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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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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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5일 전의 마지막 모습. '바비 롭슨 재단'이 암 치료 기금 모금을 위해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의 4강 잉글랜드서독의 매치업을 재현했었다.

이름로버트 윌리엄 "보비" 롭슨 경
(Sir Robert William "Bobby" Robson, CBE)
생몰년월일1933년 2월 18일 ~ 2009년 7월 31일(만 76세)
국적잉글랜드
출신지더럼
포지션윙포워드
소속팀풀럼 FC(1950~1956)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1956~1962)
풀럼 FC(1962~1967)
밴쿠버 로얄스(1967~1968)
감독풀럼 FC(1968)
입스위치 타운(1969~1982)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1982~1990)
PSV 아인트호벤(1990~1992)
스포르팅 CP(1992~1994)
FC 포르투(1994~1996)
FC 바르셀로나(1996~1997)
PSV 아인트호벤(1998~1999)
뉴캐슬 유나이티드(2000~2004)
FC 바르셀로나 역대 감독
요한 크루이프
(1988~1996)
바비 롭슨
(1996~1997)
루이 판 할
(1997~2000)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역대 감독
루드 굴리트
(1998~1999)
스티브 클라크
(1999)
바비 롭슨
(1999~2004)
존 카버
(2004)
그레이엄 수네스
(2004~2006)

잉글랜드의 前 축구선수이자 전설적인 국민감독.

1 커리어

1.1 선수시절

풀럼 FC,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2개 클럽에서만 17년간 선수생활을 하며 1부리그와 2부리그에서 총 583경기 133골을 기록했다. 출중한 득점력을 보유한 윙포워드로서 1957-58 시즌에는 41경기 24골이라는 측면 선수로서는 경이적인 득점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수시절 말기에는 신생 캐나다 축구리그에서 1시즌을 보낸 특이한 기록도 있다.

약 18년동안 선수 생활은 했지만 우승과는 극히 먼 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우승 경력은 없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20경기 4골을 기록했고, 1958년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팀의 성적은 부진했다. 1962년 월드컵 때도 대표팀에 선발은 됐으나 부상으로 낙마했고, 이후 다시는 조국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본인은 미완으로 남은 대표팀 커리어를 평생 아쉬워했지만... 괜찮다. 감독으로서 그 아쉬움을 채우고도 남을 업적을 쌓았으니까.

1.2 입스위치 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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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원소속팀 풀럼 FC에서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많은 명장들이 그렇듯이 첫번째 도전에서는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강등당했다.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한 롭슨은 선수시절부터 충성을 바친 구단에게 하루아침에 토사구팽당했는데, 이때 유명한 일화로, 롭슨은 출근길 조간신문에서 "롭슨 경질!" 이라는 머리기사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기가 해고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풀럼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서 다음으로 지휘봉을 잡은 입스위치 타운에서 성공신화를 썼다. 1969년 입스위치의 감독으로 부임한 롭슨은 크지 않은 구단 입스위치에서의 13년의 재임 기간 동안 단 14명의 선수만을 영입하며 유스 선수 위주로 실속있게 팀을 육성했다. 1973년 Texaco Cup컵[1] 우승을 시발점으로 리그 상위권 팀으로 부상한 입스위치는 롭슨 휘하에서 지속적으로 1부리그 5위권의 성적을 기록하며 1978년 FA컵, 1979년 UEFA컵 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에는 당시 준우승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6-0으로 격파하는 쾌거를 올렸고[2], 1981년, 1982년에 2번 리그 2위를 차지했다.

61년 리그 우승 이후 성적이 부진했던 입스위치는 롭슨 휘하에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고, 롭슨은 잉글랜드 대표팀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13년간 입스위치에 머무르며 유럽의 강자로서 팀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롭슨의 공로를 누구보다 잘 알던 입스위치는 10년 재계약을 제시하였을 정도였지만, 결국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팀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업적으로 롭슨은 입스위치에서 레전드의 대우를 받게 되었으며 지금은 시내 한복판에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1.3 잉글랜드

1982년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한 잉글랜드는[3] 분위기 쇄신을 위해 젊고 유망한 감독이었던 롭슨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한다. 롭슨은 유로 1984 예선전 28경기에서 단 한번만 패하고도 운이 따르지 않아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시련을 겪고 사표를 제출하지만, 축구협회에서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그를 유임시켰다. 잉글랜드는 무난히 1986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하지만 8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신의 손'에 무너지면서 좌절을 맛본다. 이를 두고 롭슨은 "그건 신의 손이 아니라 사기꾼의 손" 이라는 명언을 남긴다.

