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닝구 무스메로 돌아가기
목차
1 1997년 ~ 1999년 : 태동기
모닝구 무스메의 시작은 TV 도쿄계에서 방영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인 'ASAYAN'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샤란큐 락 보컬리스트 공개 오디션'이라는 기획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오디션의 최종 심사에 떨어진 5명을 샤란큐 멤버인 층쿠가 프로듀스하여 새로운 아이돌 유닛으로 만든 것이 모닝구 무스메의 시초이다. ASAYAN은 꽤 인기가 있는 방송이었으며, 이 오디션을 통해 데뷔한 유명 가수로 스즈키 아미, 케미스트리 등이 있다. TV도쿄의 방송에서 데뷔해서인지 모닝구 무스메는 그 후로도 TV도쿄와 인연이 깊다.
이 때 처음 모인 멤버가 지금은 다 출세해서 다른일 하고있는 30줄 넘으신 아이돌 나카자와 유코, 이시구로 아야, 이이다 카오리, 아베 나츠미, 후쿠다 아스카. 참고로 앞에 두분은 현재 40대이며 뒤에 3명도 현재 30대다. (99년에 탈퇴해 결혼을한 이시구로 아야의 자녀가 현 모무스의 또래이다...) 나카자와 유코는 데뷰 당시 나이가 23살, 이시구로 아야는 20살이었다. 참고로 이 오디션에서 우승한 건 헤이케 미치요. 데뷔를 했는데 별 인기를 얻지 못하고 은퇴했다. 정작 탈락자인 모닝구 무스메 1기가 더 큰 인기를 얻었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
1.1 1998년, 1기 5명으로 시작하다
5명의 활동을 지켜보니 의외로 가능성이 있어보여서 인디즈 싱글을 5만 장 팔면 메이저 데뷔를 시켜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런데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싱글을 팔아치우고 메이저 데뷔에 성공한다. 당시 ASAYAN에서 방영한 오사카 즉매회의 영상을 보면 음반 매장에서 한참 떨어진 지하철 역까지 줄을 서 있는 경악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로서 모닝구 무스메는 공식적으로 1998년 1월 28일에 첫 싱글 <모닝 커피>의 발매를 시작으로 일본 가요계에 등장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섯 명의 초기 멤버로 시작했다.
1.2 1998년, 2기 영입
1998년 5월 3일에 층쿠는 돌연 2기 멤버의 영입을 발표했다. 오디션 방송 ASYAN에서 공개했는데 멤버들은 대놓고 싫은 눈치를 보였고 나카자와 유코는 '모닝구무스메는 5명이다'라는 말을 했었다. 1기 본인들은 층쿠에게 반항했다고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2기 멤버로 3명이 영입되었다. 원 멤버들은 이때 화풀이로 막 들어온 2기 멤버들에게 텃세를 지독하게 부렸다. 첫 대면에서는 1기 멤버들이 대놓고 웃음기를 뺀 모습으로 (...) 1,2기 갈등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2기 멤버들은 다른 기수들보다 동기애가 각별했다고 한다. 원 멤버들과 2기 멤버들의 갈등은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이후 우타방에서 1기 5명 모두 솔직히 2기 멤버들이 모두 싫었다고 답했지만 이시구로는 특히 이상한 프라이드가 생겨서 2기를 그만두게 하고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하며 지금은 서로 솔직한 마음도 다 털어놓고 잘 지낸다고 이야기하였다. 1999년 당시 아직도 사이가 안좋은게 아니냐는 질문에 아베 나츠미는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말할수 있는것'이라며 이이다 카오리는 '그것을 위한 고해였다' 고 답했다. 2기 멤버는 3명이며 이때부터 아베 나츠미와 후쿠다 아스카가 메인 보컬을 맡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모닝구 무스메의 특징인 가입과 졸업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여덟 명이 된 해 9월 9일에 발매된 <안아줘 HOLD ON ME!>가 첫 오리콘 1위를 한다. 그리고 여덟 명의 멤버로 1999년 4월까지 유지되다가 후쿠다 아스카가 4월 23일에 학업을 이유로 졸업한다. 졸업 당시 학업때문에 한다고 했지만 당시 나이가 겨우 15살이라 졸업 이유에 대한 여러 추측이 나돌았다. 훗날 한 잡지 인터뷰에서 활동 당시 나이차가 나는 다른 1기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 밝혔다.
"1대 4가 되어버렸죠. 이동 중에도 4명은 뭉쳐서 이야기하는데 저만 혼자였어요. 노골적인 것은, 라디오 녹화 중에 모두 저하고는 말도 안 해줘서 저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으로밖에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신규 멤버 3명이 합류했을 때는 기뻤어요. 다른 네 명은 '방해물이 들어온다'라는 듯이 서로 뭉쳤지만 저는 '동료가 생겼다. 잘 됐어'였죠."
때문에 이지메를 못 견뎌 나간 것이라는 추측이 한참 돌았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의도적으로 따돌렸다기보다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데다 워낙 기가 센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어색했었던 것. 어쨌든 후쿠다는 그래서 비슷한 또래였던 2기 멤버들에게 거부감 없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더 이상 연예계 복귀를 안할 줄 알았으나... 2011년 이후 asuka 명의로 PEACE$TONE이라는 인디밴드로 활동하고 있다. 이것이 모닝구 무스메의 첫 졸업이다.
초창기 그룹의 가창력을 하드캐리하던 후쿠다가 졸업함으로써 그룹은 생각 외로 큰 타격을 입었다. 기금다 역대 모닝구무스메 멤버들 중 가장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멤버로 많이 꼽힌다. 후쿠다가 떠난 후 발매한 싱글 <고향>은 파트 분배가 매우 악랄해서 아베 나츠미만이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 6명은 코러스만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싱글은 오리콘 주간 5위에 머무르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어, 그룹에는 좋지 않은 공기가 흘렀다. 당시 같은 ASAYAN 출신인 스즈키 아미의 <BE TOGETHER>과 동시발매하여 대결한다는 콘셉트였는데, 모닝구는 예상외로 쪽박을 쳤고 반면 스즈키는 대박을 쳐서 엄청난 비교가 되었다. 당시 방송을 보면 스즈키 아미도 모닝구가 5위라고 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 1999년 ~ 2003년 : 전성기
2.1 1999년, 3기 영입
<고향>의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침체되었던 모닝구 무스메에 1999년 8월 22일 3기 멤버가 가입한다. 원래 층쿠는 3기 멤버를 두 명을 뽑을 계획이었지만 이 3기 멤버의 실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했기에 한 명만 뽑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그가 바로 모닝구 최고의 에이스로 평가받는 고토 마키다. 코다 쿠미가 이 때 같이 오디션을 봤지만 떨어졌고, 다음에 본 에이벡스 오디션에서는 합격, 에이벡스 소속 솔로가수로 데뷔하게 되는데... 하지만 지금 모닝구 무스메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코다 쿠미는 차라리 이 오디션에서 떨어진 게 잘 된 것이다. 게다가 코다 쿠미는 솔로로 데뷔해서 화려하게 성공하였으니 말하자면 전화위복인 셈.
