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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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생몰 : 1688 ~ 1747
제위 : 1736 ~ 1747

18세기 이슬람 권이 배출한 최고의 정복 황제
페르시아의 나폴레옹, 제 2의 티무르라고도 불리는 명장

본명은 나디르 콜리, 사파비 왕조 건국에 공헌한 튀르크계 아프샤르 족 출신으로 고향은 이란의 동북부인 호라산 지방의 다르가즈다. 사파비 왕조의 무장이었던 나디르 샤는 1722 ~ 1729년의 7년여간 이스파한을 점거하며 호타키 왕조를 세우고 이란을 지배한 아프간 족을 축출하고 사파비 왕조를 복원시켰지만, 오스만 제국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는 이내 이름뿐인 사파비 왕조를 멸하고 1736년에 제위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건국한다. 동진유유와 비슷

그 후로 대정복을 개시하여 인도양에서 잘나가던 오만 제국을 갈아버려 수도를 탄자니아 인근의 잔지바르로 옮기게 만들었고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였으며 곧바로 1739년, 무굴제국의 대군을 카르날 전투에서 대파하고 델리를 점령한 후, 코이누르 등 무굴 황실의 보물을 약탈하고 개선한다. 1740년에는 부하라 칸국히바 칸국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까지도 평정한다. 그러나 내치에는 실패하여 반란이 잦았다. 1747년,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진중에서 반란이 일어나 암살되어 파란마장한 생을 마감한다.

2 시대 배경

17세기 말 ~ 18세기 초의 사파비 왕조는 아바스 1세 이후 흔들리며 서쪽의 오스만 제국과 북쪽의 러시아 제국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었고 동쪽의 수니파 아프간 족은 사파비 왕조의 시아파 강요 정책과 무자비한 수탈에 시달리며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18세기 초, 사파비령 아프간 총독 압둘라 칸에 대한 폭동이 아프간 길자이족의 미르 바이스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번졌고 사파비 샤 후세인 술탄은 군대 2만명을 파견하여 겨우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스파한으로 압송된 미르 바이스는 샤의 환심을 사고 메카를 가서 율법학자에게 이단인 시아파 정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답을 듣고 온다.

그 후 1709년, 샤의 허락으로 칸다하르에 돌아온 그는 자신을 생포했던 장군 기오르기 한과 부하들을 연회에 초대하고 살해한 후 아프간 민족에게 메카에서 들은 말을 전하고 재차 봉기한다. 이에 샤는 정예 튀르크 기병(키질바시)와 그루지야, 압달리 아프간 족으로 구성된 3만의 대군을 파견하지만, 사파비 군대는 대패하여 700명만 도주에 성공한다. 미르 바이스는 페르시아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고 사실상 아프간의 독립을 이루어 낸 채로 1715년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압달리 아프간 족도 마음을 바꿔 1717년에 반 사파비 봉기에 동참한다.

바이스의 아들인 미르 마흐무드 호타키는 같은 편인 압달리 족을 통수 공격하기도 하는 등 샤에게 사파비에 대한 적개심을 위장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게 힘을 기른 후 1721년, 마흐무드의 2만에 달하는 길자이 아프간 기병은 사파비 국경을 넘어 케르만을 함락시키고 시아파의 탄압애 몸서리 치던 이란 남부의 수니파, 조로어스터 교도들의 협조를 얻어낸다.

1722년, 샤는 뒤늦게 4만 2천명과 24문의 대포로 구성된 군대를 편성하나 아프간 족은 굴른바드 전투에서 빠른 기동력으로 사피비 군대의 포병대를 압도하여 5백명의 손실로 5천명을 전사시키며 패잔병들을 이스파한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른다. 6개월 간의 포위 끝에 10만여명이 아사하여 수비 인원이 고갈되자 1722년 9월,아프간 길자아 군대는 사파비 왕조의 수도이자 아바스 대제 당시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던 이스파한을 점령하고 호타키 왕조의 건국을 선포한다.아프간 제 1제국 그리고 샤가 항복하자 사파비의 왕족들과 귀족들을 화합을 가장한 연회에 초청한 후 도륙하였고 그 자녀들도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때에 늙은 샤도 마흐무드가 보는 앞에서 자녀들을 끌어안은 채로 죽음을 맞았다. 아바스 왕조가 시작한 악습

그러나 마흐무드는 정신이상으로 지나친 폭력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칼을 들고 자기의 살점을 직접 잘라내는 등 가학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한마디로 미쳤다 결국 1725년 마흐무드는 측근들에게 살해되고 사촌 아시라프가 제위를 계승한다.

