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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루마니아 왕 | ||||
전임자 | → | 현임[1] | → | 후임자 |
페르디난트 1세 카롤 2세 | 미하이 1세 | 없음(왕정 폐지) |
▲ 젊은 시절(1947년)
▲ 노년의 모습(2007년)
1 개요
이름 | Michael I[2] (미하이 1세) |
출생 | 1921년 10월 25일, 루마니아 시나이아 |
부모 | 아버지: 카롤 2세 어머니: 엘레나 공주 |
재위 기간 | 1927년 7월 20일 ~ 1930년 6월 8일 (3년) 1940년 9월 6일[3] ~ 1947년 12월 30일 (7년) |
전임자 | 페르디난트 1세 |
후임자 | 카롤 2세 이후 왕정 폐지로 없음 |
배우자 | 안 드 부르봉파르므 |
서명 |
루마니아의 마지막 국왕. 2차 재위 기간이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 루마니아가 20세기에 겪은 굴곡진 역사를 모두 본 산 증인이기도 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 어린 시절의 사진. 1차 재위 기간 중으로 추정된다.
1921년 루마니아 왕국의 왕세자 카롤 2세와 그리스 왕국의 공주인 엘레나(Regina E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좀 후덜덜한데, 왕자라는 타이틀 이외에도 조상들의 핏줄을 따라 올라가 보면, 어머니 엘레나는 그리스와 덴마크 제국의 혈통을 물려받았고, 할머니 되는 마리아 왕비는 무려 대영제국의 여왕인 빅토리아 여왕의 조카 되는 인물인 데다가 러시아 제국의 차르 집안과도 인연이 있었으니 바로 니콜라이 1세의 친척이었던 것. 따라서 미하이 1세는 영국 왕실과도 인연이 깊었고, 현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는 8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미하이 1세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인 필립 공과는 동갑이나(생일은 필립공이 4달 정도 빠름), 촌수로는 필립공의 5촌 조카이다. 필립공과 어머니 엘레나 왕비가 사촌 관계이기 때문.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엘레나 왕비의 아버지(즉, 미하이 1세의 외할아버지)인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 1세의 셋째 남동생(14살 차이)이 필립공의 아버지인 안드레아스 왕자이다.
본래 그는 왕세손이었고 당시 국왕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세자였던 아버지 카롤 2세는 자신의 부인 엘레나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고 1925년 영국 왕비의 장례식에 참석하던 중 내연 관계에 있던 유대인 여성인 마그데 루페스쿠(1895~1977)와 이탈리아로 도망을 가 버렸다. 아들의 망나니 같은 짓에 화가 난 페르디난트 1세는 카롤 2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그 자리에 손자 미하이를 올렸다. [4]
2.2 1차 재위와 아버지 카롤 2세의 재위
▲ 1928년 1월에 찍은 사진. 쫓겨나기 2년 전의 해맑은 눈빛
1927년 7월 20일, 루마니아의 국왕 페르디난트 1세가 사망하고 미하이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미하이 1세의 나이는 겨우 6세였고 당연히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왕이 비정상적으로 나이가 어렸던 이 상황 때문에 임시 방편이 고안되는데 3인 섭정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섭정을 담당할 3인으로는 니콜라에 왕자(페르디난드 1세의 차남, 미하이의 삼촌), 게오르게 부즈두간(대법원장), 미론 크리스테아(루마니아 정교회 주교)가 선정되었다. 미하이는 섭정에 동의하고 루마니아 헌법을 준수할 것을 서약한 후 정식으로 루마니아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3년 후인 1930년에 아버지 카롤 2세가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카롤 2세는 왕위를 욕심내고 당시 루마니아 총리와 비밀리에 모의하여[5] 왕위 계승을 약속받았다. 이 상황에서 아직 10살도 안 된 미하이 1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결국 졸지에 미하이 1세는 왕위에서 쫓겨나고[6] 1930년 6월 8일부터 카롤 2세가 루마니아 국왕이 되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강제로 빼앗고 죽여 버린 어떤 삼촌이 떠오른다 그러나 카롤 2세는 왕 자리를 먹고도 약속했던 엘레나 왕비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내연녀를 만나기 시작했고 이 꼴을 보고 분통이 터진 엘레나 왕비는 1928년 카롤 2세와 이혼하고 말았다. 