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야마 하지메

일본군 삼대오물
무타구치 렌야스기야마 하지메도미나가 교지


1.jpg
Hajime_Sugiyama_02.jpg
이대근?
사진 자꾸 보지마라 정든다. 하루라도 빨리 대한을 독립시키기 위해 명철한 작전을 구상 중인 원수님 가슴의 훈장에 태극문양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 すぎやまはじめ)
(1880.01.01 ~ 1945.09.12)

1 소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원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한국 광복군 연합군의 비밀요원
일본 패망을 앞당긴 삼총사중 둘째.

무타구치 렌야의 활약이 너무나도 특출난 나머지 한국에서는 묻혔으나, 일본에서는 삼대오물(三大汚物)의 한 명으로 꼽고 태평양 전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까이는 인물이다. 구 일본군 패장들을 무조건 쉴드 쳐 주는 현대 일본의 극우들마저도 이 셋은 절대로 안 건드린다. 대단한 업적이다


2 출세가도를 달리다

1880년 후쿠오카에서 고쿠라 번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세에 육군사관학교 출신 엘리트 장교로 임관하여 러일전쟁에 제12사단 예하의 보병 제14연대 제 3대대 부관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러나 1904년 10월 8일의 사하 전투에서 얼굴을 다쳤고, 이 부상으로 왼쪽 눈을 크게 못 뜨는 후유증을 얻었다. 그래도 전공을 인정받아 무척 젊은 나이에 영관에 올랐다. 그렇게 러일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최대 파벌 중심인 육군대학교을 졸업하고 출세 가도를 달린다.

1910년대에는 찬드라 보세와 접견하여 뒤에 임팔 작전의 동맹인 자유 인도군과의 접점도 있었고, 필리핀 등 인도차이나에서 외교 및 첩보 활동을 하며 착실하게 경력을 쌓아나갔다. 이후 1920년대에는 일본 육군성 항공과장을 지냈으며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을 진압할 당시에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군부 세력의 선봉으로 활약했다. 이후 내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장관에 올랐다.

육군참모총장, 육군 장관, 육군 교육총감이라는 3대 요직을 모두 경험한 엘리트였고 최종 계급은 일본 육군 원수였다.


3 막장의 시작

육군대장으로 승진한 스기야마 하지메의사하야시 센쥬로 내각에서 1937년 육군대신으로 취임해 제1차 고노에 내각 때까지 유임했다 만주사변 당시 육군 차관이었으며,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중국은 1개월이면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 주전파로 들고 일어나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장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관동군은 전쟁 초기 기세 좋게 중국으로 밀고 들어가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과 옛 수도 베이핑(오늘날의 베이징)을 순식간에 함락했다. 하지만 장쉐량의 협박에 뒤늦게 정신 차린 장제스마오쩌둥국공합작으로 단결하자 상하이, 난징 등 주요 도시와 거점만 확보한 일본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는 배후 지역의 게릴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1938년에는 장관직을 사임하면서 다시 군사참의관을 했다가, 1938년 12월에는 북지나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취임하여 산시성의 공략전을 지휘했다. 그러나 전쟁을 풀기는커녕 점점 더 개판으로 바뀌어갔다.

1941년 9월, 석유 수출과 대 미국전을 계획하는 어전 회의에서 스기야마는 도조 히데키와 함께 작전을 설명하며 "진주만 공습미국은 3개월이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때 히로히토가 스기야마에게 반대하는데, 배석했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수기로 기록한 당시의 대화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히로히토: 일본미국 사이에 일이 터지면 육군은 어느 만큼의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시오?
스기야마: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스기야마 그대는 중국사변 발발 당시 육군대신이었소. 그때 그대가 중국사변 이후 우리 일본이 중국을 1개월 정도면 정리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짐은 아직 기억하오. 그렇지만 4년이나 질질 끌었고 아직도 정리를 못했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스기야마: 중국은 오지가 넓기에 예상과는 달리 작전을 못 폈습니다. 허나 폐하, 태평양은 도서 지역이기 때문에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뭐요? 중국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소이다!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소릴 하는 것이오?
-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스기야마는 히로히토에게 갈굼을 듣자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군인도 아닌 덴노가 더 작전을 잘 짜겠다

사실 중국보다 넓은 정도가 아니라 러시아보다도 더 넓다. 애초에 태평양의 면적은 지구상 모든 육지를 더한 것보다 넓다. 태평양은 바다 총 면적의 약 절반, 지구 전체 면적의 약 3분의 1, 러시아의 약 10배, 중국의 약 17배에 이른다. 그럼 4 X 17 년 정도면 태평양을 점령할수 있겠군

그래도 그를 위해 억지로 실드를 쳐준다면, 바다는 육지와는 다르게 높이가 일정하고 장애물이 없기에 같은 면적이라면 바다를 관리하기가 더 쉬울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같은 면적의 바다라면.


4 임팔 작전의 결재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최종 승인은 도조 히데키가 했는데, 목욕탕에서 목욕하다가 결재를 했다고.

대부분의 참모장작전과장이 무타구치의 작전에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이 아닙니다.'라고 반대했으나, 스기야마는 이렇게 말하며 결재를 통과시키라 명령했다.

"작전 입안에 참여한 무타구치 장군과 데라우치 장군의 얼굴을 봐서라도 결재해 주게."

여기서 데라우치는 데라우치 히사이치, 제1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장남. 즉, 나라의 흥망이 걸린 대작전을 입안 참여자가 자기랑 같은 일본 육군 내 최대 파벌이었던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 출신 파벌이라며 어설프게 확인하고 승인했다. 후대에 개념없다고 까이는 도조 히데키임팔 작전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라 단언했으며, 히로히토는 "각료들이 모두 찬성했다면 짐 역시 따르겠지만,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작전인가?"라 되물었다고.

스기야마가 이런 병크를 저질러, 무타구치 휘하에 있던 10만 가까운 남방 전선의 일본군 중 1만 5천 명 정도만 갖은 고생 다 하고 귀환했다. 그래서 다른 전선보다 희망이 있었던 인도차이나 남방 전선은 완전히 무너져, 1945년 초 영인군과 버마 국방군에게 지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완전히 내줬다.

그래도 일본군의 파벌을 이용해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으로, 1945년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서자 본토 결전을 위한 제1총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자신이 무능해서 패전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은 권총으로, 부인은 단도로 부부가 나란히 자살했다. 사실은 독립운동 행적이 들통나서라 카더라 죽으려면 혼자 그러지, 왜 노기 마레스케처럼 애꿎은 부인까지 끌어들여?


5 후대의 평가

전쟁이 끝나자 전후의 책임을 지고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자신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유서를 남겨서인지 다른 삼대오물보다는 낫다고 쉴드를 받는 편. 그렇다고 긍정적인 평가가 대세는 절대 아니지만, 책임을 느껴 자살한 사람은 욕하기도 좀 그런지라… 전쟁에서 다른 사람들은 사지로 몰아 넣고 전후에 자기들만 악착같이 살아남던 다른 삼대오물 무타구치 렌야도미나가 교지에 비하면 그나마 일말의 양심을 가진 군인으로 본다.[1]


그가 전쟁 중에 남긴 메모는 '스기야마 메모'라 하여 한국 광복군일본군의 당시 첩보 상황을 알려주는 귀중한 전사 사료로 보존받는다.
  1. 그 다른 둘도 무능했을 뿐, 학살 명령을 무시하는 등 양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