그렇게 이란에서 사파비 세력이 소멸한 후 거칠 것이 없어진 호타키 군대는 이란 전역을 지배 하에 넣고 러시아를 격퇴한 오스만 군대와도 싸워 승리하지만 당시 칼리프 지위를 지니고 있던 오스만 황제에게 이란의 정통 지배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란 서부를 떼어주는 하마단 조약을 맺는다. (1727년) 패해는데 개꿀 전쟁을 틈타 잠시동안 사파비의 잔당이 이스파한을 회복하기는 하지만 곧 진압되고 이란 지역은 아프간길자아족의 호타키 왕조와 안정을 찾는 듯 하였다. 하지만 시아파 페르시아인들은 수니파 파슈툰인들을 벼락출세한 이단 야만족의 정복으로 여겨 경멸하였으며 아시라프 역시 마흐무드의 측근들이랑 충돌하는 등 호타키 왕조도 분쟁에 휩싸였다.

3 사파비 왕조의 충신

이스파한이 함락되자 운 좋게 살아남은 사파비의 왕위 계승자 타마스프는 6백명만 데리고 동쪽의 호라산 지방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티무르 삘 아프샤르족과 쿠르드족 5천여 명의 도둑떼를 이끌던 나디르를 만나고 나디르는 타흐마습의 맘룩크 나디르 칸으로써[1] 몸을 일으켜 1726년부터 그를 도와 아프간 족과의 항쟁과 그의 복수를 돕는다. 도적떼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쌓은 실력으로 여러 차례 호타키 군대를 격파한 그는 헤라트를 점령하고 호라산을 평정한 공으로 사파비 군대의 사령관 자리에 까지 오르고 마침내 1729년, 이스파한을 회복하고 아시라프를 축출 추살하여 왕자를 타마스프 2세로 즉위시킨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잔다르크 이로써 나디르는 나디르 콜리 벡[2]으로 불리게 되었다.

나디르는 여세를 몰아 호타키 왕조와의 하마단 조약으로 오스만이 점령한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서부를 회복한 후 이란 내부의 호타키 잔당마저 일소한 1730년, 호라산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출정한다.

역시 1730년, 나디르의 높아지는 인기에 위기감을 느낀 타마스프 2세는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1732년에 아라스 강을 국경으로 하는 현상유지의 아메드 파샤 조약을 맺고 물러선다.

4 아프샤르 왕조 창건

타마스프 2세의 나약한 모습에 분노한 나디르는 그를 폐위시키고 왕자를 아바스 3세로 즉위시킨다.잔다르크가 이성계로 그리고 아직 걸음마인 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정을 손에 쥔 채로 섭정이 되어 오스만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오스만과의 전쟁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과제였는데,전쟁에 우유부단하다는 이유로 타마스프를 폐위시켰으니, 승리만이 폐위를 정당화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초반에 이란 서부에서 오스만 군에 패하자(...) 그는 보복으로이란의 튀르크 인을 추방하고 타브리즈를 회복한 후 오스만 제국의 본거지안 터키로 진격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승리에 대한 압박감에 나디르와 도적떼일 때부터 그를따르던 정예부대는 악귀처럼 싸워댔고 튤립시대의 사치와 번영으로 느슨해져 있던 오스만 군대를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 격파하고 카프카스(아제르바이잔,조지아,아르메니아) 등을 빼앗어 오스만 정부의 협상 요청을이끌어 내었다. 1734년 나디르는 옛 사파비 왕조의 이스마일 1세아바스 1세가 영유했던 고토 바그다드까지 탈환하고 오스만 제국은 페르시아에게 메소포타미아 땅 대부분을 빼앗겼다. 당시 오스만 정부는 휴전을 원하지 않았으나 1735년, 러시아에게 재차 크림반도를 침공당하는 악재가 겹쳐 양면 전선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휴전 협상에 응하였다.

그에따라 1736년에 체결된 콘스탄티니예 (이스탄불) 조약에 따라 나디르는 이란 서부의 양도 뿐만 아니라 오스만 령 카프카스까지 이란령으로 만드는 쾌거를 올리게 된다.[3]

연이은 엄청난 승리에 민중과 군대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나디르는 1736년, 아라스강 하류 모간 평야의 대회의에서 자신이 4년 전에 옹립한 아바스 3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은 섭정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은퇴하겠으며 현자를 찾아 제위에 세울 것을 권하고 이 심오한 뜻을 깨달은 군민들이 추대하자 스스로 나디르 샤 임을 선포하고 왕중왕이 되어 이란의 이슬람화 이후 가장 강력하고 넓은 국가가 될 아프샤르 왕조를 개창한다.

