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 گورکانی (페르시아어) مغلیہ سلطنت (우르두어) मुग़ल सलतनत (힌디어) | ||
국기 | 국장 | |
1526년 ~ 1857년 | ||
위치 | 스리랑카와 남부 일대를 제외한 인도 전체, 페르시아 동부 일대 | |
수도 | 델리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알라기르 | |
언어 | 페르시아어 차카타이어 우르두어 | |
민족 | 인도인 | |
종교 | 이슬람(국교), 힌두교 | |
주요사건 | 1526년 건국 1600년 동인도 회사 설립 1857년 세포이 항쟁,멸망 | |
통화 | 루피 | |
성립 이전 | 티무르 제국, 로디 왕조 | |
멸망 이후 | 영국령 인도 |
목차
1 개요
Mughal Empire [2]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북인도에 존재하던 이슬람 왕조.
주요 영토는 인도 지역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발원지는 아프가니스탄이며, 초창기의 세력은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이다. 때문에 몇몇 서적에서는 이를 두고 제2차 티무르 제국이란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
본래 정식 명칭은 구르카니, 구르칸으로, 이는 티무르를 비롯한 티무르 왕조의 여러 군주들이 칭기스 왕실의 공주를 아내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무굴 황실은 전반적으로 칭기스 칸의 혈통보다는 티무르 왕조의 일원임을 강조했다.
강역 면에서는 남인도의 복속엔 실패하고 북인도를 차지하는 데에 그쳤으며, 그마저도 이슬람에 근거해서 다수의 힌두교도를 지배하는 방식이라 사상적으로 불완전했기 때문에 존립 내내 각처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하지만 인도가 워낙 넓다보니[3], 북인도의 왕조 가운데 데칸 고원 너머의 지역까지 완전히 차지한 왕조는 없었다. 그나마 무굴 제국은 마우리아 왕조 등과 함께 인도를 거의 통일한 몇 안되는 왕조다.
동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국에 존재했는데, 북동쪽으로 영토가 겹쳤지만 그 영토 사이에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 중 하나가 사이에 있어 별다른 영토분쟁 없이 그냥 무역만 하고 지냈다. 만약 두 국가가 붙었다면 그야말로 아시아 전쟁사 중 세기의 대결이었겠지만, 전기 무굴의 전성기였던 악바르 1세-자한기르-샤 자한-아우랑제브 시대와 청의 전성기였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시대의 차이가 있어서 두 제국 모두 전성기일때 전쟁할 수는 없었다. 여담으로 무굴 제국이 한창 전성기일 때는 중국에서 명나라가 쇠해가는 시절이었다.
2 역사와 역대 황제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무굴 제국의 역대 황제 | ||||||||||
1대 바부르 (1526 ~ 1530) | → | 2대 후마윤 (1530 ~ 1539, 1555 ~ 1556) | → | 3대 악바르 1세 (1556 ~ 1605) | → | 4대 자한기르 (1605 ~ 1628) | → | 5대 샤 자한 (1628 ~ 1658) | → | 6대 아우랑제브 (1658 ~ 1707) |
2.1 초기 역사
첫번째 황제 바부르[4]는 티무르의 자손이자[5] 모계로 징기스칸의 혈통[6] 을 잇는 인물로 본래 페르가나 지방을 지배하던 군주였는데, 티무르 왕조의 내전과 우즈베크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앙아시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도망치다가 1504년, 카불을 점령했다. 바부르는 이후에도 중앙아시아, 특히 사마르칸드에 대한 재진출을 시도했으나, 우즈베크인들에게 패배해 번번히 실패했다. 이후 바부르는 인도로 시선을 돌렸는데, 바부르는 과거 티무르가 인도를 점령했었고 자신은 티무르의 후손이므로 자신이 인도를 지배해야 할 정당한 군주라고 주장하며 인도를 침공했다. 결국 1526년, 파니파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바부르는 금요 설교를 '힌두스탄의 황제'로서 진행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즈음하여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인들은 정치적 혼란기를 맞이했는데, 바부르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후마윤과 군대를 파견했으나 실패했다. 그리고 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무굴제국의 상황은 열악했다. 심지어 바부르의 후계자인 후마윤(1530~1556)은 재위 9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군벌에게 패배해 이웃한 페르시아로 거점을 옮겨야 할 정도였다(1540).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의 힘을 빌어 15년만에 겨우겨우 인도로 돌아왔으나,[7] 1년을 다 못 채우고 사고[8]로 죽었다. 안습.
