弔義帝文
1 개요
조선 시대의 문신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난했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말 그대로 "의제[1]를 조문하는 글"로서[2], 초한쟁패기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회왕) 귀신이 꿈에서 나타났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회왕과 단종 모두 어린 왕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회왕이 왜 꿈에 나타났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도 그렇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바로 "칠장복"이다.[3] 즉,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을 의미한다는 것.
정리하면, 여기서 항우는 세조를 뜻하고, 의제는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당한 단종을 의미한다.
2 왜 썼나
저자였던 김종직은 내심 세조의 왕위 찬탈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으로 생각만 할 일이다. 실제로 세조 때 김종직은 아무 말 없이 출사했고, 근무만 잘했다. 그러다가 이런 글을 쓴 걸 보면.. 뒷담화라고 봐도 무방할지도.[4] 더군다나 단종을 내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은 세조의 후손인 조선 왕조의 정통성에 대한 정면적인 비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해석되었다.
3 누가 보고했나
일반적으로 조의제문의 최초 발견자이자 보고자로 거론되어 수백 년 동안 비판받았던 이극돈은 사실 그렇게까지 막장은 아니다. 오히려 능력 있는 관료라고 보는 게 더 옳다. "불경을 외워서 벼슬한 인물"이란 것은 김일손의 카더라 통신에서 나온 비판으로, 같은 사료에는 오히려 "능력에 비해서 출세가 늦다"란 말도 나온다. 아들은 잡과를 보았을 만큼 솔선했던 인물.
이극돈네 집안인 광주 이씨 자체는 당시 최고 명문가 중 하나였고, 이극돈의 5형제 중 정승 두명에 판서 하나(이극돈)가 나왔다..먼치킨 집안? 명문가 집안답게 당시 국정을 총괄하고 있었고. 나름 나라를 이끌어가는 자부심도 있었던 집안이었다. 더군다나 이극돈은 그 집안에서 기대받는 인재로 차기 정승감으로 인정받았던 사람. 이극돈이 사림파랑 관계가 안 좋았던 건 사실이지만[5] 운빨로 관료생활 한 건 아니다. 함경도 가서 국경 경비도 선 적이 있는 인물이고 훈구공신과도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이극돈은 조의제문을 최대한 덮어둘려고 노력했다. 조의제문을 처음 봤을 때 같이 이를 보았던 노사신과 '어쩌다 우리 후배들이 이렇게 되었냐'고 같이 울기까지 했다고 한다.[6] 더군다나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가 단종의 시체를 버려 짐승들이 먹게 했다[7]거나, 성종의 아버지였던 덕종의 후궁들을 세조가 찝적댔다[8].. 라는 카더라성 기록까지 수록해버렸기 때문에 국왕 귀로 들어가면 김일손은 물론이고 전체 관료 사회가 위험해 질수도 있었다.
당시 사관들은 강력한 책임감과 엄정한 역사의식으로 무장되어 들어가야 하는 초 엘리트들이었다. 따라서 기록 작성에서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거기다가 웬만하면 실록 기록을 삭제하지 않는 전통까지 가미하면... 사관들에게 부여받은 책임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런 걸 충분히 알고 있던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본 순간 기분이 어땠을런지는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더구나 이건 유교적 역사관에 대단히 어긋난다. 한국의 대표적 유교적 사서로 꼽히는 삼국사기의 저술방침인 술이부작을 고려해보자. 더구나 이건 정사, 국가의 정식 역사서이다. 이걸 사관의 사심이 반영되어서 깽판을 친다면, 실록의 신빙성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무엇보다 무오사화의 경우처럼 국왕이 알게되면 실록과 사관 자체가 날아가버리는 수가 있다! 이걸 사림의 수장이라는 인물이 해대고 있으니 후대는 어떻게 될지 뻔할 노릇이다. 이 시기의 사림은 이상하게 이런 식의 소설에 가까운 야담에 관심이 가서 관련서적이 좀 나오게 되는데, 김종직의 사제인 남효온의 육신전 역시 이와 유사한 케이스였고, 이 책 역시 선조 때에 한번 사단이 나게 된다.
