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次 遼東 征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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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년 6월 계축일 ~ 1370년 11월 4일 |
요동성전투 | |||
날짜 | |||
공민왕 19년(1370년) 11월 4일 | |||
장소 | |||
요동성 (현재 랴오닝 성 랴오양 근처)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고려군 | 원나라 잔병 | |
지휘관 | 이인임(李仁任) 이성계(李成桂) 지용수(池龍壽) 양백안(楊伯顔) 임견미(林堅味) 정원비(鄭元庇) 최혁성(崔奕成) 김용진(金用珍) 이구(李玖) 최공초(崔公招) 홍인계(洪仁桂) 배언(裴彦) | ↓기샤인티무르 (奇賽因帖木兒) ←이원경(李原景)[1] ◎ 김백안(金伯顔)[2] ◎송보리(松甫里) ◎법독하(法禿河) ◎아상개(阿尙介) ◎합자피두(哈刺疲豆) ◎덕좌불화(德左不花) ◎고달로화적(高達魯花赤) ←처명(處明) | |
병력 | 불명[3] | 불명 |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
결과 | |||
요동성을 445년만에 탈취함. | |||
기타 | |||
우리나라 역사 마지막 요동 점령시기. |
목차
1 개요
공민왕 때 있었던 고려의 대외원정. 한국사에서 마지막으로 요동(만주)땅을 공략하고 실제 점유했던 시기이기도 하다.[4]
제1차 요동정벌이라는 표현 외에도 동녕부 원정이라는 표현도 쓰인다. 정확히 고려가 쳐부순 세력은 요동 동녕부에 웅거했던 기사인티무르 세력 뿐이고 이외의 요동군벌들은 존속했기 때문에 요동 지역 전체를 점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나하추, 에센부카, 유익 등)
2 당시 시대 상황
원나라는 1348년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1351년 홍건적이 봉기하는 등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해였던 원나라는 내부 반란 진압에 힘을 쏟기 위해 외부보다 내부에 신경을 더 쓰기 시작했다. 요동의 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예전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이러한 상황은 고려로서는 자주성을 되찾기 위한 적기가 찾아 온 것이 마찬가지였다.
한편 12살에 원나라로 끌려가 11년간 붙잡혀 있던 강릉대군은 당시 고려와 원나라 정세를 비교적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형 충혜왕은 온갖 병크를 저질러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원나라에 끌려가 독살당했고, 자신보다 어린 조카들인 충목왕,충정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곳곳에서의 내부 반란만으로 원나라가 붕괴될수도 있는 그런 긴박하던 상황도 지켜보고 있던 강릉대군은 1351년, 22살의 나이로 볼모를 마치고 고려에 돌아와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고려의 중흥을 위해 "반원"을 기치로 내건 공민왕이다.
3 공민왕, 야심을 품다
令宰樞至吏胥 人備弓一 矢五十 劒一 戈一 閱于崇文館。재추(宰樞)[5]로부터 이서(吏胥)[6]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원들에게 분부하여 활 1개, 화살 50개, 검(劒) 한 자루, 과(戈)[7] 한 자루를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崇文館)[8]에서 사열했다.
ㅡ《고려사》 권38 공민왕 원년(1352년 윤 3월)
공민왕은 1351년,즉위 직후 시행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군사검열이었다. 이는 즉위 전부터 요동 탈환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공민왕의 반원정책과 맞물려 있는데 공민왕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원세력이 버티고 있던 요동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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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재위초 고려의 영토와 주변 상황[9] |
요동 정벌에 대해 재위 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압록강 건너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파사부 공략이었다. 1357년, 공민왕 6년 6월에 인당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
癸丑。印璫引兵渡鴨綠江 攻婆娑府等三站 破之。계축일. 인당(印璫)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10] 등 세 참(站)을 공격해 격파했다.
원은 요동의 주요 도로마다 역참을 설치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파사부였다. 이곳은 러일전쟁당시에도 만주 진출을 노리던 양국이 충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만주 진출시 가장 먼저 점령해야 될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후 명나라가 건국한 직후인 1368년,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이는 공민왕의 본심이 아니었다. 요동은 명나라와 원나라 모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명나라는 내부 친원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빴고, 원나라는 더이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최영,이성계,정도전등 고려의 정치적 주역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370년 1월 겨울. 고려는 파사부에 이어 요동성으로 가는 주요 요충지인 고구려의 첫 수도, 오녀산성을 공략한다.