5 정복자 나디르 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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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간 나르샤 (1737 - 1743)

1737년부터 동쪽으로 진격하여 호타키 왕조에 대한 복수극을 시작한다. 맨 먼저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를 점령하였으며 1738년에 카불을 함락하고 아프간 전역을 정복하여 호타키 왕조를 멸하고 복수를 마무리한다.역관광 나디르 샤의 아들인 레자 쿨리는 발흐를 점령하고 아무다리야강을 건너 우즈베크족이 세운 부하라칸국의 군대를 격파하여 우즈베크를 북쪽으로 추방시켰다.

한편 나디르 샤의 눈에 호타키 왕조의 쇠퇴 시기에 칸다하르를 점령한 무굴제국이 아니꼬와 보였다. 16,17세기 동안 아프간의 대부분은 사파비, 남부와 카불 지방은 무굴 제국이 나누어 지배했었다. 무굴제국 입장에선 회복 1738년 나디르 샤는 무굴제국에 사신을 보내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절대 무굴에 받어들이지 못하게 하였지만 무굴제국의 황제 무하마드 샤는 말로만 그렇게 했을뿐 아프가니스탄의 도망자들을 받아들였고 화가 난 나디르 샤는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사신은 델리의 궁에 감금되었고 세번째 사신은 목이 잘린채로 돌아왔다.

이에 격노하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이란과 대비적이었던 인도의 부가 탐났던 나디르 샤는 5만 5천의 군대로 친정하여 카이버 고개를 넘고 술라이만 산맥을 넘어 인더스강을 건너 무굴제국으로 진격하여 펀자브 지역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시크 왕국이 타격 입은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무굴 조정에서도 아프간 족과 오스만, 오만 등을 격파한 명성을 익히 들어 사다트 칸에게 기병, 보병에 코끼리병까지 혼합된 3만명의 정예 군대를 편성해 맞받아친다. 허나 무굴조는 쇠퇴기에다가 시크 왕국과 마라타 동맹에게 패한 직후라서 군대의 규모도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축소되어 있었다.

사다트 칸의 무굴군은 쿠르드족 용병으로 구성된 나디르 샤의 선봉대 6천명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나디르 샤가 직접 이끈 5만명의 대군과 맞부닥쳐 흡사 전격전과 같은 나디르 샤의 진군에 전투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나디르 샤의 장기인 매복전술에 걸려들어 무굴군은 복병에게 큰 피해를 당했으며 코끼리병도 대포소리에 놀라 제멋대로 전장을 뛰쳐나가버렸고 기병과 보병도 모두 달아나고 말았다

나디르 샤의 군대는 피로를 풀 여유도 없이 1739년 델리 인근에 있는 카르날 평원에서 무하마드 샤는 직접 1만5천명의 군대를 이끈 무굴제국의 군대와 맞부닥쳤다. 그러나 무굴군의 성급함 및 페르시아군의 활과 대포가 사정거리에서 무굴제국의 활과 대포보다 월등하고 병사들의 백병전 기술도 페르시아군이 강했으며 무굴제국의 코끼리는 나디르 샤의 대포와 궁기병대의 치고빠지기에 별 힘을 못써보고 패퇴하여 나디르 샤는 재빨리 적군의 양익을 포위하고 무굴 군대를 말 그대로 궤멸시켜 버렸다.

이제 북인도에서 나디르 샤를 막을 자는 없었고 결국 무하마드 샤는 포위를 당해 항복을 하였으며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를 사면하였다. 나디르 샤는 델리로 입성하였으나 몇명의 인도인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그의 보좌관 한명을 죽이자 나디르 샤는 화가 치밀어 군사들에게 하루종일 인도인들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였다. 무굴제국 내에서 200여년간 번영을 누리던 델리는 수십일간 약탈을 당하고 3만명의 인도인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학살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델리에서 나디르 샤가 저지른 살육은 이후 인도어에 대량학살을 뜻하는 '나디르샤시(Nadirshahi)'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이 나디르 샤의 대침공으로 정예군이 캐발살된 무굴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이 떼에 나디르 샤는 인더스 강 서쪽을 탈취 할양받았으며 또 눈독을 들여 가져온 무굴 황실 보물 중에는 공작 옥좌[4]와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인 '빛의 산' 코이누르[5] 다이아몬드가 있었다.[6] 북인도의 약탈품만으로도 몇년치 국가예산은 충족시켰기에 나디르 샤는 3년여간 제국의 세금을 철폐해도 될 지경이었고 실제로도 그리 행하였다. 이 시기가 나디르 샤의 인생의 황금기였다.

