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론 해전 | ||
날짜 | ||
1942년 3월 31일 ~ 1942년 4월 10일 | ||
장소 | ||
스리랑카 섬 및 동남 인도양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영국 | 일본 제국 |
지휘관 | 제임스 서머빌 | 나구모 주이치 |
병력 | 항공모함 3척 전함 5척 순양함 7척 구축함 15척 항공기 100기 이상 | 항공모함 5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구축함 19척 항공기 350기 |
피해 규모 | 항공모함 1척 침몰 순양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 침몰 항공기 약 40기 손실 | 항공기 약 20기 손실 |
결과 | ||
일본의 승리 | ||
기타 | ||
영국의 인도양 작전이 크게 위축됨 일본의 남방점령지 안전 확보 |
목차
1 개요
1942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친 일본 제국 연합함대의 인도양 작전과 이를 저지하기 위한 영국 동양함대의 해전. 이 해전에서의 참패 이후 영국은 인도양-동남아시아 방면에서 방어전으로 일관해야 했고,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작전과 실행은 사실상 미국이 주도하게 된다.
2 배경
영국 해군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에서 참패하고 사령관 톰 필립스 제독은 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후 자바 해전에서도 ABDA 연합함대가 탈탈탈 털리며 동양함대는 더 이상 일본의 침략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이제 동남아시아가 문제가 아니라 인도양 전체에 영국의 해상 세력은 이름밖에 남아있지 않는 상태였으며, 일본군이 쳐들어오면 해상에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 지역이 탈탈 털리고 버마(미얀마)까지 밀리자, 영국에게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 제국의 문 앞까지 일본군이 당도하게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군 수뇌부, 그리고 전시 내각의 수반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고민 끝에 전함 5척이 중심이 되는 대대적인 전력 증파를 결정했다. 사실 영국군은 아직 본토 방위와 함께, 지중해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에 맞서 싸워야 했으나 나치 독일은 한참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으켜 소련을 침공 중이었고, 이탈리아는 타란토 공습 이후 해군 작전을 거의 안하고 있었으며(…) 북아프리카 전역도 에르빈 롬멜의 거센 반격을 저지하고 일단 숨돌리는 데 성공한 상태였기에 이런 증파 결정이 가능했다.
이와 같은 영국군의 증파 소식을 접한 일본군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미 태평양 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고 영국 동양함대를 격멸해 안정적으로 남방 점령지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찰나 들어온 영국군의 대규모 증파 결정은 태평양 외곽 방어선 구축을 준비하던 일본군에게 위협이 되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역시 남방 점령지에 대한 위협 제거라는 이유로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포트 다윈을 신나게 두들기고 돌아온 나구모 주이치의 기동부대에 인도양으로 진출할 것을 지시한다.
3 양측의 준비
3.1 영국
일단 영국의 준비는 겉보기에는 그럴 듯 했다. 당장 전함 5척이 동양함대에 긴급배치되었고, 항공모함 HMS 포미더블이 추가되어 기존의 항공모함인 HMS 인더미터블, HMS 허미스까지 총 3척으로 구성된 항공모함 부대까지 편성되었다. 항공기도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리던 호커 허리케인과 매우 귀중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를 소량이나마 배치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전함 5척 중 4척이 제1차 세계대전기에 건조된 리벤지급 전함 HMS 리벤지, HMS 로열 소버린, HMS 라밀레스, HMS 레졸루션으로 화력은 15인치 8문으로 준수해 보이지만, 구식인 데다 속도도 느려서 도저히 일본군 주력 함대와 맞서 싸우기 힘든 수준이었다.(…)[1] 나머지 1척도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인 HMS 워스파이트인데, 역시 리벤지급 전함과 동시기에 건조된 구식인 데다가, 고속전함이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다른 전함들의 속도가 향상되는 바람에 일반 전함과 별 차이가 없는 속도를 가진 물건이었다. 항공대도 신예기가 일부 있었지만 여전히 폴머 같은 구형 전투기가 다수 있었고, 적 함대 공격의 핵심인 뇌격기는 구닥다리 복엽기 페어리 소드피시…. 제공권을 쥔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선 활약했지만 제공권 확보가 안되며, 저속 선회전이 자랑거리인 A6M이 날뛰는 인도양 전장에선 도저히 써먹을 기체가 아니었다.
