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열차분야지도

태조 4년(1395년)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국보 228호.
(가로 122.8cm, 세로 200.9cm. 흑휘석(黑輝石=흑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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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마일스톤? 모노리스? 사람보다 크다 1톤짜리.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소재


숙종 본. 보물 8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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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모사본

天上列車天象列次分野之圖

하늘의 모습(천상)을 각각 12개의 차로 나누고(열차), 북극성을 중심으로 28수로 나누어(분야) 그린 그림.

1 개요

한국 천문학 최고의 자랑거리. 세계에서 두번째로 만들어진 전천(全天) 천문도이자 세계최초의 고경도석판위에 세겨진 전천천문도. 석각본, 모사본(석각본 탁본), 필사본이 모두 존재한다. 경이로울 정도의 정밀도를 자랑하며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 300년간 만들어진 전천천문도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조선 건국후 얼마되지않아 이정도의 천문도를 만들었다는것은 한민족이 이미 조선시대보다 훨씬 전부터 빼어난 천문과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배경

때는 조선 태조(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갓 조선을 건국하고 정통성 살리기에 고심하던 차에, 고구려 멸망 후 평양 대동강물에 빠져 사라졌던 천문도의 인본(영인본)을 가져온 이가 있어 서운관에서 그 오차를 교정하여[1] 권근, 류방택, 권중화등 11명이 만들었다. 양면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에 따라서는 세종 때까지 해서 완성시켰다고 본다. 임진왜란때 궁궐이 불에 타면서 잊혀졌다가 재발견 되었고 세월의 흐름으로 많이 닳아서 숙종 대에 새로 돌에 새겨 둘다 궁 안에 보존하였다.

새롭게 갈아 엎은 판은 아니기에 4세기~6세기 고구려의 능력과 큰 차이는 없다고 봐도 좋다. 이는 몇몇 간헐적인 벽화나 기록 말고는 딱히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 고구려 천문학의 수준을 가늠할수 있는 좋은 자료다.

3 구성

성도의 구성은 그 중심에 북극이 있고, 그 북극을 중심으로 하여 관측지의 북극의 고도에 따른 작은 원과 더 큰 적도황도권이 그려져 있다. 원의 주위에는 28수(宿, 별자리)의 명칭과 적도수도(赤度宿度)가 기록되어 있고, 각 별자리의 거성(距星)과 북극을 연결하는 선에 의하여 개개의 별의 입수도(入宿度)가 눈으로도 매우 정밀하게 읽어갈 수 있게 그려져 있다. 관측의 글에는 28수(宿) 거극분도(去極分度), 24절기의 동틀 무렵과 저물 무렵에 자오선을 지나는 별에 대한 글, 12국 분야(分野) 및 성수분도(星宿分度), 에 대한 글, 논천설(論天說)[2], 천문도 작성 경과, 작성자들의 관직과 성명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467개의 별들이 293개의 별자리를 이루는데 별자리의 숫자는 서양의 88개보다 많다. [3]눈금은 365도. 12지와 황도 12궁이 있다.

4 의의

태조 때 본은 사실 고구려 때로부터 보정이 잘 안 된 것으로, 태종 때 좀더 보정이 되는데 이로 추측된 시기를 보면 도리어 고구려 천문도가 중국보다 좀더 일찍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7~8세기 일본 기토라 고분[4]과의 연계설도 제기된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밝기에 따라 크기를 세분한 것이 중국보다 낫다는 점.

또 하나의 특징은 중국에는 없는 네 개의 별로 이루어진 '종대부(宗大夫)'라는 별자리다. 사대부의 나라 답다 이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제작된 일본의 천문도[5]에도 '종대부' 별자리가 새겨져 있어 조선 천문학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동시대 인물로, 한국 고유의 역법인 칠정산(七政算)이 일본 정향력(貞享曆)의 모태가 됐다는 기록을 남겼던 일본의 유명한 천문학자 시부카와 하루미(1639~1715)는 그의 문집에서 "조선의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일본의 천문도 제작에 큰 도움을 주었다" 퍼가요 라고 밝혔다.

5 현대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진가를 맨 처음 알아본 사람은 미국인인게 안습. 1910-1930년대 평양 숭실 학교에서 근무했던 W. C. 루퍼스가 1936년 출간한「한국 천문학」이란 책에서 "동양의 천문관이 집약된 섬세하고도 정확한 천문도"라 격찬한게 최초이다. 하긴 근대를 거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냐만은. 루퍼스는 「한국 천문학」에서 개성박물관에 고려인의 천문관이 담긴 동경(구리거울)이 남아 있다고 했으나 현존 여부는 알 수 없다 북조선 개객끼 해봐 하지만 개성박물관의 소장품들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에 몽땅 남쪽으로 싹쓸이 해왔다(...) 일성아 일성아 동경 줄게, 유산 다오. 본격 유산 거래

이후 해방과 한국 전쟁을 거치다보니 60년대에 이르러 각석이 다시 발견된 곳은 경복궁 관상감(왕립 천문대)의 흠경각이 아니라 창경궁명정전 추녀 밑이었다. (...) 그 유명한 창경원 한복판. 거기서 평범한 돌덩어리풀밭에 내팽겨친채 발에 밟히고, 소풍시민들이 돗자리를 깔고 석각 위에서 도시락을 먹고, 아이들은 그 위에서 뛰어놀며 모래 장난을 했다고. 안습. 성신여대 전상운 교수가 기가 찼을만도 하다.

1985년 8월 3일 태조본이 국보, 8월 9일 숙종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2006년 신한은행선조때 만들어진 일본 텐리대학의 목각본을 구입해 들여온바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재.