또한 실책도 상당해서 삼권분립 제도를 없애고 전제 군주정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사형 제도를 부활시켜 민심을 잃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1939년 나치 독일과 소련 간에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고 동년 9월부터 폴란드 침공에 의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루마니아는 독소 불가침조약의 비밀 합의 조항에 의해 영토 일부[7]를 호구처럼 뜯기면서 카롤 2세는 전국적인 비난 여론과 퇴위 압력에 직면했고, 당시 총리였던 이온 안토네스쿠가 퇴위를 강권해 1940년에 결국 퇴위했다. 이후 왕세자인 미하이 1세가 다시 즉위해 2차 재위 기간을 열게 되고 당시 그는 18세였다. 2번 왕이 되었는데도 20살이 안 되었다니
2.3 2차 재위와 쿠데타
▲ 이온 안토네스쿠(망원경 바로 앞의 인물)와 미하이 1세(안토네스쿠 바로 왼쪽)
하지만 이미 국가의 실권은 안토네스쿠에게 넘어가 버린 상황이었고 미하이 1세는 2차 재위 때가 되어서도 아무런 힘을 지니지 못했다. 때문에 2차로 즉위한 이후 이온 안토네스쿠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온 안토네스쿠는 이미 나치 독일의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고 루마니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으며 1941년 6월 22일 펼쳐진 바르바로사 작전에 루마니아군을 남부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로 대거 파병했다.하지만 천왕성 작전에서 무너져 독일군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데.. 그러나 1944년 추축국의 패전이 확실해지면서 안토네스쿠의 존재가 루마니아에 큰 재앙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하이 1세는 쿠데타를 일으켜[8] 안토네스쿠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온 안토네스쿠는 사형에 처해졌다. 얼마 뒤 루마니아는 연합국에 가입하고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고, 결국 13만 명에 이르는 루마니아군이 굴라그에 끌려가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미하이 1세의 정치 인생은 여기서 끝났다. 그는 공산 정권이 루마니아를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령의 최종 서명에 거부하는 등 노력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1947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포되면서 루마니아의 왕정은 소멸되었고,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의 압력으로 인해 그는 동년 12월 30일 퇴위했다. 재위 기간 내내 자신의 의지대로 해 본 것이 별로 없었던 안습한 왕이라 할 수 있겠다.
2.4 혁명 이후
▲ 결혼식 당시의 모습.
미하이 1세는 퇴위 직전인 1947년 11월 엘리자베스 2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안 드 부르봉-파르마(Anne de Bourbon-Parma)라는 여성을 만났고, 1948년 6월 결혼했다. 이후 이탈리아, 영국을 돌며 생활하다가 스위스에 정착했다.[9] 하지만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지배하던 루마니아 공산권 정부는 미하이 1세의 시민권을 박탈해 버렸고 마음대로 루마니아에 들어갈 수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저 당시 루마니아 꼴을 보면 안 들어가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이후에도 미하이 1세는 자신이 루마니아의 정통성을 지닌 왕임을 계속 주장했으나 이 또한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뿐이었고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이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라는 정신 나간 악마가 등장하여 루마니아에 본격적으로 헬게이트가 열렸다. 차우셰스쿠의 폭정 때문에 루마니아 국민들은 왕가의 복귀를 원하게 되었고 미하이 1세의 국내 평가도 올라갔다. 차우셰스쿠가 사망한 1992년에야 미하이 1세 왕가는 다시 루마니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자 미하이 일가를 반기는 사람들의 수가 무려 10만 명이 넘었으며 당시 대통령 이온 일리네스쿠는 정권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고 다시 입국을 금지시켜 버렸다(...) 이후 1997년 에밀 콘스탄티네스쿠가 대통령이 되면서 미하이 1세는 시민권을 회복하고 루마니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 2014년 미하이 부부의 모습.
