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성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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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6대 지마 이사금 박지마7대 일성 이사금 박일성8대 아달라 이사금 박아달라
시호일성 이사금(逸聖 泥師今) / 일성왕(逸聖王)
박(朴)
일성(逸聖)
생몰년도음력44년? ~ 154년 2월(110세?)
재위기간음력134년 ~ 154년 2월 (21년)

1 개요

신라의 제7대 왕. 칭호는 이사금.
김씨 조선 태조 김일성과는 다르다! 김일성과는!
김씨였으면 한국사 시간 흠좀무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유리 이사금, 혹은 유리 이사금의 형, 일지 갈문왕, 지마 이사금이라는 네 가지 다른 설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148년(일성이사금 15)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로 미루어 '아도갈문왕'이 유리이사금의 아들이자 일성이사금의 아버지, 즉 가운데 한 사람이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을 따르면 아들 일성이 즉위한지 15년이나 지나서야 아버지를 왕으로 추증한 것이 문제가 된다. 당시 갈문왕이 대충 조선시대의 대원군과 비슷한 지위라고 일단 알려져 있긴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뭘 하는 직위인지 완전히 알 수는 없는 상태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다. 박씨 족보에서는 44년생이라고는 하는데 불분명하다.

2 개판족보?

일단 정사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유리 이사금의 아들 또는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만약 유리 이사금의 아들일 경우, 일성 이사금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신라 왕자 천일창일 가능성이 커진다. 왕비는 지소례왕(支所禮王)(또는 지마 이사금)의 딸 박씨부인이다. 다만 위에서도 언급됐듯 148년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으로 봉한 사실에 미루어, 아도 갈문왕이 유리 이사금의 아들이며 일성 이사금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기록이 깔끔하지 않고 혼란스러운데, 실제로 이러한 개판에 가까운 족보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의심하게 하는 단서 중 하나가 되고 있으며 해석에 대해서도 각종 학설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삼국유사까지 가져오면 언뜻 보기에는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 없어 멘붕하게 되지만, 족보를 따져보았을 때 '기록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에 대두되는 학설. 족보를 따지느냐, 씨족을 따지느냐에 의한 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설에도 헛점이 있고, 실질적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대체 뭔 생각을 했는지 지금으로선 알기 힘들다. 성골진골 기준도 100%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훨씬 앞 시대인 이 때야 뭐...

아무튼 삼국사기 기록상 유리 이사금의 아들 중 둘이 왕위에 오르는데, 즉위 순서와는 다르게 나중에 왕이 된 일성 이사금이 이고, 훨씬 먼저 왕 했던 신라 제5대 왕 파사 이사금동생이다. 그리고 동생이 먼저 즉위했으며, 즉위한 것은 서기 80년. 이후 조카지마 이사금을 한 번 거쳐, 일성 이사금이 왕이 된다. 동생이 왕위에 오른지 54년 뒤에 형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후 왕위에 올라 20년을 다스린다.

이쯤 되면 일성 이사금의 나이를 역계산해 볼 수 있는데, 파사 이사금이 기록에 따르면 형보다 현명하여 왕위에 올랐다고 하니, 더 똑똑한지 아닌지 알려면 그래도 최소한 8세 이상은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10대 이상은 되었다고 보는게 자연스럽지만.. 그렇다면 형은 서기 80년에 최소 9세 이상. 그렇다면 왕위에 오를 때는 최소 63세가 된다. 이후 20년간 더 살았으니 삼국사기 기록을 믿는다면 최소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말이 되며, 너무 최소에 맞춰 타이트하게 계산하지 않고 좀 더 현실성 있게 되려면 90세 이상 장수했다는 말이 된다. 뭐 비슷한 시대 고구려 태조왕보다는 현실적인 수명이긴 하다만.. 동생이 왕 하는 동안 고구려에서 태조왕 형제 장수전설을 쓴 선진의술을 배워왔을지도 모른다. 다만 위에 나온 기록 중 형보다 현명하다는 기록은 표면상의 이유고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3 생애

위에서 썼듯 왕이 됐을 때 꽤 나이가 많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즉위 이전의 행적은 기록이 남은 게 별로 없다.

