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서지적 비판

환단고기/비판
서지적 측면고증적 측면사상적 측면

1 신봉자들의 주장

주의!
이 항목은 환단고기 신봉자의 주장으로 사실과 다릅니다.
청록색 글씨로 쓰인 부분에 주목하며 읽어봅시다.

[1]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 조인되면서 한국에 대한 일제의 야욕이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한국에서는 단군을 구심점으로 하는 민족주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고, 1909년 1월 15일에는 홍암 나철이 단군교(이듬해 대종교로 개칭)를 창립하였다. 하지만 세부적인 교리에서 나철과 뜻을 달리한 해학 이기(李沂)는 두 달 뒤인 3월 16일에 운초 계연수(桂延壽)와 함께 단학회를 세우고 단군교에서 분리되어 나왔다.[2]

이때 이기의 집에는 '태백일사'라는 책이 대대로 전해오고 있었고, 계연수의 집에도 '삼성기'가 대대로 전해오고 있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한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러자 여기에 자신이 지금까지 평안북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구한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간행할 생각을 한 계연수는 곧장 이기의 감수를 받으면서 작업에 착수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환단고기로 알려진 책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기가 단학회 창립 넉 달만인 7월 13일에 서울에서 단식 자결하자 환단고기의 출간은 난관에 부딪쳤다. 단학회의 2대 회장이 된 계연수는 환단고기의 원고를 들고 만주 관전현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홍범도와 오동진의 후원을 받아 1911년 3월 16일에 환단고기의 초간본 30부를 인쇄했다. 그리고 1915년에는 관전현 홍석랍자에 배달의숙이란 학교를 세워 본격적으로 사람들에게 환단고기를 가르쳤다.

이로써 최종적으로 환단고기에 들어간 책들은 다음과 같다.

  • 삼성기(상) / 안함로(安含老) 지음
  • 삼성기(하) / 원동중(元董仲) 지음
  • 단군세기 / 홍행촌수(紅杏村叟) 이암 지음
  • 북부여기 /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 지음
  • 태백일사 / 일십당주인(一十堂主人) 이맥 지음

시간이 흘러 1919년 10월, 한 아이가 관전현에 들어왔다. 이제 13살이 된 아이의 이름은 바로 이유립(李裕岦)이었다. 평안도 삭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립은 앞서 4월 7일 신안동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참이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이관집도 계연수와 절친한 단학회 신도였다. 이에 이유립은 배달의숙에서 계연수에게 환단고기를 사사받고 최시흥, 오동진 등의 강의를 들었다.

이때 계연수는 이상룡이 이끄는 서로군정서의 참획군정으로 있었는데, 1920년 8월 15일에 일제의 위순사감독 감영극이 보낸 밀정에게 살해되고 사지가 토막난 채 압록강에 버려졌다. 이때 배달의숙이 불타면서 계연수의 원고와 그가 참고한 책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계연수는 피살되기 전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주면서 육십갑자가 지난 다음 경신년(1980)이 되거든 공개하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때 이유립은 불과 14살이었다.

그해 조선독립소년단의 단장이 되고, 천마산대의 소년통신원으로 활동하던 이유립은 1922년 3월에 삭주로 돌아와 종정산 아래 정곡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이후 1927년 3월에 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간회의 삭주지부에서 활동했지만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고, 1939년에 신풍학원을 세우는 등 아이들을 가르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한편 단학회는 3대 최시흥, 4대 이덕수, 5대 이용담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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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전 건국동맹에도 참여한 이유립은 광복 후 1945년 10월 3일에 이용담(李龍潭)과 함께 단학회를 재건하지만, 소군정의 탄압을 받은데다 1947년 7월에는 아버지 이관집이 사망하고 1948년에는 북한의 토지개혁으로 땅까지 빼앗기면서 그해 3월 월남을 시도했다. 하지만 월남 도중인 5월 2일 해주에서 보안대에 발각되어 4개월 동안 구금되었고, 9월 16일에 다시 월남에 성공하여 38선 이남의 청단에 도착했다.

