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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7일 (화) 19:18 기준 최신판

1 일본의 기습 및 개전

1.1 루거우차오 사건

사건 당시의 일본군

1937년 7월 7일, 어느 병사가 똥 싸느라 늦었다는 황당한 이유를 시작으로 중일 양국 간에 마찰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일단락되는 듯 했으나 군사적 공명심 떄문에 무모한 도발을 일삼던 일본군의 분위기에 편승한 연대장 무타구치 렌야가 사건을 키우고 일본의 군부와 내각이 사태에 기름을 부으면서 한 병사의 복통은 순식간에 중일 양국의 운명을 건 전면전으로 확대되게 된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1]

1.2 일본의 확전 음모

"이번 사건은 완전히 중국 측의 계획적인 무력항일인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정부는 일본의 각의에서 중대결의를 행하여 북중국출병에 관해 정부로서 취해야 할 필요조치를 내릴 것을 결정한다.

7월 11일 일본 정부의 성명

루거우차오에서 벌어진 교전에 대해 7월 8일 오후 친더춘과 하시모토 소장이 전전 교섭을 실시했다. 7월 8일 심야에 구두합의가 이뤄졌음에도 7월 9일 가와베 마사카즈의 명령으로 일본군이 오전 6시에 중국군에 포격을 감행하는 일이 있었으나 7월 9일 오후 3시, 일본군의 요구를 모두 수락했고 7월 11일 오후 8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제29군 대표는 일본군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책임자를 처벌하여 장래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한다.

2. 풍대의 일본군과 인접한 완핑현성 및 용왕묘에는 중국군을 주둔시키지 않으며 보안대가 치안을 유지한다.

3. 항일단체를 철저히 단속한다.

원하는 바를 얻은 하시모토 소장도 확전을 피하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전에 동의했다. 이에 쑹저위안은 베이핑을 통과하는 열차의 운행의 정상화와 계엄령 해제, 전투태세 완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장제스는 조선군 20사단과 본토의 3개 사단이 중국에 증파된단 소식 때문에 장제스는 일본의 휴전 의사에 대해 믿지 않게 되었고 이에 영토 회복을 명령하며 바오딩에 30만 대군이 집결했다.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전면전 준비 활동은 루거우차오 사건 문서에서 확인할 것.

하지만 장제스의 결전 의지와는 별개로 쑹저위안은 일본에게 공격의 빌미를 줄까 두려워하여 장제스의 지시를 무시했다. 그러나 쑹저위안이 저자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그 중에서도 관동군은 화북을 장악할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관동군 참모장 도조 히데키는 즉각 2개 혼성여단을 출동시켰고 관동군 참모 츠지 마사노부무타구치 렌야와우 판타스틱에게 달려가 관동군이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이니 마음껏 저지르라고 부추겼다. 중국군과 교전을 벌였고 앞으로 벌여야 할 당사자인 지나주둔군보다 관동군이 너무 날뛰어서 지나주둔군 참모들이 당황할 정도였다.

7월 8일 오전,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는 노구교 사건을 보고받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무타구치의 만행으로 사태가 악화되자 오후 6시에 각의를 열어 확전을 막기로 했다. 하지만 3대 오물 중 하나로 유명한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의 반발로 뒤집혔다. 스기야마는 이번 사건은 중국의 계획적인 도발이며 그 원인으로 중국의 반일 성향을 지목했다. 스기야마는 3개 사단을 증파하려 했지만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가 반대했다. 이에 참모본부는 주전파와 신중파로 갈려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처음엔 신중파가 우세했지만 중국군이 북상중이란 소식에 전세가 뒤집혀 중국을 침략할 절호의 기회란 분위기가 자리잡혔다. 7월 11일 오후 2시의 5상 각료회의에서는 재가없이 멋대로 출동한 관동군 2개 여단과 조선군 20사단에 대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고(...) 추가로 본토의 3개 사단의 파견이 승인되었으며 '중국의 반성을 위해 부득이하게 출병한다'는 정신승리로 점철된 궤변이 발표되었다. 지금까지의 사태를 북지사변으로 부르기로 한다는 결정도 내려졌다. 지나주둔군은 정전 협정도 체결됐고 중국군의 반격 가능성도 낮다고 보고했지만 곧 대세에 따랐다. 12일 병상에 걸린 다요를 대신하여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을 지휘하기 위해 가츠기 중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3 국민정부의 결단

"우리가 일개 약소국이긴 하나 만일 '최후의 관두'에 달했을 때에는 전민족의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국가의 생존을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 만일 피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여 '최후의 관두'에 서게 되면, 우리에게는 당연히 최후의 희생과 응전이 있을 뿐이다."

1937년 7월 17일 장제스의 연설.

한편 장제스 역시 쑹저위안이 일본과 맺은 모든 조약이 무효이며 교섭권은 난징 정부에게만 있음을 천명했다. 7월 12일 장제스는 화중에 배치된 모든 부대에 정저우에 집결하란 명령을 내렸다. 장제스는 방어선을 꾸리고 철도를 정비하며 일본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이핑과 톈진을 수비하는게 무리라는건 장제스도 잘 알고 있었고 그는 처음부터 도시를 내주고 지연전을 펼칠 계획을 짜고 있었다. 7월 12일 장시성 루산에서 루산 국방회의가 열려 중국 전역에서 주요 인사 150여명이 참석했다. 이 와중에도 사태는 급박하게 진전되어 주일 중화민국 대사관은 난징정부에 심상치 않은 보고를 올렸다.

일본의 이번 출병은 중앙군과의 일전을 목표로 한 것이다. 여론은 완전히 통제되어 베이핑, 톈진의 소식은 10분의 9가 군부에서 나오고 있다. 일본의 신문기자는 국민정부의 태도와 중앙군의 북상에 집중되어 있으며 현지에서 성립된 협정은 중시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당초 불확대 의향이었으나 이미 군부, 특히 현지 군부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2일 일본의 외무성 당국은 앞으로는 군인 대 군인의 교섭이며 외교당국이 나설 시기가 아니라고 공언했다.

7월 14일 가츠키 사령관은 기찰정무위원회에 7개항의 협정세목을 제출했다.

1. 공산당의 책동을 철저히 탄압한다.

2. 배일적인 인물을 파면한다.

3. 배일적인 색채가 있는 중앙계 기관을 기찰로부터 철수시킨다.

4. 남의사, CC단 등 뱅리단체를 기찰에서 철수시킨다.

5. 배일 언론인과 그 밖의 선전기관 및 학생, 민중의 운동을 단속한다.

6. 학교와 군대 내의 배일 운동을 단속한다.

7. 베이핑의 경비는 보안대가 전담하며 중국군은 성 밖으로 철수한다.

7월 12일 중화민국 외교부장 왕총혜는 "여하한 협정이든, 중앙의 동의가 없는 한 무효이다."라고 천명한 바가 있었고 7월 13일 장제스도 쑹저위안에게 단독으로 교섭에 응하지 말란 지시를 내리며 항전을 지시했으나 확전을 두려워한 쑹저위안은 현지해결을 고집하며 일본과 무단으로 교섭했고 7월 19일에 협정세목에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7월 16일 장제스는 쑹저위안과 친더춘에게 '현실을 냉엄하게 직시하여 대일교섭을 오판하지 말도록 자각하라'는 전보를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미 한 병사의 이탈이 중화민국의 주권을 위협하는 사태로 확대되었고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중화민국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장제스는 5일간의 회의 끝에 7월 17일, 중국은 평화를 원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르고도 싸울 것임을 천명하는 유명한 루산 담화를 선언했다.

1. 그 어떤 것도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할 수 없다.

2. 기찰위원회의 행정조직에 대해 비합법적인 어떤 변경도 용납할 수 없다.

3. 난징 정부가 기찰위원회에 파견한 관리를 파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거부한다.

4. 제29군은 일본으로부터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다.

장제스는 항일의 결의 뿐만 아니라 평화가 다하기 1초 전까지 평화를 희망할 것이라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의지 역시 표명하였으나 일본은 국민정부의 태도가 도전적이라고 비난할 뿐이었다. 결국 중화민국은 7월 19일 항전의 각오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본은 뻔뻔하게도 중국에게 황국의 위력을 보여주자고 날뛰었다. 7월 20일 참모본부는 무력 사용을 결의했고 7월 27일에 고노에 내각이 3개 사단의 중국 파병을 승인했다. 사실상의 선전포고였으며 이로써 양국은 전면전으로 돌입했다.[2]

2 초기 중국군의 패배, 그러나 고착화되는 전선

2.1 베이핑[3]과 톈진의 함락

7월 25일에 전화선 수리를 명목으로 불법 월경한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고 7월 26일 일본군 1개 대대가 베이핑의 광안먼으로 쳐들어왔다. 7월 25일 전투에선 중국군이 일본군 항공대의 가세에 참패했으나 광안먼 전투에선 일본군이 중국군 경비대의 포위 공격에 전멸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쑹저위안은 급히 공격을 중지하여 이들을 살려주었다. 쑹저위안의 부하들이 쑹저위안의 태도에 반발하기 시작했지만 쑹저위안은 일본에 계속 양보했다. 하지만 일본은 7월 26일 저녁, 지난 충돌을 핑계로 베이핑 교외의 모든 중국군을 융딩강 서쪽으로 철수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들이 시한으로 내건 28일 정오도 되지 않은 1937년 7월 28일 오전 8시에 대대적인 공격에 착수했다.[4] 3만명의 일본군이 몰려오자 쑹저위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뒤늦게 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한편 바오딩의 쑨롄중, 완푸린에게 원군을 요청했지만 너무 늦은 조치였다.

7월 28일 오전 8시, 베이핑, 톈진, 탕구에 걸친 저역에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됐다. 난위안, 펑타이, 시위안이 잇달아 함락됐고 펑즈안의 중국군 37사단과 장쯔중의 38사단은 일본군의 공세에 패퇴했다. 톈진과 다구에서 중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전함과 항공기를 비롯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에 의해 모두 제압되었다. 중국군 방어선을 모두 분쇄한 일본군은 5사단, 6사단, 10사단 등 3개 사단을 동원하여 베이핑을 공격했고 7월 30일 밤에 베이핑과 톈진을 함락시켰다. 1만 6천명의 피해를 낸 중국군은 철도를 따라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6백명에 불과했다.[5]

2.2 제2차 국공합작과 중국의 전쟁 태세

1937년 8월 2일 중화민국 주석 린썬이 대국민 성명을 통해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 항전에 임하라'며 대일 항전을 선포했다. 8월 7일 주더, 저우언라이, 예젠잉을 비롯한 공산당의 주요 간부들까지 참석하여 국민당 임시전국대표회의가 열렸고 공식적으로 항일 전쟁을 결의했다. 장제스는 항일을 위하여 서안 사건 이후 교전을 중단한 공산당과도 본격적으로 협력하기로 했다. 루산 회의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공산당이 난징 정부에 대한 모든 적대 행위를 중지하고 소비에트 정권과 적화 통일을 포기하며 난징 정부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8월 19일 공산군은 제8로군으로 개편되어 국민혁명군에 공식적으로 합류했고 주더가 총사령관에 펑더화이가 부사령관에 예젠잉이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들은 옌시산의 제2전구에 배속되어 일본군과 싸웠다. 그 외에 화중, 화남의 산재한 공산군 게릴라 1만 3천명도 공산당 중앙의 설득으로 신4군으로 개편되어 유격 활동을 맡았다.

