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Maintenance script (토론 | 기여)님의 2017년 2월 3일 (금) 06:12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4.jpg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눈을 감고 지휘한다. 원래 지휘는 단원과 눈을 마주치면서 교감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말이 많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미 오케스트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완전한 교감을 이루었기에 눈을 감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눈 감고 지휘하다가 바닥에 구른 것은 흑역사.[1]

Herbert von Karajan
1908년 04월 05일 ~ 1989년 07월 16일

라데츠키 행진곡, 1987년 빈 신년음악회에서.

베토벤 교향곡 제3번. 1982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립 100주년 공연 중. 이 공연 실황은 카라얀이 남긴 여러 영상물 중 최고봉 중 하나로 꼽힌다.

1 생애

1.1 젊은 시절

1.1.1 집안

그는 1908년 4월 5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라얀의 먼 조상은 그리스 출신이다. 1767년 카라얀의 5대조 게오르크 카라야니스가 그리스에서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카라얀의 선조들은 의료, 상업 계통에 종사하면서 귀족의 칭호까지 얻어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von(폰)이 붙는다. 카라얀의 아버지 Ernst von Karajan 역시 잘츠부르크의 의사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귀족제도 폐지되며 귀족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어린 시절 카라얀의 본명은 Heribert Ritter von Karajan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는 제정의 폐지됨과 함께 귀족의 특권도 폐지되었으며, 귀족의 성 앞에 쓰는 von도 소멸되었다. 카라얀의 성 앞에 붙는 von도 공식적으로는 호적(?)에서 사라졌으며, 이때 퍼스트 네임도 Heribert에서 Herbert로 바꾸었다. 1984년 11월 내한했던 카라얀의 여권에는 Herbert Karajan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성 앞에 von을 계속 사용한 것은 예술가로써 일종의 예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 안네 조피 폰 오터 등도 von을 사용하고 있다. 반면 오스트리아 황실 가문 출신의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von을 사용하지 않았다.

1.1.2 유년 시절

그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과의 경쟁심 때문이라고 한다. 카라얀은 몸집이 작아 덩치가 큰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피아노를 시작한 것도 그런 경쟁심에 의해서라고.(또한 카라얀의 내성적인 성격도 한몫하였다.) 카라얀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했지만 건초염으로 추정되는 손가락 기능 이상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1.3 대학 시절 (1926~1929)

결국 카라얀은 1926년 빈 공대(Technical University of Vienna)에 진학하였다.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카라얀은 공대에 다니면서 효율을 높인 엔진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공대를 그만두고 빈 음대(University of Music and Performing Arts, Vienna)에 들어가게 된다. 건초염 등으로 인해 피아니스트로 성공에 한계를 깨달았고 아울러 잘츠부르크에서의 은사인 파움가르트너의 조언 등을 받아들여 지휘자의 길을 택한다.

1929년 빈 음대를 졸업한 직후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지휘자로써 데뷔하였다. 이때 지휘한 작품은 무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돈 주앙,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5번 등이었다. 이 때 청중 가운데 있었던 울름 오페라극장의 극장장의 초빙을 받아 독일 울름 가극장의 지휘자가 된다.

1.1.4 울름 오페라극장 (1929~1934)

당시 울름 오페라극장의 상황은 매우 열악해 단원이 약 20명 정도, 합창단은 16명에 불과했다. 가극장의 지휘자로 취임하기 직전에 극장장의 초대로 울름 오페라극장이 야심차게 준비한 로엔그린 공연을 본 카라얀은 신세계를 경험하면서 거의 기절할 뻔 했다고 한다. 악보상으로 아홉 대의 트럼펫이 찬란한 팡파레를 터트리는 장면[2]에서 단지 한 대의 트럼펫만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학 시절 빈 국립 오페라를 견학하면서 공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이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은 20대 전반을 울름에서 보내면서 나름 성실하게 임했다. 없는 악기는 카라얀 자신이 피아노를 치며 메워 나가야 했고, 때로 큰 악기들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 직접 도와야 했다. 훗날 카라얀이 유명해졌을 때, 이런 형편없는 악단을 지휘한 것이 음악성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나라는 질문에 대해, 자신은 항상 마음 속에만 들리는 다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당시 독일은 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써 배상금을 갚느라 경제학원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최악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던 상황[3]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취업을 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런 일이었다. 카라얀이 울름 오페라극장에 취임했던 1929년은 세계 경제 대공황이 발생한 해로, 간신히 회복세로 접어들던 독일 경제가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다시 나락으로 추락하던 상황이었다. 세계 경제 대공황 당시 빈 필, 베를린 필과 같은 오케스트라조차도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빈 필은 미국의 부호에게 지휘를 맡긴 흑역사가 있고, 베를린 필도 스스로 민간 오케스트라로서 자주성과 자부심을 포기하고 정부 보조금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1.1.5 아헨 오페라극장 (1934~1938)

1933년 4월 8일에 나치에 입당하고 5월 1일에 두번째 입당절차를 밟은 후[4] 1934년 아헨 독일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다.[5] 독일 최연소 음악감독이라고 한다. 당시 상당수의 지휘자들이 나치 집권을 피해서 또는 경제난을 겪고 있던 독일을 떠난 덕을 좀 봤다고 할 수 있다.[6] 소도시 울름과 달리 큰 도시였던 아헨은 오페라극장 또한 어느 정도 규모가 있고 시설이 충분히 갖추어 진 곳이었기 때문에 카라얀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다. 카라얀은 훗날 아헨에서의 시절을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기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카라얀의 이름도 빠르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헨 오페라극장에 부임한 직후인 1934년 여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1937년에는 최고의 오페라 극장인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였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에 초빙되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성공을 거두었다.

1.1.6 베를린 국립 가극장과 제2차 세계대전 (1938~1945)

1938년 드디어 제국의 수도 베를린에서 국립가극장과 베를린 필에 각각 데뷔했다. 특히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데뷔하면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신문에서 지칭한 '분더 카라얀' 즉 영어로 '원더풀 카라얀'은 이후 카라얀을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이 기사는 노장 지휘자들도 카라얀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오바했는데, 이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등을 분노케 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정식 음악감독이 되었다. 1938년 4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도 데뷔하였다. 메이저 무대에서는 신인이나 다를 바 없었지만, 이미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된 만큼, 베를린 필의 첫 초청에 대해서도 충분한 리허설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퇴짜를 놓기까지 했다. 결국 그래도 몇 달 후 베를린 필에 데뷔하게 되었는데,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한 순간 베를린 필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악단임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히틀러가 보는 가운데 자작 '영웅소나타'를 초연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아헨에서 알게된 11년 연상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첫 번째로 결혼한다.

1942년 재력자 집안 출신의 이혼녀 아니타 귀터만과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그녀는 유태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나치당 내부에서 활동에 일부 제약을 받기도 했다.[7]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는 카라얀을 신진 지휘자의 대표격으로 선전했다. 푸르트벵글러가 괴벨스의 지지를 받은 반면, 카라얀은 상대적으로 괴링의 지지를 받았다.[8] 히틀러는 푸르트벵글러를 항상 높이 평가한 반면에 카라얀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히틀러나 괴벨스는 카라얀에 대해 '아무래도 푸르트뱅글러보단 급이 아래'라는 평을 내리고 있었다.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그동안 전쟁에 징집되지 않았던 카라얀이었지만, 전쟁 말기에 징집 대상이 확대되자, 그동안 징집 면제를 받아왔던 카라얀도 군입대에 대한 여론의 압박을 받았다. 기왕 입대할 거라면 공군으로 가서 파일럿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괴링과의 연줄을 이용하여 공군에 들어갈 생각도 했다.[9]

그러나 결국 전쟁 말기에 푸르트벵글러 등과 마찬가지로 제3제국을 탈출하고 말았는데, 밀라노에서의 콘서트를 핑계로 베를린을 떠난 후 종전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밀라노와 인근 북부 이탈리아에 머물렀다.
밀라노에서는 전재산을 잃어버리면서 알거지가 되었는데, 카라얀 부부가 투숙했던 호텔방이 밀라노 민병대에게 털렸기 때문이다. 망했어요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했지만, 길거리를 배회하던 중 다행히 한 이탈리아 음악 애호가의 호의로 그의 집에 머물게 되어 숙소를 해결할 수 있었다. 카라얀의 아내는 영어 통역을 하면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카라얀 자신은 악보 공부와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면서, 지휘자리를 알아봤는데 여의치 않아서 밤무대 같은 곳에서라도 지휘할지 고민했다고 한다. 이 시절 카라얀은 매우 열심히 공부했는데, 매일 자신이 목표로 한 양의 공부를 다 하지 못하면 스스로 끼니를 거름으로써 스스로를 벌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꽤나 능숙하게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종전 후 간신히 지인들과 연락이 닿은 카라얀은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향해 출발했는데,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어서, 기차 안에서 통역 알바를 하면서 여비를 벌기도 했고, 중간 경유지의 삼류 극장에서 지휘를 해서 여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1.2 전후 재기 (1945년 ~ 1954년)

1.2.1 활동금지

종전 후 독일 내에 머물렀던 다른 거물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약 2년간 연주활동이 제한되었다. 활동 금지 기간 동안 푸르트벵글러 등 다른 지휘자들과 마찬가지로 카라얀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 카라얀에게 구세주로 나타난 이가 바로 EMI의 명프로듀서 월터 레그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라얀을 주목해 왔던 레그는 미래에 녹음할 연주들에 대해 미리 선지불하는 형식으로 카라얀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다. 1946년 1월부터 카라얀과 레그는 이미 빈 필과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비록 카라얀이 연주활동을 금지당한 상황이었지만 레그는 녹음은 공식적인 음악회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연합국의 제재를 피해갈 수 있었다.

1948년 카라얀은 연합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무혐의를 인정받아 지휘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컴백한 후 여러 곳에서 활동했지만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극장,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루체른 페스티벌이다.

