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후패

400px-XiahouBa.jpg

夏侯覇
(187년 이전?[1] ~ 259년 이전[2])

1 개요

삼국시대 , 촉한의 장수로, 위나라의 맹장으로 유명한 하후연(夏侯淵)의 차남이다.[3] 자는 중권(仲權). 동생으로 하후칭, 하후영, 하후위, 하후혜, 하후화가 있다.

위의 대표적인 명문성씨인 하후씨에 황충에게 죽은 하후연의 아들로 반평생 촉에 원한을 갖고 살았으나, 권력 투쟁에 밀려 촉한으로 투항해 중신이 된 기구한 삶을 살다간 인물. 그리고 기록마저 적어서 흩어진 배송지주와 여러 열전들의 기록을 참고해야만 그나마 인생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 것치곤 군사 커리어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아버지 하후연과 동생 하후영한중공방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언제나 그 원수를 갚을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위나라에서의 하후패의 군사커리어는 대촉전선에서 두각을 낸다.

황초 연간(220년~226년)에 편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편장군이 상당수 유망주들이 맡는 직책임을 고려하면 위에서도 나름대로 유망주로 꼽혔었던 듯하다.

워낙 하후패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상당부분 다른 인물의 열전이나 어환의 『위략』에 의존해야하는데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일족을 죽인 촉한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는 부분과 편장군에 봉해졌다는 부분외에는 유추할만한 내용조차 없다.

2.2 낙곡 대전에서의 행보

244년, 조상이 군사를 일으켜 촉을 침공했을 때 하후패도 같이 참전했다. 선봉을 맡아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던 하후패는 흥세를 포위하고 전곡에 진채를 내렸다.

그러나 촉한에서는 하후패를 알아봐서 군사를 출격시켜 곧바로 공격했다. 하후패를 향한 공세는 비의의 지원군이 오기 이전까지는 왕평의 지휘를 따라서 험한 산세를 활용한 유격전으로 위군을 지연시키는데 주력했던 촉한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데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패를 포박하거나 참살함으로 사기진증을 노린 것으로 추측된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낙곡대전은 한중전 이후로 두번째로 한중에서 양국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인데 하후연의 아들 하후패가 참살당한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할지와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상당히 확연하다.[4]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병이 도착하여 위기를 벗었다."

-『위략』

하후패는 위기의 순간에 몸소 녹각 사이에서 촉한군과 맞서 싸우고 끝내 구원병의 도움으로 위험을 벗어났다. 일군을 이끄는 장군의 몸으로 몸소 녹각에서 싸워 구원군이 올때까지 버텨내걸 보면 하후패는 촉한에 대한 적개심이 무척 강했고 연의의 묘사처럼 무예에도 능했던 듯 하다. 하후연이 몸소 녹각을 점검하다가 황충에게 참살당한 과거를 떠올려보면 아버지처럼 솔선수범하는 장군이었을 수도 있다.

촉한군과의 교전 이후 하후패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상의 본대가 비의의 지원군에게 참패했으니 군을 수습해 철수했을 것이다.

이로써 하후패는 아버지의 죽음 외에도 직접 촉한군과 맞대 싸우며 촉한과의 두번째 악연을 쌓는다.

2.3 위나라의 숙장, 그러나 꼬이는 인생

2.3.1 토촉호군 역임

낙곡대전에 종군한 이후 하후패는 우장군에 봉해졌다. 『위략』에 의하면 우장군 하후패는 농서에 주둔하며 병사를 기르며 동시에 융족들과 화친했다고 한다. 양주의 융족과의 관계를 활용해 북벌에 요긴히 사용하던 촉한과 강유를 견재하기 위해서 이민족들과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시연간(240년~249년)에 하후패는 하후유(夏侯儒)의 뒤를 이어 정촉호군(征蜀將軍)[5]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강유의 북벌에 대한 기록을 담은 「강유전」과 「곽회전」에서는 촉한군과 맞서는 인물로 곽회와 더불어 하후패만을 언급한다. 당시 곽회는 옹주자사로써 관중 지역의 군사력을 총괄하고 있었으나 하후패 또한 토촉호군으로써 중앙정계에서 조상 일파의 일원인 정서장군 하후현의 직속으로 관중 지역에 대한 지분이 만만찮았을 것이다. 즉, 하후패는 곽회가 정서장군으로 임명되는 계기인 249년의 고평릉 사변이 터질 때까지 관중지역의 양두방어체제를 담당한 셈이다. 워낙 하후패에 대한 기록이 간략한 덕분에 그리 부각되지 않지만 기록이 굉장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촉한에 투항 249년까지 강유의 북벌에 꽤 자주 언급된다는 점은 하후패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2.3.2 강유의 북벌을 저지하다