4 요동성을 정벌하다
4.1 오녀산성 공격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으로 추정되는 오녀산성(우라산성). 저 성벽으로 보이는건 절벽이다. 저 위에 성을 쌓았다. |
우리 태조가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12]을 넘어 6백여 리를 진군해 설한령(雪寒嶺)[13]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7백여 리를 행군해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이날 저녁 하늘에 자줏빛 기운이 가득 찼는데 그 빛줄기가 모두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 서운관(書雲觀)[14]에서 그것을 두고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보고하자 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내니 하늘에서 응답한 것이 틀림없다." 고 기뻐했다. 당시 동녕부(東寧府)의 동지(同知) 이오로테무르(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진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亏羅山城)으로 이동해 들어간 다음 험한 지세에 의지해 저항하려 했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당도하자 이오로테무르가 와서 응전해 보다가 잠시 후 무장을 해제하고 큰 절을 올리며, "제 선조도 본디 고려인이니 저도 고려의 신하가 되겠습니다."고 하면서 3백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이오로테무르는 뒤에 이원경(李原景)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농성한 채 계속 저항해오므로 아군은 성을 포위했다. 마침 태조가 활이 없는지라 종자의 활로 편전(片箭) 70여 발을 쏘았는데 모두 적군의 면상을 명중시켰다. 이에 성안에 있던 군사들은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고안위는 처자를 내버려둔 채 밤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와 도주해 버렸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성을 나와 투항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여러 성들도 모두 투항해 오니 1만을 넘는 민호가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노획한 소 2천여 두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려주자 수많은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며 물결같이 귀순해 왔다. 이에 따라 동쪽으로 황성(皇城), 북쪽으로 동녕부, 서쪽으로 바다, 남쪽으로 압록강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서 적이 일소되었다.ㅡ《고려사》 공민왕 19년 봄 정월 기사.
이때 동원된 병력은 총 1만 5천명이었는데 서북과 동북의 병사는 각각 보병 9,000명,기병 600기/보병 4,700명, 기병 200기에 불과했고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친위병력은 16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중앙군 포함한 병력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북면 → 함흥 → 강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오녀산성[15]을 쳤다. 훗날 용비어천가에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할때 활약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을 공략할때 이성계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우리 태조가 편전 70발을 쏘아 모두 얼굴에 맞추었다.ㅡ《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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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전.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보통 활솜씨로는 사용하기가 엄두도 못내는 무기다. |
이성계가 난전 속에서 본인 활도 아니고 종의 활을 빼앗아 쐈는데 70발 모두를 적의 머리에 구멍을 내버렸다. 영점 안잡힌 총으로 사격 만발 이러한 초인적인 포스를 풍긴 이성계의 활약으로 성을 함락시키고 1만호가 넘는 사람들이 투항했고 그 결과 고려 정벌군은 파사부와 우리산성이라는 두개의 주요 길목을 점령에 성공하며 요동성 정벌에 한발 더 다가섰다.
4.2 기사인테무르[16]의 반란
이성계의 정벌이 있은후 기사인테무르는 고려출신 벼슬아치인 김백안과 손을 잡고 요동일대에 남아있던 원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동의 동녕부를 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기사인테무르는 자신의 아버지 기철의 원수를 갚고자 고려 북쪽을 침공했다. 고려는 이들의 공격을 막아낸후, 곧바로 그들의 본거지인 요동성으로 칼끝을 돌렸다.[17]
4.3 요동성을 공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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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0년, 10월 공민왕은 요양성(지금의 랴오양)에 남아 있던 기샤인테무르를 잡아족치기 위해 짓밟아 버리기 위해서 원정군 총 책임자인 도통사 시중 이인임을 필두로 동북면원수 이성계, 서북면도원수 지용수, 서북면 부원수 양백안, 안주상만호 임견미가 이끄는 군대가 요동으로 향했다. 공민왕의 꿈이자 고려의 바람인 고토회복의 시작, 요동탈환이 시작된 것이다.