1.2.2 푸르트벵글러의 견제

카라얀이 활동이 재개됨에 따라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도 다시 시작되었다.[10] 베를린 필에서는 물론이고 빈 필과 국립 오페라극장에서도 푸르트벵글러는 자신과 카라얀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엄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푸르트벵글러는 나치로 부터 빈 필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바 있었기 때문에 빈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카라얀은 푸르트벵글러의 이러한 처사에 대해 지인들에 대해서도 불평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자리라고 말하며 크게 연연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을 모두 보유하고 있던 EMI의 월터 레그는 두 지휘자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과 절친했던 레그마저 점차 꺼려하였다. 결국 푸르트벵글러의 녹음 프로듀서는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11]

1.2.3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950년대 카라얀의 음반 녹음은 주로 EMI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로 이루어졌다. 음반 산업의 미래를 내다본 월터 레그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느껴 자신이 직접 영국 내의 우수한 연주자들을 접촉, 모집하여 1946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카라얀은 1948년 이 악단과 첫 녹음을 시작했는데, 푸르트벵글러의 견제로 빈 필을 지휘하기 힘들게 되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밀접한 관계[12]를 맺게 되었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까지 카라얀의 사실상 모든 녹음이 이 악단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1948년부터 1955년까지 카라얀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사실상 이끈 지휘자였지만 상임지휘자 등의 정식 직책은 갖지 않았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이기도 해서 1959년까지 상임지휘자가 없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 전용 오케스트라로 창단되어 처음에는 스튜디오에서 녹음만 했고, 대중들 앞에서 연주하는 일은 없었지만, 카라얀과 레그는 악단의 성장을 위해서는 공개 콘서트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아 공개 음악회도 열기 시작했다. 이어 1952년에는 유럽 순회 공연까지 가졌다. 이 때 이탈리아에서 공연을 직접 관람했던 토스카니니는 큰 감명을 받아 나중에 직접 런던을 방문하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을 남겼다. 토스카니니가 NBC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정규 녹음이다. 이 유럽 순회 공연의 마지막 공연은 베를린에서 열렸는데, 이는 언젠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이라는 야심을 갖고 있었던 카라얀의 포석이었다. 이 순회 공연에 사비를 털어 지원했던 월터 레그도 카라얀의 이러한 바램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연주회를 "카라얀을 베를린으로"라고 불렀다.[13] 실제로 이 공연은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종전 후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 공연을 통해 카라얀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또 카라얀은 연주회 뒷풀이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친목을 도모할 기회를 마련했는데, 이자리에서 베를린 필의 핵심 단원들과 친분을 쌓아두기도 했다. 이 공연 이후에 카라얀을 베를린 필 정기연주회에 초청할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 더욱 높아졌고 결국 베를린 필은 푸르트벵글러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1953년 11월 카라얀을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했다.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어느 선 이상 깊이 진전되지는 못했다. 카라얀의 목표는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것임을 월터 레그도 잘 알고 있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악대 복무 요원들을 중심으로 창설된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나치 치하의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였던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었던 듯 하다. 1955년말 미국 순회공연에서 카라얀과 단원들 간에 사고가 터졌는데, 카라얀이 순회공연 중 어떤 이유로 기분이 상해 청중들의 커튼 콜에 응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다음 리허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 참전군인 출신의 한 바이올린 단원이 일어서서 카라얀이 커튼 콜에 응하지 않은 것은 영국의 동맹국으로 2차 세계대전을 도와준 우방인 미국 시민들에 대한 결례라고 비난하면서 카라얀이 미국 청중들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이었다. 카라얀에게 항의한 단원은 이 순회공연을 위해 충원된 임시단원이었기 때문에 다행히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갈등은 확대되지는 않았고 카라얀도 이 사건을 문제삼지는 않았다. 순회공연 당시 플룻 수석이었던 단원은 영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원에서 카라얀의 지시를 무시하고 템포보다 약간 늘어지게 연주했는데 카라얀이 의외로 암말 안하더라며 호기롭게 말하기도 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1955년부터는 오토 클렘페러가 이 악단을 지휘하는 빈도가 크게 늘었다.

어차피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내정된 카라얀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를 청산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견한 일이었다. 1960년 카라얀과 EMI와의 계약 연장이 불발되면서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관계는 완전히 끝을 맺는다.

카라얀은 훗날,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베를린 필과 달리 직업으로써 음악을 대했고 악보에 나타난 것 이상을 들려주지 못하는 악단이었기 때문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헤어지는 것이 슬픈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1.2.4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녹음용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실제 콘서트를 위한 카라얀의 악기는 주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담당했다. 카라얀은 1948년말부터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 시작하였는데, 곧 푸르트벵글러에 의해 빈 필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빈에서의 활동은 빈 심포니로 집중되었다. 당시 푸르트벵글러의 빈 필과 카라얀의 빈 심포니의 경쟁은 빈 시민들을 즐겁게 했다. 1950년 카라얀과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독일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이웃 독일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의 지원도 받은 투어였다. 그러나 음반 녹음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50년대 당시 빈 심포니의 기량은 썩 좋지 않았다. 당시 빈 심포니의 해외공연 리뷰를 보아도 연주력에 대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다. 어떤 비평가는 적지않은 청중들이 빈 필의 공연으로 잘못 알고 왔다가 실망하여 돌아갔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카라얀은 1950년대 초중반 동안 빈 심포니의 사실상의 수장이었지만 정식 직책에 취임하지는 않았다.[14]

1.2.5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1951년 한스 크나퍼스부쉬와 함께 전후 재개된 바이로이트 페스트벌의 지휘자로 선임되었다. 바이로이트 측에서는 처음에 푸르트벵글러에게 접촉했다가 거절당했는데, 나중에 대신 카라얀이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푸르트벵글러가 갑자기 페스티벌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미 카라얀과 크나퍼츠부쉬를 섭외하여 스케줄을 정한 페스트벌 측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이자 개막 콘서트라도 지휘하겠다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 그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 공연이었다. 카라얀은 바이로이트에서 51년에는 니벨룽겐의 반지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52년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그러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는 52년을 끝으로 2시즌 만에 결별했다. 바이로이트 경영진과 의견 차이와 신바이로이트 연출에 대한 이견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카라얀은 빌란트 바그너가 연출한 텅 빈 무대를 보고는 도저히 악상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카라얀과 바이로이트의 이른 결별은 음악애호가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담으로 바이로이트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유명한 합창 지휘자 빌헬름 피츠는 카라얀이 바이로이트에 추천한 사람이었다. 피츠와 카라얀은 아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1.2.6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의 독일부문 음악감독이 되어 이탈리아 오페라 지휘도 재개했다. 여기에는 사바타와의 친분이 작용하였다. 밀라노에서 첫 시즌에는 직함대로 독일 오페라로 레파토리가 제한되었지만 이듬해부터는 직함이 무색하게 독일, 이탈리아 오페라를 가리지 않고 지휘하게 되었다. 이 시절 카라얀은 칼라스를 비롯하여 여러 정상급 이탈리아 성악가들과 알게 되었고, 나중에 빈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을 때, 밀라노의 이탈리아 가수들을 빈으로 초빙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15]

1.3 푸르트벵글러, 토스카니니와의 관계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를 존경하고 그 둘의 음악을 융합하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해왔다. 카라얀은 그들의 음악을 매우 열심히 연구했던 것 같다. 카라얀의 지인의 증언에 따르면(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카라얀은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된 이후에도 푸르트벵글러의 음악회에 항상 변장을 하고 찾아와서 들었다고 한다.

카라얀이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트벌의 탄호이저 공연(토스카니니는 1931, 32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지휘했다.)을 보기 위해 자전거로 수백킬로를 달려 바이로이트까지 갔다고 한다. 카라얀이 만년의 인터뷰에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젊은 시절 고향 잘츠부르크의 공연장에서 피아노를 치려고 들어갔는데 그 방에 우연히 토스카니니가 들어왔다고 한다. 리허설이 뜻대로 안되서 화가 나있던 토스카니니는 그 방에 카라얀이 있는지 모른 채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했다고 한다.[16][17] 토스카니니가 공연하러 왔다는 소문을 접한 젊은 카라얀이 그의 연습 장면을 관찰하기 위해 일부로 공연장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월터 레그에 따르면 1952년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에로이카를 녹음했을 때 카라얀은 대기실에서도 계속 토스카니니의 녹음을 듣다가 지휘대에 올랐다고 한다. 이 녹음 직후에 카라얀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유럽 투어를 떠났는데, 밀라노 공연에서 카라얀의 에로이카를 들은 토스카니니는 크게 감명을 받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 계약까지 맺었다. 토스카니니가 만년에 NBC 오케스트라 이외의 악단과 남긴 유일한 녹음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토스카니니에 대한 음악적인 흠모에도 불구하고 토스카니니와 인간적인 접촉을 시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토스카니니 뿐만 아니라 다른 선배 거장들과 굳이 일부러 인연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단 한번 토스카니니가 신예 카라얀에게 조언을 해준적이 있는데 "크레센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부터 포르테까지 단 한번에 밀어붙어야한다"는 조언으로 카라얀은 이 원포인트 레슨이 지휘실력을 쌓는데 매우 주요했다고 회고했다.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과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편이다. 푸르트벵글러가 극도로 카라얀을 혐오했기 때문에(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을 K라고 불렀다고 한다.) 카라얀은 종전 이후부터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필과 빈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다. 빈 필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푸르트벵글러는 빈 필 단원들에게 자신과 카라얀 중에 택하라고 했다고 한다.

1.4 베를린 필과 빈 국립 가극장의 대권을 잡다 (50년대 중후반)

1954년 11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사망 후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대권을 잡았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카라얀이 상임지휘자가 된 것은 당시 카라얀이 대세였다 뭐 이런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사정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고 복잡한 역학 관계가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언론과 음악계에서는 카라얀 뿐만아니라 첼리비다케, 요훔, 뵘, 카일베르트 등 다양한 인물들이 비중있게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를린 필 단원들도 여러 지휘자들에 대해 열띤 논의를 벌이고 있었다.

