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웅용(金雄鎔) |
출생 | 1962년 3월 8일, 서울특별시 |
가족 | 아버지 김수선, 어머니 유명현의 4남 1녀 중 장남 |
학력 | 충북대학교 |
직업 | 공학자 |
목차
1 트리비아
그는 4살 때 일본에서 8시간의 지능검사를 통해 IQ 210을 기록해 1980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고 지능지수 보유자로 등재되었다. 그가 5살이 되었을 때에는 모국어 이외에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의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5살이었던 1967년 11월 2일, 일본의 후지 TV에 출연해 방청객들 앞에서 막힘없이 미적분을 풀어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1] 그리고 그 방송에서 독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 일본어, 한국어로 시를 짓는 모습을 보여주었다.[2]
1.1 세계 최고의 지능 지수 보유자(?)
터먼식으로 측정된 그의 IQ는 210으로, 한때 세계 최고의 지능지수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었다. 이후 이 항목은 아이큐가 더 높은 미국 여성인 마릴린 보스 사반트가 자리를 대신했다. 마릴린 보스 사반트의 경우 비율 지능 검사에서 228, 표준편차 16 방식의 고지능 검사에서 186[3]을 기록하였다. 그 이후로 1990년부터는 지능지수가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네스북에서 IQ 관련 항목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대외적으로 고지능자들이 나타나면서 이러한 기록이 무색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 지능 지수 보유자는 그리스의 정신과 의사 에반겔로스 카치울리스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능 지수는 표준편차 15 기준으로 198이라고 한다.[4] 그의 뒤를 이어 미국인 릭 로스너와 크로아티아인 미슬라브 프리다벡이 표준편차 15 기준으로 192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에반겔로스 카치울리스에 대해서는 여길 참조.
또한 이미 국내에서도 김웅용과 지능 지수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두 명 존재한다.[5] 화성인 바이러스에도 출연했던 박창현과 2012년에 의대생 신분으로 화제가 되었던 천재 이한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의 지능 지수는 표준편차 16으로 각각 187[6], 183으로 이를 비율 지능 지수로 환산하면 대략 220~230 가량이 된다.[7]
사실 비율 지능 검사 혹은 편차 지능 검사 중 어떠한 방식의 지능 검사라도, 극단적인 지능을 보유한 사람들의 우열을 가리는 데 있어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 김웅용이 검사한 비율 지능지수의 경우는 거의 아동용으로만 행해진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170 이상의 점수는 사실상 무의미한 가상적인 점수[8]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능은 타인과 타인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 연령이 신체 연령에 비해 어느 수준에 이르러 있는가를 비교하는 검사라는 점도 문제인데, 그런 이유로 인해 지능지수 비교가 기네스북에서 삭제된 것이다. 다음으로, 편차 지능 검사의 경우 타인과 타인을 비교할 수 있지만, 최신판의 검사가 3만 분의 1인 IQ 160(sd 15)까지만 신뢰성과 타당성을 갖춘 표준화된 검사이고, 그 이상의 검사들은 엄밀하게 표준화된 검사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백만 분의 1 이상의 지능을 보유한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는 초고지능 검사는 편차 지능 검사에 속하면서도 엄밀하게 표준화되지 않았으며, 실험적인 성격의 지능 검사이다. 따라서 검사 결과의 신뢰도와 타당성은 일반적인 지능 검사에 비해 불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세계적인 초고지능지수를 보유했다고 알려진 사람들 간의 비교를 하는 것도 문제가 존재한다. 우선, 고지능 검사가 가지는 검사 결과가 표준화 과정을 엄밀히 거치지 않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이로 인해 서로 다른 지능 검사를 받을 때마다 지능 지수의 변동이 심할 수 있다. 일례로 세계 공동 2위의 아이큐 소유자라 불리는 프리다벡의 경우, 위에 나온 한국의 고지능자 이한경보다 CFNSE, SLSE48이라는 테스트에서는 낮은 지수를 기록한 바 있다. 또한, 카치울리스 역시 자신이 세계 최고 기록을 세운 수열 유형의 다른 고도 지능 검사에서는 150대의 낮은 점수를 얻은 바 있다.[9] 그러므로 원래부터 초고지능자들의 개인별 지능지수 기록들은 육상이나 수영처럼 개인통산 최고기록들을 표시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사람들이 일률적인 검사가 아닌 저마다 다른 고지능 검사를 받고서, 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자신의 지능 지수로 소개한다는 점이 문제다. 예를 들어, 마릴린 보스 사반트의 경우 Hoeflin의 Mega Test를, 카치울리스는 자비에 쥬브의 NVCPE, 릭 로스너는 Jason Betts의 Mathema를, 프리다벡의 경우는 Roberto Lato의 LS60라는 지능 검사 결과를 인용한 것이다. 이들이 받은 지능 검사는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지능 검사의 저자가 전부 다르다.
