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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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 ← | 데이빗 로이드 조지 | → | 앤드루 보나 로 |
풀네임 | David Lloyd George, 1st Earl Lloyd-George of Dwyfor (1대 뒤퍼 백작,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
출신 정당 | 자유당 |
생몰연도 | 1863년 1월 17일 ~ 1945년 3월 26일 |
재임기간 | 1916년 12월 6일 ~ 1922년 10월 19일 |
1 개요
1차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인물. 클레멘트 애틀리보다 30여년 앞서서 현대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국제적으로도 파리 강화 회의, 아일랜드 독립 승인과 같은 굵직한 사안들에 자취를 남겼다. 덧붙여서 자유당에서 배출한 마지막 총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1863년 맨체스터에서 출생했다. 맨체스터에서 출생하였지만 부모는 웨일스 출신이었고, 그 덕분에 그의 모국어는 웨일스어가 된다.[1]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자유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실시된 영국 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면서[2] 정치인으로의 생활을 시작한다. 다만 이 시기에 영국 국회의원은 무보수직이어서 먹고 살려고 변호사 활동도 꾸준히 했다고 한다.
2.2 소장파 의원 시절
그가 막 초선의원에 당선됐을 시절, 자유당의 지도자이자 영국의 수상이었던 글래드스턴은 아일랜드에게 자치권을 부여하고자 백방 노력하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로이드 조지 역시 웨일스 자치 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아일랜드 자치권 법안이 영국 하원에서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되면서 글래드스턴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웨일스 자치 운동 역시 시들해졌고, 결정적으로 1895년 영국 총선에서 자유당의 참패 원인으로 지방 자치 운동이 거론되면서 로이드 조지는 웨일스 자치 운동을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시련은 그에게 추진력을 주기 위함이었고 1902년 보어 전쟁과 제국주의의 비도덕성을 비판[3]하는 연설을 행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 된다. 이 연설에 분노한 전쟁 지지자들에게 살해 협박을 받기도 하고, 전쟁 수행 지지 여부를 놓고 자유당이 분열되는 등 시련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용감한 연설 덕분에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 내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연이어서 교회학교에 국가가 보조금을 제공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4]하면서 자타공인 자유당 내 거물이 된 로이드 조지는 1905년 헨리 캠벨배너먼을 수상으로 하는 자유당 정권이 수립되면서 상무원(商務院) 장관으로 등용된다.
2.3 내각 활동
상무원 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기업인들을 설득하여 노조의 대표권을 인정하는 한편 노사분규를 제어할 목적으로 노사정위원회[5]를 설치한다.[6] 이어서 새로 수립된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에서는 1908년 재무부 장관으로 위치를 옮긴다. 당시 영국은 독일 제국과 건함 경쟁이 한창이던 와중이었는데 로이드 조지는 파격적이게도 드레드노트 전함의 군축과 이를 통한 복지 증대를 주장한다. 심지어 다음해인 1909년에는 당시로서는 생각도 못한 개념이었던 불로소득에 대한 징세를 주장하여서 영국의 상류층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는다.
다만 로이드 조지의 이런 제안들은 당시 영국 정계에서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특히나 야당 보수당의 격렬한 반발을 샀던 탓에 모두 무산되고 만다. 특히나 전함 군축 문제와 관련되어서는 야당 보수당이" We want eight[7] and we won't wait."라임 오지구요이라는 슬로건까지 들고 격렬하게 반대했고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 불타오르던 일반 대중들 역시 보수당의 슬로건에 크게 호응하면서 신나게 욕만 먹고 끝난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는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비를 조달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러던 중 전쟁 2년차인 1915년에 포탄 위기(Shell Crisis)가 영국 정계를 뒤흔든다. 이 시기 영국군은 포병 전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포탄의 공급량과 질이 크게 떨어졌던 것. 애스퀴스 수상은 부랴부랴 탄약성(Minister of Munitions)이라는 새로운 정부 조직을 만들고 로이드 조지를 이 탄약성의 장관으로 임명한다. 탄약성 장관으로 임명된 로이드 조지는 군수물자의 생산 및 보급 과정에 있어 일대 개혁[8]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효과를 거두면서[9] 로이드 조지는 이 시기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된다.