3.1 재위기간 및 업적

134년 즉위 직후 다른 왕들처럼 시조묘(나정)에 제사를 지내고 죄수들을 사면한 뒤, 138년 금성(金城)에 국가중대사를 회의하는 장소인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했다. 144년에는 모든 주군(州郡)이 제방(堤防)을 수축하고 전야(田野)를 넓게 개간하도록 명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한다. 당시 금은과 주옥의 사용이 진한의 풍습이라고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당시 귀속된 오환족의 고유 풍습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기록에는 오환족의 풍습 중 금은주옥을 사용하는 것이 있다고 되어 있다. 146년에는 전전왕 파사 이사금 때 항복했던 압독국(押督: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이 모반하자 군사를 보내어 평정하고 주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남쪽 지방으로 강제이주시켰다. 148년에는 그의 아버지로도 추정되는 박아도를 봉하여 갈문왕에 삼았다.

전왕과 마찬가지로 재위 중에 여러 번 북방 말갈족의 침입을 받아서 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도 하였다. 약 세 차례(137년 1번, 139년 2번)의 침입이 있었다. 138년 10월 왕이 친히 북쪽 영토를 순행하고 태백산에 들러 하늘에 제를 올리기도 했고 140년 2월 말갈을 막기 위해 장령 고개에 목책을 세우기도 했다. 말갈이 자꾸 쳐들어오자 142년 7월에는 아예 예방전쟁격으로 선제공격해서 뿌리를 뽑자고[1] 대신들을 불러 주장하기도 했지만 이찬 웅선이 반대해서 그냥 그만뒀다.

전왕과 마찬가지로 재위기간 내내 천재지변도 잦았는데, 즉위 12년에 남쪽 지방 가뭄은 특히 심각했는지 타지역에서 식량을 급히 옮겨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했다.

재위 21년인 154년, 붕어하였다.

그의 아들이 일성 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신라 초기 마지막 박씨 국왕인 아달라 이사금이다.

4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八月 일성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사면을 하다
二年春一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웅선을 이찬으로 근종을 일길찬으로 임명하다
四年春二月 말갈이 장령을 공격하다
五年春二月 금성에 정사당을 설치하다
五年秋七月 알천 서쪽에서 사열하다
五年冬十月 북쪽으로 순행해 태백산에 제사지내다
六年秋七月 서리가 콩을 해치다
六年秋八月 말갈이 장령을 습격하다
六年冬十月 말갈이 침입했다가 퇴각하다
七年春二月 장령에 목책을 세우다
八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九年秋七月 말갈을 정벌하려다 중지하다
十年春二月 궁실을 수리하다
十年夏六月 화성이 토성을 침범하다
十年冬十一月 천둥이 치다
十一年春二月 제방 수리와 전야 개척을 명하고 민간의 금은주옥 사용을 금하다
十二年 기근이 들자 진휼을 베풀다
十三年冬十月 압독의 반란을 토벌하다
十四年秋七月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추천하도록 하다
十五年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삼다
十六年春一月 득훈을 사찬으로 삼고 선충을 나마로 삼다
十六年秋八月 살별이 천시에 나타나다
十六年冬十一月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돌다
十七年夏四月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十八年春二月 대선을 이찬으로 삼다
十八年春三月 우박이 내리다
二十年冬十月 궁궐 문이 불타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一年春二月 왕이 죽다

시조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일성 이사금까지 삼국사기 1권이다.

5 항목

실제로 장수한 왕들

  1. 고려조선 초기에 수시로 여진족을 털어서 이쪽으로 못 쳐들어오게 약화시켜놓았던 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