유로 1988에서도 예선에서는 단 한번 무승부를 제외하고 전승을 기록했지만 본선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었고, 대회 후 약체 사우디 아라비아와 평가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자 한 신문이 "알라여, 그를 쫓아 주소서"라는 머리기사를 쓰는 등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지만 경질은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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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990년 월드컵에서 최후의 도전을 결심한 롭슨은 축구협회에 대회 후 사임할 것을 사전에 통보하고 배수진을 친다. 희대의 판타지스타 폴 개스코인을 필두로 한 잉글랜드는 16강에서 벨기에를 가볍게 꺾었고, 8강에서 로저 밀러카메룬의 돌풍을 연장 혈투 끝에 잠재웠으나, 4강에서 숙적 서독을 만나 패널티킥 승부에서 패배했고, 롭슨과 개스코인은 필드 위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비록 조국을 주요 국제대회 우승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8년간 국가대표 감독으로 장수하면서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 최고성적을 기록한 롭슨은 잉글랜드 팬들에게 높은 신망을 받았고, '국민감독' 이미지를 확고히 굳힌다.

1.4 유럽으로

대표팀을 떠난 롭슨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 네덜란드PSV 아인트호벤으로 떠난다. 당시까지만 해도 잉글랜드 선수들은 감독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군대식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롭슨은 초기에 호마리우등 주축 선수들의 자유분방한 생활로 인해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적응에 성공하고 2년 연속 PSV를 우승으로 이끈다. 이후 그는 스포르팅 리스본, FC 포르투에서도 같은 성과를 낸 뒤 1996년 여름에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2년 계약을 맺고 취임했다.

롭슨이 바르샤에 온 내막은 이러했는데, 당초 바르샤의 회장인 주젭 유이스 누녜스는 그해 봄에 요한 크루이프의 후임으로 당시 아약스의 감독인 루이 판 할을 점찍어 놓았으나 판할의 아약스 감독 계약기간이 1997년까지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공백의 1년을 이끌 적임자로 롭슨을 택한 것이다. 누녜스 회장은 1984년부터 3년간 바르샤를 지휘한 테리 베너블스의 추천으로 롭슨과 인연을 맺었고, 당시 포르투갈 생활이 문화적으로 편치 않았던 롭슨이 그 러브콜을 받아들인 것이다.

롭슨을 선장으로 맞아들인 바르샤는 PSV와 브라질 국대에서 10대의 나이로 경이로운 활약을 보인 호나우두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루이스 엔리케를 각각 영입한 뒤 1996/97 시즌 동안 2점 차로 레알 마드리드에게 놓친 라리가 타이틀을 제외하고 당해 치른 코파델레이-수페르코파-컵 위너스컵 3관왕을 제패하는 성과를 거둔다. 사실 라리가 타이틀도 브라질축구협회가 호나우두를 이용해 상업 수익을 얻기 위해 치룬 무수한 A매치 참가로 공백이 안 생겼으면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롭슨은 그 해에 유럽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는데, 호나우두는 롭슨 감독을 두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감독"으로 칭송했다. 이에 롭슨 감독도 호나우두를 두고 "그가 곧 전술"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당시의 바르샤 축구는 호나우두의 독무대라고 불릴 정도로 그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누녜스 회장의 눈에는 호나우두만이 돋보이는 바르샤는 성에 차지 않았다. 1997년 여름에 누녜스는 호나우두에게 그의 경력에 걸맞지 않은 재계약 조건을 내밀면서 이에 호나우두가 거액의 이적료를 받고 인테르로 이적했고, 롭슨 역시 미리 사전에 계약된 판 할 감독에 감독 자리를 넘긴 뒤 총감독으로써 1년을 채우고 바르샤를 떠났다.

