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석

1 프로게이머

前 스타크래프트 1 프로게이머
프로필
이름이기석
로마자 이름Lee Gi Seok
생년월일1980년 9월 12일
국적/출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종족테란, 프로토스
現 소속무소속
IDSSamjang, SSamzang
소속 기록
무소속1999-01-01 ~ 2003-01-31
KTF2003-02-01 ~ 2003-06-30
헥사트론 드림팀2003-07-01 ~ 200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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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수상 기록

1998년 LG배 다크레인대회 준우승
1998년 12월 블리자드 시즌3 16강 래더 토너먼트 8강[1]
1999년 블리자드 래더토너먼트 시즌2 우승
1999년 KPGL 1,2차대회 우승
1999년 싱크마스터즈 1차대회 우승
1999년 i2e2 2v2토너먼트 우승
1999년 블리자드 월드 챔피언쉽 16강
1999년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 3위
2000년 2000 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 8강
2000년 Game-q 스타리그 올스타전 준우승
2000년 iTV 레드얼럿2 초청전 우승
2001년 iTV 임진록:조선의반격 대회 우승

1.2 소개

국내 프로게이머 사상 최초의 스타 플레이어.

스타크래프트의 1세대 플레이어. 신주영과 함께 1세대 프로게이머로, 임요환이 나오기 전까지는 '프로게이머'의 대표로서 유명했었다. 코넷 광고의 임펙트가 워낙 컸었고, 그외 지상파에도 자주 얼굴을 내보였었던지라 일반인에게도 인지도가 상당히 있는 편.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스타 팬 사이에서 유명한 게이머들, 가령 김택용, 이영호[2]의 게이머의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나, 이기석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는 아직도 제법된다.

ID는 SSamjang 혹은 SSamzang. 본 종족은 테란이었는데 프로토스도 겸했다. 애칭으로 쌈장 이기석이라 칭한다. 이쯤되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 코넷의 CF에도 등장하기도 하였다.

1.3 스타크래프트 게이머 시절

99 프로게이머 코리아 오픈에서는 광고 촬영으로 인해 본래 참가하지 않았었지만 신길재가 개인 사정으로 기권하게 되면서 시드를 쥐어 참가, 프로토스 중심의 랜덤종족으로 플레이 했다. 사전투표에서도 우승확률이 가장 높게 집계되었던 네임밸류의 선수답게 4강까지 전승 행진을 하고 무적포스를 내뿜으며 우승을 노렸지만 국기봉최진우와의 플레이오프에서 각각 1:2, 2:3으로 아쉽게 패배하여 결승 진출이 좌절되고 3위를 차지하였다.

한참 전성기 시절 아마추어 신분으로 서울 어느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임요환과 붙었다고 이윤열이 밝혔고[3] 거기서는 임요환이 2대0으로 패했다고 한다. 당시 이기석의 포스는 정말 장난이 아니였다고..

임요환 역시 이기석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속에 담아두고 동경하면서 게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둘은 동갑내기 친구라고 한다.

하지만 1세대 프로게이머들이 대개 그러했듯[4] 그 역시 곧 빠른 속도로 몰락하게 되는데,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그의 유명세.[5] 이기석의 네임밸류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은 넘쳐났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대회보다는 이런 경기 외적인 활동에 불려다닌 결과로 인해 2000년 하반기가 된 이후, 그의 실력은 경쟁 프로게이머들 사이에서 도태되면서 사실상 퇴물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포함한 e-스포츠의 틀이 본격적으로 잡히기 시작한 것은 프로리그가 시작된 2003년 무렵이었고, 그 이전의 활동하던 선수들은 각종 길드나 피씨방 정도에 소속되어 있는 등 느슨한 방식으로 게이머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보를 합리적으로 잡아줄만한 요소들이 부족했던데다, 자신들 역시 기욤 패트리가 그랬던 것처럼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의 전망을 밝게 보았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터이니 이런 외적 활동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터. 이들의 몰락은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그는 선수로서의 활동보다는 상업 활동에 주력했고, 2001년에는 ITV에서 개최된 임진록 2(...)의 게이머로서 참가해 우승을 거두는 등 사실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라고 볼 수 없는 활동을 전전하며 거의 3년 가량을 보내다

