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 |||||||||
미국 | 영국 |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 | 조지 6세 | 네빌 체임벌린 | 윈스턴 처칠 | 클레멘트 애틀리 | ||||
중화민국 | 소련 | (자유) 프랑스 | |||||||
린썬 | 장제스 | 미하일 칼리닌 | 이오시프 스탈린 | 샤를 드 골 |
미국 대통령 | |||||||
32대 | ← | 33대 | → | 34대 | |||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 ← | 해리 S. 트루먼 | →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공식 초상화 | |
성명 | Harry S.[1] Truman |
정당 | 민주당 |
생몰 | 1884년 5월 8일 ~ 1972년 12월 26일 (만 88년 7개월 18일) |
재임기간 (미 합중국 부통령) | 1945년 1월 20일 ~ 1945년 4월 12일 (만 82일) |
재임기간 (미 합중국 대통령) | 1945년 4월 12일 ~ 1953년 1월 20일[2] (만 7년 283일) |
서명 | |
키 | 175cm |
< 1945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190px | ||||
1944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 | 해리 S. 트루먼 | → | 1946 - 제임스 번스[3] |
< 194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190px | ||||
1947 - 조지 C. 마셜 | → | 해리 S. 트루먼 | → | 1949 - 윈스턴 처칠 |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4]- 대통령 재임 중 책상 위에 놓은 명패에 적힌 글.
나는 그 자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파면했다. 그 자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파면한 게 아니다. 물론 그 자는 그랬지만, 그게 불법은 아니니까. 만약 그게 불법이었으면, 장군들의 절반 혹은 3/4 정도는 다 감옥에 있어야 할것이다.[5]-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 중 트루먼이 1960년에 했다는 발언을 인용하며
개새끼![6]- 입버릇처럼 달고 산 말
목차
1 개요
미국의 33대 대통령. 그의 전임자 FDR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부통령이 된지 82일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입장에선 나라를 세 번이나 구한 인물.[7] 앤드루 잭슨의 뒤를 이어 평범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도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일전까지 대통령 한 명 나오지 않았던 '깡촌' 미주리 출신 (미국 역사상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다. 제럴드 포드와 흥미로운 공통점이 많다. 유이한 중서부 출신, 초임이 아닌 후임자 부통령, 그리고 승계, 재임 당시의 낮은 인기 등. 다만 트루먼은 재선에 성공했고 주요한 결정으로 미국 역사에 한획을 긋고 갔다.
2 이름
퍼스트 네임인 해리는 해리 S. 트루먼의 외삼촌이자 어머니(마사 엘런 영 트루먼·Martha Ellen Young Truman)의 오빠인 해리슨(해리) 영(Harrison "Harry" Young)에게서 따왔다. 단 외삼촌의 경우 Harrison이 정식 이름이고 Harry는 애칭이었지만, 해리 S. 트루먼은 Harry 자체가 정식 이름이다.
트루먼의 미들 네임은 그냥 S.이다. ' 그의 친할아버지(Anderson Shipp Truman)와 외할아버지(Solomon Young)의 이름을 동시에 따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알파벳 한 글자를 그대로 미들네임으로 하는 건 스카치 아이리시[8] 사이에 흔한 관행이라고 한다.
트루먼은 "할아버지가 내 출생신고를 하면서 서류 위에 국수 한가닥을 흘렸어."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뒷날 트루먼은 미들네임인 S가 이니셜이 아니라 완전한 이름이기 때문에 뒤쪽에 붙는 점을 빼는 게 맞다고 말한 적이 있는 모양이지만(출처 필요) 실제로는 트루먼 본인도 공문서나 조약 등에 서명할 때는 분명히 'Harry S. Truman'이라고 적었으며 트루먼 본인의 자서전에도 미들네임 뒤에 점을 찍어 본인의 이름을 표기하고 있다. 즉 트루먼이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면 '굳이 따지자면 S 뒤에 점 안 찍는 게 맞겠지만, 그냥 점을 찍고 있다'는 정도로 말했다고 이해하면 될 듯.
증거자료인 트루먼의 친필 서명. 미들네임 S 뒤의 점이 선명하다.
트루먼의 대통령 취임식 선서를 진행한 할런 F. 스톤(Harlan Fiske Stone) 연방대법원장은 트루먼의 풀네임을 오해하여 그에게 "I, Harry Shipp Truman"(나 해리 십 트루먼은)이라고 따라 말하게 시켰는데 트루먼 본인은 알아서 "I, Harry S. Truman"(나 해리 S. 트루먼은)으로 고쳐서 선서한 일화가 있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1897년 사진. 아따 고놈 똘똘하게 생겼네. 이런 애가 커서 입에 SOB를 물고다니는 사람이 될 줄이야
미주리 주 러마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지독한 책벌레였다고 한다. 안경을 쓰게 된 것도 너무 책을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져서 근시가 되어 버린 것. 역사책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원래 본인은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어했지만 지독한 근시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덕분에 우드로 윌슨과 함께 안경이 두드러지는 대통령이 되었다.[9]
3.2 제1차 세계대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시절에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트루먼은 병역비리를 저질렀는데, 위에서 볼수 있듯이 지독한 근시 때문에 군 복무를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 육군 신체검사에서 시각검사판을 통째로 외워서 통과하였다.비리는 비리네 꼭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자원 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육군 포병장교로 복무하였으며 대위까지 승진하였다. 육군 복무 경력은 대략 8년. 그리고 트루먼의 부대는 종전이 선언되는 그날까지 독일군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1차대전의 마지막 교전에 참전한 부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게 그라는 걸 생각해보면 트루먼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마지막 사건을 장식한 유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여러모로 무섭다.
