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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 감독 | |
앤서니 리차드 "토니" 풀리스 (Anthony Richard "Tony Pulis) | |
생년월일 | 1958년 1월 16일 |
국적 | 웨일스 (Wales) |
출신지 | 뉴포트 주- 필그웬리 |
신장 | 185cm |
포지션 | 수비수 |
유소년 경력 | 뉴포트 YMCA (1974–1975) |
소속 클럽 | 브리스톨 로버스 (1975–1981) 해피 벨리 (1981–1982) 브리스톨 로버스 (1982–1984) 뉴포트 카운티(1984–1986) 본머스(1986–1989) 질링엄(1989–1990) 본머스(1991–1992) |
스태프 | 본머스 감독 (1992–1994) 질링엄 (1995–1999) 브리스톨 시티 (1999–2000) 포츠머스 (2000) 스토크 시티(2002–2005) 플리머스 아가일 (2005–2006) 스토크 시티(2006–2013) 크리스탈 팰리스(2013–2014)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2015~) |
목차
1 소개
남자의 축구를 도입한 남자
현대 축구의 이단아
하위권 팀들의 구원자
현 EPL감독 중 유일하게 매 경기마다 야구모자와 레인자켓을 입고 나오는 감독
아스날의 철천지원수
토니 풀리스는 웨일스의 전 축구 선수이자 현재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감독이다. 그는 1992년부터 20여 년의 긴 감독 생활 동안 여러 하위 리그 팀들을 맡아 대부분 승격에 성공시키거나 잔류 시키는 데 기여하여 명성을 쌓았다. 그의 스타일은 과거 영국이 추구했던 롱볼 패스 축구이른바 뻥축에 피지컬을 접목한 것으로서, 상대에게 거친 압박을 가해 공을 탈취하고 롱볼 패스로 상대의 뒷공간을 공략하고 피지컬로 상대 수비진을 허물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짧은 패스와 팀워크 등을 중시하는 현대축구와는 정반대인 전술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놀랍게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장기간 성공적인 경력을 쌓아와 세간의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지나칠 정도의 피지컬과 거친 파울 중시는 상대팀 선수들이 축구 생명이 망가질 정도의 부상을 당하는 데 일조하여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특히 아스날은 풀리스식 축구의 최대 피해자다
또한 풀리스는 그의 스타일만큼이나(...) 성격이 직설적이고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여 걸핏하면 보드진과 마찰을 빚었고 심지어 법정 싸움까지 가기도 했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풀리스는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막판에 쫓겨나거나 제발로 나가기 일쑤였다. 20여 년의 감독 생활 동안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고도 빅클럽들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일 지도 모른다.
2 선수 경력
본머스 시절의 풀리스. 할아버지?
풀리스는 19살에 뉴포트 YMCA의 아마추어 축구팀에 가입했다. 그는 곧 브리스톨 로버스로 이적하여 그의 친구 이안 할로웨이와 함께 축구를 익히며 기량을 갈고 닦았다. (이안 할로웨이는 훗날 풀리스와 함께 하위권의 명장으로서 이름을 날린다.) 풀리스는 1981년에 홍콩의 해피 벨리 AA 축구 클럽에 이적하여 85경기를 소화했다.
이듬해 그는 브리스톨 로버스로 돌아와서 3년간 45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1984년에 뉴포트 카운티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수비수로서 진가를 발휘하여 주전 선수로 기용되었다. 당시 뉴포트의 감독이었던 데이비드 길은 풀리스가 최고의 감독이 될 자질이 있다고 여겼다고 한다. 1986년에 본머스로 이적한 풀리스는 그곳에서 3년간 활동했다가 1989년 재정에 부담을 느낀 보드진에 의해 질링엄으로 보내졌다. 당시 본머스 감독이었던 해리 레드냅은 풀리스의 이적에 반대했으나 구단이 이를 무시하고 이적을 강행했다. 그 만큼 풀리스는 수비수로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풀리스는 질링엄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본머스로 돌아와 선수겸 코치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1992년까지 16경기에 출전하여 한 골을 기록하였고 1992년부터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감독으로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3 감독 경력
3.1 본머스 시절
풀리스는 본머스에서 2시즌을 치루면서 팀을 2부리그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보드진이 선수를 영입하는 데 성의를 보이지 않아 이적자금을 거의 주지 않았고 이에 화가 난 풀리스는 사임해버렸다.