이후 프로팀에 입단 했는데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와 헥사트론(현 eSTRO)을 거쳤지만 별다른 활약은 없었고 올드 게이머 초청전에서 강도경과 맞 붙었으나 0:2로 패했다. 한편 그의 경기력이 동료인 임요환에 비해 넘사벽으로 수준으로 낮아서 악평을 듣기도 했다.

1.3.1 그가 남긴 것

이렇게 보면 그저 한 때 잘 나갔으나 지나친 외도로 인해 몰락한, 과거의 유산 중 한 명이라고 생각될 수 있겠으나 실제 전성기 당시 그의 네임밸류는 분명 전성기의 임요환 이상이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레전드 중에서도 레전설 평가받기는 했으나 그 유명세는 거의 스타크래프트라는 울타리 안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간간이 외부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는 정도였던 임요환과 달리, 이기석의 유명세는 이를 훨씬 뛰어넘어 인터넷 문화 자체를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후술할 코넷 CF나 KBS 방송인 "밀레니엄 슈퍼내각"에서 사이버 국방부장관에 뽑힌 사례[6] 등을 봐도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 임요환이 전성기를 맞을 2001~2002년 당시 이기석의 실력은 바닥을 친 지 오래였지만 사회에서의 유명세는 여전히 임요환에게 그다지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퇴물이 되고도 거의 3년 가량을 방송 활동으로 먹고 살 수 있었던 것도 그 유명세가 받쳐주었기 때문이다.[7]

게임적인 부분에서 그가 남긴 것은 우선, 테란의 기초소양인 입구막기로 건물의 전략적 배치의 중요성을 전수하였으며, 로스트템플에서 BBS테란을 즐겨 사용했다. 이 전략은 아직도 간간히 이용되고 있다.[8] 게다가 쇼다운이라는 맵에서 보여준 배럭 날리기[9] 저그 상대로의 포지 더블넥 전략이 유명하다.[10] 다만 배럭날리기의 경우 이미 배틀넷에서 사용되던 전략이라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따지면 완전히 새로운 전략이 몇이나 될까? 아무리 새로운 전략이라 하더라도 배틀넷의 누군가가 이미 사용했던 전략일 수 있으므로 이런 깎아내리기는 의미가 없다. 누가 처음으로 개발했든 공식전에서 처음으로 사용해야 기록이 되는 것이다.
당시 프로토스의 대저그 전략은 온니 드라군이었는데 이러한 패러다임을 깨고 강자 최지명선수와의 경기에서 공방 2업씩 된 저글링, 히드라를 노드라군 질럿, 아칸, 다크, 템플러, 리버로 멋지게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메카닉 테란의 첫 장을 열었다. 메카닉 테란김창선, 김대기김대건으로 이어져 점점 체계를 갖추게 되고 최종적으로 김대건이 완전히 정립시킨 것으로 평가받는다.

1.3.2 흑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제패 프로게이머. 그러나 그의 배틀넷 승률 조작, 소위 어뷰징 시비가 붙으면서 그의 네임밸류는 매우 훼손되었다.99년도 당시의 신문기사에도 실렸다. 기사화된 이스포츠 조작의 원조... 이 의혹은 신주영, 김태형 등 당시 배틀넷 최상위권에 랭크한 한국인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니 의혹이라기보단 기정사실인데, 당시 배틀넷에 승률조작이 판치는 바람에, 어뷰징(밀어주기)가 없으면 절대 래더 순위권에 들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대 세계최강의 유저였던 기욤 패트리가 배틀넷 순위권에서 밀려나 블리자드 토너먼트 출전을 못한 안습한 상황도 일어났다. 당시 블리자드 토너먼트는 배틀넷 순위권에 들어야 출전 자격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러니 당시 상위권 랭커들은 일단 대회출전권을 얻기 위해 어뷰징을 했다는게 정설이다. 물론 토너먼트에서 다른 유저들과 붙어 승리한 것 자체는 이기석 본인의 실력이지만...