그래도 흔히들 김웅용이 지금도 그렇고 당시도 그렇고 실제로 세계 최고 지능보유자라는 사실이 아니라는 건 의의로 보기에는 정확하다. 특히나 초고지능지수 보유자들간의 커뮤니케이션이나 교류활동이 활발해진 건 現 세계최고지능보유자인 에반겔로스 카치울리스라는 사람이 월드 인텔리전스 네트워크(WIN), IQ 소사이어티와 같은 단체를 설립하고 대외적으로 활동하면서부터였다.
2 본인이 주장하는 생애
아래 내용 중 7세부터 충북대 입학 전까지의 해외경력은 검증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2.1 유년기
1962년 3월 8일, 각각 건국대와 이화여대의 교수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생후 6개월 때 간단한 문장을 말할 수 있었고, 11개월이 되자 고작 이틀만에 한글 뿐만 아니라 천자문까지 뗐다. 만 2살이 되자 일기를 썼고, 3살때는 본인의 생각을 시(詩)로, 그것도 문학에 수식을 접목하여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한양중학교에 3살의 나이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당시 중학교는 고작 6개월 다녔을 뿐이었지만, 본인의 기억으로는 수업이 끝나면 중학교 학생들이 업고 다니며 매우 잘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지능도 지능이지만, 일단 어릴적에 외견상 신체 발달사항도 눈에 띄게 조숙했다. 생후 80일에 이미 걷기 시작했고, 생후 100일때 이미 치아가 19개나 났으며, '엄마'라고 말을 처음 했었다.[10]
아직까지도 '꼬마천재 김웅용'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진. [11]
서너 살 때쯤 곧 국제적으로 유명해져서 외신기자들과 6개월 동안 합숙하며 지냈는데, 이 때 외신기자들로부터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했다. 당시 한 가지 언어를 터득하는데 걸린 시간이 고작 1개월 정도였다. 이 때 배운 언어는 4가지 -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였다. 한국어를 합쳐 이미 4살 때 5개 국어 회화를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
그의 나이 불과 만 4세였던 1967년 일본의 후지TV에 출연해 대학교수가 임의로 낸 미적분 문제들을 척척 풀고,[12] 4개 국어를 술술 구사하면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까지 큰 충격을 줬다. 그리고 그 방송에서 독일어, 중국어, 스페인어, 베트남어, 타갈로그어, 일본어, 한국어로 시를 짓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에서 아이큐 테스트를 받았는데, 아래 링크 기사에서 보면 알겠지만 당시 측정한 테스트로는 최고 측정치가 200이었는데 만점을 받으니 '측정 불가'라며 보너스 점수 주듯이 10을 더 얹어 210으로 결론냈다고 한다. 물론, '만점'이 200점이면 다 맞췄으면 200점만 주는 게 맞지만, 나이가 어린 점을 감안하여 상징적으로 10점을 더 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이큐 테스트의 신뢰성에 대해 의혹이 있으며, 그 당시 아이큐 테스트가 어떻게 치뤄졌는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다. 참고로 아이큐 테스트 받을 당시 4살짜릴 앉혀놓고 8시간 테스트를 했었다고 한다. 2시간 테스트하고 5분간 쉬면서 받았다는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매우 피곤했다고.
2.2 미국 유학·NASA 연구원 시절
7살에 청강생 자격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8살에 나사 주선으로 콜로라도 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웅용씨는 자신이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졸업한 것은 아니다) 16세까지 5년간 NASA 핵물리학 분야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하였으나, 말이 좋아 연구원이지 사실은 적분셔틀, 계산노예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아직 컴퓨터가 초기단계에 불과했기 때문에 계산단계부터 과학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 물론 애초에 미국 국적자도 아닌 김웅용을 NASA가 중요한 일을 시킬 리 만무하기도 했고...