8월 11일 국방최고회의가 설치되어 군사위원장 장제스가 주석이 되었고 행정원장인 왕징웨이가 부주석이 되었다. 8월 15일 국가총동원령이 선포되었고 8월 20일 중국 동부 최전선을 5개 전구로 구분했다. 화북과 장강 이북의 제1전구와 5전구는 장제스가 맡았고 서북족인 산시는 2전구는 옌시산, 난징과 상하이가 포함된 중국의 중심인 장강 하류인 3전구는 펑위샹이 맡았다. 푸젠, 광둥을 비롯한 화남의 4전구는 허잉친이 맡았다. 쓰촨, 윈난, 구이저우 등 주국 서부는 후방 유격구로 편성되었다. 이후 전구는 전선이 확대되면서 12개로 늘게 된다.[6]

2.3 베이핑 탈환전

일본군 입장에선 이번 침략은 만주사변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고 일본군의 목표는 만주국을 만들었을 때처럼 화북 지역 5개성 정도를 점령해서 새로운 괴뢰국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청일전쟁은 차치하더라도 지난 사건, 만주 사변, 러허 사변, 상하이 사변 등으로 번번이 일본군의 침략 야욕에 시달리며 번번이 영토를 할양해야 했던 중국 입장에선 일본군의 침략에 더 이상 맥없이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도발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던 난징 정부가 전쟁 선포를 비롯한 강경대응으로 맞선 것도 이러한 이유 떄문이었다. 중국군은 핑한 철도를 따라 중앙군을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북상시켜 쑹저위안의 패잔병 1만여명과 합류했고 여기에 중국 공군까지 합류했다. 차하얼 성에서는 푸쭤이의 7집단군이 동쪽으로 진격했다. . 반격의 중심인 탕언보 장군이 지휘하는 13군은 베이핑 서북쪽 난커우까지 진격하여 베이핑을 위협했다. 이에 일본군은 바오딩 공략을 멈추고 8월 11일엔 난커우의 탕언보 군을, 8월 14일엔 장자커우를 공격했다. 탕언보는 일본군의 포위 섬멸 시도에 잘 저항하여 일본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고 이에 장제스는 류즈, 웨이리황의 병력을 북상시키고 푸쭤이에게 가세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의 대규모 반격이 있기 전에 8월 25일 쥐융관을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돌파했으며 웨이리황, 류즈, 옌시산의 반격도 모두 격퇴했다. 결국 탕언보는 2만 6천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고 겁을 먹은 군벌군들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탕언보는 차하얼 성으로 후퇴했으나 일본군은 차하얼 성까지 추격했고 탕언보 군을 다시 한번 패주시킨 다음에 8월 27일에 차하얼의 성도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탕언보는 맹렬히 저항했지만 군벌들의 이기적인 적전도주로 인해 결국 측면을 내주어 패퇴해야 했고 중국군은 완전히 무너졌다.[7]

2.4 2차 상하이 사변

한편 허베이에 국한되어 있던 전황은 일본군이 상하이에서 도발을 감행함에 따라 화중으로 확대되었다. 장제스는 80여만 대군을 상하이에 급파하여 일본군의 도발에 맹렬히 맞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지만 결국 전략적인 실수로 인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고 항저우 만의 배후 공격을 용인하면서 패퇴하고 말았으며, 양쯔강 하류 장인에서 벌어진 장인 전투에서는 중화민국 해군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2.5 일본의 강화 제의

상하이 사변에서의 판단 미스로 중국군은 모든 전력을 소진해버렸고 난징을 지킬 수단을 상실해 버렸다. 중국 국제연맹 대표 구웨이쥔은 일찍이 8월 30일에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했지만 이탈리아의 반대로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가 부결되었고 미국의 반대로 석유 금수조치도 부결되었다. 한편 일본의 목표는 상하이가 아니라 허베이이었고 허베이가 손아귀에 들어오자 고노에 내각은 삼국방공협정 때문에 악화된 소련과의 관계와 히로히토의 조속한 종전 요구를 의식하여 중국에 정전협정을 제안했다. 이는 육군의 반대를 의식한 비밀 회담이었고 여기에 독일이 중재에 나섰다.[8]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일본의 타협안을 장제스에 전달했다.

1. 내몽골에 자치정부 수립.

2. 만주국 국경으로부터 텐진, 베이핑 남방까지 비무장 지대 확대.

3. 상하이의 비무장 지대 확대.

4. 항일정책 중단.

5. 일본에 대한 관세 인하.

사실상 화북을 그냥 다 내놓으라 이 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던 관계로 주화파인 왕징웨이, 허잉친은 말할 것도 없고 강경파였던 바이충시, 구주퉁조차도 받아들이자고 했지만 장제스는 여기서 일본에 굴복한다면 중국인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쟁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떤 타협도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일본 외상 히로타는 우리의 요구는 더욱 가중될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장제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난징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본영은 전선을 확대하면 안된다고 했지만 본국의 명령을 씹고 난징을 향해 몰려들었다.

2.6 난징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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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난징 전투의 경로를 나타내는 지도
"모두가 반대하니 당신과 나, 둘중 하나가 난징을 지켜야하오."

"위원장님을 어찌 이곳에 남게 하겠습니까?"
-난징에서의 군사위원회 회의 도중 탕성즈와 장제스의 대화[9]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몰려들기 시작하자 중국군은 난징을 사수하기 위해 타이후 호를 기점으로 15군, 19군, 21군으로 구성된 좌익군과 8군, 10군, 23군으로 구성된 우익군을 조직하여 젝트 라인에 배치했지만 이들은 신병과 패잔병으로 구성되어 사기도 질도 형편없었다. 일본군은 푸산-쑤저우=우장-자싱을 연결하는 중국군 제1방어선에서 중국군 토치카에 막혀 다시 고전해야 했지만 11월 18일 창수를 점령했고 19일 쑤저우, 자싱을 돌파했다. 타이후 호 북방 방어선이 뚫리면서 11월 27일 우시, 11월 28일에 창저우가 함락되었다. 남방 방어선도 뚫려 11월 24일 후저우, 11월 30일 안후이 성의 광더가 일본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군이 수송수단을 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진격속도가 느렸다는 것이다. 이에 일본군은 보급문제도 해결할겸 중국인들을 공격해 남자들은 죽이고 여자들은 강간했다. 11월 19일 쑤저우에선 35만 쑤저우 시민들의 씨를 말려버렸다.

장제스는 난징이 위태로워지자 11월 24일 군사위원회와 참모회의를 열었다. 평야지대인 난징을 지키는건 사실상 불가능했고 난징은 전략적인 가치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버린다는것은 국제적인 위신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였고[10] 누군가가 난징을 수비해야했고 이에 후난 군벌이자 군사참의원장인 탕성즈가 난징을 지키겠다고 자진하여 나섰다.

하지만 모두가 반대하니 수도는 충칭으로, 군사위원회와 주력부대는 우한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트라우트만 대사를 통해 12월 2일 만약 일본이 중국의 화북에 대한 명목상 주권을 인정해준다면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했지만 일본군은 이미 협상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참모본부는 장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청했지만 고노에 수상과 히로타 외상은 패배자 주제에 조건을 붙이는 것은 주제넘다고 반대했다. 고노에는 강화를 받아들이면 중국과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군부를 질타했다(...). 군부의 대표적인 불확대파인 타다 하야오 중장은 '참모본부와 내각의 입장이 바뀌었다. 내각이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한탄했다.[11]

탕성즈는 상하이에 에서 패퇴해 전열을 가다듬은 독일식 87, 88사단을 중심으로 난징 교외의 모든 건물을 불태우고 난징 성에 병력을 모았는데 성곽은 항공기와 야포를 막기엔 너무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탕성즈는 교량과 배를 모두 없애고 무단후퇴자는 참수하겠다는 명령을 내리고 본인도 난징에서 죽겠다며 배수진을 쳤지만 덕분에 50만에 달하는 난징 시민들의 피난길도 막아버렸다. 12월 6일 일본군이 난징에 도달했다. 일본 해군과 폭격기들이 난징을 강타했고 중국 공군이 맞섰다. 이때 미 해군 함선 파나이 호와 파나이 호를 구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 호가 일본군의 공격에 침몰하여 50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국은 영미의 참전을 기대했지만 미국과 영국 모두 배상금만 받고 물러났다.

일본군은 탕성즈가 배치한 중국군 2개군, 4개 사단으로 구성된 최외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난징을 포위했다. 마쓰이 대장은 12월 10일 오전까지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지만 탕성즈는 거부하고 성문을 모두 막았다. 12월 10일 오후 1시가 되자 4개 사단, 10만명의 일본군이 공격해왔다. 12월 12일까지 전선은 교착 상태였지만 12월 12일 오후에 일본군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을 폭파시키면서 일본군은 난징 시내로 몰려들었다. NHK를 비롯한 일본 언론들은 난징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쳤고 일본 전체가 좋아 날뛰었지만 사실 일본군은 난징 시내에서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성문을 폭파시킨 데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결국 독가스를 사용하면서 방어선이 무너졌고 중국군은 시내로 철수하면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편 일본군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파견했던 구나사키 지대가 중국군이 양쯔강 너머로 철수할 거점인 푸커우를 함락해 중국군은 퇴로가 차단되고 말았다.

오후 8시, 탕성즈는 군사위원회에서 후퇴 허가를 받고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머진 서쪽으로 퇴각하라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통신선이 끊어진 관계로 후퇴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음에도 탕성즈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참모들을 데리고 달아났다. 탕성즈가 달아났단 소식에 잘 싸우던 중국군은 동요하여 무너져내려 각자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탈출을 위해 같은 국민당 군 끼리 총격전을 벌이는 등[12] 와해되었다. 12월 13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취했고 오후 4시에 난징 정부 청사를 점령했다. 중국군은 무너져내려 탈출하기 시작했고 피난민들과 섞여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거나 군복 그대로 양쯔강 강가로 갔지만 거기엔 국민당 독전대가 있었고 독전대가 없던 곳 에선 일본군이 며칠 전 부터 점령해 있었다. 대략 15만명 정도가 난징 방위전에서 싸웠고 이 중에서 성공적으로 난징을 탈출 한 건 2만명 정도 [13] 였고 8만명은 전사, 그리고 나머지 5만명은 시내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거나 난징 안전구 [14]로 숨어들었지만 일본군은 안전구와 시내를 샅샅이 뒤지며 중국군과 중국군 부역자들을 색출하고 처형했다. 이후 우한으로 달아났던 탕성즈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 실권을 쥐지 못했고 국공내전 중에 공산당에 전향해서 후난성 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중에 숙청되어 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처럼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하여 온갖 질병은 다 얻은 채 82세에 죽는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2.7 난징 대학살

일본군이 난징 외곽 양쯔강에서 자행한 대규모 학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징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은 죽어간 중국인, 죽어간 중국인, 오직 죽어간 중국인이었다.”

-AP통신 기자 예이츠 맥대니얼.

이 학살로 최소 수만에서 최대 30만이 넘은 중국인들이 일본군의 총칼에 무참히 살육되었으며 수만명의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게 강간당했다. 이 와중에 욘 라베와 같은 위인들의 분투로 20만명의 중국인들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자세한건 해당 문서 참조.

3 전쟁의 확대와 교착(1937~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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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일본 제국의 확장

3.1 공간으로 시간을 벌다

“우리는 항복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앞으로 진군해야만 한다. 항복은 틀림없이 전 국가적인 참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장제스
"우리는 승리할 때까지, 우리의 두 다리가 정말로 부러질 때까지, 설령 우리의 아름다운 땅유구한 역사 그리고 중화의 갈망이 피로 물들고, 화염에 삼켜져 멸망할지라도 계속 싸울 것입니다."

-쑹메이링(宋美齡) 1937년 11월 미국 라디오 방송 中-

한편 화북을 지키던 펑위샹 휘하 6전구의 40만 대군은 너무 다양한 계파의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훈련도 장비도 부족했다. 한편 일본군의 수는 무려 37만에 달했는데 차하얼 성과 쑤이위안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바오딩을 점령하고 산둥 성을 공격했다. 산둥 성의 성도 지난이 함락되었고 칭다오엔 일본군 육전대가 상륙했다. 군벌 한푸쥐, 쑹저위안, 쑨롄중은 적전 도주했다. 결국 황허 강 이북 전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었고 펑위샹의 6전구가 폐지되었으며 펑위샹도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한편 일본군 5사단은 그들답게도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산시 성을 쳤다. 산시 성은 옌시산의 영지였는데 핑싱관 전투에서 옌시산은 중국 공산당과 함께 핑싱관과 신커우전에서 일본군을 무찔렀다. 이에 일본군이 대거 산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한푸쥐에게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란 명령을 내렸지만 한푸쥐는 또 달아났다. 결국 산시도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옌시산은 남은 영지에 틀어박혀서 일본군과 비밀리에 협상했다.

항저우, 지난 등의 주요 도시들이 잇달아 함락되자 가장 강경파였던 펑위샹조차 중국이 반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 절망했다. 일본은 의기양양하게 만주국을 승인하고 일본의 점령지를 모두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 것을 요구했다. 쿵샹시는 난징 대학살을 비난하며 일본의 강화 제의를 빙자한 말 같지도 않은 항복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전황이 절망적이었던 터라 왕징웨이 등은 빨리 일본과 협상할 것을 요구했고 외교부장 왕충후이는 일본에게 협상의사를 전달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굴복만 있을 뿐 타협은 없다면서 ‘반성하지 않는 장제스’를 비난하고 주중 일본 대사를 소환했다. 이에 중국도 대사 쉬스잉을 소환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1월 16일 '국민정부의 부정'를 선언했으며 해당 선언은 2일 후에 부정이란 무시가 아니라 '말살을 의미한다.라는 보충설명까지 달았다. 이것은 곧 국민정부를 붕괴시키고 그 대신 일본의 괴뢰정부를 세워 전쟁을 종식시키는 계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관동군이 이미 1937년 11월 14일 베이핑에서 북양 군벌 정권의 전 재정총장 왕커민을 내세워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바가 있었고 중지나방면군도 난징에서 1938년 3월 28일 중화민국 유신정부를 수립하고 역시 북양 군벌 정부에서 일했던 량훙즈를 수괴로 세웠다. 하지만 일본이 내세운 괴뢰정부의 이름하에 행해진 학정으로 중국인들은 항일의 기치에 더욱 견고히 결집하게 되었다.

