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왕산

대한민국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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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사에서 바라 본 주왕산 기암. 보통 주왕산을 소개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구도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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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는 . 높이는 해발 721m.[1]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악기의 주왕산 일대는 거대한 호수였다고 한다. 호수의 바닥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육화되었는데 약 7천만년전 이 퇴적암층을 뚫고 엄청난 규모의 화산 분화가 있으면서 뜨거운 화산재가 대량으로 쌓이고 이 화산재 주변에 용암이 응집하면서 거대한 암벽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화산폭발은 최소 9차례 이상 있었다고 하며 이후 침식과 풍화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주왕산에 폭포가 많은 이유는 주왕산의 하천 기반을 이루는 암석이 풍화와 침식에 대한 저항이 매우 강한 인산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대로 침식이 되지 않아 주행이 복잡해지고 협곡은 깊어지면서 결국 폭포를 많이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질학적 특성은 주왕산의 바위, 폭포, 계곡, 산세를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2 주왕산이라는 이름의 기원

"주왕"산 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주도(周鍍)는 스스로를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당나라 수도 장안을 공격했으나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곽자의(郭子儀)장군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망쳐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사람을 주왕(周王)이라고 한다.

주왕은 반란이 실패하자 멀리 한반도의 석병산[2]으로 피신했다. 그는 산입구가 되는 주방천 협곡에 산성(자하성)을 쌓고 재기를 노린다. 나중에 주왕이 신라 땅에 숨어 들어간 것을 안 당나라에서는 그를 잡아달라고 신라에 요청했다. 신라는 마일성 장군의 형제들을 필두로 진압군을 이곳 석병산으로 보내 주왕과 그의 군사들을 격퇴시켰다.

신라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주왕은 폭포수가 입구를 가리고 있는 주왕굴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몰래 세수를 하러 나왔던 주왕은 그만 마장군의 낚시에 걸려 생포되어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마장군의 화살과 철퇴를 맞고 최후를 맞이했다고도 전한다.

주왕이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맞아 흘린 피가 주방천을 물들인 뒤 붉은 꽃망울을 피웠다는 꽃이 주왕산 수달래이다. 그래서 수달래는 주왕의 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장굴은 주왕이 갑옷과 무기를 숨긴 곳으로 전해진다. 기봉은 주왕이 적과 대치할 때 대장기를 세웠다고도 전해지고, 군량미처럼 보이기 위해 낱가리를 돌렸다고도 전해진다. 주왕산 초입의 대전사(大典寺)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을 위해 고려 태조 2년 보조국사 지눌이 세웠다고 전해지[3], 백련암은 주왕의 딸 백련공주의 이름을 딴 암자라고 한다. 연화굴은 백련공주가 성불한 곳으로도 전해지며 주왕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으로도 전해진다. 주왕굴 앞의 주왕암은 주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외에 신라 시대의 원성왕(김경신)과 왕위 계승을 다투었던 김주원이 당시 이 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농성하여 그 이름을 따 주왕산이라 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설은 제1폭포를 오르다보면 급수대를 만나는데 그 급수대의 안내판에 적혀 있는 내용에 따르면 김주원(金周元)이 김경신(金敬信)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이곳 주왕산에 대궐을 건립하였다는데, 당시 산 위에는 우물이 없어 계곡의 물을 퍼 올려 우물물을 대신하였는 고로 그 후 이곳을 급수대라 하였다는 말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여기에서 생겨난 가설이다. 한편 주왕의 전설은 김주원의 자손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와전되어 생겨났을 수도 있다고 한다.[4] 이러한 내용에 관해서는 참조한 사이트에서 찾아보기 바람.

이렇듯 의 마지막 왕인 주왕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지만 어째선지 가보면 은의 주왕과 관련된 명칭도 제법 찾아볼 수 있다. 달기약수라든가 달기폭포라든가. 이름이 붙은게 달기밖에 없는 것을 보면 이는 후대에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3 등산 및 탐방

경사가 매우 급하고 코스를 길게 잡을 경우 15km이상이 나오기도 하는 등 국립공원으로서의 규모는 작지만 오르기에는 만만치 않은 산이다.

일반적으로는 대전사에서 출발해 주왕산 정상(주봉)에 올라 후리매기 삼거리를 거쳐 폭포를 보면서 하산하는 코스를 선호하는데 거리도 짧고 산행시간도 휴식 및 식사 시간 포함 5시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사실상의 정상인 가메봉(해발 880m)를 오르려면 코스도 길어지고 난이도도 상당히 높아진다.

따라서 가메봉에 오르거나 주왕산에서 가장 난코스라는 장군봉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산꾼들이다. 특히 장군봉 코스는 경사도도 심한데다가 오르내림이 심하고 가메봉은 경사도는 장군봉 만큼이 아닐지 몰라도 절골에서 6km, 대전사에서는 거의 7km를 걸어야 도달할 수 있다.

주왕산의 가장 큰 단점은 능선의 조망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치를 즐기면서 산행을 하려면 주봉쪽으로 오르는 길에 설치된 전망대들을 들렀다가 후리매기를 거쳐 하산하면서 폭포들과 기암 괴석들을 구경하는 코스가 무난하다. 등산이 싫으면 대전사에서 연화폭포까지 이어진 사실상 평지에 가까운[5] 길만 걷는 것도 괜챦다.

참고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으니 가메봉이나 장군봉쪽을 오를 예정인 위키러라면 미리 식수를 충분히 준비하자.

4 관광과 먹거리

유명한 먹거리로 달기약수로 끓인 백숙 삼계탕과는 다르다 삼계탕과는!! 이 있다. 다른 약수보다 철분 함량이 높아 색다른 맛을 낸다

근처에 주산지라는 연못이 있으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었다. 여러 영화나 CF 같은 영상매체에 등장한 바 있다. 최근엔 예전과 같은 모습이 많이 사라져서 영화를 보고 찾아갔다간 실망할 수 있다. 특히 왕버드나무가 예전보다 줄었고, 물도 줄어서 예전과 같은 모습은 사진이나 영상 매체로만 볼 수 있다.

주왕산 등산로를 따라가다보면 6.25 때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이룬 내원마을이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에서 찐빵이나 술떡같은 간식류도 팔고 도토리묵, 라면, 동동주같은 식사류도 팔았다. 거기다 민박도 되서 등산객들이 자고 가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국립공원이라는 이유로 모든 마을사람들이 보상금을받고 마을에서 내려왔다. 지금은 옛 분교 건물과 갈대밭만 남아있다.

몇몇은 주왕산 입구아랫길에서 민박을 하는 중.

  1. 정상을 주봉으로 볼 경우 해발 721m이지만 가메봉으로 볼 경우 880가 된다.
  2. 石屛山, 현재의 주왕산.
  3. 신라 문무왕 12년, 672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음
  4. 후자의 가설은 청송의 향토사학가 김규봉 씨가 제시한 것이다.
  5. 무장애 탐방로라고 해서 휠체어나 유모차도 이동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