- 3기 멤버
다시 한 번 8명이 된 모닝구 무스메는 1999년 9월 9일 발매된 일곱번째 싱글 <러브 머신>으로 첫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게 된다. 160만 장 이상을 팔았다! 이 기록은 이후 AKB48이 경신했다. 하지만 초기 멤버중 한명인 이시구로 아야가 2000년 1월 7일을 마지막으로 졸업을 하게 되어 다시 7인조가 되었다. 이 때의 모닝구 무스메의 인기는 몇 달 전에 비해 엄청날 정도로 고공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졸업을 한 이시구로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다. 이시구로의 마지막 우타방 방송에서는 우타방의 스폰서들이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 주었다. 선물은 포키 1년치, KFC 1년 이용권에 심지어 차도 한대 받을 '뻔'했지만 면허가 없어서 대신 산악자전거를 받았다.
2000년을 멤버의 탈퇴로 시작한 모닝구 무스메는 2000년에도 역시 상승기류속에 새천년을 시작했다. 2000년 1월 26일에 발매된 싱글 <사랑의 댄스사이트>도 역시 밀리언 셀러가 되어 두 번 연속으로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2.2 2000년, 4기 영입
그러나 7인의 모닝구 무스메는 부족했던 것인가. 층쿠는 4기 멤버를 뽑는 오디션을 실시했다. 이때 후지모토 미키도 오디션에 2차 심사까지 붙었지만 결국 떨어진다. 그러나 오디션이 끝난 후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본 층쿠에 의해 솔로가수로 데뷔한다. 그외에도 컨트리무스메의 사토다 마이도 떨어진 후 층쿠에 의해 컨트리 무스메의 멤버로 데뷔한다. 이 오디션에서 4명을 선발하여 2000년 5월 17일에 <해피 서머 웨딩>을 발매하였다. 밀리언 셀러에 가까운 판매량이였다. 아깝게도 9천장 차이로 밀리언은 달성 실패하였다. 99.1만 장...
2000년 5월 21일. 2기 멤버로서는 처음으로 이치이 사야카가 졸업을 했다. 11명은 다시 10명이 되었으나 멤버가 줄었다고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2000년 9월 6일에 발매한 는 TBS의 올림픽 테마곡이 되었다. 그리고 2000년 12월 13일에 발매한 <연애 레볼루션 21>"도 상당한 인기을 자랑했지만 밀리언에는 아깝게 실패하였다.(98.6만장.) 2000년도 모닝구 무스메에게는 두 명의 동료가 졸업하였지만 4명의 새 가족이 들어왔고 음반 시장에서의 성공 등 경사가 겹친 한 해였다. 이 시기 모닝구 무스메는 일본 아이돌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2001년의 모닝구 무스메는 출발부터 큰 변화를 겪었다. 4월 15일 초대 리더였던 나카자와 유코가 졸업을 하였고 리더는 1기 멤버 중 연장자인 이이다 카오리가 맡았다. 이이다 카오리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 모닝구 무스메는 7월 25일에 발매된 싱글 <더☆피스>도 오리콘 1위를 기록하였다. <더☆피스>는 이시카와 리카의 센터로 유명한 곡. SMAP의 리더 나카이 마사히로는 이 곡을 상당히 좋아해서 방송에서도 몇 번 부른 적이 있었다. <더☆피스>를 이후로 모닝구의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멤버들이 센터로 서게 되었다.
2.3 2001년, 5기 영입
2001년 8월, 5기 멤버를 뽑는 오디션을 실시했다. 당시 오디션에 응모했던 소녀들의 숫자는 무려 25,827명으로 역대 오디션 중 최고의 인원수와 경쟁률을 자랑하며 이 당시 드높았던 모닝구 무스메의 인기를 보여줬다. 그 해 8월 6일, 5기멤버 4명을 선발하였다. 2001년 10월 31일 5기 멤버에게 있어서 데뷔곡인 <Mr.Moonlight (사랑의 빅밴드)>가 발매됐다. 모닝구 무스메에 있어선 과거에 없었던 다카라즈카의 컨셉을 차용했고 특히 이 싱글을 통해 요시자와 히토미가 보이시한 매력을 물씬 풍기며 소녀팬들을 대거 발생시켰다. 5기 멤버 중 한 명인 다카하시 아이가 다카라즈카의 엄청난 팬이다. 사실 모닝구 무스메의 멤버가 되는 것보다 다카라즈카의 배우를 꿈꿨다고... 하지만 그녀에겐 큰 난벽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다카라즈카 배우가 될려면 키가 157cm 이상이라는 기준이 있었다. 다카하시의 키는 153cm
하지만 초창기부터 자신만의 캐릭터를 확립함으로써 인기를 얻은 선배들과 달리 5기 멤버들은 정체된 모습만을 보여왔다. <러브 머신>부터 <연애 레볼루션 21>까지 약 2년간 거의 전 싱글이 밀리언 셀러였던 모닝구 무스메는, <더☆피스>때 판매량이 68만장으로 대폭 떨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 피스가 특별히 판매량이 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상술이 심하지 않아서 곡의 인기에 따라 판매량이 좌우되던 시절이었기 때문. 연애 레볼루션 직전 싱글인 I WISH와 비교하면 오히려 더 피스는 잘 팔린 것이었다.
