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光, 1918.7.17~1997.2.21
오진우, 리을설, 최현 등과 함께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항일 빨치산 1세대였고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었던 갑산파의 주요 인물로 유명하지만, 다소 부침이 있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자료마다 출생지가 후창이나 라선 등으로 다르게 기재되어 있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다. 1930년대 후반 무렵에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고, 이 때 김일성과 처음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관동군의 항일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1940년에 소련령이었던 연해주의 하바롭스크로 넘어갔고, 이 곳의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1942년에 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 제88특별저격여단으로 편입되자 해당 여단의 소대장에 부임했다.
만주 작전으로 관동군이 만주 지방에서 일소되자 동북항일연군 옌벤분견대의 대위로 옌벤에 진주해 관동군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고, 1946년 봄에 귀환해 김일성의 심복으로 조선인민군과 북한 정권 창건 작업에 참가해 인민군 1사단 참모장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인민군 제13사단의 사단장(계급은 소장)으로 참전했고, 전쟁 후반기인 1952년 가을 강건군관학교 교장으로 이임했다.
휴전 후에는 제5군단에서 군단장을 잠시 맡다가 1954년 1월에 중장으로 진급하면서 제1집단군 참모장을 역임했고, 정계에서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출세 행보를 착실히 밟았다. 개전 10주년이었던 1960년에는 상장으로 재차 진급했고, 당 중앙위원과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부상을 역임했다. 1962년 10월에는 민족보위상으로 이임한 김창봉의 후임으로 총참모장에 부임했고, 동시에 대장으로 진급했다. 총참모장 재임 기간 동안에는 김창봉, 허봉학 등과 함께 1.21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비롯한 대남/대미 군사도발을 입안하고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푸에블로호 나포에 성공한 직후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군부와 정계의 실력자로 리즈시절을 한창 누릴 때였던 1968년 12월 무렵 갑자기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고, 이듬해 1월에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를 혼란시키고 당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김창봉과 함께 공개 비판을 받으며 숙청되었다. 다만 숙청 후 사형에 처해진 것으로 알려진 김창봉과 달리, 황해남도 은률광산의 광부로 좌천되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1976년 봄에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복권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했고,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면서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와 수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88년 2월에는 정치위원 폐지 문제를 거론했다가 실각한 오극렬의 후임으로 재차 총참모장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부임했다.
1990년에는 김정일의 군부 승계 작업 일환으로 신설된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4월에는 김일성의 여든 번째 생일을 맞아 진행된 군부 최고위층 진급식에서 차수 진급과 함께 두 번째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김일성 사망 후에는 국가장례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995년 10월에는 같은 해 2월 오진우가 죽은 뒤 몇 달 동안 공석이었던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조선인민군 원수로 진급해 리을설과 오진우에 이어 세 번째로 인민군 원수가 되었다.
하지만 군부 복귀 후에도 계속 개혁파와 갈등이 있었고, 김일성 사후에는 그냥 퇴물 늙은이 취급을 받는 등 말년의 위치는 좀 안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건강 상태도 계속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7년 2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장례는 오진우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혔다.
군사적 능력은 오진우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역시 밑바탕이 부실하고 과거 빨치산 시절의 경험만 중시해 신무기나 전술의 도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인민군 내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오극렬을 비롯해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의 소장파 장성들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오극렬 실각 후 총참모장이 되면서 오진우와 함께 개혁 세력을 억누르고 군의 보수화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이후 고난의 행군 등을 거치면서 막장화가 심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