3.3 평범한 정치인,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소꿉친구였던 베스 윌리스와 결혼을 하고 양복점을 경영했지만 얼마 못 가서 말아먹었다. 이후 30대에 캔자스시티 법률학교를 졸업하여[10]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1922년부터 1934년까지 지역 판사(겸 서기)로 일했으며 1934년 연방 미주리주 상원의원이 되었다. 이후 계속 재선해서 2차대전 당시엔 미국 연방 상원의 국방사문위원회, 일명 트루먼 위원회의 의장으로 주로 군납비리에 대해 군대와 산업계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활동을 펼쳐 당시의 물가기준으로 약 150억 달러의 국고를 보존할 수있었고 미군에 납품되는 물자, 병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확립했고 이러한 업적은 오늘날까지 미군과 군수산업계에 영향을 줬다고한다.
상원의원 활동 때에도 그저 활발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을 제대로 못 하지도 않는 무난한 의원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44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부통령이 되었다. 부통령이 된 과정이 좀 무섭다. 전임 부통령이었던 헨리 A. 월리스가 루스벨트와 사이가 멀어지면서 자연스레 4선 선거(1944)에서는 부통령을 바꾸자는 논의가 일어났는데, 이 때 가장 가능성이 낮은 후보가 트루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트루먼이 대통령이 된 것이 예상치 못한 사건은 아니었다. 1944년 당시 루스벨트의 건강상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은 미 정가 고위층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던 사실이었다. 따라서 1944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굉장히 중요했다. 당시 민주당 중진들은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트루먼을 뽑은 것이다. 후보자들 중에서 가장 만만하고 능력도 없어보였기 때문에 루스벨트 사후 자기들이 잘 이용해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치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트루먼을 만만하게 보던 정치인들은 트루먼이 한성깔 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곧 알 수 있었다.
다만 루스벨트가 트루먼을 부통령직에 앉히는데 동의한 까닭은 좀 다르다. 그는 자신이 4선을 꽉 채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후계자를 선택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가 트루먼을 선택하는 데 동의한 이유는 부통령 후보자들 중에서 뉴딜 정책을 옹호하는 유일한 후보자였기 때문이었다[11]. 하지만 그는 월리스가 스스로 자력으로 치고 나온다면 그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고, 트루먼에 그의 의중이 있다는 것은 월리스를 경계하는 정객들에게 더욱 과대포장된 감이 있었다. 여하간 모든 것은 정객들의 계산에 들었고, 루스벨트도 크게 마음에 안 들진 않았고, 월리스만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12]
그리고 과연, 3개월만인 1945년 4월, 얄타 회담 직후 루스벨트가 뇌일혈로 죽자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상태로 대통령이 되었다. 참고로 트루먼은 이 소식을 하원의원들과 술을 먹다가 받았다고 한다(…) 급한 소식이 있다는 소리에 투덜거리면서 백악관에 들어갔더니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첫 마디가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였다고 한다.
엘리너의 회고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오.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13]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행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I felt like the moon, the stars, and all the planets had fallen on me)라고 소감을 밝혔다.
3.4 대통령 제1임기(1945.4~1949.1)
…(전략) 한 때 무능하고 유약하다 폄하되었던 평화의 연합체는, 독재자와 군부의 폭정보다 훨씬 더 강력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ㅡ 1945년 5월 8일 유럽전선 승리를 발표하며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했는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맨해튼 프로젝트의 보고를 받고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지시한 인물이 바로 그다. 이 때문에 트루먼을 까는 표현으로 'give 'em hell, harry(엿 먹여줘, 해리)'라는 말이 나돌았다. 1975년에는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고 다가 아니었으니, 종전 후에는 사회주의 권역의 확산 저지 문제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서유럽 경제의 복구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여 공산화 방지를 천명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유렵 대륙에 경제 원조를 하는 마셜 플랜을 세워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부흥을 지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에 지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마셜 플랜 등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이 좋지는 못해서 1948년 재선에서 트루먼의 재선 가능성은 불투명했다. 1944년 이미 FDR과의 대결에서 상당한 득표력을 보인 미국 공화당의 토마스 듀이 후보가 큰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16년만의 정권교체 가능성을 벼르던 공화당은 약이 오른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 이래 민주당의 텃밭이었던 남부는 주권민주당(딕시크랫)이란 이름으로 따로 출마했으며, 실제로 39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더불어 월리스도 진보당으로 나왔다. 오랜만의 4파전.
트루먼은 패배를 예감하고 대통령 선거 전날에 '뭐 어차피 질 텐데 잠이나 푹 자자'라고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일어나자 박빙의 차로 자신이 이겼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대선 당시 듀이는 자신의 인기를 과신했고, 미리 각료를 구성하거나 뱃놀이나 벌였으며, 트루먼의 지지율이 최악이었던 것에 자만한 나머지 선거 유세도 제대로 안 하는 비범함을 자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 2주 전인 10월 중순에 시행된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듀이는 5%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 2주일 사이에 표심이 뒤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후대에 들어서 듀이가 우세했다는 내용을 담은 <갤럽>의 여론조사는 <갤럽>의 삽질이었다는 시각도 나타났다. 전후 미국은 농촌보다 도시화가 가속화되었는데, 표본에서 농촌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 그 결과 듀이의 지지율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여하간 1936년 루즈벨트 당선을 예측하며 대박을 친 <갤럽>은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겼다.[14][15][16]
대통령 당선 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의 오보를 들고 웃는 트루먼. 너 폐간!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고 할만한 장면은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이라는 신문이 앞서서 '듀이가 트루먼을 이겼다'고 설레발을 친 게 하루아침에 오보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원래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고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적대적인 신문이었기 때문에 민주당 후보인 트루먼의 패배를 아예 기정사실화하고 헤드라인을 저렇게 박아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트루먼은 당선된 이후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을 비웃듯이 저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다. 이 일화는 신문 보도의 정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유명한 이야기로 손꼽히며 그와 함께 트루먼이 신문을 번쩍 치켜들고 웃고 있는 위 사진도 미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뽑힌다. 어쨌든 이런 역전극을 통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대한 이야기
3.5 대통령 제2임기(1949.1~1953.1)
트루먼의 대통령 제2임기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역시 한국전쟁이다. 보통, 특히 밀리터리 쪽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와의 마찰이 유명하다. 애시당초 둘은 성격이나 정치사상부터가 달랐고, 트루먼은 쇼맨십이 강한 맥아더의 행동을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대통령 말 안 듣고 혼자 설쳐대는 맥아더를 보고 누가 대통령인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을 정도이니……. 그래도 군사적 능력을 인정해서 딱히 제재를 가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맥아더 원수가 "핵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자 트루먼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냥 핵 한 발이 아니라, 만주와 중국 본토, 한반도에 수십 여발! 리얼 폴아웃 이런 맥아더를 보자 평소의 악감정에 더해서 또다시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트루먼은 결국 그를 해임시켜버리고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맥아더의 핵 투하를 반대한 탓에 중공군이 개입해서 한국이 통일을 못 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만일 맥아더의 주장대로 핵을 떨어뜨렸다면 말할 것도 없이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이다. 한국전쟁의 참전국만 봐도 강대국 간의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이 나올 정도.[17] 물론 방사능의 여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8]
1949년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 독점 시대가 불과 4년만에 끝나버렸기 때문에 미국이 함부로 핵을 쐈다가는 소련도 공산권의 반응을 의식해서 미국과 한반도에 핵공격을 가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맥아더의 만주 폭격계획에 사용되는 핵폭탄의 개수가 핵 한두 개가 아니라 핵폭탄 20여 개 및 방사능 폐기물들을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 투하하여 중공군이 지나갈 수 없도록 방사능 오염 지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 한반도는 3면은 바다, 한 면은 방사능 지대, 아니 3면이 방사능 지대[19], 한 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한반도는 지옥이 된다! 말 그대로 이후 문제는 고려않고 순전히 '이기기 위한' 계획이였던 것.
