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平尹氏
1 개요
본관인 해평은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이다. 시조는 고려 고종~원종 시기의 무신이었던 윤군정(尹君正)이며, 그 손자인 윤석(尹碩)이 충숙왕 때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져 본관이 해평이 되었다고 한다.
인구는 2000년 기준 불과 26,341명으로, 전체 본관별 인구수에서 202위, 윤씨 중에서는 파평 윤씨, 칠원 윤씨, 해남 윤씨에 이은 4위이며, 70만 명이 넘는 파평 윤씨에 비하면 희성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한미한 가문은 아니었고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정승, 판서, 부마 등을 배출하긴 했으나, 기본 인구가 워낙 적은 편이라 그나마 알려진 조선시대의 유명인은 윤두수(…)와 그 고손녀이자 김만중의 어머니인 윤씨 정도.
윤군정의 증손 대에서 소수의 문영공파(文英公派)와 다수의 충간공파(忠簡公派)로 나뉘었고, 충간공파는 다시 윤두수 대에서 윤두수의 후손인 오음공파(梧陰公派)와 동생 윤근수의 후손인 월정공파(月汀公派)로 나뉘었다. 아래의 네임드는 대부분 오음공파 출신.
경상도를 본관으로 한 성씨지만, 의외로 경상도에서는 보기 드물고, 충청도에 많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충청북도에 더 많이 산다.
파평윤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카더라가 있으나 해평윤씨는 잉어도 먹는다.
2 가문 번성
이처럼 비교적 인구도 적고 평범한 양반 가문이었으나, 구한말과 일제시대에 갑자기 유력 가문이 되었다. 여기엔 크게 두 갈래가 있다.
우선 윤두수의 장남 윤방의 후손이자 윤두수의 13대손녀가 순종의 계후 순정효황후 윤씨가 되면서 외척이 되었다. 동시에 그 아버지인 윤택영과 백부인 윤덕영 형제는 각각 일본으로부터 후작,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 다시말해 친일파로 변모(…). 다만 윤택영의 장남인 윤홍섭은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독립운동가로 남았으며, 해방 이후에는 아래에 언급된 먼 친척들인 윤치영, 윤보선 등과 함께 한민당을 창당했고(문제는 한민당도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숙명학원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 이들과는 촌수거리가 좀 먼, 윤두수의 차남 윤흔의 후손이자 윤두수의 7대손인 윤취동(1798.7.18 ~ 1863.12.21)이란 인물이 있었다. 말이 양반 가문이지 그의 아버지 윤득실 대에는 가세가 많이 기울어 직접 나뭇짐을 지고 농삿일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품이 후하고 성실했던 윤취동은 고향인 천안에서 아산으로 온 뒤 열심히 농토를 개간해 결국 아산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가세를 다시 일으켰다. 이후 관직에 진출하여 본인은 중추부지사가 되었을 뿐더러, 모은 재산으로 교육시킨 두 아들 윤웅렬과 윤영렬은 각각 대한제국 군부대신(지금의 국방장관)과 자헌대부로 출세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윤웅렬과 윤영렬은 자식을 매우 많이 두었고, 윤취동이 모은 재산과 남다른 교육열로 이들과 이들의 후손들 또한 대부분 유력인사가 되었다. 이들 중 나무위키에 개별 문서가 있는 인물들만 해도 윤치호, 윤치성, 윤치영, 윤보선 등이 있다.
윤취동의 주요 자손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참고 - 윤취동의 가계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은 ★로 표시한다.
- 장남 웅렬★(1840.5.18 ~ 1911.9.22) : 대한제국 군부대신.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으로 남작 작위를 받아 친일파가 되고 1년 만에 죽었다(…).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 총 5남 2녀를 두었는데, 윤치호는 두 번째 부인 전주 이씨 소생이고 윤치왕·윤치창은 측실 김정순 소생이라 터울이 꽤 크다.
- 장남 치호★(1865.1.23 ~ 1945.12.9) :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정치가, 예술가, 기업가, 학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했다. 3남 윤광선이 남궁억의 딸과 결혼하여 그와 사돈 관계가 된다. 증손녀 윤순명은 방응모의 증손자[1]인 방상훈 현 조선일보 대표와 결혼했다.
- 3남[2] 치왕(1895.2.17 ~ 1982.12.21) : 영국 글래스고에서 유학하여 의사가 된 뒤 군의관으로 소장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재향군인회를 창설했다. 의사이자 의학자로서 대한민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세브란스 병원 2대 원장을 맡기도 했다. 자손들은 대부분 학자, 기업가, 정치가가 되었다.
- 4남 치창(1899.3.5 ~ 1973.10.1) : 시카고 대학교에서 유학한 뒤 기업가, 외교관 등으로 활동했으며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이사를 맡기도 했다. 손원일 제독의 매형이다. 탤런트 남궁원, 전 외무부 장관 김동조와도 사돈관계가 된다.
- 차남 영렬(1854.4.15 ~ 1939.11.4) : 대한제국 자헌대부. 형과는 달리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만년에는 가난해졌지만 차남 윤치소의 재산 덕분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조카 윤치호는 그의 일기에서 "치소가 아니었다면 삼촌은 진작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패드립을 날렸으며, 학식이 없다고 까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리분별력과 수완은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한 명의 본처(한진숙)와 두 첩과의 사이에서 총 9남 5녀를 두었으며, 아래의 아들들은 모두 본처 소생이다.
