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일본 관계

중국어 정체: 臺灣日本關係, 臺日關係
중국어 간체: 台湾与日本关系, 台日关系
일본어: 日台関係(にったいかんけい), 日本台湾関係
영어: Japan-Taiwan relations

중국어 정체: 中華民國日本關係, 中日關係[1]
중국어 간체: 中华民国日本关系, 中日关系
일본어: 日本-中華民国関係, 日華関係[2]
영어: Japan-Republic of China relations

32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320px-Flag_of_Japan.svg.png
청천백일만지홍기일장기

대만일본의 관계, 혹은 중화민국일본의 관계[3].

1 개요

대만과 일본은 꽤 친밀하다.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현지인들이 '그럼 저희는 언제 따라가나요?' 라고 문의했을 정도라고(...).니들이 왜 따라오는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군인 총독이 주도하는 억압적인 통치로 일관했던 조선과는 다르게 민간출신 각료가 온건적인 통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조건적인 친일이 아니라 언제 대만을 집어 삼킬지 모를 중국을 견제해야 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친일이 될수밖에 없는 대만의 정세도 고려를 해야 한다. 아래 문단에 나오지만 역사적으로도 대만은 일제 점령기 이전에도, 대만 거주민들이 스스로 통치권을 갖고 있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운 적은 없기 때문에, 일본 점령기에 큰 거부감이 없던 것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일본식 문화가 많이 녹아든 상태. 특히 일본산 엔터테인먼트 컨텐츠쉽게 말해 오덕 소비가 매우 활발하다. 그리고 일본어도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기도 한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 차원에서는 그렇지 못한데[4], 우선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에는 중일전쟁으로 일본과 피터지게 싸웠으며, 난징대학살 등 영토 일부가 점령당하고 (심지어 난징중화민국의 수도였다.) 사람이 죽고 정부가 쫓겨다니는 수모를 겪었다. 오죽하면 총통이 나서서 위안부 문제를 비판했을까. 양국의 높으신 분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는 한 예시가 되겠다.

그런데 일본에게 중화민국은 아웃 오브 안중인듯[5](...)하였으나방치플레이 아베 신조[6] 내각이 성립한 이후에는 상당히 가까워지고 있다. 일본 총리가 직접 "대만은 우리 일본의 친구"라고 하기도 했다.[7]

정확히 일본 국민들이 대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건 아베 내각이 성립한 이후라기 보다는 도호쿠 대지진 이후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대만이 도호쿠 대지진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많은 도움[8]을 주었으며 과거에도 일본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매스컴의 보도 및 일본정부의 보답 대응은 아주 미미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만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2002년 월드컵 직전에 터키의 한국사랑에 대한 정보가 퍼지면서 한국국민의 터키에 대한 관심이 급상승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현재는 일본 국민들의 사이에서 대만은 프랑스와 더불어 "일본을 사랑하는 나라"의 대표급으로 여겨지고 있다.

2 식민지 시절

17세기 중엽까지 스페인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를 차례로 경험 후 겨우 독립국을 이룩한 것이 1662년이었고 당시 해방자인 정성공의 모계가 일본인이기에 이미 그때부터 일본과 연결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독립 23년 만에 의 침공으로 정씨왕국이 멸망하고 청의 영토가 되었으며, 2세기 후 1895년부터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대만을 청에게서 할양받아 50년간 식민 통치가 진행되었다.

일본은 대만에 비교적 유화적이며 청나라보다 더 스마트한 통치로 주민들의 호감을 샀다, 당시 대만으로 이주한 일본인에 대한 평판 역시 매우 좋았다고.

