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해병대의 제31대 사령관에 대해서는 이호연(군인)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목차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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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사진은 2010년 3월 3일자 인터뷰 사진으로, 뇌출혈로 쓰러지기 거의 직전의 모습이다. 쓰러진 이후 공개된 사진은 없다.)
이호연 (1954년 1월 18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 음반 제작자,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이자 연예 기획사 DSP미디어의 전 대표이사이다.
충남 대전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성균관대 체육교육과[1]에 입학한 그는 선후배들과의 교분으로 인해 연예관계자들과도 교분을 쌓아왔다. 당시 체육과와 연예계는 서로 통했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2]를 하던 중 1981년 ‘연예계의 대부’이자 선배인 양승국 한밭기획 사장의 권유로 엔터테인먼트계에 뛰어들었고, 소방차, 유열, 심신 등을 발굴해 양사장과 함께 매니지먼트를 했다. 이 중 한국 최초의 아이돌로 불리는 소방차는 기획, 홍보 등에 있어 이호연 사장의 첫 작품으로 많은 연예관계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1991년도에 독립하여 대성기획(후에 DSP미디어로 명칭변경)을 설립했다. 소방차의 성공을 보고 한국에도 아이돌이 뜰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고 살던 집을 털어 창업했다고 한다. 이후 ZAM, 젝스키스, 핑클, 카라, SS501 등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을 배출했다. 잘나가던 90년대 말~2000년대 초에는 젝스키스와 핑클로 SM엔터테인먼트의 H.O.T., S.E.S.와 라이벌 구도를 이룸으로써 아이돌계의 양대기획사로 군림했다.[3] 2000년대 중반 ~ 2010년대 초반까지도 SS501, 카라 등으로 어떻게든 경쟁을 이어갔다.
2010년 3월, 지인과 술자리를 갖고 돌아가는 길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다행히도 생명에 지장이 있는 상태는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경영 일선으로 돌아올 정도까지 회복된 것은 아니라, 거동이 불편한 상태이며# 2016년 현재까지도 경영 일선에선 복귀를 하지 못하고 병상에 있다. 의사소통은 가능하고 감정표현도 자연스러운 상태지만, 말을 하지 못하고 거동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레인보우가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아이돌이다.##[4]
DSP미디어는 반쯤은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5][6] 2000년대 중후반 이호연이 잠시 가수들한테서 손을 때고 드라마에 빠져있을 때는 성적이 안 좋다가, 다시 돌아와 손을 본 암욜맨과 프리티걸이 대박을 쳤던 것을 보면, 쓰러지기 직전에도 감은 여전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2010년 그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DSP도 쇠퇴했다. DSP의 대표 자리는 그와 재혼했던 최미경이라는 부인이 맡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임원과 이사들은 회사를 떠나갔다. 친딸(이호연 친자식이 아닌 최미경과 전남편 사이의 딸)을 이사 자리에 앉힌 점이 문제되기도 했다.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의 발단도 결국은 이호연 대표가 쓰러진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카라 멤버들은 이호연 사장님은 믿지만 회사는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당시 이호연 대표가 있는 병실로 찾아가려 했으나 회사 측은 병실 위치조차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2015년 10월,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받은 건 좋은데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5년째 와병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제와서 표창을 주는 의미가 있을까 싶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30여년간 배출한 가수들과 한국 가요산업에 끼친 영향력을 보면 충분히 받을만한 상이긴 하다.[7] 표창은 카라 멤버 박규리와 한승연이 대리 수상했으며, 이날 시상식에는 레인보우, 에이젝스, APRIL이 출연하여 선배 가수들의 곡을 불렀다.
DSP 소속 가수 및 연예인 팬들에게는 '호연사마', '다트사마' 라고도 불리고, 여러모로 애증의 존재. 회사가 쇠퇴한 지금에 와서는 이호연 대표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팬들이 있다. 2016년 기사를 보면 감정표현은 자연스럽지만 말을 못하고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니, 경영 일선에 돌아와 DSP를 재건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다.
2 평판 및 일화
81년도 한밭기획 전무이사를 시작으로 30여년간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연예계에서 상당한 인맥과 파워를 자랑했다. 당장 DSP 아이돌의 흥행성적이나 자사 가수를 방송에 꽂아주는 능력을 보면,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과 후가 심하게 대비된다. 몇년째 병상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었는데도 2015년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는데, 괜히 그런것이 아니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전술한 바와 같이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8][9]
태진아 초창기 때 매니저를 해준 인연으로 태진아와 친분이 두터운데, 태진아는 이호연이 쓰러진 뒤 카라 사태가 터졌을 때 발벗고 나서주며 상황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여러모로 악명 높은 MBK엔터테인먼트의 김광수 사장도 이호연 정정한 시절에는 이호연을 형님으로 모셨었을 정도다. 그런데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카라 사태가 터지자, 김광수가 구하라를 노리며 카라 해체를 주장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 빈축을 샀었다.역시 김광수 클라스 기타 연예인들과의 관계는 아래 목차에 서술되어 있다.
젊었을 적에 한 주먹했다는 소문 등이 있으나, 이에 대해 확인된 바는 없다.
김광수 등 대부분 연예제작자가 밑바닥 로드매니저 부터 밟고 올라오는 것과 달리, 81년도에 한밭기획 전무이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나이도 만 27살이었으니 당시로서 이례적인 사례다. ZAM의 윤현숙(아버지가 육참총장)이나 젝키의 은지원(설명이 필요한지?) 등 다이아몬드 수저 집안에서도 자식을 맡길 정도고, 대학도 제대로 나온 것을 보면, 90년대 당시 어두웠던 연예업계 분위기 치고는 인텔리에 가까웠다고 보인다. 아래 목차에서 DSP 가수들이 이호연을 좋게 말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조폭같은 양아치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소문과 달리 실제 인상은 그냥 사람 좋아보인다는 증언이 여럿 있긴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2009년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에서, 게키단 히토리의 아내이자 유명 탤런트인 오오사와 아카네는 이호연을 사람 좋아보이고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영상 1분25초부터. SS501 초창기 시절에는 어떤 일본꼬마가 표를 잃어버려서 콘서트 못 들어가고 있으니까, 왜 그러고 있냐며 대기실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꼬마랑 SS501이랑 밥도 같이 먹었다고.. 팬클럽 창단식 때는 팬들 700명이 밤새느라 밖에서 벌벌 떨고있으니까, 이호연이 양해 구해서 안에 리허설 보게 도와주기도 했다.# SS501 공방 뛰러온 팬들한테 슬쩍 다가가서 "지금 하는거 재밌니?" 라든지 "현중이 왜 좋아해?" "쟤네 인기 어느 정도냐"라는 등 어슬렁 거리며 말을 건냈다고 한다. 심지어 멜론콘서트 때는 초록색 옷 입고 팬들이랑 같이 풍선 흔들고 있었다고..
말이 많은 젝스키스의 경우도, 결성 과정을 보면 멤버들 부모님에게 일일히 찾아가서 안심하고 맡기라고 말씀드리고 데려왔다. 강성훈 어머니는 아들이 갑자기 가수를 한다고 했을때 걱정했지만, 사장님을 보니 사람 좋아보여 맡기게 됐다고 말했다. 관련내용은 각주와 같다.[10]
그래도 연예계에서 무서운 이미지였다는 점은 맞다고 보인다. 이에 대해 단적으로 나온 방송이 2009년 12월 라디오스타에 SS501이 나왔던 편이다.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이다. 라스 MC들이 저럴 정도면 확실히 그 이미지가 유명했긴 한가 보다.
SS501이 내년에 재계약을 할 것이냐는 문제에 대해, 김구라가 여기저기서 영입 제안이 오냐고 물어봤다.김현중: 그런 (제의를 해오는) 사람들이 없어요.
신정환: 왜 딜이 안 들어오는 줄 알아요?... 사장님이 무서워서 그래요.
김현중: 알고 있어요.
윤종신: 요즘은 안 무서우세요.