247년에 옹주와 양주의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위를 배신하고 촉한에게 항복했다. 촉한의 강유는 이에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켰는데 하후패는 옹주자사 곽회와 함께 도서에서 이들을 맞서 싸웠다. 「곽회전」에 따르면 당시 하후패는 군사를 인솔하여 위시(為翅)에 주둔했는데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할 것임을 예측했다고 한다. 실제로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하자 곽회는 하후패를 증원해서 강유를 함께 맞섰다. 점차 퇴각하던 강유군과 위군은 도서(洮西)에서 겨뤘다.

「곽회전」에 의하면 도서 전투 이후 강족을 토벌해 아화와 소과를 참살하는데 성공하고 1만여 부락이 항복하는 결실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강족의 반란과 강유의 호응은 248년까지 이어지는 것을 고려하면 전투에서 패했어도 강유의 본대는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적다.

248년에 이어지는 강족 반란에 하후패는 곽회와 참전해서 강유를 맞서 싸웠다. 「곽회전」에 의하면 곽회의 전략을 따라서 촉한의 최전방인 답중(沓中)까지 강유를 추격했다고 한다.

2.3.3 고평릉 사변 그리고 촉한으로의 투항

하후패는 강유의 북벌을 맞서면서 열렬히 촉한을 싸웠지만 249년의 고평릉 사변을 기점으로 조상 일파가 실각하고 사마의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조상의 이종사촌 동생으로 사마씨와는 정치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사이가 나빴던 정서장군 하후현이 중앙으로 소환되었다. 하후패에게 종자뻘[6]인 하후현이 중앙으로 떠나 목숨을 담보할 수 없게 되고 그 후임으로 평소 서로 사이가 나빴던 곽회가 정서장군으로 부임하자[7][8] 신변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휘하 군마를 이끌고 원수의 국가인 촉한으로 투항한다.

배송지가 「하후현전」에 주석으로 기재한 『위씨춘추』에 의하면 하후패는 귀순을 결심하고 하후현에게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하후현은 거부하고 남았다.[9] 결국 그는 조위의 충신으로서 사마사에게 목숨을 잃는다. 하후패가 반역을 저질렀지만 가문의 위상덕인지 동생들인 하후위, 하후혜, 하후화는 연좌에 휘말리지는 않았고 관직생활을 계속해 제각기 자사나 태수까지 역임했다.[10] 특히 막내동생 하후화는 종회의 반란에 협조하지 않는 등 사마씨 정권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영화를 누렸다. 하후패가 위에 남겨두고온 자식들도 낙랑으로 유배가긴 했으나 하후연의 공로를 이유로 목숨은 건졌고 양호에게 시집간 딸도 별탈 없었다.

이같은 관대한 처사와 미비한 당시의 기록이 맞물려 하후패의 투항 사유에 대해선 이런저런 썰이 나오는데 『삼국전투기』의 최훈처럼 제풀에 겁먹고 헛짓했다는 사람[11]과 평소에 사마씨와의 사이가 굉장히 나빠서 하후현처럼 언제든 죽을게 뻔했기에 귀순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런데 하후패의 가족들이 이후에도 멀쩡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사마씨와 정말 그 정도로 사이가 나빴는지에 의문이 생기며, 반대로 사이가 그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면 애당초 겁을 먹을 이유가 있었는지 등이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하후패가 촉한으로 투항한 이유에 대한 논의에서 주로 간과되는 부분은 하후패가 촉한을 유독 증오했다는 점이다. 『위략』에서 서술했듯이 아버지와 형제를 죽인 촉한을 "늘 이를 갈며 증오했"다고 한다. 이후 낙곡 대전에서의 혈투와 강유와의 전투 같은 개인적인 경험은 촉한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켰으면 증폭시켰지 해소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하후패가 겁을 먹어서[12] 원수의 나라 촉한에 투항할 정도의 결심을 내렸다면 어느정도 투항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는게 맞을 것이다. 특히 아직 두각을 내지 못한 종회의 잠재성을 예견하는 등 정보에 그럭저럭 능통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하후패의 행동이 마냥 뻘짓이었을 가능성이 적어진다.