그런 점에서 보면 트루먼은 단순한 서방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라 좁게는 자국민을, 좀 더 넒게는 한반도를, 그리고 세상을 파멸의 위협에서 구해낸 숨은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것과 한국전쟁의 개입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미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트루먼의 전쟁(Truman's war)'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외에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가 트루먼의 두 번째 임기에 발족했다.
3.5.1 해군과의 불화
2차 대전이 끝난 후, 그의 친공군적 성향[20] 때문에 타군, 특히 해군이 두려움에 떨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미국 국방부는 전쟁부(육군부)/해군부로 나뉜 것을 통솔하는 '부 위의 부'로서 창설되었는데, 초대 장관이 해군장관 출신 제임스 포레스탈이긴 했지만 별로 쓸모가 없었다. 되려 트루먼의 공군 위주 성향과 타군에서 "왜 미군은 해군에만 그렇게 돈을 퍼부어대냐"고 징징대는 영향으로 인해 극단적으로는 "어차피 2차대전 만큼 무식한 전쟁이 나지도 않을텐데 해군 예산 확 줄여도 되지 않을까?"[21]이라는 의견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포레스탈 장관은 해군장관 시절부터 육군/해군부를 통합하는 안에 기겁하던 것을 초대 국방장관으로 내정하여 겨우 진정시켰던 것이고, 트루먼이 하도 공군을 좋아하며 해군을 등한시하자 1948년 대선에서 제임스 듀이 공화당 대선후보와 비밀리에 짝짜꿍을 했다가(…) 선거 몇주 전 그 일이 들통나서 트루먼이 재선 후 2기 내각을 구성할 때 해임해버렸다.
제2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은 육군 예비역 법무대위 출신으로, 트루먼의 성격에 딱 맞는 성향의 인물이었다. 그가 해군이 핵무기 운용이 가능한 크고 아름다운 폭격기를 운용하기 위해 기획했던 초거대 항공모함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함을 건조 시작 5일만에 취소시켜버리자 급기야 참고 참아왔던 해군 제독들이 폭발했다. 오늘날에도 제독들의 반란으로 회자되고 있는 사건으로, 존 설리번 해군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이던 해군대장 루이스 덴펠드 제독, 해군소장 알레이 버크 제독 등 수많은 제독들이 불명예 제대까지 각오하고 국방부에 항명했으며, 5월에는 포레스탈 前 장관이 베데스다 해군병원에서 투신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22] 그러자 존슨 장관은 해군에게 염장지르듯이 "앞으로 상륙작전 같은거 없을거니 해병대 필요 업뜸. 해군이 할 일은 공군이 하면 되니까 해군도 필요 업뜸." 같은 말을 해버렸다(……). 참고로 1949년은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한 게 하반기에 세계에 알려지자 핵무기 무턱대고 쓰다간 인류멸망이 온다는 공포 속에 재래식 무기의 중요성이 다시 조명되던 참이었고 루이스 존슨 장관이 저 말을 한건 12월이었다. 이건뭐(…).
사태가 악화되던 1950년 6월 말에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미군이 참전하여 해군과 인천 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해병대, 그리고 무엇보다 해군/해병 항공대의 맹활약을 통해[23] 그런 해군 무용론이 버로우탔지만 오랫동안 이들의 갈등은 남아있었고, 베트남 전쟁 등을 거쳐서야 그 갈등이 조금씩 중화되었다. 당연하지만 소련의 핵개발이니 한국전쟁이니 하는 마당에 집안싸움까지 벌어지던 국방부의 혼란을 도저히 붙잡기 힘들게 되었고, 존슨 장관의 후임으로 육군원수 조지 C. 마셜 장군이 임명되는 초강수가 나와야 했다. 마셜 장군이 현역 군인 신분[24]으로 국무장관에 재직하며 마셜 플랜도 실행했던 경력이 있고 국방부와 군부에서 명망이 높은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문민통제를 깔끔히 씹어먹는 인선이라고 말이 많았다. 하지만 국방부 꼴이 이러다가 당나라 군대가 될 것을 걱정한 상원에서 마셜 장군의 국방장관 임명을 특례로 승인했다.