그 배경에는 당시 서양 열강의 아시아 땅따먹기 경쟁에서, 그 대상이기도 했던 일본은 오히려 자신들도 식민지 경영을 할 수 있는 일등국(만국공법에서 정의한)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청일전쟁의 결과로 얻은 첫번째 식민지인 대만 통치에 많은 노력과 투자를 했고 서양의 열강 국가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케이스로 삼았다.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대만의 통치에 실패하면 히노마루 깃발의 빛은 실추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대만 통치는 일본에게 중요했다.[9]

틈만 나면 반항하던 조선에 비해서 일본의 대만 통치는 전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매우 성공적이었다. 우선 청나라의 대만 통치 자체도 만주족에 의한 식민 지배와도 같았으니 일반인의 입장에선 통치자들이 바뀐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만은 조선보다 규모가 작고 지정학적으로도 조선보다 중요성이 떨어져서, 1910년대 이후 대만 총독이 가지고 있었던 대만군(대만 주둔 일본군) 지휘권이 신설된 대만군사령관에게로 넘어가면서 일본 총리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되었으며, 민간인 총독이 임명될 수 있었다.[10] 덕분에 고토 심페이 등 유능한 민간인 관료들이 자주 와서 대만을 통치했고, 사탕수수 재배를 바탕으로 식민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100% 자립도와 대만인들에게 상당한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게 해주었다. 일본의 정치나 문화적인 억압은 조선에 비해서 많이 부드러웠다. 그래서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이 조선에 비하면 비교적 약했다. 당시에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대만인들은 당근으로 회유하는 게 가능하지만 조선인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고 했다.

물론 초기에는 대만 또한 일본 식민 지배에 많이 저항했었다. 대나무숲에서 게릴라전을 벌인다든지 하면서. 그리고 도중에도 저항했다. 이를테면 1930년 여러 소수 부족들이 창칼을 들고 일본인들을 살해하면서 벌어진 저항에 일부 대만인들이 참가하면서 대대적인 내전으로 벌어지는가 싶었으나, 역시 일본의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이 벌어져 패배했다. 이 저항운동의 중심이던 대만 원주민 시디그 족은 마구잡이로 학살당해 지금까지 대만에는 겨우 8천명(2012년) 정도만 살아남아있다. 이들은 일본에 대하여 대대로 이를 간다고 할 정도로 싫어한다.[11] 대만에서도 잊혀지던 이 일은 2011년 대만 최대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 시디그 베일로 제작(2011년 9월 개봉)되었다. 오우삼을 비롯한 제작자가 투자하고 실제로 시디그 족들이 나왔으며 시디그어로 촬영되었는데 흥행은 대박을 거둬들였다. 이에 대하여 넷우익들은 홍콩 및 중국 투자이니까 당연히 반일일 수 밖에 없다고 징징거렸다. 어디 시디그 인들 앞에 나와서 그래봐라

Taiwan_historyENG2.PNG

또 대만과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타국의 식민지 지배가 갖는 의미의 차이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본다면 모르겠지만, 일단 대만을 별개의 지역으로 놓고 본다면 대만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포르투갈인들이 섬을 발견해 네덜란드인들과 스페인인들의 치하에 놓였으며, 정성공이 반청복명(反清復明)의 기지로서 세운 정씨 왕국이 단명한 이후로는 청나라에 복속되었으며, 그 후에 일본이 오고, 그 다음에는 중국에서 외성인이라는 자들이 건너와서 중화민국을 세운 것이다. 즉 본성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은 수많은 지배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한국은 원종부터 공민왕 이전까지의 고려가 약 60년 동안 원나라의 속국이자 실질적 영토로 있었던 것과 일제강점기를 제외하면 지배를 받아본 적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경제사적 관점에서 접근해보는 주장도 있다. 가령 대만의 경우 설탕 판매, 아편 중독자들로부터 거두는 대만 총독부의 아편 전매 수익[12], 각종 상품성 작물 등의 재배가 주요 산업이었는데 이것들은 일본 본토와 경쟁관계가 놓여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대체관계에 불과했다. 거기에 전반적으로 당시 대만은 인구가 조선의 1/4~1/5수준에 불과해서 먹여살릴 인구도 적었다. 덕분에 일본 본국의 예상과는 달리 10년만에 재정적으로 총독부 재정이 자립상태에 놓였다. 즉, 대만은 경제적으로 일본 입장에서는 꿀 빠는 동네였고 실제 대만인들의 생활 수준도 식민지인 치고는 괜찮았다.