다만 FC 바르셀로나 시절은 썩 좋은 평가 자체는 못듣는다. 우선 언어적으로 통하질 않아 선수들과 겉도는 면이 있었으며 회의때도 바비 롭슨이 한마디 하면 통역을 맡았던 주제 무리뉴가 그 이상으로 풀어서 통역을 하며 오히려 선수들은 무리뉴와 더 가깝게 지냈고 리그 중후반부에선 무리뉴와 선수들의 아이디어로 전술을 구상해 경기에서 승리를 하는 등 팀 운영과 구상에서 주도적이지 못한면이 있었다. 펩 과르디올라의 평전인 '승리의 길'을 보면 리그 후반부부터는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에게 팀을 일임하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있었던 때도 있었다고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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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르팅 감독 재직중 롭슨은 이후 수제자가 되는 주제 무리뉴와 인연을 맺게 된다. 무리뉴는 원래 스포르팅이 고용한 통역이었으나 롭슨은 그의 재능을 간파하여 포르투로 데려가 수석코치에 임명했고, 이후 FC 바르셀로나에서도 넘버2 자리를 맡긴다. 롭슨 밑에서 꾸준히 지도자 수업을 받던 무링요는 그가 떠난 후에도 바르셀로나에 남아 역량을 쌓은 뒤 벤피카, 레이리아를 거쳐 2002년 1월 포르투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포르투 재직 중 롭슨은 그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16세 소년이 쓴 편지를 받는다. 내용인즉 롭슨에게 팀의 스트라이커 도밍고스 파시엔시아를 팔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 편지에 나타난 소년의 축구에 대한 열정에 감명받은 롭슨은 그를 불러 유스팀 코치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데, 이 소년이 2010-11시즌 FC 포르투로 미니 트레블을 이뤄내고 첼시 FC토튼햄 핫스퍼의 前 감독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빌라스 보아스가 축구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롭슨이다.

어찌됐건 그는 유럽생활 9년간 총 4회 리그 우승, 3회 컵 우승이라는 사기스러운 경력을 쌓는다. 1997년에는 유럽 올해의 감독상도 받는다.

롭슨은 9년 유럽생활을 통해 잉글랜드의 국민감독에서 유럽 최고의 감독으로 발돋움한다. 3개국 4개 팀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이때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펩 과르디올라, 뤼트 판 니스텔로이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지도했다.

1.5 뉴캐슬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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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국내외에서 감독에게 가능한 모든 영광을 다 차지한 롭슨에게 더이상 갈 곳은 없어 보였고, 은퇴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후의 도전이 하나 남아있었다. 바로 어린시절 열렬히 서포팅했던 클럽, 뉴캐슬 유나이티드였다. 당시 뉴캐슬은 전임 뤼트 휠릿 감독의 실정으로 강등 위기에 처해 있었고, 뉴캐슬 운영진은 "팀은 강등 위기고 돈은 전임 감독이 다써서 한푼도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라고 말하며 스페인 남부에서 휴가중이던 롭슨에게 구원을 청했다. 롭슨은 흔쾌히 승낙했다.

1999년 9월 당시 뉴캐슬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주포 앨런 시어러는 부상 이후 지독한 부진에 빠졌고 팀은 리그 최하위에 쳐져 있었다. 전문가들은 전통의 강호 뉴캐슬이 이번에야말로 강등을 당할 수 있다는 분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었고, 아무리 전설적인 감독이라지만 나이가 70에 육박한 롭슨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첫 경기였던 셰필드 웬즈데이 전, 뉴캐슬은 8-0으로 승리했고 시어러는 5골을 넣었다.

첫시즌 리그 11위로 팀을 안정시킨 롭슨은 이후 크레익 벨라미, 로랑 로베르 등 주축 선수들을 영입하여 화끈한 닥공 축구로 뉴캐슬을 강팀으로 변모시킨다. 뉴캐슬은 2001-2002 시즌 4위를 기록하면서 챔피언스 리그에도 출전하지만 열망하던 우승에는 실패하고[4] 2003-2004 시즌 5위로 쳐지자 일각에서는 노쇠한 롭슨의 지도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2004-2005 시즌 초반 팀의 성적이 부진하자 뉴캐슬은 롭슨을 해임한다. 실제로 당시 71세의 고령이었던 롭슨은 로랑 로베르, 키어런 다이어, 크레익 벨라미, 타이터스 브램블, 리 보이어등 악동들이 즐비했던 뉴캐슬의 스쿼드를 관리하기에는 다소 힘에 부친 것은 사실이지만, 4년전 자신이 사랑하는 팀을 구하기 위해 은퇴도 번복하고 높은 보수도 마다하며 와준 그에게 당시 뉴캐슬 운영진의 갑작스럽게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하면서 보여준 무성의한 태도는 천하의 개쌍놈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5]