한편 우한으로 이동한 국방최고회의는 1938년 4월 1일 국방최고위원회를 건설해 전쟁 수행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이후 1939년 2월에 장제스가 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사실상의 정부로 기능하게 된다). 또한 중국은 소련, 미국, 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여 전열을 정비했다. 비록 일본군이 엄청난 영토를 점령했지만 24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긴 해안선은 일본군의 힘으로 단속하긴 너무 길었고 홍콩, 마카오, 광저우,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무기들이 수입되어 중국군을 무장시켰다. 양측이 실익이 없다는 이유로 상호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텐진 시는 일본군이 점령했으되 톈진 세관은 중화민국이 관할하면서 텐진의 관세를 충칭으로 송금하는 기이한 현상도 벌어졌다. 장제스는 이런 점을 이용, 일본군 점령지의 조계지를 이용한 원장 루트를 개설하여 무기를 수입했고 부패한 일본군과 괴뢰 관료들을 매수하였다. 이러한 원장 루트는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에야 차단되었고 양국은 1941년 12월 9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하는 자살행위를 저질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후에야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3.2 타이얼좡 전투

"항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행복한 순간이다." -리쭝런

허베이 전선이 붕괴된 이후 장제스는 산둥 군벌 한푸쥐를 비롯, 41명의 여단장급 이상 고위 장성들을 체포하여 1938년 1월 24일 모조리 총살했고 이후로도 부패한 관료와 장군들을 총살시켰고 덕분에 중국군의 규율은 상당히 회복되었다. 이 와중에 중국에게 날아온 승전보는 전국적인 경사가 되었다.

산둥 성과 장쑤 성을 관할하는 제 5전구는 광시 군벌 리쭝런 휘하 35만 대군이 수비하고 있었다. 여기에 쓰촨 , 허베이 군벌, 장제스 중앙군이 잡다하게 섞여 있었다. 산둥 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화북의 점령지와 화중의 점령지를 잇기 위해서 교통의 요충지인 쉬저우를 노리고 공세를 취했다. 이에 장제스는 명장 바이충시를 참모장으로 급파하였고 탕언보 휘하의 중앙군을 증원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도록 했다. 원래 일본군 대본영은 더 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도록 방침을 내린 터였지만 대본영의 방침이 칼같이 준수됐다면 애초에 전쟁이 안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북지나방면군 제2군 사령관인 니시오 도시조 중장을 비롯한 일본의 호전적인 일선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쉬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쉬저우 방어의 중핵인 타이얼좡의 주민들을 소개한 다음 2집단군, 22집단군과 59군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꾸렸다. 일본군 세야 지대는 80대의 전차를 앞세워 맹공을 퍼부어 중국군 방어선을 꾸렸고 22집단군 산하 122사단은 사단장 왕밍장 이하 전원이 일본군의 공격에 용맹하게 맞서다 장렬히 전사했다.

린 현을 점령한 일본군은 타이얼좡 북쪽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일본군 2대대와 야전중포병 1개 대대가 타이얼좡을 공격했다. 이때 타이얼좡에는 무려 중국군 3개 사단이 집결해 있었다. 일본군은 무턱대고 2개 대대로 3개 사단을 공격했고 타이얼좡 성내로 손쉽게 진입했지만 곧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다. 일본군은 급히 1개 대대를 증파했지만 역시 포위되었다. 이에 본대인 세야 지대 소속 5천 명이 일제히 타이얼좡에 진입했다.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중국군도 병력의 삼분의 이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한편 타이얼좡 북쪽의 린이에서는 장쯔중이 지휘하는 59군과 사카모토 슌 소장 휘하의 사카모토 지대가 충돌하던 중이었는데 사카모토 지대는 세야 지대가 포위당했단 소식에 철수했다. 리쭝런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20군을 투입하여 사카모토 지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결국 사카모토 지대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이에 중국군은 4월 3일부터 총 반격에 나섰다. 세야 지대는 전멸 직전까지 몰렸고 사령관인 센야 소장은 결국 후퇴를 결심했다. 사카모토 지대도 포위망을 뚫고 퇴각했다. 일본군이 참패한 것이다. 중국군은 일본군 뒤를 맹추격하여 린이 등을 탈환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지레짐작으로 타이얼좡을 점령했다고 난리를 치다가 뒤늦게 통신 혼선으로 오해가 있었다고 변명해야 하는 등 망신을 당했다. 이 싸움에서 중국군은 일본군 5사단과 10사단의 주력을 분쇄하여 2만명 이상의 피해를 주었고 1만 정의 소총과 77문의 보병포, 전차 40량, 대포 50여문을 노획했고 7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선전했다. 일본군이 인정한 피해도 1만 2천에 달했다. 중국군의 피해도 2만명에 달했는데 쑨롄중의 2집단군에 피해가 몰려 있었다.

일본군은 타이얼좡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쉬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북지나방면군의 5개 사단과 2개 혼성여단, 중지나방면군의 3개 사단과 2개 독립지대, 해군 육전대, 임시 항공병단까지 총 20만의 대군이 쉬저우로 몰려들었다. 장제스는 쉬저우를 사수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주었다. 장제스는 상대적으로 약한 중지나방면군을 우선적으로 섬멸할 것을 지시했다. 5전구엔 무려 중국군 60만 대군이 집결했다.

북지나방면군의 신임 사령관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중장은 4월 19일 5사단과 10사단을 지휘해 린이 성을 점령하고 이허 강을 도하하여 맹공을 퍼부었지만 2개 사단 모두 곧 중국군에게 포위되었다. 히가시쿠니 중장은 5월 7일에 허겁지겁 16사단을 증원하여 중국군을 밀어냈다. 한편 뒤늦게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 대장의 9사단과 13사단이 북상하기 시작했고 북지나방면군 제1군이 카이펑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진군이 늦어진 것은 일본군의 열악한 병참 때문이었다. 리쭝런은 주력부대를 남쪽으로 보내려 했지만 북지나방면군 제2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일본군 13사단은 중국군 후방을 맹공하였고 난징에 주둔한 3사단도 북상했다. 푸닝과 루저우가 점령당했고 일본군 14사단이 중국군의 퇴로를 막기 위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제5전구 전체가 포위섬멸될 위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제스는 즉각 퇴각 명령을 내렸고 리쭝런은 부대를 다섯개로 나눠서 철수했다. 상하이에서 무턱대고 퇴각하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장제스는 계획적인 철수 계획을 입안하였고 그 덕분에 주전력의 손실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반면 일본군은 중국군을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협조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들끼리 공을 놓고 싸우느라 밥상을 엎고 말았으며 여기에 중국군의 저항 또한 완강했다.

한편 일본군 14사단은 과거 송나라의 수도였던 카이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쉐웨가 지휘하는 12개 사단에게 포위당했다. 장제스가 전멸시키라고 독촉했음에도 쉐웨는 일본 16사단의 개입으로 철수해야 했다. 일본 대본영도 이러한 행태는 참을 수 없었는지 1군 사령관 가쓰기 기요시를 해임했다. 어쨌거나 일본군의 대공세는 승리로 이어졌고 5월 19일 쉬저우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국군은 주력을 보전하여 퇴각한 후였다. 대본영은 더 이상 중국군을 추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일본군은 어김없이(...) 상부의 명령을 씹었다. 일본군 14사단은 카이펑을 점령하고 정저우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장제스는 황허 강 제방을 폭파시켜 대규모 수공을 가했고 일본군 16사단과 14사단이 휩쓸렸다(하지만 홍수로 1천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하는 등 중국도 뼈아픈 희생을 치러야했다). 쉬저우에서 중국군은 5~6만의 병력을 잃었고 일본군은 4만 3천명을 잃었다. 과거 만주에 주둔한 장쉐량의 수십만 대군이 1만 5천명의 관동군에게 탈탈 털렸던 일이나 상하이에서 80만 대군이 사실상 붕괴되었던 전례를 생각하면 중국군의 발전은 놀라웠다.

중국과 급격히 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황허 제방 폭파를 두고 게르니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악행이라고 비난했다. 그때까지 장제스를 옆에서 보조하던 트라우트만 대사와 팔켄하우젠 고문 등도 본국의 명령으로 모두 철수해야 했다. 팔켄하우젠은 중국을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나치는 떠나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팔켄하우젠은 1938년 6월 27일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석한 연후 홍콩으로 떠났다.

나치 독일을 대신한 것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2억 5천만 달러의 원조 자금을 제공했고 바실리 추이코프[15]를 비롯한 군사고문, 2천명의 병력, 3천명의 고문, 900대의 비행기, 82대의 전차, 2000문의 화포, 1만정의 기관총, 5만정의 소총, 2000대의 차량을 제공해주었다. 소련에서 보낸 보급물자들이 도착하는 란저우에는 소련인들이 ‘터질 듯이 넘쳤다.’ 또한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16]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장구펑(장고봉)에서 일본군의 도발을 크게 무찔렀다(하산 호 전투).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크게 기뻐하여 소련이 일본의 후방을 치길 원했지만 블류헤르는 장구펑을 탈환하진 않았고 스탈린도 확전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소일 국경의 총성은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블류헤르는 대숙청 와중에 일본 스파이로 몰려서 극심한 고문 끝에 처형당했으며 장제스는 뒤늦게서야 그 소식을 듣게 된다.

3.3 우한, 광저우 함락

우창, 한양, 한커우 3개 지구로 구성된 우한은 군수 산업과 교통의 요충지로 국민정부는 우한에 군사위원회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천청을 방어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리쭝런은 허난, 안후이, 후베이를 나누는 270킬로미터 길이의 다볘 산맥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우한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었다. 장제스는 우한을 9전구를 편성하고 천청에게 그 자리를 겸하게 했다. 우한을 지키기 위해 120개 사단, 100만 대군이 집결했고 200대의 항공기와 30척의 군함도 동원되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잇달은 전투로 인해 매우 지쳐 있었고 무기도 매우 부족했다. 또한 여러 군벌 부대를 긁어모은 부대라 지휘와 통신에 애로사항이 꽃피어 대규모 작전을 지휘하는데 미숙했다. 이 와중에 히로히토 천황은 우한 공격을 위해 독가스탄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했다.

일본은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령을 선포하고 10개 사단을 추가 편성하여 2개 사단을 관동군에, 8개 사단을 중지나방면군에 편성했다. 1938년 8월에는 중국에 주둔한 병력이 자그마치 80만에 이르게 되었고 우한 공략을 위해 40만 대군이 동원되었다. 일본은 우한을 함락시키면 중국의 항전 의지를 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중국군의 포위 섬멸보단 우한 점령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이는 중국의 전투의지를 고려하지않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일본군이 우한을 공격하는 이유는 중국의 전투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는데 우한을 점령한데도 중국군 주력을 섬멸하지 않으면 중국과 계속 싸워야 할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를 간과했다. 각설하고 3사단, 10사단, 13사단, 16사단으로 구성된 일본군 중지나방면군 제2군의 17만 대군이 쉬저우에서 화이허 강을 도하하여 루저우에 집결했다. 6사단, 9사단, 101사단, 106사단으로 구성된 제11군의 20만 대군은 난징에서 서쪽으로 진군했다. 북과 동에서 동시에 우한을 공격하는 전략이었다. 11군의 선두인 6사단은 6월 12일 안칭을 점령하고 7월 26일 주장을 점령함으로 우한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했다. 중국군은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일본 3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격렬히 맞섰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우한을 대대적으로 폭격하며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 공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주장을 점령한 일본군은 이곳에서도 대규모 살인과 강간을 저질렀다.

8월에 접어들자 장제스는 정부 부서들과 민간인 50만명을 충칭으로 소개하였다. 8월 22일 일본 대본영은 대륙명 188호를 통해 우한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중지나방면군 2군은 갑군과 을군으로 나뉘어 진군하기 시작했다. 갑군은 루안, 광저우를 점령하고 뤄산을 돌파했지만 중국군의 치열한 저항으로 수천명의 피해를 냈으며 1달이나 소요하였다. 일부 연대는 75%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뤄산 뒤의 신양에서도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을군도 리쭝런의 저항에 부딪혀 많은 사상자와 병자를 냈다. 11군은 루산과 마안산의 중국군 방어선에 부딪혀 조금도 전진하지 못했고 오히려 쉐웨의 반격에 전멸 위기를 겪으면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결국 11군은 수천명을 잃고 마안산 대신에 마터우전을 공격했다. 마터우전은 일주일간의 격전 끝에 함락되었다. 3함대와 해군육전대까지 동원한 일본군은 광지를 점령하고 톈자전까지 밀고 들어갔다. 결국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긴 했으나 우한 방어의 중핵을 모두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1938년 10월 10일에 건국기념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 장제스는 우한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우한은 완전히 포위되었고 장제스는 우한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려 10월 17일 군사위원회를 충칭으로 철수시키고 전 전선에 후퇴 명령을 내렸다. 10월 26일 일본군은 한커우와 우창을 점령했고 27일에 한양까지 점령하면서 우한 삼진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일본인들은 치열하게 저항한 중국인들을 오랑우탄이라고 비하했다. 그런데 일본군은 놀랍게도 난징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율을 보여주면서 살육 행위를 자제했다. 약탈은 행해졌지만 대량 강간과 학살이 벌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일본군의 상태를 고려하면 대단한 일이었다. 일본군은 11월 3일 명치절을 우한에서 성대하게 기념했고 11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11월 11일 일본군은 퉁청과 웨저우를 점령함으로 우한 작전을 종료하고 후베이 성을 거의 함락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위해서 6만 명 이상의 전사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1만명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이질에 걸려 죽은 일본군만 해도 1만 2천명에 달했다. 중국군의 분투는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강요했고 우한 함락을 6개월이나 지연했다. 일본군은 대외적으로 선전한 ‘20대 1의 교환비를 자랑하는 수월한 정복’에 누를 끼칠까봐 불구가 된 아군 중상자들을 함부로 다뤄서 죽게 방치했다.