김웅용의 말에 따르면 인생에서 가장 지옥같던 시절이었다고 전했으며, 당시 연구원들은 김웅용을 어리다고 무시하며 냉대했다. 'NASA에서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같이 시합을 하고 어울려야 하는데 내가 너무 어리니까 끼워주지 않았다'는 말이 그가 그 당시 어떠한 고통을 받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예이다.
그는 지난 일을 회상하며 돌아가고 싶어도 주위의 기대가 너무나 컸으며 실망감을 주기도 싫어서 바로 그만둘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어린 시절 김웅용은 외국에 유학가게 되면서 "남들 못가는 외국유학을 갔으니 이제 내가 될 것은 대통령 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부심이 대단했는데, 이것도 금방 뛰쳐나올 수 없었던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고통에 견디다 못해 16살이 되던 1978년 NASA를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계속 NASA에 남아있었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른다며 그 이후로는 NASA에서 뛰쳐나온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2.3 귀국 후
김웅용은 초중고를 전부 안다니고 바로 미국 대학 청강생 루트를 탔기 때문에 초중고 졸업장과 대학 학위가 없어서 취직을 할 수 없었다.[13] 결국 이 때문에 초중고 졸업장 타겠다고 검정고시를 치게 되었는데, 체력장 시험장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14]
이러한 세간의 관심 속에 체력장 시험을 치러 20점 만점에 13점으로 붙었다. 그런데 또 언론들은 이 시원찮은 성적을 자세한 설명도 없이 신문에서 사실상 생중계하는 추태를 보였다. 당시 검정고시 점수가 만점이 아니었던 이유는...
“노천명의 시 중에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어느 동물인가요’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사슴과 기린 중 기린에 동그라미를 쳤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사슴이더군요.”
어릴 적부터 대학과 NASA 등 연구기관 사이만을 전전했던 김웅용이 얼마나 기초적인 상식이 결여된 사람으로 자라났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김웅용은 수학과 영어에서도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연구기관 근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밑의 논란 항목을 참조.
결국 세간의 관심이 부담스러워[15] 일부러 서울을 떠나 충북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충북대학교같은 지거국은 당시 80년대 초반엔 지금의 중앙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공식적으로는 학위가 없는 것을 학력으로 인정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긴 하지만, 요즘같이 학위에 민감한 사회에서도 학위와 상관없이 해당 과정을 수료한 사실이 있으면 'XX과정 수료'라는 식으로 프로필에 기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이 될 뿐더러, 이미 충분히 그 자격과 수준이 증명되는 NASA 근무 경력도 있으니, 아무리 정식 학력이 없다한들 그 정도면 ~대학입학을 허용해줄만도 한데, 당시 한국사회의 학력인증 방식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다.~(법령상 이런 것은 현재도 불가능하다. 정규학력이 없다면 반드시 검정고시를 거쳐야 한다. 흔히 고졸 검정고시로 알려진 것은 정확히 말하면 대학입학 응시자격 검정 시험이다.) 단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아주 많은 부분이므로 아래 비판을 참고할 것. .
2.4 대입 이후와 현재
충북대에서 수학하던 당시 할 수 있는 한 모든 동아리에 다 가입하여 활동하는 등 스스로가 가진 인간관계에 대한 소망을 마음껏 누렸고, 심지어 친구들 중 다수가 원주고등학교 출신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원주고에서 명예 동창으로 임명, 고교동창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은 고마워서 원주고 교가를 외웠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봉사활동을 다니다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참고로 아내는 충북대를 나왔는데(동 대학 인지과학 연구교수), 사람들이 아내에게 '왜 충북대 나온 사람과 결혼했냐'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황당했다고.
충북대 졸업 후엔 동 대학의 대학원에서 계속 공부하여 한국에서도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수료 후엔 교단에 서려했지만 8년 동안 정식 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고 시간강사 생활을 전전하였는데, 지방대 출신인 점과 한물간 천재라는 인식 때문에 임용이 기피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분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단 이해하기 쉽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노트필기를 꾸준히 하는 등 수업에 성실히만 임하면 성적도 A를 쉬이 준다고.