2.2 전성기
악바르 (1556~1605) 시절의 강역 (주황색) 과 아우랑제브 시절까지의 확장 (빨간색).
2.2.1 악바르 1세 시기
악바르 1세 (1542~1605, 재위 1556~1605). 흔히 악바르 대제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굴은 바로 이 대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열세살에 즉위해 근 50년간을 즉위한 3대 황제인 악바르 대제가 명군이었기 때문이다. (묘하게 청나라의 강희제와 서로 연상되는 부분이 많은 명군이다. 인도인들에겐 강희제가 중국의 악바르 대제일 듯) "악바르"란 이름에 걸맞게[9] 그는 피지배 민족에 대해 종교적 관용을 보였다.
그 종교적 관용이 어느정도였냐면 본인은 물론 지배계층 및, 황족들이 이슬람교를 믿고 있음에도 이슬람교 전통의 지즈야 곧 타 종교에게만 거둬들이는 인두세도 폐지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하고, 본인 자신도 힌두교인인 라즈푸트 출신의 공주[10]와 결혼했으며, 힌두교계 학자와 신하들도 이슬람계와 아무 차별없이 등용하고 신임했다.[11]
그리고 그때껏 땅없이 떠돌아다니기 일쑤던 시크교도에게도 힘을 실어주어 안정된 정착생활을 할수 있게도 만들어주었다. 1580년대 이래 악바르의 지배에 놓인 시점 이래 시크교가 자리잡은 펀자브 지방은 지금까지도 가장 큰 시크교의 성역이 되었다.
아 물론, 이러한 조치에 모두가 환영한건 아니고 당연히 이슬람교인들은 발끈했지만 황제는 그딴거 신경 안 썼다.[12]
악바르는 치세중 단순히 종교적 관용만을 베푼것이 아니라 종교적 토론 또한 즐겼다.
아예 궁궐내에서 악바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각 종교 대표논객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동조하거나 등등의 견해차를 보이며 치열한 입싸움을 벌였고, 악바르는 그 논쟁을 지켜보길 즐거워했다. 그야말로 관대한 키배 매니아. 정말 이슬람교인이 아니라 그냥 무신론자인가?
이 종교 논쟁중 일화 2가지만 소개하자면..
1.한 시크교도는 악바르에게 토론 중 이런 진언을 무심한듯 시크하게 올린바가 있었다.
"출생도 신분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행동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허뭅니다. 종교를 가지고 사람을 우려먹는건 신성모독입니다. 연민이나 자기비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물로 죄를 씻어낸다든가 여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라고 비하하는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2. 델리에서 악바르 황제와 그의 종교 토론을 본 한 포르투갈인 신부는 이런 글을 썼다.
"무신론자가 흔히 저지르는 잘못을 그 왕도 범하고 있다. 이성을 신앙의 밑에다 두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문제를 불완전한 이성으로 처리하면서 자기만족 하고 있기 때문이다"말빨에 발린 자의 열폭[13]
이건 여담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악바르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다.[14] 처음부터 끝까지 악바르 자신만을 섬기는 종교라 묻혔지만(...)[15] 무신론자 맞는것 같다.[16]
여하튼 이 악바르 치세를 기점으로 행정적 체계[17] 또한 갖춤으로써 비로소 안정기를 지나 팽창기에 들어선다. 학자들은 악바르의 치세를 기점으로 하여 인도의 군벌 국가가 제국으로 탈바꿈했다고 평가한다. 현재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지역이 인도에 귀속된 것도 바로 이 시기(1576년).