마셜 장군은 건강 문제로 짧게 재임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한국전쟁과 역시 육군 원수 출신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백악관행이 겹치며 마찰은 점점 중화되었고, 오늘날 미 국방부는 예산 편성만 보면 여전히 해방부(?)이긴 하지만 각 군별로 균형이 잘 맞게 배정되어 있으며 협력체계도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해군 항공대는 여전히 공군을 한수 아래로 여기고 있으며 공군도 불쾌하게 여기는 등 티격태격하고 있다.[25]
훗날 니미츠급 항공모함 8번함 CVN-75가 이 대통령의 이름을 땄는데, 하필이면 이 배의 원래 이름이 바로 유나이티드 스테이츠(…)[26] 그래서 미 해군에서는 '트루먼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를 두 번 죽였다'고 수근댔다고 한다. 지못미...
4 평가
한국에서는 한국전쟁과 많이 연관되어 설명되곤 하지만, 전반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훌륭한 편이다. 미국 대통령 인기 순위 조사나 업적 평가를 하면 항상 10위권 내에 들며 우수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전임자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지도력을 검증받지 못한 채 갑작스레 대통령이 되었지만 냉철한 판단력으로 여러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냉전과 한국전쟁을 주도하면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세계의 지도국가로 굳힌 점이 높이 평가받는 모양이다.
언변도 정치인치고는 능숙한 편이 아니라서 대통령 재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할 때에는 야유를 받는 굴욕까지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기차를 타고 소도시, 지역 마을을 돌았다. 서유럽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거의 유럽에 돈을 퍼붓다시피 한 마셜 플랜으로 인해 욕도 많이 먹었다. 특히 1953년 1월에 트루먼이 퇴임하여 고향 미주리로 돌아갈 때는 그 뒤에 대고 욕설을 퍼부은 국민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가 3선에 나서지 않고 한달반 일찍 퇴임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27]
대통령 재임 중에는 욕을 많이 먹기도 했지만 근면하고 정직, 성실한 태도나 위에 나온 그의 좌우명인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에 따른 책임의식 역시 그가 높이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 '재임 중에 욕을 먹지만 퇴임 후 찬양받는' 전형적인 케이스. 그의 미들네임 S를 따서 3S라고도 한다. Stubbornness(고집), Sympathy(동정심), Stoicism(인내[28]). 그리고 성깔(Seongkkal) 성깔이나 고집이나 같은뜻 아님?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도 그를 좋아했으며 철의 장막도 처칠이 트루먼의 모교(고등학교)를 찾아가서 한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29] 처칠이 "서방 세계를 구했다"라며 붙여 준 긍정적인 별명으로는 작은 거인.[30] 또 중국 총통 장제스도 그를 프랭클린 루즈벨트만큼 좋아했다고 한다. 장제스가 단순히 친미파라는 걸 떠나서 트루먼이 일본에 직접 원자폭탄을 투하하려고 마음먹고 실제로 중일전쟁을 빨리 끝내 중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어했던 그의 바람대로 트루먼의 명령에 의해서 일본에 원자폭탄 2방이 떨어져 완전히 지옥으로 변해버렸으니까.
1971년 12월 촬영.
CNN의 래리 킹은 그를 "매혹적인 언변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정확히 표현할 줄 알았던 탁월한 커뮤니케이터"라고 평가했고,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트루먼에게는 리더의 최대 걸림돌인 교만이 없었다. 그와 그의 일 사이에는 한 번도 자존심이 끼어든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2년 12월에 그가 88세로 사망했을 때 칼럼리스트 메리 맥그로리는 트루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영웅도 예술가도 체스 선수도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솔직하고 실수도 하고 어떨 때는 예기치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인간 그 자체였다. 그는 평범한 미국인이 위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한국에서의 평가는 상당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좌파쪽에서는 공산권의 확산을 막는 과정에서 펼처진 민족운동 탄압의 이미지로 비난을 받았고 결론적으론 김씨왕조에서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분이다 우파쪽에서는 다 이긴(?) 정말? 6.25 전쟁을 말아먹고 맥아더를 잘랐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런 레퍼토리는 1950년대 한국의 우익 정치인들부터 자주 써먹던 레퍼토리였다. 물론 위에 나와있는대로 핵이 터졌다면 북한은 멸망을 면할 수 없었겠지만 남한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맥아더가 6.25에서 승리하면 맥아더의 인기가 높아져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그에게 패배할 것을 우려해 맥아더를 자른 것이라는 얘기까지 있다.[31] 미국의 보수층도 마찬가지로 공산당을 결단낼 기회를 걷어찬 겁쟁이라고 까기도 한다.
물론 모두가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으레 유명한 트루먼의 말버릇 대로 소식을 듣자마자 "개새X들, 당장 파병해!"라고 하고 바로 파병해 준 천조국 천자님이라고 고마워하는 경우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 그의 성 트루먼(Truman=True+Man)을 한역하여, 정감록에 나오는 바다를 건너와 백성들을 구하는 진인(眞人)이 바로 그라는 해석도 나왔을 정도다(!).상당히 그럴듯한데? 정확한 인용은 다음의 대목으로, 군통수권자로서 의회 승인과 관계 없이 미군을 파병했다.
“이 곳은 극동의 그리스다. 만일 우리가 강경한 조치를 취하기만 하면 다음 단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32]”
"한국에서 미국의 행동은 악당들의 기습(Bunch of bandits)을 유엔이 격퇴시키는 것을 도우려고 취해진 것"
채명신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채명신은 퇴임 후의 트루먼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채명신과의 만남에서 트루먼은 채명신에게 "내가 맥아더를 경질한 것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한국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듣고 싶군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오오 대인배 오오. 안타깝게도 뒷 이야기는 없다.