이후 계룡산에 자리를 잡은 이유립은 1949년 3월 16일에 강화도 대시전에서 동복 오형기(吳炯基)를 만나 환단고기의 정서를 맡겼고, 그해 5월 상순에는 오형기가 발문을 쓴 필사본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이유립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라며 오형기가 발문을 쓴 필사본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계연수의 초간본을 애지중지 간직했다.

이윽고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이유립은 금산으로 피난을 갔지만, 이곳에서 뜻밖의 화재로 책이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종전 이후에 성남에 살다가 홍수로 책이 모두 떠내려갔다는 말도 있다. 급기야 1970년대 초에 대전에서 의정부로 이주해 셋방살이를 하다가, 잠시 군산으로 내려간 사이 집 주인이 집에 있던 책들을 냅다 팔아버리면서 기어이 초간본 환단고기도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유립은 기억을 살려서 어찌어찌 환단고기를 복원해냈다.

주의!
이 항목은 환단고기 신도들의 주장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청록색 글씨로 쓰인 부분에 주목하며 읽어봅시다.

그나마 이유립은 1963년에 단학회를 단단학회로 확대 재건하고, 1976년부터는 박창암이 발행하는 <자유>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사정이 조금 피기 시작했다. 이유립이 조병윤, 양종현, 전형배와 같은 제자들을 만난 것도 바로 이 즈음이었다. 이유립은 그들에게 환단고기를 가르치는 한편 자신의 글로 <자유>지를 거의 도배하다시피 했고, 1978년에는 동아일보 주필 선우휘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듬해인 1979년에 조병윤이 이유립의 환단고기를 가져다가 무단으로 광오이해사에서 영인본 100부를 출간하고 말았다. 처음으로 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손을 벗어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유립은 노발대발하며 단단학회 대표를 사칭하며 자신의 허락도 없이 오자도 많은 환단고기를 출간했다는 이유로 조병윤을 단단학회에서 파문해버렸다.

이에 이유립은 이번에는 박창암에게 자신의 원고를 넘겨주었는데, 박창암은 다시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에게 이것의 주해를 부탁했다. 물론 이유립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가지마 노보루는 이를 엉뚱하게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끼워맞춘데다, 역사의 정통을 단군에서 일본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왜곡해 1982년에 일본어로 출판해버렸다. 이유립은 화를 내면서 전형배를 시켜 박창암에게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복사본을 돌려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문제의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

하지만 환단고기가 어찌되었든 이유립은 여전히 잘 나가는 중이었다. <자유>지를 기반으로 이유립, 안호상, 임승국, 최태영, 문정창 등이 뭉친 '국사찾기협의회'가 세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1978년 9월 29일에 이들은 국사교과서를 전면 개정하라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정도로 세가 커졌다. 1981년에는 한미연합사령부에서 초청강연을 했는데 이때가 바로 이유립의 전성기였다.

결국 1983년에 이유립은 자신이 직접 교정한 환단고기를 배달의숙에서 영인본 100부로 재출간했다. 여기에서 이유립은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오형기의 발문을 없애버리고, 말미의 서지사항에는 1911년 3월 16일에 운초 계연수에 의해 초판이 발행되었음을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의 허락 없이 출간된 광오이해사본을 흑역사로 취급한 나머지 재판본의 서지사항을 1979년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그런데 웃프게도(...) 배달의숙본 100부 가운데 시중에 나온 것은 고작 7부에 불과하고, 나머지 93부는 이유립이 보관하고 있다가 분실하면서 사실상 세상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반면 정작 이유립이 족보에서 파버린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는 앞서 살펴본 대로 가지마 노보루에 의해 일본에서 출판되었고, 이것을 임승국이 국내로 가져와 1986년에 '한단고기'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하면서 국내에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국내에 환단고기가 알려진 것이 이때부터니 세상일이란 참...