그의 시기 무굴 제국은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으며, 이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지고 명나라의 힘이 기울어가던 시점이었다. 그 당시 무굴 제국과 명 제국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밋거리 중 하나. (무굴 제국에 악바르라는 희대의 명군이 있었다면, 명 제국에는 만력제라는 희대의 암군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목적 중 하나가 중국을 정벌하고 나면 인도 정벌에 착수하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인도를 침공했다면 그는 악바르와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악바르의 동시대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면, 악바르 때 인도에서는 툴시다스라는 시성이 활동하고 있었다. (툴시다스의 주저 람차리트마나스는 산스크리트 서사시 라마야나를 힌디어의 방언인 아와디어로 개작한 것으로 북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경전이자 서사시 중 하나로 웬만한 힌두 가정은 다 이 책의 사본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단테의 신곡이나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과도 견줄만한 작품임에 틀림없으나 외부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
2.2.2 자한기르와 샤 자한
악바르 대제의 뒤를 이은 4대 자한기르 역시 수완가였다. 자한기르는 무굴 제국의 황제들 중 처음으로 인도 귀족의 어머니를 두었고, 인도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티무르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었다.[18] 하지만 자한기르의 시대에 시크교와 무굴 제국 정부의 사이가 나빠졌다. 시크교가 자한기르의 장남이 반란을 일으키게 획책했기 때문이다. 이후 제국의 역사 내내 시크교와의 사이는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크교와의 갈등은 종교적이라기보다도 정치적인 문제였고, 자한기르 본인은 아버지처럼 타 종교에 우호적인 편이어서 관용 정책을 지속해나갔다.
압둘 아지즈의 연구에 의하면 자한기르 때 국고에 쌓인 금이 7톤, 은이 1116톤, 다이아몬드가 80파운드(500만캐럿 이상), 루비와 에메랄드가 각 100파운드(각 650만캐럿 이상), 진주가 600파운드, 그 외 각종 보석이 무진장했다고 하니 그 당시 무굴 제국이 굉장히 부유한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종종 무굴 제국의 부유함은 프랑스와 페르시아를 합한 것보다 더 굉장하다고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샤 자한(1592~1666, 왼쪽)과 뭄타즈 마할(오른쪽)
셋째 아들로 계승한 5대 샤 자한(샤 자한 1세, 본명 샤하붓딘 무함마드 후람, 재위 1627~1658)도 '세계의 왕'이란 칭호를 받을만큼 나름대로 훌륭한 군주였다. 관용 정책을 유지하고 영토 확장을 계속해 무굴 제국을 당대 최대의 제국으로 넓힌 것도 업적. # 샤 자한 시대의 강역, 지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칸다하르와 카불도 당시 무굴 제국의 영역이었다. 칸다하르는 끝내 샤자한 후반기에 페르시아에게 뺐기고 말지만...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를 정도라고 한다. 남쪽의 골콘다와 비자푸르도 샤자한에 굴복하여 조공을 바치는 신세였다.(이 두 나라는 이후 아우랑제브가 치열한 전쟁 끝에 합병해버린다.)
당시 무굴 제국의 보병은 90만 명이 넘었고, 기병은 18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1년 세입은 악바르 시절의 2배가 넘을 정도였다. (악바르 시절의 1년 세입이 영국 파운드화로 1750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샤자한 시절의 1년 세입은 3770만 파운드 이상이었다고 한다. 알람기르의 시절에는 3860만 파운드 이상!) 당시 무굴 제국은 오스만, 사파비, 청나라 등과 더불어 세계에서 명실상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대국 중 하나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니아 등도 당시 강대국 대열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애처가였던지라 셋째 황후 뭄타즈 마할이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자 국력을 소진시켜 가면서 그 유명한 무덤 타지마할을 지어버렸다[19]. 지금이야 인도의 관광수입을 높이는 세계유산으로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받지만 당시 건설을 위해 동원되고 희생당한 국민들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샤자한 당시 연세입은 3억 180만 루피 정도였는데, 타지마할 공사에 22년 동안 총 32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연간 약 145만 루피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딴 수도 샤 자한 나바드를 델리에 짓고, 붉은 궁성에 디와니앰과 디와니하스를 지었으며, 카슈미르에 777개의 정원을 짓는다든지 하는 온갖 계획을 동시에 진행시켰다. 참고로 붉은 궁성 공사에는 총 6000만 루피가 소요되었다.