3.2 질링엄 시절
1년 간 휴식을 취한 풀리스는 1995년 질링엄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질링엄은 그가 부임하기 전엔 3부 리그 강등이 유력한 팀이었다. 하지만 풀리스는 이 암울한 팀을 단시일에 바로잡고 2부 리그에 잔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4년간 팀을 이끌며 질링엄의 전력을 강화시켰고 1998-99시즌에 마침내 질렁엄 역사상 최초로 EPL에 승격시킬 기회를 잡았다.
당시 질링엄은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시티와 승격 쟁탈전을 벌였다. 질링엄은 풀리스의 지휘를 받으며 초반에 2: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경기 종료 몇 분 전, 맨시티 선수들은 투혼을 발휘하며 2골을 연달아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렸고 결국 승부는 승부차기에서 결정되었다. 그 결과, 맨시티가 3:1로 승리를 거두었고 질링엄은 승격이 아쉽게 좌절되었다.
그런데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한 직후, 풀리스는 갑작스럽게 경질되고 말았다. 이 경질은 실로 뜻밖이었던지라 사람들은 질링엄의 처사를 비난했다. 보드진은 '개인적인 사유'로 그를 해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알릴 수 없다고 밝혔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질림엄 보드진은 사전에 약속되었던 보너스를 지급하기 싫어서 풀리스를 경질했다고 한다. 풀리스는 자신을 해임하고 지급하기로 약속되었던 40만 파운드의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은 폴 스컬리 회장을 상대로 고소했다. 이 법정 싸움은 2001년에야 풀리스가 7만 5천 파운드를 받는 대가로 합의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3.3 브리스톨 시티 시절
풀리스는 1999년 6월 브리스톨 시티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풀리스는 선수 시절 브리스톨 시티의 라이벌인 브리스톨 로버스에서 뛴 적이 있었다. 브리스톨 시티 팬들은 라이벌 팀에서 뛰었던 그가 감독으로 온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포츠머스로 가려고 한다는 루머까지 번지자, 팬들은 그에게 꺼지라는 야유를 퍼부었다. 결국 풀리스는 불과 여섯달 만에 포츠머스로 쫓겨나듯이 이적했다.
3.4 포츠머스 시절
2000년 1월, 풀리스는 포츠머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최하위권에 있던 팀을 중위권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불과 10개월 후, 그는 "개인적인 문제"를 이유로 경질되고 말았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풀리스가 포츠머스 회장인 밀란 만다리치의 의향에 사사건건 반발한데다 선수 보강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것에 심하게 반발했기 때문에 경질되었다고 한다.
3.5 스토크 시티 1기 시절
포츠머스에서 경질된 뒤, 그는 2년 간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2002년 11월, 풀리스는 스토크 시티의 요청을 수락하고 감독직에 복귀했다. 당시 스토크 시티는 3부 리그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다. 풀리스는 암울한 팀 분위기를 단시일에 전환시켰고 임대 가 있던 공격수 아데 아킨비위와 골키퍼 마크 크로슬리를 복귀시켰다. 과연 두 사람은 제 역할을 잘 수행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아킨비위의 결승골로 레딩을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면서 팀을 2부 리그에 승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11위를 기록하며 2부리그에 잔류시켰다.
그러나 2004-05 시즌때 풀리스는 보드진과 또다시 마찰을 빚었다. 풀리스는 여름 이적 시장 때 영입을 해주지도 않고 팀내 주축 선수인 데이브 브레머와 스티브 시몬슨을 자유계약으로 보내버린 것에 분노했다. 풀리스는 2005년 1월에 그의 아들 앤서니 풀리스와 루이스 벅스턴을 스쿼드에 합류시켰다. 그러자 아이슬란드 출신 구단주와 풀리스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풀리스는 아데 아킨비위를 챔피언쉽 라이벌인 번리로 팔아버린 것에 "우리는 우리의 탑 공격수를 팔아버렸고 그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한탄했고 구단주는 자기 아들을 멋대로 스쿼드에 포함시킨 감독의 행태에 화가 났다. 결국 2005년 6월 29일, 풀리스는 경질되고 말았다.