요훔은 자신이 차기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것으로 확신하여 베를린에 집을 알아보러 다녔다고 한다. 첼리비다케는 이미 베를린 단원들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끝에 관계가 파국에 이르러 차기 후보에서 완전히 제외된 상태였다. 뵘은 당시 빈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어 베를린보다는 빈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카라얀의 경우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푸르트벵글러 때문에 베를린 필을 거의 지휘하지 못했고, 푸르트벵글러가 죽기 몇 개월 전에서야 겨우 베를린 필의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 만년에는 건강 문제로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하지 못했으며 베를린 필 단원들은 이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상임지휘자의 의무로서 좀 더 많은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내지는 거의 강요 수준)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953년에는 베를린 필을 자주 지휘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푸르트벵글러도 베를린 필에 한발 양보해서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지휘해도 자신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과의 유대관계는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상당수의 베를린 필 단원들은 많은 음반을 녹음하던 카라얀의 돈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첼리비다케와 베를린 필이 멀어지게 된 배경에는 레코딩을 혐오하는 첼리비다케의 성향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데는 특히 1955년 베를린 필의 미국 순회 공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0주년인 1955년 독일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독일이나 미국 양측에 큰 이슈였다. 당시 아데나워 서독 수상도 이 순회공연에 각별하게 신경을 쓰고 있을 정도였다. 2차 대전에서의 적대관계 직후 찾아온 냉전 체제 하에 냉전의 최전선에 서며 전후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았던 서독은 이 순회공연이 미국 국민들의 대독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 순회 공연은 당연히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54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면서 순회 공연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공연이 추진되던 당시에도 푸르트벵글러의 건강에 대한 우려가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푸르트벵글러에게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한 대비도 미리 논의되고 있었다. 이 공연을 추진하던 기획사와의 계약에는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지 못한다면 기획사가 승인하는 다른 지휘자가 지휘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자 기획사가 대신 요구했던 유일한 지휘자는 카라얀이었다. 베를린 필 측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전에 유사시에 카라얀에게 미국순회 공연을 맡아달라고 언질을 하기도 했다.[18] 미국 공연을 3개월 앞둔 상황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였고, 미국순회공연의 지휘자 자리는 카라얀에게 돌아갔다. 카라얀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푸르트벵글러 사후 약 2주간의 논의 끝에 카라얀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의 계약은 세부조건의 합의에서 난항을 겪어 쉽게 체결되지 못했다. 1955년 2월말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미국 순회 공연을 떠날 당시에도 카라얀은 상임지휘자직을 보장받지 못한 상태였고 베를린 필과 관련된 아무런 직함도 없었다. 그러나 카라얀은 일생일대의 이 기회를 잘 활용했다. 카라얀은 베를린 시의회와 베를린 필 운영진을 조르고 구슬리고 협박한 끝에, 마침내 이 중요한 순회공연을 떠나기에 앞서 진행된 공식 인터뷰에서 "카라얀이 푸르트벵글러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는 발언을 하도록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카라얀은 대중에게 자신이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에 확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심어주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여론은 카라얀의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 취임을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미국 순회공연 이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측은 세부적인 사항에서 이견이 있어 계약에 싸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특히 카라얀은 다른 권리를 약간 포기하고서라도 자신의 계약기간을 종신으로 확정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종계약은 1956년 4월 25일에서야 이루어졌다.

평생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염원해왔던 카라얀은 자신에게 돌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노력했다. 카라얀은 훗날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살인이라도 저질렀을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베를린 필과 미국 순회공연을 떠나기 직전에 카라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카라얀은 그토록 염원했던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촌각을 다투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중한 어머니를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이를 두고 고향 잘츠부르크에서는 말이 무성했다고 한다.[19]

베를린 필과 싸인을 하기도 전인 1956년 3월 카라얀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의 파격적인 제안을 받아들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57년에는 홧김에 사표를 낸 칼 뵘의 뒤를 이어 빈 국립 가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였다. 그러자 베를린에서는 카라얀이 빈 국립가극장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베를린 필을 이용했다고 분개하는 기사가 났다. 그러자 카라얀 본인이 직접 나서서, 정말 빈의 지휘자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면 베를린 필과 종신으로 계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베를린의 여론을 진화했다. 카라얀은 1964년 극장 경영진과 마찰을 빚고 사임할 때까지 빈 국립 가극장에서 매우 열성적으로 활동했으며, 비판적인 세간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연출까지 했다.

1958년 10월 모델 출신의 금발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로 결혼하였다. 이 결혼은 카라얀의 남은 여생동안 지속되었다. 아니타와의 두번째 결혼 생활도 비교적 무탈하고 원만했지만, 아니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고, 언젠가는 카라얀과 이어질 것이라고 믿으며 수년간 기다려왔던 엘리에트의 노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엘리에트와의 세번째 결혼은 적어도 외부에 비춰진 모습으로는 화목하게 유지되었고, 엘리에트는 비록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은 없었지만 카라얀을 열심히 내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혼한 아니타와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엘리에트 폰 카라얀은 지금도 잘츠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카라얀의 막대한 유산과 지금도 매년 수십억씩 지급되는 음반 로열티를 받으며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

1.5 60년대

전후 EMI에 전속되어 활동해왔던 카라얀은 DG, DECCA와도 계약을 체결하여, 1959년 3월에 두 음반사와 각각 첫 녹음을 시작했다.

베를린 필과 전속계약을 맺고 있었던 DG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부터 지속적으로 카라얀에게 접촉해왔다. 마침내 카라얀이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자 그를 영입하기 위해 회사의 등골이 휘는 거액을 제시했고, 마침내 카라얀과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한편 카라얀은 DG와 계약은 맺은 것과 비슷한 시기에 DECCA와도 계약을 맺었다. DG가 베를린 필과의 녹음을 위한 방편이 있었다면 DECCA와의 계약은 당시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던 빈 필(빈 국립 가극장)과 녹음을 위해서였다.

반면 종전 이후 지속되던 EMI와의 계약은 더이상 갱신되지 않고 1960년에 종료되었다. EMI와의 계약이 종료된 것은 월터 레그와의 관계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처음에 카라얀에게 은인으로써 다가온 레그는 한동안 레코딩 계획을 주도했으며, 카라얀은 레그의 계획에 따라 녹음을 진행했다. 그러나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지휘자가 된 이후 카라얀의 위상이 급변함에 따라 레그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실제로는 카라얀과 EMI측 모두 재계약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카라얀은 DG, 데카와도 계약을 맺고 있었던 만큼 이제 레그의 영향력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당시 EMI 경영진은 계약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한 끝에 결국 재계약을 포기했다. 주요한 이유는 카라얀이 높은 개런티를 요구다는 점, 당시 사내에서 월터 레그를 껄끄럽게 여기던 경쟁자들이 레그의 입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점 등이 거론되고 있다. EMI와의 계약이 끝나면서 10여년간 지속되어왔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도 자연스레 청산되었다.

1963년 새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개관하였다. 개관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공연했다. 새 베를린 필하모닉 홀은 한스 샤룬이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며, 건축설계학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한다. 한스 샤룬의 설계는 카라얀 자신이 직접 뽑은 것이다. 그러나 완공된 필하모니 홀은 음향에서 다소 문제점을 노출했으며, 지속적인 보완을 거쳤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역시 음향 문제 때문에 전용 홀이 완공되고도 70년대 중반까지 10년 이상을 포츠담의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녹음을 진행했다. 70년대 중반 베를린 필이 필하모니 홀에서 녹음을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음향상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공항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녹음을 진행하기 어려웠던 현실적인 측면도 크다.

1964년 행정 당국과의 마찰로 빈 국립 가극장 음악 감독직을 사임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 측과 감정의 골이 상한 카라얀은 자신이 눈감을 때까지 조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카라얀은 실제로 1977년까지 빈 국립 가극장에서 지휘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 빈 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만 지휘했다.

1964년 카라얀이 빈 국립 가극장을 사임한 직후, 고향이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측이 전권을 위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카라얀에 접근하였고, 마침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카라얀은 오스트리아에서 지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 발언을 빈에서 지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축소하였다.

카라얀은 1967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트벌을 창설하였다. 이는 이미 사이가 틀어진 바이로이트 이외의 극장에서 카라얀 자신의 이상대로 바그너를 지휘하고자 했던 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여름에 개최되는 잘츠부르크 페스트벌 기간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겹치기 때문이고 최고 수준의 바그너 가수들을 섭외함에 있어서 바이로이트와 경쟁해야 뺏겨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부활절 기간에 열리는 별도의 페스티벌을 창설하게 된 큰 원인으로 보여진다. 67년부터 4년간 매해 차례로 발퀴레, 라인의 황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을 공연함으로써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공연과 음반녹음을 완결했다.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은 음반 녹음을 병행함으로써 제작비를 충당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실제 공연보다 반년 정도 앞서 음반 녹음 세션을 가졌다. 녹음을 마친 후에 배우들과 연출을 준비하는 단계로 넘어갔는데 이때 카라얀은 피아노 반주 대신 먼저 녹음된 음원을 틀어놓고 연출을 연습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당시에는 전래없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페라 연출계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미리 녹음된 음반은 시중에 발매되기에 앞서 페스티벌 청중들에게 카라얀 친필 사인이 있는 한정판으로 먼저 발매되었다.