1938년 11월 장제스는 회의를 열고 드디어 16개월 간의 전쟁의 첫 단계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장제스는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징병령을 내리고 군관과 사병 훈련 계획을 세웠다. 사기진작을 위한 정치교육을 위해 공산당원들도 대거 초빙되었다. 바이충시는 일본은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패망한 것처럼 패망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장제스는 일찍이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추격하면서 쓰촨, 윈난, 구이저우을 국가재건의 기지로 지목하면서 장기 항전의 중심지로 본 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중심은 상하이, 난징을 비롯한 근대화된 연안 대도시에 있다고 봐서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여겨졌지만 일본이 중국 깊숙이 전진해온 순간 이제는 서남 오지만이 중국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9월 7일부터 중국 남부의 대도시인 광저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광저우는 매우 근대화되고 유서 깊은 도시였으며 쑨원이 국민당의 기치를 든, 국민당에게 있어 의미가 깊은 도시였고 또한 군수물자의 80%를 수입하는 주요 통로였다. 광저우는 허잉친의 4전구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실질적 지휘관은 광둥 성 주석인 위한머우였다. 군사위원회는 우한과 광저우가 동시에 공격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광저우의 병력을 대거 우한으로 이동하여 광저우엔 11만 명의 수비군만 있었다. 9월 19일 5사단, 18사단, 104사단, 4항공단으로 구성된 일본군 21군 7만명이 편성되어 광저우로 진격했다. 10월 12일 일본군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으며 바이예스만에 상륙했다. 장제스는 광저우를 사수할 것을 명령했지만 위한머우는 적전도주했다. 결국 10월 21일 광저우는 매우 쉽게 함락되었고 10월 25일에는 후먼 요새도 함락되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2천명이 채 되지 않았다. 광저우가 너무 쉽게 함락되는 통에 위한머우가 일본에게 매수되었단 소문까지 돌았고 영국에선 국민당의 작전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였다. 결국 위한머우는 당 주석 자리에서 사임했고 장파쿠이를 신임 광둥 성 주석 겸 4전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어찌되었건 광저우의 함락으로 중국은 매우 뼈아픈 타격을 입었지만 장제스는 즉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를 개설하여 다시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3.4 왕징웨이의 배신

"중국은 나 하나로 절대 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몸 하나를 파는것에 지나지 않는다." -왕징웨이

한편 일본은 우한 함락 이후 국민정부가 붕괴하리라 예상했으나 여전히 국민정부는 건재했으며 각지의 군벌은 국민당에 복종하고 있었다. 이에 고노에 내각은 1938년 1월 16일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고 일본과 진정으로 제휴가 가능한 신흥지나정권과 공존할것 '을 천명했고 2일 후에는 상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시(ignore)가 아니라 말살을 의미한다.라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국제법상 유례가 없는 발언인 이것은 국민당의 내부분열을 시도한 것이며 이것은 왕징웨이의 탈주로 실제로 일어났다.

국민당의 초창기 멤버이자 거물인 왕징웨이는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완전히 패배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장제스의 지연전을 중국의 숨통을 끊는 행위라고 비난했고 일본과 협상하여 그들의 선처를 얻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심복인 가오중우를 홍콩에 보내 일본과 비밀리에 협상하기 시작했다. 가오중우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 주권을 인정한다면 항전을 중지하겠다는 왕징웨이의 의사를 전달했다. 중일이 양국 대사를 소환한 이후에 중일의 유일한 대화창구는 예문연구회였는데 가오중우는 예문연구회의 수장이었다. 가오중우는 이미 1938년 2월 심복인 둥다오닝을 일본에 보내 일본 수뇌부와 접촉한 전력이 있었다. 당시 일본은 나쁜 과거를 잊고 정성으로 서로를 대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란 반응을 보인 바가 있었다. 이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일본측이 화평 해결이 조급하다고 평가하고 더 이상의 화평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왕징웨이는 7월 즈음에는 자신의 주화론에서 장제스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은 노골적으로 왕징웨이에게 전국을 해결하자며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 내각은 7월 12일 중국의 ‘일류 인물’을 선별하여 반장제스, 반공산당, 반전을 표방하는 신정부를 건립하자는 결정을 내렸다.

8월에 홍콩에서 다시 회담이 열렸고 왕징웨이의 심복 메이쓰핑은 왕징웨이의 충칭 이탈 이후 신정부 수립에 대해 처음으로 논의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윈난, 광둥의 반장제스 군벌들이 합류하리라 믿었다. 10월에 이르러선 왕징웨이가 기자들 앞에서 독자적 대일 협상의 가능성을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11월 상하이의 중광당회담에서 일본과 왕징웨이는 중일 간의 방공협정, 만주국 승인, 중국 내부 일본인 거주, 영업 허가와 일본 조계, 치외법권 폐지 고려, 화북 5개성의 중일 합작 개발, 일본의 내몽골 주둔, 내몽골 이외 지역의 일본군의 즉각적 철수를 교섭 사항으로 내세웠다. 일본은 기존 괴뢰정부인 베이핑의 임시정부와 상하이 유신정부를 해체하여 왕징웨이 정부에 합치자고 하였고 왕징웨이의 편에 설 것으로 예상된 윈난, 광둥 군벌군을 일본군이 지원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가 우려한 내정간섭 분야에 있어서 화북, 난징, 상하이, 항저우 지역에 계속 병력을 주둔시키고 고문 파견을 통한 영향력 행사를 명시함으로 중국 침탈을 계속할 것을 드러냈다.

어쨌거나 마음을 굳힌 왕징웨이는 12월 18일 청두로 강의하러 간단 핑계로 부인과 측근들을 데리고 쿤밍으로 떠났으며 19일 하노이로 떠났다. 1939년 1월 1일 장제스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그가 돌아오길 바란다고 하다가 결국 왕징웨이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왕징웨이의 국민당 당적을 삭제하고 모든 직위에서 해임하며 왕징웨이의 배신과 정부 정책을 멸시한 죄를 물을 것이라 이를 갈았다. 하노이에 도착한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평화회담을 호소했지만 장제스는 이를 무시하고 왕징웨이를 암살하려고 시도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그가 죽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여하튼 왕징웨이는 일본 화물선에 숨어 상하이에 도착했고 신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일본은 왕징웨이와의 중광당 밀약에서 약속한 일본군 철수와 중국 주권 보장에 대해선 오리발을 내밀었다. 결국 왕징웨이는 또 다른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왕징웨이는 주석대리 겸 행정원장, 저우포하이는 부주석 겸 행정원 부원장, 천궁보는 입법원 원장, 량훙즈는 감찰원 원장, 왕커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한때 중국의 북방을 지배한 대군벌 우페이푸도 일본의 제안을 받았고 그는 이에 일본군이 먼저 철군한다는 전제'를 붙이는 사실상의 거부로 답했다. 이후 그는 일본인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다가 의문사했는데 이에 대해서 일본의 암살설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도 왕징웨이도 왕징웨이 주도의 신정부가 수립되면 반장제스 군벌들이 대거 왕징웨이에게 합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파쿠이나 룽윈을 비롯한 반장제스 군벌들은 왕징웨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장제스의 권위만 확인되었다. 장제스는 두웨성을 시켜서 가오중우 등 왕징웨이의 측근 일부를 홍콩으로 망명시킨 다음 왕징웨이와 일본이 체결한 밀약 내용을 폭로하였다. 이에 온 중국이 분노하였고 왕징웨이는 과거의 혁명가에서 역적이자 한간으로 떨어졌다. 그는 1944년 골수암으로 일본에서 사망했고 중국이 승리한 이후 장제스는 그의 무덤을 폭파시켜버렸다.

3.5 교착화되는 전쟁

처음 15개월 간의 전쟁 동안 중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차하얼, 쑤이위안, 허베이, 산둥, 산시, 장쑤, 안후이가 함락되었으며 허난, 후베이, 장시, 광둥에도 일본군이 들어왔다. 중국은 관세수입의 91%, 공업능력의 94%, 전력 생산의 96%, 방직 공업의 75%를 상실했으며 주요 철도, 항만 시설을 잃었고 무기를 수입할 통로와 근대화된 도시들을 거의 다 잃었다. 이전 항목에서 일부 설명한 것처럼 엄청난 인구가 후방에 몰리면서 식량과 조세를 조달하기도 어려워졌다. (과장된게 분명하지만) 공식발표상의 전사자는 81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의 강경파인 하타 슌로쿠 장군은 중국이 항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일본군은 공세종말점에 이르렀으니 이젠 무력이 아니라 지략으로 중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일본군이 중국군 포위 섬멸에 실패하면서 장제스는 초반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수백만에 달하는 주력을 온전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권위도 재확립했다. 충칭의 장제스는 무려 82개의 직책을 겸임하여 철권통치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유격전과 군대 재건이었다.

한편 평소에 유격전의 중요성에 대해 눈여겨 보고 있던 장제스는 전체 병력의 삼분의 일을 일본군 점령지 후방에 투입하여 후방을 교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광둥을 담당하는 장파쿠이의 4전구와 장쑤, 산둥을 관할하는 위세중의 노소전구, 허베이와 차하얼을 관할하는 루중린의 기찰 전구가 유격 전구로 지정되어 유격전을 실시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유격전 전술을 눈여겨보고 공산당 본거지인 옌안에 교관 파견을 요청하여 예젠잉을 비롯한 30명의 교관이 유격전을 가르치게 되었다. 공산당 교관들은 1940년 2월 도로 철수하긴 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유격 교관 양성은 계속되었고 장제스는 80만에 달하는 유격부대를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유격 부대의 활약상은 중일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한편으로.장제스는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유럽 열강의 식민지인 하노이와 버마를 통해 무기를 수입했다. 이 중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과하는 하노이 루트가 제일 비중이 컸다.

3.6 하이난 함락

중일전쟁이 터지기 전의 일본군은 30만명 수준이었고 이론상의 전시상태 육군도 50개 사단수준이었으나 전선이 너무 넓어진탓에 1939년에 이르면 150만으로 폭증해 있었다. 이중 80만명이 넘는 대군이 중국에 있었으며, 그 결과 일본은 엄청난 인력, 장교, 물자 부족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전선이 무지막지하게 넓어지면서 더 이상 공세를 취하기 어려워졌고 진격 속도 역시 둔화되었고 전비 지출도 실로 막대하여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시점에서 일본은 중국에서 이득을 찾는게 힘들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그 사람이 정치적 인생을 끝장내는 것은 물론이고 암살 위협까지 받을 수 있던 탓에 결국 무의미한 전쟁은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의 조기 종식을 위해 중국의 물자 수입 루트를 차단하기로 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은 영국령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신장의 소련 국경 쪽에서 물자를 수입했는데 이 중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경유하는 하노이 루트의 비중이 제일 컸으며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있는 유일한 루트이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서 하이난 섬 점령을 논의했으나, 영불과의 외교적 마찰이 우려되었으며 중불 국경 전체를 차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이는 보류되었다. 하지만 1939년 1월 19일 일본 해군이 하이난 공략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대륙명 265호가 발령되어 일본군은 하이난 섬을 공략하게 되었지만 일본군은 하이난을 완전하게 통제하는 것에는 끝내 실패했다.

하이난 공격은 작전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것은 물론 열강의 분노를 샀다. 프랑스는 실질적인 손해를 입었기에 3억 프랑의 예산을 들여 인도차이나의 방위를 강화하고 군대를 증파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물자의 제한을 없애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하이저우와 쉬저우를 잇달아 점령하면서 산둥, 장쑤를 거의 장악했고 이로써 중국의 해안을 사실상 봉쇄하는데는 성공했다.

3.7 짜오양과 창사의 승리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기 어려워진 반면에 공산당과 국민당 유격대의 항전으로 인해 점령지 내부에서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일본군은 100만에 육박했지만 거대한 중국의 영토에 비하면 그것도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이에 일본군은 치안 유지를 우선순위로 삼고 점령지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대본영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도 일본군 현지 사령관들이 그걸 무시하는 상황은 일본군 항목을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일본군 현지 사령관들은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명예욕을 바탕으로 무리하게 확장을 시도했다. 대표적인 것이 우한에 주둔한 일본군 11군이었다. 일본군 11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중장은 중국군에게 세 방향으로 포위된데다 중국 공군의 공습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일본군이 다 그렇듯이 ‘허약한 지나군’을 얕잡아보고 측면의 위협을 제거한단 구실로 공세를 결정했다. 첫번째 목표는 난창이었다.