3.6 플리머스 아가일 시절
풀리스는 이후 플리머스 아가일의 부름을 받고 감독에 취임했다. 그는 표류하던 팀을 바로잡아 강등권에 처져 있던 팀을 호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가 웨스트햄에서 임대해온 센터백 엘리엇 워드와 쉐필드 유나이티드에서 영입한 미드필더 릴리안 날리스의 활약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성과였다. 플리머스는 그의 지도력에 힘입어 챔피언쉽에서 14위를 기록, 잔류에 성공했다.
3.7 스토크 시티 2기 시절
2006년 5월, 풀리스의 후임인 요한 보스캄프가 스토크 시티 감독직에서 쫓겨나면서 풀리스가 스토크로 돌아온다는 루머가 돌았다. 8년만에 스토크의 구단주로 복귀한 피터 코츠는 이전 구단주가 경질한 풀리스를 아깝게 여기고 있었고 마침 풀리스가 플리머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자 그와 접촉한 것이다. 플리머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결국 그해 6월 14일, 풀리스는 스토크로 돌아왔다.
풀리스는 수비수 대니 히긴보텀, 스트라이커 리카르도 풀러, 그리고 스트라이커 빈센트 프리차드를 영입하여 스쿼드를 보강했다. 그는 또한 아스톤 빌라로부터 미들필더 리 핸드리를 임대 영입했고 리버풀로부터 살리프 디아오를 임대 영입했다. 이러한 보강에 힘입어, 스토크는 2007년 1월에 접어들 무렵 4위를 기록했다. 이후 풀리스는 4월에 5경기에서 승점 11점을 획득하여 4월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막판에 뒷심이 약한 모습을 보였고 최종 경기에서 퀸즈 파크 레인저스와 1:1로 비기면서 8위를 기록, EPL 승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풀리스는 다음 시즌을 대비하여 주장 대니 히긴보텀을 선더랜드로부터 300만 파운드에 팔았고 로리 델랍, 라이언 쇼크로스(맨유로부터 임대 영입) 등 총 5명을 영입했다. 풀리스의 영입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고 스토크 시티는 마침내 2007-08시즌에 EPL로 승격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구단 역사상 23년만에 거둔 쾌거였다.
풀리스는 프리미어 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2008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많은 선수들을 보강했다. 먼저 레딩으로부터 스트라이커 데이브 킷손을 550만 파운드에 영입했고 울버햄튼 원더러스로부터 미들필더 세이 올로핀자나를 3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또한 뉴캐슬로부터 미들필더 압둘라예 파예를 225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찰튼 아슬레틱으로부터 수비형 미들필더 엠디 파예를 영입했다.(엠디 파예의 이적료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우스햄튼으로부터 미들필더 앤드류 데이비스를 120만 파운드에 영입했으며 레딩으로부터 수비수 이브라히마 송코를 200만 파운드에 영입했다. 풀리스는 또한 그의 아들 앤서니 풀리스와 스트라이커 존 파킨을 다른 팀으로 팔았다. 자기 아들 마저 냉정하게 버리는 차도남 풀리스
2008-09 시즌에서, 스토크는 시즌 중반까지 슬럼프에 빠져 최하위권을 전전했다. 그러나 1월에 세필드에서 합류한 중미 제임스 바틀렛과 웨스트햄에서 합류한 윙어 매튜 애더링턴이 스토크의 상승세를 이끌어냈다. 스토크는 3월부터 승점을 획득하기 시작하며 강등권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2009년 5월 9일, 스토크는 헐 시티를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어 잔류를 확정했고 승점 45점을 기록하며 12위를 차지했다. 풀리스는 스토크의 제한된 이적 자금을 가지고도 팀을 잔류시키는 데 성공하여 세간의 칭찬을 받았고 2008-09 시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9-10 시즌, 스토크는 이전 시즌에 비해 한결 나아진 경기력을 보이며 리그에서 순항했고 FA컵에서 요크 시티, 아스날, 그리고 맨시티를 차례로 격파하며 8강에 진출했지만 첼시 원정에서 패하여 탈락했다. 이 시즌에 스토크는 47승점을 획득하며 11위를 기록했다. 2010-11 시즌, 풀리스는 볼튼 원더러스를 5:0으로 대파하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FA컵 결승에 진출했다. 이 결승전에서 맨시티에게 1:0으로 패하고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맨시티가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확정시켰기 때문에 유라파 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획득했다. 리그에서는 홈에서 막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원정에서는 약한 면모를 보이며 13승 7무 18패로 리그 13위를 기록했다.(홈경기에서 10승4무5패, 원정경기에서 3승3무13패.) 스토크 회장 피터 코아테스는 풀리스가 팀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사상 최초로 유로파 리그에 진출한 스토크는 크로아티아의 하이두크 스플리트를 상대로 1:0 승리를 거두며 유로파 조별단계에 진출했다. 풀리스는 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최고의 수비력을 갖춘 것으로 명성이 자자한그러나 최악의 유리몸인 조나단 우드게이트를 자유계약으로 영입했다. 그는 또한 여름 이적 시장 마감일에 버밍엄으로부터 공격수 카메론 제롬을 영입했고 토트넘으로부터 공격수 피터 크라우치를 영입했다. 특히 피터 크라우치는 천만 파운드에 이적했는데, 이 금액은 스토크 역사상 가장 많은 이적료였다.