게다가 팬들 사이에서도 5기 멤버를 부정하는 여론까지 형성되어 5기 영입 후 첫 싱글인 <Mr.Moonlight (사랑의 빅밴드)>는 51만장, 그 직후 싱글인 <그래! We're ALIVE>는 44만장을 판매하는데 그쳤고 이후에는 밀리언 싱글은 커녕 50만장 이상을 판매한 싱글도 나오지 못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아이돌 음반이라고 해도 상술이 없었기 때문에, 음판이 곧 인기의 척도였다. 지금처럼 음반 판매량이 상술의 척도가 된 것은 2000년대 중반 이후다.
게다가 업프론트에서는 하로마게돈이라는 헬로! 프로젝트 역사상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고 많은 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막 들어왔던 5기 멤버들은 많은 안티들을 보유하게 됐다. 특히나 니이가키 리사는 이 시기 야쿠자 아버지 뒷배경설, 스폰서설 등 많은 루머에 시달렸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안티를 보유하게 됐다.
3 2002년 ~ 2005년 : 쇠퇴기
2002년 02월 20일 야구치 마리를 센터로 세운 <그래! We're ALIVE>가 발매. 참고로 이 곡은 TBS의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테마곡이 되었다. 더피스-문라잇-소우다의 세 곡은 3연속 위클리 1위의 쾌거를 이루었지만 이후 모닝구의 인기는 조금씩 식어가고, 2002년 9월 <Do it! Now>를 끝으로 모닝구 최고의 에이스 멤버 고토 마키가 졸업하면서 인기의 하락세는 급경사를 타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모닝구 무스메의 화려했던 전성기가 끝이 난다.
3.1 2003년, 6기 영입
2002년이 서서히 끝나가는 겨울, 6기 멤버를 뽑는 오디션을 개최. 총 3명이 뽑혔다. 그리고 당시 솔로로 활동 중이였던 후지모토를 모닝구 무스메로 영입시키면서 총 4명 6기 멤버로 영입. 2003월 7월 30일 <비눗방울>이 발매됐다. 당시 이제 갓 데뷔한 다나카 레이나를 메인으로 세운 파격적인 구상을 내세웠다.
솔로로 인기를 얻고 있었던 후지모토, 그리고 오디션 당시 과거 고토의 이미지와 비슷했던 다나카를 내세워 과거의 인기를 되찾으려 했지만 결과는 딱 평타. 당시 이미 하락세였던 모닝구 무스메였기에, 새 멤버들마저 이렇다할 성과를 못 내자 하락세는 계속되었다.
이 시기 팀을 사쿠라구미와 오토메구미라는 두 개의 유닛으로 나누어 활동한 적이 있다. 멤버의 분위기에 따라 팀을 나누어 사쿠라구미에는 아베, 카고, 야구치, 콘노, 요시자와, 카메이, 다카하시, 니이가키가, 오토메구미에는 이이다, 츠지, 이시카와, 오가와, 후지모토, 다나카, 미치시게가 들어갔다. 그러나 이 유닛 활동은 아주 성공적이진 못했고, 싱글 판매량은 정확히 본체 매상의 절반씩 나왔다……. 당시 본체 매상이 15만장 정도 나왔는데, 이들 유닛은 사이좋게 8만장씩 나왔다. 다만 사쿠라구미에 인기 멤버가 더 많아서 그런지 사쿠라구미가 살짝 더 많이 팔렸다.
3.2 2004년, 졸업의 연속
2003년 5월에는 "AS FOR ONE DAY"를 끝으로 초대 서브리더였던 야스다 케이도 졸업했다. 그녀가 졸업하면서 그녀만이 가졌던 이지메 캐릭터가 없어졌고, 오가와가 그 캐릭터를 이어받았어야 했지만, 그녀가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우타방과 같은 예능 프로에서의 모닝구 무스메의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음 2대 서브리더는 같은 2기 멤버였던 야구치 마리가 맡게 되었다.
2004년 1월에 모닝구의 얼굴로 불리던 아베 나츠미가 <사랑이 있다면 IT'S ALL RIGHT>를 끝으로 졸업, 8월에는 국민여동생 기믹을 맡았던 츠지 노조미와 카고 아이가 <여자들의 시끌벅적 이야기>를 끝으로 졸업 하면서 인기는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한다. 2004년 여름에 7기 멤버를 뽑는 오디션이 개최되었지만 최종결과 합격자 없음이라는 충격적인 결말로 끝났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6기 멤버가 영입되며 멤버가 무려 15인이 되었기에 팀내의 분위기는 가장 활발했고 카고 아이와 쯔지 노조미의 졸업을 전후로 한 시기는 그룹의 아이돌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던 시기라 기존의 팬들중 이 시절(2003년 ~ 2005년 초)을 가장 아끼는 팬들도 상당히 많다. 특히 아베 나츠미의 졸업 콘서트와 2004년 봄콘인「베스트 오브 재팬」은 지금도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는 콘서트이다. 이 시기에 나온 곡들 중 팬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 많은데, <AS FOR ONE DAY>, <Go Girl ~사랑의 승리~>, <낭만 ~MY DEAR BOY~> 등이 명곡으로 꼽힌다.
11월 발매한 싱글 <눈물이 멎지 않는 방과후>는 콘노 아사미와 미치시게 사유미가 메인을 서서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4 2005년 ~ 2007년 : 변화기
2005년 1월에는 마지막 원 멤버이자 2대 리더인 이이다 카오리가 졸업, 3대 리더는 서브리더였던 야구치 마리가 되었다. 하지만 석 달 후 야구치는 오구리 슌과 데이트 중 파파라치에게 들키게 되었고, 연애가 금기인 사무소 방침에 따라 결국 모닝구를 불명예 전역하였다. 역대 모닝구무스메 졸업생들은 기본적으로 치르던 행사인 졸업콘서트도 없이 긴급 탈퇴. 하지만 불쌍하게도 1년 후 둘은 오구리가 양다리를 걸쳐 깨졌다. 그로부터 6년 후 야구치는 키 47cm차를 극복하고 모델 출신 남자배우와 결혼에 골인했으나 2년후 야구치의 불륜으로 이혼했다(...). 야구치가 나가면서 공석이 된 리더 자리는 서브리더였던 요시자와 히토미, 서브리더는 나이순으로 가장 많았던 후지모토 미키가 되었다. 5월에는 개인팬이 가장 많았던입문캐 이시카와 리카도 졸업하였다.