이후 뉴캐슬은 악동들을 관리하기 위해 잔소리꾼 그레이엄 수네스[6]를 임명했고, 막장 운영진과 막장 감독, 부상병동, 그라운드의 악동들이라는 환상적인 조합으로 뉴캐슬은 2008/2009 시즌 강등까지 이르는 막장행보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후 현역 생활에 미련을 버린 롭슨은 은퇴하여 뉴캐슬에 머물고, 2007년에는 잠시 아일랜드 대표팀 고문 역할을 맡기도 한다. 조 본프레레 감독의 퇴임 이후 국내 언론은 일제히 대한축구협회가 롭슨 감독에게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의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이것이 단순한 루머였는지 실제성이 있었던 건지는 불명확하지만 당시부터 이미 급격히 악화 일로를 걷던 롭슨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아마 제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성사 가능성은 미미했을 것이다. 사실 루머였어도 이 기사가 나왔을때 축빠들은 엄청 설레었다. 사실 감독으로서의 명성은 전임자인 본프레레나 쿠엘류는 물론이요 당시 국민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도 롭슨경에 비하면 많이 쳐지는 편이었다.

2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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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물결이 이어진 입스위치 타운의 홈구장 포트먼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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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제막된 뉴캐슬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롭슨 동상

1992년 최초로 장암이 발견된 받은 롭슨은 이후 총 5회의 암 선고를 받으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2006년에는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아 좌반신에 감각을 잃는 장애까지 입게 되었다. 결국 2007년 2월, 롭슨의 양쪽 폐에 암이 발견되었고, 의료진은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여생을 암 치료 사업에 헌신하기로 결심한 롭슨은 2008년 3월 바비 롭슨 재단을 설립했다. 2009년 10월 기준으로 동 재단은 잉글랜드 북동부 지역 병원들의 항암치료 사업에 2백만 파운드 (한화 약 40억원) 이상을 기부한 상태다.

2009년 7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2년 이상 암과의 힘겨운 투쟁을 지속하던 롭슨이 결국 세상을 떠났다.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 등 축구계 주요 인사는 물론, 고든 브라운 총리, 윌리엄 왕자 등 유명 인사들이 잇달아 조의를 표했다. 풀럼, 입스위치 타운, 뉴캐슬 유나이티드 등 그가 거쳐간 클럽의 홈구장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어 슬픔을 나눴고, 2009년 9월 21일 듀럼 대성당에서 벌어진 그의 공식 추모 행사는 전국적으로 생방송되었다. 롭슨 사후 바비 롭슨 재단의 대표는 앨런 시어러가 맡게 되었다.[7]

5차례 암 선고를 받고도 장기간 현역 생활을 계속한 굴하지 않는 의지와 말년에 펼친 자선 사업은 한 인간으로서 귀감이 될 만하다. 이를 두고 한 팬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는 암에 패한 것이 아니다. 단지 4-1로 이겼을 뿐이다.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나온 칼스버그의 광고에도 그를 추모하는 내용이 담겼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멋진 광고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성적은...

3 평가

영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을 논할 때 빌 샹클리, 알프 램지, 브라이언 클러프, 알렉스 퍼거슨 등과 함께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다. 사실 성과만으로 따진다면 리버풀의 황금기를 이끈 샹클리, 유일한 잉글랜드 출신 월드컵 우승 감독인 램지, 중소클럽 노팅엄 포레스트를 이끌고 리그 우승과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한 클러프, 경악할 만한 우승기록을 세운 퍼거슨에 비해 메이저급 트로피 (자국리그, 챔피언스리그, 월드컵, 유로) 하나 없는 롭슨의 성과는 초라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런 점과 무관하게 롭슨이 이들과 동등하게 평가받는 데에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여러 클럽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위에 기재한 감독들은 대부분 하나의 팀에서 주로 성과를 거뒀으며, 말년에 파나티나이코스 기술고문으로 재직한 램지를 제외하고는 해외 경험이 전무하다. 그러나 롭슨은 12년간 머문 입스위치 타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팀에서 짧은 시간 내에 큰 성과를 이루어 냈으며, 일반적으로 영국 감독들이 진출을 꺼리는 유럽 대륙에서도 UEFA 올해의 감독상을 받을 정도로 큰 족적을 남겼다. 실제로 영국 출신 명감독 중에서 프리미어 리그의 국제화 이후에 활약한 덕에 유명해진 퍼거슨을 제외하고는 현격한 차이로 해외 인지도가 가장 높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후배 감독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었는데,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FC 트벤테, VfL 볼프스부르크 등에서 성공적인 감독 생활을 하고 있는 스티브 맥클라렌 감독이 스스로 롭슨의 선례를 따르기 위해 해외진출을 택했다고 했을 정도다.