이 사실은 3월 26일 신임 동양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제임스 서머빌 제독도 잘 알고 있었다. 서머빌 제독은 다가올 일본군의 공세로부터 동양함대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고 전면적인 침공에 대비하며 일본군을 견제하는 데 주력하기로 전략을 세운다. 그리고 일본 함대가 공격시 동양함대는 최대한 이를 끌어내고, 지상기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도 두들긴다는 기본 전술을 채택한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첩보부는 4월 1일즈음에 일본군이 콜롬보 항을 공습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동양함대는 주력함들을 출항시키고 일전을 준비한다. 서머빌 제독은 휘하의 전함 5척 중 리벤지급 전함 4척을 B 부대로 편성하고 워스파이트와 항모 인더미터블, 포미더블로 A 부대를 편성하여 A 부대를 주력으로 삼았다.
3.2 일본
일본 해군의 인도양 작전은 진주만 공습, 남방작전 지원, 포트 다윈 공습 등에서 굴리고 또 굴려진 나구모 주이치의 제1항공함대와,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제1남파함대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이중 핵심은 제1항공함대였다. 오자와의 제1남파함대가 벵골만 일대에서의 통상파괴 및 일본군이 공격중인 버마에 대한 위협 제거가 목적이었다면,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는 동양함대가 결집한 실론섬을 두들기고 영국 동양함대를 격멸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서머빌 제독이 취임한 3월 26일, 포트 다윈 폭격을 마치고 휴식중이던 제1항공함대는 셀레베스 섬을 출항하여 자바 섬 남쪽을 통해 인도양으로 나아갔다.
4 전투
4.1 4월 1일 ~ 4일 : 일본군을 찾아라! 안 보이네? 안 오겠군! 으아아아아악!!
영국군은 기본 전략대로 지상 기지 및 항모의 함재기를 총동원한 일제적인 일본 함대 타격전 수행을 위해 예상되는 침공로를 샅샅이 수색했다. 항공모함 허미스를 포함하여 보유한 초계기 및 비행정을 모두 투입하여 일본함대를 찾았으나 안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4월 1일로 예측된 일본군의 공격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머빌 제독은 일본 함대가 실론섬 남쪽으로 접근하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그 남쪽 해역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이 전혀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때문에 아 ㅅㅂ 첩보부 애들이 낚인 거 아녀?, 잽스가 또 술책을 부리는 건가? 하고 당황하고 있었다. 일단 서머빌 제독은 일본 함대가 우회 루트로 실론섬으로 오고 있을 가능성을 경계하면서도 허미스를 트랑코말리로 보내 마다가스카르 침공전을 준비시켰고, 순양함 일부를 또 떼내어 호송선단 호위 준비를 시켰다. 나머지 주력 함대는 일본군의 작전권에서 벗어나 있다고 판단되는 몰디브로 이동시켜 보급을 받게 했다.
서머빌 제독은 이때 아군의 첩보가 틀렸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런 분산 배치를 감행한 것이다. 물론 실제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고 때문에 주력 함대를 몰디브까지 이동시켜 보급을 받게 한 것이지만 문제는 타이밍이 매우 안 좋았다는 데 있었다.
4월 4일 정오경, 몰디브로 이동해 열심히 보급을 받고 있던 영국 함대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정찰 임무를 띄고 출격한 비행정으로부터 대규모 일본 함대가 동쪽에서 접근 중이라는 급보가 들어온 것이다. 이 비행정은 얼마 안 가 격추당했고, 서머빌은 급히 전 함대에 출항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몰디브와 실론 섬의 직선거리는 1,000km 내외로 쉽게 돌아갈 거리가 아니었다. 애시당초 일본군은 술책이나 우회 기동 없이 정상적으로 실론 섬 공격을 위해 이동중이었다. 그저 첩보부의 공격 예측 날짜가 3일 빗나간 것일 뿐이었다. 서머빌은 황급히 콜롬보의 잔존 함정들에게 탈출 후 합류 명령을 내렸고, 트랑코말리로 간 허미스에게도 본대 합류 명령을 내렸다.