비운의 배달의숙본 환단고기

어찌되었든 이 환단고기 분쟁을 기점으로 박창암과 사이가 소원해진 이유립은 자연 국사찾기협의회에서도 점점 소외당하기 시작했다. 1981년 8월 31일에 '국사찾기협의회'가 제출한 국사교과서 내용 시정 요구에 관한 청원서와 11월 26일에 열린 공청회에서는 이미 환단고기가 2년 전 출간되었음에도 그와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들이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급기야 1984년에 이유립은 의정부에서도 쫓겨나 김포의 단칸방에서 빈궁하게 살게 되었고, 1985년에 김포까지 찾아온 박정학이 국사 찾기에 나설 것을 제안하자 오히려 "나는 끝났다, 이제는 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나마 박정학이 화곡동에 전세집을 마련해주고, 전형배의 주선으로 김낙천 고려가 사장이 문집 출간을 제안하면서 이때부터 이유립은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는 작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유립은 환단고기에 현토와 주석을 다는 작업도 진행했다.

그러나 1986년 4월 17일 쓰러진 이유립은 다음날 새벽 사망하였고, 남겨진 유고 문집은 이듬해 '대배달민족사'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물론 1500질이나 찍어낸 데 반해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창고에 쌓아두었던 것이 창고가 침수되면서 전량 폐기되었다고(...). 하여튼 배달의숙본의 역주는 이후 전형배와 고동영을 통해 명맥이 이어졌고, 태백교의 종통은 양종현에게 이어지다가 마침내 2012년 증산도에 흡수되었다.

...고 이 책의 신도들이 주장하나,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정말 쓸데없이 자세하고 장대하다

사실 신도들끼리도 말이 안 맞아서 정리하는 데 고생했다

2 지은이에 대한 문제

우리 동방이 순임금과 하나라 때 어떠하였는지는 역사에 전하지 않아 상고할 수 없지만, 주나라가 은나라 태사 기자(箕子)를 책봉하였으니 그곳이 중국과 통하였음을 대개 알 수 있을 따름이다.

- 이색, 목은집 목은문고 권8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1378)

우리 동방으로 말하자면 단군의 조선은 상고할 수 있는 전적이 없으나 기자의 조선과 혁거세의 신라는 모두 역년이 1천 년이었는데 그 도는 어디에서 말미암았는가?

- 하륜, 호정집 권3 잡저 책문 제3

2.1 안함로와 원동중의 황당한 실체

환단고기에는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삼성기가 나란히 들어 있는데, 이것은 각각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삼성기 전 상편'과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삼성기 전 하편'으로 일컬어진다.[3] 그런데 문제는 정작 환단고기 이외의 그 어느 기록에서도 안함로나 원동중이 지었다는 삼성기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한 군데 등장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세조실록에 실린 1457년의 도참비기 회수령이다.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 삼성밀기, 안함로원동중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 도증기, 지리성모, 하사량훈, 문태산왕거인설업 등 삼인기록 수찬기소…… 등의 문서는 마땅히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서는 안 된다.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하도록 허가하고, 자원한 서책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이를 관청과 민간 및 사찰에 널리 알리도록 하라.
<html>

『세조실록』 3년 5월 26일
</blockquote>
그런데 환단고기에 따르면 안함로가 쓴 삼성기(A)와 원동중이 쓴 삼성기(B)는 이름만 같이 서로 완전히 다른 책이지만, 세조실록에는 마치 하나의 책처럼 열거되고 있다. 게다가 단순 고유명사의 나열인 이 기록은 어떻게 띄어 읽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보기에 따라 안함이 쓴 '노원'이라는 책과 동중삼이 쓴 '성기'라는 책이 될 수도 있고, '안함로원'이 하나의 책 이름이고 동중이 쓴 '삼성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뭔 YHVH도 아니고 물론 이것과 교차검증할 수 있는 기록이 아무것도 없다면, 거꾸로 환단고기를 근거로 이것을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 보고 안함로가 쓴 삼성기(A)와 원동중이 쓴 삼성기(B)를 묶어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조의 도참비기 회수령으로부터 고작 한 시대 뒤인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와 교차검증되는 내용이 존재한다.

수양산성: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만 856척이고 높이가 18척이다. 세간에 전하길 "옛날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童仲) 세 사람이 터를 보아 쌓았다"고 한다.

