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四天王寺(址) 개요
사천왕은 본래 고대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方位神)이지만, 불교에서 사천왕의 개념을 가져와 불법(佛法)과 가람[1]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변하였다. 이 때문에 사천왕의 이름을 딴 절들은 불교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이름이 되었다.
2 경주시의 사천왕사
2.1 개요
경주시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 남쪽에 있다. 지금은 남북 105m, 동서 73m의 터만 남아 '사천왕사지'로 불린다. 사적 제8호이다. 칠처가람지허 중 하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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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지. 강당지는 동해남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훼손되었다.
2.2 역사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치려고 하자 당시 당나라에 있던 승려 의상(義湘)이 그 소식을 듣고 670년에 귀국한다. 이를 문무왕에게 알리고 승려 명랑(明朗)을 시켜 679년에 사천왕사를 짓고 명랑이 일종의 밀법인 문두루(文豆婁)란 비법(秘法)을 쓰자 서해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의 군선이 침몰하여 침략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이 황룡사의 목탑을 지었던 선덕여왕릉 근처[3]에 있는 것도 호국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참고로 이 당시에 당에서 사신을 보내와 확인할려고 하자 연막으로 근처에 망덕사를 지었다는 설화도 있다. 자세한 것은 망덕사 참고. 문서가 생긴다면 말이지(…) 일단은 여기를 참고
삼국유사에는 10세기 초 경명왕 대에 신라가 혼란하자 사천왕사 벽화의 개가 나와 짖거나 탑의 그림자가 거꾸로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는 설화가 등장한다. 고려 문종 28년(1074) 7월에도 사천왕사에서 27일 동안 문두루도량을 열었다.
삼국유사에 칠처가람지허의 하나로 나온 것을 보면 13세기 고려 말에는 몽골의 습격으로 인해 폐사지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이 이 절에서 묵으며 주지와 시국을 논한 뒤 근처에 원을 세웠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조선 초에는 다시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폐허가 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근처의 분황사처럼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봤을 수도 있다. 어쨌든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폐사지가 재건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에 한 일본인 수집가가 거의 도굴하다시피 서탑터를 발굴해서는 사천왕 부조상 등의 유물들을 박물관에 팔아버렸다. 이를 통해 이 절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실측 외의 발굴조사에 무심했다. 황룡사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유적은 다 조사했던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조차도 저서 <조선건축사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총독부가 절터 땅을 사들여 보존중이지만 발굴조사를 위한 운동을 했는데도 물거품이 된 것은 애석하다.
게다가 1930년대에 동해남부선 철도를 절터의 강당터 위로 내버렸다. 덕분에 강당터는 아직도 손을 대지 못하고있다..OTL 현재 이 구간은 경주시를 크게 우회하는 방향으로 선로를 이설하는 공사를 하고 있고, 2018년 12월 개통 예정이다. 빠르면 2019년부터 발굴을 시작할 수 있을 듯.
2.3 가람배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 즉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를 따른 최초의 절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다. 두 개의 목탑과 금당을 가지고 있었다.
2009년, 동해남부선 철로로 인해 유실된 강당지 일부가 확인됐다.
2.4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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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뛰어난 돌 조형을 느낄 수 있는 사천왕 부조상들이 출토되었다.[4] 상당히 사실적이고 이전의 불상 양식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예술품이다. 승려 양지의 조각품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보상화문 전돌 같은 뛰어난 조각을 가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경주 박물관 소장.
녹유소조상(綠釉塑造像, 녹색유약을 바른 소조상) 역시 유명하다.
2.5 기타 발굴 정보
06년부터 2012년 현재까지 계속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발굴현장과 유물 사진들
2011년 사천왕사 사적비의 조각, 즉 사적비편이 발굴되었다. 신장, 대왕, 십육일, 거수, 특, 도, 이, ?, 월, ?, 영이라고 적혀있다. #
2013년이후 발굴 사실이 있다면 추가 바람.
발굴 현장에서 지난 2012년 6월 보상화문전 3점과 연화문전 6점이 도난당했다가 4개월 후 밝혀졌다. 인간 쓰레기들. #
3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
3.1 개요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아스카 시대의 사찰. 시텐노지는 우리말로 "사천왕사"다. 호류지와 함께 백제의 건축 양식 영향을 받은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주요 건축물들이 모두 파괴되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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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건축 양식과 유사점이 많다고 생각되어지는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복원되었다.[5]
3.2 역사
서기 578년에 쇼토쿠 태자가 백제로부터 장인 세 사람을 받아들여 절인 시텐노지를 건축하게 하였고 593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호류지보다 이른 것이다. 아스카데라가 역사상 일본 최초의 사찰이지만 사라졌다면,[6] 시텐노지는 최초의 관사이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그러나 1576년에 있었던 화재로 전체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다. 이 때문에 건물 자체는 호류지가 더 오래되었다.