4.1 2005년, 7기 영입
2005년 1월, 7기 오디션이 다시 개최되었고, 층쿠에게 미라클이란 찬사를 받았던 "쿠스미 코하루" 단 한 명만이 영입됐다.
- 7기 멤버
쿠스미는 영입되자마자 소속사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고 츠키시마 키라리의 성우를 맡게 되면서 초통령으로 등극하였지만, 쿠스미 개인만 인기를 얻었을 뿐 그룹 전체의 인기를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2006년에는 5기 멤버였던 콘노가 대학 입학, 오가와는 어학연수라는 이유로 졸업해고당하였다. 콘노는 이후 여성 아나운서로 진로를 바꾸었다.
4.2 2006년 ~ 2007년, 8기 및 유학생 영입
2006년 7월 말 8기 오디션이 개최. 보라색 쥬얼티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나른함 62%. 12월에 8기 멤버로 미츠이 아이카가 영입됐다.
이 때 팬덤 내에서는 반발이 조금 있었는데, 사토 스미레, 킷카와 유우, 마스다 아야미 등 재능이 많았던 참가자들이 합숙까지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떨어뜨리고 미츠이 한 명만을 합격시켰기 때문이다. 사토는 SKE48의 중견급 멤버로 활약하고 있고, 킷카와는 업프론트에서 솔로로 데뷔하였다. 마스다는 오디션 합숙 도중 에이벡스에서 데뷔를 보장하며 채가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업프론트에서는 오디션 영상을 공개하지 않게 되었고, 오디션 낙선자들도 하로프로 연수생으로 붙잡아두게 되었다. 그러나 마스다는 에이벡스의 메인 레이블인 에이벡스 트랙스에서는 데뷔를 못 하고, 2014년 현재는 에이벡스 산하 애니송 레이블에서 질 낮고 유치한 만화영화 주제가나 부르고 있다.
8기에서는 2006년 정식 오디션이 끝난 이후에 중국인 유학생들을 영입. 중국인 멤버들의 경우, 외국인이고 원래 모닝구는 연예 활동 경력자는 배제하는데도 이미 연예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정식 오디션으로 선발되지 않은 낙하산 멤버라는 점에서 기존의 모닝구 무스메 기수가 가졌던 정통성은 없다고 평가받는다. 공식적으로도 '유학생'이라는 표현을 썼으며, 이 두 명은 입학 일자가 완전히 다르다. 팬들에게서는 "층쿠가 드디어 갈 데 까지 가는구나."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정말로 이 때 탈덕한 사람 많다. 일본이고 한국이고... 그래도 멤버들의 현지 적응력이나 다른 멤버와의 관계는 상당히 좋았다고.
2007년 5월에는 모닝구 무스메 내의 마지막 전성기(1999 ~ 2002) 멤버이자 4대 리더인 요시자와 히토미마저 졸업하였다. 그녀가 나가면서 5대 리더는 서브리더였던 후지모토 미키, 4대 서브리더는 다카하시 아이가 되었지만 리더가 된지 몇 주 지나지 않아 야구치처럼 후지모토도 쇼지 토모하루라는 개그맨과 데이트 중 파파라치에게 들켰고, 그녀도 탈퇴되었다. 참고로, 후지모토 미키는 모닝구 역사상 최단기간 리더라는 기록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탈퇴 후, 6대 리더는 다카하시 아이, 5대 서브리더는 니이가키 리사가 되었다.
5 2007년 ~ 2010년 : 플라티나기
2007년 <미완>부터 2009년 <거짓된 연애>까지는 싱글이 수록된 앨범 이름을 따서 팬들 사이에서는 '플라티나기'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이 시기에 발매된 <리조넌트 블루>, <울고 말지도 몰라>, <어쩔 수 없이 꿈을 좇는 사람> 등의 곡에서는 이제까지의 모닝구 무스메에 비해 세련되고 멋진 노래, 안무, 의상으로 무장하여 컨텐츠 측면에서는 모닝구 무스메 역사상 최고로 완성도가 높았던 시기라고 평가받는다. 다카하시 아이를 중심으로 한 멤버들의 역량 또한 절정에 달하였다.
다만 모닝구가 원래 강점으로 삼던 예능에서의 활약은 이 때 극도로 줄어들었다. 애초에 나오는 방송 자체가 없어진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나마 나오는 예능 방송에서도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 무엇보다 리더 다카하시 아이가 아이돌로서의 매력보다는 가수로서의 실력을 주 무기로 하였고,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다보니 팀 분위기가 퍼포먼스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퍼포먼스만으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어쩔 수 없이 꿈을 좇는 사람>에서는 3년만에 오리콘차트 주간 싱글 1위를 차지하였고, <거짓된 연애>에서는 4년만에 판매량 7만장을 뛰어넘기는 등 상업적으로도 성과를 얻었다. 다만 이건 40번째 싱글을 기념하여 개최된 싱글 판촉 이벤트 덕분이었다. <거짓된 연애>로는 하로프로가 수 년동안 출연하지 못하였던 음악 방송 뮤직 스테이션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모닝구 무스메를 둘러싼 여성 아이돌 업계에는 이 시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2007년에는 Perfume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모닝구 무스메의 인기와 판매량을 추월하였다. 뒤따라 2009년 즈음부터는 AKB48이 대세를 타고 사실상 일본 내에 거주하는 거의 모든 아이돌 오타쿠들을 흡수하였다. 게다가 2010년에 등장한 소녀시대, 카라 등 한류 여성 아이돌의 인기도 만만치 않아서 모닝구 무스메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졌다.
그리고 2007년 전후로 시작한 아시아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한 것도 바로 이 시기. 유학생인 쥰쥰과 링링의 영입이 그 신호탄. 덕분에 2008년 대만과 한국 그리고 중국의 상하이에서 공연을 했고 현지 방송에도 출연했다. 2009년에는 대동경소녀의 프로모션차 다시 방문했고 2010년에는 중국의 설특집 방송에 출연했었고 상하이 액스포에도 일부 멤버였지만 참여를 했다. 하지만 이런 아시아 진출은 2010년 말 쥰쥰과 링링이 졸업하고 사실상 플라티나기가 끝나며 사실상 현재까지 중단된 상태. 참고로 이 시기에 해외진출의 일환으로 미국과 프랑스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었다.