丁亥。我太祖與池龍壽等 至義州 造浮橋 渡鴨綠江。11월 2일. 우리 태조가 지용수 등과 함께 의주(義州)에 도착하자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10월 30일경 압록강에 만호 정원비, 최혁성, 김용진이 만든 부교는 말 세필이 한꺼번에 지나갈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였다고 전해지는데 전군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는데만 3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때 빨리 건너려다가 죽은 군사도 있었다고 기록 되어있다.
11월 2일, 압록강 도하를 마치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치고 번개가 내려치자 병마사 이구가 병사들에게 "용이 움직일 때면 반드시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는 법이요. 지금 상원수(上元帥)의 이름이 용(龍)인데[18] 그분이 도강하는 날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리니 이는 전투에서 승리할 조짐이 틀림없소."라며 병사들의 동요를 막았다.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遼城)까지의 거리가 이틀간의 노정(路程)이므로 치중(輜重, 군수품(軍需品))을 남겨 두고, 7일간의 양식만 가지고 출발하였다. 비장(裨將) 홍인계(洪仁桂),최공철(崔公哲)[19] 등으로 하여금 경기(輕騎) 3천 명을 거느리게 하여 요성에 나아가 습격하니, 저들이 우리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더불어 싸웠는데, 대군(大軍)이 잇따라 이르자, 성안에서 바라보고는 낙담하였다.ㅡ《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
도강후 요동성 동쪽 200리(약 80km) 지점인 나장탑에 도착했는데 이를 계산하면 당시 고려군은 하루에 100리씩 행군을 한 셈이다.[20] 그리고 기적의 행군으로[21]나장탑에 고려군 주둔지를 설치한후 지용수는 비장 홍인계, 최공초등에게 기병 3,000기를 주어 요동성을 공략하게 하고 본대는 뒤이어 따라가기로 했다.[22] 그리고 단순한 공격뿐 아니라 심리전을 펼쳤는데 "요동땅은 원래 우리땅이었고 요동백성은 우리 백성인데 이제 되찾으러 왔다. 다만 투항하면 봐줌" 이라는 방을 요동성 곳곳에 띄웠다.
요동성 복원도 |
요동성에 성주는 기샤인테무르였는데, 기샤인테무르는 기병 3,000명을 상대하기위해 공성을 하지 않고 병력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왔으나 고려군 본대가 도착해 싹 쓸렸다(...).
이때 이성계의 무용담이 《용비어천가》과 《고려사》지용수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기샤인테무르가 이끌고 나온 장수중에 처명(處明)이라는 자가 있는데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잘싸우자 이성계가 몽골어를 할 줄 아는 이원경에게 항복 권유를 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하자 이성계는 활을 들어 처명의 투구를 날려버렸고 두 번째 권유에도 거절하자 처명의 허벅다리를 맞춰버렸다. 이에 처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고 이성계는 놔줬다. 상처를 치료하고 돌아온 처명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걸었는데 이원경이 세번째 설득을 했다. "이번에 말에서 안내려오면면 머리를 맞추겠다" 결국 처명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며 이성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는 이야기. [23]
처명이 항복하자 어떤자가 성위에 올라와 "우리는 항복하려고 했는데 성주가 강제로 싸우라고 우릴 몰아붙이고 있다. (나를 비롯한 일반 백성들은 싸울 의도가 없으니)공격하면 거져 먹을수 있을 것" 이라고 소리쳤으며 이에 고려군은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己丑。進襲遼城 急攻拔之。11월 4일. 요성(遼城)까지 진격한 아군이 적을 급습해 함락시켰다.
ㅡ《고려사》 공민왕 19년 11월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또 나무와 돌도 섞이어 쏟아져 내렸으나, 우리 보병(步兵)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다가가 급히 공격하여 드디어 함락시켰다.ㅡ《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
반나절 간의 치열한 접전끝에 1370년 11월 4일, 발해가 멸망한지 445년만에 고려는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다. 아쉽게 기샤인테무르를 잡진 못했지만 그의 측근인 김백안을 사로잡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후 공민왕은 동녕부에 "우리가 요동을 친 건 기샤인테무르가 감히 원나라 황제의 이름을 팔아서 사리사욕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응징한 것이다. 그리고 요동은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 따지지 말라"라는 내용을 요지로 한 공문을 보냈다. 그후 다음 달인 12월에 강계만호부에 지시해서 고려로 귀화할 시 요동에다 땅을 주고 고려의 백성과 똑같이 대하도록 했다.
