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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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신문선 (辛文善 / Shin Moon-sun)
생년월일1958년 3월 11일
국적대한민국
출생경기도 안성시
신체조건173cm
프로입단1981년 대우 축구단
선수시절 소속팀대우 축구단 (1981~1982)
유공 코끼리 (1983~1985)
스태프성남 FC 대표이사 (2013~2014)

1 개요

1958년 3월 11일 경기도 안성시에서 태어났으며, 연세대학교에 진학했고 국가대표로 뛰기도 했다. 1983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여 프로선수를 했고, K리그 1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은퇴 직후인 1988년에는 프로스펙스에 입사하여 틈틈히 MBC 축구 해설위원을 겸업했다.

당시에는 선수 출신 축구 해설위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신문선은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후 유명세를 타면서 프로스펙스를 퇴사하고 전업 해설위원이 된다.

2 해설위원으로서의 면모

해설할 때 특징으로 스포츠 과학 이론을 토대로 한 분석을 상당히 많이 내놓는다. 이를 통해 경기를 좀 더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서서히 인기를 얻더니, 1997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에서 스타 선수들 못지 않은 주목을 받게 된다. 이때 함께 해설한 송재익 캐스터의 만담이 곁들여지면서 일명 신문선-송재익 콤비가 떴다. 특히 한일전 1차전-흔히 말하는 도쿄대첩에서 나온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는 지금도 이들 콤비를 대표하는 걸작 애드립이다.

이후 월드컵 본선에서도 많은 어록을 만들어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급기야 신문선은 1999년 신문선의 최대 흑역사인 옥션 광고에 등장하면서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1] 아는 사람은 다 기억하는 만원에 천원 더! 낙찰~이라는 대사가 유명하다. 또한 이 사람을 패러디한 '신문지' 란 개그맨[2]이 등장했을 정도였다. 그밖에도 특유의 어투와 "골이에요~ 골~" 등의 멘트는 다른 사람들이 자주 하는 성대모사이기도 하다.

이 당시 신문선-송재익 캐스터가 신드롬을 일으킨 상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는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 등으로 해외축구에 대한 접근성이 대중화된 2000년대 이후와 달리 그 이전에는 해외축구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었고 소수의 매니아[3]를 제외하면 해외 선수나 팀은 철저히 남일 수 밖에 없었다. 두번째는 축구의 인기가 국가대표 경기에 집중되있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K리그 경기보다 국가대표 경기에 더 비중이 실리고 TV 중계나 관심도 등이 그것을 반증하지만, 당시 대중적으로 축구는 곧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절된 상황은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우리 그 자체였고 그와 상대하는 해외팀은 무조건 적에 가까운 인식이었으며, 이에 부합한 것이 송재익-신문선 중계진이었다. 또한 신문선 해설위원의 재치있는 입담, 오랜 중계경력의 송재익 보조자의 순발력까지 합쳐져 우리 팀이 이겼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전투의 승리처럼 배가되었던 것. 여기에 해설의 편파성을 지적한 목소리도 있었지만, 세간의 비판과는 달리 해설의 객관성 측면은,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 오노의 반칙에 눈감던 미국 해설자들의 그것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들이 제일 크게 할약했던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1, 2차 포함 패전은 단 한 번밖에 없었을만큼 승승장구하던 국가대표팀의 활약까지 겹쳐, 신-송 중계진 또한 신드롬이라 할만큼 화제가 되었고, 축구 게임 FIFA 시리즈의 해설까지 녹음할만큼 유명해졌다.

하지만, 4년 후 국내에서 펼쳐질 월드컵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2001년 송재익과 함께 SBS로 이적하고, MBC에서 축구영웅 차범근 전 감독을 영입해 맞불을 놓으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입담은 초보자인 차범근 해설위원이 "네~ 좋아요!"를 남발하던 것에 비해 천양지차로 나았지만, 축구팬들은 이것마저도 간결한 해설로 받아들이고 차 감독의 분석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였던 것... 특히,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대회를 앞두고 프랑스와 가진 평가전에서는 지네딘 지단의 부상에 대해 오판한 해설[4]로 구설수까지 오르게 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 조별예선 스위스전에서 발생한 프라이 선수의 골에 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서 당시 신문선 해설 위원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과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해석은 달랐다. [5] [6]
이때 신문선은 프라이의 골에 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 대해 "저건 오프사이드가 아니므로 정당한 판정이다."라고 해설했다가 당시 여론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자진사퇴, SBS 축구 해설위원에서 물러났다. 애국해설을 안해서 쫓겨난게 아니다.