어떤 프로듀서가 표절곡으로 SS501한테 사기쳤던 이야기가 나왔는데, 윤종신이 돈 문제는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다.김현중: 사장님한테 잡혀서요.. 다 뱉어냈어요.
김구라: 사장님이 그럴 때는 아주 뭐.. 대단하신 분입니다. 이 대표님.
윤종신: 사장님이 태권도 선수 출신이신거 아시죠?
2007년 인터뷰까지 결혼을 안 했다고 나오는데, 이때부터 2010년,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 사이에 최미경과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최미경은 재혼이다. 이호현이 쓰러진 이후 딸 강나현이 DSP 이사로 오른 점이 문제가 됐는데, 이호연 친자식이 아닌 전남편과의 자식이다. 2006년 DSP가 온라인 학습사업에 투자했다가 거하게 말아먹었는데, 그 학습사업 대표가 최미경이다. # 이때부터 이미 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댓글에는 뇌출혈로 쓰러지기 3개월 전에 결혼했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한 시점을 아는 사람은 추가 바람).
허나, 기타 젝키 팬덤에게는 쌍욕을 듣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DSP가 잘못한 점도 분명 있긴 하지만, 과장되거나 틀린 소문을 만들어서 욕하는 점이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따로 분리된 젝키 항목을 참조 바람.
SS501 팬덤의 경우를 보면, 초창기에는 전술한 바와 같은 훈훈한 일화도 있었지만, 후반기에는 무리한 일본 진출을 했던 일, 제대로 활동을 시켜주지 않은 일 등으로 이호연에 대한 평판이 좋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는 회사 자체가 백억대의 부채 때문에 오늘 내일 하던 상황이긴 했다. SS501 막바지 상황은 젝키 해체 때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애초에 이 무렵은 이호연이 뇌출혈로 사경을 헤메던 상태였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이호연이 있었으면 그룹을 이어나갈 수도 있었다는 아쉬운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이외 2010년 1월 18일 전두환의 생일에 김현중이 참석한 일로 이호연이 욕을 많이 먹은 바 있다. 김현중은 자신은 사장님 생일에 참석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실제로 전두환과 이호연 생일이 1월 18일로 같다. 그렇다고 이호연 정치성향이 극우라고 보기는 힘들다. 노무현 대통령 사망 당시 이명박 정권의 시퍼런 압박에 연예계도 눈치를 봐서 소극적으로 의사를 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호연은 SS501을 조문하게 하고, 공항에서 출국할 때 멤버 전원 검은 양복을 입게 했다. 정치성향이 어떻다 보다, 그냥 별 생각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행동했다고 보인다. 한편 전두환 생일 참석 건을 가지고, 이호연이 김현중의 몸값을 떨어뜨려 DSP에서 못 나가게 하려는 수작 아니냐는 음모론도 있었다. 하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김현중이 무릎팍도사에서 직접 밝힌 바를 보면, 이호연은 김현중을 쿨하게 보내주면서 힘든 것 있으면 얘기하라며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후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 점을 봤을 때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김현중 인기를 봤을 때 겨우 그 정도 사건 가지고 소속사를 못 찾을 수준이 아니기도 했다.
3 기획사 사장으로서의 능력
이호연을 다트사마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트 던져 데뷔일이나 컨셉 등을 정하는 것 아니냐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일부 사람들은 다트 던져 운빨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평가절하 하기도 한다. 그러나 30여년간 히트시킨 가수들 숫자를 보면 그게 운빨이면 그 자체로 더 대단하다. 다트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맞추면 실력으로 봐야할 것이다#. 일단 인맥이 좋아서 곡빨 안무빨을 잘 끌어오고 방송에도 잘 꽂아줬으며, 성공한 사례들을 보면 일을 밀고나가는 추진력이나 방향성을 결정하는 감이 좋은 경우도 많았다. 특히 아래 목차에서 보듯이 비쥬얼甲인 멤버들을 잘 뽑아왔다. 전술한 언론기사 내용을 보면 각주와 같다.[11][12]
한편 SM을 따라가는 전략으로 성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일리있는 말이다. 다만 단순히 따라가는 전략 뿐이 아니라 자사 가수들만의 강점과 특색을 살려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냥 따라간다고 성공할 정도로 가요계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다. 당시 99년 11월 3일자 한겨레 기사를 봐도 SM을 따라했지만 실패한 가수는 무수히 많았고, 그 중 DSP는 기획력 측면에서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다.[13] 또한 이호연이 이수만보다 한국에서 먼저 도입한 것들도 꽤 있다. 일본 아이돌 형태를 먼저 도입해 소방차와 ZAM을 히트시켰다. 소방차는 국내 최초의 아이돌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외 IDOL은 최초로 10대인 멤버로 이루어졌고, 최초로 해외파 멤버로 이루어진 아이돌이었다. 젝스키스의 블랙키스와 화이트키스는 아이돌 유닛의 시초다. 핑클은 4인 4색으로 아예 그룹내 색깔별로 맡은 타이틀이 있었고, 클릭비는 최초의 밴드형 아이돌이었다. SS501은 리얼리티쇼에서 데뷔하여 스타덤에 오른 최초의 사례였다.[14]
DSP 역사상 최고로 돈을 많이 번 것은 카라의 일본진출 성공이다. 이를 두고 이호연 쓰러지고 나서 터진거니 이호연이 한게 없지 않냐는 반문도 있다. 하지만 이호연이 쓰러진 날짜가 2010년 3월 후순이고, 막 일본진출을 한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일본에서 대박날 기반을 다 닦아놓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단 일본 거대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이미 거의 성사된 단계였다#. 그냥 생뚱맞게 카라가 일본에 진출한 것이 아니다. 2006년에 이호연과 친분이 있던 高和彦씨를 대표로 선임해 DSP 일본법인을 설립했고, SS501을 일본에 진출시켰다. 이때의 高和彦씨의 인맥과 노하우가 카라의 일본진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국내에서 형성된 이미지와, 국내에서 활동하던 곡(미스터, 점핑 등)과 안무(엉덩이 춤)로 일본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즉, 국내에서 히트를 시켜놨으니 일본에서 통한 것이다. 이호연이 드라마에 눈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손을 본 프리티걸이 히트를 치며 카라가 스타덤에 올랐다. 애시당초 구하라, 강지영 등 멤버 구성에 있어 이호연 입김이 컸다. 카라한테 처음 반응이 오자 일본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국내기반을 더 닦아야 한다고 판단해 거절했다. 당시 회사가 백억대 부채로 휘청이던 상태여서 한푼이 급했겠지만 잘 선택한 판단이다. 훗날 이호연이 물러난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와 에이젝스를 국내 기반도 안 닦였는데 무리하게 진출시켰다가, 양국에서 이도저도 아니게 된 것과 비교되는 결정이다. 2009년 카라의 국내 기반이 제대로 닦이자 일본에서 스스로 알아서 반응이 일어나며 더 좋은 조건으로 진출하게 된다. 게키단 히토리, 야구치 마리 등 톱연예인들이 자처해서 언급해줄 정도였다. 특히 2009년 국내활동을 하며 일본에서 히트를 친 결정적 요인인 명곡 "미스터"가 탄생됐다. 그게 안무가랑 작곡가가 만든거지 이호연이 만든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는데, 그 작곡가랑 안무가를 인맥과 감으로 섭외하는게 소속사 사장 역할이다. 대표이사 바뀐 이후의 DSP가 자사 가수들, 특히 레인보우에게 줬던 곡과 안무 퀄리티역대급이었던 것이 블랙스완를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 카라 때의 DSP는 백억대 부채로 앞을 못 내다보는 상황이었고, 레인보우 때의 DSP는 카라가 벌어다 준 현금으로 풍족한 상태였던 것을 생각하면, 소속사 사장 역할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스터를 타이틀곡으로 안 밀고 Wanna를 타이틀곡으로 민 것은 미스였다.