사실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개입은 커녕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치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미국의 대(對)공산권 방어전략상 그리 중요하지 않은 지역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애치슨 라인을 참고하자.) 심지어 전쟁 후에도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에서 조선인민군에 밀리기 시작하자 유엔군사령부와 미국 정부 내에서 유엔군 철군론이 대두하기도 했으니 말 다했다. 다행히 월튼 워커 중장의 분투 덕에 철군론은 수그러들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및 마오쩌둥 정권 수립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때 중국군 인해전술을 무력화한 계기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는 한국전쟁 한정이며,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당연하겠지만 과거 중화민국 시절 장제스 정권 때 2차 세계대전에서 같은 연합국으로써 추축국 일본을 크게 무찌른 영웅 동료로 생각하고 있으며, 특히 해리 트루먼이야 말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워누(일본의 비하 명칭)놈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꺾어버린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는 일본 열도를 아예 지구상에서 없애버리는 몰락 작전이 진짜로 실행되었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더욱 발전하게 되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워하는 중국 극단주의자들도 있다. 실제 중국에서 반미 감정이 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해리 트루먼에 대해서는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일본의 입장에서는 원자폭탄 투하 최종명령으로 천황을 굴복시킴과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피해를 불러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치의 항복 이후에도 끈질기게 전쟁을 이끌었던 일본에게 패전을 자극시키게 하여서 원자폭탄이라는 희대의 수단을 사용하여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많은 인명을 살상한 원흉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천황의 권한을 완전히 떨어뜨려 그저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했음과 동시에 일본 미군정을 통해서 전후 일본에게 제재를 가해온 대통령으로도 평가된다. 동시에 일본 우익들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꿈꾼 시절을 완전히 단절시킨 철천지 원흉격에 속하기도 하겠다. 또한 구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국방군을 현재의 방위급 자위대로 격하하게 만들었던 원인으로 지목되는 편. 사실 일본도 트루먼이 마음만 먹었으면 그냥 몰락 작전을 강행해서 일본을 지구상에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테니 원자탄 투하로 감지덕지해야 하는 판이다. 트루먼도 많은 미국군 사상자와 전쟁비용 때문에 정치생명을 위협받았겠지만 아예 지구상에 사라지는 일본만 하겠나...
북한의 입장에서는 김일성과 간접적으로 대적한 원흉이자 한국전쟁 때 자국병들을 파병하여 자신들의 남침을 좌절시킨 원흉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시에 남한 및 한반도 전체 공산화를 방해하고 좌절시킨 원흉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북한의 입장에서 주적이자 원흉으로 불리우는 미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하였기에. 하지만 1949년 남한에 있는 주한미군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을 때는 의외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당연히 미국군이라는 방해꾼에 골칫거리가 없어지면 남침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 후 이 철수 때문에 남한이 전쟁의 도가니에 빠져서 위기에 처하자 트루먼이 대통령 자격으로 미국의 우방인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남한에 미군 전투병력을 파병한다는 명령을 내리자 다시 원수지간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소련에서도 평가는 좋지 않았다. 종전 직전까지만 했어도 소련의 수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머리를 맞대고 전범국 소탕에 협력하기도 하였으나 종전 이후 냉전기에 접어들고 한반도 문제까지 겹쳐서 그 당시 미국과 사이가 적대적이었던 입장에서 좋게 평가받은 인물은 아니었다. 또 한국전쟁 때 미국군의 파병 명령을 내리게 된 장본인이기도 하여서 북한과 함께 자신들의 계획을 방해했던 걸림돌이자 원흉으로 평가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도 1990년대부터는 여러 연구를 통해 업적이 평가되어 이제는 한국을 구원한 분으로 맥아더의 자리를 대신한 면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맥아더의 여러 전략적 전술적인 실수[33]와 오만함이 객관적으로 연구되는 측면도 있고 냉전 초기의 트루먼의 전략적 결정의 중요성이 평가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5 여담
- 20세기 유일한, 그리고 미국 최후의 고졸 대통령이고, 아마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다.[34]
- 소꿉친구와 결혼해서 백년해로한 인물인데 영부인 베스 트루먼을 6세 때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고 하며 그 이후 고등학교에 가서 사귀었는데 둘의 결혼은 트루먼이 그럭저럭 안정을 찾은 1919년(35세)에야 이루어졌다. 결혼 전인 1910년부터 1959년까지 부부는 매번 편지를 교환하곤 했는데, 이 편지를 따로 묶은 서간첩인 <Dear Bess>(베스에게)가 따로 책으로 나왔을 정도이다. 이 서간첩은 576페이지에 이른다고 한다. 이 부부 사이에 자녀는 딸인 마거릿뿐이었지만 트루먼이 만난 지 84년만인 1972년 사망할 때까지 글자 그대로 백년해로했다. 베스 트루먼은 남편이 죽은 지 딱 10년 뒤인 1982년 영면했다. 덧붙여 베스 트루먼은 2015년 현재 역대 미국 영부인 중 가장 장수한 영부인이다.(97세 247일)
- 그 밖에도 전쟁 말기에 동남아의 어느 듣보잡 국가의 특이한 이름의 지도자로부터 "독립 후 당신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트루먼은 어디 촌구석에서 날아온 편지따위는 신경도 안썼고(보기는 봤을까?), 그의 후임자들도 (어쨌든) 그 동네와 친구는 먹었지만 정작 친구먹고 싶다며 편지를 보낸 사람을 완벽하게 적으로 돌려버렸다. 결국 미국은 이 편지를 보낸 사람에게 쓴 맛을 보고 체면을 왕창 구겨버렸다. 전임자도 조그만 이웃 섬나라의 12살 짜리 꼬마에게 편지를 받았고 무시했다가 사후 그 꼬마의 국가와 적이 되었다.