한동안 명지대학교 기록정보대학원 교수직에 전념하다가 2011년 아시안컵 기간 중에 MBC SPORTS+ 축구 해설위원으로 복귀했다. MBC 축구중계에 복귀하여 10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결국 공중파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10/11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AC 밀란vs토트넘전에서는 피터 크라우치크라우처요한 크라우저 2세?라고 발음하지를 않나[7] 경기 흐름은 물론 토트넘, 밀란에 대한 최신 정보 부족도 드러내며 원성을 들었다. 물론 가투소선수 얼마나 화가 났으면 지구를 때리네요 드립은 좀 터졌다는 듯(...) 밀란의 골키퍼인 아비아티가 크라우치와 충돌해 부상을 입고 목에 깁스까지 하고 교체되었는데 부상이유를 스트레스를 못 견뎌서 나갔다고 목에 깁스하는 와중에도 주장해서 시청자를 벙찌게 만들었다.

해설 중에 선수들의 플레이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 재밌게 얘기를 해주지만, 이런 면모 때문에 오히려 싫어한다는 사람도 적지않다.#

2012년 6월 9일에 JTBC가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 중계권을 따내면서 JTBC에서 신문선에게 해설을 맡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對 카타르 경기 시작 전에 JTBC의 월드컵 예선 중계권 획득에 대해 '축구 컨텐츠의 다양화 측면'이라고 말하며 JTBC를 옹호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2015년 11월에는 TV조선에서 중계한 (중국 우한에서 열린) 올림픽 국가대표팀 4개국 친선경기 대회의 해설을 맡았다.

2016년 3월에는 뜬금없이 바둑 해설자로 나섰다. 알파고이세돌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MBN에서 해설했다. 바둑을 아마 5단쯤 둔다고 한다.

3 행정가로서의 면모

1990년대에는 축구 행정가로서도 활동하여 축구협회 이사를 한 적이 있으며, 현재도 축구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독선적인 활동으로 융화되지 못했던 점을 지적받는다. 특히 연대출신으로 고대출신을 지나치게 비판해온 것이나, 잦은 설화 등이 문제인듯. 그래도 김우중이 축구협회장일 때는 어느 정도 활동했으나[8] 정몽준에게 잠깐 기용되다 내쳐진 이후에는 반 정몽준 파로서 활동했다. 현재도 이런 점에서 축구협회의 정치역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 이후 지속적으로 반 정몽준파인 허승표[9]의 축구회장 선거운동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축구협회와는 사이가 나쁘다. 한 토론프로그램에서 "일본은 백년지대계를 수립해서 차근차근 진행해 가는데 축구협회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다." 라고 비난하자 당시 조중연 축구협회 전무가 "신문선 위원은 옛날에 축구협회 계셨는데 그때는 왜 그런 장기 계획을 못만드셨습니까?" 라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10].

4 성남 FC 프런트으로서의 면모

2013년 12월 26일 성남 시민 프로축구단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계약기간은 1년이고, 성과에 따라 연장하기로 했다.

스포츠서울 - 2014/01/14 '데스크가 만난 사람' 신문선 성남시민구단 초대 대표이사 "박종환 감독과 힘겨루기 없다. 시스템으로 분업화할 것"

취임 이후 다양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시민구단의 구태를 밟아가지 않을 것이며 시민구단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언론사에 인터뷰를 하더니 - “시민 구단의 새 모델 되겠다”… 신문선 성남 대표, 취임 일성 - <프로축구> 신문선 교수 "성적보단 구단가치 높이는데 주력" - 성남FC 신문선 대표 “시민구단 흑역사를 지우자”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허상이 하나 둘 씩 드러나고 있다.

창단식에서 야심차게 네이버를 스폰서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11] 막상 네이버는 무슨...제대로 된 스폰서 계약 조차도 하나도 따내지 못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2월 24일 기준으로 유니폼, 스폰서는 물론이요 주경기장, 표값까지, 정말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결국 성남은 롤링 주빌리라는 공익사업을 메인 스폰서(?)로 내세우는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프로구단이 되었다[12].

그 뿐이 아니다. 일화가 성남에 손을 뗀지 어언 석달이 넘어가는데 탄천종합경기장에 남아있는 일화의 잔재(통일스포츠라든가)조차도 완벽하게 벗겨내지 못했다. 물론 모든 직원이 스폰서를 위해서 사력을 다해 발벗고 뛰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런 사소한 것들은 준비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도 있으나, 한 두시간만 공을 들인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까지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신문선의 구단 지휘능력이 모자란다는 의문을 갖게 만든다.

