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송의 역대 황제 | |||||
6대 태종 명황제 유욱 | ← | 7대 후폐제 유욱 | → | 8대 순황제 유준 |
묘호 | 없음 |
시호 | 창오왕(蒼梧王) |
연호 | 원휘(元徽, 473년 ~ 477년 7월) |
성 | 유(劉) |
휘 | 욱(昱) |
생몰기간 | 463년 3월 1일 ~ 477년 8월 1일 |
재위기간 | 472년 5월 11일 ~ 477년 8월 1일 |
유욱(劉昱, 463년~477년, 재위 472~477)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7대 황제. 대(大) 유욱의 장남으로 아버지의 이름과 발음이 같기 때문에 소(小) 유욱이라 부른다. 폐위당한 황제라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후폐제(後廢帝).
재위 기간 내내 원휘(元徽)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전폐제 유자업보다 명성이 상대적으로 낮지만, 이 쪽은 그야말로 인간임을 포기한 수준이다. 유자업은 암군이긴 해도 단지 여자만 좀 밝혔다 수준이라면[1], 유욱은 인간의 기본 윤리를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명 7년(463년) 정월, 아버지 유욱(대 유욱)과 어머니 진묘등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유욱은 총명해서 의복을 재단하거나 모자를 만드는 것을 한번만 보고도 곧장 만들었고 한번도 불어본 적이 없는 악기도 금방 배워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높은 장대나 천막 기둥에 기어 올라가길 좋아해서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나이대에 흔한, 모험심이 강한 개구쟁이처럼 보이겠지만, 어느 날부터 자신의 재능을 남용해서 연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게, 끌, 송곳, 망치, 톱 등을 만들어 소중히 다루고 직접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여줬다. 여기까지만 해도 천계제같이 평범히 미니어쳐를 좋아하는 암군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유욱은 연장으로 나무나 돌을 깎은게 아니라 산 사람을 썰고, 분해하며 놀았다!! 쏘우의 대스승, 카오스 스페이스 마린
유욱은 사람을 톱으로 썰고 그걸 구경하며 즐거워하는 등 머리가 뭐가 들어있나 의문일 정도의 짓을 많이 했으며, 심발이라는 자가 보물이 많다고 하자 뺏기 위해 협박할 때 싸닥션을 맞고 욕을 처먹자 그는 심발을 연장들로 조각조각 17분할 인수분해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데다가 차하르족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자 배를 갈라 속을 확인하기도 했고 스님을 묶어서 몸을 해체한 후 언제 죽나 기다리기도 했다. 이처럼 하루라도 살인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아 아예 반역자를 직접 자신이 조각조각 잘라 살해하기도 했고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대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시종들과 창을 들고 민가와 거리를 습격해 사람과 가축, 야생동물 등을 가리지 않고 학살했다.
사실 유욱은 아버지 유욱의 장남이라고 하나 따지고 보면 아버지 유욱이 심영어느 순간 고자가 되어 불임이 됐기 때문에 친자식이 아니었다. 왠지 아버지 유욱은 부인이었던 진묘등을 총애하는 심복 이도아에게 하사했다가 임신하자 나중에 돌려받은 다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2] 그래서 항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로 유욱은 즉위한 후 짐은 이장군(李將軍)이다!'이라고 자칭함으로써 떳떳하게 이씨의 혈통임을 스스로 커밍아웃했다. 왕조에서 제왕이 자신이 왕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은 난 제왕의 자격이 없으니까 빨리 나를 죽여줘라는 의미니 그야말로 무리수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과연 계양왕 유휴범의 난이 일어났는데 사실 유휴범은 유욱의 정통성을 따지며 난을 일으킨게 아니라 스스로 무능한 주제에 재상으로 임명해주지 않는다면서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유휴범은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우위장군 소도성이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키고 유휴범을 살해한 뒤 난을 평정했다.
이어 일어난 건평왕 유경소의 난도 평정하는 등 소도성은 잇따른 난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그래서인지 유욱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친위군 장수이자 당시 명성이 높던 소도성이었다. 그래서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해 자신과 시종들이 활을 쐈으며 심지어는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놓고 화살로 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주변 내관들의 간언 덕에 죽이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솜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선택이었는데 구석에 몰려 있는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상대방에게 생명의 위협을 주면 어떻게 나올지 예상하지 못한 탓이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과 힘을 합쳐 양옥부,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7월 7일 칠석날 밤,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개를 훔쳐 삶아 술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유욱은 양옥부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을 것이니라"라고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양옥부는 결국 유욱이 깊이 잠들자 유욱이 아끼던 수제 살인도구를 꺼내 목을 베어 살해할 때의 나이는 고작 14세였다.
이렇게 유욱이 암살되자 양옥부는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으며 왕경칙은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인정하게 했다.[3] 하지만 선양은 더더욱 막장극이었다
유욱이 살해당하자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외쳤으며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 ↑ 근친상간은 물론이오, 자기 어머니에게 패드립을 친다던가, 숙부들을 죽여버리는 등의 행보를 보면, 그 놈이 그 놈이다. 다만, 유자업은 황제가 된지 1년만에 뒈져버려서 병크가 적은 편이다. 유자업이 황제를 더 오래했다면, 유욱을 능가했을 가능성도 있다.
- ↑ 아마 고자라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했던 것 같다.
- ↑ 여담으로 왕경칙은 남제를 세운 사실상 공신으로 고제 소도성-무제 소색-울림왕 소소업-해릉왕 소소문을 거쳐 명제 소란 시대까지 살아 있었다. 왕경칙은 당시에는 회계 태수로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에 반란을 일으켰다. 명제는 수도를 황태자 소보권에게 맡기고 토벌에 나섰는데 왕경칙이란 '단공의 삼십육계 주위상(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니 너희 부자는 달아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네'라면서 깝죽대다가 결국 전사했다(...). 여기서 단공이란 유유의 부하로 유의륭때 반간게에 걸려 죽은 명장 단도제로 단도제가 싸움에서 불리하면 자주 퇴각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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