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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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1월 20일 ~ 1968년 6월 6일
풀네임은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 (Robert Francis Kennedy). 애칭으로 바비 (Bobby)라고 불리기도 한다.

1 소개

미국의 64대 법무장관을 지냈으며 1968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선에 참가했으나 암살당했다.

미합중국 제35대 대통령존 F. 케네디의 동생.

2 일대기

1925년 매사추세츠 주 브룩레인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딴 뒤 변호사 자격증을 얻었다. 1952년 형인 존 F. 케네디가 상원의원에 출마하자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고, 1953년에는 매카시즘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가 이끄는 상원 위원회 법률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60년에는 형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대통령 선거 운동 사무장으로 선거 운동을 관장하였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존 F. 케네디가 당선되자 로버트는 35세의 나이에 법무장관에 발탁되는데, 이러한 장관 인사를 두고 족벌인사, 정실인사라는 비난이 빗발쳤으나 법무장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과 초기의 여러가지 업적은 로버트 케네디를 미국 역사상 훌륭한 법무장관들 중 하나로 남게 하였다.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함께 유일하게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장치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사후에는 248시간 분량의 회의기록, 12시간의 전화통화 내역을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누어져 공개되었다. 이 녹취 대화록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국정수행능력을 평가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존 F. 케네디의 암살 이후 린든 B. 존슨 행정부까지 법무장관을 역임하였으나 1964년 상원의원 출마를 위해 법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해 11월 상원의원 선거에서 현직 상원의원을 제치고 뉴욕주 상원의원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민권법안의 통과에 큰 기여를 하였고, 한창 진행중이던 베트남 전쟁의 수행에 관하여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진보 세력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1968년 대통령 선거에 예비 후보로 출마하여 여러 주에서 승리를 거두고, 1968년 6월 4일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6월 5일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앰배서더 호텔에서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 나오던 중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에게 총격을 받아 다음날 이른 새벽 사망했다.

3 암살

1968년 6월 5일 태평양 표준시로 밤 12시 15분경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뒤 지지자들에게 연설을 하고나서 앰배서더 호텔의 주방으로 빠져나왔다.

주방 복도에서 마주치는 지지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던 로버트 케네디는 당시 16세 소년 후안 로메로와 악수를 하는 순간, 미리 접근하고 있던 시르한에게서 8발[1]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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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바로 이송되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위 사진에서 보듯이 로버트 케네디는 총격을 받고 자리에 쓰러졌고 응급구조요원이 도착할 때까지 몇 분 동안을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있었다. 게다가 로메로에게 "모두 다 괜찮냐"고 물어볼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이 있었던 상태였다. 로버트 케네디가 사망한 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시르한의 총격이었지만 간접적으로는 늦게 도착한 응급구조요원의 책임도 크다. 적절한 응급조치가 있었더라면 생명을 구했을지도 모를 일.

로버트 케네디는 근처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조치를 받았지만 다음날 새벽 1시경 사망하였다. 경찰의 조사에 따르면 시르한 비샤라 시르한은 팔레스타인 이민자로서 평소에 로버트 케네디의 친이스라엘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저질렀다. 원래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여담으로 이때 시르한을 기소한 검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스쿨을 나와 법조계에서 활동했던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실제 인물 린 캄프튼.
2016년에도 계속 복역 중이며, 2016년 초에 감형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마피아히트를 다룬 서적에서는 법무장관 당시에 마피아들을 하도 갈궈대서 빡친 마피아가 암살했다고 하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추측은 쿠바 공격을 크게 확장하지 않은 케네디 형제에 대한 CIA 등의 분노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입장으로는 형 존 F. 케네디 역시 쿠바 습격 작전을 축소한 탓에 공격이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도리어 아예 발을 빼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최근 모건 프리먼이 나레이션을 맡은 다큐 <JFK: 배신당한 대통령> 같은 곳에서도 밝혔고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같은 영화에서도 묘사되었듯 앞뒤안가리는 군부 미치광이들의 의견대로 전쟁을 확장했다면 3차 대전으로 빠질 위험이 상당했다. 그리고 억지로 확장하려고 대통령에게 왜곡되거나 제대로 되지 않은 정보를 제공하는 등 횡포가 심했다. 로버트 케네디도 형의 뜻을 따르고 있었으므로 목표에 올라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마피아도 이 쿠바 문제에 다른 쪽으로 이권이 걸려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정황증거이니 해석은 여러분의 몫이다.

4 암살 여파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함에 따라서 몇 해 전 존 F. 케네디, 그리고 대선이 열리던 1968년 4월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잃었던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특히 196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기에 로버트 케네디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결국 암살당하면서 로버트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형제 공동 최연소 대통령이 형제 암살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만일 로버트 케네디가 68년 선거에서 이겨서 취임했다면 형과 같은 만 43세가 되는데, 로버트가 생일이 더 늦기에 43세 2개월로 형의 기록을 반년 경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선거를 거치지 않은 승계 최연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이길 수는 없었겠지만.