또한 위에 언급했던대로 시민과 함께 하는 구단이 되겠다고 천명은 했으나 개막전 2주일 전까지 개막전 일정을 홍보하는 현수막 하나도 성남에서 제대로 보기 힘드며, 팬과의 소통을 천명하던 취임 초기와는 달리 팬과의 제대로 된 미팅 조차 가지지 않은 채 조기축구회 회원들과만 만나는 모습을 보여줘 선거운동에 이용되는것 아니냐는 질타까지 받고 있는 실정이다. 성남FC의 시즌 준비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면 기분탓입니다

돈새는 성남FC, 용품 후원사로 빚어진 초라한 현실 게다가 루머로만 돌던 스폰서 뒷통수마저 사실로 밝혀지며 맹비난을 받고 있다.

그래도 박종환 감독이 폭력을 행사하여 논란이 났을 때 강하게 경질해야 한다 주장하며 끝내 자진사퇴를 이끌어냈다. 최소한 상식적인 행동을 하였던 것은 잘 한 행동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제대로 진행되는 일은 없고, 취임한지 1경기가 지난 이상윤 감독 대행을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13], 그 다음에 이영진 코치를 감독대행으로 임명했다가 다시 1경기만김학범을 신임감독으로 올렸다. 3경기 동안에 감독이 3명이 들어선 꼴이고, 그중에서 2명은 1경기 목적이었다. 당연히 감독대행에 임명되었던 이상윤이나 이영진 등은 자신들이 1경기만에 잘릴 줄은 몰랐기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등의 인터뷰를 한 뒤였다. 이상윤 전 대행은 FA컵 준결승 포부를 밝힌 뒤에 아예 쫓겨났고, 이영진 전 대행은 후임 감독 김학범의 수석코치로 남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

2014년 12월 29일 비난을 의식해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성남 FC 대표이사직을 사임하였다.

5 기타

여담으로 히딩크 감독이 오대영으로 불릴 시절, 신문지상에서 조광래와 함께 히딩크를 혹독하게 비판[14]했다. 체력훈련 때려치우고 조직력이나 키워

그리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이 끝난 뒤 책을 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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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연히 씹히고...이젠 찾아보기도 어렵다. 심지어 월드컵 1주년 대담이랍시고 한 인터뷰에선 '폴란드와 첫 경기 전 라커룸에 들어가니 천하의 히딩크가 벌벌 떨더라.' 라는 소리도 했다. # 경기 전의 선수단 라커, 특히 다른 경기도 아닌 월드컵에서 다른 시간도 아닌 경기 직전에 라커룸은 1급보안대상이라 선수단이나 코칭스태프 아니면 관계자도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다. 관계자도 아닌데다 하물며 일개 해설위원이 들어갔다는 얘기인데 아무리봐도 거짓말일게 뻔하다.

이렇듯, 신문선은 언제나 남에게는 신랄하게 까는 비판을 일삼지만 정작 과장을 많이하고 말만 요란하고 자기 미화로 포장을 일삼으면서 성남 FC의 사장으로 일했을 때의 여러가지 병크를 생각하는 성남팬들에게 "신문선은 말만 많지. 능력도 없다."라면서 실속이 전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많다. 특히, 허승표와 가까운 관련 인물이라서 대한민국 축구 암흑기 시절의 실세였던 허승표를 싫어하는 안티들은 학을 떼면서 싫어할 정도다.