또한 일본에서 카라가 성공하는데에는, 인기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가 방송에서 카라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준 덕택이 컸다.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2009년말부터 카라를 열렬히 홍보했다. 이렇게 홍보한데에 이호연 사장의 역할이 나름 중요했다. 게키단 히토리가 일본 방송에서 카라를 홍보할 때 감동받은 일이라며 자주 말하는 일화가, 카라가 일본 진출하기 훨씬 전에 사적으로 DSP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 포스터를 받아왔다는 이야기다.[15]영상 사무실 앞에 어떤 경비원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라의 팬이라고 말하니 사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이 있는 포스터를 줬다고 한다. 사람 좋아보이는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도쿄 赤坂BLITZ에서 열린 카라의 라이브에 간 날 그 경비원 아저씨가 있길래 아는척 했더니, DSP 사장이었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이 이호연이었던 것이다ㄷㄷㄷ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이야기다.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게다가 게키단 히토리가 누군지 알 리도 없으니[16],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적당히 응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친절히 대접했고 그 결과 상상 이상의 홍보효과를 냈다.
참고로 이때 카라인도쿄 방송을 보면 이호연 사장이 일본까지 같이가서 챙기고 있다. 그런데 안색이 그냥 보기에도 안 좋아, 이미 뇌출혈의 징조가 있었다. 윤흥관 이사(카라가 아빠라고 부르던 분)는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카라의 일본 첫 쇼케이스 날 뒤에서 울다가 이호연 사장님에게 들켜서 한동안 놀림 당했다고 말한 바 있다. 윤흥관 이사는 2013년 카라의 첫 도쿄돔 콘서트 전날 다음과 같은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내일이다. 나가 이곳에서 공연을... 믿기지 않는다. 그리고 기쁘다. 눈물 날 정도로 ㅠㅠ 사장님께서 이걸 보셨음 많이 좋아하셨을텐데........"
4 안목과 줍줍...
이호연 특유의 안목과 인맥으로 DSP 아이돌은 항상 비쥬얼에 있어서 성공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호연과 DSP를 싫어하는 팬들도 인정할 정도다. 데뷔 시에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을 데려와서 데뷔시키기도 하고, 어디선가 불쑥 데려오기도 했는데, 데려온 멤버의 비쥬얼 자체는 물론, 기존 멤버들과의 조화도 매우 좋은 편이라 해당 그룹이 히트치는데 큰 역할을 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젝스키스의 멤버들, 오종혁, 유호석, 김현중, 구하라.
언론이나 방송에서 밝혀진 캐스팅 일화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효리의 캐스팅 비화를 보면, 이호연이 핑클 멤버 구성에 한참 신경을 쓰고 있을때, 강남역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이효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달려가 버스를 타던 이효리를 설득해 사무실로 데려왔다. 하지만 당시 이효리는 다른 매니지먼트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말도 안되는 계약조건이어서 즉시 소속 매니지먼트사에 항의해 이효리를 데려왔다고 밝혔다#. 이효리가 힐링캠프[17]에 출연해서 밝힌 일화에 따르면,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만나서는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켜보고 얼굴만 보고 바로 뽑았었다고 밝혔다. 이효리의 2집 앨범 땡스투에 "8년동안 든든하게 지켜주시는 우리 사장님 '나 이호연이야!' 그 말 오래오래 듣고 싶어요. 건강하세요.."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나 이호연이야'가 평소에 자주하는 말버릇이었다고 보인다. 참고로 이날 방송에서는 DSP 측에서 한혜진 미모 포텐을 알아보고 핑클에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한혜진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역대급 비쥬얼 걸그룹이 나올뻔 했다
이호연이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에 참여한 레인보우의 경우[18], 멤버 지숙이 2014년 2월 세바퀴에서 레인보우 멤버로 뽑힌 비화를 이야기했다. 당시 회사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소파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중후한 남성이 들어오더니 ‘너 뭐냐. 잠깐 들어와봐’라고 해서 들어갔다고 한다. 이어 그 남성이 ‘애들아 나와봐’라고 하자 6명의 멤버들이 나왔고, 그 사이에 서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너 다음 주부터 나와’라고 해서, 오디션을 보지도 않은 채 합격했던 일화를 밝혔다. 그 남성이 이호연 사장이다. 소파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팀의 메인 보컬을 노래도 안 듣고 뽑는 DSP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너무 좋은데[19] 왜 못 뜨는지 이해가 안 간다'며, '레인보우가 1위 하기를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반응인 것을 보면, 확실히 멤버는 잘 뽑아서 데뷔시켰다고 보인다. 그러나 데뷔시켜놓고 자기는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케어를 전혀 못해줬다
다른 DSP 가수들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일화들이 많다. 젝스키스의 고지용도 공항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이 그냥 바로 캐스팅 했다는 소문이 있고, 김재덕도 본인이 밝히길 사장이 그냥 처음 봤는데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바로 캐스팅 했다고 한다[20]. 장수원은 오디션장에서 사장의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 클릭비의 오종혁은 2006년 라디오에서 밝히길, 오디션 보러 DSP 사무실에 갔을 때 어느 경비원같은 후줄근한 옷입은 아저씨가 다가와서 '오디션 보러왔냐'고 묻길래 진짜 버릇없이 굴었다고 한다. 근데 그게 알고보니 이호연이었다.[21] 이외 카라의 강지영은 뽑아서 15일 연습시키고 데뷔시켰다... 전술했듯이 이효리도 춤 노래 아무것도 안 시켜보고 그냥 얼굴 보고 뽑았다.
이렇게 설렁설렁(?) 뽑은 멤버들이 이후 크게 활약한 것을 보면 감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타 90년대 초중반 이본, 오현경, 이승연, 이아현, 박소현[22] 등을 발굴한 사람도 이호연이다. (출처: #, #, #, #, 아궁이 160715일자 방송편 등)
한편 젝스키스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강성훈이 밝힌 바에 의하면, 멤버 캐스팅에 강성훈이 직접적인 관여를 했다고 한다. 당시 듀엣에서 급작스럽게 6인조로 바뀌자 강성훈이 탈퇴하려 했고, 이에 이호연이 나머지 4명은 너가 OK 하는 사람들로 뽑겠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디션장에서 강성훈이 이호연 옆에 앉아 같이 결정했다고 한다. 방송된 내용은 각주와 같다.[23] 한마디로 정리하면, 김재덕은 강성훈이 뽑기 싫어했고, 이재진은 이호연이 싫어했으나 강성훈은 마음에 들어 했는데, 김재덕과 은지원이 회사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고지용, 장수원은 사장이랑 강성훈 둘다 마음에 들어했다고 보인다. 한편 당시 상황에 대해 컴백 자서전에 나와있는 내용은 각주와 같다.[24]
이호연을 싫어하는 젝키 팬들은 이 방송을 계기로 "젝키를 만든 것은 강성훈이지, 이호연은 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멤버 구성에 강성훈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이호연의 공이 크다.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친분이 있던 하와이 클럽 사장에게 소개 받아 직접 데리고 왔다.[25] 이외 4명이 문제인데 고지용 영입은 전적으로 강성훈의 친구였던 사실 덕분이지만, 나머지 3명은 강성훈 아니었으면 젝키 멤버로 뽑히지 않았을거라고 볼 수는 없다.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김재덕의 경우 이날 방송의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이 사실 뽑기 싫어했다. 이재진의 경우 이호연이 코가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기존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은지원과 김재덕이 이호연을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영상 14분부터
이호연의 과거 아이돌들을 보고, 멤버 뽑기만 잘하지 이후 소속사가 별로 해준게 없다는 평도 있는데, 아이돌 시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인물 뽑기라는 생각이 전통적으로 강하게 잡혀있던 사람이었다고 보인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다. 즉, 아이돌은 일반 대중에게 있어 우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 우상이 되려면 뭔가 남다른 것을 '타고나야' 할텐데, 그것은 타고난 유전자/외모/근성/성장과정 같은, 후천적인 트레이닝이나 의술로 가질 수 있는 것과 구별되는 점들이다. 체계적인 트레이닝으로 노래나 춤 실력을 길러내고 외모도 후천적인 성형으로 갖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과 정반대의 방향이다. 이런 의견이라면 거의 누구나 아이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전술한 입장에서는 그런 경우 idol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아마도 그런 생각이 DSP와 이호연의 사고방식이었다고 보인다. 과거부터 DSP 출신 연예인들을 보면 타고난 외모나 근성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남들 눈치 안 보고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해도 보기 흉한 게 없는, 소위 구김 없는 면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부분은 성장 과정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들이다. 꼭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이 그렇게 유복스럽지 않더라도 여전히 구김없는 모습을 보여주는 애들이 있다. 아마도 그런 것이 스타의 근성 같은 것을 형성할 것이다. 일반 대중들이라도 그들의 눈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돌은 말 그대로 idol이어야지, 철저히 꾸며서 속인다 해도 어느 순간 한계를 드러낸다. 그 기준선을 감으로 잡아내서 idol이 될만한 인물을 뽑는 것이 DSP와 이호연의 역할이었다고 보인다.