그래서 이극돈은 이 문제의 보고를 올리는 데 주저했다. 하지만 이미 김일손의 사초가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좌악 퍼져 있었고, 당시 낙하산이었던 한치형이 그 소문을 듣고 이극돈을 달달 볶아댔다.[9]
하지만 정작 조의제문을 연산군한테 처음 올린 사람은 이극돈도, 한치형도 아닌 유자광으로 보인다. 기록에 보면 조의제문을 본 이극돈이 이를 봉하고 일체 발설하지 않도록 했는데 다음날이 되니 한치형, 이극돈, 노사신, 윤필상등이 떼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을 찾아가서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했다. 이는 연산군이 조의제문을 누군가한테서 엿들은 다음에 이극돈 등한테 '빨리 갖고와' 라고 버럭질한 결과라고 밖에 추측이 안된다. 그리고 조의제문 문제를 거론한 중신들 중에 실록청 당상이 아니었던 사람, 즉 조의제문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를 못한 사람은 유자광 하나다.. 누가 봐도 이건 유자광이 먼저 꼰질르고 열받은 연산군이 이극돈을 조진거라 밖에 볼 수 없다.
이극돈은 "사초는 원래 임금이 볼 수 없으니, 그걸 발췌하면 원칙도 지켜지고 문제도 해결"라는 식으로 절충을 하려고 했고, 결국 이 작업으로 이극돈은 무오사화란 사건에 자기 이름을 제대로 가로새기는 천추의 나쁜 놈이 되고 말았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벌어진 무오사화 때문에 이극돈은 보고를 늦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을 당했고. 당연히 올라갈 거라 예상되었던 정승직위도 놓쳤다. 물론 그 대신 동생 이극균이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연산군은 이 때부터 광주 이씨 집안을 경계하게 되고 기어이 갑자사화때 트집을 잡아 집안 자체를 멸문한 거나 다름없게 만든다. (이극돈은 다행히(?) 연산 9년에 졸.) 덤으로 중종반정 이후에는 또 이러한 전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적당하고 까여서 이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고생 숱하게 하게 된다. 후손인 이이첨 또한 이 부분을 숱하게 인신공격당한다.
4 무오사화
이 조의제문은 연산군대 에 있었던 무오사화의 중요 원인 중 하나다. 뒤에 보겠지만 무오사화는 조의제문 때문에 일어나게 된 게 아니다. 정확히는 김일손이 세조를 비난하며 왕실 스캔들 기사를 사초[10]에 기록한 병크 사건으로 인하여 김일손이 압송되고, 사초에 적혀있던 김일손의 다른 기사 부분들을 검토하던 도중 조의제문이 걸려들게 된다. 잡았다 요놈!
조의제문은 당시 지식인들도 읽기 어려울 정도로 은유적 표현이 가득한 글이었는데, 유자광이 친절히 이 글을 해석해서 연산군에게 알려주었고, 조의제문이 세조의 쿠데타(계유정난)에 대해 비난하는 글임이 밝혀진다. 설령 김종직이 그런 의도로 쓰지 않았다 하더라도, 제자인 김일손은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 심문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무오사화라는 헬게이트가 열리게 된다.
"조룡이 아각을 농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인데, 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 손심인데, 처음에 항량이 진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를 삼았으니, 종직은 의제를 노산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하여 관군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를 입어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은 노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종직이 주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를 짓는 것을, 《강목》의 필에 비의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에 찬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난을 꾀해 화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백왕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들과 성덕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연산군 일기)
원래는 윤필상이 "차마 입으로는 읽지 못할 뿐 아니오라 눈으로 볼 수도 없나이다"라고 했고, 김종직 사단인 표연말, 홍완 등까지 극형을 주장했을 정도로 실록에 올라갈 수 없는 문장인데,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이후 쓰여진 연산군 일기에 버젓이 전문이 오르게 된다(...) 되려 연산군과 유자광 덕분에(?) 문장이 제대로 남아버린 셈이다.