2.3 정체기 : 아우랑제브 (알람기르 1세)
결국 샤 자한은 타지마할 축조로 인해 민심을 잃은 것을 빌미로 마흔살의 아들인 아우랑제브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 유폐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아우랑제브 역시 뭄타즈 마할의 셋째아들이었지만 사실 어머니 장례식한다고 백성들 등골 빼먹는 격이니 나름대로 명분은 있었다. 이렇게 6대 황제가 된 젊은 아우랑제브 황제(1618~1707, 재위 1659~1707)는 꽤나 야심만만하고 호전적인 군주였던지라 즉위 직후 바로 정복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 때 계획했던 아그라에서 델리로의 천도를 완수했으며, 그 결과 인도 역사상 최대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명목상으로는 스리랑카를 제외한 남인도까지 거의 다 밀어버린 것으로 판단할 정도. "무굴의 영역은 카불에서 코모린 곶(지금의 타밀나두 주 카니아쿠마리)까지"라는 이야기가 종종 불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역적인 면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 반대로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제국은 퇴보를 걷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재위 20년을 넘기면서 이슬람빠였던 그가 힌두교도, 시크교도 국민들에게 철저한 불관용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 그러나 그는 오로지 영토를 제일 크게 넓혔다는 이유만으로 무굴 제국 황제들 중 제일 유명해져 버렸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20] 긴 재위(48년) 내내 팽창정책을 구사했으나 내치에서 퇴보를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가 죽고난 직후 태어난 청나라의 건륭제나 동시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아우랑제브 시대의 온갖 병크는 결국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아우랑제브의 강압에 반발한 힌두교도들이 결성한 마라타 동맹의 반란으로 제국은 분열을 맞았으며, 시크교 역시 그들의 구루가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이래 무굴 제국에 반발했다. 아우랑제브가 분노해 남부 고원의 마라타 게릴라들을 진압하자, 이번엔 시크교도들이 많은 북부가 그들의 반란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아우랑제브는 선대 황제들과 달리 후사 문제를 제대로 수습해놓지 못한 채 데칸고원에서 전사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사후 국정 역시 극심한 혼란 국면에 빠져들었다.[21] 결국 잘했던 20년보다 말아먹은 30년이 더 부각되는 안습한 인물. 해먹기도 오래도 해먹었다
아우랑제브가 후사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세 명의 아들들이 서로 황위를 차지하려 다투다가인도판 왕자의 난 그 중에 제일 나이가 어린 아들이 형들을 몰아내고 바하두르 샤 1세(Bahadur shah I)로 즉위한다.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의 병크로 인해 터진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많은 애를 썻지만 병으로 고작 5년밖에 못하고 죽는다. 바하두르 샤 1세 이후로는 더이상 제대로 된 황제가 나오지 않았고 무굴 제국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2.4 쇠퇴 멸망기
30년의 혼란속에서 무굴은 점차 약해졌고, 기어이 델리 함락으로 결정타를 받았다. 페르시아 아프샤르 왕조의 전투 기계 나디르 샤가 1739년 델리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무굴 제국군을 대파하고, 델리로 입성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약탈한 뒤, 무굴 제국은 실질적으로는 망했다. 실질적인 행정력이 미치는 지역이 수도인 델리밖에 없는, 그야말로 동주나 신성로마제국, 후삼국시대 후기의 신라 같은 처지가 되었고, 인도 각지는 마라타 동맹 등 힌두계 왕국들과 이슬람계 술탄국인 마이소르 왕국, 하이데라바드 왕국 등이 나누어 접수한다. 마라타 동맹과 마이소르 왕국은 둘 다 영국에 투항해 버린다.
이 틈을 노린 영국은 1757년의 플라시 전투(7년 전쟁의 인도 전역)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이래 동인도 회사를 내세워 소왕국들을 회유·정복하면서 인도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영국의 꼭두각시가 된 18세기, 19세기 사이에도 무굴 제국은 명목상으로나마 백여년간이나 존속할 수 있었지만, 바하두르 샤 2세가 세포이 항쟁을 뒤에서 지원하자 영국은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고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하여 추방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무굴 제국을 폐지시켰다(1857년). 그렇게 인도 최후의 왕조인 무굴 제국은 330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무굴 제국을 없애고 나머지 남인도 및 스리랑카, 심지어 버마까지 병합한 영국은 전 인도를 아우르는 단일 식민 통치 기구인 인도 제국을 1877년 수립하기에 이른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 ↑ [1], [2], [3]
- ↑ mogul 혹은 moghul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러면 이건 남아시아필의 "거부", "장자"라는 의미로 쓰인다.몽골 제국과의 혈연성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몽골-투르크 계열의 조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계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다만 시조 바부르가 혈통적으로 티무르와 차가타이 계통인 건 확실하다.
- ↑ 인도 반도의 면적은 440만 km2 정도로 러시아 등을 제외한 유럽 (540만 km2)보다 조금 작은 수준이다.