행운의 편지하지만 다행히 2016년 기준으로는 그 두 나라 모두 국교를 회복했다. - 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백인 하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인데, 하딩의 one drop rule에 따르면 흑인인 연고로 인해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근데 하딩 흑인설도 이미 망한 떡밥이라(…),
- 독서는 죽을 때까지도 즐겨서 은퇴 후 70대에 들어서도 어떤 기자가 트루먼의 자택을 찾자 책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기자가 "대통령께서는 주무시려고 책들을 읽으시는 겁니까?"라고 묻자 "아니오. 깨어 있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책벌레의 패기
로렌 배콜(Lauren Bacall)과 피아노를 치는 트루먼. |
- 의외(?)로 피아노가 취미였다. 실력도 제법 괜찮았던 듯. 당시 유명한 헐리우드 여배우인 로렌 배콜(1924~2014)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그녀를 피아노 위에 앉혀 놓고 피아노를 치는 위 사진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본 트루먼의 친구가 "자네 그 사진보고 마누라가 뭐라 안하던가?"라고 묻자 트루먼은 "집사람이 '당신 피아노를 치는 거예요? 아니면 그 여자랑 노는 거예요?'라고 묻던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영어로는 (피아노 등을) 연주하는 거나 노는 거나 둘 다 to play다. 이를 이용해 트루먼이 말장난을 한 것이다.
- 당대에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자서전도 있다. 오늘날에는 2차대전 말기와 냉전에 관한 정책적 결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는데. 자서전답지 않게 의외로 진솔하고 책임질 일은 확실히 책임지고 있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싫어했던 맥아더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오오
- 한국에 동상이 세워진 유일한 외국 국가원수로 동상은 파주 임진각에 위치하고 있다. 상술했듯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군의 남한 파병을 최종승인한 미국 대통령"이기도 하다. 맥아더 동상도 논란이 되는 와중에 트루먼의 동상이 논란이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 그의 업적에 비해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맥아더랑 사이가 나빠서 놔두는 걸지도 - 대통령 재임시절 예산위원회장을 만나면 늘 직접 나와서 악수로 맞아주었다. 그래서 "늘 뵙는건데 이렇게 직접 나오셔서 악수로 맞아주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예산위원회장이 말하자 트루먼 대통령 왈, "아니오, 언론을 모르셔서 그런데 내가 이렇게 나와서 맞아주지 않으면 신문에 '대통령이 예산위원회장에게 화났다'라고 나올 거요."
5.1 그 애가 커서 대통령된게 나다 이 X만이 새끼야!
역대 미국 대통령중 한성깔 하기로는 정말 유명한 대통령이다. 성질이 급하고 괴팍한 면이 있어서 욕도 잘했다고 한다. 당장 대통령직 승계 때도 백악관에 들어가면서 투덜거렸을 정도니까. 이 사람이 특히 즐겨 사용한(?) 욕설은 바로 우리말로 '개새X' 정도의 의미인 son of a bitch(약자로 SOB). 한국전쟁 전화 급보를 받고는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새X들을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맥아더를 해임하고 나서는 "난 딱히 맥아더가 멍청한 SOB라서 해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아서 그를 해임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고.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논쟁을 하다가도 이 욕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 후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전 트루먼 대통령께서 저에게 SOB라고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 제가 SOB인 것에 대해 사과할 생각입니다.
과연 말빨왕 케네디
- 또한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를 할 무렵 지원유세를 하기도 했는데, 연설하러 온 곳에 공화당원들이 온 것을 보고 별안간 "지옥에나 떨어져라!(Go to hell!)"이라고 욕설을 내뱉어서 케네디가 트루먼에게 직접 '자제 좀 해주세염'이라고 편지까지 보내기도 했다. 트루먼은 처음에는 조지프 케네디를 싫어해서 그 아들인 존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케네디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
-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1950년 푸에르토 리코 국적 남성 2명에게 워싱턴의 블레어하우스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경호원들의 대응으로 암살범들은 사살되었다. 다음 날 어떤 기자가 트루먼에게 "만일 대통령님께서 암살범들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란 질문을 던지자 트루먼은 주저없이 "그 자의 손에서 총을 빼앗아 목에 들이댄 후 방아쇠를 당길거요(I would have taken the gun from him, shoved it up his gullet and pulled the trigger.)."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패기 쩐다
- 아무튼 성질머리가 그 모양이다보니 사석에서뿐만 아니라 공식석상에서도 벌컥 화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는 경우도 많았다. 그 에피소드 중 하나가 있다. 1950년 12월, 워싱턴에서 열린 외동딸 마거릿 트루먼의 공연에 대해 음악평론가 폴 흄은 "노래는 잘 못하며 전문 성악가로 남기는 힘들 것이다"라는 혹평을 내렸다. 그러자 트루먼은 흄에게 다음과 같은 격한 내용의 편지를 썼다.
"방금 당신(풀 흄)의 형편없는 평론을 봤소. 나는 한 번도 당신을 만난 적 없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당신의 새로운 코가 필요할 것이며, 눈에 멍이 들 줄 아시오."
- 요약하자면 "감히 우리 딸내미 기를 죽이다니, 나 만나면 넌 뒈졌어." 정도의 뜻이 되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딸 마거릿[35]은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어렵게 될 것이라며 우려했지만 트루먼은 되려 "국민들의 80%는 내 편일 테니 넌 너무 걱정마라"고 여유있게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백악관에 많은 편지가 도착했는데, 트루먼의 장담대로 대부분은 트루먼의 행동을 지지했으며, 특히 여성들한테서 "제 남편도 우리 딸을 대통령님이 하신 것처럼 지켜줬으면 좋겠어요"란 내용이었다고. 그러나 일국의 대통령이 하기에는 부적합한 이런 행동들 때문에 그의 비판자들은 '도량이 좁고 비천한 인물'로 혹평하기도 한다. 혹은 미국인답게 American Bad Ass의 전형인 간지남으로 평가받기도. 그래도 서민층에서는 '인간미가 느껴져서 좋다'라는 평가를 내렸다고.
- 후임자인 아이젠하워에 대해서는 그가 당선되기 전에 “아이젠하워는 이 자리에 앉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지.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36]
- 닉슨에 대해서도 평가한 적이 있었는데 닉슨을 뽑는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공개적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이후 닉슨이 재기하여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가는데 후일...
