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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wis Burwell "Chesty" Puller (1898.7.26 ~ 197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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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이자 미합중국 해병대의 기념비적인 인물. 또한 HBO 제작 TV 미니시리즈 더 퍼시픽의 등장 인물이기도 하다.[1] 최종 계급은 중장. 수많은 전쟁과 전투에 참여하여 미 해병대의 신화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해군 십자장(Navy Cross)[2]을 5회나 수상한 유일한 해병대원이기도 하다.[3] 카리브 해와 남미 정글에서의 게릴라전부터 태평양 전쟁, 한국전쟁까지 모두 참전한 대단한 베테랑.[4]
2 생애
2.1 초기 생애
그는 버지니아 주 웨스트포인트에서 매튜 풀러와 마르타 풀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서부터 어쩐지 군인의 느낌이 물씬 난다. 근데 육군 안 갔잖아?[5] 그의 아버지는 루이스 풀러가 10살도 되지 않아 죽었지만, 그는 토마스 잭슨의 무용담과 남북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고 한다. 그는 191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참전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그의 나이는 어려서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하는 입장이었고 그의 어머니 마르타 풀러 씨는 그에게 참전에 대한 허락을 해 주지 않아 참전하지 못하였다고 한다.[6]
다음 해인 1917년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고작 1년 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위하여 해병 제 5연대[7] 에 입대하여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해병대 훈련소에서 고된 훈련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는 못하였으나, 해병대의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됨에 따라 콴티코에 있는 장교 학교에 입학하였다.[8] 그는 원래 중위 계급장을 달 운명이었으나, 전후 군축에 의해 상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의 군 경력 첫 번째는 카리브 해의 섬나라인 아이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아이티에서 5년간 반란군 세력과 40회가 넘는 전투를 수행하며 살아 남았으며, 소위로 진급한 후 1922년이 되자 그는 향후 미 해병대의 사령관이 될 알렉산더 벤더그리프트 장군의 부관이 되어 그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1924년 6월 중위로 진급하여 해병 제 10포병연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진주만에도 가 있었고, 1928년에는 캘리포니아 주 샌디에이고로 옮긴다. 얼마 있지 않아 1928년 12월 그는 니카라과 방위군 부대 소속으로 또 다시 자리를 옮긴다.[9] 그는 니카라과에서 그의 첫 번째 해군 십자장을 받게 된다. 이후 1931년 그는 조지아의 포트 베닝으로 소속을 옮긴다. 이후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가 1940년 5월 해병 제 4연대 2대대의 대대장을 맡아, 지휘관으로써의 경력을 지속해 나간다.
2.2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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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달카날에서의 루이스 풀러.
그는 1941년 8월 말 미국으로 잠깐 복귀한 이후, 그는 해병 제 1사단 7연대 1대대장을 맡아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이후 그는 과달카날 전투에 연대를 이끌고 참전하여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서 싸운 것으로 이름을 높였다. 특히 그의 판단력은 마타니카우 강 전투에서 빛났는데, 그의 대대 휘하에 있는 3개 중대가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지자, 그는 해변가로 달려가 미 해군에게 신호를 보내 일본군에게 집중 포화를 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신호에 호응한 미 해군 구축함 USS Monssen 은 일본군에게 무차별 포격으로 공격부대를 박살을 내 놓았고, 그의 중대들은 큰 피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전투 후 그는 청동 무공 훈장을 받게 된다. 또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날 때 쯤 그는 그의 3번째 해군 십자 훈장을 받기도 한다. 본격 훈장으로 총알 막을 기세
또한 존 바실론이 M1917 무쌍을 선보인 룽가 전투를 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의 주력 부대는 마타니카우 강 북쪽에서 허먼 하네켄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일본군의 주력이 모조리 룽가 방면으로 몰려오자 그는 기관총을 방어의 핵심으로 사용할 것을 지시하여 일본군의 주력을 붕괴시키고 방어선을 지켜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전투는 존 바실론이 다 했지만 이후 글로세스터 곶 전투에서 그는 네 번째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1944년 1월 대령으로 진급하여 해병 1연대의 연대장으로 전보한다. 그리고 펠레리우 전투에도 참전하였다.[10] 한편 그의 동생이었던 사뮤엘 D. 풀러는 해병 제 4연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괌 전투에서 일본군 저격수에게 저격당하여 안타깝게 전사하고 만다.
그는 1944년 말 미국으로 귀국하여 보병 훈련연대장을 맡았다가, 또 다시 진주만으로 배속된다.
2.3 한국전쟁에서의 활약 및 그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루이스 풀러는 진주만의 해병들을 지휘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해병 1연대를 다시 맡아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하여 은성 무공 훈장을 받는다. 이 당시의 에피소드.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가 훈장을 수여할 당시 풀러는 진지에서 공격을 대비해 엄폐해서 앉아 있었다. 알몬드가 이 곳은 적의 사정거리 바깥에 있다며 안심시켰지만 오히려 풀러는 위험하다며 알몬드를 강제로 무릎을 꿇게 했다. 훈장 수여식 때도 순간적으로 일어나 경례를 하고는 알몬드가 건넨 훈장을 낚아채다시피 받고는 다시 알몬드를 옆에 앉혀서 작전을 논의했다고. 풀러의 신중함이 잘 나타나는 에피소드이다.