2007년 1월 12일부로 새로 발행된 1만원권 지폐 뒷면에 모사본이 있다. 참고로 지폐 제작 과정에서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가 별자리 위치가 엉망으로 기재되어 있고 별의 숫자가 누락되어 있으며 별의 밝기 표시또한 무시당해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고 한국은행 발권국 관게자는 "디자인 측면에 초점을 두다보니 일부 누락되고 수정된 부분이 있으나 학계 최고의 전문가들에게 자문받아 만든거라 별 문제가 없다."고 밝혔고 이후 그대로 제작되었다.'천상열차분야지도' 별자리가 왜 이 모양이야?(2007년, 주간한국) 한국은행의 이런 변명은 그런 석학들의 지시를 받고도 제대로된 도안을 못만들었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를 받는다.

6 논란

위에서도 얘기했듯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설명부분에 따르면 본래 석각본은 평양성에 있었으나 병란중 대동강 물에 빠져서 잃어버렸고, 그 석각본의 탁본을 이용해서 복웠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평양성이라 하였으므로 흔히 고구려를 연상하게 된다. 이 천문도를 연구했던 칼 루퍼스(Carl Rufus)도 1913년에 천문도의 원도는 고구려 때의 것이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나중에 효소왕 1년(692)에 승려 도증(道證)이 당나라에서 천문도를 가져왔듯이 그 고구려의 천문도도 당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루퍼스의 글은 여러 학자의 논문과 동아시아 과학사 분야의 권위 있는 저술에 인용됨으로써 한동안 정설로 굳어져버렸으나 이것은 이미 틀린 학설이란것이 증명되었다. 전형적인 일본식민사관의 영향에 의한 폐혜이다.

루퍼스 박사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 틀린부분을 쉽게 찾을수있는데 그의 결론은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 수록된 문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데, 그 『해동잡록』의 원문에는 “여계(麗季)의 병란으로 인하여 강에 빠졌다.”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권근의 도설에는 단지 “병란으로 인하여 강에 빠졌다.”라고 되어 있으니, 권별이 자기의 상식으로 판단하여 “여계(麗季)”라는 어구를 추가한 것이다. 계(季)는 어떤 역사 시기를 말기를 뜻한다. 문제는 여(麗)이다. 여당전쟁(麗唐戰爭)과 같이 이 글자가 고구려를 뜻하는 약자일까? 조선시대의 문헌에서 이 글자는 지극히 일반적으로 고려(高麗)를 뜻한다. 더군다나, 루퍼스와 동시대인 1934년에 출간된 『경성부사(京城府史)』에도 “이 천문도는 전 왕조인 고려의 천문도를 바탕으로 하였다.”고 소개되어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중심부 별의 위치를 연구해보니 '기원전 34년 ±170년' 즉, 고구려때 평양이나 서울에서 본 하늘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태조 이성계가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본의 원본(대동강에서 잃어버린) 제작시기 추정을 피휘(避諱)를 통해 접근한 논문이 있다. # 중국은 이미 죽은 왕의 이름을 피휘하지 않으나, 고려와 조선의 경우는 이를 따르지 않고 계속 피휘했다고 한다. 천상열차분야지도에 표기된 별 중에 기존에 건성(建星)이라 불리는 별을 피휘하여 입성(立星)으로 고쳐 석각본에 새긴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호인 '건(建)'을 피휘한 '입(立)'을 통해 원래 석각본의 제작시기를 연구했다. 위의 논문 내용중 결론부분에는 4가지 가능성을 가정하고 있다.

1. 원본인 평양 석각은 고려시대 것이다.

2. 원본인 평양 석각은 고려시대의 것인데 탁본을 만든 사람이 건(建)으로 환원한 것을, 조선의 태조 석각을 만든 사람이 다시 입(立)으로 환원하였다.

3. 탁본을 만든 사람이 고려시대의 피휘에 맞도록 글자를 입(立)으로 수정하였다. 오래된 탁본을 변조하거나, 평양 석각이 고려시대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

4. 조선 태조 석각을 만든 조선 사람이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이름을 피휘하였다.

논문에서는 이중에서 마지막 4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평양 석각과 탁본에 모두 건성(建星)으로 되어 있었을 경우이다. 이 경우는, 조선 태조 당시의 서운관의 천문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면서 탁본의 건성(建星)을 일부러 입성(立星)으로 고쳤다는 말이 된다. 조선초기의 천문학자들은 전문성을 잃지 않기 위해 고려시대 천문학자들이 세습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려시대의 천문학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조선 초기에 간행된 고려사, 고려사절요, 삼국사기 중간본(重刊本), 삼국유사 중간본 등에 고려의 국왕들의 이름에 대한 대자피휘가 복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던 것처럼 조선초기의 분위기가 피휘를 엄격하게 따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사료에 입성(立星)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그대로 입성(立星)으로 남겨둔 것이다. 건성(建星)으로 되어 있던 것을 일부러 입성(立星)으로 고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러한 조작은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갖는 정치적인 위상, 즉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제공하고 조선의 정통성을 표상하는 역할에 정면으로 반하여, 오히려 반역에 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6]

  1. 능력상의 오차도 있으나 무엇보다 세차운동이나 평양과 한성의 위도 상의 문제가 크다. 물론 조선초와 600년 차이나는 현대 역시 조선 때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보정을 해야 실제 하늘과 비교할 수 있다.
  2. 대략 천원지방에 가깝다.
  3. 서양의 88개 별자리에는 총 1564개의 항성이 소속되어 있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48개 별자리만 있었다.
  4. 나라현 아스카촌에 있는 고분으로 7세기 말~8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천장에 천문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 천문도가 고구려 천문도를 토대로 그린 것이라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
  5. '천상열차지도(天象列次之圖, 1670)'와 '천상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1677)'
  6. 안상현, 2011, 고궁문화 제 4호, 149p, 국립고궁문화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