난창은 3전구와 9전구 경계의 요충지로 6개월 전 일본군 106사단이 무리하게 점령하려 했다가 쉐웨의 중국군 제 1병단의 역습으로 개발살나서 패퇴했던 곳이었다. 일본군은 106사단의 패배를 잊지 않았고 이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939년 2월 6일 11군 산하 6사단, 101사단, 106사단과 전차 1개 대대, 1개 포병 여단, 2개 포병연대, 해군 육전대 1개 대대 12만 명을 동원하여 난창을 쳤다. 일본군은 130대의 전차와 장갑차, 250문의 야포를 비롯한 막대한 양의 중화기를 준비한 상태였는데 일본군이 이렇게 중화기를 잘 준비한 경우은 일본군 전사를 통틀어서 드문 일이었다.난창은 쉐웨의 9전구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39개 사단, 20만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했다. 수적으론 중국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역시 화력, 개인장비, 숙련도에서 일본군에 많이 열세였다. 장제스는 처음에는 기존처럼 난창에서 일본군에게 손실을 강요한 다음에 난창을 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동안 중국군이 수비에만 전념했으니 만약 역습을 가한다면 전혀 예상치못한 일본군이 붕괴할 것이란 예측을 하고 쉐웨에게 반격을 가하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명령이 너무 늦게 내려진 관계로 일본군의 공세가 먼저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순식간에 난창에 도달했고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을 돌파하고 3월 27일 난창을 점령했다. 작전 개시 1주일 만이었다. 일본군은 끝이라고 시작했으나 실은 시작이었다.

장제스는 4월 16일 3전구와 9전구에 난창을 탈환할 것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국지적인 공세로 일본군의 증원군의 발길을 붙잡고 난창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일본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본군은 위기에 몰렸고 4월 21일 중국군은 난창에 진입했다. 결국 당황한 일본군은 독가스를 마구잡이로 살포하면서 발악하여 중국군에 큰 피해를 강요했다. 5월 9일 장제스는 퇴각 명령을 내렸고 중국군은 5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희생자도 2만 4천에 달했고 전투의 승리도 전적에 독가스에 의지한 것이었다. 중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1939년을 기해 중국군의 치열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총 1만 8천회에 달하는 교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정면에선 중국군 주력 대부대를, 후방에선 유격대를 상대해야 했다.

일본군 11군은 리쭝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5전구를 제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리쭝런은 우한 탈환을 도모하며 일본군 병참선을 위협했는데 일본군 입장에서 그들이 거슬리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일본군 11군 사령관 야마다 중장은 5월 1일 짜오양의 중국군 5전구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11만 3천명을 동원했다. 리쭝런의 군세는 25만명이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공세 정보를 입수하고 즉각 쑨렌중의 2집단군의 일부를 떼어 5전구에 보내주었고 리쭝런은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을 유인하여 협공을 통해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장쯔중의 33집단군과 77군을 격파하고 5월 7일 짜오양을 순조롭게 점령했다. 그들은 5전구의 주력인 11집단군과 31집단군을 포위섬멸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중일전쟁 전역에 걸친 공통적 문제이지만 이것이 엄청난 패착이 되었다. 중국 영역 깊숙이 들어온 일본군은 당연히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병참에도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이 멈추었단 소식을 듣고 5월 9일 공격 명령을 하달하고 2집단군 병력을 더 증원해주었다.

5월 12일 중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이 구멍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퇴각을 시작했지만, 일본군은 전멸 직전까지 몰렸지만 폭격기와 독가스를 투입하여 간신히 달아날 수 있었다. 중국군은 2만 8천명을 잃었는데 일본군의 손실도 2만 1천명에 달했다. 중국군은 5월 20일까지 일본군을 모두 몰아내었고 곳곳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은 독가스 살포를 통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무엇보다 참담한 패배를 겪고 말았다. 중국에선 이 전투를 웨베이 대첩이라고도 부른다.

한편 난창에서 물러난 쉐웨의 9전구는 주력 부대를 후난성으로 물려 창사를 지키고 있었다. 장제스는 9전구에도 적절한 지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제스는 궁극적으로 난창과 우한을 다시 탈환하려고 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군 11군은 후난 성을 먹기 위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후난 성 장악을 위한 포석으로 일본군은 후베이 성 남부의 중국군을 몰아낸 다음에 창사 북쪽 80킬로미터 지점까지 접근했다. 일본군 11군은 예의 우한의 안전을 확보한단 명목으로 창사 공략 및 9전구 섬멸을 건의하였고 대본영은 이들의 요청을 수락했다. 11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중장은 공상 작전을 수립하여 4개 사단,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창사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장제스는 50개 사단, 30만 명을 보유한 쉐웨에게 역시 일본군을 유인한 다음에 공세할 것을 지시했다. 쉐웨는 3개 방어선을 구축한 다음에 가축과 식량을 소개하고 도로를 파괴하는 등 청야작전을 펼쳤다.

9월 17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철저히 준비해둔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안겨다주었고 진격은 순조롭지 못했다. 가오안, 상가오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중국군의 맹렬한 저항으로 일본군은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이 직접 지휘한 신챵허 강 도하 작전도 2차례나 실패했다. 결국 일본군은 닥치는 대로 독가스를 뿌려 중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나서야 겨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서도 일본군은 중국군의 콘크리트 기지와 기관총 진지의 공격에 발이 묶였다. 매복한 중국군도 후방에서 일본군을 습격했다. 거기에 더운 날씨와 풍토병이 일본군을 괴롭혔다. 미뤄 강 쪽의 공격에서도 일본군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고 식량과 탄환이 바닥났으며 중국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결국 오카무라 야스지 장군은 10월 1일 불리한 전황을 인정하고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이들을 맹렬히 추격하여 역시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850명밖에 안되며 중국군 4만 4천명을 사살했다는 되지도 않는 거짓부렁이 선전을 했다. 중국군은 자신들이 일본군 3만명을 섬멸했다고 주장했다. 양쪽 모두 터무니없는 과장이 섞인 결과였지만 어쨌거나 일본군의 공세는 참담하게 실패했고 장제스는 쉐웨를 직접 치하했다.

하지만 창사 전투에서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후난 성 당국은 창사 밖 30킬로미터 밖에 일본군 기병대가 나타났단 소식에 쌓아둔 인화성 물질에 불을 지를 것을 지시했는데 이 때문에 창사 전체가 닷새동안 불타올랐고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격노한 장제스는 창사로 달려가 창사 수비대장, 경찰국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을 모조리 총살했다.

한편 장제스는 특무조직 군사위원회조통계국(BIS)[17] 다이리[18]에게 한간들을 처단할 것을 지시했다. 다이리는 전쟁 이전부터 비밀경찰의 수장이었고 천씨 형제들과 장제스의 총애를 다투던 장제스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시안 사건이 터졌을 때도 다이리는 시안으로 달려가서 장제스에게 자신의 충성이 굳건함을 맹세함으로 장제스의 신임을 받았고 의심많기론 둘째 가라면 서러운 장제스였건만 다이리만큼은 그의 앞에서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다. 다이리는 남의사를 자신의 군통 조직에 흡수하여 테러 임무를 수행했다. 다이리는 장제스에게 소금전매권과 매달 50만 위안의 자금을 받아 청방과 연합하여 상하이 등지에서 친일파들을 암살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41년까지 150명 이상이 처형당했다 한다. 전 상하이 시장 푸샤오안은 실은 다이리가 잠입시킨 첩자였던 요리사의 칼에 찔려 죽었고 왕징웨이 정부의 외교부장, 비서장 등 여러 거물들이 척살되었다. 일본에 협조한 청방 우두머리 장샤오린도 참혹하게 죽었다. 왕징웨이는 최대의 표적으로 수없는 폭탄, 총탄, 독극물이 그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기차를 타고 가던 왕징웨이 정부 관료 75명이 한꺼번에 폭사되기도 했다. 이에 친일 경찰들도 끄나풀들을 풀어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중국인들을 죽이는 등 잔혹하게 보복했다. 이 시기를 다룬 영화로는 색계가 있다.

3.8 충칭 대공습

“적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야만적이다. 내가 살면서 목격한 가장 참혹한 광경이다.”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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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5일 일본군의 충칭 대공습에 희생당한 시민들[19]

해당 항목 참고.

3.9 1939년 동계 대공세

1939년 12월 장제스는 전 전선에 걸쳐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지난 1939년 5월 일본이 할힌골 전투, 흔히 노몬한 사건이라 불리는 소련과의 국경 분쟁에서 소련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에게 처참하게 박살난 것을 목도한 장제스는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소련이 일본을 공격할 것이란 기대를 하게 되었다. 더욱이 짜오양, 창사에서의 잇달은 승리로 그는 크게 고무되었다. 장제스는 우한을 비롯한 장강 중류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2전구, 3전구, 5전구, 9전구의 병력을 동원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했다. 65개 사단 50만 대군과 전차, 항공기, 함선 등 중국에게 얼마 없는 중화기까지 동원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한편 일본군은 11월 23일,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광시 성의 성도이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국경의 난닝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폭격과 하이난 점령으로도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지 못한 일본군이 육상 공세를 취한 것이다. 광저우의 21군 산하 5사단을 주력으로3 만명의 병력이 난닝 작전에 투입되어 중국군 4전구 소속 3만명을 격파하고 26일에 난닝을 점령했다. 중불 국경 지대의 룽저우와 전난관도 일본군 오이카와 지대의 공격으로 차례로 점령되었고 중국군 수비대는 무참히 패배했다. 중국군은 난닝 탈환을 위해 전차 4대와 1500명의 병력을 데리고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룽저우 반격 작전에서도 패배했다. 중국군은 7700명의 전사자와 700명의 포로를 냈고 일본군은 경미한 피해를 입은 반면에 막대한 군수물자까지 노획했다. 이에 4전구 사령관 장파쿠이가 사의를 비치기도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반려했다. 난닝의 패배 때문에 장제스는 동계 공세 계획을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공세를 위해 준비되었던 상당수의 병력이 난닝 탈환을 위해 광시로 빠졌고 중앙군, 쓰촨, 구이저우에서 난닝 탈환을 위해 대군을 차출했다. 12월 17일 난닝 탈환을 위해 15만 대군과 100여대의 항공기, 200대의 전차와 장갑차가 집결했다. 바이충시가 지휘하는 난닝 탈환군은 쿠룬관 공격을 시작으로 난닝 탈환 작전의 서막을 올렸다.

중국의 대반격이 준비되는 동안 일본군은 중국군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맞설 수 없을 것이라 자만했다. 하지만 12월 초부터 대륙 전역에서 중국군의 총반격이 시작되었다. 12월 1일부터 화북의 제1전구 3집단군 소속 유격대들이 일본군의 교통망을 교란시켰고 81사단이 카이펑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신5군, 9군 36군도 총반격에 들어가 일본군 35사단을 격파하고 안양을 점령했으며 47군이 태행산을 점령했다. 12월 10일에는 2전구가 반격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중국의 대부대가 집결 중인 것을 눈치 챈 일본군 37사단이 선제공격에 들어갔으나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가 처참하게 패배했다. 4, 5, 14집단군과 34, 61군이 일본군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고 27, 40군도 산시 성 중부를 쳤다. 일본군은 잇달아 패배했고 중국군은 창즈를 점령하는 등 선전했다. 이에 일본군 37사단이 반격에 나서서 양측은 매우 격렬한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일본군은 포병, 항공부대 등을 지원하며 맹공을 퍼부었지만 창즈의 중국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병력을 추가 파병한 후인 1940년 1월에야 겨우 창즈의 중국군을 격퇴했다. 12월 18일에는 8전구가 쑤이위안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마잔산이 지휘하는 유격대와 연합한 이들은 바오터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일본군의 증원군들을 차례로 섬멸했다. 일본군은 무리하게 반격하여 중국군 거점 우위안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으나 결국 중국군의 반격으로 전멸당했다. 일본군은 대병력을 투입하여 우위안을 다시 공격했으나 중국의 반격으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퇴각길에 올랐다.

12월 16일 구주퉁의 3전구가 화중에서 반격을 시작했다. 난창, 항저우, 장강 하류에 중국군 대부대들이 공세를 펼쳤고 일본군은 장강의 여러 거점들을 손실하였다. 일본군은 12월 23일에 반격했으나 중국군의 저항에 3일 만에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일본군은 4월 22일에 본토에서 2개 사단을 증원받아 중국의 공세를 겨우 격퇴할 수 있었다.

화중에서 가장 거센 공격을 받은 곳은 바로 우한으로 5전구와 9전구에서 동원된 71개 사단, 50만 대군이 우한을 쳤다. 우한은 일본군 11군 소속 4개 사단이 지키고 있었는데 압도적인 숫자의 중국군에게 밀린 일본군은 전멸 위기에 처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몇겹으로 포위하고 공세를 퍼부었지만 일본군은 전차, 포병, 항공대를 투입하는 한편 철도로 예비대를 지원받아 결국 중국군의 우한 탈환은 실패로 돌아갔다.

12월 17일에는 4전구 소속 중국군 25개 사단이 난닝을 공격해 일본군 1만명을 사살하고 쿤룬관을 점령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나카무라 마사오 소장이 전사하는 등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일본군 21군 사령관 안도 리키치는 난닝을 포기할 것을 명령했는데 5사단장 이마무라 히토시의 반대와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대규모 반격으로 일본군은 난닝을 사수할 수 있었으나 장기적인 난닝 사수도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일본군은 1940년 11월에 난닝을 버리고 퇴각했고 중국군은 중불 국경을 탈환하게 된다.