1739년 말에는 페르시아 만의 지배자가 되려고 단기간에 해군을 급조하여 바레인을 점령하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쇠퇴 이후 동아프리카 연안을 지배하며 번영하던 야리바조의 오만 제국을 본거지에서 격파하여 오만 제국은 수도를 잔지바르로 옮기고 페르시아 만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7]

1740년, 나디르 샤의 불패 군대는 트란스옥시아나의 부하라 칸국과 히바 칸국을 공격한다. 티무르 제국의 본거지 였던 그곳은 이미 200여년 간 우즈벡 족이 세운 두개의 칸국들의 소유였다. 나디르 샤 본인의 롤모델이기도 한 칭기즈칸, 아미르 티무르 에게 함락된 과거가 있는 두 도시는 나디르 샤에게도 함락되었다. 그로써 나디르 샤는 중앙아시아도 평정하여 사산조 페르시아 이래 아무다리야 강(옥서스 강)까지 아프샤르 왕조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8]

나디르 샤는 무굴제국 원정 이후부터 교만해지고 탐욕스러워졌다. 1741년, 터키 원정을 준비하며 정복에 한것 열에 올랐던 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바로 마자다란에서의 암살 기도였다. 나디르 샤가 말을 타고 숲속을 거닐다 한 아프간인이 나디르 샤를 화승총으로 저격하였으나 총알은 나디르 샤의 어깨를 스쳐 나디르 샤가 탄 말의 앞머리를 맞추었다. 암살시도는 실패하였지만 큰 충격에 휩쌓인 나디르 샤는 맏아들 레자 쿨리를 의심하여 왕위 계승자인 그를 코렁탕을 먹이고 장님으로 만들고 만다. 장남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이 때 눈이 뽑힌 레자 쿨리는 "아바마마가 내던진것은 나의 눈알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눈알입니다."라며 절규하였다고 한다. 이 막장 드라마 사건이 말년의 그의 사리분별력과 분노조절 능력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1743년, 보스포루스부터 인더스 까지의 옛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로 나디르 샤는 다시금 오스만 제국을 침공한다. 그러나 철저히 준비해 온 오스만 제국은 치욕을 되풀이 당하지 않고 아프샤르 군대를 격퇴해낸다. 이 전쟁이 그의 마지막 대규모 원정이자 그가 이기지 못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나디르 샤는 오스만제국의 24대 술탄 마흐무드1세에게 휴전의 의미로 25,000개의 진주로 장식한 황금 도금된 옥좌를 선물하였다. 오스만조의 마흐무드 1세는 나디르 샤에게 에메랄드가 3개 박힌 단검을 선물했다고 한다.[9]

6 실패한 내치와 연이은 반란

10여년 간 이어진 나디르 샤의 내치는 그의 전쟁 수행 능력과는 현저히 달랐다. 아니 완전 막장이였다. 내치를 팔아서 외정 능력을 샀다 튀르크 계의 수니파였던 그는 200여년간 지속된 사파비 지배의 부산물인 이란의 시아파 민중들에게 12이맘파(자파리파)를 수니파의 제 5학파(하나피,말리키,샤피이,한발리)에 포함시켜 수니파를 강요하였고, 거기다가 시아파 율법학자들을 탄압했으며 종교재단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하였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연이은 승전보와 강력한 군대와 장악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영광과 동시에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무리한 원정들도 승리했고 약탈품이 많았지만 승전보와 함께 무거운 세금 고지서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암살 기도 후 공포정치의 정도가 심해져서 여러 민족과 여러 지역들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수도 마슈하드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나자 나디르 샤는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마슈하드의 봉기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각지에서 그의 탐욕스러움과 압제에 항거하는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페르시아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 상태에 빠졌다.

1745년,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에서 일어난 봉기는 특히 격렬하였고 나디르 샤는 7년 전에 함락했던 도시를 재함락 시키고 가혹하게 응징하였다.