2009년 12월 6일에는 쿠스미 코하루가 모델로 활동하기 위해 가을 콘서트 투어를 끝으로 모닝구 무스메와 헬로! 프로젝트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4년 뒤 크나큰 뒤통수를 치게되는데(...)
6 2010년 ~ 2012년 : 재편기
2010년 중반부터는 전형적인 하로프로 의상에 장르적인 노래로 돌아가고 말았다. <청춘 콜렉션>은 촌스러운 청록색 의상에 곡도 밋밋했다. 반면 팬들 사이에서 좋아하는 곡을 꼽으라면 적지 않은 반응을 얻었고, 곡조가 아니라 곡을 전혀 살리지 못한 허접한 의상과 안무가 더 큰 문제였다는 의견이 많다. 청춘이라는 나름 아이돌 스러운 테마로 만들어진, 의외로 가사가 멀쩡한 곡이기도 했고. <제멋대로 프린세스>는 코사크 댄스라는 무리수를 선보였으며 <여자가 눈에 띄면 왜 안 돼>나 <여자와 남자의 자장가 게임> 등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기는 힘든 곡들이 연달아 나왔다.
2010년 8월 8일 카메이 에리, 쥰쥰, 링링이 가을 콘서트를 끝으로 졸업함이 발표되었다. 카메이에게는 아토피 피부염이라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만 쥰쥰과 링링은 3년 동안 하로프로에서 백댄서만 서다가 중국으로 돌아간 꼴이 되었다. 12월 15일 열린 졸업 콘서트에는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평일에 10,000명이 훌쩍 넘는 관객을 끌어 모으며 아직도 모닝구 무스메를 '좋아하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로서 모닝구 무스메의 플라티나기는 완전히 끝을 맺었다.
6.1 2011년, 4년만에 영입된 9기
카메이 에리, 쥰쥰, 링링의 졸업과 동시에 4년만에 9기 멤버 오디션을 발표했다. 초등학생, 갓 중학생 등이 선발됐다는 루머가 정식 합격자 발표 전에 흘러나오기도 했다. 2011년 1월 2일자로 9기 멤버 4명이 가입했다.
9기 멤버가 뽑힌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카하시 아이의 졸업(헬로 프로젝트까지 졸업)이 발표되어 다카하시는 2011년 9월 30일 졸업하였다.
6.2 2011년 말, 10기 영입
한편 9기 멤버의 첫 투어에서 10기 멤버 오디션이 발표되었고, 이에 따라 9월 29일 콘서트에서 10기 멤버 4명이 발표되었다. 이로써 모닝구 무스메는 5~8기 4명, 9기 4명, 10기 4명으로 모두 12명 구성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년 사이에 멤버의 절반이 새 멤버로 교체된 판이라 거의 새로운 그룹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불과 1년 전이던 2010년 12월만 해도 5명에 평균연령 21세였던 그룹이 9기와 10기가 연달아 들어오면서 이제 12명에 평균연령 15.7세가 되었다.
다카하시 아이가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12년 정초 니이가키 리사의 졸업이 발표되었다. 한편 미츠이 아이카 역시 콘서트 중 얻은 부상이 악화되어 5월 18일 갑작스럽게 졸업이 확정되었다. 새 리더는 미치시게 사유미가 맡게 되었다.
2011년 중반부터 2012년 초에 이르는 시기는 모닝구 무스메 최대의 암흑기였다. 다카하시 아이, 니이가키 리사, 미츠이 아이카 등 그룹을 이끌어나가던 선배 멤버들이 줄줄이 그룹을 떠난 한편, 새로 들어온 9기와 10기 멤버들은 아직 팬덤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사와 의상, 콘셉트가 다 따로 노는 <이 지구의 평화를 진심으로 바라!>, 멤버 전원이 병아리 의상을 입고 나온 <깡총깡총 울트라>, 개다리춤 안무로 지탄을 받은 <연애 헌터> 등, 싱글들도 팬들의 기대치를 만족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나마 다카하시와 니이가키의 졸업 싱글 버프로 싱글의 매상은 준수하게 유지했지만, 졸업 싱글 버프가 없었던 <깡총깡총 울트라> 싱글은 그룹의 역대 최저 판매량을 갱신하였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7 2012년 ~ 2014년 : 컬러풀기
10기 영입과 함께 모무스는 <One・Two・Three>부터 음악색을 바꾸고, 포메이션댄스를 특징으로 하는.화려한 퍼포먼스를 내세웠다. 특히 음악은 전자음 편곡을 씌운 90년대 J팝으로,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모닝구만의 음악 색을 정립했다. 흔히 EDM이라고 하지만, 사실 모닝구의 노래는 본격적인 EDM과는 좀 거리가 있다. 오히려 90년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유로비트와 비슷하다.
또한 싱글에 악수회권을 넣고, 싱글 8장을 한꺼번에 사면 멤버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체키회권을 주는 등 보다 공격적인 마케팅 노선을 시작했다. 말이 공격적인 마케팅이지 사실은 노골적인 상술이었지만, 판매량을 높이는데는 도움이 되었다.
미치시게 리더 체제의 첫 번째 싱글이자 50번째 싱글인 <One・Two・Three>는 걸즈 어워드 2012 행사장에서 공개되었다. K-POP 스타일의 곡으로 팬들의 반응은 '간만에 좋은 곡이 나왔다' 등 호평 일색. 이 싱글은 발매 첫 날 야마시타 토모히사와 2PM, 2AM 합동 유닛인 원데이를 제치고 2위에 올랐으며, 초동 판매량은 10만 598장을 넘어섰다. 초동 10만 장은 8년 6개월 만에 달성한 쾌거라 팬덤은 흥분에 휩싸였다. 다만 곡이 좋아서 잘 팔린 게 아니다. 싱글 일곱 장을 강제로 사야 참여할 수 있는 체키회를 열었다. 멤버들과 투샷을 찍을 수 있는 이벤트로 당연히 팬들이 미친듯이 달려든다. 이렇게 이제까지 하로프로에서 볼 수 없었던 상술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실질적인 곡의 인기를 나타내는 렌탈 차트나 유선 차트, 벨소리 차트 등에서는 10위권에도 들지 못하였다. 또한 강력한 상술을 동원한 것 치고는 판매량이 실망스럽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 때부터 모닝구무스메의 싱글 판매량이 10만장을 넘기 시작했고, 팬들 사이에서는 이 시기를 13번째 정규앨범인 '13 컬러풀 캐릭터(13カラフルキャラクター)'에서 따 온 '컬러풀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 컬러풀기에 이르러, 모닝구무스메는 조금씩 부활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7.1 2012년, 11기 영입
2012년 9월, 11기 오디션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11기 멤버는 카나가와현 출신의 중학교 2학년생 하로프로 에그 출신인 오다 사쿠라. 단 한 명만이 합격했다.