5 DSP 소속가수 등과의 관계
소속가수들이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이호연 사장에 대해 언급한 바 등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젝스키스에서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영상 22초부터 강성훈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팬들은 (이호연 사장님을) 안 좋아하지만 DSP 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이재진의 경우 싫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기자, 답글로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26] 90년대 SM가수들이 지금도 수시로 이수만을 찬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호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편이다. 활동 당시의 많은 스케쥴, 정산문제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특히 이수만은 지금도 정상에서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이호연은 병상에 몇년째 누워만 있다는 이유가 클 것이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해체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 SS501의 김현중의 경우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호연 사장과 아버지, 아들이라 서로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DSP를 떠나기 전에 이호연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도저히 말이 안 떨어져 몇잔이고 술을 계속 마셨다고 한다. 그러다 이호연 사장이 '너 어떡할거냐? 있을거야? 말거야? 나갈려면 빨리 나가야지 서로 힘들게'라고 말했고, 김현중은 '사장님 곁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러자 이호연은 힘든 거 있으면 말하라고, 회사 못 구해도 도와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호연은 뇌출혈로 쓰러졌는데, 김현중은 지금도 병문안을 종종 가고 있으며 솔로로 1위를 하면 꼭 사장님께 수상소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후 솔로로 1위를 했을 때 그렇게 했다.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를 데뷔시켜주신 DSP 이호연 사장님을 요즘에도 가끔 찾아 뵙곤 해요. 건강이 조금 안 좋으셨는데 요새는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
- 활동 당시에 이호연이 김현중을 특히 아꼈다는 이야기가 돌긴 했다. 김현중은 로또로 100억원이 당첨되면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대해, 이호연 사장님께 10억원을 줄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꽃보다남자 촬영 이후 이호연은 김현중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사진
소문의 이미지랑 전혀 안 어울린다.이호연이 오늘날 김현중의 소송으로 얼룩진 삶을 보고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긴 하다. - 다른 멤버 김형준은 2016년 Double S 301로 컴백하면서, 지금도 DSP 최미경 사모님과 연락하며 지내고 있고 키워주신 이호연 사장님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김형준이 14살 때 이호연 사장이 직접 캐스팅해 데려왔었다. 김규종은 활동당시 공홈편지에서 평소 이호연이 '우리 오공돌이들~ 일로와봐~'라고 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 이호연은 2006년 연말에 SBS 연기대상 제작공로상을 탔었는데(당시 DSP 제작의 마이걸 등이 히트를 쳤다), 당시 방송을 보면 수상소감을 말하지도 않고 그냥 내려가버리려 한다. 그러자 MC가 수상소감 좀 말해달라 하니까, "감사합니다" 딱 이 한마디 하고 들어가버렸다. 자막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들어갔다. 향간에는 동시간대에 하는 MBC 가요대제전의 SS501를 서둘러 보러 가려고 했다는 말이 있다. 평소에도 이호연은 SS501 무대를 현장에 직접 가서 자주 지켜봤다. 이는 전술한 은지원의 발언에서 보듯이 젝스키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 핑클과는 매우 두텁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병실에 누워있을 때, 핑클 4명이 모두 찾아와서 이호연 사장이 좋아하던 노래 "루비"를 불러주며 눈물 지었다고 한다.# 활동 당시에는 핑클의 기행 항목에서 보듯이 화려한(?)일화들 떄문에, 이호연은 핑클을 망나니시스터즈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 이효리가 출연해서 말하길,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이외 솔로 1집이 대박난 이후로는 이효리가 예전과 달리 싫은건 싫다고 하자, 이호연 사장이 이효리한테 '아. 네! 이 사장님' 거렸다는 말도 있다. DSP 나가서도 리허설 무대 위에서 이호연 사장 보고서 인사할 정도면 확실히 친하게 지낸 것은 맞다고 보인다. 기타 다른 멤버들도 이호연 사장과 관계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데뷔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회사에서 나갈때도 매우 원만히 나가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옥주현은 2015년 핑클회동 당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며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 사장 역할이 컸음을 밝히기도 했다[27]. 또한 옥주현은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데뷔 일화를 밝혔는데#, 이호연이 스카우트로 풀어놓은 기자가 옥주현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이호연한테 데려갔다고 한다. 이호연은 옥주현을 처음 보자마자 왜 이렇게 뚱뚱하냐며 돌직구를 던졌는데, 옥주현은 나는 성악하는 사람이니까 상관없다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이호연은 너 아이돌 시켜준다는데 뭐가 싫냐며, 여자는 살빼고 쌍커풀 하면 확 바뀐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데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수술을 안 시켜주다가 뒤늦게 시켜줘서, 데뷔하고 쌍커풀 부운 채로 활동했다고...[28]
- 카라의 경우도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 DSP의 상황이 어려워져 카라가 해체위기일 때 끝까지 지킨 것이 이호연 사장이다. DSP가 상장사 시절 제작했던 드라마 연개소문이 크게 실패하면서 자본잠식을 당한다. 당시 지분은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대부분 가지고 있었다. 곧바로 소집된 주주총회에서, 적자폭이 커진 부분을 가지치기 하고 회사를 살리라는 압박이 들어온다. 이 가지치기 대상이 바로 드라마, 예능부분 사업을 접고 걸그룹 카라를 해체시키는 것이었다. 3회에 걸친 회의 끝에 이호연 사장이 내린 결론은 지원 안받고 '지분 다 내놓고 합병 파기 자본잠식으로 상장폐지...그래서 SS501 & 카라 데리고 나옴'이었다. 이후 카라가 일본에서 초대박을 쳐서 회사를 살렸던 것을 생각하면 신의 한수였다. 정작 자신은 카라의 일본 진출 후 얼마되지 않아 뇌출혈로 쓰러져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 카라가 처음으로 공중파 가요프로에서 1위를 한 날, 이호연 사장이 멤버 전원에게 청담동 명품샵에서 명품백을 하나씩 사줬다고 한다.
-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이 발생한 결정적 이유 중 하나가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점이다. 카라 측은 신뢰관계가 있던 이호연 대표가 투병을 시작한 시점부터 소속사와 신뢰가 깨졌다고 밝혔다. 사장님은 믿지만 회사는 믿지 못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카라 멤버들은 이호연 사장 병실에 찾아가려 했지만, 회사 측에서 막았다고 한다. 구하라의 경우, 병상에서 누워있는 아버지 같은 이호연 대표를 떠날 수 없어 소속사에 잔류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 같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실제로 이호연이 구하라를 특히 아꼈다는 이야기가 돌긴 했다. 2010년 6월 5일 김정은의 초콜릿 방송에 이효리가 출연해 다음의 에피소드를 말했다. 한번은 이효리가 구하라를 불러내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구하라가 다음날 스케쥴 중 구토를 했다. 그러자 이호연이 이효리한테 전화를 걸어 ‘너 그 버릇 아직도 못 고쳤냐’며 혼냈다고 한다.