2.4 촉한의 중진

『위략』에서는 하후패의 투항 과정이 상당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남쪽으로 음평(陰平)을 넘었다가 길을 잃었는데 양식이 떨어져 말을 죽이고 도보로 걸었다. 다리를 다쳐 바위 아래에 누워있는데 길을 찾아보았으나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촉이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하후패를 영접했다."

-『위략』

삼국지연의』의 경우에는 간단하게 하후패가 강유에게 투항했는 식으로 서술하고 끝마치지만 오히려 정사의 기록이 더욱 처절하다. 권력투쟁에 밀려 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나라에 투항해왔음에도 양식이 없고 길을 잃은데다가 끝내 다리를 다쳐서 바위 아래에 누워있어야 했다. 당시 기분에 대한 서술이 없지만 표현할 수도 없이 굴욕적이고 착잡했을 것이다. 그나마 촉한에서의 환대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으나 가문의 원수에 1년전만해도 서로 싸우던 입장임을 고려하면 이마저도 기분을 매우 복잡하게 만들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후패의 촉한 내에서의 중요 활동은 총 4개를 꼽을 수 있다.

2.4.1 거기장군으로의 승진

『위략』에 의하면 유선의 황후 장씨는 장비의 딸이며 그 어머니 하후씨가 하후연의 집안 조카였기에 촉한에 투항한 하후패를 그같은 연유로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유선과 하후패가 대면하자 유선은 하후패에게 말했다.

“경의 부친이 해를 입은 것은 내 선친의 칼날에 의한 것은 아니었소.”

그러곤 자신의 아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아이는 하후씨의 외손자(甥)요”

이후 하후패에게 관작을 두텁게 내리고 총애했다고 한다.

하후패가 촉한에 투항하고 받은 관직인 거기장군은 본래 황실의 인척이 주로 맡는 직책이다.[13] 하후패를 인척으로 만들어서 유선은 하후패의 거기장군 선임을 정당화한 것이다.

촉한에서의 대접은 굉장히 좋아서 상술한대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는데 단순서열상으론 위장군 강유보다 위였다. 같은 귀순자라지만 하후패와 강유의 경력과 공적 차이를 감안하면 촉한이 위 최고 명문가의 일원이자 개국공신의 아들인 그의 귀순을 얼마나 반겼는지 알 수 있다.[14] 또 사후에는 개국최고공신인 관장마황조보다 시호를 먼저 받았다.

2.4.2 장억과의 인연

장억과도 인연이 있었는데 진수가 지은 『익주기구전』에 의하면 하후패는 장억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와는 소원하지만,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을 대하는 것과 같이 마음을 의탁하겠습니다. 이 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장억이 답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알지 못하고, 그대도 아직 저를 모릅니다. 우정의 커다란 도는 저쪽에 있습니다. 어찌 마음에 의탁한다고 하십니까! 원컨대 3년 후에 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당시 식견있는 사람들은 이를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고 한다. 여러모로 촉한내에서 하후패의 귀순을 굉장히 반긴 듯하다.

2.4.3 종회에 대한 경고

"강유가 하후패에게 물었다.

'사마의가 이미 저들의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히 다시 정벌할 뜻을 가졌겠지요?'

하후패는 말하였다.

'저들은 자기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하기에 아직은 밖의 일에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종사계[15]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는 비록 젊지만 만약에 조정의 정치에 관장한다면 오와 촉의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자치통감』 75권

상당히 재미있는 일화로 소설속에 신캐 등장을 위한 밑밥깔기와 같은 면이 있다. 실제로도 『삼국지연의』에서 비슷한 일화가 나오는데 종회뿐만이 아니라 등애에 대해서도 경고해서 두 사람이 범상찮은 인물임을 시사한다.

사실 하후패가 종회에 대해 경고한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떡밥거리다. 「종회전」을 참고해도 종회의 첫번째 활약은 255년의 관구검의 난에서 참모로 종사했을 때부터다. 하후패가 경고했을 무렵의 종회는 하안 등 조상 일파와 교류하며 딱히 두각을 내지 않은 상태임에도 종회의 잠재성을 정확히 예견했다. 이를 고려하면 하후패는 단순한 무부가 아닌 나름의 정보력을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2.4.4 강유의 북벌에 종군하다

"후년, 옹주자사 왕경이 진태에게 말하기를 강유와 하후패가 세갈래 길, 즉 기산, 석영, 금성으로 향하여 병사를 위시로 나아가게 하고, 양주의 군사로 하여금 포한에 이르게 하여 토촉호군을 기산으로 향하도록 하려고 한다고 했다."