- 11기 멤버
이 시기의 모닝구 무스메는 전자음을 사용한 일렉트로니카 악곡으로 활동했다. <One Two Three> 이후 네 개의 싱글을 내리 일렉트로니카로 활동했는데, 이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오다 사쿠라가 들어온 후 첫 번째 싱글인 <Help me!!>가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였다. 이는 <어쩔 수 없이 꿈을 좇는 사람> 이후 3년 8개월 만의 1위였으며, 신규 멤버 가입 싱글이 1위를 한 것은 5기의 가입 싱글이었던 <Mr.Moonlight (사랑의 빅 밴드)> 이후 11년 5개월 만이다. 대전 상대가 슈퍼주니어의 유닛인 슈퍼주니어 KRY 밖에 없었던 등 운도 따라준 어부지리식의 1위였다.
이는 <One Two Three> 이후 급격히 늘어난 상술 덕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였다. 하지만 차트 순위와는 관계 없이 판매량은 10만 장 언저리에서 정체 상태에 있다. 이는 팬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판매량이 늘어난 것이 아니라, 억지로 판매량을 끌어올린 것에 불과하다는 증거이다. 다만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한 덕분에 여러 매체로의 노출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라, 팬 확보의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앞으로 어떤 곡이 나오냐, 멤버들이 얼마나 열심히 하냐에 따라 재기를 할 수 있을지 아닐지가 갈릴 것이다.
다행히 <와쿠테카 Take a chance>에서 8만장대로 떨어졌던 총판이 <Help Me!!>에서 다시 10만장대로 올라갔고, <브레인 스토밍/너만 있으면 아무 것도 필요없어>가 적은 양이지만 <Help Me!!>보다 판매량이 늘어나면서 조금씩이지만 판매량 증가 + 2연속 오리콘 1위라는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에서의 주목도도 높아졌다. 언론에 모닝구 무스메가 소개 될때마다 항상 2연속 1위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언론이 모무스에 호의적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 음악의 날이나 FNS 여름축제 등 음악 생방송에도 출연하였다. 결국 다시 조금씩 인지도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상술과 이벤트 → 덕후들의 지갑 털이 판매량 증가 → 노출도 상승 → 인기가 조금씩 상승 - 이 정도.
7.2 2013년
11기 멤버 발표 후, 한동안 멤버 변동이 없을거라 예상되었으나 6기 멤버 다나카 레이나가 2013년 봄 투어에서 졸업한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다나카 레이나가 졸업하고 나면 대중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멤버는 미치시게 사유미 밖에 안 남기 때문에 9-10-11기 멤버들이 하로프로 오타쿠 이외의 대중들에게 전혀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미치시게마저 졸업하면 모닝구 무스메는 완전히 대중들로부터 외면받는 그룹이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우려를 표하는 팬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9-10-11기 멤버들이 제대로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12기 멤버 오디션이 발표 되었다. 그러나 2013년 8월 24일, 12기 오디션은 해당자 없음이라는 결과로 마무리 되어 당분간 11기까지 10인 체제가 유지될 예정이다. 공식적인 사유는 현 모무스에 걸맞는 실력을 갖춘, 즉시 전력이 될 수 있는 인재의 부재로, 9기였다면 합격시켰을 사람은 몇 있었다고 한다. 다만 후보들 중 몇명은 에그로 뽑아서 연습생 생활을 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2013년 하반기 들어서는 우파가 약을 빨았는지(...), 일을 하기 시작했다! <わがまま 気のまま 愛のジョーク/愛の軍団> 프로모를 위해서 곳곳에 대형 광고판을 설치했고, 지난 몇년간 나온 횟수를 합친 것 보다 많은(...) 방송출연을 해냈다. 무려 6년만에 뮤직 스테이션도 출연했다! 이 단독 엠스테 출연은 모닝구에게 큰 의미가 있는데, OG들과 합동출연이 아닌, 현역 모무스 멤버들로만으로는 6년만에 출연인데다가, 팬들 사이에서 엠스테는 어른의 사정으로 못나갈 것이라고 몇년동안 인식되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4분이 넘는 시간을 배정받은데다가, 선곡도 그동안 방송에서 너무 많이 써먹어서 사골머신이라 불리던 러브머신이 아니라 '해피 섬머 웨딩'과 わがまま 気のまま 愛のジョーク 메들리여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해피 섬머 웨딩' 은 굉장히 오랜만에 방송에서 부른 곡인 데다가, 뒷줄 앞줄 할 것 없이 멤버별로 상당히 고른 단독샷을 배분해서 큰 환영을 받았다. 야구치가 했던 날아차기 안무는 이시다 아유미가 했다. わがまま 気のまま 愛のジョーク는 이때 잡힌 풀샷 덕분에 팬들 사이에서 와가마마의 댄스 포메이션이 '?'모양이었다는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댄스샷 PV에서도 정면샷만 잡혀서 팬들도 '왜 오다만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지?'했을 뿐, 설마 안무가 ?진영으로 되어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 방송직후 트위터 인기 키워드에도 오르는 등 굉장히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골수 팬들 사이엣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8월 19일부터 매일 유튜브를 통해 한편씩 공개되기 시작한 1/娘。 영상으로, 지금 멤버들의 캐릭터와 각오를 동시에 드러내며, 구팬과 신규 팬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1/娘。항목 참조.