중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 40여일간 1340회에 전투를 치르며 일본군을 위협했지만 1940년 1월부터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또한 1940년 5월 1일 우한 지구에서 일본군은 이창 작전을 시작하였다. 소노베 와이치로 중장의 11군, 3개 사단과 각 사단에서 차출한 대대들, 독립여단, 전차연대, 중포병, 비행단, 포함된 8만 대군이 리쭝런의 5전구 산하 6개 집단군 13개군 50개 사단 35만 대군이 지키는 이창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짜오양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격퇴하자 반격으로 전환하여 일본군 3사단을 포위하고 병참선을 끊어 한때 일본군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5월 16일 중국군 33집단군 사령부의 위치를 알아낸 일본군 39사단이 반격에 나섬으로 일선에서 직접 싸움을 지휘하던 장쯔중 장군이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해 5전구의 우익이 통째로 마비되어 쑨롄중, 탕언보도 패배하였다. 리쭝런은 퇴각 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리쭝런의 사령부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무리하게 진군한 일본군은 중국군의 매복에 223 보병연대장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으며 격퇴당했다. 11군 소노베 중장은 더 이상의 작전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중단하려 했으나 참모들의 반발로 다시 공세를 재개해야 했다. 장제스는 최측근 심복인 천청에게 직계군 18군을 맡겨 이창을 방어하게 하였으나 6월 11일의 공세에서 이창은 끝끝내 함락되었다. 이로써 중국군은 거의 파멸상태에 놓였다. 장제스는 이를 항전 이래의 최대의 위기라 불렀다.

대공세는 전략적으론 실패에 가까웠다. 중국군의 피해가 막심했으며 요충지 탈환은 대부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중국군 전력의 2~3할이 소모되었으리라 평가했다. 장제스는 각 전구의 협력 부재로 인하여 한개 현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질책하며 여러 장군들의 소극성에 대해서 비판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군의 역량 부족에 있었다. 이를 모르지 않았던 장제스는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는 장기전을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자꾸 안 좋아졌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쓰러뜨리고 비시 프랑스를 수립하자 하노이 루트가 끊기고 말았다. 영국도 일본의 압력 때문에 버마 루트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장강의 요충지인 이창이 함락됨으로 물자 수송이 지극히 어려워졌고 장제스는 수도의 물자 공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공습은 계속되어 외국인과 내국인,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한편 장제스는 일본과의 강화 가능성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상태였다. 다이리의 첩보원들이 홍콩을 통해 일본과 접촉했고 충칭 정부의 대표들이 홍콩에서 일본인들과 회담을 열었다. 장제스, 왕징웨이, 일본군 지나 파견군 참모총장이 대면하는 회담을 여는 데에 양국은 합의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만주국 승인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일본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미국에 흘리면서 미국의 지원을 얻고자 했고 이를 위해 쑹쯔원을 워싱턴에 파견하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게 했다. 쑹쯔원은 5천만 달러의 통화 안정 협정과 중국에 차관 제공, 중국 원자재 구입을 약속하는 신용 대부를 얻어냈다. 미국의 대중 원조는 2억 4500만 위안에 달했다. 이어 영국도 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제공했으며 버마 루트를 다시 열어 물자를 제공했다.

또한 일본 대본영은 충칭을 함락하기엔 일본군의 공세 능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자각하고 장기 전략 방침에 따라 현상유지를 목표로 삼고 기존 점령지를 안정화하는 한편 중국 내부엔 폭격을 통한 전력 약화를 꾀했다. 중국의 내륙 오지에는 도로도 철도도 없었고 가뜩이나 병참 능력이 형편없는 일본군으로써는 중국 내륙에서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간 입은 손실도 무시할 수준이 못 되었으며 일본군의 자체적인 모순도 심각한 상황이었고 사기 역시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장제스도 이러한 점을 눈치채고 일본군의 역량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수차례 국지적 공세를 펼쳐 중국군에게 많은 손실을 입히고 약탈을 자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으며 중국군의 반격과 유격대의 후방 교란으로 점령지를 유지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상가오 회전에서는 중국이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 33사단과 34사단을 궤멸 직전까지 몰고가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 양국은 곳곳에서 치열하게 맞서며 서로의 전력을 깎았고 양측의 전력 공백이 생긴 곳에는 어김없이 공산당이 나타나서 해방구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3.10 환난 사변

한편 중국 공산당은 전투를 회피하고 세력확장에 골몰하여 국민당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는데 결국 이러한 공산당의 행태에 분노한 국민당이 상하이와 난징 일대에서 활동하던 공산당 신4군의 철수에 대해 최후통첩을 날리게 된다. 이에 신4군은 굴복하여 화북으로 이동하기 시작되었으나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신4군과 국민당의 교전이 벌어지고 신4군은 궤멸당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4 태평양 전쟁의 시작(1941~1944)

행운은 결코 어떤 사람에게 오랫동안 마냥 미소만 짓는 것이 아니다

- 장제스의 일기에서 발췌.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본 미국 등은 일본을 제재하기로 결정하고, 전략물자의 대일수출을 금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곤란해진 일본은 제재를 가한 미국, 영국[20], 네덜란드[21]와 중국을 묶어 ABCD(American+British+Chinese+Dutch) 포위망이라고 가칭하며 일종의 배후처럼 선전했다. 이후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 기지를 습격함으로 미국이라는 잠자는 거인을 깨워 전쟁터로 끌고오는 장대한 대삽질을 저질렀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의회는 압도적으로 선전포고를 결의했고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극동 전쟁에 대한 모든 통제를 자신에게 집중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장제스는 일본 군대는 중국 내부에서 소멸시키고 그 동안 미국이 일본 본토를 초토화시키길 원했다. 며칠 후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공통의 적에 대항하는 공동 행동을 취할 방도를 즉각 준비하는 단계를 옹호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1941년 12월 31일 장제스는 중국 전구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이 되었고 명목상 아시아 전역이 그의 지휘권에 속해 있었다. 1942년 1월 1일 워싱턴에서 열린 연합국 26개국 대표들의 연합국 공동선언에서 중국 대표로 파견된 쑹쯔원은 루스벨트, 처칠, 미국 대사 리트비노프에 이어 4번째로 서명했다. 루스벨트는 중국에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노변담화에서 최종적으로 일본을 격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위대한 저항과 불가피한 반격을 하고 있는 중국을 반드시 돕는 것이라는 연설을 했다. 하지만 미국인 참모들은 전황을 나쁘게 보았고 중국이 정리한 그간의 기록을 믿지 않았다. 미국 육군성이 중국에 파견한 참모단은 장제스가 지금까지 거둔 승리를 영리한 속임수라고 주장했고 충칭 정권은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열악하여 장제스가 곧 일본 괴뢰정부보다 약화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일본이 중국을 장악하여 황화의 공포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고문단의 주장을 물리치고 중국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장제스는 중미 관계를 강화하여 더 많은 원조를 얻기 위해 미국인을 참모장에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국민혁명군를 현대화하여 중국군을 강화할 기회라고 여겼고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조지프 스틸웰 중장을 파견하기로 했다.

4.1 조지프 스틸웰의 등장

원래 조지 마셜 총장은 과거 퍼싱 장군의 참모였던 휴 드럼 장군을 파견하려 했다. 휴 드럼 장군은 대규모 야전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중국통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경험이 있는 장군이었다. 하지만 드럼은 미국이 중국에 파견할 장군이 자신들이 아시아 전선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이면서 아무 지원도 해주지 않고 버릴 말로 써먹으려는 것임을 간파하고 대규모 대중 지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중국에 지원을 해줄 생각이 없었던 미국은 그를 후보에서 제외했고 새롭게 뽑힌 인물이 조지프 스틸웰이었다.

‘까다로운 조’, ‘삐딱이 조’라고 불리는 58세의 조지프 스틸웰은 퇴역을 앞에 둔 육군 중장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북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될 예정이었다. 그는 톈진의 미국 조계지 파견군, 주중 미국 대사관 군사 무관 등을 지내며 중국에서 13년을 근무했고 중국말에도 능통하여 미 육군 중에서 최고의 중국통이라 할만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중국에 파견되어야 한다는 말에 매우 불쾌해했다. 스틸웰은 마셜에게 중국군의 전 지휘권을 자신에게 주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이에 헨리 스팀슨 육군 장관이 장제스에게 지휘권을 받기로 했다고 보증했다. 하지만 스틸웰이 수백만명이나 되는 거대한 군대를 지휘한 경험도, 지휘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장제스가 처음보는 미국인에게 자신의 지휘권을 홀라당 넘겨주길 기대하는 것은 스틸웰 자신조차도 일기에서 회의적으로 보았다. 중국의 외교부장 쑹쯔원은 이미 스틸웰이 중국에 머물렀던 시기는 장제스의 난징 정부 시절로 한창 군벌 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그가 중국에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의 우려는 적중했다. 그리고 쑹쯔원은 스틸웰에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울 것임도 예상했다.

스틸웰은 중국 전구 연합참모장, 충칭연합군군사위원회 미국 대표, 중국, 인도, 버마 전구의 미군 총사령관, 대중 원조 물자 관리통제관, 버마 루트 감독관, 재중 미 공군 지휘관 등 여덟개의 으리으리한 직함을 달고 중국에 도착했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땅콩이라 조롱했고 나중에는 방울뱀이라 비하했다. 워싱턴의 선의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지금껏 그가 상대했던 소련 고문인 바실리 블류헤르, 바실리 추이코프나 독일 고문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같은 점잖은 고문들을 기대하며 스틸웰을 맞았으나 곧 이 거칠고 신경질적인 양키 참모장에게 학을 떼고 만다.

장제스의 비밀 공작 능력이나 충성심 우선 성향도 스틸웰에겐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스틸웰은 고급 캐딜락을 거부하고 군용 지프를 고집했으며 허름한 군복만 입고 용모를 일부러 볼품없게 만들고 다녔다. 고급 옷을 입고 잘 손질한 외모의 장제스와는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스틸웰은 북경어를 구사했다. 작가 에밀리 한은 스틸웰은 그가 남의 관점이 자신의 것보다 일리가 있을 것이란 가능성이나 미국보다 더 큰 세계의 존재에 대해서 정신병적인 수준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중국의 참모장이 된 미국인 스틸웰은 중국, 버마, 인도의 미군을 지휘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미국에 중국에 무기대여법에 따라 제공하는 모든 무기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전쟁위원회의 미국 대표 겸 영국과의 연락관도 겸했다. 곧 스틸웰과 장제스의 권력다툼이 시작되었다. 장제스는 중간의 스틸웰을 무시하고 군 지휘관들과 직접 연락하며 그들의 충성심을 재확인했고 이를 스틸웰은 좋아하지 않았다. 스틸웰은 중국군을 통제하고 싶어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미국이 중국정부를 무력화하고 중국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었지만 미국이 스틸웰을 위해 그런 일을 해줄 리가 없으니 결국 마땅한 수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제스도 스틸웰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까봐 노심초사했고 이후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나는 순간까지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하게 된다. 어쨌거나 스틸웰의 존재는 표면적인 미중관계를 진전시켜주었다. 쑹쯔원은 5억 달러 어치의 차관을 새로 유치했고 미국의 원조를 두배로 늘렸다.

4.2 일본의 남방작전과 버마 전투

자세한 것은 남방작전 항목 참조. 영국, 미국, 네덜란드는 참패하여 식민지들을 일본군에 내주었으며 태국은 친일 동맹국이 되었다. 장제스는 버마 방위를 돕기 위해 스틸웰을 사령관으로 삼아 중국원정군 10만명을 파견했지만 스틸웰의 졸렬한 지휘와 영국군의 배신으로 전력의 75%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버마를 내주어야 했다. 스틸웰은 이 모든 것이 중국군의 무능함 때문이라고 비난했고 장제스는 자신의 정예병력을 날려버린 스틸웰에게 이를 갈았다. 이때부터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또한 원조 문제, 연합국 내부의 주도권 문제로 중영, 중미 간의 갈등도 벌어졌다.