스토크는 유로파 조별단계에서 터키의 명문 구단 베식타스, 러시아의 디나모 키예프, 이스라엘의 마카비 텔아비브와 같은 조가 되었다. 1차전 디나모 키에프와의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었고 베식타스를 크라우치의 결승골에 힘입어 2:1 승리를 거두었으며 텔아비브와의 홈 원정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키예프와 또다시 비김으로서 3승 2무로 32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32강에선 발렌시아와 격돌하여 홈, 원 정 1:0으로 패하며 탈락했다. 발렌시아와의 경기 때 풀리스는 리서브 선수들을 대거 경기에 투입시켰고 서브엔 고작 4명에 배치시켜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풀리스는 리그까지 치뤄야 하고 부상이 많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했다. 한편 리그에선 유로파까지 치르느라 고전했지만 후반기부터 선전하면서 14위를 기록했다.
2012년 여름, 풀리스는 또다시 바쁜 이적 시장 행보를 보였다. 그는 먼저 그동안 스토크에서 활약했던 리카르도 풀러를 방출하고 많은 미들필더 선수들을 영입했다. 미국 출신의 제프 카메론과 모리스 에두,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이미 네스와 찰리 아담, 울버햄튼 원더러스 소속의 윙어 마이클 카이틀리, 블랙번 로버스의 미들필더 스티븐 은존지가 바로 그들이다. 또한 풀리스는 영국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언도 영입하여 공격진 보강도 착실히 했다.
스토크는 2012-13 시즌을 탄탄해진 수비력을 바탕으로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하며 6승 10무 3패를 기록하고 전반기를 8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2013년 첫 경기인 맨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3:0으로 패하면서 기세가 꺾였고 1월에 극도로 부진했다. 이에 풀리스는 서둘러 영국의 기대주 골키퍼 잭 버틀란드 등을 영입하며 반전을 기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스토크는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극도로 부진에 휩싸여 13경기 1승 3무 9패라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전반기에 벌어들인 승점 덕분에 강등권과는 거리가 멀었고 리그를 13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시즌이 끝난 후, 풀리스는 2013년 5월 21일 피터 코츠 회장과 면담한 후 계약을 상호해지하고 팀을 떠났다. 견실한 팀 관리와 효율적이면서도 단단한 축구로 스토크를 프리미어리그 중위권에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아왔던 풀리스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떠나보낸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스토크가 그를 내친 것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스토크 팬들은 FA컵 준우승과 유로파 진출 이후 기대치가 상당히 높아졌고 2012-13 시즌 후반기의 부진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또한 구단주가 아들에게 구단을 넘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팀의 전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었다. 결국 풀리스는 더 버텨봐야 좋은 꼴 못보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상호 해지에 합의한 것이다.
3.8 크리스탈 팰리스 시절
2013년 11월 23일, 크리스탈 펠리스는 강등권에 쳐져 있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안 할로웨이를 경질하고 풀리스와 2년 계약을 체결했다. 풀리스는 부임한 이후 웨스트 햄과의 첫 경기에서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1월 이적 시장에서, 풀리스는 블랙풀로부터 윙어 톰 인스를 영입했고 셀틱으로부터 미들필더 조 레들리를 영입했으며 블랙번으로부터 센터백 스콧 댄을, 사우스햄튼으로부터 제이슨 펀천을, 그리고 올버햄튼 원더러스로부터 골키퍼 웨인 헤네시를 영입했다.