- 대통령재임시, 백악관에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겪기도 했다. 화장실 다녀온 사이에 만년필이 엉뚱한 곳으로 가있거나, 잠을 자려고 할때 옆에서 사람이 혼잣말 하는게 들린다던가, 에이브러햄 링컨 귀신을 마주쳤다던가 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한성깔 하시는 분 답게 백악관 일부를 불도저로 밀어버렸고
트루먼: 귀신이면 귀신답게 이계에서 놀아야지 어디 인간세상에서 난리냐!?!?그후에는쫄았는지귀신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저것들을 종합해보면 패기넘치는 화끈한 성격과 다르게 얌전한 취미, 딸바보에 소꿉친구와 결혼, 평범한 사람으로써 대성공한 인생에 자기 손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귀신과 마주하는 등 여러모로 문학 주인공으로나 나올법한 인물이다
6 대중매체에서의 트루먼
- 1977년 더글라스 맥아더의 전기영화 <맥아더>에서는, 6.25 전쟁의 수행 방식을 둘러싸고 맥아더(그레고리 펙)와 대립하는 모습이 부각되어 나온다. 이건 실제 역사이긴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이 맥아더인 관계로 트루먼은 맥아더의 승리에 열폭하거나 사사건건 발목잡는 인물처럼 묘사됨.
-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일본, 캐나다가 공동 제작한 TV영화 <히로시마>에서는 케네스 웰시가 트루먼 역을 맡아 매우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주었다.[38]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하고, 이후 원자폭탄 투하에 이르는 과정을 잘 재현한 작품.
- 스웨덴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선 주인공인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도 친분을 쌓는다. 영화 버전에도 당연히 등장하는데 실제 나이보다 좀 젊은 인상에 뭐랄까 좀 허영에 찬 인간으로 등장한다. 하원의원이 아니라 칼손과 술을 마시다가 루스벨트의 죽음을 듣고 칼손에게 미합중국 대통령에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며 자신의 라이터를 주곤 퇴장하는데 원작 소설에서의 후일의 행보는 다 편집됐다. 영화 버전 자체가 소설에 비해서는 고증을 많이 포기한 부분이 많아서...
- 정말 여담으로 앤디 앤드루스가 쓴 "우화의 탈을 쓴 자기계발서"인 <폰더 씨의 위대한 하루>에서 천사장, 링컨 대통령, 솔로몬 왕보다 더 먼저 등장한 트루먼은, 주인공이자 60년 뒤의 미래에서 타임슬립해 온(…) 40대 백수인 데이비드 폰더에게 자기의 좌우명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39]에 바탕한 충고를 해주어 책임감을 북돋워준다.
- 퓨처라마에서 머리가 아니라 몸이나온 몇 안 되는 미국 대통령중 하나인데 로스웰에서 어떤 외계인이 발견되자 이 외계인을 51구역으로 보내고, 때문에 거기서 찍던 달착륙 조작영상을 못찍게 되자 NASA를 만들고 진짜로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후 조이드 버그를 구출하러온 프라이와 릴라를 보고 루즈벨트의 유령이라고 기겁한다
부통령 시절에 고생이 많았는 듯하다
7 관련항목
- ↑
Son of a bitch의 약자가 아니다.의미 없는 그냥 S다. - ↑ 그전과 같다면 그의 임기는 한달 보름 뒤인 3월 4일에 끝나야했다. 그러나 그의 임기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가 부통령 취임을 1월 20일에 했기 때문이다. (이는 수정헌법 20조를 따른 것이기도 하다. 1월 1일을 취임일로 하려는 목적은 실패했지만...) 존 낸스 가너가 헌법에 따라 1월 20일 사퇴하면서 루즈벨트의 3선 러닝메이트 헨리 A. 월리스와 트루먼 모두는 1월 20일에 취임하고, 퇴임했다. 조지 워싱턴이 퇴임한 이래(1797~1953) 156년간 계속 같은 날(3월 4일)로 유지되던 정, 부통령의 취임식은 이로서 모두 1월 20일이 되었다. 부통령 항목 참조.
- ↑ 트루먼 시절 국무장관. 대소 강경파.
- ↑ 트루먼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설이나 영화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표현이다.
- ↑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a bitch. Although he was, but that’s not against the laws for generals. If it was, half to three-quarters of them would be in jail.
- ↑ Son of a bitch!
- ↑ 따지고 보면 사실상 일제에서 한국을 독립시키고, 미군을 파견해 6.25전쟁에서 북한을 막았으며, 맥아더의 한반도 방사능 도배작전을 철회시킨 사람이다!
- ↑ 아일랜드 섬의 얼스터(영국의 일부로 남아 있는 북아일랜드 및 그 주변 지역)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주민. 현재도 북아일랜드의 개신교도들 상당수가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사람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가 다시 미국에 이주해서 상당수가 정착돼 있는데 이들을 Scotch-Irish American이라고 한다. 해리 트루먼도 Scotch-Irish American이다. 참고로 스카치 아이리시라는 표현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구닥다리 표현이라 쓰이지 않고 대신 Ulster Scots라고 부른다. 현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Scotch를 스코틀랜드와 관계된 먹을거리에 한정해서 쓰는 경우가 많고 스코틀랜드계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옛 용법이 남아 Scot(s)나 Scottish와 동일한 의미로 쓰는 경우가 아직도 많다.
- ↑ 물론 시어도르 루즈벨트나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그랬듯이, 미국의 거의 모든 대통령은 한번씩 안경을 써본 경력이 있다. 하지만 대중적 공식 이미지로서 쓴 이미지가 남은 대통령은 윌슨과 트루먼, 거기에 더 더해야 두 명의 루즈벨트 정도이다. 참고로 안경은 1500년대(16세기)에 나타났다.
- ↑ 이후 법대 야간 코스를 시작했지만 중도에 포기했다.
- ↑ 실제로 트루먼은 재임기간 뉴딜을 한층 강화한 "페어 딜Fair deal"로 사회보장정책과 완전고용을 완수하였다.
- ↑ 흥미로운 건 월리스는 전시 각료감이었는지 맨하탄 프로젝트에 깊게 관여했고, 또 민주당 내에서 대단히 진보적이었으며 소련에도 가장 우호적인 정치인이었다. 이 때문에 냉전기에 월리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냉전의 불안감이 줄어들었을 것이란 옹호론과, 미국이 소련에게 끌려다니는 호구가 되었을 것이라는 비판론이 있다.