김웅용은 2014년까지 충북개발공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다.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IBC)에는 종신 부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국제인명센터는 본부가 케임브리지 지방에 있을 뿐 케임브리지 대학교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위키백과에 따르면 돈만 주면 이름을 올려주는 일종의 사기 단체라는 의혹이 있다. 마퀴스 세계 인명 사전도 또한 상대적으로 IBS 인용지수를 고려하는 것으로 보이나, 영문 위백에 따르면 역시 비슷한 논란을 받고 있다. 굳이 이 이름을 마퀴스의 "Who's Who"라고 하는 것도 영국에 같은 이름의 출판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짜가
지금 그는 두 아들을 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으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보다 여유가 있었을 땐 일주일에 한 번씩 검정고시 야학 강사로 봉사에 나서기도 했었으며, 앞으로도 여유가 있으면 다시 야학 강사로 봉사하고 싶다고 한다.
2014년 1월 14일자로 신한대학교 부교수와 경기북부개발연구원 부원장이 되었으며,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근황 및 교수가 되었던 과정 등을 이야기했는데 자신은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살아서 동료들조차 언론 보도를 보고나서야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 사회가 너무 영재교육에 집착한 나머지 숨은 진짜 천재들을 망치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3 본인이 주장하는 경력에 대한 검증과 비판
본인이 거듭 언론에서 주장하는 과거의 행적 대부분이 거짓이었다는 과거 신문 기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주장 다수에 모순점이 많다.
3.1 1979년 당시 뉴스 기사
미국에 갔다는 건 거짓말이며 사실 국내에 있다는게 발견되었고 1979년 9월에 체력장 등으로 여러번 언론에 노출되어 엄청난 집중포화를 받은 바 있다. 검정고시 또한 상대적으로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국어, 영어, 수학은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반면, 미술, 체육 같은 단순 암기 과목은 높은 점수를 받아 암기 위주의 한국 교육 체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그간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보였다.
외국에 나간 것도 일본 후지TV 깜짝쇼에 출연한 것 한 번 뿐이며 외국에서의 석사·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보도는 낭설이라고 말했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 등에 청강을 위해 잠깐 간 일이 있으나 실제 웅용군을 맡길 만한 천재 교육 기관이 없어 바로 데려왔다.아이의 정상발육과 교육을 위해 그동안 외국에 유학간 것처럼 해두고 집에서 가르쳐 왔다.
- 동아일보 1979년 9월 6일자
지난 10년 동안 웅용이가 은둔생활을 한 건 사실이지만 결코 세월을 헛되이 보낸건 아니다.시끄러운 바깥 세상과 담을 쌓고 독학으로 기초과목을 다지며 내실을 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 많은 세상에서 아이를 떼어내어 집에서 보호한 것이 과연 내 잘못이었을까. 그동안 웅용이는 집에서 공부만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1주일에 한 번은 바깥세상으로 견학을 내보냈다. 스케이트 자전거 등산 등 운동에서부터 시장 같은 데 나가 세상사와 접할 기회도 갖도록 유도했다. 일가끼리의 길흉사에도 참석케 하는 한편 가명을 쓴 채 여러 친구들과도 어울려 지내게 했다.
- 동아일보 1979년 9월 12일자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서 하나같이 외국으로 간 건 거짓말이고 10년 간 은둔생활을 했다 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당시 언론을 신뢰한다면 김웅용의 부모는 천재라고 국가적으로 엄청나게 주목받던 아들을 집에서 몰래 키우면서 해외 대학 석박사다, 나사 연구원이다 등등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고, 이걸 보면 언론의 악의적인 보도에는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는 늘 김웅용이 곧 대단한 성과를 발표한다는 부모의 언플이 자주 나오고 있으며 월간조선에 의하면 김웅용의 어머니는 심지어 김웅용 자작 로케트 태안에서 발사라는 걸 알리기도 하였다.
3.2 검증-10대에 미국에서 공부했다?