  1. 유명 대전액션게임을 이상하게 섞었다.
  2. 본명은 차승환으로 MBC 출신 개그맨으로 MBC 표준FM '즐거운 오후 2시 이택림 김나운입니다'에서 개그맨 김학도와 콤비를 이루어 송재익-신문선 콤비를 패러디한 김학도-신문지 콤비로 만담개그를 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이후로는 뮤지컬 배우를 하다가 현재는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 배우 김예분과 결혼.
  3. 스타 TV 등을 통해 프리메라 리가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중계가 우리말로 진행되는것도 아니었고 지금처럼 그 선수나 팀, 혹은 경기에 대해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할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벽은 존재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그 선수나 팀에 대해 더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었기에 더 충실한 팬이 될 수 있었다.
  4. 당시 지단은 김남일의 태클로 허벅지 부상을 입었고, 교체 사인을 벤치에 전달한 후 나중에 벤치로 돌아가 얼음찜질을 하며 진통제를 먹었다. 이 때 차범근은 이 상황을 그대로 파악하고 해설했으나, 신문선은 지단이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션을 냈다고 보았다. 사실 신문선 정도면 저 상황을 잘못 짚을리가 없었는데 대체 왜 그랬는지는 의문.
  5. 당시 신문선과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이 다른 이유는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이 2가지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에서는 " 공격수가 상대팀 최종 수비수보다 앞서 있을때 오프사이드 위치에 해당한다. 이때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공격수가 상대 수비수의 몸에 공이 맞음과 관계없이 공격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다면 오프사이드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온사이드다."라고 명시되었다. 그런데 이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서 다음과 같이 해석될 여지가 남아 있다. 하나는 "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공격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서만 공격에 관여하면 오프사이드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온사이드다. " 라고 해석할 수 있고, 또 하나는 " 오프사이드 위치에 있는 공격수가 오프사이드 위치에 상관없이 그냥 공격에 관여하기만 한다면 오프사이드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온사이드다. " 라고 해석할 수 있다.
  6. 신문선 해설위원의 해석은 전자에 가까운편이고, 반면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해석은 후자에 가까운 편이다. 그리고 2006 독일 월드컵 동시 오프사이드 규정은 두 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에 무조건 어느 한쪽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뚤어진 애국심이나 국까로 몰아세우는건 옳지 않다.
  7. 덕분에 샤다라빠에 의해 킹 오브 챔스, 크라우처에게 먹은 골의 원한을 풀지 않고 배길쏘냐 등등으로 패러디되며 까였다.
  8. 이 시기 신문선의 대표적인 위대한 업적(?) 으로는 1992년 아시안컵 예선에 국가대표팀이 아닌 대학선발팀을 내보냈다가 본선 조별예선에도 못 가보고 예선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김우중은 축구협회장을 관두면서 "내가 앞으로 허승표, 신문선 패거리와 축구 이야기를 하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다만, 이 때의 책임은 신문선보다 허승표가 더 크다는 지적이 더 많다.
  9. 인텍웨이브 회장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 출범 전에 영국 리그에 최초 진출한 한국 선수였다. 당시 아스날 B팀에서 뛰었고, 1973년에는 코벤트리에서 뛰었다. 기록은 34경기에 17골. 다만 저 영국진출이 실력으로 스카우트 된게 아니라 견학 수준에서 그런게 아니냐는 반문도 있다. 축협의 무능함에 질렸던 일부 축구팬들이 멋도 모르고 개혁가로 알고 있는데 축협이 그냥 커피면 이 양반은 T.O.P 수준이다. 과거 축구협회 행정가로 AFC에 파견되었는데, 하라는 일은 안하고 골프만 친다고 AFC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당연히 당시 대표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은 건 물론이다. 게다가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당시 금품 살포 의혹까지 받은 적이 있는 인물. GS그룹에서도 일찌감치 선을 긋고 외면했을 정도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10. 참고로 신문선은 일본의 백년지대계는 실컷 떠들면서 축구협회에서 유소년 투자를 얼마나 하는지는 전혀 언급 안 한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여러 이유로 많이 까인 조중연은 적어도 유소년 축구를 양성한 것 만큼은 찬양받고 있다.
  11. 이게 참 어이가 없는게 네이버 본사가 성남에 있다고 그냥 달려들었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듯이 네이버에 제의했는데, 네이버는 절대 甲의 존재지, 시민구단 따위에게 굽실 거릴 乙이 아니다. NC가 야구단을 운영하는데, 네이버도 마음만 먹으면 야구단이든 축구단이든 거느릴 수 있다.
  12. 야구에서 롯데 자이언츠유니세프와 협약을 맺고 있지만, 모든 경기에 유니세프를 달고 뛰지는 않는다.
  13. 다만 이상윤 대행은 이미 박 전 감독이 잘린 다음부터 사실상의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성적은 별로 나오지 않았다.
  14. 뭐 당시 한국인 축구관계자치고 히딩크를 옹호한 사람은 극소수이긴 했다. 당시 이용수 기술위원장과 차범근 이분은 몸소 체감하신 분이시니 옹호를 안할래야 한 할수가 없다. 정도만이 히딩크를 옹호했지, 나머지 이름을 알면 알만한 축구인들은 모두 히딩크를 미친듯이 씹어댔다. 물론 가장 앞장서서 비판했던 사람들이 조광래와 신문선이었다.
  15. 사실이 아닌 가능성이 높은 것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면 책의 초판은 2002 월드컵 전인 2001년 4월 6일로 나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