<html> <p style="text-align: right;">『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 해주목

이것을 세조실록의 기사와 비교해보면 안함(安含)이 안함(安咸)으로, 노원(老元)이 원로(元老)로, 동중(董仲)이 동중(童仲)으로 글자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서로 대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4] 즉 안함로와 원동중이란 사람은 사실 안함·노원·동중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을 하나로 합치고 둘로 나눈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삼성기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세 성인이란 바로 안함·노원·동중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즉 안함·노원·동중이란 삼성기의 저자가 아니라 주인공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문제의 안함·노원·동중 삼성기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을까?

오늘날 노원과 동중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안함의 전기가 해동고승전에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안함은 601년부터 625년까지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라의 승려였는데,[5] 축지법을 쓰거나 예언서를 남기고 입적한 다음에는 서방정토로 날아가는 등 각종 기이한 신통력을 부렸다고 한다. 따라서 입적한 뒤에는 아도화상이나 자장율사와 나란히 흥륜사에 모셔져 신라 10대 성인의 한 사람으로 받들어졌다.

이를 기초로 노원과 동중의 정체도 얼마간 짐작해볼 수 있다. 안함은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오면서 서역에서 온 비마라진제 · 농가타 · 불타승가와 함께 중국인 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와서 불경을 번역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두 사람이 노원과 동중일 가능성이 크다. 즉 이들이 안함과 함께 활동하면서 각종 신이한 행적을 남겼고, 그로 말미암아 셋이 하나의 세트로 취급되면서 삼성기라는 책으로 기록이 남았던 것이다.[6]

2.1.1 안함로

그러자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환단고기 신도들은 삼성기의 저자인 안함로가 바로 위에서 말한 신라의 고승 안함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뒤에 붙은 로(老)는 그저 안함을 수식하는 존칭이므로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이 합리화시키려 하는 환단고기의 안함로를 제외하면 사람의 이름 뒤에 존칭으로서 로(老)를 붙였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즉 이들의 논증은 전형적인 Ad Hoc이다.

게다가 안함이란 사람은 엄연히 불교의 스님이다. 그것도 단순한 스님이 아니라 23세부터 47세까지 장장 스물네 해 동안을 장안에 머무르면서 국제적으로 교류하다 온 정통 유학파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안함의 불교신앙과 삼성기의 신앙관은 지나치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삼성기에는 불교적인 색채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그 대신 도교적인 신앙관만이 노골적으로 부각되고 있어서 도저히 신라시대에 쓰여진 승려의 기록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한 신이 있어서, 시베리아(斯白力)의 하늘에서 홀로 화하여 신이 되었으니, 광명은 우주를 비추고 권능은 만물을 낳았다. 장생구시(長生久視)하면서 항상 쾌락을 얻었으니, 지기(至氣)를 타고 노닐며 오묘하게 부합됨이 자연(自然)하였다. 무형(無形)하지만 보이고, 무위(無爲)하지만 이루고, 무언(無言)하지만 행하였다. 신라시대 기록에 왜 시베리아가 나오는지는 묻지 말자(...)

<html> <p style="text-align: right;">『환단고기』 삼성기 상편

또한 동시에 안함은 신라의 귀족이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의 최고 관등인 이찬에 오른 진골이었고, 애당초 그가 중국에 유학을 간 것도 진평왕의 정책적인 지원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게 무지막지하게 시달리는 중이었다. 당장 안함이 귀국한 바로 그해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삼성기에는 고구려가 단군을 이어받은 천손의 나라로 서술되고 있다(...).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2.1.2 원동중

그럼 다른 한 사람인 원동중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이에 대해 환단고기 신도들은 여말선초의 성리학자(!)인 운곡 원천석을 끌어오고 있다. 하지만 명색이 성리학자인 사람이 천신이니 주술이니 운운하는 글을 썼다는 것부터 무리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천석은 그들이 주장하는 한민족 고유의 신앙과는 동떨어진 인물로서 공자의 유교, 노자의 도교, 석가의 불교는 모두 개인 수양의 방편으로 귀결된다는 삼교일리론(三敎一理論)을 수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원천석의 역사인식은 어디까지나 중화주의적 문명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중국의 삼황오제는 신생국가 조선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태평성대였고, 황제는 치우를 토벌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삼성기 하편에서는 정 반대로 치우가 황제를 신복시켰다고 하고 있으며, 삼황오제는 지들끼리 분열되어 치고받고 싸우던 막장 난세로 서술되어 있다. 원천석이 원동중이라면 어디서 인격분열이라도 일으켰던 것일까?[7]