위의 언론 보도를 차치하더라도, 미국에서의 경력에 대한 김웅용의 최근 발언에는 그 자체적으로 굉장히 모순점이 많다. 우선 석박사 학위에 관한 부분. '석박사를 청강했는데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라는 말은 대학원에 다닌 사람이라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곧바로 알 수 있다. 보통 대학원은 석,박사 공통의 대학원 수업과 논문연구로 이루어지고, 논문제출자격에 필요한 수업을 모두 이수하고 자격시험을 통과했다면 어디서나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수료' 자격이 생기게 된다. 즉 수료했는데 인정받지 못했다는 건 사실과 다르다.
그러므로 박사를 '청강했다' 라는 건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담당교수가 허락한다면 대학원 수업을 청강할 수는 있다. 하지만 박사는 수업을 듣는다고 따는 게 아니며, 청강은 당연히 어디서나 인정받지 못한다. 요즘은 MIT 수업도 온라인으로 청강이 가능한 세상인데 그거 보고서 나도 MIT 청강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바보취급당한다. 근데 송모군이 실제로 그런 발언을 하긴 했다..
그리고 7,80년대는 해외여행이 통제되던 시기로 해외 유학 경험은 굉장한 특권 이었던 시절이다. 해외 석사 학위나 박사 수료 정도로도 국내에서 교수가 충분히 가능하던 시절. 그런데 해외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는데 국내에서 인정 못 받았을 리가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3.3 검증-나사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또한 나사에서 일했다는 것 역시 모순점 투성이이다. 우선 나사에서 정식 학부 졸업장조차 없는 외국인을 고용할 이유도 전례도 없다. 나사의 대부분의 포지션은 시민권을 기본적으로 요구하며, 시민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또한 본인은 핵물리학 박사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핵물리학과 궤도계산은 역시 아무 관계도 없다! 천재적인 계산 능력을 이용해서 미적분 셔틀로 사용했다고 주장하지만 핵물리학과 관련해서 60년대에는 이미 컴퓨터가 잘만 쓰이던 시절이다. 휴랫패커드의 전자계산기 역사 참고. 그리고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는 나사에서 '무기를 만드는 연구를 했다' 라고도 했는데 비 시민권자는 예나 지금이나 예민한 분야 연구는커녕 나사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최근에는 TV에서 NASA 선임 연구관을 역임했고 주판으로 역행렬을 계산(...) 했다고 구라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는 모습을 보였다. 선임연구관이 손수 손으로 역행렬을 계산하는 NASA의 위엄 사실 해외여행 자체가 엄격히 통제되던 7, 80년대라면 어느 정도 통할 만한 구라고 웬만한 건 '나사에서 비밀리에 연구했다' 라는 식으로 넘어가고는 계신데 요즘엔 널린게 해외 유학생, 해외 교포이고 나사나 JPL에서 연구하는 사람도 흔하기에 저게 다 거짓말이라는 게 만천하에 드러나 버렸다. 망했어요.
그리고 웃기는 건 핵물리학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나사에서 7년이나 행렬 계산을 했다는 사람이 학력고사도 아닌 대입 검정고시 에서 영어, 수학 점수를 낙제에 가깝게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사에서 일하지 않고 미국에서 7년동안 접시만 닦다 온 사람이라도 검정고시 영어를 그렇게 못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리고 고등수학으로 도배된 핵물리학을 공부했다는 사람이 수학 낙제점을 받았다는 것도 코미디.
3.4 검증-국내에서 인정을 못 받았다?
언론에서는 국내에서 천재를 인정해주지 못해서 오랜 기간 임용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사실 매우 간단명료하다. 천재로 유명했다는 걸 떼고 보면 김웅용의 경력은 평균 이하이다. 충북대 학부를 나와서 1998년 37세에 충북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수많은 서카포 출신 젊은 해외 박사들과 비교하면 임용시장에서 밀리는게 당연하다. 또한 위의 문단들에 나와 있는 검증과 비판을 참고해 보았을 때, 국내에서 인정을 못 받은 이유는 아마도 실제 그러한 학위들(해외에서 유학을 했다는)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받을 수 없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는게 타당할 듯.
최근에는 지도교수 추천서와 NASA 경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대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국내 연구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아예 학위 자체가 없었다는 듯 하다.
3.5 검증-언어 천재?
상식적으로 언어 천재라면 고졸 검정고시의 영어 성적이 낙제점 가까이 나올리가 없다.