- ↑ 크게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의 전후 처리만 봐도 알수 있다.
- ↑ 사실 여론조사와도 별도로 선거인단 제도에서도 트루먼은 우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언론은 듀이의 승리를 예측했다. 트루먼은 전국적으로는 듀이보다 4.5%를 더 득표했지만, 78석이 걸린 오하이오, 일리노이, 캘리포니아에서 1%도 안되는 격차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월리스가 유독 4.7%를 득표한 상황이었다.
고춧가루를 이겨냈다이 세 주의 격차였던 2만9천표만 뒤바뀌었어도 대선은 전혀 다른 결과로 끝났을 것이다. - ↑ 이 일은 이후 대학의 통계학개론 강의 등에서 적절한 표본집단 선정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두고두고 써먹히게 된다.
- ↑ 다만 1936년 대선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시행한 뉴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해서 경제 불황이 상당히 개선된 상태였고, 누가 보아도 루스벨트의 재선이 확실시되던 상황이긴 했던 점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1936년 대선에서 루스벨트는 미 대선 역사상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것에 비견될 만한 기록은 1972년 대선의 리처드 닉슨이나 1984년 대선의 로널드 레이건 정도밖에 없다.
- ↑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에다 미국이 대표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중국,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 진영이 모두 참전했다. 소련은 물론 곁다리로만 했고 직접 참전한다고 하진 않았다.
- ↑ 정확하게 만주에 20여발, 압록강 이남에서 충주를 섹터로 하는 지역에 12발으로 총 32발, 그외 한반도 동서해안 전체에 반감기 50~100년에 이르는 방사성 코발트로 도배하는 계획이었다(이쯤이면 헬 오브 지옥).
- ↑ 방사능 폐기물들이 압록강, 두만강 강물을 따라 동해와 황해로 흘러들어갈 것이므로(…)
남해는 무사할까? - ↑ 미 공군은 1947년 육군 항공대가 독립하여 창설되었다.
- ↑ 일본은 망했고, 영국은 쇠퇴한데다 동맹이고, 러시아의 해군력이란 볼품 없으니.
- ↑ 이후 포레스탈 장관의 헌신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포레스탈급 항공모함이 명명되었다.
- ↑ 서해5도도 그렇지만 사실상 북한 지역 황해의 모든 도서는 미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남한이 차지했으며, 서해안 전역에서 공수, 상륙 작전 역시 빈번했다. NLL은 그걸 다 포기해주고 새로 그은 선에 가깝다.
- ↑ 미군의 각군 원수 계급 진급자는 종신 복무가 보장된다. 이 때문에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인 육군원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도 출마 후 전역, 대통령 퇴임 후 예비역 재소집이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에 재직했다.
- ↑ 이들의 갈등은 점점 중화된다 뿐이지 꽤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군용 항공기 이름도 한국전쟁 끝난뒤 10년 가까이 제각기 이름짓다가 1962년에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지시로 공군 스타일로 통합했고, 50~60년대 우주개발 경쟁에서도 미사일/로켓 개발이 각군별로 따로따로 이뤄지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겪었으며, 우주인 프로그램에서도 해군과 공군 출신 우주비행사들이 서로 대놓고 싸우진 않아도 서로 끼리끼리만 뭉쳐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결정타로 해군 예비역인 닐 암스트롱이 현역 공군인 버즈 올드린보다 먼저 달을 밟아서 공군은 망했어요... - ↑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의 이름을 붙이자는 정책 때문에 개명당했다고...참고로 이 '유나이티드 스테이츠'라는 이름은 1대함을 빼고는 모조리 저런 식으로 취소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엥?
- ↑ 트루먼의 재임시기에 대통령의 3선 금지 조항이 헌법에 성문화되었으나 현직 대통령인 트루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조항이었기 때문에 3선 도전이 원칙적으로는 가능했다. 현재도 이건 마찬가지라 2선까지 해야 하는데 1선만 하고 물러났으면 나중에 다시 도전해서 한번 더 할 수 있는데 그 자격을 가진 생존자가 재선에 실패한 지미 카터하고 조지 H. W. 부시.
- ↑ 스토아 철학이란 의미인데, 흔히 극기, 인내로 번역된다.
- ↑ 나무위키의 철의 장막 항목에 있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연단에서 연설하는 처칠 뒤에 트루먼이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 ↑ 물론, 175cm는 충분히 되었으니 실제적으로 그리 작진 않았다. (무엇보다 토머스 듀이가 그보다 작았다.
역시 루저) - ↑ 수정헌법에서 3선 금지 조항이 나온게 1951년이라 트루먼이 원했다면 3선을 나설 수도 있지만 나가지 않았다.
- ↑ 즉 3차 세계대전이 벌어질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곳 으로 미리 막는다는 뜻 이다.
- ↑ 그 중 하나로 꼽히는 게 바로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
- ↑ 그 이전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유일하다 싶은 고졸이다. 흥미롭게도 역시 민주당 출신이며 변호사를 땄다. 또 밀러드 필모어가 고졸 출신 대통령인데 트루먼은 그를 신랄하게 깠다. 항목 참조.
- ↑ 참고로 성악가로서는 별 활약을 보이지 못했지만, 훗날 미스터리 작가로 꽤나 성공했다고 한다.
- ↑ 실제 아이젠하워는 재임중에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 아이젠하워가 국민들의 지지속에 상당히 권력이 강했던 대통령임을 생각해보면 대통령이란 자리의 어려움과 막중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발언
- ↑ HBO에서 방영된 미니시리즈 <존 애덤스>의 원작자.
- ↑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지구 온난화 재난영화 <투모로우>에서 주인공인 과학자를 시종일관 무시하다가, 나중에 잘못을 뉘우치는 부통령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다.
- ↑ 국내 번역판에서는 직역하여 '공은 여기서 멈춘다' 라고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