반면 조선의 경우 대만처럼 특별히 본국에 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자립할만한 산업은 전무했다. 끽해야 홍삼이나 운산 등의 금광 정도가 있었는데 홍삼의 수입은 총독부 재정에 비해 무시할 만큼 작았고, 금광 역시 벼락부자들을 낳았지만 그것 역시 식민지 경영에 그렇게 좋게 작용하지는 않았다. 조선에서 그나마 산업이 되는 것은 초기에는 쌀농사, 중후기에는 중공업(군수공업 등)이 주를 이뤘는데 이것들은 본국 산업과 경쟁관계에 놓인 산업이었다. 거기에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대만과 달리 러일전쟁 때문에 1차 대전 종전 때까지 일본은 조선에 대해 그렇게 투자를 많이 할 여력이 못 되었다. 더군다나 일본 입장에서는 '돈도 없는 주제에 자존심만 높고 쓸데없이 먹여 살려야 할 조선인들이 너무 많았고' 이것은 식민지 경영이나 일본인들의 현지 진출 등에 장애가 되었다. 그들 기준으로는 '개척해야 할 공간이 줄어드니까'. 총독부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양 목축업이나 면화 농업은 그닥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일본 입장에서 조선은 경제적으로 잉여 식민지인 반면, 조선 입장에서 일본은 경제적으로 투자한 거도 별로 없으면서 뭐 해볼라 치면 일본에서 쓸데없이 태클 걸고, 그런 주제에 요구하는 건 쓸데없이 많은 본국이었다.

실제 일본인과 조선인, 대만인의 세부담을 본다면 1936년에는 일본인이 1인당 12~13엔, 대만인이 4~5엔, 조선인이 2~3엔 정도 꼴을 보였다.[13]

그러다 보니 해방 이후에 들어온 국민당 정권의 2.28 사건 등의 탄압에 비하면 일제의 통치는 별것 아니었다고 받아들여져서 상대적으로 친일본정서가 강해졌다. 이런 경향에 따라 서울대학교경성제국대학을 전신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과는 달리, 국립타이완대학이 다이호쿠제국대학(臺北帝国大学)[14]을 전신으로 인정하는 등의 차이를 보인다. 참고로 일본 본토가 아닌 곳에 세워진 제국대학은 저 두 곳 뿐이다.

또 다른 예로서는 총통부 청사는 지금도 대만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다. 한국의 경우도 1945년에서 1986년 까지는 중앙청으로 1986년에서 1995년 까지는 중앙박물관으로 써왔으나 이는 순전히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고 이미 해방 당시부터 총독부 건물을 중앙청으로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강했으며, 경복궁 흥례문을 파괴하고 정궁을 가로막고 지어진 조선 총독부를 그 위치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전 복원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만 이전 복원 비용이 신축 비용을 초월했는데, 그러자 정부가 내린 결론은 그 정도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보존할 가치가 없다는 것으로, 결국 철거했다. 그러나 대만은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일찍 여유가 생겼음에도 상당기간 계속 썼다는 것은 한국인의 감성으로는 흠좀무하다. 타이완에서도 총통부 청사로 대만 총독부 건물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여론이 있기에 마잉주 정권 때 총통부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시작되었지만, 한국처럼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자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대만 총독부 건물은 지금도 중요 문화재로 일본인 관광객이 항상 들리는 코스중 하나.(...)

요즘도 넷 우익은 대만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그래서 대만은 일본에게 감사하고 친일이라고 자랑하지만, 일제의 대만 통치에서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점령 초기 한족들의 저항은 꽤 상당한 수준이었고, 예를 들면 통치 초기 첫 5년동안에 사형된 대만 주민이 3천 명이었는데, 약탈, 살인은 물론 건물이나 표지를 손상한 자 또는 미수에 그치더라도 사형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악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5] 이처럼 철저하게 처음부터 저항하는 세력은 씨를 말려버린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3 중화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의 관계