오래 생존한 편인 동생 에드워드 케네디(테드 케네디, 1932 ~ 2009) 상원의원 역시 다음 선거인 1972년 선거에서 대통령의 꿈을 꾸고[2], 실제로 당선 가능성도 높게 여겨졌지만 여비서의 의문사 일명 차파퀴딕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경선에서 낙마하고 말았다. 그렇게 닉슨은 (곧 사임하지만) 짧게나마 수명연장을 했다. 이후 1980년 선거에서 지미 카터를 대신할 인물로 부상하지만 경선에서 패배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1994년 선거에서 밋 롬니를 이기는 등 피선거권이 주어지는 30세(1962년)에 보궐선거로 당선된 이래 반세기에 가까운 46년 292일을 8선 상원의원으로 지냈다. [3][4][5][6] 이게 더 대단하다/대통령 후보와 수명을 맞바꿨어 뇌종양 투병 속에서도 버락 오바마를 지지를 호소했으며, 결국 약 1년 뒤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민주당은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허버트 험프리를 대선후보로 내세우지만 리처드 닉슨에게 패배했다. 거기에 민주당의 분열 크리까지 겹치면서 선거인단을 제외하고는 간발의 차로 패한 것. 아마 로버트 케네디였다면 당선되었을 확률도 컸을 것이다. 그랬다면 1968년(항목 참조)은 완벽하게 실패하지만은 않은 해가 되었을 것이며, 민주당 주도 정국은 당분간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워터게이트 사건와 같은 불명예스런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일단 닉슨이 대통령이 안된게 어디냐 여러 의미로, 로버트 케네디의 죽음은, 특히 미국 진보진영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2001년 11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로버트 케네디의 탄생 76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법무부(미국) 청사의 이름을 로버트 F. 케네디 빌딩으로 바꾸었다.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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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컬프[7]가 마릴린 몬로의 삶을 다룬 <노마진과 마릴린>(1996년작), 쿠바 미사일 위기를 배경으로 한 <D-13>(2001년작)에서 두 차례 로버트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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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가( 家)>(Kennedys. 2011년작)에서는 배리 페퍼[8]가 로버트 역으로 출연했다. 화려하지만 스캔들, 잔병 치레에 시달리는 형과는 대조적으로 가정적이고 사생활도 깨끗하며, 나이와 경력으로 자신보다 한참 위인 FBI 국장 에드가 후버를 상대로도 주눅들지 않는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형의 피살 후 형수인 재클린을 각별히 배려하는 모습도 나온다.[9]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노골적으로 밥 호스킨스가 분한 존 에드거 후버의 음모로 묘사된다. 후버를 만난 닉슨이 로버트 케네디가 있는 한 당선이 어렵다고 하자 "그럼 그 인간이 출마를 안하면 되겠군."라고 하고 닉슨은 그 인간이 왜 출마를 안하겠나?하고 손사레를 치지만...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에서도 존 F. 케네디 암살과 함께 간단히 언급된다. "형제는 힘든가봐요."

2006년 부시 집권기에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바비>가 개봉되었다.

에밀리오 에스테베즈가 감독을 맡았으며, 부시에 질려있던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영화에 대거 출연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 데이비드 사우스웰의 책에 의하면, 그 대부분의 총격은 뒤에서 날아온 것이라고 한다.
  2. 여기는 당선됐다면 취임시 만 40세 9개월. 더 어리다!
  3. 재미있는게 공화당의 역대 최다선 상원의원(7선, 41년)의 이름도 테드 스티븐스(역대 7위)다. 알래스카 출신이라 앵커리지에 스티븐스의 이름을 딴 공항도 있다. 87세로 2010년 사망. 여하간 페일린의 땅 답다
  4. 참고로 역대 최장은 아니다. 민주당 상원의원들은 장수 의원이 많아 무려 3명이 에드워드 케네디의 기록 앞에 있으니, 즉 역대 4위다. 최장은 92세까지 9선, 51년간 상원의원을 맡은 웨스트 버지니아로버트 버드Robert Byrd(1917년~2010년). 에드워드 케네디보다 장수하면서 끝내 최고령 의원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젠장
  5. 참고로 2위는 하와이일본계(이민자 2세) 의원인 대니얼 이노우에(Daniel Inouye)로, 50년에 육박하며 2012년 88세로 사망해 기록경신에는 실패.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미군에 복무하며 명예 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이지만 친일적 행보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미국 내 걸림돌로도 유명하다. 같은 핏줄이니 이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일본계임에도 적극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에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6. 3위는 2003년 100살까지 46년을 재직한 사우스 캐롤라이나스트롬 서먼드. 보듯이 체육교사,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전쟁영웅(중령), 주지사, 해리 S 트루먼에 맞선 딕시크랫의 독자 대선후보 등 장년까지 별짓 다하다가 54세부터 일종의 정계은퇴직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되며 세운 기록이다. 에드워드 케네디, 로버트 버드, 대니얼 이노우에처럼 젊어서부터 상원의원에 나섰으면 최소 60~70년의 기록은 세웠을 듯. 대선후보시절 제3당으로 득표한 표도 어마어마하지만, 출마를 안해도 대선 낙마에 빡친 민주당 보수파 백인 유권자의 압도적인 몰표로 첫 임기에 당선되고, 사임하고 나와도 홀로 당선되는 흠좀무했던 인물.
  7. <위기의 주부들> 시즌1에서 브리 반 드 캠프의 남편, <웨스트 윙>에서 미 하원의장 등으로 출연했음.
  8. 전쟁 영화 <위 워 솔져스>에서 종군기자 조 갤로웨이로 출연했다. 그보다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다니엘 잭슨 이병 역으로 나왔었다.
  9. 극중에서 재클린 역으로는 과거 탐 크루즈의 연인이었던 케이티 홈즈가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