한편, 계속된 반란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진 나디르 샤는 1746년, 국경을 1639년의 카스리 시린 조약때로 되돌린다는 케르덴 조약으로 오스만 과의 전쟁을 끝냈다. 현상유지라 하면 될 것을 그렇게 어렵게 명시하다니

1747년에는 고향 호라산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7 죽음

나디르 샤는 다문화 다민족 국가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정복자로써 유능하였으나 그를 통치하는 데에는 영 부적격이었다.

1747년, 나디르 샤는 마시하드에 출병하여 서부 이란의 쿠르드 족 반란군을 진압하던 도중 쿠칭에서 근위대의 반란을 의심한 나머지 반란을 일으킬 지 모르는 모든 병사와 장교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이 잔인한 명령은 군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나디르 샤의 병력 중 절대 다수를 적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 다음날 나디르 샤는 잠을 자던 중 진 내에서의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역관광

나디르 샤 사후 아프샤르 왕조는 어린 손자 샤 루흐 미르자가 재위하였으나 급속히 쇠퇴하여 호라산 일부로 축소되고 트란스옥시아나 등의 지역들은 독립한다. 분열된 이란에는 잔드 왕조가, 독립된 아프가니스탄에는 두라니 왕조가, 아제르바이잔에는 파슈툰계 아자드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 소국으로 전락한 아프샤르 왕조는 잔드 왕조를 대체하여 이란을 통일하게 되는 카자르 왕조에게 1796년에 멸망당한다.

티무르 제국과 종종 비교당하지만 티무르 사후 40여년간 영토를 일부 잃었지만 패권을 유지했던 티무르 제국과는 달리 아프샤르 왕조는 알렉산드로스의 헬레니즘 제국처럼 바로 무너져 내렸다. 실질적 2대 통치자가 샤 루흐인 점은 닮긴 하다.[10] 실제로 나디르 샤의 모델이 티무르이긴 했다.

8 전쟁광

나디르 샤는 전쟁을 매우 좋아하여 일생을 전쟁으로 보냈고 엄청난 전쟁광이었다. 회교 율법학자[랑의 대화에서 나디르는 천국이 어떤 곳이냐고 묻고 율법학자가 천국은 72명의 미녀들이 시중을 들며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모든 쾌락을 누리는 강남룸 곳이라고 설명하자 나디르 샤는 그럼 전쟁이 없고 환락만 있다는거 아니오? 그곳이 어찌 즐거울 수 있겠소?는 식으로 시큰둥했다고 전해진다.제군 나는 전쟁이 좋다
  1. 그래서 별칭이 타흐마습 쿨리(타흐마습의 노예)이다.헌데 나중에 역관광
  2. 벡은 이름이 아니고 칸이나 샤처럼 칭호를 의미한다.레벨업
  3. 하지만 불행히도 오스트리아가 바로 선전포고 하여 오스만 제국은 다시금 양면 전선 크리를 맞게 돤다.
  4. 무굴조의 보물로써 침대만한 크기의 옥좌로 온갖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찬란하게 박혀있고 12개의 기둥이 용상위를 덮고 있는데다가 그위에는 보석으로 수놓은 공작새 모형이 날개를 펴고 있다. 이 공작 옥좌는 팔라비 왕조레쟈 샤 팔라비의 옥좌로 쓰였다.도둑놈 후손 인증
  5. 우르드어로는 코이누르, 페르시아어는 고어누.
  6. 벼락출세자로써 무굴조랑 혈연 관계를 맺어 아프샤르조를 천한 혈통으로부터 격상시키려는 나디르 샤는 무하마드 샤의 첫째 부인에게서 보석이 무굴 황제 무하마드 샤의 터번에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얻어 무하마드 샤에게 관습대로 화친의 표시로 서로의 터번을 바꿔쓸 것을 제안했고 결국 보석은 나디르 샤에게 털리고 말았다.
  7. 그러나 이란의 오만원정은 얼마 못가고 1745년 싸이드 가에게 아프샤르군이 패배하여 오만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이로써 오만에는 현 왕조인 싸이드조가 건국되었다.
  8. 이후 부하라 칸국은 명목상으로 존재하다가 1785년 망기드조에게 멸망되고 만다.
  9. 나중에 나디르 샤가 암살당했을때 마흐무드 1세는 그 선물한 단검을 훔쳐왔다고 한다.(...)줬다 뺏기
  10. 다만 명군이었던 티무르조의 샤 루흐랑은 달리 아프샤르조의 샤 루흐는 유약한 군주로 장님이 되고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