정사일. (중략) 또 강계만호부(江界萬戶府)에 지시해 요심(遼瀋)의 지역민에게 다음과 같은 방을 붙여 설득하게 했다. "요심은 원래 우리나라 땅으로, 대군이 또 출정하면 선량한 사람까지 피해를 입을까 우려된다. 압록강을 건너와 우리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 자는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주어 저마다 생업에 안착하게 해 주겠다."ㅡ《고려사》 공민왕 19년 12월 정사일.
그후 요동에 있는 원나라 세력을 물리치면서 동시에 그 지역에 살던 고려인 세력의 귀부를 받아들여 고려 세력으로 흡수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요양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만...
5 어처구니 없던 실수, 그리고 퇴각
성을 점령한 그날 저녁에 부대를 성의 동쪽으로 옮긴 후 나하추와 에센부카를 설득하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5일. 밤에 붉은 기운이 군영에 들어와 불처럼 피어오르자 일관이었던 노을준이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닥쳤으니 진지를 옮겨야 무사할 것 같다고 건의했으며 그 건의가 받아들여져 석성[24]의 고가노를 공격하러 온 배언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철수했다.
初城陷 我軍火倉廩殆盡 由是 軍中乏食。성이 함락되었을 때 아군이 창고에 불을 놓아 거의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군영 내에 식량이 모자랐다.
ㅡ《고려사》지용수 열전
처음에 성이 함락되자, 우리 군사가 창름(倉廩)을 거의 다 불질러 양식을 취할 데가 없었다.ㅡ《동국통감》 권 49 고려기 공민왕 19년
이 전투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성을 점령하던 전투를 벌이다가 실수로 성 내의 군량고에 불이 붙어 군량이 죄다 타버렸다는 점이었다. 가져온 식량이 떨어져 가는 가운데 고려 본국에서도 보급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래서 퇴각하는 도중에 소와 말을 잡아 먹었으며 부대는 제대로 대오를 갖출 수가 없었고 그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거기다 지용수는 장수들이 일직선으로 이동하자는 말을 쌩까고 빙빙 돌아가는 해안선을 따라 움직였는데 이런 것들이 더욱 부대내 불만을 키웠다. 결국 지용수도 이를 인식했는지 해변을 따라 이동하던 것을 지름길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이때 추격을 대비해서 야영을 할때는 반드시 변소와 마굿간을 만들어 놓게 했다. 그덕에 나하추가 이틀간 추격을 해왔을때 "변소와 마굿간을 만든것으로 보아 대오가 질서정연하니 습격하는 것은 무리" 라며 퇴각했다.
11월 9일, 송참에 이르러서 나천서(羅天瑞)가 곡식 수백석을 가져다 주어 군사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투당시 전사자보다 복귀시 추위와 굶주림에 죽은 병사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후 5개월후인 1371년 3월, 공민왕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했는데 정몽주가 돌아간 후 홍무제는 "고려가 명나라에서 첩보활동함. 정조사(正朝使)로 온 사신은 한 달이면 올 거리를 4개월에 걸쳐서 명나라를 활보한 후에 북경에 도착했는데 이게 존나 의심스러움. 중국어를 할줄 모른다길래 그놈을 손발 묶어 물속에 던져놓더니 살려달라며 한어(중국어)로 살려달라고 빌기도 했는데 그놈이 꼰지를 바로는 "올때는 육로로 왔고 갈때는 해로로 갈껍니다" 라고 했는데 이건 산동일대를 정탐하기 위해서임." 이라고 말을 하며 고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내비쳤다. 심지어는 "고려가 우릴 치게 만들자, 그러면 우리가 배 8~9척을 건조해서 고려를 3개월 만에 조질수 있음" 이라는 과격한 발언까지 했을 정도였다.
다만 공민왕은 이후 "동녕과 요양이 명나라에 귀화를 안했으니 야만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방어해야한다" 며 결국 요동을 내어주고 그나마 있는 우리땅을 잘 지키자라는 식의 발언을 하며 요동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
어쨋든 1차 요동정벌이 시행된 다음해인 1371년(명태조 4년)에 명나라는 북원에 있던 요양행성을 점령하고 요동 서남부에 정요위와 요동도사를 설치했다.