- ↑ 어렸을 때부터 뻐드렁니 때문에 비버처럼 생겼다고 바부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 ↑ 티무르의 셋째 아들 미란 샤의 자손이다.
- ↑ 모계로 모굴리스탄의 유누스 칸의 자손인데 그는 징기스칸의 둘째인 차가타이 계통이다.
- ↑ 후마윤은 이 와중에도 사마르칸드에 대한 집념을 못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갔다가 우즈베크족에게 털리고 인도로 갔다(...)
- ↑ 도서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그리고 후마윤의 할아버지 곧 초대황제 바부르의 아버지는 바부르가 열한살때 벼랑에서 새랑 같이 놀다가 실수로 헛디뎌 떨어져 죽었다.(.....)
집안 내력? - ↑ 악바르라는 이름 자체가 위대함이라는 의미이다. 알라후 아크바르!할때 아크바르가 이 악바르이다.
- ↑ 이름이 '조다'로 알려져있지만, 그 밖에 다른 여러가지 이름이 있다. 인도 영화 '조다 악바르'는 이 공주와 악바르 사이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는 조다 공주가 잘랄루딘 무함마드(악바르의 본명)의 유일한 부인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악바르에게 부인이 36명이나(!) 있었다.
- ↑ 바부르, 후마윤과 함께 인도로 온 기존 무굴 제국의 지배층, 즉 중앙 아시아 출신의 투르크인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투르크인들이 중앙 집권 체제와 왕권 강화를 아주 싫어했던 것은 이 시절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 ↑ 사실 1580년에 동생 무함마드 하킴을 중심으로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악바르도 고생을 좀 했다. 이 반란 진압 이후로 악바르는 확고한 위치를 점할수 있었다.
-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에선 이 글에 주석으로 네루의 "그것이 무신론자라면 우리에겐 무신론자가 많을 수록 좋다."라는 어록을 넣어 디스했다.
- ↑ 본문에는 이것(= 딘 일라히)이 하나의 확실한 종교라 서술되어 있지만, 사실 소수설이다. 다수설은 악바르가 단지 이슬람의 (이단적인) 종파를 만들었다는 것. 악바르가 만든 종파는 악바르를 (준)성인으로 칭송했다. 이는 악바르가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그 자신에 대한, 더 나아가 무굴 황실 그 자체에 대한 충성에 신성성을 더해주기 위함이라 추측된다. 그에 대한 일례로 악바르의 사후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자한기르는 딘 일라히의 주장 대부분은 폐기했지만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되는 부분은 모두 남겼다. 또, 종교적 경직성으로 많은 비난을 받는 아우랑제브도 왕권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면 악바르의 이단적 주장을 실행에 옮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후일 무굴 제국이 영국에 대항하는 저항에 지도자로 추대된 것 역시 악바르의 종파가 남긴 영향이라 평가된다.
- ↑ 이 종교/종파가 지나치게 악바르의 후빨을 한 탓에, 악바르의 이와 같은 행위를 노망이 아닌가 하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이 종교/종파를 악바르가 선포했을때 악바르의 나이는 고작 40살에 지나지 않았는데!
- ↑ 추가하자면 악바르가 이 종교를 창시한 목적은 위에 나온바와 같이 힌두,무슬림,시크,자이나 등 당시 인도 아대륙에 존재하던 여러 종교들을 통합하는 것에 있었다. 각 종교의 좋은점(본인의 생각에..)들을 짬뽕하여 만든 것이 바로 악바르의 종파였다.
- ↑ 재미있는 것은 무굴 제국의 행정 체계는 사실 후마윤을 인도 바깥으로 추방했던 셰르 칸 수리의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 ↑ 그래서 외국의 사신들이 자한기르에게 티무르와 관련된 유물을 선물로 주거나, 유물을 미끼로 우호 관계를 맺으려고 했단다.
- ↑ 하지만 이 타지마할 덕에 세계사적으로 무굴 제국의 문화적 가치가 드높여지게 되었다.
원래 어제의 토목이 오늘의 문화유산이 되는법 - ↑ 아우랑제브 또한 죽기직전 '나는 전쟁을 너무나도 좋아했다.'라며 후회했다.
- ↑ 아이러니하게도 데칸은 아우랑제브가 최초로 부왕을 지냈던 봉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