또 카라얀은 오페라 제작비를 절감하면서 세계 유명 극장에서 최고수준의 오페라 공연을 공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명 극장 간의 공동제작을 구상해왔는데,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면서 실제로 이를 구현했다. 즉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제작한 프로덕션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 그대로 옮겨서 상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카라얀이 직접 뉴욕 메트 오페라 데뷔가 이루어졌다.[20] 하지만 각 오페라 극장간 스케줄을 조율하는 문제 이외에도 극장간 무대 규격이 다른 문제 등 현실적인 제약이 많아 카라얀의 이러한 구상은 곧 폐기되었다.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 끝나고 70년대에 들어선 후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트벌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오텔로, 파르지팔 등을 공연했으며, 음반 녹음과 병행하려는 방식을 이어나갔으나 음반사의 이해관계와 항상 맞아떨어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카라얀은 57년 베를린 필과 일본 순회 공연에서 자신의 공연이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영상 매체에 크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60년대 중반에 방송용 음악회 녹음을 한 후 흑백으로 슈만 교향곡 4번, 베토벤 교향곡 5번, 드보르작 교향곡 9번 등을 촬영을 하였고, 이어 컬러로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녹화하였는데 Hugo Niebeling의 지나치게 난잡한 카메라 워크에 실망하여 이후 카라얀 자신이 직접 촬영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카라얀 스스로가 카메라 기술을 배웠다. 이듬해에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녹화를 거쳐 70년대초에 유니텔을 통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 등 영상물의 촬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이후 발매되는 영상물들은 음향과 영상미를 출중히 보여주는 공연동영상의 모범 사례들로 남게 된다.

냉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는 베를린 필이 소련의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공연함으로 국제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이 연주회에는 쇼스타코비치를 비롯한 소련의 많은 음악가들이 참석하였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빗발치는 요구 때문에 수백장의 입석표를 추가로 발행했다.[21] 소련 당국은 프로그램은 연주회 프로그램에 서베를린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표기했고[22] 첫 공연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라얀은 두번째 공연에서 무대 위에 등장하여 쳄발로에 앉은채 연주를 시작하지 않으며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한참 후 관계자가 나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라는 것을 공지한 후에야 카라얀은 지휘를 시작했다고 한다.

1.6 70년대

1969년 샤를 뮌슈의 후임으로 1년여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재임했다.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과 빈 필 이외에는 거의 지휘를 하지 않았던 카라얀이 듣보잡 신생 관현악단인 파리 오케스트라를 맡은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파리 오케스트라는 카라얀이 맡기 불과 1년전에 창설된 뉴비 악단이었는데, 자칭 문화대국 프랑스가 자국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문화대국이라는 자존심에 걸맞는 명문 교향악단을 만들겠다는 목표하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1968년 창설되었다. 프랑스정부의 지원과 더불어 프랑스 출신인 카라얀의 와이프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근래에 발간된 한 서적은 카라얀이 파리 오케스트라를 잠시 맡은 이유가 레코드사와 재계약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카라얀의 포석이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59년 첫녹음을 시작했던 카라얀과 DG는 60년대말 계약이 만료되어 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카라얀과 DG는 유리한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전개하고 있었다. 60년대 동안 카라얀과 베를린 필, 그리고 DG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을 위시하여 다양한 레퍼토리를 녹음하여 이미 주요한 레퍼토리는 다 녹음한 상태였다. 여기서 DG와 카라얀의 파트너쉽에는 약간의 이견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카라얀은 브루크너 교향곡을 새로 녹음하길 원했고 또 기존에 녹음한 레퍼토리의 재녹음을 원했다. 하지만 당시 DG의 정책은 다른 음반사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레퍼토리의 중복 녹음을 가급적 제한하는 것이었다. 지휘자 왕국이라는 별명 답게 DG는 카라얀 이외에도 많은 지휘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DG는 이미 요훔과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라얀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 곳이 EMI였다. EMI는 1960년 카라얀과 계약을 종료되었지만 그이전에 녹음된 카라얀의 음반들이 여전히 높은 판매고를 올리자 카라얀과 재계약하지 않은 것을 내심 후회하고 있었다. 60년대말 EMI의 경영진은 카라얀과의 계약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69년 EMI와 새로 계약을 맺은 카라얀은 파리 오케스트라와 프랑스 레퍼토리를 EMI에서 내 놓은데 이어 베를린 필과 차이코프스키 후기 교향곡 및 브루크너 교향곡 4번, 7번의 음반을 내놓았고 이 음반들은 매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얼마 후 DG도 카라얀과 재계약을 맺었다. 70년대 전반기에 DG와 카라얀은 기존에 녹음되지 않았던 슈만과 멘델스존 교향곡 전집, 말러 교향곡 5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등으로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한편 DG는 오페라 녹음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70년대 전반기에 카라얀은 DECCA에서 푸치니의 라보엠, 나비부인을, EMI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녹음했다.

카라얀은 여전히 기존에 녹음했던 유명작품들을 다시 재녹음하고 싶어했는데,EMI를 통해 재녹음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등이 높은 판매고를 올리는 것을 목도한 DG는 마침내 1975년 카라얀과 다시 포괄적인 재계약을 채결하였다. 이 재계약은 DG가 그동안 자재해왔던 재녹음과 오페라 녹음을 전면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사실상 카라얀이 하고 싶은대로 녹음할 수 있도록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재녹음을 하던 뭘하던 간에 카라얀이 경쟁사가 아닌 자사에서 음반을 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레코딩 프로듀서 역시 카라얀이 원하는 사람으로 구성하였는데, 카라얀은 EMI에서 알게 된 프랑스 출신의 미셸 글로츠를 중용했다. 75년부터 본격적으로 DG와 카라얀은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스키 교향곡 등 기존의 녹음된 주요 레퍼토리를 재녹음해 나갔으며, 또한 카라얀의 오랜 염원이었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녹음도 추진되었다. DG에서 원하는 관현악 곡을 마음대로 녹음할 수 있게 된 카라얀은 EMI에서 녹음 비중을 크게 줄였고 DG가 아직 오페라 녹음을 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 녹음은 계속 EMI에서 진행했다. 79년경 DG가 오페라 녹음에도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카라얀과 EMI의 녹음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70년대 후반 지휘대에서 넘어지는 사고 등을 겪으며 75년과 78년 두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이로인해 1975년 스케줄의 상당수가 취소되었다. 이후 걸음이 불편해졌고 80년대 이후에는 허리를 받치는 지휘대에 기대어 지휘하게 된다.

1977년에는 십여년만에 마침내 빈 국립 가극장에 복귀하여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지휘했고 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979년 디지털 녹음 방식이 도래하였다. 카라얀은 70년대 후반 기껏 재녹음했던 레퍼토리를 80년대에 다시 디지털로 재녹음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만약 디지털 녹음 방식 5년 정도 더 일찍 도래했다면 카라얀이 베토벤, 브람스,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작 교향곡들을 70년대말과 80년대에 반복해서 재녹음했던 것이 한 번으로 줄고 대신 다른 신규 레퍼토리의 녹음이 더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1.7 80년대 - 베를린 필과 불화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불화가 터진 것은 80년대 초 자비네 마이어 입단 사건이다. 자비네 마이어 이전에도 카라얀과 베를린 필 간에 불화는 있었다. 대부분 사건들이 자비네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관악기 수석단원을 뽑는 일과 연관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갈등들은 특히 비독일계 수석단원들 선발하거나 여성단원을 선발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23] 이미 1958년 카라얀이 폴란드 출신의 미셸 슈발베를 악장으로 영입할 때 단원들이 거부감을 표출한 적이 있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1964년 호른 수석의 선발 건이었다.[24] 베를린 필의 오디션에 응하여 통과한 첫번째 후보는 스웨덴 출신의 벤그트 벨프라게였다. 그는 몇 개월간의 수습 기간 동안 베를린 필의 수석자리에서 연주했다. 카라얀은 벤프라게의 연주에 만족했으나 베를린 필의 호른 단원들은 그가 베를린 필에 걸맞는 독일적인 소리를 갖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입단을 부결했다. 이것은 베를린 필이 카라얀에게 처음으로 No라고 말한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카라얀은 파리 순회공연을 취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유명한 전설의 게르트 자이페르트(Gerd Seiferd)가 나타나 호른수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1969년 쵤러의 후임으로 플룻 수석을 뽑을 때도 약간의 잡음이 있었다. 카라얀이 스코틀랜드 출신의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인 제임스 골웨이 우리가 아는 백발의 턱수염을 기른 플루티스트 제임스 골웨이 그분이 맞다 를 오디션에 초빙한 것이었다. 베를린 필 목관단원들이 타지 출신의 골웨이를 껄끄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명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 골웨이는 74년 퇴단한 이후 솔로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골웨이의 후임을 뽑을 때도 잡음이 있었다. 유력한 후보는 여성이었는데 카라얀은 이 여성 주자의 실력에 만족했지만 목관단원들, 특히 오보에 수석인 로타 코흐가 앞장서서 그녀가 베를린 필의 중압감을 이겨내기에는 멘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대해 결국 입단을 무산시켰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누적되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것이 자비네 마이어 사건이다. 클라리넷 수석 주자으로 카라얀이 지지했던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 필의 목관 단원들이 소리가 너무 밝고 오케스트라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하면서 마침내 사단이 난 것이다. 셸렌베르거, 칼 라이스터 등 목관단원들를 중심으로 베를린 필은 카라얀의 독단적인 성향을 비난했고, 만년에 꼬장꼬장완고해진 카라얀도 자신의 예술적 견해가 단원들에게 무시당한 것에 크게 분노했다.

84년 카라얀은 그해 연말까지 상임지휘자로써의 최소한의 의무인 정기연주회를 제외한 모든 녹음 일정과 순회공연, 외부 페스티벌 출연등의 부가적인 스케줄을 취소하였다. 당시 음반 녹음을 비롯한 외부활동으로 연봉의 다섯배의 수입을 올렸던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재정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빈 필은 84년과 85년 동안 카라얀과 차이코스키와 드보르작 교향곡 등을 녹음할 수 있었다. 베를린 필의 수뇌부였던 셸렌베르거(오보에 수석)와 겔러만 등은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카라얀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매일 논의하였는데, 꽤 효과적인 아이디어들이 튀어나왔고 대담하게 이를 실행에 옮겼다. 베를린 필 단원들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고 출연을 거부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텔레몬디알은 카라얀이 본인의 영상물 녹화를 위해 사적으로 설립한 회사였다[25]. 텔레몬디알과의 계약 파기는 카라얀이 자신의 영상물을 남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베를린 필 단원들이 카라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선택한 카드였다 엿 좀 먹어봐라. 카라얀은 텔레몬디알의 영상물 촬영에 참여한 댓가로 베를린 필에 높은 출연료를 지급하고 있던 터였다. 베를린 필 단원들이 고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텔레몬디알과의 계약을 취소하자 그들의 의도대로 이것이 카라얀에게 큰 심적 타격을 준 듯 하다. 카라얀은 사건 초반에는 베를린 필에서 자신의 권위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선에서 일이 수습되고 베를린 필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길 원했던 듯한데, 텔레몬디알 계약 취소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고 베를린 필에서 마음이 떠난 듯 하다.