에도시대를 거치면서 시텐노지 역시 계속 증축되었으며, 금당과 탑 등의 건축 양식 역시 바뀌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공포의 형식이나 기둥의 배치조차 바뀌어 지붕이나 하앙 정도만 옛 흔적이 남아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가람의 배치만큼은 창건 그대로다. 지금도 시텐노지식이라고 함은 강당과 금당, 탑, 정문이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는 배치를 뜻하며, 백제식 가람배치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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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를 거친 근대의 시텐노지. 특히 지붕의 형태와 장식이 많이 변형되었다.
이후 1934년에는 태풍 등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하였지만 결국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탑과 정문, 금당, 남측 회랑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셋 다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고증하여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을 하고 말았다.(…) 양식을 되돌리는 것이야 종종 있는 일이지만 콘크리트라니.. 콘크리트 건축물은 그 무게 때문에 기초공사를 하기 위해 땅을 다 파해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흔적이 남아있는 주춧돌과 기단은 제거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3.2.1 곤고구미와 시텐노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는 별명이 있던 건축 업체 곤고구미의 상징이 바로 이 시텐노지다. 시텐노지를 건축한 세 명의 목수 중 한 명인 금강중광(金剛重光: 곤고 시게미츠)이 일본에 남아 대대손손 시텐노지의 증축과 유지보수를 하게 되었고, 이 것이 곤고구미의 시작이다. 에도시대까지 곤고구미는 시텐노지의 유지보수를 전담해 왔기 때문에 시텐노지로부터 매년 정해진 돈을 받아 회사를 유지해왔다. 시텐노지의 완성 이후로도 계속 보수와 증축을 하였으며, 1576년에는 시텐노지 전체가 불에 탄 것을 재건한 기업도 곤고구미다. 그러나 1868년에 메이지 유신 직후에 내려진 "신불 분리령"에 의해 시텐노지는 소유한 사원의 토지를 모두 잃고, 곤고구미도 고정수입을 잃게 되었다. 그래도 1934년에는 태풍으로 무너진 시텐노지의 탑을 재건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곤고구미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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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태풍으로 무너진 오층 탑과 정문.
3.3 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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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텐노지를 묘사한 그림
3.3.1 중심 가람
백제의 영향을 받아 한 개의 5층 목탑과 금당을 가지고 있는 1탑 1금당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다. 호류지와 달리 모든 건물이 일직선으로 놓여있는 이러한 배치를 시텐노지식이라고 부르며,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로 추정한다.
현재 있는 금당과 탑 등 중심가람의 건축물들은 모두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안타까운 점이 있다. 내부는 현대식으로 복원되었으며, 내부에 있던 벽화와 장식 등도 완전히 소실되어서 현대적으로 새로 그려놓았다.
콘크리트로 복원하면서 에도시대의 양식이 아닌 창건 당시였던 아스카 시대의 양식으로 복원을 했다. 고증은 한국과 일본의 고건축을 연구했던 저명한 학자인 후지시마 가이지로가 했다. 고증에는 호류지나 7세기경에 건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구인 다마무시노즈시(옥충주자: 玉蟲廚子), 한국 삼국시대 건물들의 흔적 등을 참고 하였다고 한다.
복원된 시텐노지는 호류지와 비슷하게 하앙 구조, 배흘림 기둥 등 백제의 영향을 받은 아스카 시대 요소로 추측되는 것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에도시대까지 이어진 고식으로 파악되는 독특한 지붕의 형식, 가람 배치와 서까래의 종류와 배열 방법, 人자형 대공 등에서 호류지와는 좀 차이가 있다. 가람배치는 창건 당시부터 달랐고, 호류지는 난간을 제외하면 人자형 대공이 없는데 반해 시텐노지에서는 직접 가구에 쓰고 있다. 그리고 서까래가 호류지나 일반적인 일본 건물들처럼 평연(모든 서까래가 평행)이 아닌 선자연(부채꼴)으로 배치한 근거는 발굴 조사 때문이다. 화재로 인해 건물이 다 없어진 상태에서 1950년대에 발굴조사를 진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여러 흔적들을 발견했는데, 그 중에는 나라 시대 즈음 주저앉아버린 서까래의 흔적이 나왔다. 그 모양이 둥근 긴 서까래와 선자연의 형태였던 것. 이러한 발견점을 반영하여 호류지와 다르게 복원하였다.