이러한 영입은 크리스탈 팰리스를 좀더 견고한 수비력을 갖춘 팀으로 키우는 데 성공했고 풀리스는 첼시, 카디프, 아스톤 빌라, 에버튼, 그리고 웨스트 햄을 상대로 모두 승을 거두며 팀을 강등권에서 탈출시켰다. 이러한 활약으로, 풀리스는 2014년 4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탈 팰리스는 2013-14 시즌 승점 45점을 거두며 1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2014년 8월, 그는 아스날과의 2014-15 시즌 첫 경기를 이틀 남겨두고 돌연 해고되고 말았다. 해고 원인은 이적 시장 행보에 대한 구단과의 마찰이었다. 풀리스는 스티븐 코커, 미구엘 미추, 길피 시구르드손 등을 영입하여 팀을 좀더 높은 순위로 끌어올리고 싶었지만 보드진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격노한 풀리스는 보드진과 마찰을 빚다가 결국 경질되고 만 것이다.
3.9 웨스트 브롬위치 시절
2015년 1월 1일, 풀리스는 웨스트 브롬위치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2월의 모든 경기에서 무패 행진을 이룩하며 또다시 이 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풀리스 부임 이전 강등 위기에 몰렸던 팀은 풀리스 부임 이후 안정적인 행보를 보이며 41점을 획득, 최종 순위 13위를 기록했다. 이로서 풀리스는 22시즌 째 무강등 기록을 이어갔다. 잔류왕 풀리스
이후 풀리스는 미들필더 유수프 물룸부와 공격수 사마라스, 브라운 이데예, 수비수 줄리언 레스콧을 방출하고 공격수 살라몬 론돈을 1200만 파운드(구단 역대 최고액)에 영입했으며 제임스 맥클런, 제임스 체스터, 리키 램버트, 조니 에반스, 그리고 안드레스 린데가르드를 영입했다. 팀내 최고 스트라이커 베라히뇨는 빅클럽으로 가겠다고 징징거렸지만 결국 이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15-16시즌 역시 2016년 4월 11일 현재, 32경기 10승 10무 12패를 기록하며 승점 40점을 획득, 강등의 마지노선인 18위 선덜랜드(현 승점27점)에 13점을 앞서며 사실상 EPL 잔류가 확실시 되고 있다.
4 감독 스타일 : 남자의 축구
풀리스의 스타일은 "수비", "피지컬", "롱볼 패스" 라는 세 단어로 정의할 수 있다. 풀리스는 기본적으로 수비 라인을 내리고 실점을 최소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아마 수비 전술을 짜는 데 있어 EPL에서 그만한 실력가는 얼마 없을 것이다. 또한 풀리스는 피지컬을 중시하여 190에 가까운 키의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의 지도 하에 있는 팀의 선수들은 180이하의 선수라곤 찾아보기 어렵고 대부분이 190 가까이 되거나 그 이상의 장신 선수다. 이러한 피지컬을 보유한 풀리스의 팀은 상대의 공격을 피지컬로 막아내고 공격을 전개할 때도 피지컬로 밀어붙힌다. 또한 공격 시 중앙에서 패스 워크로 공간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사이드로 빠져서 크로스를 올려 우월한 피지컬의 공격수에게 공을 전달하여 상대의 골문을 가르거나 코너킥, 프리킥 등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득점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풀리스는 상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거친 플레이를 강조한다. 즉, 상대에게 거친 태클이나 몸싸움을 가해서 상대 선수가 기가 질리게 만들어버리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옛날 영국이 취했던 롱볼 패스를 그대로 이어가 긴 패스를 날려 상대의 뒷공간을 공략한다. 사람들은 이렇듯 패스 워크 따윈 갖다 버리고 압도적인 피지컬로 거칠게 밀어붙이고 롱볼 패스로서 뒷공간을 뚫어버리는 그의 전술을 가리켜 남자의 축구라고 불렀다. 이 전술은 그의 감독 인생 내내 효력을 발휘하여 그가 감독 생활을 시작한 지 22년 간 단 한번의 강등을 경험하지 않고 많은 업적을 쌓는데 기여했다.