-『위서』 「진태전」

촉한에서 의외로 여러 일화들을 남긴 하후패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 강유의 북벌에 뺀질나게 종군하며 참모로써의 모습을 보인 것과 달리 역사상으로 하후패가 참전한 북벌은 255년의 북벌이 유일하다.

"강유는 적도에 도착하여 위나라 옹주자사 왕경을 크게 격파시켰다. 왕경의 병사 가운데 조수에서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촉서』 「장익전」

"그 뒤 (연희) 18년(=255년), 다시 거기장군(車騎將軍) 하후패(夏侯霸) 등과 함께 적도(狄道)로 출병하여 위(魏)의 옹주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조서(洮西)에서 대파하니 (왕)경의 군사들 중 죽은 이가 수만 명에 달했다."

-『촉서』 「강유전」

"여름, 거기장군 하후패 및 장익을 이끌고 적도에 출병하여, 위의 옹주자사 왕경을 조서에서 크게 격파했다.

왕경의 무리중 죽은 자가 수만, 왕경은 물러나서 적도성을 지켰다."
-『화양국지』 「유후주지」

도수 전투는 강유의 북벌 중 최대의 성과로 수만의 군사력을 참살하며 순수 피해량만 고려하면 제갈량의 북벌을 뛰어넘는 전과를 올렸다. 진수가 하후패가 강유와 함께 종군했다는 사실을 굳이 기록한 것을 봐서는 이 전투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기록상으로는 종군했다는 사실만 기록되었을 뿐 실질적인 역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촉서』와 『화양국지』 뿐만이 아니라 『위서』 「진태전」조차도 하후패의 참전을 기록한다는 점은 하후패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특히 255년의 북벌과 이전의 강유의 북벌을 차별화하는 점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동력이다. 이전까지 강유는 미리 요충지를 선점한 곽회와 하후패에 의해 전략적으로 휘둘려서 퇴각하기 일수에 후일 등애와의 결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그에 비해 255년의 강유와 하후패는 왕경과 진태가 전략을 논했을 무렵 이미 부한(枹罕)에 도달한데다가 직후 적도를 향해 진군해서 진태의 허를 찌르고 왕경군을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위나라 출신에 오랬동안 위측에서 관중에 주둔한데다가 곽회와 여러번 손을 맞춰서 출병했던 하후패의 과거를 고려하면 그의 정보력과 경험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게 더욱 이상하다. 특히 낙곡 대전과 강유와의 전투로 숙련된 능력은 도수 전투의 상상을 초월하는 전술적 승리에 공헌했을 듯하지만... 이를 명확히 밝혀내는 기록이 없는만큼 추측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2.5 불확실한 최후

도수 전투 이후 시호를 받았다는 기록외에는 언급이 없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받은 시호조차 기록되지 않을 정도로 정보가 부족하다. 다만 『촉서』 「조운전」과 「장익전」에 의하면 260년 이전에 시호가 주어진데다가 거기장군을 요화장익이 각각 좌, 우로 나눠 맡은 때가 259년이니 그 이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다.

강유의 북벌 최대의 패배로 장수 20여 명이 죽었다는 256년의 단곡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고 그냥 자연사 했을거라 보는 사람도 있다. 기록이 없다보니 결론이 날 수도 없고 그냥 상상의 영역이다.

3삼국지연의』에서의 모습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합이 죽은 뒤 사마의의 부장으로 첫 등장하며, 죽은 제갈량이 만들어 둔 목상을 보고 내빼는 사마의를 호위역, 공손연 토벌의 선봉으로 종군한다. 촉한에 투항하고 나서는 강유의 참군 역할이 되어 등애종회의 존재를 알려주고 북벌군에서 수차례 분투하다가, 262년 제 8차 북벌때 조양으로 나가 싸우다 등애의 복병에 걸려 화살을 맞고 전사한다. 정사에 비해 더욱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다.

4 평가

열전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생년과 몰년조차 모르는 심각한 기록부족때문에 『삼국지연의』만큼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기록에 의거하면 실제 역사의 하후패도 만만찮게 뛰어난 무장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 하후연과 비슷한 스타일의 맹장으로 낙곡 대전 당시 위협에 빠지자 녹각에서 몸소 싸우며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용맹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하후연이 어떻게 죽었는지 고려하면[16] 아버지의 죽음을 반면교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의 똑같은 행동을 보이다가 스스로를 죽을 위기에 빠뜨리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였다는 점은 비판할 수 있다.