현재는 부쿠레슈티에 위치한 엘리사베타 궁전에 거주하고 있다.
2016년부터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염려되는 부분.
3 가족
- 자녀(딸 5명)
▲ 마르가레타 왕세녀와 | ||||
장녀 마르가레타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1947~) 현재 루마니아 왕세녀. 루마니아 적십자사의 회장을 맡고 있다. | 차녀 엘레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1950~) 마르가레타 부부에 자녀가 없는 관계로 마르가레타 다음으로 왕위 계승권을 지녔다. | 3녀 이리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1953~) 2013년에 투계 도박 혐의로 구속되어 루마니아 왕가에서 제명됨. | 4녀 소피아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1957~) | 5녀 마리아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1964~) |
4 기타
- 비행기에 관심이 많아 망명 생활 중에 테스트 조종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 왕세자 시절 교통사고로 자전거 선수를 사망하게 한 흑역사가 있다. 당시 총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는 당연히 언론에서 검열삭제되었다고 한다.
- 평전으로 Michael of Romania: The King and the Country가 있다. 작가는 영국 출신 외교관인 이보르 포터.
- ↑ 명목상의 왕 칭호일 뿐 실권은 없다. 루마니아는 정치 제도에서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여 대통령과 총리가 국가 통치의 실권을 지닌다.
- ↑ 루마니아어로는 mihai I라고 표기한다.
- ↑ 이날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 ↑ 참고로 카롤 2세는 엘레나 왕비와 만나기 전에 지지 람브리노(1898~1953)라는 여성과 사귀면서 카롤 람브리노(1920~2006)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카롤 람브리노의 장남인 파울-필리페(1948년생)은 자신이 가문의 주인임을 주장하고 있으며, 2010년에 무려 62세(!!)라는 나이로 아들을 낳았다.(인공수정 혹은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 정설이다. 참고로 파울-필리페의 부인은 1949년생. 공식적인 입장은 현대 의학의 힘을 빌렸다는데...) 미하이 1세는 딸만 다섯을 둔 지라 자신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듯 하였으나,,, 호엔촐레른 가문은 살리카법과 귀천상혼이 둘다 적용되기 때문에 그도 계승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미하이 1세가 2011년에 아예 호엔촐레른 가문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로므니아 왕가로 바꾸면서 말짱 꽝...
- ↑ 당시 루마니아 정부에서는 왕위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내연녀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엘레나 왕비와 재결합할 것을 요구했다.
- ↑ 이때 왕세자로 격하되면서 ‘알바 이율리아 대공(大功)’이라는
허울뿐인칭호를 얻었다. - ↑ 소련에게는 바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 지방, 그리고 헤르차 지방을 빼앗겼고, 나치 독일은 루마니아를 압박해 트란실바니아 북동부 지역과 다뉴브 강 이남의 카드릴라테르 지역을 각각 헝가리(당시 헝가리 왕국)와 불가리아(당시 불가리아 왕국)에 양도하게 강요했다.
- ↑ 이 쿠데타는 2차 대전의 종전을 약 6개월 정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로 인해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공로훈장을,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으로부터 소비에트 전승훈장(Орден "Победа")을 수여받았다.
- ↑ 벨기에의 레오폴드 3세가 임시 망명을 떠난 장소이기도 하다.
- ↑ 부르봉 왕가의 방계인 부르봉-파르마 가문 출신이다. 손윗고모(아버지의 누나)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황후인 지타이다.
- ↑ 나무위키에는 오른쪽 인물이 남편으로 기록 되어 있지만, 조카(이름은 니콜라스)이고, 사실상 왕가 계승자였는데... 2015년에 왕위 계승 서열에서 제외되었다. 문제는 미하이 1세의 외손자는 니콜라스가 유일하다는 점... (3녀 이리나 공주도 아들을 두기는 했으나 하단에 서술 되었듯이 왕가에서 제명되어버렸다.)
- ↑ 차녀인 엘레나 데 호헨졸레른시그마링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