- 2013년 도쿄돔 공연 당시, 리더 박규리가 마지막 멘트를 할 때 이호연 대표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2015년에 이호연이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을 받을 때는 박규리와 한승연이 대리수상하며 "이호연 사장님이 직접 나오셨더라면 좋았겠지만 DSP의 맏언니로 우리가 나오게 됐다. 사장님은 말보다 항상 행동으로 보여주셨던 멋진 분이다. 이런 행동들로 이 상을 받으시게 된 것 같다. 잘 전해드리도록 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전했다.
- 기타 가수들의 일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 한국의 전설적 밴드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은 80년대 아시아의 인어라 불리던 최윤희와 결혼하며 범국민적 패닉을 불러일으켰는데[29], 이 때문에 결혼식은 절에서 극비리에 진행됐었다. 훗날 라디오스타[30]에서 밝히길 당시 결혼식에 이호연 사장이 참석했다고 한다.
- 2016년 6월 24일 방송된 MBC FM4U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에 룰라의 김지현과 채리나가 출연했다. 알다시피 채리나는 무섭고 싸움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날 방송에서 채리나는 룰라 시절 후배들을 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사연을 밝혔다. 채리나는 혼낸 적은 없고 혼난 적은 있다며, 젝스키스 인사를 안 받아준다고 그쪽 대표님인 이호연 사장한테 혼났다고 말했다. 이어 채리나는 “그때 당시 저희가 선배인데 젝스키스가 인사를 건성으로 하더라. 그래서 받아주기 싫었다. 이후에는 친해져서 오해를 풀었다”며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 걸그룹 여자친구의 리더 소원은 과거 DSP 연습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DSP에서 3년 6개월의 트레이닝 기간을 거쳤고 쏘스뮤직으로 이적한 후 다시 1년 6개월 간 트레이닝을 받았다. 시기를 계산해보면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지기(2010년 3월) 직전에 DSP에 들어왔다. 이때만 해도 위세있는 소속사 중 하나[31]였기 때문에, 당시에 외모나 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급이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후 소원은 데뷔일정이 계속 미뤄지다가 쏘스뮤직으로 이적했고, 걸그룹 여자친구로 대박을 터뜨린다.
- SM 인물들과도 연이 있다. 김민종과 친해서 핑클이랑 김민종을 데리고 일본으로 놀러 간 적이 있다고 하고#, S.E.S. 유진이 유일하게 주연을 맡은 영화 "그 남자의 책 198쪽"의 제작자가 이호연이다. S.E.S. 유진의 경우 핑클이 활동할 때 그렇게 라이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의아하긴 하다.
- 전술한 설명 중 타 연예인과의 일화를 뽑아서 보면 다음과 같다.
- 일본에서 카라가 성공하는데에는, 인기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가 방송에서 카라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준 덕택이 컸다.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2009년말부터 카라를 열렬히 홍보했다. 이렇게 홍보한데에 이호연 사장의 역할이 나름 컸다. 게키단 히토리가 일본 방송에서 카라를 홍보할 때 감동받은 일이라며 자주 말하는 일화가, 카라가 일본 진출하기 훨씬 전에 사적으로 DSP 사무실에 직접 찾아가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 포스터를 받아왔다는 이야기다.[32]영상 사무실 앞에 어떤 경비원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가 카라의 팬이라고 말하니 사무실로 친절하게 안내해서 멤버 전원의 친필 싸인이 있는 포스터를 줬다고 한다. 사람 좋아보이는 친절한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도쿄 赤坂BLITZ에서 열린 카라의 라이브에 간 날 그 경비원 아저씨가 있길래 아는척 했더니, DSP 사장이었다고 한다. 즉, 그 사람이 이호연이었던 것이다ㄷㄷㄷ 뇌출혈로 쓰러지기 얼마 전의 이야기다.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게다가 게키단 히토리가 누군지 알 리도 없으니[33],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적당히 응대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장이 직접 친절히 대접했고 그 결과 상상 이상의 홍보효과를 냈다.
- 태진아 초창기 때 매니저를 해준 인연으로 태진아와 친분이 두터운데, 태진아는 이호연이 쓰러진 뒤 카라 사태가 터지자 발벗고 나서주며 상황을 해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태진아 아들 이루의 까만안경 뮤직비디오에 김현중을 출연시키기도 했다.
- 여러모로 악명 높은 MBK엔터테인먼트의 김광수 사장도 이호연이 정정한 시절에는 이호연을 형님으로 모셨었다. 그런데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뒤 카라 사태가 터지자, 김광수가 구하라를 노리며 카라 해체를 주장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 빈축을 샀었다.
역시 김광수 클라스
6 젝스키스 팬덤과의 관계
6.1 최악으로 치닫은 관계
젝키 팬과의 이호연의 관계를 보면, 젝스키스 활동 당시 오빠들을 무리한 스케쥴로 혹사시켜서 번 돈을 젝키에게 제대로 안 주고 핑클에게 쏟는다며 이호연 사장을 엄청 욕 했고, 핑클에 대한 안티 활동도 심했다.#[34] 이후 젝스키스가 해체하면서 그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훗날 멤버들 말에 따르면 강제해체는 아니고 해체 의향이 있는 멤버들이 있었다. 다만 해체에 소속사 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무튼 당시 팬들은 해체 전날 멤버들이 전화로 일방적으로 해체를 통보 받고 강제 해체 됐다고 굳게 믿었다.(심지어 오늘날도 그렇게 믿고 있는 팬들이 있다.)
그렇게 믿은 결과의 상징적인 예시가 조영구 차다. 젝키가 해체한 날 팬들이 몰려가 조영구 차를 이호연 차로 생각하고 반파될 정도로 완전 부셔버렸다.영원히 고통받는 조영구 차종이 그랜저 XG로, 산 지 보름도 안 된 것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차 안에 있던 조영구씨의 옷가지나 소지품 등도 도난당했다. 기사, 기사 이로 인해 현장에서 몇 명의 고교생 팬들이 경찰에 잡혀 파출소로 연행되었을 때 조영구가 차마 학생들을 처벌해달라고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차비까지 줘가며 집에 보냈다고 훗날 토크쇼에서 밝혔고[35], 이후 팬클럽에서 공식적으로 조영구에게 사과를 하고 조영구도 용서를 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됐다. 팬들이 십시일반으로 보상금을 모금하기도 했으나 모금한 인원이 20여명이었고,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모은 돈인지라 액수가 적어 조영구 측에서 거절했고[36], 보상은 젝키 소속사 이호연 사장에게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수리비 견적이 1100만원이 나왔고, 1100만원 전액 이호연 사장이 보상했다고 밝혔다.기사.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고급 차종이 반파됐는데 겨우 1100만원 보상하냐고 볼 수도 있는데, 당시 그랜져 XG의 신차가격이 2000만원 할 때이다.기사 저 정도 수리비면 아예 다 갈아엎어 수리한 정도다.
이외 당시 "미친 개호연 새끼 뒈지는 날 우리젝팬들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핀다."는 문구로 회사 사장 이름을 대놓고 욕하며 활보하고 다녔다.사진 그나마 이런 문구는 애교로 보일 정도인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었다. "D.S.P 두고 보자 / 개좇십창 창녀 썅클 / 썅클은 창녀래요 / 뻑큐 씹탱 개호연 / 이호연 죽여라 / 창녀 핑클 / 이호연 너 나랑같이 죽자 / 이호연 너의 정력에 무릎을 꿇는다 / 이호연 제삿상에 옥돼지 머리 놔주마. / - 호연씨 사랑해요. 당신의 효리가 - / 이호연 너의 그녀들을 찾으려면 창녀촌으로 오너라 / 나는 개호연이다 나는 미친놈이다 나는 오늘 뒈졌다 속보 6월18일 2시 이호연 젝키팬에게 맞아 사망."# 오늘날 이수만이나 양현석, 박진영을 상대로 저런 행동을 하면 바로 경찰서 갈 각이다. 그리고 2000년 6월 8일 시사프로 피자의 아침 방송을 보면 당시 사무실 경호회사 직원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하고 있다. "18일..농성을 부리고 여기에다 계란 세례나 밀가루, 식초 이런 것들을...난동을 부려가지고..."