당시 중국인들이 고려인은 성을 빼앗고 지키는걸 아주 쉽게 한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뒤로는 한반도의 영향력이 요동에 미치는 일은 없었다.[25]
6 그 이후의 요동정벌
제2차 요동정벌은 고려 우왕 때 최영의 주도로 하려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이다. 그리고 조선 건국 후 이성계가 즉위하고 정도전의 주도 하 제3차가 또 있을 뻔 했지만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무산되었다. 1395년 명태조가 조선이 요동을 침략하려는 술수를 부린다며, 조선정벌을 거론하기도 했을 정도로 위협적인 군사활동이었다.
7 평가
중도에 너무 어이없게 끝나버려서 그런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요동까지 점령했다는 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군량고를 불태우지 않았더라도 당시 고려가 요동을 점유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회의적인 시각이 크다. 일단 고려의 사정이 어렵다보니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데, 골칫거리였던 나하추도 건재했고 여진족 문제도 있으며 왜구들이 등뒤를 노려대는 판이었다. 그래서 공민왕이 요동을 포기하자는 발언도 했었고.
요동 정벌 후에도 남쪽의 왜구들은 굉장히 골칫덩어리였다. 고려 말에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주요 병력들이 내려가는 상황도 벌어졌기에 요동성을 유지할만한 병력을 파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6여년 후엔 왜구들 때문에 개경으로 천도를 하자는 주장도 나왔을 정도. 실제 이성계도 2차 요동정벌 당시 왜구의 준동을 요동공략불가의 이유중 하나로 들었다.
후세의 학자 정약용도 '요동을 소유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우리 국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그거 방어하느라고 백성들의 삶은 몇배나 더 고단해졌을 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해당 전문은 다음과 같다. #
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제 12권 요동론(與猶堂全書 第一集詩文集第十二卷 '遙東論') 고구려 때는 강토를 멀리 개척하였다. 그 북부는 실위(室韋)에 접했고, 그 남부는 개모(蓋牟)(지금의 산해관(山海關) 이동이 모두 그 땅이다)에 이르렀다. 고려 이래로부터 북부남부는 모두 거란이 차지하였고, 금, 원 이후 다시는 우리 것으로 되찾지 못하였고 압록강 일대가 천연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우리 세종, 세조 때에 이르러 마천(摩天) 이북으로 천리의 땅을 개척하고 육진을 바둑돌처럼 설치하였으며, 밖으로는 창해에 닿았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되찾지 못하였다. (다른 여러)논자는 그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나는 요동을 수복하지 못한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요동은 중국과 오랑캐가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여진(女眞)은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중국에 갈 수 없고, 선비(鮮卑)와 거란(契丹)도 요동을 차지하지 못하면 적(敵)을 제어할 수 없고, 몽고(蒙古) 또한 요동을 거치지 않고는 여진과 통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성실하고 온순하여 무력을 숭상하지 않는 나라로서 요동을 차지하고 있게 되면 그 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요동을 차지하고 있을 경우, 서로 화친한다면 사신(使臣)의 접대에 드는 비용과 병정(兵丁)을 징발하여 부역시키는 일 때문에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서로 사이가 좋지않게 된다면 사면에서 적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므로 온 나라의 힘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세종과 세조때는 대명이 북경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과 심양의 사람들이 기내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차지할 수 없었다. 설령 요동과 심양이 오히려 여러 오랑캐에 속했다 해도 이조(二祖)께서 이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어째서인가? 척박한 황무지로 이득이 없는 땅을 얻고 천하에 적을 늘리는 행동은 영명한 군주라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당 때에도 오히려 주, 진 때의 옛 일을 살펴 도읍을 관중에 정한 후에 위세를 얻어 천하를 제어하였다. 고로 중국의 지략가들이 논한 바는 오로지 동서 이경(낙양과 장안)의 우열뿐이었다. 대명의 성조 문황제는 세상을 뒤덮을 뛰어난 지략이 있었으나 강성한 몽고와 여진을 멀리서 제어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마침내 대명【부】(大名【府】)(북경(北京)을 의미)에 귀속시켰다. 이후 중국의 주인은 이를 바꾸지 않았고 대명부는 중국의 도읍이 되었다. 이러한즉, 요동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었겠는가? 또 우리나라의 지세는 북으로 두 강을 경계로 삼고,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강역의 형태가 혼연히 천혜의 요새이니 요동을 얻는 것은 반대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것이다. 어찌 유감으로 여기겠는가? 그렇지만 진실로 나라가 부강하고 병사가 강성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다툴 뜻이 있고 한걸음이라도 중원을 엿보려 할 경우에는, 먼저 요동을 얻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어쨌든 서로 요동을 얻고 동으로 여진을 평정하고 북으로 경계를 넓혀 흑룡강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우측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다. |
그러나 공민왕의 1차 요동정벌이 전혀 의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후 고려말~조선초 우왕, 최영, 이성계, 정도전 등 당대 권력자들의 요동경락에 대한 의욕과 실행이 계속 이어지게 한 중요한 단초가 되었고, 결국 요동은 장악하지 못했지만 대신 압록강-두만강 일대의 영유권은 확실하게 인정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대의 고조선과 고구려의 고토 회복 의지에 있어 가장 실천적 노력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 ↑ 몽골식 이름은 이우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이어로첩목아. 동녕부에서 싸우다 고려에 투항했다.