하지만 그 뒤에는 이를 뛰어넘은 조작자가 나타났으니 는 바로...

1.3.3 신주영과의 라이벌리

그가 유명해지면서 한번씩쯤 사람들이 신주영과의 실력차를 궁금해 하기도 하였는데, 이기석의 인터뷰에 따르면 최소한 그 인터뷰의 시점 당시엔 이기석이 3전 1승 2패로 뒤쳐졌었다.(역시 그 인터뷰에서 이기석의 말에 따르면 2패 후 1승을 하였는데, 그 1승에 대단히 기뻐했다는 말과 인터뷰의 흐름으로 봤을때 당시엔 자신보다 형인 신주영의 실력을 더 위로 인정했던듯 하다.)

신주영 VS 이기석의 1999년 Starcarft Championship
정말 희귀한 영상인데, 지금 보면 해설, 중계 방식, 플레이 등등 모든것이 답답할수 있겠지만 당시 신주영, 이기석, 김도형을 이길 사람은 없었다. 이 당시의 방송경기 화면 구성과 중계 방식은 바둑과 같은 전통적인 보드게임 중계에 가까운데, 방송 포맷이 백지나 다름없는 초창기였던 만큼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보드게임 중계를 많이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E스포츠 시장이 10대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로 자리잡아가면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 역시 일종의 아이돌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고, 중계 또한 자연스럽게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지금의 시끌벅적한 스타일로 변하게 된다.

이후 2002년 ITV 명인전에서 둘은 다시 한 번 맞붙게 되는데,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두 사람이었지만 방송에 좀 더 오래 출연했던 이기석이 불과 5분 만에 손쉽게 승리하게 된다.

1.4 그외 게이머 시절

  • 그의 말에 따르면 처음으로 출전한 게임대회는 워크래프트2관련 대회인데, 상품인 pcs가 갖고싶어서 참전했다 우승한거라 한다.
  • 그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시에는 이벤트성으로 일본 스타크래프트 대회 우승자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로 대결을 하기도 하였다.(결과는 이기석의 관광승)
  • 온게임넷 초창기에는 임진록 2 : 조선의 반격 리그에도 참가했었다.
  • 국기봉과 함께 바나나TV에 출현하여 성인방송에 출현했다는 괴루머성의 기사가 떠돌았었는데 이는 허위사실이며, 이기석이 카페와 네이버 지식인 답변에 스스로 해명하였다.참조

1.5 코넷 CF

코넷CF에 등장, 프로게이머의 존재가 희박하던 시절에 프로게이머라는 직업과 그의 아이디를 사람들에게 각인 시켰다.

이때의 유명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1999년 12월 31일 KBS에서 방영된 밀레니엄 특집 프로그램 "밀레니엄 슈퍼내각"에서 김좌진 장군을 제치고 밀레니엄 슈퍼내각의 국방장관으로 지명되기도 했다.[11]

스타크래프트와는 관계없지만, 철도청 초저항 1001호 차번 변경 사태 당시, 해당 1001호가 진품임을 입증한 증거가 바로 이기석이 출연한 코넷 광고 스티커였다. 이 광고가 1999년, 즉 초저항 도입 74년으로부터 25년이 지난 시기였다는 것으로써 입증.

1.6 그외

  • PC통신상에서는 나우누리 모뎀플레이 모임(略 나모모) 동호회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있다.
  • 책으로 "프로게이머를 꿈꾸며"라는 스타크래프트 공식 가이드북을 내기도 했다.

1.7 은퇴 후

현재는 결혼하여 유부남. 한국뉴스에서는 유학을 떠났다는 뉴스 기사를 마지막으로 잊혀진 사람이 되었는데, 일본 도쿄 한인타운인 신오쿠보 등지에서 PC방에서 일하는 이기석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2005년무렵부터 있었다. 싸이월드를 보면 도쿄 현지의 한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와세다대학을 다니다가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졸업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금전적으로 꽤나 성공했다는 카더라도 있는데 정확한지는 확인바람.