젝키가 재결합하며 팬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이호연에게 쌍욕하는 글도 다시 많아졌다.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노인네가 갑자기 젝키 팬들에게 각종 쌍욕과 패드립을 엄청 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과장과 허위 정보를 가지고 욕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젝키 데뷔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신규 입덕한 애들도 올드팬들 말에 따라 "개호연새끼 뒤져라"는 등의 소리를 외치고 있고, 그러면서 서로 결속력을 다지고 있다. 요즘 악플에 대한 고소와 처벌 사례를 비추어 봤을 때, 지금까지 올라온 글들을 보면 빼박캔트 처벌 당할 글들이 꽤 많다. 욕 자체가 걸릴 수위인 것은 물론, 내용이 허위사실인 경우가 상당히 있기 때문이다. 이호연은 어짜피 말도 못하는 상태로 누워만 있으니 자신이 직접 고소할리는 없겠는데, 회사 대표로 있는 부인이 하면 가능하기는 하다.요즘 DSP 돈도 제대로 못 벌던데, 이런거로나 돈 버는건 어떨지 그래도 팬들도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인지, 젝키 활동 시절 올라오던 각주와 같은 수준 낮은 주작 글은 보이지 않는다.[37]
젝키 팬들은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로 아래 목차에서 나오는 소문을 든다. 하지만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맞는 말도 있지만, 상당부분 과장되거나 허위사실인 점이 있어 문제다.
6.2 젝키 재결합 후 나온 DSP의 언플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은 분노하여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38].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쳐먹게 되었다. 이호연에 관해 정산, 해체, 대우 등에 있어 퍼진 평판과 루머가 악플의 발단인데, 각 주제에 대해 서술된 바(정산, 해체, 각종 루머)를 보면 맞는 말도 있지만 상당부분 틀린 말이 있는 점은 문제다. 하지만 젝키 시절 잘못한 점이 없다 할 수 없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고 비쳐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호연 사장을 욕받이로 세워놓고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 DSP 측의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현재는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인 것이다. 이호연 사장을 욕받이로 세워놓고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 DSP 측의 멍청한 행동이었다고 보인다. 사장이 쓰러진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놀랍지 않기는 하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렇게 네이버 메인에 뿌릴 내용이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뿐이다.
사실 이 정도면 이호연 엿먹일려고 일부러 저런 기사 썼다고 볼 수준이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을 보면 맞는 말도 있지만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힘들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가 있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전부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언플에 대해 젝키 팬들은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에게 병문안 겸 인사 가는 것 자체도 말이 안된다고 본다. 하지만 젝키 팬덤이 이호연과 전술한 바와 같은 최악의 관계인 것이지, 위 목차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젝키 멤버들이 이호연과 그 정도로 최악의 사이는 아니다. 이외 팬들은 이호연과 소속사는 젝키에게 제대로 해준 것이 없고, 젝키 멤버 본인들 매력과 능력으로 뜬 것인데 뭔 염치없는 소리를 하냐는 반응이다. 하지만 지금 아이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점을 잊은 듯 하다. 소속사가 키우는 것이 아이돌이다.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아래 서술하는 바와 같이 DSP와 이호연이 키웠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선 S급 멤버들이 한 팀에 모인건 DSP 이호연 역할이 컸다. 2016년 라디오스타 방송(젝스키스 멤버 항목에 설명 있음)을 계기로 일부 팬들은 강성훈이 젝키 멤버를 구성한 것이지 이호연은 젝키를 만든 것에 1도 한 것이 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막상 내막을 살펴보면 고지용을 제외하고는 이호연의 공이 크다. 자세한 내용은 각주 참조.[39] 그리고 젝키의 뮤비 퀄리티가 안좋긴 하지만, 대신 비싸고 좋은 작곡가는 많이 섭외해서 겨우 3년 활동인데도 명곡들이 즐비하다. 해체 후 16년이나 지나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지만 오늘날 들어도 좋은 노래가 많아 세트리스트를 충분히 채웠다.[40] 이에 대해 팬들은 작곡가가 곡을 만든거지 이호연은 한게 뭐냐고 욕하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다. 기획사가 아이돌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가 좋은 작곡가로부터 대박날만한 곡을 받아오는 일이다. 이 능력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성공이 결정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2016년 기사만 봐도,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이호연이 쓰러진 이후의 DSP가 레인보우에게 블랙스완같은 망곡을 주며 못 띄우는 것만 봐도, 소속사 사장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이외 이호연 까는 용도로 '젝스키스라는 이름 조차 MBC PD가 지어줬는데 이호연은 한게 뭐냐'는 말이 많은데, 그 MBC 은경표 PD가 이호연 인맥이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을 스카웃 했을 때, 이호연이 하와이에 간 이유가 은경표 PD랑 놀러간 것이었다. 사장이랑 친분이 두터우니 고민을 거듭해서 젝스키스라는 끝내주는 이름을 지어준거지, 그런 인맥이 아니었으면 이름을 지어줄 리 없었다. 애초에 데뷔하자마자 H.O.T.의 라이벌 포지션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주요 방송에 출연한 것은, DSP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당시의 DSP 위상은 지금과 전혀 다르다). 이후 당시 최고로 인기있던 프로그램들에 젝키가 무수히 많이 출연했는데, 이 역시 소속사의 파워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스케쥴을 매우 빡세게 돌려 원망을 들었지만, 그렇게 쉴 새 없이 앨범을 내며 몰아부쳐 H.O.T.를 따라잡았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2011년 해피투게더 해당영상 6분 20초부터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기서 은지원이 밝힌 바에 따르면, H.O.T.와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데뷔초에는 인기 격차가 너무 커서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H.O.T.는 활동 후 휴식기가 있던 반면, 젝스키스는 전혀 쉬지 않고 1년에 2~3장 씩 앨범을 내며 활동해서 팬을 늘려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그렇게 쉬지 않고 활동한 기간(97년 4월 15일 ~ 99년 1월)의 마지막인 3.5집 커플에서 H.O.T.를 이겼었다. 강타가 무릎팍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젝키의 3.5집 커플에 처음으로 지면서 위기감을 느꼈었다고 한다.[41] 근본적으로 DSP 자체가 거의 이호연 사장의 카리스마, 인맥, 그리고 감으로 유지되던 회사였다. 그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DSP가 쇠퇴하자 이 점이 더욱 부각됐고, 이호연의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기사들도 나왔다.[42] 당시 아이돌 시장이 막 형성되고 있던 상황이라, DSP와 이호연 이외에 H.O.T. 라이벌을 키워낼만한 역량을 가진 곳은 없다시피 하기도 했다. 2016년 라디오스타에 젝키가 출연했을 때 해체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자, 사장님과의 관계 때문은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도의적으로 뇌출혈로 6년째 누워있는 사장한테 인사 좀 하러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7 젝스키스와 관련된 소문과 진실
2016년 무한도전 방영 이후 과거 젝키가 당했던 일이라며 각종 커뮤니티에 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그러나 맞는 말도 있긴 하지만, 상당 부분이 과장되거나 허위사실이어서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를 참조 바란다.