다만, 어렸을 때 후지TV에 나가 여러 언어로 시를 지었다는 부분에 대한 반박 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 기사나 동영상 링크 등이 있으면 추가바람
4 평가
사실 김웅용의 이야기를 기레기들의 만행(...)이나 실패한 천재에 대한 조롱을 떠나서 심도있게 다룬 기사는 지금은 폐간한 진보적 잡지[16]인 뿌리깊은 나무였다.
김웅용의 10대 시절 미국 유학에 의문이 있다는 점 등을 밝혔으며 이 기사를 위해서 김웅용의 출입국 기록을 분석해서 그가 장기적으로 외국에 체류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었고 부모가 가정학습을 이유로 그를 사실상 가두었다는 이웃사람의 증언도 체득했다. 실지로 1979년 9월 6일 경향신문 기사에 나온, 그의 아버지 김수선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웅용의 외국 경험은 후지TV 출연을 위한 일본 방문 외는 없으며,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은 낭설"이라고 밝히고 있다. 출입국 기록을 조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1970년대 말에는 지금처럼 외국 여행도 어려웠고 군사정권 시절이라서 출입국 관리가 상당히 엄격했다.
뿌리깊은 나무와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있던 월간조선도 역시 비슷한 기사를 1990년대에 냈는데, 여기서는 천재의 타락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와 비슷한 논조로 상당히 우수한 재능의 아이를 부모의 욕심과 과장된 언론플레이, 한건 하고자 하는 기레기들때문에 망친 것에 대해 비판하는 기사였다. 즉, 심도는 높지만 인간 김웅용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시각을 드러낸 기사들이었다.
이 기사는 1970년 당시 김웅용의 부친을 포함한 김웅용 신화 주변에 있던 사람들 거의 전부와(김웅용 자신은 인터뷰를 거부했다) 전문가들을 통해서 신화 벗기기를 시도했었다. 일단 김웅용의 210 아이큐도 제대로 검증되지 않았고[17] 실지로 기네스북 지정 최고 아이큐에서도 나중에 190의 다른 소년이 올랐고 김웅용 관련 자료는 기네스북 본사에서도 모른다는 답변을 받았다.
또한 김웅용의 부친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역시 항간에 소문으로 나온 "미쳤다" "죽었다" "나사에서 핵무기 개발 연구원이다"나사는 핵무기 개발하는 곳이 아니다 "유학 갔다"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들이 가정학습을 시켰다는 이야기를 밝혀냈다. 만일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당연히 언론 소송감이다.
이 기사 이후에는 간간히 그런 사람이 있었지 수준의 추억이었는데 후술할 문화방송 다큐부터 새롭게 조명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미국 유학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가 2005년부터 자신이 나사의 연구원이었다는 걸 새롭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김웅용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은 바로 이곳을 지적한다.
2012년 9월 8일에 MBC 스페셜에 김웅용의 일생에 대해 재조명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천재가 한국에 태어났으면 시리즈 종결자라는 느낌에 초점을 맞추고 당시 기레기들의 만행에 치를 떨게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김웅용에 대한 당시나 현재 학자들의 평가, 즉 정말로 우수한 재사였지만 부모나 언론때문에 휘둘리는 게 안타깝다는 식의 이야기를 문화방송에서 앞뒤를 잘라먹고 기레기의 만행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게 문제.
5 기타
슬하에 아들만 둘이 있는데 특히 작은 아들이 어릴 때의 그를 쏙 빼닮았다. 그런데 아들들은 자기 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했던 사람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다가 인터넷에 뜬 기사를 보고 알았다고 한다.
송유근이 화제가 되었을 때, 잊힌 비운의 천재로 김웅용이 종종 언급되었는데, 후에 인터뷰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을 함부로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송유근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면서 실패로 몰아가는 언론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이 인생선배의 말은 현실로 다가오는데...카이스트 자살 사태 관련 인터뷰를 한 적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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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30일방송된 KBS 2TV의 퀴즈 프로그램 1대 100에 출연하였다. 미국에 장기체류한 기록이 없는데도 미국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나사에 근무했다고 주장하는 장면이다.