나아가 베를린 필은 카라얀 이외의 다른 지휘자들과 녹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베를린 필 단원들은 DG와의 전속계약마저 파기했다. DG는 전속계약의 댓가로 베를린 필에게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40% 높은 로열티를 지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은 이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카라얀 없이도 잘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베를린 필의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어려움이 많았다. 베를린 필의 음반 녹음 제의를 받은 무티 등의 지휘자들은 대부분 카라얀과의 관계를 고려해 이를 거절했다. 가까스로 바렌보임의 지휘 겸 피아노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어떤 음반사도 카라얀의 황제 폐하심기를 거스르며 이 음반을 출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녹음은 몇 년 동안 발매되지도 못했다. 한편 이때 베를린 필과의 녹음에 응해준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 단원들에게 크게 환심을 사게 되어 차기 상임지휘자 후보 1순위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을 조장 확장한 것에는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베를린 필의 어처구니 없는 내부 규정이 한 몫을 했다. 이는 베를린 필의 총감독 슈트레제만도 지적한 것으로, 단원을 가채용할 때 상임지휘자가 참석해야 하지만 투표권을 비롯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식적인 수단이 전혀 없다는 점, 그러나 단원이 가채용을 거친 이후의 임명과 해고에 대해서는 상임지휘자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점, 오케스트라가 불합격으로 결정한 연주자를 총감독이 직권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점 등 이율배반적이고 상호모순적인 규정들이 난무하는 베를린 필의 내부 규정들이 사태를 확산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양측은 서로를 상처내기 위한 결정을 하면서도 이것이 규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항상 강조하였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등 당시, 이 갈등은 다분히 일부 단원들(목관 단원들) 중심으로 주도된 측면이 있다. 셸렌베르거, 라이스터, 코흐 등 목관수석들은 카라얀과 마찰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단원들이었다.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해당 악기의 최고의 명인으로 꼽히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단원들 가운데서도 이들의 예술적 위치는 남다를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베를린 필의 관악기 수석들은 베를린 필을 비롯한 여러 오케스트라들과 비일비재하게 협연하는 비루투오소 솔로이스트들이다. 오케스트라의 리허설 과정에서도 십여명 단위로 거의 일방적으로 지휘자의 지시를 받는 현악기 단원들과 달리 관악기 단원들은 개인이 한 파트를 담당하기 때문에 리허설 때 지휘자와 커뮤니케이션에서 적극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단원들의 개별 인터뷰를 보면 카라얀에 대해 우호적인 단원들도 대단히 많았던 것 같다. 28년 동안 콘서트마스터로 재직했던 다니엘 스타브라바는 카라얀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독재자'는 아니었으며 단지 음악에 대한 주관과 고집이 확실한, 강력한 지도자였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카라얀을 싫어하는 단원도 있었지만 다수는 카라얀을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이탈리아의 가벼운 스타일을 추구했던 아바도와 갈등이 훨씬 컸다고 말하고 있다. 25년간 트럼펫 수석을 지냈던 콘라딘 그로트 역시 카라얀을 싫어했던 사람도 있지만 좋아하는 단원들도 많았으며, 자신은 카라얀의 의견은 거의 법과 같이 신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호른 단원 스테판 예치어스키도 카라얀과 호른 파트는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였고 적어도 자신과 카라얀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84년 11월 일본을 거쳐 최초의 내한 공연을 가졌다. 당시 자비네 사건이 터지고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부가활동을 보이콧한지 근 반년만에 다시 복귀한 직후였기 때문에, 이 아시아 투어는 해외음악계에서도 제법을 관심을 모았었다. 일본으로 공연가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카라얀이었기에 아시아 투어에 임박해서 베를린 필에 복귀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의 시작 부분에서 앙상블이 엉켜서 중지하고 다시 처음부터 연주하는 망신을 겪기도 했는데,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갈데까지 간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나머지 연주는 좋았으며 DVD로까지 발매되기도 하였다. 며칠 후에 있던 내한 공연도 큰 찬사를 받았다. 내한 당시에 카라얀 부인이 지갑을 잃어버렸는데, 예상치 않게도 지갑을 되찾게 되어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내한 당시 카라얀은 외부인이 리허설을 몰래 참관하다가 걸리는 일이 발생하면 모든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해를 넘겨 85년이 되어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수습단계에 들어갔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라얀은 빈 필과의 활동을 점차 늘려갔다.

1985년 빈 필, 빈 징베라인과 함께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하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 미사에서 모차르트의 대관미사를 지휘하였다. 이는 비오 10세에 의해 전례 중 오르간 외의 악기 연주가 금지된 이후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미사 때 오케스트라가 연주된 것이었다.

1987년 1월 1일에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했으며, 이를 이유로 1986년 베를린 필의 송년음악회를 지휘하지 않아 베를린에서의 여론이 악화되었다. 1988년에는 건강 악화 때문에 베를린 필과의 공연을 취소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날 일본 투어를 위해 출국하자 베를린의 여론은 또 안좋아졌다.

1989년 4월 마침내 건강상의 이유로 베를린 필의 종신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했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사임한 데는 당시 새로 사민당이 정권을 차지하게된 베를린시와 불편한 관계도 한 몫 했다.

1989년 미국공연을 끝으로 그 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의 리허설을 준비하던 중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둔다. 이날 오전에 자택에서 소니의 사장과 만남을 갖던 중이었다.

-고클래식 웹진 인용-

DG와 오랫동안 몸담다보니 DG와 얽힌 이야기가 제법 많다. 데뷔 때와 70년대에 잠깐 EMI에 있다보니 역시 EMI와 얽힌 얘기조차 많으며 당시 소니 사장과 친해서 자신의 땅에 CD공장을 지었다고도 전해진다. 야망이 아주 컸는지 자신의 모든 녹음과 영상을 많이 남기려고 애 썼으며, 그 결과 엄청난 레코딩이 남았고 이를 상술로 많이 써먹었다는 것은 전설. 고소 크리 먹이는 것을 좋아해서(?) 고소를 먹이는 일화도 있다.

카라얀의 개관은 이 글을 읽어보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2 그의 지휘/세간의 평가

그의 지휘를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무작정 까는 사람도 있다. 까는 사람들은 그의 상업주의나 나치전과 등을 이유로 많이 까고[26] 최고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다이나믹한 음향 또는 기름진 음향. 그리고 청중을 사로잡는, 현악의 마술사[27] 등과 같은 이유로 많이 추앙한다. 국내에는 극도의 카라얀까들이 만든 와전된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다. 대표적인 예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나치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협력한 사람인 피해자였고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의 앞길을 막고 디스한 것은 상업주의와 야욕에 물든 카라얀에게서 베를린필을 지키려는 목적이었다는 이중잣대식의 해석[28]이다. 푸르트벵글러는 생전 내내 이유 없이 카라얀을 싫어한 인물로서 카라얀이 피해를 많이 봤다. 심지어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을 부르는 것 조차 싫어해서 미스터K, 혹은 카씨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러한 행동에 "베를린 필을 지키려는 숭고한 행위"등을 들먹이는 것은 이지매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카라얀의 나치당적을 언급하며 정당화하는 것 역시 물타기나 내로남불에 불과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후 세르주 첼리비다케베를린 필하모니커의 상임으로 선정되지 않은 이유가 카라얀의 정치질과 이간질이라는 루머[29], 베를린필 단원들이 카라얀보다 귀도 칸텔리를 원했다는 루머[30]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카라얀-크랑크[31]로 불리는 극도의 팬들과 극도의 안티가 공존한 거장이었지만, 클래식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거장이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음의 세공사 정도로 비유해야 맞을 것이다.[32]

대중이 얼마나 카라얀을 원하는지를 보여주는 투표.

그의 명반은
1. 베토벤에서 브루크너, 브람스로 이어지는 게르만 교향곡
2. 그리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
3. 베르디, 푸치니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4.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33]의 교향곡
5. 베토벤과 바그너, 슈트라우스로 이어지는 독일 오페라

이상을 우선적으로 언급할 수 있겠다.

카라얀은 의외로 게르만 낭만 교향곡들 중에서 슈베르트 - 멘델스존 - 슈만으로 이어지는 비오페라라인의 교향곡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인데, 멘델스존 교향곡과 슈만 교향곡 전곡은 70년대에 게르만 주요 교향곡 녹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1차례 녹음했을 뿐이다. 본인이 좋아하는 곡은 몇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녹음하는 카라얀의 습관을 생각할 때,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슈베르트의 8,9번 교향곡[34], 슈만의 4번 교향곡은 그런 와중에도 아꼈고, 말러에도 그렇게 관심은 크지는 않았지만,[35] 말러 9번 교향곡을 언급할 때 카라얀의 이름이 언급되는 빈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반대로 유명한 푸치니의 라 보엠의 경우에는 파바로티, 프레니, 갸우로프를 캐스팅해서 진행한 데카 녹음이 워낙에 흡족해서 다시 녹음하지 않았다고도 하나, 출처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말년인 80년대에 빈필과 녹음한 곡들은 대개가 카라얀이 특히 아낀 곡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80년에 베르디 팔스타프, 81년에 푸치니 투란도트, 82년에 하이든 천지창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장미의 기사, 83년에 브람스 독일 레퀴엠, 84년에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5,6번, 베르디 레퀴엠,85년에 드보르작 8,9번 교향곡, 슈만 4번 교향곡, 모차르트 대관식 미사, 86년에 모차르트 레퀴엠, 87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왈츠, 바그너 서곡집,88년에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브루크너 8번 교향곡, 89년에 베르디 가면무도회, 브루크너 7번 교향곡를 녹음했다.