4.3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전쟁

이 시기 일본은 '군벌 장씨'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어 내륙 지방에 숨어버렸고 중국의 요충지가 모두 장악되었으며 왕징웨이 정권의 안정성은 완벽하므로 이제 더 이상 걱정할 것 없다고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중국군은 대륙 전역에 걸쳐 항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1941년 12월 3차 창사 공략전에서 일본군은 참패하기까지 했다. 영미와 2전선까지 열어버린 일본은 중국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충칭이나 청두까지 전진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일본은 1942년 9월 5호 작전을 수립, 충칭과 청두까지 점령함으로 전쟁을 끝내려고 했지만 태평양에서 미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어 과달카날에서 참패를 당하게 되자 막대한 병력을 남방으로 빼내야 했고 따라서 중국 내륙에 대한 공세를 수행할 여력이 전혀 남아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선 남은 전력을 보존하여 현명하고 신중한 전략을 짜야 마땅했겠지만 상부의 명령 듣지 않기로 유명한 일본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명예욕을 위해서 헛된 공세를 무리하게 감행했고 아까운 물자와 인명만을 번번이 낭비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전선은 고착화되었는데 일본은 불리해지는 전황을 만회하기 위한 매우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1942년 4월 18일 제임스 둘리틀 중령 휘하의 폭격기 편대가 진주만 공습에 대한 보복으로 도쿄, 오사카 등지를 폭격했다. 일본이 입은 피해 자체는 대단한 것이 없었으나 일본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대본영은 중국 내부의 미국 항공기지들을 파괴할 것을 지시했고 일본군은 절공작전을 수립하여 공세를 준비했다. 하타 슌로쿠 대장이 지휘하는 18만명의 일본군은 5월에 장시, 저장 성의 중국군 3전구를 강타했다. 3전구는 숫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낙후된 약체였고 일본군의 대공세에 순식간에 무너졌다. 장제스는 급히 3개 군을 급파하여 맞섰으나 결국 일본군은 7만명의 중국군 피해를 안겨주고 목표한 저장 성과 미군 항공기지를 모두 파괴했다. 허나 일본군 역시 3만 6천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5사단장 사카이 나오지가 전사했다. 이에 일본군으 보복으로 저장 성에서 수십만명의 중국인들을 학살하고 약탈, 강간을 벌였다.

이후 일본군은 유명한 신멸작전을 벌인다. 마오쩌둥은 일본군과의 교전을 피하면서 곳곳에서 해방구를 건설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곳은 화북의 10%에 불과할 정도였다. 이에 일본군은 공산당 및 국민당 유격대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잔혹한 토벌작전을 시행하는 데 그것이 바로 삼광작전 혹은 신멸작전이라 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이로 인해 최소 7만 5천명이 죽었고 100만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4.4 일본군의 1943년 공세

해를 넘겨 1943년에 접어들자 영미의 거센 반격으로 일본의 열세와 불리함은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었고 지나파견군에서도 계속 병력을 차출해서 남방의 구멍을 메워야 했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고 전력이 축소되자 지나 파견군은 상황이 더욱 열악해진 1943년에 들어서서야 허겁지겁 반격을 기획하고 우한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후난과 후베이 지역에 3차례에 걸친 공세를 감행했다.

1943년 2월 초에 벌어진 1차 공세로 강북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후베이 성 남부의 웨이저우의 중국군 6전구 소속 2개 사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는데 중국군 2개 사단을 전멸시키기 위해 일본군 3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질적으론 말할 것도 없고 숫적으로도 일본군의 반 밖에 되지 않던 중국군은 순식간에 참패하였고 중국군 8600명이 전사하고 2만 3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254명의 전사자만 발생했다. 정작 일본군은 병참 상의 문제로 많은 병력 손실을 입었다. 작전은 3월에 종료되었고 일본군은 중국군 2개 사단의 반격까지 손쉽게 격퇴한 다음에 퇴각했다.

1943년 4월 후베이 성의 6전구 주력을 섬멸하고 후베이의 곡물을 약탈하기 위한 2차 공세인 강남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무려 4개 사단과 독립혼성 17여단 및 여러 독립지대들을 동원했고 왕징웨이 괴뢰정부 산하의 화평군 1만명까지 차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고질적인 미숙한 병참으로 인하여 공격은 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9일에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중국군을 격퇴하고 많은 식량을 약탈했다. 5월 중순에 중국군은 쓰촨 성과 후베이 성의 경계인 스파이 요새까지 밀려났는데 이 요새가 뚫린다면 충칭의 숨통에 총구가 겨눠지는 격이었다. 물론 중국군도 그 중요성을 잘 알아 스파이 요새에 최정예 부대인 11사단을 배치한 상태였다. 일본군 13사단이 스파이 요새를 돌파하기 위한 공세에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해냈다. 이때 미국 공군과 중국 공군이 일본군의 병참로를 습격하면서 일본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6전구 사령관은 천청은 일본군이 스파이 요새에 발목이 잡힌 틈을 타서 반격을 감행, 일본군 13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자신들이 위기에 처한 것을 깨달은 13사단은 공세를 멈추고 퇴각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전사자가 771명이며 중국군은 3만명 사살,4 천명 포로의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으나 중국군은 일본군 2만 5천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자기들답게 후베이 성에서 창자오 학살을 감행 3만명의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고 또 대규모 강간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일부 전술적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전략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태평양 전선의 상황이 악화되면서 오히려 중국 주둔군을 차출하여 남방에 파견해야하기 위한 감호전용계획이란 것을 짜야 할 지경이었다. 이에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하마 이사무 장군은 대규모 병력을 차출하는 것은 전선에 차질을 준다면서 병력을 빼내기 전에 중국군에 공세를 가하여 위협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대본영이 이를 승인하면서 이름도 유명한 창더 섬멸작전이 시작되었다.

4.5 창더 전투(상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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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을 통과하는 중화민국군, 1943년 상덕(常德)
창더는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다.

-장제스

창더를 공략하기 위해 11군 소속 5개 사단과 13군의 병력, 3비행사단에서 차출된 병력 35개 대대 6만 명이 모였고 11월 2일에 공세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공격을 알아차린 6전구 사령관 천청은 3개 집단군을 동원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여 74군을 창더로 급파하고 18군을 예비대로 꾸린 다음에 일본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작전을 짰다. 하지만 호우와 장강의 범람으로 10집단군의 전개에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결국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창더를 삼면으로 포위했다.

장제스는 57사단장 위청완에게 절대사수를 명령하는 한편 천청 이하 지휘관들에게 창더가 중국의 스탈린그라드가 되어야 한다고 훈시했다. 쉐웨가 즉각 증원군을 보내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했고 중미 연합공군도 가세했다. 일본군의 공세도 거셌다. 중국군 신5사단장 펑스량, 150사단장 쉬궈장이 전사했고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도 좌관급 장교 수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후송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한 중국군의 피해가 더 컸고 일본군은 외곽 방어선을 분쇄하고 57사단장 위청완 휘하 8천 명의 병사들이 지키는 창더를 포위했다. 위청완은 황푸군관학교 1기생으로 그간 많은 전투를 치러낸 노련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특히 방어전에 능숙하였고 창더의 지형물을 이용한 튼튼한 방어선을 꾸렸다.

11월 22일 일본군 116사단이 공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중국군의 강한 저항에 많은 피해를 냈으며 109연대장 누노 데이치 대좌가 전사했다. 놀란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장군이 직접 나섰다. 그는 3사단과 68사단을 증원하여 창더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4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의 일부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너무도 강력한 중국군의 저항에 일본군은 완전히 발이 묶이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독가스를 살포하면서 7천명의 중국군이 사망했고 일본군 역시 1만명이 독가스와 세균 무기의 피해를 입고 후송되었다. 결국 독가스 공격에 90%가 넘는 병력을 상실한 중국군은 무너졌고 위청완 장군은 2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탈출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중국군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곳곳에 숨어 치열한 저항을 전개했다. 중국군 10군이 함락 초읽기에 들어간 창더를 구하기 위해 나섰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10예비사단장 쑨밍진을 잃는 등 큰 피해만 입고 물러났다. 결국 12월 3일 83명의 포로를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중국의 저항은 종결되었고 일본군은 창더를 장악했다. 위청완은 열심히 싸웠음에도 적전도주했다는 잘못된 보고가 올라가 격분한 장제스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제대로 된 정보가 올라옴에 따라 장제스는 즉각 그를 석방하고 크게 치하했으며 26군 군장으로 승진시켜주었다.

한편 천청은 후베이 성 북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하고 일본군의 인프라를 파괴하였으며 일본군을 포위하는 거대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요코야마 중장은 중국군의 포위 전선이 펼쳐진 것을 알아차리고 12월 11일 작전 중지 및 퇴각을 명령했다. 중국군은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되찾았으며 일본군을 추격해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미국 고문단은 약탈이 목적이었던 일본군은 목적을 달성하여 철수한 것일 뿐 중국의 용전을 폄하, 무시하였고 이러한 왜곡된 정보들을 전달받은 워싱턴에선 장제스가 정말로 일본에 제대로 맞서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갔다. 어쨌거나 일본군은 전사 1274명, 부상 2977명에 반해 중국군 2만 9천명을 사살하고 1만 4천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사단장 6명을 전사시켰다고 으스댔다. 반면 중국군은 일본군 4만명을 사상시켰다고 주장했다. 창더 전투를 그린 영화 "첩혈고성"에 전투가 아주 상세히 묘사되있다. 위청완 장군이 부하장교들 및 잔여 병력과 함께 직접 소총을 들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창더를 빠져나가는 장면이 압권

5 말기(1944~1945)

5.1 대륙타통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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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륙타통작전(이치고 작전) 지도

미국, 영국, 호주, 뉴질랜드, 중국 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난국 속에서 일본의 전황은 날이 갈수록 불리해졌다. 미국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거셈과 동시에 일본군은 남방 점령지에서 차례로 밀리고 있었고 병참선도 다 끊어졌다. 일본은 불리한 전황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 인도를 점령한다는 장기적 구상 속에서 중국 대륙의 남과 북을 관통한다는 대륙타통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무려 50만에 달하는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스틸웰의 이적행위나 다름 없는 행태로 인하여 전선을 보강할 여력이 전혀 없었던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대륙타통작전도 전략적으로 볼때 무리하게 짝이 없는 작전이었고 일본의 전황 회복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5.2 버마 탈환전

대륙타통작전에서 시간을 약간 거슬러 올라가서 1943년 인도에선 치욕적으로 버마를 걸어서 탈출해야 했던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이 구상되고 있었다. 스틸웰은 이미 1942년 6월에 장제스에게 버마를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영국과 연합하여 버마를 탈환하겠다는 야심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창설된 것이 5만 명의 중국군으로 구성된 X군인데 장제스는 영국이 지휘권을 가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X군의 창설을 승인했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선 태평양보다 부차적인 중국 전선에 돌아가는 지원의 양은 극히 적었고 정작 버마의 지배자인 영국인들이 버마 탈환에 시큰둥하면서 버마 탈환은 순조롭지 못했다. 영국은 중국의 아시아에서의 발언권이 세져 영국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두려워했고 중국군의 도움을 한사코 거부했으며 인도에 들어온 중국군을 내쫓기 위해서도 여러차례 시도했다. 루스벨트가 중재하여 중국군의 인도 주둔은 유지되었으나 미국, 영국, 중국이 모두 반대하면서 난황은 계속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버마를 탈환할 필요성을 느껴 비협조적으로 일관했고 중국은 영미의 협조가 없는 상황에서 중국군만 피를 흘릴 순 없다고 반대했다. 게다가 장제스는 스틸웰이 이미 자신이 준 10만명의 정예부대를 말아먹은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X군도 말아먹지 않을까 매우 우려했다. 이에 따라 스틸웰의 버마 탈환 작전인 애나킴 작전은 진척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942년과 1943년 2월의 영국군의 제한적 반격이 큰 피해만을 남긴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영국은 더욱 소극적이 되었다. 1943년 5월 트라이던트 회의에서 연합국 수뇌부는 버마 탈환에 손을 떼버리고 중미연합공군의 육성에 지원을 돌렸다. 결국 1942년 11월에 시행 예정인 애나킴 작전은 1943년 말에야 시행될 수 있었다.