1949년 국부천대 이전의 중화민국과 일본은 만주사변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서로 적대국 관계에 놓여있었다. 그러다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면서 두 나라 관계는 정지된다.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이자 당사자이며 또한 피해국이었던 중국 초청 문제에 국공 양자가 모두 초청되지 않게 되어(...) 두 나라 정부간의 강화는 1952년 이른바 일화화평조약(日華和平條約)을 체결함으로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71년 중화민국이 UN에서 축출[16]되고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간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마침내 1972년 9월 중일공동성명을 통해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면서 일본-중화민국 간의 공식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2013년 현재는 양국이 대표부를 상호 설치하고 비공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원래는 "관광 대표부"였으나 2014년 아베 신조 정부에서 정치, 무역, 경제교류 기능까지 포괄하는 "포괄적 일반 대표부"로 승격하였다. 이에 중일관계가 심히 냉각된 건 덤.


4 현대 일본과의 관계

800px-thumbnail.jpg
800px-%E8%AC%9D%E8%AC%9D%E5%8F%B0%E6%B9%BE%E8%A8%88%E7%94%BB_%E8%81%AF%E5%90%88%E5%A0%B1.JPG
824px-%E6%97%A5%E6%9C%AC%E5%8C%97%E6%B5%B7%E9%81%93%E9%87%A7%E8%B7%AF%E5%B8%82%E5%95%86%E5%AE%B6%E6%89%80%E8%B2%BC%E7%9A%84%22%E8%AC%9D%E8%AC%9D%E5%8F%B0%E7%81%A3%22%E6%A8%99%E8%AA%8C_%22Thanks_for_the_Assistance_from_Taiwan%22_outside_a_store_in_Kushiro%2C_Hokkaido%2C_Japan.jpg
20120429080309.jpg
모에선[17] 대만[18]과 일본을 캐릭터로 표현한 그림.

4.1 친일

대만과 일본은 묘하게 사이가 좋다. 식민지의 역사적 경험과 이후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의 본성인 탄압이 겹쳐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시각이 좋아진 것이다. 19세기 말 일본의 식민지 이전 청의 대접이 그리 좋았던 편도 아니고, 또 2차 대전 후에 진주한 중국 국민당 정권은 반일을 주장하면서 막상 대만 현지인들에게는 잔인한 처우를 했던 전례가 있다. 대한민국의 4.3 사건이나 5.18 민주화운동에 필적하는 대만의 2.28 사건은 1987년까진 언급 자체가 금지되었다.[19] 이에 비하면 일본의 식민지 시절은 그리 나쁜 편도 아니라고 인식하는 편이다.

현대 일본이 아닌 근대 일본, 즉 일제에 대한 인식도 한국에 비하면 좋은 편인데, 식민지 시기 자체에 대한 인식도 그렇고, 일제시대에 대만이 근대화되었다는 논리, 즉 말하자면 대만판 식민지 근대화론에 긍정하는 사람들이 한국보다 더 많다. 2015년 7, 8월에 대만 학생들이 일으킨 반과강(反課綱)[20] 시위에서 학생들의 주장들 중 하나가 위안부 관련 문제에서 "일부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다"이다. 대만에도 위안부 피해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란을 일으켰고 결국 학생들이 사과해야 했는데, 설령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 쳐도, 이것 때문에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자신의 할머니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라며 오열하는 학생까지 있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만의 친일성향은 정치적인 요소도 작용한다. 중국이라는 강대한 국가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또다른 강대국이 일본인 것.[21] 요는 일본이야말로 거리상으로나 경제력으로나 대만이 기대기에 가장 적절한 강대국이기에 중국과 직접 대치해야 하는 대만인들 입장에서 나름대로 친일인 것이다.