둘째, 어려운 클럽 여건에도 불구하고 큰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프리미어 리그 2위, UEFA컵 우승으로 이끈 입스위치 타운은 리그 상위권과는 거리가 먼 군소 클럽이었으며, 지금도 풋볼 리그 챔피언쉽 하위권에 쳐져 있는 팀이다.[8] 또한 취임 당시 무일푼에 스쿼드는 거의 와해 수준이었던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단 2년만에 리그 우승권 팀으로 만든 것도 놀라운 업적이었다. 흔히 "끝났다"는 평가를 들었던 뉴캐슬의 간판 스트라아이커 앨런 시어러를 부활시키는 것을 롭슨의 뛰어난 선수관리와 전술적 이해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

셋째, 그 어떤 감독보다도 주변의 평이 좋다. 영화로도 소개된 바 있는 브라이언 클러프의 원만치 못한 대인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상기 언급된 명감독들 모두 어느정도 "독단적"이라는 평, 심지어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롭슨의 지휘를 받은 선수 중에서 공개적으로 그의 지도력이나 성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견해를 언급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심지어 뉴캐슬에서 롭슨의 골머리를 썩히던 키어런 다이어, 타이터스 브램블 같은 악동들조차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그를 아버지라고 이야기할 정도였고, 그가 갑작스럽게 해임당한 후 크게 안타까워했다. 후임으로 수네스가 와버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겠지. 앞서 언급한 시어러는 롭슨 없이는 자기 선수생활이 2000년도에 끝났을 거라고 수차례 말했으며, 바르샤에서 그와 함께 영광의 시절을 보낸 호나우두 역시 "세계 최고의 지도자 중 하나" 라며 극찬했다. 알렉스 퍼거슨이 스스로 "축구계에서 내가 같이 일해본 모든 사람을 통틀어 최고" 라고 말했으니 할말 다했다.

4 경력

4.1 대회 우승

  • 입스위치 타운 (1969/70 - 1981/82)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2 - 1990)
    • World Cup – Fourth Place (1): 1990
  • PSV 아인트호벤 (1990/91 - 1991/92)
  • FC 포르투 (1993/94 - 1995/96)

4.2 개인 수상

  1. 이전 문서에는 풋볼 리그 컵 우승이라고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1970~75년까지 열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 아일랜드, 웨일즈 리그에서 1개팀씩 참가한 소규모 대회인 Texaco Cup에서 우승을 한것으로 정식대회는 아니었다. 1973년 풋볼 리그 컵 우승팀은 울버햄튼이다.
  2. 그나마 당시 맨유 골키퍼가 페널티 킥을 세 번이나 막아냈기 때문에 6-0 스코어에서 마무리된 압도적인 퍼포먼스의 경기였다. 롭슨의 뉴캐슬 데뷔전인 셰필드 웬즈데이전 8-0 승리와 더불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롭슨의 캐관광 경기.
  3. 프랑스 체코 쿠웨이트와 한조가 되어 3전 전승으로 조 1위로 2라운드의 올랐지만 독일과 스페인과 무재배를 하는 바람에 4강진출에 실패
  4. 다만 대단한 기록을 세우는데, 초반 세 경기에서 지고도 남은 세 경기에서 전승을 거둬 2차 리그에 진출했다. 당시 같은 조에 유벤투스도 있었다.
  5. 심지어 언급된 저 악동들은 보비 롭슨경이 떠나자마자, 본색을 제대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보비 롭슨이 얼마나 저 선수들의 멘탈을 잘 관리해왔었는지도 엿볼 수 있다.
  6. 참고로 그레이엄 수네스는 '리버풀의 레전드이지만 리버풀 감독 시절 그 이미지를 다 깎아먹었다.'로 잘 알려져 있지만, 뉴캐슬의 더비 라이벌 미들즈브러 FC 선수 출신이기도 하다.
  7. 뉴캐슬에서 경질당하던 당시 시어러와의 불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이런 사례로 보듯 그저 일부의 '그럴수도 있지 않나'하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8. 다만 알프 램지는 3부 리그에 있던 입스위치 타운을 맡은 지 5년만에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시킨 전력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2부 리그에서 승격하자마자 우승을 거머쥔 5명의 감독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