다만 현존하는 사진 등은 모두 에도시대의 자료고, 옛 그림들도 시대도 다르고 간략화되어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어 복원이 완벽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시텐노지의 양식은 어디까지나 백제 건축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스카 양식이지 백제 양식과 동일하다는 근거가 없음은 주의해야 한다.
3.3.2 외부 가람
비록 시텐노지의 중심 가람은 현대에 재건되었지만, 그 밖에 오래된 다른 건축물들은 아직 남아있다. 주로 에도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아름다운 조경을 가진 혼보(本坊) 정원이나 유서깊은 춤 무대인 이시부타이(石舞台, 돌무대)[7]와 뒷편의 건물인 로쿠지도[8], 쇼토쿠 타이시덴(쇼토쿠 태자전), 박물관인 보물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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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부타이와 로쿠지도
3.4 시텐노지의 행사
3.4.1 시텐노지 성령회 무악
해마다 이시부타이에서는 쇼토쿠 태자를 위령하는 행사를 한다. 4월 22일이 쇼토쿠 태자의 기일이며 이 때 대법회인 성령회(聖靈會)와 이때 추는 춤에 쓰이는 음악인 무악(舞樂)를 연주한다.
성령회와 성령회 무악은 1400년이나 이어진 오래된 행사로, 많은 기원을 가진 춤과 음악을 펼친다. 무악은 좌무(左舞)[9]와 우무(右舞)[10]라는 2가지 기본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각 형식에 따라 음악과 옷색깔이 다른데, 좌무는 중국에서 유래한 음악인 당악(唐樂)에 따라 추며, 우무는 고구려에서 전래한 음악인 고려악(高麗樂)에 따라 춤을 춘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한반도에서 전래된 춤인 소리코(蘇利古)로, 612년에 백제에서 건너온 무용가인 미마지(未麻之)[11]에 의해 전수된 고구려 사자춤과 탈춤이다.
3.4.2 시텐노지 왓소 마츠리[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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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많이 봤던것 같은 복장들이?
백제인들이 오사카 해안에 도착할 때면 일본인들이 반가워서 그들을 가마에 태우고는 "왔소~, 왔소~"를 외치며 시가를 행진했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 이 당시 언어는 현대의 한국어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한 주장이다. '왔소'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기록상에서는 16세기 이후이기 때문에, 민간어원에 의한 재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시텐노지의 역사를 보면 시텐노지 왓소 축제 자체가 백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유력하며, 실제로도 한국의 복장들을 입고 한국에서 온 문화를 기념하는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축제에서 왓쇼이(ワッショイ)라고 구령을 부르는 것이 널리 퍼져있는데, 시텐노지의 왓소 축제에서 나왔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개중에는 유태인의 문화가 영향이었다는 좀 억지스러운 설도 있는 모양(…).
3.5 기타
- ↑ 절의 건축물
- ↑ 삼국유사에서 '전불시대(前佛時代) 칠처가람지허'라고 하였다. 일곱 곳의 빈 절터라는 뜻.
- ↑ 삼국유사에 실려서 유명한 '선덕여왕의 세가지 예언' 이야기 중 마지막 이야기가 '자신의 능침을 도리천에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서방정토에 있는 도리천을 경주에서 찾으려 하는 신하들에게 '낭산 아래가 도리천이다'라고 하여 능을 그곳에 마련했고,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선덕여왕릉 아래에 조성하면서 불경에 나온 '사천왕천 위의 도리천'이란 조건이 맞아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
문무왕이 끼워맞춘 것이었을까 - ↑ 사천왕사가 완공된 것은 통일신라의 전성기였던 중대(650~765)였는데, 이 시기 신라의 불교미술은 최정점에 달해있었다.
- ↑ 보통 오사카에 관광을 가게 될 경우 일본 체류기간을 좀 길게 잡은 사람이면 교토에 가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교토에 있는 히가시혼간지, 니시혼간지 등을 보면 확실히 건축양식이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 ↑ 지금 남아있는 것은 후대에 다시 창건된 것
- ↑ 무대강(舞臺講)이라고도 한다.
- ↑ 로쿠지는 여섯개의 시간을 말하는데 하루 여섯 차례의 염불과 독경을 뜻한다.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곳이다.
- ↑ 사호노마이라고도 한다. 중국·인도의 음악 양식에 근거한 춤
- ↑ 우호노마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와 시베리아 계통의 음악 양식에 근거한 춤
- ↑ 미마지의 춤과 관련 음악은 일본 왕실 아악의 기초가 되었으며, 미마지는 아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 ↑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