알다시피 대만은 일본을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게 나라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안습한 현실이다[22] 2012년 3월 11일 도호쿠 대지진 1주년 추모행사에 중국과 대만의 대표가 동시에 참석하자, 일본 정부는 중국 대표를 1층 VIP석에 모셔놓고 대만 대표를 2층 구석진 곳에 앉혀놓고는 아예 대만 대표가 행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추모행사에는 지명헌화라 하여 대지진 당시 도움을 준 각 국가와 국제기관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헌화하는 식전이 있는데 여기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이따위 천대에 길길이 날뛰는게 정상이겠지만, 대만 정부는 '고작 이따위 일로 대만과 일본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는다'며 쿨하게(…) 대응. 사실 쿨하다기보다는 나라사정 때문에 날뛰고 싶어도 날뛰지 못하는 초안습한 경우겠지만. 힘없는 나라의 설움이라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성금을 200억 엔이나 냈는데 이런 푸대접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논란이 되었고, 그래서 정권이 바뀐 2013년부터는 지명 헌화 명단에 중화민국이 들어갔으며 국가에 준하여 예우하고 있다. 물론 중국에서 엄청나게 반발했고 이후로 중국은 대지진 추모행사에 불참하고 있다.

2007년 여름에는 리덩후이 전 총통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초대형 사건이 있었고, 아예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한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사실 리덩후이 전 총통은 일제의 식민통치 시절을 겪은 대만 본성인이며, 창씨개명까지 했었다. 중국 국민당 내의 적게 존재하는 친일인사 겸 대만 독립 지지세력의 리더이기도 했고, 결국 그 때문에 2000년 대선에서 같은 본성인인 천수이볜의 편을 은근슬쩍 들어 이후 당에서 축출되었다. 그렇기에 중국을 싫어하는 일본 우익들과의 교류도 많고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찾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입국 비자 내지 말라고 일본을 압박하지만 일본이 그걸 들어줄 리가...

대충 대만에서 친일파는 반중국 세력인 민주진보당 지지자들이 많다. 대만독립을 꿈꾸는 그들에게는 국민당과 중국 대륙을 싫어하고 섬나라인 대만이 독립해서 일본과 가까운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득 앞에서는 전혀 아닌지라 AIIB에 가입 신청을 하며 일본에게 배신을 때렸다. 입으로는 친일이라고 하지만 더 큰 이득 앞에서는 중국이 주도하는 AIIB이라도 어서 가입하여 이득을 취하자 이러니 별 수 없는 노릇. 다만 이것을 추진한 현 정권이 반일 입장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중국 국민당 정권이고 중국과의 경제적 협력을 중시하기 때문인 것도 있다. 그리고 AIIB는 영국 등 서방 유럽국가들도 가입했기도 해서 합류가 불가피했다.

2016년에 반중, 친일 성향 민진당차이잉원 후보가 대만 총통에 당선됨으로써 일본과의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차이잉원 당선자는 아베 신조 총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고 아베도 대만통으로 유명한 만큼 일본이 대만을 중국 견제에 이용할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도 대만-일본-한국으로 이어지는 대중 포위망을 만들수 있다. 차이잉원은 한국과의 관계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발언.

예상대로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서도 한발짝 물러서고 위안부에 대한 태도에서도 "자발적인 것일 수도 있다"고 시인하는 등,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대만은 일본서브컬처 소비도 상당한 편이고 이에 코믹 마켓을 본딴 팬시 프론티어라는 대형 동인 행사가 나와 코믹 마켓 다음의 헬게이트가 되기도.(...) 코믹 마켓팬시 프론티어 간 상호 교류도 많은 편이다.

4.2 반일

2012_Anti-Japan_demonstrations7.jpg
중국에서 볼법한 대만의 반일 시위 장면

반대로 중국과의 통합, 또는 1국가 2체제를 주장하는 국민당을 지지하는 쪽은 반일정서가 상당수 남아있는 편. 국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자체가 일본의 중국침략을 몸소 겪고서 대륙에서 1949년 이후에 넘어온 사람들이기에 반일정서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23] 센가쿠 열도 문제로 일본을 압박하고 있는 대만 정치인들도 주로 이쪽 사람들. 그리고 센카쿠 열도 문제로 종종 국내 언론으로 보도되는 대만 극우들도 이러한 사람들로 센카쿠 열도에서 일본 극우랑 배로 들이박아 양쪽이 서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이다.