- 그는 해병 제 1연대를 이끌고 한국전쟁 최고의 지옥도였던 장진호 전투에서도 살아남아 자신의 다섯 번째 해군 십자장을 수여받는다. 이후 그는 1951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해병 제 1사단의 부사단장으로 부대를 지휘하였고, 1951년 5월 미국으로 귀국할 때까지 직위를 유지하였다. 그는 곧 소장을 거쳐 중장까지 진급하였으나, 1955년 고혈압으로 인한 질환으로 은퇴한다.
루이스 풀러 중장은 1971년 10월 11일 사망하였다.
3 기타
- 그의 아들인 루이스 버웰 풀러 Jr. 는 베트남 전쟁에 해병대 소위로 참전하였다가 지뢰를 밟아 안타깝게도 두 다리와 한쪽 손이 모두 날아가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루이스 풀러 중장은 아들을 병원에서 처음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훗날 아들은 팔다리가 날아간 것보다도 아버지가 통곡하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웠다고 회고했다. 아들은 제대한 후 변호사로 활동했고, 말년에 자서전을 내어 1992년 퓰리처상까지 받았지만 극심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1994년 권총으로 자살했다. 풀러 장군의 며느리이자 풀러 2세의 아내인 토드 풀러는 현역 버지니아 주의회 상원의원(민주당)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 훌륭한 장군이시고 인생을 그야말로 파란만장하고 치열하게 살았으나 어떻게 보면 참 기구한 팔자를 타고나신 분..동생을 전쟁으로 잃고 거기다가 아들이 전상자가 되고 며느리는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고..정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인물.
- 풀러 장군이 별세한 후 미 해군에서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 FFG-23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현재는 선령이 오래되어 미 해군에서는 퇴역했고 이집트군에게 공여되어 이집트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후 2014년에 2대 함정으로 미군의 신형 이동식 상륙 플랫폼(Mobile Landing Platform) 3번함 USNS 루이스 B. 풀러가 진수되었다.
- 루이스 풀러는 조지 S. 패튼 장군의 먼 친척이라고 한다.
4 명언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우리가 후퇴한다고?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라는 명언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풀러 역시 이러한 멘탈갑 명언을 남겼다.
- "우리는 포위됐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졌다. 우리는 이제 모든 방향으로 공격할 수 있다." - 1950년 11월, 장진호 전투에서.
- ↑ 이 역을 맡은 배우 윌리엄 새들러는 국내에서는 아마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죄수 헤이우드 역을 맡았던 걸로 유명할 것이다.
- ↑ 명예 훈장 바로 아래의, 군인이 받을 수 있는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의 훈장으로, 육해공군별로 동 서열의 훈장이 존재한다. 해군 십자장은 해군과 해병대, 해안 경비대 구성원이 기본 수여 대상이다. 동급의 타군 훈장과 마찬가지로, 공로가 인정되면 타군에게도 수여가 가능하나 당연히 실 사례는 드물다. 풀러 장군은 육군의 동급 훈장인 공로 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도 하나 받았다.
- ↑ 해군과 해병대, 해안경비대를 합쳐 해군 십자장을 5개를 받은 사람은 단 두 명으로, 한 명은 미 해군 잠수함 에이스인 해군소장 로이 M. 대븐포트(Roy M. Davenport) 제독이다. 해군 십자장을 가장 많이 받은 인원들도 이 두 사람. 보통 미군에서 십자장을 두 번 수여하는 것은 명예훈장을 수여하는 것과 마찮가지로 여겨지는데(여담으로 살아서 명예훈장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살아서 받는 사실상 최고 무공훈장이 수훈십자장. 두 훈장 모두 군인에게는 최고의 영예다. 독일 국방군으로 치자면 황금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셈.) 루이스 풀러는 수많은 전장을 거치면서도 전사하지 않고 살아남으면서 무려 6개의 십자훈장(해군 십자장 5개,육군 십자장1개)을 수훈했다. 그야말로 엄청난 굇수.
- ↑ 그가 참전하였던 큰 전투만 해도 과달카날 전투, 글로세스터 곶 전투, 펠레리우 전투,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등이다(...) 한 마디로 20세기에 아시아-태평양 권역에서 벌어졌던 피튀기는 혈전에는 그가 항상 있었다는 뜻이다.
- ↑ 실제로는 버지니아가 아니라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있다.
- ↑ 사실 미국 제국주의의 본색을 내 보인 전쟁 중 대표적인 케이스라 참전했다면 흑역사가 될 수도 있었으니 어쩌면 잘한 선택일지도?
- ↑ 미국 해병대에 사단편제급 부대가 신설된건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하기 직전 1941년 초기가 되어서였고 상륙군단급 편제는 1943년이 되어서 활성화되었다. 전간기에 있던 해병대는 연대, 여단이 전부였다.
- ↑ 더 퍼시픽의 등장 인물인 앤드류 할데인 대위도 이 학교 출신이다.
- ↑ 아마 군사 고문단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다.
- ↑ 이 때 루이스 풀러는 상륙 제 1파로 섬에 진입하였는데, 일본군의 거센 반격으로 인해 LVT가 박살나서 전사할 뻔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