8 경력
약력
2008 ~ 2010 DSP미디어 대표이사
1991 ~ 2008 DSP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성균관대학교 체육학
수상 경력
2015년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2009년 제24회 골든디스크 시상식 제작자상
2006년 SBS 연기대상 제작공로상
1999년 제10회 서울가요대상 최고 인기가요 기획상 外
제작 드라마
SBS 세잎클로버
SBS 마이걸
SBS 그여자
SBS 연개소문
SBS 외과의사 봉달희
SBS 불량커플
제작 예능
KBS 박수홍 최원정의 여유만만
KBS 경제비타민
KBS 좋은나라 운동본부
제작 앨범
김규민 1집 [옛이야기]
ZAM 1st [난 멈추지 않는다]
ZAM SBS드라마 [공룡선생] OST
ZAM Secret (Remix Ver)
ZAM 2nd [어색한 느낌]
ZAM 3rd [나만의 이유]
조진수 1st [너와나]
CO CO 1st [그리움으로 지는 너]
CO CO 2nd [요즘 우리는]
MUE 1st [새로운 느낌]
MUE 2st [나의 또 다른 모습]
IDOL 1st [BOW WOW]
마운틴 1st [TANGO TANGO]
IDOL 2nd [환상체험]
젝스키스 1st [학원별곡]
젝스키스 2nd [기사도]
김효수 1st [또 다른 시작]
젝스키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젝스키스 3nd [ROAD FIGHTER]
젝스키스 3.5 [커플] SPECIAL
FIN.K.L 1st [BLUE RAIN]
FIN.K.L 2nd [영원한 사랑]
FIN.K.L 1st [Live Concert]
FIN.K.L [To My Prince] Special
클릭비 1st [Promise]
젝스키스 [BLUE NOTE]
FIN.K.L 3nd [now]
클릭비 2rd [환영문]
클릭비 [Live Festival]
엄지선 [꿈이라도]
FIN.K.L [Memorise & Melodies]
클릭비 3rd [백전무패]
클릭비 3.5 [너에게]
Travis 1st [Yesterday]
FIN.K.L SBS 드라마 Special [나쁜 여자들]OST
FIN.K.L 4th [영원]
클릭비 4th [Cowboy]
옥주현 1st [난]
2Shai 1st [Love Letter]
이효리 1st [10Minutes]
클릭비 Best Of 클릭비
Shyne 1st [Too Late]
옥주현 2nd Chtch
FIN.K.L 디지털음반
SS501 경고
SS501 Snow Prince
이효리 2집 " Dark Angel"
투샤이 2집 (2SHAI) "그녀...웃었다."
SS501정규1집 [SS501 S.T 01 NOW]
KARA 정규1집 [The First Blooming]
1ST SHOWING SUN HA[宣 河] FAHRENHEIT
SS501 Single 3rd Album [데자뷰]
A'ST1 Single 1rd Album [1,2,3,4 BACK]
SS501 Special Album [FIND]
KARA MINI Album [Rock U]
SS501 Special Album [U r Man]
- ↑ 1997년에 스포츠과학과 라는 이름으로 학과명이 변경된다. 이 학과는 현재 수원 율전 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호연 사장이 재학하던 당시에는 서울캠퍼스에 속해있었고, 1999년에 수원 율전캠퍼스로 이전하였다.
- ↑ 과거 태권도 선수였었다고도 한다
- ↑ 당시 기사 원문: ‘SM기획’과 ‘대성기획’은 그 중 단연 두드러지는 곳. SM기획(대표 이수만)은 H.O.T S.E.S 신화를, 대성기획(대표 이호연)은 젝스키스와 핑클을 배출해 가요 시장의 권력을 장악했다. 요즘 가요계를 ‘수만이와 호연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1]
- ↑ 멤버 한명 한명 너무나 잘 뽑아놓고 데뷔는 시켰놨는데, 사장이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회사가 기울었다. 이후 멤버들 능력치에 비해 제대로 서포트를 못받았다는 평이 많다. 레인보우에 대한 세간 평가가 '멤버 개개인은 너무 좋은데 왜 안 뜨는지 모르겠다'며 '레인보우가 1위하길 온 우주가 기원한다'는 식인데 괜히 그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 ↑ 최근 언론에서 밝혀진 것들만 보면, 옥주현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었고#,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의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 ↑ 기사원문: 이호연 대표는 국내 매니지먼트 1세대 출신으로서 젝스키스, 핑클, 클릭비, SS501, 카라, 레인보우 등 대중들에게 오랜 시간 큰 사랑을 받은 뮤지션들을 기획, 제작하여 한국의 음악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카라의 경우 국내 걸그룹 최초로 첫 도쿄돔 단독 공연을 기획, 개최하는 등 한류열풍을 이끄는데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이호연 대표는 TV드라마 '마이걸', '연개소문', '외과의사 봉달희' 등을 제작.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미디어사업 분야에도 기여한 점이 이번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표창 수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 ↑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 ↑ 최근 언론에서 밝혀진 것들만 보면, 옥주현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었고#, 젝스키스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 폼생폼사는 이호연의 인맥으로 신인 작곡가를 발굴해 대박을 터뜨린 사례다.#
- ↑ 컴백 자서전 강성훈 어머니 부분: "저 가수가 될래요." 너무나 갑작스러운 전화에 나는 몹시도 당황했었다. 한국에 있어도 불안했을 텐데, 미국에서 가수제의를 받았다는 말에 나는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늘 아들을 믿었던 나는 무작정 반대만을 할 수는 없었다. 성훈이에게 가수가 될 것 을 제의했다는 기획사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걱정과는 달리 DSP는 평판이 좋은 기획사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음을 바꾼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이호연 사장님을 만나면서였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훈이는 재능이 많은 아이입니다. 키워보고 싶습니다." 한시름 놓긴 했지만, 사실 성훈이의 첫방송을 보기 전까지 마음속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 김재덕 아버지 부분: 서울에 올라가서 가수가 되겠다고 했을 때도 차마 말릴 수 없었다. 부모로서 특별히 잘해 준 게 없이 때문에 저 좋아서 하겠다는 데 말릴만한 명분이 없었다. 더욱이 사장님께서 함께 부산에 내려오셔서 "염려하지 마세요, 좋은 가수로 키우겠습니다"하는 바에야..
- ↑ 원문: ‘SM기획’과 ‘대성기획’은 그 중 단연 두드러지는 곳. SM기획(대표 이수만)은 H.O.T S.E.S 신화를, 대성기획(대표 이호연)은 젝스키스와 핑클을 배출해 가요 시장의 권력을 장악했다. 요즘 가요계를 ‘수만이와 호연이의 전성시대’라고 부를 만큼 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
- ↑ 옥주현은 2015년 핑클 회동 당시 페이스북 글에서,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의 판단과 추진력이 크게 작용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해당부분: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후략)
- ↑ 기사.
- ↑ 이호연이 했다고 보기는 어렵긴 하지만, 이제 일반화가 된 역조공은 카라가 처음으로 했다.
- ↑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
- ↑ 당시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
- ↑ 120416일자 방송
- ↑ 데뷔하고 거의 곧바로 이호연 사장이 쓰러졌다. 데뷔는 시켜놨는데 케어는 전혀 못해준 셈이다.
- ↑ 김재경은 연습생 당시에도 에이스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고우리는 공중파 드라마에 조연으로 활발히 출연 중인데, 비쥬얼이 원래 배우인 것 같다는 평이다. 조현영도 남초 사이트에서 매우 흥했었다.
- ↑ 그래서 김재덕 본인은 자기가 얼굴이 잘생겨 뽑힌줄 알았다고 한다.
- ↑ 전술한 일본 개그맨 게키단 히토리와의 일화에서도 이호연을 경비원으로 착각한 것을 보면, 평소에 옷을 그렇게 입고 다녔다고 보인다
- ↑ 첫 매니저가 DSP의 길종화 이사였다.# 2016년 젝키가 재결합하며 강성훈이 박소현의 러브게임에 출연했는데, 연습생 시절 강성훈과 은지원이 원래 듀엣으로 데뷔하려던 모습도 다 알고 있었다.