바로크 녹음의 경우 특유의 기름진해석과 구조보단 멜로디를 중시하는 스타일 상 호불호가 갈리며 대중의 평가 및 평론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그의 특성은 녹음시기마다 조금씩 다른데 50년대 녹음은 가장 기름기가 덜하지만 토스카니니의 영향을 많이받은지라 흔히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36]. 그리고 말년인 80년대로 갈수록 좋게 말하면 디테일이 다듬어져 있고 나쁘게 말하면 기름기가 묻어 나온다.[37] 80년대에는 상기했던 대로 빈필과 녹음한 음반이 많은데, 카라얀의 말년 미학과 빈필의 궁합은 어떤 측면에서는 베를린필과의 궁합을 상회하는 면도 있어서, 좋은 시너지 효과를 보인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오히려 이 시기에 베토벤, 브람스 교향곡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을 빈필과 녹음하지 않아서 아쉬워 하는 애호가도 있다.

그가 연주한 레퍼토리는 상당히 방대해서 그가 녹음한 음반수를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지만 현실은 어떤 레파토리든 다 녹음한 네빌 매리너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함정[38][39]

최근 들어 전집 박스 세트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는데 카라얀도 예외는 아니다. 2014년에 EMI의 카라얀 전집이 나왔고 2015년까지 해서 카라얀 60, 카라얀 70, 카라얀 80과 함께 오페라 전집[40]과 데카 전집까지 해서 카라얀 전집 음반이 나와있다.[41]

현대음악에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카라얀의 레퍼토리가 매우 넓기 때문에 카라얀도 적지 않은 수의 현대음악을 다루었다. 리처드 오스본이 제시한 자료를 보면 카라얀이 꽤나 많은 현대음악을 다루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라얀이 현대음악보다는 낭만주의 이전 음악에 주력한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대부분의 지휘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불레즈 같은 일부 지휘자들이 예외적으로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일 뿐. 현대음악을 많이 지휘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아바도, 래틀 등도 전체 레퍼토리에서 볼 때 현대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카라얀이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누가? 특히 레너드 번스타인과 비교할 때 이점이 많이 거론된다. 하지만 실제 작곡을 하는 지휘자는 많지 않으며, 지휘와 작곡은 별개의 직업으로써 두 가지를 같이하는 사람이 대단한 것이지,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지휘자로써의 자질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작곡과 지휘를 모두 잘 한 사람은 역사상 매우 드물며, 바그너, 멘델스존, 말러 등이 이에 해당하지만 그들이 실제 지휘한 음악을 들어볼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정확한 평가는 불가능하다. 물론 들어볼 수 있는 사람으로 명작곡가이며 명지휘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에드워드 엘가가 있다.

외모와는 달리, 오케스트라와의 연습을 담은 영상을 보면 목소리가 무척 깬다(...). 의외로 목소리 톤이 높고 가는 편. 굉장히 깐깐한 성미가 묻어나는 듯 하기도 하다.난쟁이목소리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가 단원들에게 긴장감과 집중력을 유발시키는 측면이 있다. 게다가 사진 등에서 연출한 모습과는 달리 생각보다 키가 작은 편이라서 좀 더 깨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루저[42]그래도 지휘할때는 간지폭풍.

오페라 지휘에서는 극도의 먼치킨이다. 사실 카라얀 세대의 독일/오스트리아 지휘자들 대부분이 오페라 지휘자로 커리어를 쌓아왔지만, 카라얀이 다른 이들과 넘사벽의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대다수의 지휘자들이 상대적으로 연출에는 등한시하는 반면, 카라얀은 직접 연출에까지 관여했으며 섬세하고 꼼꼼한 지휘로 호평을 받았다[43]. 장대한 대편성의 오페라도 카라얀의 지휘 아래에선 실내악적인 꼼꼼함을 보여주며 집중력을 더욱 극대화했다.[44] 그리고 성악가 발굴에 일가견이 있어 지속적으로 참신한 성악가들을 발굴해냈는데, 미렐라 프레니, 캐슬린 배틀, 안나 토모와 신토우, 조수미 등등등 수많은 성악가들이 카라얀의 발탁과 전폭적인 지원으로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났다.

음악에서 상업주의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간지나게 보이도록 자기연출을 하며[45] 또한 이를 사진으로 찍어 뿌리는 등 음악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자신의 이미지메이킹에 신경을 많이 썼다. 덕분에 그의 명성과 독특한 캐릭터가 결합하여 현대인들이 자주 떠올리는 지휘자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예를들어 한국에서 2008년에 방영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지휘자 캐릭터 강마에 역시 성격이 깐깐하고 입이 거친 점은 사실 카라얀의 캐릭터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자 김정운은 저서 '에디톨로지'에서 카라얀은 음악에 시각적 편집의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아티스트라 평가했다.[46] 이 점은 훗날 베를린 필의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디지털 콘서트홀)로 이어지는 밑바탕이 되었다.

3 기타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음대에 들어가기 전에 빈 공대에 다니다가 자퇴했다. 특히 CD의 재생 시간을 정하는 데 관여한 것은 유명하다. 만년에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걸 보고 "맘같아서는 냉동인간이 되어 수십년 뒤에 깨어나 자신의 모든 레퍼토리를 디지털 비디오로 녹화하고 싶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본에 자주 간 이유 중 하나가 소니 본사 등을 방문해서 최신 기술을 체험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기술과 산업 트렌드에 대한 식견은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1952년에 월터 레그에게 당시 잘나가고 있던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 20년 후에는 몰락할 것이라고 예견했는데 레그는 당시에 정신나간 의견이라고 생각했지만 20년 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엄청난 부자이기도 하다. 음반만 2억장이 넘게 팔려서 그 로열티로 부인 엘리에트가 잘 살고 있고, 경비행기, 요트, 포르셰, 롤스로이스, 페라리 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경비행기 같은 경우 음반 표지(...)로도 사용했다. 집도 캠핀스키 호텔 특실 임대, 스위스 루체른의 호수와 소연주홀, 경비행기 이착륙장까지 딸린 저택도 받았다. 자택 지하에는 오케스트라 연습실이 있어 여름 휴가 시즌에 베를린 필 단원들을 초청해서 챔버 규모 작품을 녹음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변호사들, 특히 에밀 유커를 죽기 전에 소송을 걸고 심지어 카라얀이 죽은 후에도 엘리에트가 이어서 소송을 걸었다.

속도광이다. 자신의 롤스로이스를 아우토반이든 아니든 간에 고속으로 몰길 좋아했다. 카라얀의 차에 동승했던 로스트로포비치는 산길에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카라얀에게 사정하기까지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오전에 아우토반에서 차를 몰다가 나무를 들이박아 전복 사고를 일으킨 후 오후에 리허설을 하러 간 적도 있다.

자동차만이 아니라 비행기 조종 면허까지 가지고 있었다. 면허를 가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바쁜 스케줄에 잘 이용했다. 심지어 일본 공연을 지휘하러 갈 때도 자가용 경비행기를 직접 몰고 지구 반대편으로 갔다. 카라얀이 비행 조종을 배운 곳은 칠레였으며, 45세에 면허를 취득했다. 하지만 2차 대전 공군 파일럿 출신이라는 소문은 잘못된 것이다. 전쟁 당시 카라얀은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였기 때문에 군입대를 계속 연기할 수 있었다.[47] 전쟁말기에 카라얀은 왜 징집 안하냐는 여론이 나왔고, 카라얀 본인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더이상 징집 연기가 안되면 괴링을 졸라 공군으로 입대하려고 마음 먹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징집되지는 않았다. 조종술에 관해 카라얀은 수많은 계기판을 보면서 신속히 판단을 내리고 섬세하게 운전하는 것이 오케스트라 지휘와 유사하다며 적성에 맞는다고 말하곤 했다. 카라얀은 분단 중인 베를린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34년간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결코 베를린에 거주한 적이 없었다. 베를린 필과 스케줄이 있을 경우는 호텔[48]에서 체류하거나 오스트리아 찰츠부르크의 자택에서 자가용 비행기로 출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교관의 감독 하에 보잉 747 비행기를 몰아 1회의 이륙과 2회의 착륙에 성공하여 합격점을 받기도 했다. ㅎㄷㄷ

또한 열렬한 스키광으로도 알려졌는데, 만년에 얻은 척추통증으로 인해 스키를 타지 못하는 것에 매우 분노하기도 했다. 57년 번스타인과 처음 만난 것도 스키를 타러 가서였다고 한다. 죽기 직전 마지막까지 한담을 나눈 주제가 비행기와 스키였으니 그가 얼마나 이를 좋아했는지를 알만하다.

카라얀이 금전적인 계약에 민감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그동안 모은 전재산을 잃고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경험으로부터의 불안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당시 카라얀은 이탈리아에 칩거하면서 극도의 경제난에 시달렸고, 식사를 거르면서 음악공부에만 매진하곤 했다고.

4 카라얀과 일본

카라얀은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열정적인 청중, 유럽보다 훨씬 앞선 일본의 실황방송 중계시스템, 소니의 뛰어난 기술력 등... 일본에 방문할 때마다 소니 사장의 안내로 각종 첨단 기기들을 관람했다. 카라얀은 CD 등을 비롯하여 소니의 음향 관련 기기의 개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카라얀은 심지어 일본에서 대학생 오케스트라를 리허설한 적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팬서비스.