2014년 스타 파이널포에 출연, 한국에 돌아왔으며 교회를 다니다 성당으로 옮겼다고.[12] 현재는 프로그래머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2 무술소년 꼬망의 등장인물

무술소년 꼬망의 등장인물로 모티브는 1번으로 추정된다. 할머니가 된 콩자를 구하기 위해 무술대회에서 우승하고 상금을 가지고 돌아가던 꼬망 일행이 비행기 추락할 때 낙하산을 사용해서 도착한 어느 섬에 살고 있던 인물.

1번 모티브(?) 답게 테란군을 지휘하고 있다.도망가던 프로토스의 애완동물인 저글링(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꼬망에서의 저글링은 프로토스 종족의 애완동물로 나온다.)을 추격하던 도중 꼬망 일행을 발견하게 되고 저글링에 대해 물어보다가 나중에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되고 열받아 꼬망 일행에게 덤벼들지만, 저글링 흉내를 내서 공격한 꼬망 일행에게 마린이 전멸, 울면서 퇴장한다. 하지만 나중에 배를 가지고 돌아가던 꼬망 일행은 크리스탈을 많이 채굴해 대량으로 생산한 마린을 가지고 추격한다. 한마디로 원 인물과 다르게 개그 캐릭터.
  1. 신주영을 만나 1:2로 패하였다.
  2. 당연히 넘사벽인 임요환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임요환은 이스포츠판을 모르는 일반인에게 있어 이바닥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이기석보다 공중파에 훨씬 많이 나온지라 일반인들의 임요환에 대한 인식수준은 거의 연예인급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2013년부터 진짜 연예인급이 된 홍진호도 제외.
  3. 이윤열도 이 대회에 참가했으나 광탈했다고 한다.
  4. 이기석 이후의 실력 있는 프로게이머였던 장진남, 강도경 등이 지나친 경기 외적 활동으로 몰락한 케이스다. 전성기 때 거의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던 이기석에 비하면 이들의 인기는 상대적으로 낮았던 편이니, 이기석이 얼마나 잦은 방송 및 상업활동에 불려다녔을지는 안봐도 비디오
  5. 사실 이기석 외에도 1세대 프로게이머들은 대개 2000년을 기점으로 거의 예외없이 몰락하고 이후 세대에게 자리를 내줬다.
  6. 참고로 당시 이기석과 함께 장관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 중 하나는 안철수였다.
  7. 다만, 이기석의 전성기는 1999년~2000년은 정부 차원에서 인터넷 보급 사업을 대대적으로 밀어주면서 사회적으로도 이런 인터넷 문화가 크게 이슈화되었던 시절이었다. 이 때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세계 무대에서도 높은 성적을 이끌어내던 한국 프로게이머들의 활동은 이슈화되기 딱 좋은 시절이었을 터. 이런 면에서 이기석은 후대의 게이머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임요환의 전성기인 2001년 무렵은 그런 사회적 움직임이 차츰 식어들어가고, 스타크래프트 및 e-스포츠 또한 그들만의 문화가 되고 있을 시점이었으니 이기석에 비하면 확실히 불리한 면이 있기는 했다.
  8. 2003년 STOUT배 AGAIN 2000 올드게이머 초청전에서 이승원, 김동준해설위원이 BBS테란의 원조는 이기석이라고 인정하였다.
  9. 본진 미네랄 뒤편의 언덕으로 배럭을 날려 생산한 마린으로 자원 채취를 방해하는 전략.
  10. 강민이 더블넥의 시초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원조는 이기석이다.
  11. 참고로 그 때 슈퍼내각 총리로 지명된 인물은 을파소였고, 법무장관은 백범 김구, 육참총장으로는 을지문덕, 해참총장으로는 이순신이 각각 지명되었다.
  12.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