조선일보의 최근 인터뷰에서 돌직구로 미국 간 게 구라 아니냐고 질문받자 "설사 내가 미국에 안 갔다고 쳐요. 미국이라고 착각할 만한 어떤 곳에 있었다고 합시다. 제가 미국에 가고 안 가고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미국 가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는 이야기에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셨을 리가 없어요. 일일이 반박하며 대응해볼까, 아니면 그냥 조용히 살까. 그 두 가지 중에서 전 후자를 택한 거예요."라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 ↑ 구구단을 배운 지 7개월 만에 미적분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 ↑ "Korean genius, 4, poses problem for high school". The Washington Post. AP. April 10, 1967.
- ↑ 표준편차 15 기준으로 181 정도에 해당한다.
- ↑ 이는 약 380억 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지능 지수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가 70억 명, 선사시대 이래 지구상을 살았던 모든 인간 수가 약 1,000억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수준의 점수는 타당성이 의심되는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 ↑ 그치만 김웅용은 터먼식 검사에서 받은 비율 지능 지수이고, 후에 언급하는 두 명은 편차 지능 지수이므로 직접적 비교는 할 수 없다고 말해야 정확한 표현이다.
- ↑ 본인의 말에 의하면 표준편차 16 기반의 검사에서 받은 지능 지수라고 한다. 더 정확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추가바람.
- ↑ 비율 지능 지수 방식으로 지능 검사를 개발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인 비네는 어떠한 연령에서도 지능지수 170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170 이상으로만 언급했으며, 그 이상의 점수는 가상적인(imaginary) 수라고 언급하였다.
- ↑ 비율 지능 검사를 개발한 지능 검사의 선구자인 비네의 의견이다.
- ↑ 릭 로스너는 IQ 192(sd 15)라고 하나 Hoeflin Mega Test를 처음 보았을 때 원점수는 44/48이고 지능 지수로는 180(sd 16)이었다. 마릴린 보스 사반트는 같은 검사를 처음 보았을 때 원점수가 46/48이고 지능 지수로는 186(sd 16)이었다. 단, 릭 로스너는 이후 이 지능 검사를 재응시했을 때 원점수로 47/48, 지능 지수로 190(sd 16)을 기록하였다.
- ↑ 생후 6개월 이내 첫 단어를 말하는 신동들은 드물기는 하지만 존재한다. 생리학상으로 보고된 사례 중 3개월에 첫 단어를 말한 아이도 존재했다고 한다. 한때 학사 학위를 가장 빨리 획득한 것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었던 마이클 키어니의 경우, 생후 4개월 때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했고, 한 달이 지나자 네 단어로 이루어진 간단한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의 경우 생후 6개월에 첫 단어를 말했다고 한다.
- ↑ 참고로 치환적분 중에서도 교과서 예제 수준의 쉬운 문제이다. 다만, 이후 나오는 다른 방법의 풀이는 조금 어렵다.
덧셈뺄셈 배울 나이에 적분문제 푸는 것 자체가 대단한거 아닌가.. 적어도 구분구적법으로 문제를 풀고 틀린 후배보다는 낫다 - ↑ 다만 이 프로라는게 SBS의 스타킹이나 MBC의 기인열전 정도의 프로였다. 그리고 위에 서술했듯 난이도도 이과 고교생 수준으로 그리 어렵진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 ↑ 대학은 초중고와 달라서, 단순히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로 학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논문을 써서 해당 학위를 수료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학위가 부여된다. 김웅용은 당시엔 당연히 논문을 쓰지 않았으므로 학위가 없는 것.
- ↑ 본인은 조용히 검정고시를 준비했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 ↑ 대표적인 주장으로, 당시에는 체력장이 입시에 포함되던 시대였는데 기자들이 몰려와서 포기했다는 주장을 했다. 올바른 주장인지 추가 바람.
- ↑ 80년대 신군부 집권 후 폐간되었고 이후 6월 항쟁 후에 잠시 복간되었다. 여기서 무려
양백김명곤이 한국전쟁의 내전론이나 남침유도설 관련 다큐도 홍보했다. - ↑ 일본에서 했다고 하지만 아버지 자신도 어느 기관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다시 아이큐 테스트를 한 교수의 말에 의하면 아이큐 검사 때 하도 부모들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해서 테스트 자체를 포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