따라서 원천석은 단군조선의 고유한 전통이 아니라, 중국에서 온 기자조선에 의한 문명화 과정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삼성기 하편에서는 단군이 천하를 통일하고 세상을 안정시켜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함으로써 그를 몹시 떠받드는 관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환단고기 신도들의 기준으로 모화사상에 찌든(?) 원천석은 삼성기와 같은 책을 쓰지 않았고, 쓸 수도 없고, 쓰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천자께서 동방을 중히 여기심인지

조선이란 이름은 이치에 적당하네
기자의 유풍이 장차 일어난다면
분명히 온 중국과 찬란함을 다투리
<html> <p style="text-align: right;">『운곡행록』 시 "국호를 조선으로 고침"

2.2 이암과 이맥, 이유립의 족보 금칠

이어서 환단고기는 단군세기의 저자인 '홍행촌수'를 고려 말기의 문신 이암(李嵒)으로, 태백일사의 저자인 '일십당주인'을 조선 전기의 문신 이맥(李陌)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이암의 4대손이 이맥이고, 다시 이맥의 22대손이 이유립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환단고기를 쓰고 공개한 세 사람이 모두 한 집안인 것이다. 이외에도 이기, 이형식, 이상룡, 이덕수, 이용담 등 환단고기에 관련된 인물 대부분이 바로 이유립과 같은 고성 이씨다. 이 모두가 정말 공교로운 우연에 지나지 않을까?

이에 대해 환단고기의 신도들은 고성 이씨 가문에서 대대로 한민족의 참역사를 보전해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실제로 태백일사의 발문에는 집에 간직되어 있던 기록들을 토대로 태백일사를 저술했다고 하고, 이것을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집안에 고이 숨겨둔다고 적어놓았다. 그러므로 이맥이 쓴 태백일사가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다가 그 후손인 해학 이기에게 이르렀다고 하면 얼핏 아귀가 맞아 보인다.

그런데 이 설정놀음에는 대단히 치명적인 구멍이 있다. 바로 고성 이씨라고 해서 다 같은 집안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성 이씨는 조선 초 이원에게서 파가 나뉘었는데, 여기에서 이기는 둔재공파이고 이맥은 사암공파에 속한다. 더욱이 사암공파는 이맥이 태어날 즈음에는 이미 분가해 있었기에, 그 집안이 이맥이 쓰고 감춘 태백일사를 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맥이 감춘 태백일사가 이기의 집에 대대로 전해왔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7세이존비(尊庇)
8세이우(瑀)
9세이암(嵒)
10세이강(岡)
11세이원(原)
12세이대(臺)이증(增)이지(墀)
13세이맥(陌)
14세이린(嶙)
15세이방(滂)
26세이기
30세이상룡
35세이유립
(둔재공파)(참판공파)(사암공파)

물론 둘 사이에는 장장 560년에 달하는 시간이 있고, 그 동안 이 모순이 해소될 만한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기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삭주로 피난을 갔다가 우연히 태백일사를 얻고, 그것이 다시 우연히 이기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근거 없는 부연가설보다 더 개연성 있는 설명은 이유립이 자기 가문을 띄우기 위해 조상과 친척들의 이름을 팔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계연수에게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주었었다는 태천의 백관묵은 이유립의 외가(...).

더군다나 환단고기에서 유일하게 고려시대를 기술한 태백일사 고려국본기에서 전체 분량의 1/4에 달하는 1204자가 오로지 고성 이씨 가문인 이존비와 이암을 칭송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는 것도 이것이 엄정한 역사서라기보다 조상을 선양하기 위해 꾸며낸 위문학(僞文學)에 가깝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칭송하는 내용조차도 대부분 계통을 달리하는 역사서들과 교차검증되지 않는 창작된 내용이다. 이는 해당 항목 참조.