스틸웰의 버마 전선은 X군, 영국군 2개 군단, 미국 메릴 부대 등 상당한 대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1943년 10월 스튜어트 전차와 쑨리런 휘하의 38사단을 앞세워 버마로 진공했다. 하지만 스틸웰은 일본군의 수와 전투력을 매우 얕잡아보고 버마에는 일본군 5개 사단만 있으며 버마 북부엔 1개 사단도 없다고 허풍을 쳤지만 실제론 8개 사단+본토에서 2개 사단의 증원이 오고 있었다. 1944년 2월에 영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일본군 55사단장 하나야 타다시가 영국군의 군수물자를 약탈하겠답시고 하호 작전이란 것을 실시하여 영국군 기관총과 대포 앞에 부하들을 반자이 돌격 시켰다가 박살이 난 통에 일본군의 방어력은 더욱 약해졌다. 그런데 1944년 3월 8일 중일전쟁의 참화에 책임을 느낀[22] 무타구치 렌야가 나섰다! 일찍이 노구교에서 사고를 쳤던 무타구치는 이후 버마에 파견되어 1942년 인도 진공 작전인 21호 작전이 무모하다고 철회시킨 이력이 있었는데 그는 연합국은 더욱 세지고 일본군은 더욱 약해진 1944년 3월에 난데없이 인도를 먹을 절호의 기회랍시고 임팔 작전을 가동시켰다. 결과적으로 9만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굶주림 속에서 죽어가고 연합군의 공세에 죽어갔다. 하지만 스틸웰은 자신이 일본군에 포위되어 죽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장제스에게 Y군을 보내달라고 졸라댔다. 장제스는 거부했지만 대륙타통작전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스틸웰은 농간을 부려 결국 Y군을 뺏어온다. 1944년 5월 Y군은 일본군 56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2년 간 방어선을 구축한 마쓰야마 유조 중장 휘하 56사단은 중국군의 공세를 잘 방어했고 때마침 일본군 2사단과 49사단의 증원으로 버마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한편 영국군과 중국군은 버마 북부의 요충지인 미치나 근처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영국은 지극히 비협조적으로 일관하며 당시 버마 북부가 무주공산이란 사실을 스틸웰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스틸웰도 졸렬한 지휘로 일본군에게 전열을 갖출 시간을 벌어다 주고 말았다. 결국 금방 장악할 수 있던 버마 북부는 8월에서야 겨우 연합군의 손에 들어왔다. 스틸웰은 자신의 공을 열렬히 선전했는데 이 중에 영국군이 점령한 모가웅 시를 자신이 점령했다고 하는 바람에 처칠과 마운트배튼 등이 격노하였고 그들은 스틸웰 해임을 루스벨트에게 요구했다. 때마침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에 반발했다. 스틸웰의 지휘력은 미국 청문회에까지 올라갔고 애꿎은 메릴 부대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쨌거나 중국군 38사단은 12월에 버마-중국 국경을 개통했고 Y군도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윈난 성 남부를 점령했다. 결국 일본군은 버마 남쪽으로 계속해서 밀렸고 1945년 1월 X군과 Y군이 합류하고 레도 공도가 개통되었다. 하지만 스틸웰도 끝났다. 대륙타통작전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던 장제스는 더 이상 스틸웰과 같은 공간에서 숨쉬길 거부했던 것이었다. 장제스는 스틸웰을 해임하지 않을 것이면 미국이 준 물자를 다 가져가라고 배수진을 쳤고 이에 루스벨트도 굴복했다. 스틸웰은 자신이 전쟁 영웅이라 굳게 믿었지만 귀국 후 선거에 방해되지 말란 핀잔을 듣는 굴욕을 겪었고 이후 1946년 미군 6군 사령관의 신분으로 위암으로 죽었다.

5.3 웨드마이어의 등장과 전력의 회복

이치고 작전의 궤멸적 타격으로 중국은 한때 충칭이 함락당할 위기에 놓일 지경이었으나 일본군의 병참 한계와 대본영이 충칭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장제스를 굴복시킬 수 있을 지 회의적이라고 판단하여 충칭 공격은 중단되었다. 새롭게 고문으로 부임한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스틸웰보다 훨씬 우호적인 자세로 나가 원조 규모를 늘리고 중국에 물자를 제공함으로 피폐해진 중국군의 전력을 회복하는데 주력했다. 또한 장제스와 스틸웰의 고질적인 마찰거리였던 중국 공산당에 대해서도 장제스만이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공산당 지원은 있을 수 없다면서 장제스를 지원했고 신임 주중 미국대사인 패트릭 헐리도 이 의견에 동조했다.

장제스는 1944년 10월 지식청년군을 편성했다. 원래 중국은 고등학생 이상의 인력은 중국 재건의 씨앗으로 보고 징집을 면제해주었는데 이치고 작전으로 중국군 전력이 고갈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한 엘리트 청년층이 필요해지면서 이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이었다. 지식청년군의 모집 소식에 무려 12만명이 지원했고 그 중 8만 6천명이 입대시험에 통과했으며 그 중 1만명은 X군에, 나머지는 경기계화부대로 편성되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는 것을 직감한 장제스는 군을 재건하면서 1945년 1월 쿤밍에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허잉친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허잉친은 국민정부군 재건 계획을 수립하여 65만명의 병력을 미군식으로 편제하여 반격할 계획을 꾸몄다. 허잉친은 4천명의 미군을 중국군에 배치하여 이 과정을 감독했고 중국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웨드마이어는 일주일에 한번 미중 참모회의를 열며 미국의 정보를 장제스에게 제공했고 공산당과 협력할 생각도 없다고 확인해주어 장제스를 크게 만족시켰다. 버마의 X군과 Y군까지 돌려받은 장제스는 버마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으며 때를 기다렸다.

5.4 랴오허커우와 즈장의 승리

1945년 1월 22일 지나파견군의 새 사령관이 된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치고 작전의 부실한 전략적 성취를 보충하기 위해 랴오허커우와 즈장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랴오허커우 공격에는 북지나방면군 소속 4개 사단, 2개 여단, 10만 명이 동원되었으나 화력 면에서 매우 빈약한 상태였다. 중국군은 일본의 공세를 눈치채고 이들을 섬멸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허잉친은 즉각 미국의 도움을 받아 양성한 미국식 사단들을 파견했다. 1945년 3월 22일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기병대를 앞세운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였으나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일본군은 3월 29일 시샤커우, 4월 7일 랴오허커우를 점령하고 포로와 민간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일본군은 작전이 끝난 줄 알고 철수하려 했으나 그들은 이미 중국군에게 포위된 상황이었다.

4월 4일 장제스가 1전구와 5전구에게 반격을 명령했다. 시샤커우에서 중국군은 일본군 5천명을 죽이고 일본군 3전차사단을 전멸시켰다. 특히 중국군 5전구는 미제 전차를 앞세우고 있었는데 4월 13일 일본군은 랴오허커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중국군은 5월 말까지 일본군을 소탕하며 빼앗긴 영토를 모두 되찾았다. 한편 즈장을 공격하던 10만명의 6방면군은 탕언보 휘하 중국군 28개 사단과 충돌했다. 일본군은 중국군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중국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형편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부대들이 전멸 위기에 처하자 오카무라 야스지는 5월 9일에 퇴각명령을 내렸고 일본군은 3만명의 병력을 잃고 패주했다. 전세를 회복한 중국의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5.5 종이 위의 구상으로 그친 카보네이드 작전

중국은 피점령지에 대한 회복과 재건, 복구, 피난민들의 귀향 등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비책이 없으며 혼란과 무질서가 닥쳐올 것이다.

-앨버트 웨드마이어

랴오허커우와 즈장에서 일본군은 중국군보다도 훨씬 많은 손실을 입고 참패했다. 이는 일본이 더 이상 중국군을 상대로도 전력적 우세를 유지할 수 없음을 의미했다. 일본은 이미 필리핀에서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에게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며 밀려났고 이오지마오키나와를 잃었다. 이에 일본군은 중국에서도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본영은 화남 지역을 더 이상 지킬 수 없다고 판단, 광저우와 홍콩을 제외한 영토를 버리고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일본군이 달아나기 시작하자 중국군은 즉각 추격에 나섰다. 5월 26일 장파쿠이가 난닝을 탈환했고 6월 14일 탕언보가 이산, 류저우를, 7월 28일 구이린을 탈환했다.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패망했으며 유럽 전선을 정리한 미국은 패튼을 비롯한 유럽 전선의 영웅들을 중국 전선에 파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허잉친은 베트남, 광저우, 구이린, 헝양을 동시에 공격하자고 주장했으나 웨드마이어는 홍콩과 광저우에 집중하자고 했고 이에 입각하여 중국은 카보네이드 작전을 수립, 20개 사단으로 광저우, 홍콩을 시작으로 중국 동남해안을 탈환한다는 작전을 세웠으나 그 전에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하지만 중국은 일본이 그렇게 일찍 항복할 줄 꿈에도 모르고 되찾은 영토에서 어떻게 질서를 수립할 것인지에 대해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5.6 소련의 참전

1945년 8월 8일 소련이 대일 개전을 선고하면서 일본이 믿던 최후의 보루인 관동군도 섬멸되고 만주국이 무너졌다. 이는 일본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항목 참조.

5.7 일본의 항복, 피의 승리

“50년 동안의 국치와 내가 감내해야만 했던 핍박과 모멸이 지금에 이르러서야 말끔히 씻겼다.”

-장제스

일본군 항복의 순간들 찍은 사진 모음집

1945년 8월 6일, 9일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의 침공까지 마주한 일본은 더 이상 아무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8월 14일 오후 8시 30분, 일본의 내각 회의는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8월 15일 오전 10시에 이 소식이 뉴스를 통해 방영되었고 같은날 정오, 천황 히로히토가 전쟁의 끝을 알리는 옥음방송을 내보냈다. 당연히 이 소식을 접한 중국 전역에서는 승리의 환호가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장제스는 전쟁이 1년이나 1년 반은 더 계속 될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의 항복의 진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비록 화남에서 밀려나기 시작했어도 중국의 일본군은 100만명이나 되었으며[23] 순식간에 소련과의 만주 문제, 영국과의 홍콩 문제, 피점령지에 대한 전후 재건 및 다시 준동할 공산당, 군벌에 대한 대책 등이 산더미처럼 장제스 앞에 쏟아졌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공산당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기 시작하자 옌안의 특별구에 웅크리고 세력을 불리고 있던 공산당은 8월 9일 항일이 끝났음을 선언하며 해방구를 확대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란 명령을 내렸으며 8월 10일 화북, 러허, 만주에 4개 집단군을 급파했다. 화중, 화남의 공산군 역시 즉각 화북의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했다. 만주에 파견된 공산당원만 해도 40만명에 달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일본군 및 만주군 군인과 기술자들을 대거 흡수하여 이후 국공내전에서 매우 유용하게 써먹었다.

기껏 피 흘려 거둔 과실을 공산당이 채가는 것에 당연히 장제스는 분노, 8월 11일 주더에게 위치를 사수할 것이며 일본군과 괴뢰군을 공격하지 말 것을 지시했고 일본군과 괴뢰군에게 공산당에 투항하지 말 것을 명령했으며 국민정부군에게 신속히 일본군 점령지를 탈환하고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킬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공산당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 명령을 무시, 8월 17일 장제스에게 복종의사를 표명하고 각 부대에게 국민당이 올 때까지 주둔지에서 기다릴 것이며 공산당을 상대로는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오카무라 야스지는 향후 중국의 지배자가 될 것이 확실해보였던 장제스와 협조하는 것이 일본에게 이로울 것이라 판단, 장제스에게 매우 협조적으로 나와 향후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대만-일본 우호관계 증진의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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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또한 이와 별도로 중일전쟁의 발발 원인에 대한 글을 추가할 예정.
  2. 본 문단은 중일전쟁(권성욱), 미지북스 203~213쪽 참고.
  3. 北平. 북경(베이징)의 중화민국 시절 명칭이다. 최근까지도 대만 등지에서 북평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4. 시한을 내걸고 그 시한보다 빠른 공격을 일삼는 것은 일본군이 일찍이 제남 사건때부터 보인 기만책의 일환이었고 일본군은 장제스가 파견한 30만명의 지원군이 오기 전에 베이핑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5. 본 문단은 중일전쟁(권성욱), 미지북스의 213~216쪽 참고.
  6. 본 문단은 중일전쟁(권성욱), 미지북스 218~220쪽 참고.
  7. 본 문단은 중일전쟁(권성욱), 미지북스 233~237쪽 참고.
  8. 원래 상하이 전투로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영국이 중재에 나섰는데 일본에서 영국의 중재를 거부했다.
  9. 출처: 용의 유전자(제국을 향한 피의 역사가 깨어난다)
  10. 수도인데다 국부 쑨원의 묘가 난징 교외에 있어 상징성도 컸다.
  11. 수많은 피를 흘리고 3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상하이 하나 함락시켜 군부에선 전략을 바꾸는 수 밖에 없었지만 분노와 증오에 찬 전투현장에 있는 야전부대 들은 사령부의 명령 따위 씹고 계속해서 진격해 나갔는데 이게 도쿄에 있는 내각에선 승승장구 하는 것 처럼 보여 그런 자세를 취했다. 더군다나 일본이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건 임진왜란 때 한양함락 이후 처음인데 그래서 더 고무 된 것도 있고.
  12. 성문들과 포구에는 탕성즈의 명령으로 배치된 독전대가 있었고 후퇴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무단후퇴금지령은 유효한 상태였다.
  13. 역으로 일본군이 난징으로 쳐들어 온 동쪽방면으로 도망갔다. 일본군도 상하이에서 급하게 난징으로 몰려온거라 지휘체계와 점령 정책이 원활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 이다.
  14. 욘 라베가 다른 외국인들과 난징대학을 중심으로 만든 안전구역 이다.
  15. 1940-1942년 기간 군사고문으로 재직했다.
  16. 이사람 역시 1924-1927년 기간 '갈렌(Galen)'이라는 이름으로 중화민국 정부의 군사고문을 맡은 적이 있었다.
  17. 그 유명한 남의사를 계승하는 조직이며 현재 타이완의 정보조직의 시작이기도 하다.
  18. 20세기의 가장 천재적인 첩보원중 한 명으로 정부의 지원이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도 5만명에 달하는 첩보원이 중국 각지에서 정보를 수집했으며 독소전의 개막일을 확보하는고 장제스에 대한 쿠데타나 반란계획을 연이어 저지하였다. 1946년 비행기사고로 급사했는데 후일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장제스는 다이 리기 있었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것이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니 그 중요성을 짐작할만하다.
  19. 출처: 영문 위키백과
  20. 영국령 말레이
  21.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22. 취소선은 쳤지만 임팔 작전의 원인중 하나는 맞다.
  23. 만주의 80만 관동군은 제외하고도 이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