1916년에는 전쟁성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이었던 키치너 경이 독일 유보트의 어뢰 공격에 사망하면서 로이드 조지가 이 자리까지 겸하게 된다. 1916년 7월 그가 전쟁성 장관을 맡기 시작했을 당시 전황은 암울했다. 막 시작된 솜므 전투에서 영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량[10]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진격속도는 더디기 짝이 없었다. 이런 막장 상황에 빡친(...) 로이드 조지는 더글러스 헤이그를 비롯한 영국군 수뇌부들에게 극딜을 퍼부었다. 다만 이런 극딜과 간섭을 별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11]한편 영국 정계에서는 지지부진한 전황으로 인하여 총리 애스퀴스의 전시 수행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만 갔고, 마침내 1916년 12월 로이드 조지가 파워 게임 끝에 애스퀴스를 사임시키고 영국의 수상이 된다.
2.4 전시 수상으로서
로이드 조지의 취임과 동시에 독일은 강화 협상을 제의하지만 단칼에 이를 물리친다. 로이드 조지의 주도 하에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함께 1917년 4월 아라스 전투를 개시하고 부분적인 성과를 거둔다. 이 시기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통해 영국을 봉쇄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 역시 이에 대항하여 유보트 격파와 상선 생산량 증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의 이런 전시 정책은 영국에게 소중한 노하우로 자리잡았고 20년뒤인 2차대전 당시에도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전시 연합내각이 그대로 벤치마킹하면서 영국이 암울한 시기를 버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준다.
전쟁 마지막 해였던 1918년에는 영국 내부의 만연한 반전주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인력 부족[12], 러시아 혁명으로 인한 동맹국의 전선 이탈(+ 서부 전선으로의 독일군 역량 집중)와 같은 고난이 연이어 벌어졌지만 의지의 로이드 조지는 굴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영국은 승리를 거둔다.
2.5 전후 처리
종전직후였던 1918년 12월에 진행된 선거에서 로이드 조지가 이끄는 자유당+보수당 연립 내각은 압승을 거두면서 국민의 재신임을 받는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뒷처리는 남아있었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빅3의 일원(우드로 윌슨, 조르주 클레망소)으로 참가한 로이드 조지는 전반적으로는 독일에 온건한 태도를 보여줬다.[13]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에는 오랜 세월 영국의 골치를 썩힌 아일랜드의 독립을 사실상[14] 승인한다.
이런 국제 문제 이외에도 로이드 조지는 내정 개혁도 실시한다. 전쟁 와중에 남성을 대신하여 생산 현장에 투입됐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고 이러한 요구에 응하여 30살 이상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한다.[15] 그 외에도 최저임금 관련 법안, 건강 보험 등의 제도를 개정하면서 로이드 조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영국인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노력한다.
2.6 실각과 말년
1922년 로이드 조지가 아일랜드의 실질적인 독립 승인과 더불어 소련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 연립 내각의 일원이었던 보수당 안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여기에 로이드 조지 개인의 비리 스캔들까지 터지면서 연립 정권을 빠른 속도로 붕괴됐고 결국 로이드 조지는 같은해 10월 19일에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총리직 사임 후에도 정계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총리직 재도전에 대한 야망을 공공연히 표출했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1920년대 중반부터는 노동당이 급부상하면서 자유당이 설 입지가 더더욱 좁아지는 결과를 빚어낸다. 그렇지만 로이드 조지 본인이 지니고 있던 정치적 위상은 대단했기 때문에 2차대전 시기까지도 꾸준히 활동하면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16] 1945년 1월에는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같은 해 3월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 니벨 공세 당시 작전계획에 국왕이 간섭할까봐 작전 내용을 철저히 국왕 앞에서 함구할 것을 내각 구성원들에게 요구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조지 5세는 꽤나 삐졌었다고(...)