- ↑ 원나라 승려가 통제원의 여종과 간통해서 낳은 인물. 원나라 장군의 위치에 올랐으나 원나라 전투때 포로가 되었고 회군한 고려군이 안주(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도달했을때 김백안이 무례한 말을 해서 지용수가 죽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 ↑ 요동성 공략시 9만 5천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출처불명이다. 오녀산성 공략시 1만 5천여, 파사부 공략시 병력도 알 수 없다. 다만 꽤 많긴 했는듯.
- ↑ 물론 '시도' 만이라면 대한제국의 간도 관련 시도가 마지막.
- ↑ 재상
- ↑ 아전
- ↑ 창
- ↑ 고려시대 왕의 직속기관이다.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불렸지만 성종 14년에 홍문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문신중에 학식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로 임명했다. 충렬왕 24년에 숭문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
- ↑ 여기 지도에서는 압록강을 살짝 넘어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압록강이 경계선이었다.
- ↑ 지금의 랴오닝성 단둥시 일대. 고구려대에는 구련성(九蓮成)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
- ↑ 원나라가 북쪽으로 쫒겨난후 생긴 북원은 1388년 멸망한다. 명나라 건국후인 1368년에 곧장 멸망한 게 아니다.
- ↑ 함흥에서 장진으로 가는 교통로이며, 신라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다.
- ↑ 평안북도 강계군 용림면과 함경남도 장진군 서한면 사이에 있는 고개
- ↑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
- ↑ "우라산성", 혹은 "올라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우라는 여진어로 "강"을 뜻하며 올라는 만주어로 "강"이란 뜻이다.
- ↑ 반란을 시도하다 처형당한 기철의 아들로, 자기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고려를 쳤다가 이성계에게 역관광을 당하고 도망쳤다.
- ↑ 이후 동녕부에 보낸 공문에서 "기샤인테무르가 건방져서 우리가 손봐준거임"이라는 글이 씌여진 것으로 보아 기샤인테무르는 좋은 핑계거리 였을 뿐인걸 알수가 있다. 다만 공민왕은 명나라와 최대한 충돌을 피하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샤인테무르 핑계를 대고 요동정벌에 나선것이었다.
- ↑ 상원수 지용수(池龍壽)를 말한다.
- ↑ 《고려사》에는 최공초(崔公招)로 기록되어 있다.
- ↑ 《고려사》 지용수 열전, 《고려사절요》,《용비어천가》에서는 이틀 거리라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병감》에서는 3일 거리라고 한다.
- ↑ 하루에 40km씩 4일간 행군하는 거리를 이틀만에 주파했다는 소리다. 천리행군이 400km를 6일에 걸쳐서 진행한다는 것만 봐도 뭐 3일동안 200km를 걷는다는 소린데,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은 하루를 더 앞당긴 셈.
- ↑ 이때 일부병력은 만호 배언(裴彦)에게 주어 석성에서 농성중인 요동성평장 고가노를 저지토록 했다.
- ↑ 후에 처명은 황산 대첩 때 이성계가 고립되어 위기에 처하자 죽기 살기로 싸워 이성계를 구해냈다.
- ↑ 지금의 선양시 부근
- ↑ 참고로 1, 2차 나선정벌 당시에는 요동 반도보다 훨씬 북쪽인 흑룡강까지 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