4.1 1954년

NHK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도쿄 뿐만아니라 교토, 나고야, 타카라주카 등 지방에서도 공연했다. 이 때 NHK심포니와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은 나중에 일본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4.2 1957년

11월 3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16회 콘서트를 가졌다.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2회), 후쿠오카, 고베, 히로시마, 야하타, 센다이에서 공연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7번,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35번, 38번, 스트라빈스키 불새 조곡, 힌데미트 화가 마티스, 슈트라우스 돈 후안,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스메타나 몰다우,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베버 오베론 서곡, 앵콜은 바흐의 관현악 조곡 제3번의 Air(G선상의 아리아), 바그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전주곡. 이 공연 영상의 일부는 DVD로 발매되었으며 유튜브에서 공연의 일부를 볼 수 있다. 카라얀은 연주회가 일본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나중에 영상물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4.3 1959년

빈 필과 일본을 방문했다. 이것은 빈 필과 카라얀의 세계 투어의 일환이었다. 17개국에서 26회의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그중 일본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총 9회의 콘서트가 열렸다. 일본 공연의 일부는 나중에 DVD로 발매되었다. 브람스 교향곡 제1번, 제4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등이 연주되었다.

4.4 1966년

베를린 필과 일본을 방문하여 4월 12일부터 5월 3일까지 3주간에 걸쳐 도쿄(7회), 오사카(2회),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 카나자와, 오카야마, 마츠야마, 타카아츠, 센다이, 삿포로에서 18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레오노레 서곡 3번 콜리올란 서곡, 브람스 교향곡 1번, 2번,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돈 후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5번, 베베른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5개의 소품,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6번. 공연의 일부는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의 경우 일본의 5개의 합창단을 연합하여 연주했다.

4.5 1970년

5월 8일부터 22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6회)에서 공연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오사카), 브람스 교향곡 2번, 3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슈만 교향곡 4번, 오네거 교향곡 3번, 슈트라우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7번,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지크, Fortner Marginalien(일본 초연).

4.6 1973년

10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7회), 오사카(3회)에서 공연을 가졌다. 레퍼토리는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6번,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브람스 교향곡 3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과 사랑의 죽음, 탄호이저 서곡, 바흐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번, 드뷔시 바다, 쇤베르크 정화된 밤. 유튜브에서 공연 전 드레스 리허설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4.7 1977년

11월 6일부터 18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6회), 오사카(5회)에서 연주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전곡 피아노 협주곡 3번, 4번, 5번, 브람스 교향곡 전곡,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2번, 더블 콘체르토, 영웅의 생애. 당시 DG(베토벤 교향곡 전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와 EMI(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녹음한 것과 연관한 선곡이라 할 수 있다. 최근에 이 실황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 발매[49]되어 화제를 모았다. 합창은 동경예술대 합창단이 맡았다. 피아노 협주곡 선곡이 많은 것이 눈에 띄는데, 연주는 모두 알렉시스 바이센베르크가 맡았다.

4.8 1979년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에서 9회의 공연을 가졌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말러 교향곡 6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 드보르작 교향곡 8번, 슈베르트 교향곡 제8번, 모차르트 교향곡 39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하이든 천지창조, 베르디 레퀴엠, 모차르트 레퀴엠, 브루크너 테데움. 2년 전 공연에서 일본의 합창단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빈 징베라인까지 데리고 왔다. 여전히 카라얀 본인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도쿄로 갔다.

이 때 공연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은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4.9 1981년

10월 28일부터 11월 8일까지 도쿄에서 베를린 필과 10회 공연을 가졌다. 베토벤 교향곡 1번, 3번[50], 5번, 6번,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전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라벨 볼레로, 스페인 랩소디,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을 공연하였다. 역시 유튜브에 공연 동영상이 있다.

4.10 1984년 방일 및 내한공연

10월 18일부터 10월 24일가지 베를린 필과 도쿄(4회), 오사카(2회)에서 총 6회의 공연을 가졌다. 오사카 공연은 DVD로 발매되었다. 프로그램은 베토벤 교향곡 5번, 6번, 브람스 교향곡 1번, 3번, 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슈트라우스 돈 후안, 라벨 다프네와 클로에 조곡 2번, 드뷔시 바다,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토 15번.

일본 공연 직후 한국에서 최초로 이틀간 내한공연을 가졌다. 첫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제5번과 제6번, 다음날에는 브람스 교향곡 제1번과 모차르트 디베르트멘트 15번[51]등을 연주했다. 당시 국내에서 엄청나게 화제가 된 공연이었다.

당시 일본 및 한국 공연은 자비네 마이어 사건으로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관계가 파탄 직전까지 간 상황 직후였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모았다. 오사카 공연에서는 돈 후안 시작 부분에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싸인이 맞지 않아 중단하고 다시 시작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번스타인과 아바도가 한국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카라얀은 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엄청 욕먹고 있는 세종문화회관에 대해서도 카라얀은 매우 큰 홀이라면서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콘서트 후에는 한국 청중들이 매우 정숙하고 음악에 대한 집중이 뛰어났고 평했다. 나중에 반드시 한국에서 다시 공연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카라얀이 이처럼 한국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데에는 내한공연 당시 그의 부인인 엘리에트 여사가 서울에서 잃어버린 핸드백을 되찾았던 사건도 작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카라얀은 나중에 지인들에게도 종종 한국에서 핸드백을 되찾은 얘기를 하면서 이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카라얀이 이웃나라 일본에 대해서 매우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점, 반면 1979년 중국 북경에서 상식 이하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에서 공연하면서 실망했던 점, 번스타인이나 아바도와 달리 한국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기로 결정된 이후에 내한한 점, 금난새, 조수미 등 한국인 음악가들과 인연도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게 된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4.11 1986년 방일 취소 및 1988년

1986년 베를린 필과 일본 도쿄에서 세 차례의 공연이 기획되었다. 이 중 두 차례 공연은 카라얀의 조언으로 설계, 완공된 산토리 홀의 개관 공연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카라얀의 건강이 악화되어 방일이 취소되고, 세이지 오자와가 대타로 베를린 필과 예정된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베토벤 교향곡 3번,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메타모르포젠, 모차르트 디베르티멘토 17번이 연주되었다.

1988년 4월 29일부터 5월 5일까지 베를린 필과 도쿄(3회)와 오사카(2회)에서 공연했다. 당시 사민당이 새로 집권한 베를린시 당국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카라얀은 베를린시에서 주최한 베를린 필의 공연을 건강상의 이유로 취소했는데, 그 다음날 일본 공연을 떠났다. 때문에 베를린에서 카라얀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다. 카라얀의 최만년 공연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카라얀의 마지막 방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 표를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베토벤 교향곡 4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6번 비창, 브람스 교향곡 제1번, 모차르트 교향곡 제39번,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등의 공연 실황이 DG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5 나치이력 논란

5.1 카라얀 옹호의견

한 때 모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나치 전과가지고 논쟁을 많이 벌이기도 했는데 사실 당시 독일출신의 거장급 지휘자들은 나치 전과가 다 있었으며 대부분 사면됐다. 예술가들의 비극이라면 비극. 딱 까놓고 얘기해서 이 전과로 음악까지는 까지 말자. 좋은자세는 아니다.[52]

5.2 카라얀 비판의견

그러나 카라얀의 전과는 여러가지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것이 사실로, 위 옹호의견에서 '한 때'라고 언급한것과는 달리 국내 클래식 커뮤니티에서는 산발적으로 논란이 계속되고있다. 무슨 히틀러가 방공호에 숨어 게릴라전하는 것도 아니고

이는 대부분의 당시 독일 거장 지휘자들이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당에 가입해야만 했고, 이러한 현실은 지휘자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예술가, 그리고 전 독일 국민들이 모두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단순히 나치당원 경력만으로 종신형 받고 그러는게 아닌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카라얀의 경우 히틀러 치세때만 해도 비교적 젊은 듣보잡 지휘자였을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 전범재판에서 "지휘자로 활동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했다"고 주장한 것과는 달리 안슐루스(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보다 한참 이전인 1933년에 이미 오스트리아에서 제 발로 직접 나치당에 입당한 기록이 밝혀졌다. 굳이 말하자면 대단한 나치 수괴는 아니었더라도 파시스트 사상의 동조자였다는 것.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역사학자 올리버 리스콜브는 카라얀의 친나치적인 언행을 추가로 공개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반 유대주의에 공감하는 편지나 학창시절 오스트리아 국수주의 단체인 '범 독일 청년 그룹' 소속 이력 등.해당 기사

그리고 1935년 히틀러 생일 축하공연(바그너의 탄호이저)이나(해당기사(독일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등을 지휘한 것 등 나치 부역 이력은 그 자신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잘못이고 과오이다.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기엔 지휘자들 이상으로 나치 부역을 거부하고 독일을 탈출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이력 때문에 1955년 미국 뉴욕에서 유대인 단체들이 비판 플래카드를 들고 항의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공연 역시 불가능했다. 애초에 나치 부역 경력에 대한 비판은 애초에 경중, 자의 타의를 가리지 않고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악단 단위에서 까였고 이들 또한 한참동안 이스라엘 공연도 불가능할 정도였으니.

토마스 만[53]의 아들은 "이 추밀원 고문들과 나치당원들은 …자꾸만 재촉하면서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활동하고 지휘하고 연출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 클레멘스 크라우스, 카라얀을 보라. 이런 자들에 의해 문화가 재건되느니 차라리 파편 속에 묻혀 있는 편이 낫다."라고 나치 부역 이력자들을 전부 비판하기도 했다.#

1981년 프랑스 영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등장하는 예술가들 중에서, 나치당원들 앞에 월광소나타를 연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2차대전이 끝난 뒤 관객석이 텅 빈 무대에서 음악을 지휘하는 수모를 당하는 피아니스트 칼의 모티브가 되었다.

6 디스코그래피

6.1 정규녹음

추가바람 너무 많지만...