업프론트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홍보노선을 보여준 원인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는데, 아예 모닝구무스메 활동 프로모션 전반을 대형 광고기획사에 외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역시 우퐈가 직접 한 게 아니었어 언론보도에는 어느 기업과 계약한 것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팬들은 최근 이벤트장에 화환을 보냈고, 과거에도 하로프로의 스폰서를 한 경력이 있는 덴츠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추정하고 있다. 덴츠는 물론 광고기획사로서 기업의 상품이나 이미지 광고를 제작하고 뿌리기도 하지만, 넓게는 크고 작은 국제회의의 운영이나, 심지어는 2020년 도쿄올림픽의 기획 및 홍보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흔히 말하는 "Public Relations"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한다. 바꿔 말하면 홍보하고자 하는 것의 질을 막론하고 덴츠가 뒤에 붙는 것 만으로도 엄청난 이미지 상승을 노릴 수 있다는 것. 업프론트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신의 한 수가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덴츠가 붙고도 안팔리는게 이상한거지...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결집된 'わがまま 気のまま 愛のジョーク/愛の軍団'은 발매 첫날 무려 9만6천장을 팔아치우며 모무스의 부활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로서 싱글 3연속 1위 기록이 세워지게 되었고, 홍백 출전 가능성도 조금 더 높아졌다. 홍백가합전이 열리는 2013년 12월 31일은 리더인 미치시게 사유의 모무스 재적 4000일이 되는 날이다. 만약 이날 홍백가합전에 출연하게 된다면 모닝구무스메 역대 최고의 드라마가 될 듯 하다. 그런데 팬이 아닌 사람들은 홍백 출전이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2012년에는 총 4팀의 여자 그룹팀이 출장했는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AKB48사단, 퍼퓸(일본), 모모이로 클로버, 카라정도가 홍백에 출연했었는데, 일단 카라는 제하더라도 나머지 세 팀 모두 돔급 규모 콘서트가 가능할 만큼 파워가 엄청난 그룹이다. 모닝구의 상징성과 덴츠와의 협력관계를 생각하면 가능성이 0%까지는 아니다. 연말에 나올 베스트 앨범이 롱런은 하지만 예상보다는 적은 판매량이 나와서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무도관이 매진되고 '모무스가 드디어 부활!'같은 식으로 기사화된다면 또 모를 일이긴 하다. 업프론트에서도 이번에 홍백에 내보내기만 하면 다시 부흥기를 열 수 있으리라는 것을 모를리도 없고.
비록 그 다음 날은 히카와 키요시에 밀려서 2위, 셋째 날은 히카와와 AKB48, B1A4에 밀려서 4위를 하는 등 이벤트가 반영되지 않는 일반 판매량은 부진함을 보여 팬들을 걱정하게 했지만, 4일차에 느닷없이 2만 4천장을 팔고, 주말동안 만장정도가 추가되면서 위클리 차트에서는 1위를 달성하였다. 덕분에 11년만에 3연속 싱글 1위에 성공하게 되었다. 판매량도 무려 14만장 ! 전 작품의 총 판매량보다 무려 4만장이나 높으며 9년만에 최고 판매량을 기록했다. 초동 판매량이 꽤나 높게 나오자 팬들사이에서는 미치시게 사유미의 참여 싱글 중 가장 판매량이 높은 샤본다마의 판매량(151104장) 을 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2주차 이후의 판매량도 기대가 적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광탈하리란 예상을 뒤엎고 약 16만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모무스의 인지도를 다시 살려냈다. 안타깝게도 등장 횟수는 5주에 머물렀지만...
2013년 모닝구 무스메 이벤트장의 모습. 기존 오타쿠층 이외에도 팬들이 많이 늘어난 모습이 보인다. 특히 여중고생 팬층의 증가가 가시적인 수준이라서, 향후 모닝구 무스메의 활동에 청신호가 켜졌다. 팬들은 EDM노선으로의 변경과 이벤트를 통한 판매량 증대가 부른 미디어의 주목 + 이번 싱글의 전폭적인 홍보활동의 시너지가 낳은 결과라고 추측하고 있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모닝무 무스메 재 브레이크'라면서 언급해 주는 등 부활에 가속도가 붙었다. 사실상 아이돌 관련 이슈를 AKB가 독점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새로운(?)그룹에 대한 이슈는 언론에서도 반가울 수 밖에 없다. 그것도 화려한 과거와 암흑기를 동시에 가진 모닝구무스메라면 화제성도 높을 테니 언론에서 알아서 띄워주기 시작한 것.
그리고 드디어 결성 16주년 기념 이벤트장에서 무도관 단독 콘서트가 발표되었다. 멤버들은 층쿠의 기습발표에 놀람+기쁨+눈물 이라는 다양한 리액션을 보여줬다. 다만 이 무도관 콘 발표가 전날 새벽 스텝의 실수로 인터넷에 먼저 공개되는 바람에 멤버들만 서프라이즈라는 농담성 놀림을 받기도 했다.
기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는데, 10월 30일에는 느닷없이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공식 응원가를 부르게 되었음이 공표되었다. 팬들은 덴츠가 역시 갑이구나이제 홍백 출전에 쐐기를 박았다며 기뻐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2013년 홍백가합전 출장에는 실패하였다. 걸그룹 TO는 한정되어 있는데, 이 시기 뜬 걸그룹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아이돌이 아닌 퍼퓸을 빼고 보더라도 E-Girls, AKB48, HKT48, NMB48, SKE48, 노기자카46, 모닝구 무스메, 모모이로클로버Z 등 유력한 팀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2014년부터, 모닝구무스메의 그룹명이 모닝구무스메'14로 변경되며, 해마다 그룹명의 숫자가 바뀌게 된다. 우퐈 이게 무슨 지거리야 현 리더인 미치시게 사유미는 블로그에서 '앗! 이대로 34년만 지나면...'이라는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7.3 2014년, 미치시게 졸업과 12기 영입
새해를 맞이하여 신년맞이 <네오키돗키리 모닝구 무스메 '14 편>이 방송되었다. 이때무터 자막과 나레이션에서 모닝구무스메 14('원 포' 라고 읽는다)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야외 공연장 무대 위에 임시로 집을 지어놓고, 멤버들이 자는 사이에 세트를 무너트려서 400명 관객 앞에서 자다가 콘서트를 하게 만드는 기획으로, 기획도 기획이지만 몰래카메라에 잡힌 멤버들의 비글스러움이 굉장히 큰 반응을 얻었다. 자려고 불 끄고 누워있다가 느닷없이 '해피 섬머 웨딩'을 춤추면서 부른다거나 윙크 범인 잡기 게임을 5회 이상 한다거나. 팬들에게도 영구 소장해야 할 장면들로 가득한 보물창고로 등극했다.