후일 대촉방위체계의 주축으로 곽회와 함께 강유를 저지한 경력 또한 호평받을만하다. 기록부족으로 어떤 전술적/전략적 공헌을 보였는지 알 수 없지만 뛰어난 전술가인 강유를 상대로 전술적 패배를 겪지 않고 곽회와 함께 전략적 승리를 이룩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곽회와 손을 맞춰서 출병했음에도 사이가 나빴다는 언급이 『위략』에서 보인다는 점은 강유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어도 그 과정에서 만만찮은 마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7]

촉한에 투항한 이후에 장억강유와 친목을 도모하는 등 원수의 국가에서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다. 255년의 북벌에 참전해서 정확한 역할을 알 수 없지만 촉한 역사상 최대의 승리에 공헌하는 등 뛰어난 숙장에 걸맞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 무렵 인재풀이 굉장히 부족했던 촉한에게 255년의 북벌 이외의 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하후패는 244년의 낙곡 대전 참전으로부터 시작해서 247~248년에 이르는 강유의 북벌을 저지하고 그후 255년의 북벌에 참여하는 등 파란만장한 경력을 자랑하는 숙장이다.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뛰어난 무력을 제하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부족한 기록에 불구하고 군사적 실책을 보인 적이 없으며, 맡은 임무마다 어느 정도의 성공(강유의 북벌 저지, 도수 전투의 승리)을 보장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면에서 촉한에 엄청난 증오심을 가진 인물이 여의치 않은 정치투쟁으로 아버지를 죽인 나라에 투항해 중진 행세를 해야 했다는 점은 굉장히 불우하다고 할 수 있다. 위나라에서 오랫동안 종군했으나 기록이 부족한 것은 투항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5 미디어 믹스

  1. 장비의 부인 하후씨의 사촌오빠라는 기록이 있다. 하후씨는 200년에 13살이었다고 한다. 대단히 오래살았다
  2. 단곡 전투의 패배로 죽었다는 설을 신봉할 경우에는 256년.
  3. 하후연의 장남은 하후형(夏侯衡)으로 연의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하후무가 하후연의 장남으로 나온다. 그런데 하후무는 하후돈의 차남이다.
  4. 게다가 왕평은 한중공방전에서 촉에 투항하지만, 어쨌든 한중공방전에 종군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5. 혹은 토촉호군(討蜀護軍)으로 표기된다.
  6. 하후현의 아버지 하후상이 하후연의 조카이니 하후패에겐 사촌 혹은 육촌동생의 아들이다.
  7. 정촉호군은 정서장군 관할에 속한 관직이다.
  8. 하후패와 곽회가 247년과 248년에 함께 출병한 사실이 앞서 서술되었는데 왜 이 둘이 불화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기록된 바가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추측은 하후패가 속한 조상 일파와 곽회가 속한 사마의 일파의 파벌싸움이라는 것 정도. 그러나 곽회는 사마의와 함께 대촉전선에서 활동하고 부인건도 있고 해서 사마씨와 가깝긴 했으나 30년 이상 변방에서 보내 정치색이 옅은 순수 군인타입이라 의문이 뒤따른다.
  9. 사마의야 하후현의 아버지 하후상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있고해서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 굳이 하후현까지 제거하려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아들이자 일찍부터 위나라를 삼킬 뜻을 품었던 사마사는 하후현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하후현은 이미 죽을 각오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 다만 하후위와 하후혜는 249년이면 이미 사망한 시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각각 49세와 37세에 죽었다.
  11. 다만 최훈의 경우에는 녹각에서 직접 싸울 정도의 무예와 깡을 갖춘 하후패를 겁쟁이로 묘사하는 등 유독 하후패에 박한 묘사를 보였기에 중립성이 결여되었다고 볼 수 있다.
  12. 특히 녹각에서 직접 싸울 정도의 용기를 갖춘 사람이란 점도 그렇고.
  13. 대표적으로 유선의 장인 장비가 거기장군을 역임했다. 유선의 의붓외숙이자 군부 중진이던 오의도 거기장군으로 한중 수비를 담당했었다.
  14. 또한 북한에서 망명한 황장엽을 우대한 것과 비슷한 정치적 효과를 노렸을 가능성도 있다.
  15. 사계는 종회의 자이다
  16. 몸소 녹각을 점검하다가 황충의 기습을 받고 죽었다(...).
  17. 하나의 가능성은 조상 일파의 하후패와 사마의 일파의 곽회 간의 파벌다툼이다. 기록이 없어서 단정할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