5 조의제문 원문
弔義帝文 丁丑十月日 정축 10월 어떤 날 余自密城道京山 내가 밀성에서 경산(성주군)[11]으로 가는 길에 宿踏溪驛 답계역(성주군 학산리)에서 숙박하는데 夢有神披七章之服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頎然而來 훤칠한 모습으로 와서 自言 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爲 "나는 초나라 회왕의 손자인 심(心)[12]인데 西楚霸王所弑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沈之郴江 침강(郴江)[13]에 잠겼다." 因忽不見 그리고는 문득 사라졌다. 余覺之 내가 꿈에서 깨어 愕然曰 놀라며 이르기를 懷王南楚之人也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余則東夷之人也 나는 동이 사람으로 地之相距 지역의 서로 떨어진 거리가 不啻萬有餘里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而世之先後 세대의 선후도 亦千有餘載 또한 천 년이 넘는데 來感于夢寐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玆何祥也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且考之史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無沈江之語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豈羽使人密擊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而投其屍于水歟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14] 是未可知也 알 수 없는 일이다." 遂爲文以弔之 하여 마침내 문을 지어 조문한다. 惟天賦物則以予人兮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孰不知尊四大與五常 어느 누가 사대(天地君父)와 오상(仁義禮智信)을 높일 줄 모르리오. 匪華豐而夷嗇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동이 오랑캐)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曷古有而今亡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故吾夷人 그러기에 나는 동방사람이요 又後千載兮 또 천 년을 뒤졌건만 恭弔楚之懷王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昔祖龍之弄牙角兮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15] 四海之波 사해(四海)의 물결이 殷爲衁 붉어 피가 되었어라 雖鱣鮪鰍鯢 비록 전유[16]와 추애[17]라도 曷自保兮 어찌 보전하겠는가 思網漏而營營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時六國之遺祚兮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沈淪播越 숨고 도망가서 僅媲夫編氓 겨우 평민과 짝이 되었다오. 梁也南國之將種兮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踵魚狐而起事 어호(魚狐)를 좇아아 일을 일으켰네. 求得王而從民望兮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存熊繹於不祀 끊어졌던 웅역(熊繹)[18]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握乾符而面陽兮 건부(乾符)[19]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天下固無大於羋[20]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遣長者而入關兮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亦有足覩其仁義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羊狠狼貪 (그러나) "양흔낭탐"[21]인 항우가 擅夷冠軍兮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胡不收而膏齊斧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嗚呼 아아, 勢有大不然者兮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吾於王而益懼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爲醢腊於反噬兮 반서(反噬)[22]를 당하여 해석(醢腊)[23]이 됨이여 果天運之蹠盭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郴之山磝以觸天兮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景晻愛以向晏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郴之水流以日夜兮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波淫泆而不返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天長地久 천지가 장구한들 恨其可旣兮 한이 어찌 다할까 魂至今猶飄蕩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余之心貫于金石兮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王忽臨乎夢想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循紫陽之老筆兮 자양(주자)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思螴蜳以欽欽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擧雲罍以酹地兮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冀英靈之來歆 바라옵건데 영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
- ↑ 의제는 항량의 초나라 부흥군에 왕으로 옹립된 왕실의 직계 후손였다. 당시에 아이였다는 점과 일찍 쫓겨나 살해당했다는 점에서 단종과 겹친다.
- ↑ 그래서 읽을 때 조의-제문이 아니라 조-의제-문이라고 읽어야 한다.
- ↑ 칠장복이란 왕세자(王世子)가 입는 대례복(大禮服)으로서 국왕,황태자가 입는 구장(九章)에서 용龍과 산山을 뺀 화충華蟲•불火•종이宗彛•조藻•분미紛米•보黼•불黻의 7개 무늬를 새겨 넣은 옷이다. 곤복 항목 참조.
- ↑ 조의제문을 지을 당시 김종직의 나이는 27살에 불과했다. 재기 넘치던 젊은 시절에 썼던 글. 그리고 김종직 본인도 강직한 원칙주의자 선비였던지라, 잡학과 불교를 중시했던 세조에게 간언했다가 삭탈된 적이 있다.