6.2 해적반

  1. 칼뵘의 단원이 왜 카라얀처럼 간지나게 눈을 감고 지휘하지 않느냐고 하자 뵘이 나는 악보를 읽을줄 알거든이라며 깨알 디스를 했다고 한다.
  2. 물론 성부도 다르다
  3. 1920년대 당시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독일 사람들은 지폐를 양동이나 수레에 담아 이동해야 했으며, 강도가 나타나 양동이에 있는 지폐를 버리고 양동이를 가지고 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4.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35년 입당이라고 돼있는데 실제 입당시기는 그 보다 2년전인 33년이 맞다.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기 전에 가입한 당적이라 이것이 독일 합병과 동시에 나치당 통합 과정에서 실제 가입시기보다 밀리게 된 것. 그러다보니 업적표를 보면 33년 입당으로 돼 있다.
  5. 나치입당이 조건이라고 하는데 사실 당시 유태인 박해로 유태인 지휘자들이 대부분 독일을 떠났다. 그 예가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등. 결론적으로 카라얀은 출세를 위해 입당한 셈이다.
  6. 당시 독일을 떠난 많은 지휘자들 중에 발터나 클렘페러처럼 유태인의 혈통을 갖고 있어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고,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나치에 반대해 독일을 떠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과 관계없이 20~30년대 최악의 경제 상황에 있던 독일을 떠나 경제적으로 훨씬 나은 처우를 받았던 미국 등지로 떠난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7. 아내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다고한다. 카라얀을 격찬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던 괴벨스가 카라얀 결혼 당시 혈통조사를 방해했다고 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아내의 혈통이 묘하게도 그에 대한 나쁜 여론을 어느정도 환기시켜주는 전화위복이 되기도 했다.
  8. 그래도 괴벨스가 카라얀을 싫어하거나 하진 않았다. 카라얀 역시 괴벨스의 문화 선전에 쓰이긴 했다.
  9. 연령문제로 거절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10. 무엇 때문에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그토록 싫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져있지는 않다. 당시 그런 푸르트벵글러는 카라얀의 이름조차 부르기를 꺼려해 K라고 불렀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지휘를 제2의 창조작업이라고 하며 지휘자의 주관적인 해석을 중요시했고 이의 대척점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인템포식 신즉물주의 연주를 매우 혐오했다. 카라얀은 당시 독일에서 토스카니니식 식즉물주의 해석의 대표 주자로 여겨져 언론에서 토스카라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점이 푸르트벵글러가 카라얀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된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1. 하지만 1952년 트리스탄과 이졸데 녹음에서는 월터 레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하였다. 까다로운 푸르트벵글러와의 녹음 작업 때문에 레그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녹음이 끝난 후 매우 만족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음반표지에 레그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정도였다. 물론 푸르트벵글러와 레그의 해빙 무드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12. 카라얀은 필하모니라 오케스트라를 최고이며 앞으로 영국에서는 필하모니아와만 협업하겠다고 했는데 정작 단원들은 카라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듯 하다.
  13. 월터 레그는 사비로 유럽 순회 공연을 준비했고, 이 때문에 경제적인 부담을 입었다.
  14. 당시 빈 심포니에는 정식 상임지휘자 제도가 없었다. 다만 빈 심포니 홈페이지에서는 악단을 거쳐간 위대한 지휘자들 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15. 당시에는 한 극장에 소속된 가수가 다른 극장 무대에 서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다.
  16. 토스카니니는 1937년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바 있는데 이때인 듯 하다
  17. 자신의 수족인 NBC 심포니에서는 잘안풀리면 엄청난 분노를 폭발했던 토스카니니였지만, 거의 지휘해본 적이 없었던 빈 필에서 대놓고 화내기는 그래서 빈 방에서 혼자 화풀이 하고 있었던 듯 하다.
  18. 베를린 필은 이미 1954년 9월에 푸르트벵글러의 청력이 극도로 나빠져 더 이상 지휘할 수 없음을 확인한 바 있다.
  19. 하지만 모자간의 갈등 끝에 어머니가 스스로 자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비해서는 양호한 편
  20.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단장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메트 오페라를 지휘하고 오케스트라의 실력에 실망할까 염려했고 이는 사실이 되었다.
  21. 그래도 표를 구할 수가 없어 화장실 등을 통해 몰래 입장한 학생들도 있었는데 현재 세계적인 지휘자로 활동하는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22. 동베를린은 동독의 수도였기 때문에 서베를린 소속의 베를린 필이 베를린시 전체의 대표성을 지닌 명칭으로 공연하는 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23. 푸르트벵글러 때도 비독일인 단원은 있었다. 플룻 수석 오렐 니콜레 등
  24. 카라얀은 이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주자인 앨런 시빌에게 베를린 필의 호른수석자리를 제의했지만, 앨런 시빌은 고심 끝에 자녀 교육 문제 등으로 카라얀의 제의를 거절한한 바 있었다.
  25. 현재 소니에서 발매되고 있는 모든 영상물이 텔레몬디알에서 제작한 것이다
  26. 예를 들어 동료 지휘자였던 첼리비다케는 그를 가리켜 "뛰어난 장사꾼이지만 음악을 듣는 귀가 없다"고 평가했다."
  27. 카라얀이 확실히 현악은 잘 부리는 게 다른 지휘자 음반하고 비교했을 때 카라얀 까들도 인정할 정도라고 한다. 아무리 대편성의 교향곡이라고 할지라도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나게 만드는 본좌급 지휘력을 가지고 있다.
  28. 푸르트벵글러의 나치부역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엄청난 논란이 있는 부분이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참고
  29. 첼리비다케의 고집불통 독불장군 성격으로 베를린필 단원들은 일찌감치 첼리비다케를 제외했다
  30. 귀도 칸텔리는 떠오르는 신예로 인정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베를린필의 상임자리에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었다.
  31. karajan krankheit(카라얀 열병)이라는 독일어. 카라얀 신드롬이 극에 달했던 당시 만들어진 신조어
  32. 즉 카라얀은 바흐 ,비발디,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바그너 ,차이코프스키,브루크너,말러 등 대부분의 오페라와 교향곡들을 가장 표준적 규범에 맞춰서 연주한 지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지휘에서 토스카니니풍의 과감한 시도나 푸르트벵글러의 장점이었던 "극적이고 감동적인 울림"은 없었지만 ,대신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상급의 아름답고 정제된 소리를 뽑아낼 줄 아는 지휘자였다.
  33. 작곡가 본인에게 자신의 곡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34. 단 슈베르트 9번 '그레이트' 교향곡에 대해서는 도무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냥 내 방식대로 지휘한다고 언급했고, 실제 60년대 토스카라얀적인 특색대로 정교하고 템포 변화 없는 빠른 연주로 일관한다.
  35. 카라얀이 말러를 시작하게 된 것은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연주하기 시작하면서이다. 70년대 중반부터 카라얀은 말러 교향곡 4,5,6,9번을 녹음했으며, 9번 다음으로 8번을 도전하려고 했으나 베를린 필과의 불화로 결국 백지화 되었다. 사실 8번도 그 전에 지휘할 기회가 있었지만 오자와 세이지에게 맡겼다.
  36. 푸르트뱅글러리즘의 표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37. 카라얀의 녹음/연주성향은 60, 70, 80년대 딱 세 종류로 나눠지는데 60년대가 패기와 박력(다이나믹), 70년대는 60년대와 80년대의 중간, 80년대는 웅장함 에서 묻어나오는 기름진 연주다. 6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80년대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으며 대다수는 60, 70년대를 좋아하는 듯 하다. 명반시리즈(디 오리지날)에는 주로 60년대가 많다. 사실 60년대(당시 카라얀 연령 50중반~60대초반)가 카라얀의 일생에서는 전성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칼 뵘은 전성기가 60년대로 알려져 있지만 남아있는 음반은 70년대 빈 필과의 녹음이 많다.
  38.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면 정말 안한 게 뭐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그의 음악관 및 장점과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비발디의 사계까지 있다. 그런데 사계도 그 많은 음반 중에서 명반이라는 평론가들이 많다. 하지만 물량이 많은 만큼 일부 음반은 음악의 본질을 왜곡했다는 혹평도 있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거기서 거기...인 것도 있지만 오히려 카라얀이 좋게 들린다는 말도 있다.
  39. 이미 매리너의 별명은 '레코딩 기계'였으니...
  40. 오페라 전집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DG, 데카, 필립스의 전집으로 구성되어있다.
  41. 물론 이미 일본에서는 130여장(!)으로 1930년대 녹음부터 전집으로 내놓았다.
  42. 카라얀의 키는 여권상에서는 170cm대 정도라고 했는데 그를 본 사람들의 말로는 10cm정도 작아보인다. 라는 증언이 있었고 실제로 내한공연이나 독일에서 그를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160cm대 초반 중반이라고 한다.
  43. 라 스칼라에서 처음으로 원어 공연을 시작하기도 했다.
  44. 이러한 카라얀의 진가를 느끼고 싶은 사람은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오페라 간주곡집을 꼭 들어보길 바란다.
  45. 가장 단적으로 예를 들자면 그의 '키'에 대한 연출이다.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커버하기 위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가수를 약간 자신의 뒤에 배치하는 등 많은 신경을 썼다
  46. 실제로 대중음악에 뮤직비디오와 유사한 홍보용 영상이 도입된 것은 카라얀이 실황 영상을 제작한 시기와 비슷하고, 본격적인 뮤직비디오의 시초로 알려진 Bohemian Rhapsody는 1975년 제작되었다.
  47. 애초에 지휘자까지 되지 않더라도 국립 악단의 단원이라면 괴벨스나 그 외 나치당 수뇌부의 비호 덕에 징집으로부터 비교적 보호받을 수 있었다.
  48. 캠핀스키 호텔 꼭대기 특실을 임ㄷ해서 사용했다(...)
  49. 도쿄 FM에서 발매되었는데 지금은 다 품절된 것 같다.
  50. 영웅 교향곡에서 네명의 호른 단원을 기용했는데, 어시스턴트, 3번, 2번, 1번 순으로 자리를 배치했다.
  51. 모차르트의 작품 중 특히 카라얀이 좋아했던 작품 중 하나로 세 번이나 녹음했다. 일본, 영국 순회공연 때도 레퍼토리로 올린 적이 몇번 있다.
  52.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칼 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나치전과에 연루돼있다. 뭐 셋 다 사면받았고 칼 뵘 같은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사면받았다는데 전기문 같은 곳에서 보면 자세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뭐라하기가 좀 그렇다.
  53.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독일의 작가. 나치에 반대하여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