아니나 다를까, 오늘날 고성 이씨 문중은 이러한 이유립의 낚시에 거하게 낚였다. 이들 문중의 회보를 보면 표지에 환단고기의 삼조선을 싣고 있지를 않나 그야말로 환상이다.[8] 이암, 이기, 이상룡 등의 인물들은 환단고기와 전혀 관련이 없음에도, 문중이 이에 낚여서 환단고기와 엮어 칭송하니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고성 이씨인 위키니트가 환빠에게 잠식당해가는 가문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2.2.1 이암

물론 정말로 행촌 이암이 환단고기에 수록된 단군세기의 저자일 수도 있다. 딱히 이암이 단군세기를 짓지 않았다는 사료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 가능성까지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0.026%, 불가능이 아니다! 명백한 가능성! 문제는 다른 여러 기록들에 전하는 이암의 생애와 사상에 비추어, 이암이 정말로 단군세기라는 책을 짓거나 그 내용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역사적으로 이암의 사상에는 유교적 합리주의와 불교적 자유주의가 결합되어 있었다. 그는 재상을 역임하면서 상서 태갑편을 필사해 왕에게 바쳤는데, 이는 그가 유교적인 사회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은퇴한 뒤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은거해 불경을 필사하며 여생을 보냈는데, 이는 또한 그가 불교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처럼 유교와 불교라는 두 가지 사상의 조화로운 결합을 꾀하는 것은 고려시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하지만 단군세기의 신비주의적 천신 신앙은 정작 이러한 이암의 사상과 크게 괴리되어 있다. 이암은 오히려 국난 속에서 도술과 같은 신비주의적 방법에 의지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했는데, 예컨대 홍건적에 맞서 평양을 지키던 중 도술로 적을 물리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박거사라는 도사를 개경으로 압송해버린 일화가 그의 이러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의 불교적인 모습도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서 신비주의적 국가관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뜬 세상의 헛된 이름은 바로 정승이고

작은 창의 한가한 맛이란 곧 산승일세
그 중에도 또한 풍류 깃든 곳 있으니
한 송이 매화가 부처 등에 비치었네
<html> <p style="text-align: right;">『동문선』 칠언절구 "식영암 선로에게 주다"

이암이 쓴 위의 시를 단군세기의 서문과 비교해보자. 두 서술자의 논조와 자세가 동일인이라 생각할 수 없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외인(外人)들이 간섭하는 정치가 갈수록 더욱 자심해져서, 양위와 복위와 임명을 제멋대로 하여도 나와 같은 대신들이 속수무책일 따름인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에 역사가 없으니 국체가 혼을 상실한 때문이다! 한 대신의 능(能)으로는 조금도 이를 구할 수 없다. 말하여 이에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구국(救國)을 다짐하게 하고 구국에 보탬이 되어 이를 구한다면, 그 뒤에 비로소 구국이란 말을 얻을 것이다.

<html> <p style="text-align: right;">『환단고기』 단군세기 서

또한 단군세기는 공민왕 12년(1363)에 쓰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때는 이미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한창으로 원나라가 임명한 덕흥군과 전쟁이 벌어지던 시점이었다. 게다가 외세의 간섭에 속수무책이었다는 말과 달리, 이암은 오히려 그 자신이 충정왕을 옹립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원의 허락을 요청한 사람이었다. 결국 단군세기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이암의 행적이나 사상과 모순되어 정말로 그의 저술이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9]

2.2.2 이맥

태백일사를 저술했다는 이맥은 더욱 가관이어서, 애당초 그의 행적이 실존인물과 맞지 않는다. 태백일사의 발문에 따르면 이맥은 갑자년(1504)에 괴산에 유배되었고,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경진년(1520)에 찬수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산군일기는 이미 1509년에 편찬이 끝났으므로 1520년에는 찬수관이란 자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권벌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연산군일기의 수찬관 목록 어디에도 이맥의 이름은 없다.