대만 충렬사같은 절을 가보면 대만 역사에서 일본에게 지배받던 와중에 일본에 맞서 싸우던 이들을 기리는 공식 행사도 한다. 충렬사 벽을 가보면 항일전투 및 일본군이 자행한 시디그 족 학살 사진까지 전시되어 있기에 대만을 친일국가라고 환상가지고 온 일본인들을 경악하게 만든다.사실을 전시하는데 어쩌라구 물론 이는 국민당이 집중적으로 하게 한 영향이 크지만.

이렇듯 반일적인 정서를 가진 대만인들도 공존하다 보니까, 2차 대전 당시 한국이나 여러 식민지 나라처럼 징용되어 죽어간 대만 젊은이들도 꽤 많은 점을 따져들면서 맹목적인 친일을 비난하기도 한다. 대만 측 기록에 의하면, 소수 원주민만 해도 12만 명이 강제 징용되어서 절반이 돌아오지 못했으며, 한족들도 100만 명 이상이 징용되어 40만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당연히 이들에 대한 피해보상도 사죄 같은 것도 아예 없기에 대만도 이 점으로 일본에게 따져든다. 그리고 맹목적인 일뽕이 아닌 대만 친일들도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일본을 두둔하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남경 대학살같은 학살사건도 대만에서도 일본을 비난한다. 이러다 보니 이런 문제에 대해선 대만이라고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진 않는다.

또한 일본 극우들이라고 해서 대만만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고 대만 출신의 노골적인 혐중, 혐대만 작가를 고용하여[24] 혐중 또는 혐대만 책을 써서 식민지배를 미화하는터라 이에 대해 대만 우익들이 반발하기도 한다. 공자 식인론을 지껄이던 황문웅이 대표적으로 당연히 대만에서도 그러한 이들은 국적 박탈에 입국금지를 하고 있다.