4.2 4월 5일 : 1차전 콜롬보 공습과 숨바꼭질
이런 영국군의 움직임은 전혀 모른 채, 나구모는 4월 5일 새벽 5시경, 공격 부대를 출격시켰다. 호위기인 제로센 포함 총 126기의 대규모 공격 편대였고, 진주만 공습과 포트 다윈 공습을 지휘한 베테랑 후치다 미츠오 중좌가 지휘했다. 일본 함대를 찾아다니던 소드피쉬 뇌격기 12기는 불행히도 이들 공격대와 조우하여 모조리 제로센에게 격추당했다.
아침 8시, 사전에 공습사실을 인지한 수비군의 요란한 공습 사이렌이 환영(?)하는 가운데 공격 부대가 콜롬보 항구를 내습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덕에 주력 함정들은 모조리 도망친 상태여서 공격할 만한 목표는 없었으므로 항만 시설과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항구에서 격침된 건 고작 구식 구축함 1척과 가장순양함[2] 1척,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대신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영국 전투기 총 42기가 이륙하여 공중전을 벌였으나 압도적 숫적 열세 속에 제로센 1기가 격추되는 동안 허리케인 15기가 포함된 영국기 19기가 격추당하는 참패를 당했다. 동남아 전선에서 쓰던 F2A 버팔로따위가 아닌 호커 허리케인까지 출격했음에도 이 모양 이 꼴이었던 건, 제2선급 전선에 투입된 영국군 파일럿과, 일본 해군 최정예 파일럿의 기량 차이도 한몫했다.
한편, 나구모는 항구에 항공모함이나 전함은커녕 순양함이나 구축함도 안 보인다는 보고를 받고는 공격 사실이 영국군에 흘러들어갔음을 직감하고, 각 함정들이 보유한 모든 정찰기를 출격시켜 주위에 있을 영국 함대를 수색했고, 정오경,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에서 출격한 정찰기가 영국군 중순양함 2척을 발견하고 보고하고, 나구모는 즉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 불행한 중순양함 2척은 HMS 콘웰, HMS 도르셋[3]으로 호송선단 호위 명령을 받고 콜롬보에 정박해 있다 허겁지겁 도망치며 본대로 합류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결국 본대와 합류하지 못하고, 아무런 항공 엄호도 못 받는 상황에서 일본기들의 좋은 표적연습이 되며 순식간에 격침당했다. 콘웰, 도르셋 격침 때 일본기들이 보여 준 명중률은 무려 88%이었고, 전투 시간은 고작 20여 분이었다.
콘웰과 도르셋이 격침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서머빌 제독은 함대를 급거 반전시켰다. 아직 허미스가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서 항공모함 2척과 구식 전함 5척으로 일본 함대를 상대하기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야간에 일본 함대를 포착하여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지만 이마저도 실패한다. 전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콘웰, 도르셋 격침 직후 양측 함대 간 직선 거리는 불과 300km 이내. 만약 이때 일본 함대가 영국 함대를 발견했다면 말레이 해전 저리가라 할 영국군 최대의 대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4.3 4월 6일 ~ 9일 : 일본군은 몰디브로 온다? 안 오자나!!
콜롬보가 초토화되고 아무런 전과도 없이 귀중한 중순양함 2척을 날린 서머빌 제독은 콜롬보가 초토화된 이상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콜롬보에서 가장 가까운 해군 기지인 몰디브의 아부 아툴 환초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서머빌은 실론에서 몰디브로 향하는 항로 주위에 매복했다가, 일본군이 몰디브 레이드를 하러 비행기를 모두 띄운 그 순간에 일본 함대를 냠냠쩝쩝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일본군은 아부 아툴 기지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애시당초 아부 아툴 기지는 건설된 지 얼마 안 된 기지였고, 일본군은 패망해서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이 기지의 존재를 몰랐다.(…) 당연히 나구모는 몰디브 같은 아무런 전략적 가치도 없는 동네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런던에서는 동양함대 휘하 B부대가 느리기만 하고 전투엔 도움도 안 된다는 이유로 영국령 동아프리카의 몸바사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서머빌 역시 이에 동의했다. B부대가 실제 일본군과의 싸움에 도움이 안되기도 했고, 이 도움도 안되지만 그래도 귀중한 전함들이 엉뚱하게 일본군에게 격침당할까 두려워한 탓이었다. 그리고 서머빌은 4월 9일, 마침내 전 함대에 봄베이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봄베이는 인도 서해안 최대의 항구도시로, 이로서 영국은 일시적으로나마 인도양 동부를 포기한 셈이었다.