- 장남 치오★(1869.9.10 ~ 1950.12.22) : 계몽운동가, 친일파. 자손이 굉장히 많은데, 장남인 윤일선은 의사로 서울대학교 총장 등을 지냈으며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의사나 예술가가 되었다.
- 차남 치소★(1871.8.25 ~ 1944.2.20) : 정치가, 기업가. 이병도의 겹사돈이다. 일찍부터 이재(理財)에 밝아 윤영렬이 집안 재산 관리를 그에게 맡겼으며,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100칸이 넘는 안국동의 윤보선 자택도 그가 지은 것이다. 이 사람도 자손이 많다. 장남이 대한민국의 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며, 삼남 윤원선은 흥선 대원군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5남 윤택선은 자식이 없었던 윤치병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그의 아들 윤창구는 KIST 교수를 지냈다. 나머지 자손들도 대부분 정치가, 학자, 목사 등이 되었다.
- 3남 치성★(1875.4.7 ~ 1936.8.11) : 해당 문서 참고. 이 사람도 자손이 많으며 대부분 언론인, 기업가, 학자 등이 되었는데, 특이하게도 차남 윤달선은 (대부분 개신교였던 이 집안에서) 조계종 승려가 되었다. 윤치성 문서 참고.
- 4남 치병(1880.7.10 ~ 1940.1.24) : 관료였으나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관직을 사퇴하며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았다.
- 5남 치명(1885.10.27 ~ 1944.4.21) : 윤치병과 함께 경술국치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 아산시에서 교육자로 살았다. 아들 윤유선은 세브란스 병원 원장, 국립보건원 원장 등을 지냈다.
- 6남 치영★(1898.2.10 ~ 1996.2.9) : 해당 문서 참고. 자손들은 주로 교수가 되었으며, KBS의 윤인구 아나운서가 손자다. 인촌 김성수의 사돈이기도 하다.
ㅎㄷㄷ하다... 불과 한 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 윤취동의 자손들 중 정치가, 외교관, 법관, 의사, 학자, 기업가, 예술가, 언론인 등으로 출세한 사람만 백 명이 넘는다고 하며. 게다가 인척, 사돈 관계를 맺은 사람까지 따지면 대한민국의 웬만한 유명인사와 다 연결될 정도.
여기에는 살짝 야사 삘나는 뒷이야기가 있다. 윤취동의 아버지 윤득실은 없는 살림에도 거지들을 구제하고 어려운 이를 보살폈는데, 시주받으러 다니다가 굶고 쓰러진 승려를 데려다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승려는 이에 보답하고자 이순신 장군의 묘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조상을 모시면 후손이 잘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후에 윤취동은 아버지 득실을 그곳에 몰래 암장했다.[3] 심지어 그 승려는 만약 들키면 몰랐다고 잡아떼라고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는 가세가 다시 서고 자손이 번성하고 출세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서 보면, 그 승려는 그 집안을 명예로서는 아주 추악하게 추락시키려고 그 짓을 했는가란 생각이 들 지경이다. 원균의 정치적 뒷배경 신료 라인에는 누가 있는가란 첫 인물을 상기한다면 말이다.
다소 씁쓸하게도, 저 격랑의 시대에 저런 유력 가문이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저 가계도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물론 끝끝내 친일을 거부한 윤보선이나 독립운동가들도 많다. 아버지(윤택영)는 친일파, 아들(윤홍섭)은 독립운동가인 등, 가까운 친척 간에도 한쪽에서는 조선귀족 작위를 받아 떵떵거리고 한쪽에서는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고 조용히 살기도 했다. 절묘하게도 윤치호 삼형제는 각각 일본 / 영국 / 미국에서 유학했으며 각각 친일, 친영, 친미파가 되었다. 가공할 분산투자인 셈이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다른 네임드(?) 친일파 가문인 여흥 민씨, 전주 이씨(왕공족 등 일부) 등은 조선귀족 작위와 일제 은사금으로 아무 생각없이 놀고 먹다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이좋게 망한 사람이 많은 반면에, 윤취동의 후손들은 기본적인 경제관념과 교육열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가 기업가, 학자, 의사 등으로 출세하여 때문에 해방 이후에도 위세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더 까이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안습.
이는 애초에 가세의 근원이 은사금 등이 아니라 대부분 윤취동 개인이 축적한 부(富)와 교육열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치왕의 경우 1910년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을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일 뿐더러 유학 시절 1년에 5천원 정도를 썼는데, 이는 오늘날로 환산하면 2억 5천만 원이 넘는 액수다. (참고로 당시 조선총독부 국장급의 월급이 80원 정도였다.) 이렇게 집안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윤치명·윤치병 같은 인물들도 생활에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물론 윤취동의 후손들과 별개로, 순정효황후 윤씨를 업고 받은 조선귀족 작위와 은사금으로 떵떵거렸던 윤덕영·윤택영 형제는 그냥 몰락했다. 심지어 윤택영은 낭비벽이 너무 심해 그 많은 은사금을 다 날리고 파산 선고를 받고 후작 작위까지 잃어버렸고, 빚쟁이에게 쫓겨 베이징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객사했다. 그나마 아들 윤홍섭은 독립운동에 투신해 집안의 체면을 살렸으니 견부호자라 볼 수 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