그나마 이맥이 찬수관 가까이라도 가본 것은 한참 전인 1503년 즈음으로, 사헌부 장령이 되기 전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했던 게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작 이맥이 유배되기 전의 일이므로 태백일사와 무관할 수밖에 없다. 결국 태백일사의 서지사항 역시 정말 이맥이 편찬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홍치 무오년(1498)에 문과에 합격하여 봉정대부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기미년(1499)에 계모 남씨의 상을 당하였다가 상복을 벗자 다시 전적에 임명되었고 교서관 교리, 예조 정랑을 거쳐 종부시 첨정으로 승진하여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홍치 16년(1503)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장숙용을 총애하여 사저를 크게 짓는 것을 오래도록 극력 간쟁하자 연산군이 노하여 견책한 바람에 동료들과 같이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html> <p style="text-align: right;">『국조인물고』 이맥(비명)

그럼 1520년에 이맥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맥은 중종반정 이후 대사간이 되었지만, 이내 자리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대간의 논박을 받고 돈녕부 도정과 장례원 판결사를 전전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마저도 1520년 당시에는 장례원 판결사로서 동료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잘 알려진 것처럼 장례원은 노비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던 기관이다. 여기 있는 사람이 무슨 인연이 있어서 내각의 비서들을 열람했다는 것일까?

2.3 범장, 귀화 중국인 성리학자

본명이 범세동이라는 범장은 더욱 가관인데, 다름아닌 그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가 바로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즉 환빠들의 논리에 따르면 환단고기는 중국에서 온 '오랑캐'에 의해 쓰여진 한민족의 정통사서인 것이다.(...)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범승조는 본래 원나라에서 예부시랑을 지내다가 고려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와 정착한 사람이었고, 더군다나 이 과정에서 주자의 사서집주를 들고 와 고려에 보급한 성리학자였다. 그 증손인 범장 자신도 성리학자인 정몽주의 문하생이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2.3.1 범장

다음은 범세동이 지었다는 책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의 일부.

우리 동방은 처음 오랑캐(九夷)에서 시작되어 단군이 중국 요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웠는데, 우임금 때에 이르러 부루 세자가 도산(塗山)에 가서 중국의 제도를 대략 모방해 와서는 이를 약간 베풀어서 오랑캐 습속(夷俗)을 바꾸었다. 주 무왕에 이르러서는 은나라의 태사(太師) 기자가 주나라에 신속하지 않고 동으로 건너왔는데, 단군의 후대 임금이 그의 덕에 심복하여 도읍을 넘기고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 동편으로 국경을 옮기니 기자가 나라 받기를 사양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에 그를 옹립하여 임금으로 삼으니 기자가 부득이 인심을 거스르지 못하여 왕위에 올라서는 팔조금법을 마련하였다.

- 범세동, <화동인물총기>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선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슬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환단고기』 「북부여기」 상

3 엮은이들의 수상쩍은 존재

210px 파일:Attachment/환단고기/서지적 비판/계연수B.jpg
좌측은 양종현이 그린 계연수 초상, 우측은 이일룡이 그린 계연수 초상. 둘 다 이유립의 증언에 기초했다.

사실 환단고기에 수록된 문헌들이 수백 년을 이어왔다는 증거는 고사하고, 구한말에 계연수라는 사람이 환단고기를 엮었다는 증거조차도 전혀 없다. 그보다도 애당초 계연수라는 사람이 실존 인물인지의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 추종자들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런저런 독립 운동에 동참은 하셨는데요, 실제 증거는 없어요(..)." 헌데 역사에 기록만 안 되었겠나? 국내 유일의 계씨인 수안 계씨 족보에도 계연수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거니와, 전하기로는 1919년에 이상룡의 막하에서 참획군정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지만 정작 이상룡의 문집인 석주유고에는 계연수라는 이름도 안 나온다. 또한 민족대표부터 시작해서 난다긴다하는 독립지사는 전부 잡히면 재판을 받았지만 계연수는 참획군정이 되자마자 이듬해인 1920년에 일제의 밀정에게 암살당했다고 하니 재판기록도 있을 리 없다.[10] 예를 들면 이런 기록 말이다.

