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Attachment/콜트 M1911/Alvin.jpg |
이름 | 앨빈 요크(Alvin C. York) |
생몰일자 | 1887년 12월 13일 ~ 1964년 10월 2일 |
국적 | 미국 |
최종계급 | 병장 |
참전내역 | 제 1차 세계대전 |
1 개요
미국의 군인.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미군들 중에서 존 조지프 퍼싱 원수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1차대전판 존 바실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2 생애
2.1 전쟁 이전
1887년 12월 13일에 미국의 테네시 주에서 11명의 형제 중 세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주 가난했고 요크는 어려서부터 대장장이로 일을 하며 가족을 위해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는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학교를 곳을 9개월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것도 초.중.고 다 합해서! 대학교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러다 1911년, 부친이 돌아가시고, 두 명의 친형들은 결혼을 해 가족을 떠나자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서 모친를 도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는 목수, 노동자, 대장장이 등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29살이 되던 1917년에 군대에 징병되는 걸 거부하였다. 요크는 절실한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걸 원치 않았고독일 제국군: ?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요크는 강제로 징병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숙부가 대신 돌봐주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요크도 마음 편히 입대할 수 있었다. 그는 1917년부터 조지아 주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2.2 제1차 세계대전에서
요크는 징병된후 1918년 1월, 프랑스 아미앵에 도착하였다. 미군이 처음 1차대전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였던 아르곤-뫼즈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1918년 10월 8일, 생미엘 전투 당시 그의 분대장이였던 버나드 얼리 병장의 지휘 아래, 당시 상등병이였던 요크를 포함한 4명의 상병들과 13명의 일.이병들은 참호들을을 넘어가 223고지에 있는 독일 제국군의 MG08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란 명령을 받았다. 요크와 병사들은 적의 MG08 진지를 급습하여 기관총사수를 죽이고 MG08을 빼앗았고 여러 명의 독일 MG08 부사수들을 잡았다. 요크와 병사들이 임무가 순조롭게 풀리는 줄 알았던 그 때, 갑자기 반대편 언덕 위에서 또 다른 MG08이 요크와 병사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순식간에 분대장이였던 얼리를 포함한 6명의 미군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을 입게 되었기 때문에 얼리의 뒤를 이어 그 다음으로 계급과 경력이 많았던 요크가 분대장이 된다. 갑작스런 독일 제국군의 급습에 요크의 휘하에는 고작 7명의 이등병들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요크는 남아있는 7명의 이병들에게 잡은 포로들을 감시하라 지시하고, 혼자 독일군의 MG08 진지를 파괴하러 갔다. 천만다행으로 요크가 언덕 밑에 자리를 잡았을때 독일군은 남아 있는 미군이 별로 없다 판단하여 사격을 잠시 중지하였는데, 그 때 요크가 독일군 참호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놀란 6명의 독일 제국군 병사들이 요크를 향해 돌격했지만 요크는 자신의 콜트 M1911 권총을 들고 자신을 향해 돌격하던 제국군들을 하나 하나 침착하게 쏴 죽인다. 그 후 요크는 독일군의 MG08 진지 주변을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권총과 단검으로 독일군들을 죽이자 제국군 중위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였고 그 독일 중위의 휘하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1차대전판 척 노리스를 본 제국군들은 겁에 질려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백기를 들고 요크에게 항복하였다. 한 대대 이상의 병력이 고작 병 한명에게 항복한 것이다. 요크는 제국군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는 132명의 포로를 잡고 당당히 본부로 귀환했다.
앨빈 요크는 이 전투에서 혼자 총 32정의 MG08을 파괴하거나 노획했고, 28명의 제국군들을 죽였고, 132명의 제국군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공으로 요크 상병은 병장으로 진급했고 미국은 그에게 미국 최고훈장인 명예 훈장을 수여했고,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연합군 총사령관이 친히 그에게 프랑스의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고, 영국군과 이탈리아군도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요크는 총 50여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미군 역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병사 출신 군인이 되었다.
2.3 전후 생활
그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자 바로 제대를 했고, 1920년에 알빈 컬럼 요크 재단을 만들어 테네시주의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일을 했다. 그렇게 평범한 민간인으로 생활을 하다가 1941년 12월 7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다 다시 군대에 재입대할 것을 희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미 국방부는 요크의 너무 많은 나이(당시 54세)와 요크가 당시 앓고 있던 비만, 당뇨병 등을 트집잡아 요크의 재입대를 거부하였다. 비록 2차 세계대전에서는 활약하지 못하고 민간인 생활을 하였지만 1차대전 당시 미군 참전용사들을 만나고, 2차대전 당시 미 장성들과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면서 편안한 노후 생활을 보내다가 196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한다.
2.4 평가
미 해병대의 살아있는 전설이 존 바실론이라면, 미 육군의 살아있는 전설은 바로 이 사람이다. 어찌보면 바실론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다. 바실론은 브라우닝 M1917이나 M1919로 아리사카나 카타나를 든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요크는 고작 콜트 M1911과 단검만으로 Gew98과 MG08, MP18로 무장했던 독일 제국군과 싸웠다. 그리고 무려 28명을 죽이기까지 한다! 당연한 소리지만 고작 권총과 칼 따위로는 볼트액션 소총은 커녕 기관총이나 기관단총에게 상대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냥 아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요크 이 사람은 이러한 상식을 거침없이 뒤집어 엎은 것이다.아직까지도 미군 내에는 앨빈 요크와 맞먹는 전설을 가진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2.5 대중매체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미국에서 '요크 상사(Sergeant York)' 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목적은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싸우고 있던 미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였다. 실제 존재했던 영웅의 일대기를 보여주면서 사기를 북돋았던 것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한국에서도 상영되었는데 한국에서는 병장이 아닌 상사로 번역되어서 개봉되었다. 대표적인 발번역의 예. 영어사전만 찾아봐도 Sergeant는 병장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요크는 부사관이 된 적이 없으며 하사 이상 계급으로 진급하기 전에 제대했다.
1980년대에 미 육군이 개발했다가 실패한 M247 서전트 요크 자주대공포도 앨빈 요크에게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