5 관련항목

  1. 요즘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일컫는 말로만 쓰는 게 보통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중화민국 내에서도 중화민국을 한 글자로 줄일 때는 中을 사용하기 때문.
  2. 일본에서는 中을 중국, 華를 중화민국의 준말로 사용하는 용례가 있다. 그래서 일본 정부와 국민당이 맺은 '타이베이 조약'(Treaty of Taipei)은 일본에서 '일화화평조약'(日華和平條約, 중화권에서는 중일화평조약中日和平條約이라고 함)이라고도 불리운다.
  3. 대체로 1949년 이전의 관계는 중일관계의 범주에 넣는 편이나,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대만-일본 관계가 곧 중일관계이다(...).
  4. 본성인 출신이 주를 이루었던 리덩후이 정권이나 대만 독립을 지향했던 천수이볜 정권은 예외. 이들은 위에서 밝힌 이유 때문에 친일 성향이 강하다. 그리고 반일 성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중국 정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일본에 대한 시각이 온건하다.
  5. 당장 중일수교 직후 중화민국 대사관을 강제 폐쇄하고 주재원들을 공권력을 투입하여 추방했다. 흠좀무. 국제행사 참가 차 방일한 대만측 인사들을 푸대접 했다는 소문도 있으니(...)
  6. 아베 신조는 대표적인 친대만파이며 2010년 리덩후이의 초청으로 대만에 방문하여 충렬사에 참배하였으며 그 때에도 대만은 일본의 친구라고 발언하였다.
  7. 도호쿠 대지진 물자 지원에 감사하다는 표시로 이렇게 말했다. 그 이후에도 틈만 나면 수시로 대만은 우리 일본의 친구라 강조하고 있다.
  8. 성금으로 대략 200억 엔이었다.
  9. 사족이지만 마찬가지 맥락에서 일본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식민지 통치를 할 수 있는 문명국임을 보이기 위해 러일전쟁 직후의 거덜난 살림 치고는 조선 통치에 많은 노력과 투자를 했고, 해외에 '조선이 식민지 통치 덕분에 이렇게 나아졌다'는 식의 선전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서양인들의 기록에서도 일제의 조선 통치 덕에 조선이 발전하고 있다며 일제의 조선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 물론 당시 서양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제국주의는 '미개한 비서구인'들을 '백인'들이 '교화'해야 한다는 의무감같은 것으로 정당화되었고, 구미 열강과 비슷한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 있는 일본의 통치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됨을 감안해야 한다.
  10. 일제 내각은 조선 총독부 역시 대만 총독부처럼 장차 내각의 지휘 하에 두고자 했다. 1920년대에 민간인도 조선 총독을 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문화통치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던 셈인데, 조선 주둔 일본군의 반발도 있고 지정학적 중요성도 있고 해서 결국 민간인 총독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11. 조선이야 광복군처럼 중국으로 도망쳐서 임시정부도 세우고 독립운동도 할 조건이 되었지만 대만은 영토도 작은데다 섬나라라서 한번 무자비한 진압을 하기 시작하면 도망칠 수 없는지라 꼼짝없이 잡혀 죽는 수밖에 없었다.
  12. 타이완 총독부는 아편 흡연에 총독부의 허가가 필요한 면허제를 실시했고, 아편을 전매했으며 가격을 슬금슬금 올려버리는 방식으로 타이완에서 아편 중독 문제를 해결했다.
  13. 출처는 당시 동아일보 기사다. 그런데 관련 논문을 보면 동시기에는 조선이 5.7엔, 일본이 그 6배가량 되었다고 한다. 다만 1인당 소득을 보면 대만이 조선의 배는 되었다는 게 일관적으로 나타난다.
  14. 중국식으로 읽으면 경성제국대학마냥 타이베이제국대학으로 읽지만 일본이 세운 관계로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공식 명칭이다. 한국에 소재한 대학이 아니므로 공식명칭을 따른다.
  15. 이 법을 만든 사람이 저 위의 유능한 민간인 관료 고토 심페이이다(...).
  16. 이 때 일본은 반대표를 던졌다. 당시 총리 사토 에이사쿠가 반중 친대만 성향이었다. 한국은 물론 축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UN 회원국조차 아니었으므로.(...)
  17. 사실 국가를 표현할 때 저런 식으로 그 나라의 전통 의상을 입은 캐릭터가 나오는 건 꽤나 자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림체가 다소 덕후 귀여워서 그렇게 느껴질 뿐.
  18. 대만 캐릭터의 옷은 대만 고산족 원주민의 전통의상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정보를 아는 위키러가 있다면 추가바람.
  19. 이제는 말할 순 있고 위령비도 세워졌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조사와 진상파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 참극을 알린 건 대만 영화 비정성시가 유명한데, 이 영화 개봉하여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 금사자상을 받으며 알려질 때까지도 이 참극을 해외에선 모르던 이들이 많았으며 대만에서도 이걸로 알게 된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20. 마잉주 정권 하에서의 교과서 개정안을 반대하는 운동. 대만의 중국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역사 및 반일적인 내용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21. 일본의 경우 서방 국가에 가깝고 친미 성향이 강하기에 중국과 대립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한국의 경우도 서방 국가로 분류되고 친미반공 성향에다가 나름 괜찮은 경제력을 지녔지만 일본 정도의 국력을 지니지는 못한 데다가, 일본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한국의 경우는 정치적으로는 통일 문제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해야 하는 편이다. 중국 역시도 한국은 일본보다 공감대도 많이 겹치고 유사시 일본의 대체제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기에 좋은 관계가 요구되는 나라이다. 괜히 한국이 안중근 의사 비석 세워달라고 했을 때, (비록 당시 센카쿠 열도 때문에 일본과의 관계가 최악인 덕을 본 것도 있지만)중국이 기념관으로 응답한 게 아니다.
  22. 당장 화교항목에서 서술한 프랑스와 일본이 중국과 수교했었을 당시의 상황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중국과 수교한 나라의 상당수는 자연적으로 대만과 단교를 할 수 밖에 없다. 일방적인 짝사랑
  23. 국민당은 필요에 따라 반중 정책을 친중정책으로 바꿨지만 반일만큼은 바꾸지 않고 있다.
  24. 김미령이나 황문웅같은 이들, 한국으로 치면 김완섭이나 고젠카 같은 이들이다. 일본 우익사관/학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