4.1 비판
풀리스 식 전술은 현대축구가 추구하는 방향과 정반대되는 시대착오적인 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롱볼 패스를 통한 공격은 말 그대로 '운에 맡기는 것'이다. 운이 좋으면 상대 선수가 미처 마크하지 못한 공간으로 공이 전달되어 공격을 완수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운 좋은 경우는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길게 찬 공은 부정확하게 날아가 상대에게 빼앗긴다. 특히 커버 플레이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팀을 상대헀을 경우, 풀리스가 이끄는 팀은 아무런 역습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터질 공산이 크다.
또한 풀리스 식 전술은 분명 안정적이고 승점을 1점이라도 획득할 가능성이 있지만 경기의 주도권을 잡는 데엔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스토크 팬들이 집권 말기에 풀리스에게 야유를 퍼분 것을 상기하자.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배가 불러서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뻥축만 일삼는 팀에게 지루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 두 시즌은 잔류를 위해 그럴 수 있지만 대륙 대회에 진출하는 등 앞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구단이 언제까지나 계속 그런 식으로 한다면 팬들이 등을 돌릴 만도 하다.
풀리스는 감독 경력 20여 년간 하부 리그에서 여러 팀들을 잔류시키거나 승격시켰고 스토크를 프리미어리그에서 생존하는 데 큰 기여를 하긴 했지만 그 후 스토크를 상위권에 진출시키지 못하고 12~14위권에 정체되었다. 이는 그의 전술이 장기적으로 팀을 상위권으로 진출시키기엔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뻥축에 의한 공격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정체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피지컬을 통한 거친 반칙을 일삼는 작전은 상대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론 램지가 라이언 쇼크로스의 거친 태클로 다리가 골절된 사건이다. 그 외에도 그가 맡은 팀은 언제나 거친 플레이를 일삼아 상대 선수들의 선수 생명을 깎아먹었다. 이런 식의 축구는 그 경기에서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세간의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고 장기적으로는 기피 대상이 되어 구단 발전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다. 20여 년의 감독 경력에서 무수한 업적을 쌓아왔음에도 빅클럽의 부름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전술이 인기 몰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기도 하다.
4.2 옹호
하지만 그가 맡은 팀들의 사정상 그런 전술을 구사할 수 밖에 없다는 반론도 제시되고 있다. 현대 축구의 흐름에 따라 점유율을 가져가고 1:1 패스로 대표되는 짧은 패스를 통한 공략, 빠른 역습으로 대표되는 속공 축구를 추구한다면 관중들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술을 택하려면 선수들의 기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빅클럽들이야 이적 자금이 풍부하니 전술을 수행할 기량이 있는 선수들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풀리스가 맡은 팀들은 그럴 수 없다. 기껏해야 빅클럽들이 쓸어가고 남은 '어중간한' 선수들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빅클럽들이 취하는 전술에 따라 같은 전술을 수행한다면, 그 리그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단적인 예로 블랙번, 블랙풀, 레딩 등을 보라. 그들은 하나같이 '닥공 축구'를 추구한다며 공격 일변도의 전술을 채택했고 사람들은 그들의 용감한 축구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을 오래가지 못하고 모조리 강등되고 말았다. 그에 비해 풀리스의 전술을 취한 팀들은 재미 없는 축구를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모두 잔류에 성공했다. 이는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존'이다. 일단 살아남아야 뭐든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풀리스는 입지가 위태로운 팀들을 맡아 생존시키는 데 성공했고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전술에는 왕도가 없다. 그의 전술이 분명 축구의 흐름과는 반대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고 충분한 이적 자금이 제공된다면, 그는 분명 성과를 낼 사람이고 또한 충분히 성과를 내주었다. 그의 모난 성격 탓에 가는 팀마다 보드진과 마찰 빚다가 쫓겨나는 게 문제지.(...)
5 기타
거의 대부분의 경기에 정장이 아닌
야구모자+트레이닝 레인자켓을 착용한다.
6 수상
6.1 현역 시절
풋볼 리그 3부 우승: 1986-87(본머스)
6.2 감독 시절
풋볼 리그 3부 준우승: 1995-96(질링엄)
풋볼 리그 2부 플레이오프 준우승: 1999(질링엄)
풋볼 리그 챔피언십 준우승: 2007-08(스토크)
FA컵 준우승: 2010-11(스토크)
- 2008-09 시즌 올해의 감독상(스토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