- ↑ 이극돈은 김일손의 정랑 진입을 막았고. "요새 애들은 너무 경망스러워." 라는 말도 한 적이 있었다. 뒤에서 보듯 솔직히 경망스러운 게 맞았다.
- ↑ 노사신도 이극돈이랑 같은 생각이었는지 무오사화내내 활약하는 유자광을 막아서서 그 당시 많은 이들이 목숨은 건질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한건 노사신이 살려준 그 사림들은 연산군과 대간의 대립에서 늘상 노사신이 연산군의 편에 서자 노사신을 간신이라고 갈궈댔었다. 그야말로 대인배
- ↑ 다만 이건 사실에 기반을 둔 소문으로 실제 단종의 유해는 죽은 뒤 그대로 버려둔 상황에서 지역 향리인 엄흥도가 몰래 묻었고 단종의 시신은 중종때 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으니 짐승이 뜯어먹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 ↑ 의외로 세조는 여색에는 관심이 적어서 후궁도 왕자 시절에 첩으로 들였다가 국왕 즉위 후 후궁으로 격상된 2명을 제외하면 전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그나마 이중 1명은 세조가 즉위한 뒤 관심을 끊자 구성군 이준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발각당해서 처형당했다. 세조는 오히려 정실부인인 정희왕후를 매우 아껴서 국정 회의 때 "중전이 한 말에 따르면 어쩌고 저쩌고......" 하며 그녀의 의견을 인용할 정도의 애처가였다. 물론 애처가랑 후궁에 관심이 없는건 상관관계가 없긴하다. 세종과 소현왕후가 금슬이 좋았지만 세종의 후궁이 6명이고 자식도 30명이 넘는것으로 보아 상관관계는 없으나 그래도 금슬이 안좋은데 후궁을 안둘리는 없다.
- ↑ 한치형은 인수대비의 사촌인데 연산군에게 바른말만 하다가 갑자사화 전에 죽었는데 이 바른말 경력 덕분에 부관참시당한다.
- ↑ 사초는 일종에 수행 비서관이던 사관들이 대신들과 왕의 회의나 행사에 참여하여 그들의 언행을 기록하고, 왕과 대신들의 잘잘못을 논하고 기록하던, 후에 실록편찬에 사료로 활용되는 일종의 역사 초고이다. 드라마 보면 대신들 끝단에 모여 임금이 말하는데로 옮겨쓰는 그들이 바로 사초를 쓰고 있는 것.
- ↑ 한자가 경산시(慶山市)가 아닌 경산부京山府라고 불렸던 성주를 말한다.
- ↑ 초나라 왕족의 성은 미(芈), 씨는 웅(熊)이라서 미심 혹은 웅심이라 한다. 조의제문으로 따지면 웅심이 맞을 것이다.
- ↑ 빈 강이 아니다.
- ↑ 침강에서 죽였다는 이야기는 있다.
- ↑ 여기서 조룡은 진시황 이다. 즉, 진시황을 세조에 비견한 것이다.
- ↑ 鱣는 전어, 鮪는 다랑어를 뜻한다.
- ↑ 鰍는 미꾸라지, 鯢는 암고래 혹은 도롱뇽을 뜻한다.
- ↑ 초나라의 초대 임금
- ↑ 제왕의 상서로운 징조
- ↑ 芉간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마당의 원문 및 국문번역을 뒤져서 서로 비교하면 알게 되는데, DB化 과정에서 芉으로 오타가 난 듯. 춘추전국시대 楚나라 왕족의 성씨는 羋미씨, 羋가 옳다.
- ↑ 사납기로는 호랑이, 심술궂고 고집세기가 양 같으며 탐욕스럽기가 이리 같다는 말로, 항우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기의 전형적 묘사.
- ↑ 가축이 주인을 해침이라는 뜻. 배은망덕과 동의어와 봐도 무방하다.
- ↑ 젓갈과 포육(脯肉)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