- 로마노프 왕조의 무능력에 질렸던 탓에 러시아 혁명이 발발했을 당시 은근히 니콜라이 2세의 폐위를 반겼다고 한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을 줄은 몰랐겠지게다가 로마노프 왕조가 영국으로 망명하려는 것을 은연중에 거절했던 탓에 니콜라이 2세의 일가는 결국 공산정권에 의해 집단 처형됐고 이로 인해서 비판받기도 했다. - 아랍 쪽에서는 상당히 취급이 안좋다. 바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들의 국가 건설을 약조한 밸푸어 선언이 그가 총리일 때 진행됐기 때문. 다만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쪽에서는 그가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적극 지지하면서 독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좋은 평가를 받는 모양.[17]
- 말년의 흑역사이지만 나치당에 대하여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1936년에는 직접 히틀러의 별장이 있는 베르히스가르텐을 방문해 히틀러를 만나보기도 했다. 그가 히틀러에 대하여 내린 평가는 대단히 신뢰가 가며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 프랑스 침공 직후 영국이 고립무원의 상황이 됐을 때는 독일과 강화를 주장했다가 총리 윈스턴 처칠에게 '페탱같은 노친네'라고 까였었다.
아닌게 아니라 1차대전 당시 행적과 비교해도 영락없이 영국판 페탱이 될 뻔 했다.
- ↑ 지금까지도 모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웨일스어인 인물은 그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 ↑ 다만 선거 자체는 엄청난 박빙이었다. 딱 19표 차이.
- ↑ 다만 추후 총리 시절 1차대전 와중에는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다가 종전 이후 입을 싹 씻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그 역시 엄연한 제국주의자였다. 뭐 그나마 온건한 성향의 제국주의자이기는 했지만...
- ↑ 글래드스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영국 자유당의 핵심 정체성 중 하나는 바로 정교분리였다.
- ↑ 오늘날 한국처럼 노-사-정이 처음부터 한자리에 모이지는 않았다.
역시 자유주의 신봉자일단 노동자와 사용자간의 협상을 거쳐 타협에 실패할 경우에만 정부가 개입하는 시스템이었다. - ↑ 여담이지만 당시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2세 역시 로이드 조지의 이런 조치를 격찬했다고 카더라(...)
- ↑ 당시 영국 해군법(영국 해군의 전력은 세계 2위 3위 국가의 전력을 합친 것보다 많아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법.)에 의거하여 영국 해군은 8척의 드레드노트를 보유해야만 했다. 로이드 조지는 이 8척을 4~6척으로 줄이자고 주장.
- ↑ 전쟁 초반부에는 군 측에서 물자 생산을 담당하였는데 이것이 비효율의 극치였다. 그리고 로이드 조지가 군 인사들과 대판 싸운끝에 물자 생산을 철저히 탄약성 및 산업부의 통제 밑으로 두는데 성공한다.
- ↑ 다만 몇몇 군사학자들의 경우에는 로이드 조지가 탄약성 장관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이미 생산 과정에 대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고, 로이드 조지는 그냥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수정바람.
- ↑ 개전 첫날에만 5만 8천명의 영국군이 독일군 기관총 앞에 녹아내렸다.
- ↑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이 주도한 갈리폴리 전투를 비롯하여 정치인들이 주도한 군사작전이 다 폭망으로 끝나자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제발 전쟁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니들 정치인들은 뒷바라지나 잘해라!'라는 분위기가 커져갔다.
근데 처칠은 나름 장교 출신인데... - ↑ 로이드 조지 본인도 스페인 독감에 감염됐었다.
- ↑ 클레망소와 달리 독일을 경제/군사적으로 완전히 재기 불능으로 만드는데 강경히 반대했다. 다만 독일을 적당히 약화시킬 필요는 그도 느꼈기 때문에 카이저의 재판과 신생 폴란드의 바다로 나가는 통로 확보 등의 안건에는 동의를 표했다.
- ↑ 사실상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형식상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아있었으며, 영국의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게다가 북동부 일부가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던 건 덤. 아일랜드가 완벽히 영국에게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1937년의 일.
- ↑ 영국에서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연령대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 ↑ 가장 대표적으로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이후 네빌 체임벌린을 실각시키고 윈스턴 처칠을 수상으로 등극시킨 이면에 그의 정치공작이 있었다.
- ↑ 막상 신생 폴란드가 한껏 민족주의에 고무되어서 소련을 침략해버리자 '성가신 얼라들(children who gave trouble)'이라고 씹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