1월 22일, au의 학생 할인 캠페인 CM에 기용됨이 발표되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메이저 CM을 찍게 되었다. 곡명은 <Password is 0>. 이 광고는 1월 CM 호감도 랭킹에서 2위에 선정되는 등 은근한 반응을 얻었다. 광고 발표 회장에서 인기 개그우먼 트리오 '모리산추'의 멤버들이 모닝구 무스메에 합류한다는 충격적인 발표가 나왔지만, 알고 보니 이는 CM을 위해 '모리무스'라는 이벤트성 유닛을 결성한 것이었다. 신곡은 모리무스 버전과 모닝구 오리지널 버전에 동시에 발표되었다. 모리무스 버전은 싱글 특전으로 수록될 듯. 설정상 모리산츄 멤버들의 투입 이유가 코미디언(오와라이)과 아이돌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 위해서라나……. au 신cm의 캠페인으로 엄청난 싱크로율의 60년후의 모리무스 스페셜 영상이 공개되었는데 충공깽이지만 나름대로 귀엽다.
1월 31일 작년에 이어 러브머신(업데이트 버젼)과 신곡 'what is LOVE?'로 엠스테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1월 29일 발매한 3A면 싱글인 笑顔の君は太陽さ/君の代わりは居やしない/What is LOVE?가 119,442만장으로 1위를 차지하면서 다시 한 번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위에 서술한 돗키리와 cm의 효과도 생각 이상으로 컸던 듯하며 총 14.9만장을 팔아치우며 4연속 위클리 1위를 달성하였다.
2014년 3월 15일에 모닝구무스메。'14 콘서트 2014 봄 투어 ~ 에볼루션 쇼니치 공연에서 작년 합격자 없음으로 끝난 12기 오디션이 공고되었다. 2014년 4월 29일 모닝구무스메。'14 콘서트 2014 봄 투어 ~ 에볼루션 야마구치 공연에서 리더 미치시게 사유미의 졸업이 발표되었다.
2013년의 기세를 몰아서 정력적으로 활동했어야 할 모닝구 무스메로서, 이 시기까지 팬들은 앞으로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상반기 이후 모닝구 무스메는 '승부의 해'라는 타이틀을 내건 것 치고는 활동을 많이 못했다. au의 CM곡인 <Password is 0>이 생각보다 크게 히트를 못 하는 등 곡이 대중적인 사랑을 못 받았고, 싱글 판매량도 상술의 힘에도 불구하고 2만 장 정도 떨어지는 등 기대에 못 미치는 성과를 거두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시기 프로듀서 층쿠의 와병으로 인해 싱글 발매가 많이 지연되었다. 기껏 인지도를 높여놓고 6개월 동안 새 싱글을 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회사의 기획력에도 여전한 문제가 있었다. 리더이자 높은 인지도를 가진 미치시게 사유미의 졸업이라는 대형 떡밥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하였다. 다른 걸그룹들이 아레나 투어, 닛산 스타디움 등으로 거창하게 홍보를 하는 반면 모닝구 무스메는 홀 투어 정도로 그치는 등 철저히 수익성만을 신경쓰는 기획으로 팬들의 원성을 샀다. 미치시게 사유미의 졸업 공연은 객석 17,000석 규모의 요코하마 아리나에서 개최했는데 너무 안정적으로 가려고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화제성이나 팬덤 규모를 고려할 때 37,000석 규모의 사이타마 수퍼 아리나 정도까지는 가기를 바랐던 팬이 많았고, 결국 천정부지로 치솟은 졸업 공연의 암표 가격으로 드러났다.
2014년 8월 6일 뮤지컬 〈LILIUM 리리움 소녀 순결 가극〉 OST 앨범이 발매되었다. 선발 멤버 7명과 스마이레이지 전원, 하로프로 연수생이 참여했고, 2014년 6월 7일 ~ 21일까지 총 8회동안 공연했다.
2014년 9월 30일, 무도관 콘서트에서 12기 합격자 4명이 발표되었다. 합격자는 연수생 출신이자 각각 11기, 12기 오디션 탈락자였던 마키노 마리아, 하가 아카네 2명과 일반인 출신인 오가타 하루나, 노나카 미키 2명이다. 발표 이후 헬로! 프로젝트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12기 멤버들의 간략한 프로필이 공지되었다.
10월에는 TIKI BUN의 발매를 맞아서 1/娘。를 재탕한전성기는 한번으로 정해진건 아니야 프로모션을 진행하였다. 미치시게 사유미의 졸업을 맞아, 미치시게 사유미의 시점으로 후배들에게 너희들이 과거를 넘어 달라고 당부하는 내용.
연말 홍백가합전 출전은 이번 해에도 성사되지 못했다. 출연이 유력시되던 노기자카46과 BABYMETAL 역시 출연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FNS 가요제, 뮤직 스테이션 수퍼 라이브, 베스트 아티스트, 베스트히트 가요제 등 연말의 주요 가요제 출연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팬덤은 쓸쓸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8 2015년 ~ : 신생 모닝구 무스메
2014년 11월 26일 미치시게 사유미가 졸업하고 후쿠무라 미즈키가 9대 리더, 이이쿠보 하루나, 이쿠타 에리나가 8대 서브리더가 되었다. 9기 이후의 신규 멤버들로만 채워진 진정한 신생 모닝구 무스메가 시작되었다.
2015년 1월 1일 부로 홈페이지에 신멤버들이 포함된 아티스트 사진이 업로드 됨과 동시에 신생 모무스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2015년 4월 15일 신생 모무스의 첫 싱글 「青春小僧が泣いている/ 夕暮れは雨上がり/イマココカラ」 가 발매됐다.
2015년 8월 19일 59번째 싱글이자 쿠도 하루카와 스즈키 카논의 첫 센터 싱글 「 Oh my wish! / スカッとMy Heart / 今すぐ飛び込む勇気 」 가 발매됐다.
2015년 12월 29일 사야시 리호의 졸업 싱글이자 60번째 싱글 「 冷たい風と片思い/ENDLESS SKY/One and Only 」 가 발매됐다.
2016년 1월 3일 모닝구무스메 16의 13기 멤버를 뽑는 신세기 오디션이 개최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9 2016년, 스즈키 카논 졸업, 4년만의 내한
자세한 사항은 모닝구 무스메 '16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