4.4 4월 10일 : 2차전 트랑코말리 공습과 허미스 침몰
나구모는 콜롬보를 박살냈으니 그 다음엔 실론 섬 제2의 항구인 트랑코말리에 쑥재배를 하기로 결정하고 항로를 변침했다. 4월 10일 아침, 또다시 후치다 중좌가 지휘하는 대규모 공격 편대가 트랑코말리를 덮쳤고, 트랑코말리 항구도 콜롬보와 동일한 운명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영국군 주력 함대는 포착되지 않았고, 콜롬보 때와 마찬가지로 소규모 영국 전투기들이 요격을 시도하다 줄줄이 격추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또다시 나구모가 고민에 빠지던 오전 9시경, 전함 하루나(순양전함)에서 출격시킨 정찰기가 영국 항모 발견의 보고를 올렸다. 나구모는 즉시 트랑코말리 항구에 대한 2차 공습을 준비 중이던 편대들에게 훗날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랬듯 긴급 무장 변경을 지시했고, 육상 폭격용 무장을 장착하고 있던 일본기들은 일제히 대함 공격용 무장으로 환장하여 출격했다. 그러나 항공모함 허미스는 일본군의 트랑코말리 공격이 끝났다고 오판하고 트랑코말리로 돌아오는 중이었으며 일본기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지켜줄 함재기들마저 모두 육상 기지에 남겨둔 채였다.
오전 10시 25분, 항공모함 허미스를 향해 대대적인 집중공격이 시작되었고 함재기도 없고 대공 화기도 부족하며, 호위 세력도 거의 없던 허미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격침되었다. 뒤이어 호위함인 구축함 HMS 뱀파이어와 동행하던 보급함들도 같이 인도양의 푸른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 공격 부대가 허미스를 격침시키던 10시 30분, 실론 섬에서 발진한 영국군 블렌하임 폭격기 9기가 일본 함대를 발견하고 폭격에 나섰다. 그러나 수평 폭격으로 항행 중인 함선들을 타격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오히려 요격에 나선 제로센들에게 블렌하임 폭격기 5기만 격추당했다.
일련의 작전을 마친 나구모는, 동양함대 주력 격멸에는 실패했지만 항모 1척과 중순양함 2척을 격침시키고 콜롬보와 트랑코말리를 쑥대밭으로 만든 성과에 만족하며 귀환을 지시했다. 진주만 공습 때와 달리, 콜롬보, 트랑코말리의 항만 배후 시설을 모조리 폭격으로 파괴했기에 나머지 동양함대 전력이 돌아와도 실론섬 기지를 이용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5 결과
명백한 영국군의 참패였다. 일본군의 공격 계획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정확한 일시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전술적으로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로서 영국은 벵골만을 포함한 동부 인도양의 제해권을 일본에게 완전히 내주었고, 일본의 남방 점령지에 대한 위협은커녕 인도에 대한 침공에 대비하는 데 급급해야 했다. 뒤이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롬멜이 다시 재공세로 전환하고 몰타 항공전도 격화되면서 영국은 인도양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졌다.
이는 사실상 영국이 대일전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이후 영국의 대일전은 식민지인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정부에 의해 주도되며,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팽창하는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설 나라는 진주만 공습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있는 미국밖에 없었다. 이후 영국이 다시 태평양으로 돌아오는 것은 유럽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1944년 이후의 일이며 그마저도 미 해군의 연합세력으로의 참전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동양함대 격멸에는 실패했지만 원했던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더 이상 남방 점령지에 위협을 가할 수 없었고, 일본은 전력을 다해 대미 전쟁에 주력하며 태평양 외곽 방어선만 유지하면 충분했던 것이다. 일본은 최상의 전략적 조건을 구비한 채 미국과의 결전에 온 힘을 쏟아붓게 된다. 그리고 말아먹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