- ↑ 장수원은 오디션 장에서 할 줄 아는게 없다고 말하는 순수함이 마음에 들어, 강성훈이 사장한테 귓속말로 "쟤 픽스 하시죠"라고 말했다고 한다. // 김재덕은 워낙 춤을 잘 추니 사장이 처음부터 OK 했다. 근데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은 김재덕 얼굴을 보고 뽑기 싫어했다고 한다. 이에 강성훈이 해명하길, 얼굴이 아니라 사투리가 너무 쎄서 오해했다고 밝혔다. // 이재진은 강성훈 덕에 뽑힌 측면이 크다고 보인다. 강성훈 생각에 김재덕이 각기춤을 잘 추는 반면 이재진은 웨이브를 잘 춰서 조화가 맞아 보였다고 한다. 추가로 영입한 4명의 멤버 중 이호연이 반대한 멤버는 이재진이다. 99년 서세원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해당영상 14분부터), 이호연은 이재진을 보고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과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 이호연 사장에 대해 공개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낸 유일한 멤버가 이재진인 것을 보면,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 고지용은 강성훈과 초등학교때 부터 친구인데, 강성훈의 추천으로 젝키에 합류하게 됐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호연이 처음 얼굴 보자마자 바로 OK 해서 멤버로 영입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이날 강성훈의 고지용에 대한 발언은 부정확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지용이 강성훈한테 가수를 먼저 하고 싶다고 말했다'라는 것은 상당부분 전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편집상의 문제라고 보인다. 고지용은 자서전에서나 인터뷰에서나 늘상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다고 언급해왔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에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즉, 강성훈의 말에서 '고지용이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라는 것은 먼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자기 의견을 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강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뒤 설득 끝에 승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 ↑ 원문: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창 5명에서 6명 정도의 댄스그룹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는 멤버의 수가 6 명이 될 것이라는 사실에 실망했다. "사장님, 동물원 원숭이도 아니고 멤버가 그렇게 많은 그룹에서는 노래부르기 싫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배짱이 튀어나왔는지 겁도 없이 사장님께 털어놓았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수의 꿈을 접고 다시 공부에 매달렸다. 사장님은 나를 설득하시는 한편, 어머니를 만나 내 마음을 돌려달라고 부탁하셨다.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번 품은 가수의 꿈이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이때 나의 마음을 돌려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성훈아, 비록 어리지만 사장님과 이미 한 약속은 지켜야 되지 않겠니? 그리고 쉽게 네 꿈을 접을 수 있겠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 "어머니, 한번 해볼게요. 그 대신, 열심히 할 게요." 그리고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은 지금의 멤버들을 하나 둘 만나면서부터였다. 착하고 세련된 느낌의 수원이, 워낙 춤을 잘 추는 재덕이형과 재진이형을 보니 더욱 믿음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소개한 지용이. 지용이는 전교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어릴때부터 나와 붙어다니던 춤꾼 중에 춤꾼이었다. 이렇게 여섯 명이 모이자, 나는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고 잘해낼 자신감이 생겼다.
- ↑ 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 ↑ 젝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호연의 감이 적중했는지훗날 이재진은 젝키의 YG행에 큰 공로(?)를 하게 된다... - ↑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 ↑ 기타 정선희가 여걸파이브에서 밝히기를, 사장이 당시 "물건이 들어왔는데 좀 커"라고 했다고 한다ㅋㅋ
- ↑ 오늘날로 따지면 김구라와 김연아가 결혼하는 꼴이라는 말도 있다
- ↑ 2011년 05월 18일자 방송
- ↑ 물론 SM이랑 2대기획사로 겨루던 시절에서는 내려온 상태였지만, 여전히 위세는 있었다. 2006년에 200억 들인 드라마 연개소문이 망하면서 회사가 힘들긴 했지만, 이후 드라마 사업에 빠져있던 이호연이 아이돌 제작으로 돌아와 손을 보면서 다시 살아났다. SS501은 암욜맨과 꽃보다 남자로 크게 히트쳤고, 카라도 앨범 프리티걸이 성공하면서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2009년 카라가 미스터와 엉덩이춤으로 대박을 냈고, 이걸로 2010년 일본 시장을 휩쓸며 돈을 쓸어담기 직전인 시기였다. 또한 레인보우도 멤버들을 정말 잘 뽑아놓고 데뷔시킨 상태였다.
- ↑ 풋스마 20110308일자, 메렝게의 기분 20110204일자, How to モンキーベイビー!2009년 11월 방송 등
- ↑ 자신이 일본의 개그맨이라고 말은 했다지만, 카라가 일본에 전혀 진출하지 않은 상태고 한국에 유명한 일본 연예인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하는게 보통일 것이다
- ↑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밝히길, 활동 당시 자기가 화장실 안에 들어가자 안티팬들이 입에 담지도 못할 더러운 쌍욕을 했다고 한다. 성유리는 그 시절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교복입은 여학생들만 봐도 식은땀이 흐른다고 한다.
- ↑ 정식으로 보험처리를 하려면 일단 학생들을 처벌해야 했는데 차마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 ↑ 조영구 본인이 놀러와 방송에 출연했을 당시 20명 밖에 모금을 안했다고 직접 말했다.#
- ↑ , 오늘날 보면 손발 오그라드는 수준의 주작 글을 올리며 핑클과 클릭비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들거나##, 이효리가 이호연 애를 낙태해서 핑클한테 대상줬다는 식의,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미 먹을 주작글도 꽤 보였다.# # # # # # #
- ↑ 2016년 5월 6일 기사가 올라왔으며, 댓글 수는 오후 3시 40분 기준 3,978개.
그 와중에 네x버는 기사 순위 내리는 중. - ↑ 일단 은지원, 강성훈 2명은 이호연이 친분이 있던 하와이 클럽 사장으로 부터 소개 받아 직접 데리고 왔다.(SBS 땡큐 130329일자 방송) 이외 4명이 문제인데 고지용 영입은 전적으로 강성훈의 친구였던 사실 덕분이지만, 나머지 3명은 강성훈 아니었으면 젝키 멤버로 뽑히지 않았을거라고 볼 수는 없다. 장수원은 기존 인터뷰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사장도 강성훈과 마찬가지로 솔직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해서 뽑고 싶어 했다. 김재덕과 이재진은 이호연이 인맥이 있던 이주노 소속사에 찾아가 직접 데려온 인물이다. 김재덕의 경우 이날 장수원 폭로에 따르면 강성훈이 사실 뽑기 싫어했다. 이재진의 경우 이호연이 코가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기존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은지원과 김재덕이 이호연을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영상 14분부터 한편 고지용의 경우도 이날 강성훈은 고지용 쪽이 먼저 가수가 하고 싶다고 자기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는데, 기존에 고지용이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는 가수를 할 생각이 없었고 방송에서도 사업가가 꿈이었다고 얘기했다. 또한 가수를 하게 된 계기를 물었을 때도 '성훈이의 추천으로' 라고 대답했었다. 즉, 강성훈의 말에서 '고지용이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라는 것은 먼저 가수를 하고 싶다고 자기 의견을 낸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강성훈의 제안을 거절하고 난 뒤 설득 끝에 승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이호연은 고지용 얼굴을 처음 보자마자 바로 OK해서 캐스팅 되는데 문제는 없었다. 핑클의 옥주현처럼 강성훈이 젝키 멤버 구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맞지만, 강성훈이 젝키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 ↑ 수록곡 중에서도 명곡들이 많다. 뫼비우스의 띠 같이 '이게 젝키 노래였어?'라고 하는 곡들도 상당수 있다.
- ↑ 아무튼 팬들 입장에선 음악방송이며 각종 예능에서 거의 1년 내내 젝키를 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에 익숙한 일부 올드팬들은 재결합 후 젝키의 신곡 활동이 2~3주란 소리를 듣고 적응 못하고 있다.
- ↑ 원문: 업계 관계자들은 “DSP가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 데는 DSP의 설립자인 이호연 대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이 대표가 DSP 설립 초부터 줄곧 기업의 경영·기획 등을 비롯해 가수의 앨범 제작까지 손수 돌보며 기업의 성장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 대표는 1981년 한밭기획, 1989년 대성기획 등을 거쳐 1991년 DSP를 설립했다. 실력 있는 제작자로 유명세를 탄 후 데뷔시키는 가수마다 정상에 올려 ‘스타제조기’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큰 부침 없이 기업의 덩치를 키워내 경영 능력 또한 높이 평가받았다.# // 원문: 대성기획의 수장은 80년대 소방차를 대스타로 만들었으며, 90년대 잼 젝스키스 핑클, 2000년대 SS501 등 수많은 스타 아이돌 그룹을 탄생시킨 이호연 대표였다. 물론 이호연 대표는 DSP의 사장도 맡았다. 추진력과 스태프 관리에 있어 가요계 최고 수준이었던 이호연 대표가 일선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절, 대성기획 및 DSP는 이수만 사장의 S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사실상 국내 양대 가요 기획사로 군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