독판부 : 독판 이계원, 부독판 여준, 부관 이장영

정무청 : 정무청장 이탁, 검사과장 김수장, 통계과장, 교섭과장 권승무, 비서 송대준, 과장
내무부 : 내무사장 곽문, 검무국장 최명수, 서무과장 김종훈, 교통과장 성인호,
실업과장 김정제, 노동과장, 비서 김유성, 검독 정상묵
법무부 : 법무사장 김응변, 상법과장 김필, 군법과장 외 불명
재무부 : 재무사장 남정변 외 불명
학무사 : 학무사장 김충식, 교육과장 안세민, 편집과장 장지필
군무사 : 군무사장 양규열, 헌병과장 최명수
참모부 : 참모부장 김동삼 외 불명
사령부 : 사령관 이청천 외 불명
밀수제102호 기1067 8월 10일
1920년 8월 9일 고경제23793호
유하현지방 불령선인단 조직변경에 관한 건
조직기관(별지)[11]

무엇보다 이런 계연수에 대한 단군교[12]와 태백교[13]의 설명이 서로 배치된다. 단군교에서의 계연수는 1916년에 묘향산의 한 석굴에서 천부경을 발견해 자신들에게 보내준 일회성 NPC에 지나지 않지만, 태백교에서는 자신들의 전신이라고 주장하는 단학회의 2대 회장으로 초대 회장인 이기가 자살한 뒤 침체된 단학회를 유지 부흥시킨 인물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단학회라는 게 존재했다는 증거도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14] 그런데 잠깐, 그런데 왜 1916년에 발견된 천부경이 1911년에 초간되었다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벌써부터 실려 있는 것일까? 오오 타임머신 오오

나철 선생과의 국사광복의 기본원칙에서부터 의견의 귀일(歸一)을 볼 수 없고 단군교의 환인, 환웅, 환검을 일체로 하는 삼신설과는 달리 우주 유일신으로서의 작용삼신(作用三神)을 받들게 되고 단군교의 단군개천과는 달리 환웅천왕의 신시개천을 내세움으로써 국사의 상한을 환웅천왕의 태백산 천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확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 <태백진훈>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보충설명하는 기본자료로서 <증주태백진경>을 저술하였다.

이유립, "국사 바로잡기 천년의 혈맥", <자유> 1987년 12월호

진군(眞君=단군)의 글이 전수된 과정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진군이 글을 완성하여 그 부본을 금거북[金龜] 속에 넣어 바다로 띄우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아무데고 네가 원하는대로 가다가 그칠 때 이것을 획득한 자가 성인이 될 것이다.' 우(禹)가 낙수에서 이것을 습득하였는데 이것이 낙서(洛書)라고 하였다. 이것이 한번 전하여 이윤(伊尹)을 얻고, 다시 전하여 기자(箕子)를 얻게 되었으니 기자는 진군의 제3세 화신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군의 도통에 있어서 내통(內統) · 외통(外統)을 모두 계승한 적손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자의 글이 완전하기 때문에 금강조사(金剛祖師) 이래로 술이부작(述而不作)했다고 한다. 마치 공자의 논어를 두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계연수와 환단고기를 공저했다는 이기의 역사인식이 이 지경이다...

─ 박종혁, 「해학 이기 연구」

덧붙여 계연수의 범례를 보면 계연수가 환단고기에 수록되는 여러 문헌을 보고서는 '자아인간의 주성발견', '민족문화의 표출이념', '세계인류의 대합공존'을 기뻐하는 구절이 있는데, 사실 1911년은 이제 막 신채호에 의해 민족사관 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던 시점인데다가 무엇보다 바로 지난해에 나라가 망했다. 방금 나라가 망한 판국에 세계인류의 대합공존이라는 소리는 그냥 이대로 살자는 소리, 더 나아가서는 일제가 외치던 대동아공영권에 조력하자는 말이 되므로 그저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결국 민족문화니 세계인류니 하는 개념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실체로 구현되고 난 후에야 존재할 수 있는 것. 여기서도 잠깐, 왜 5월 5일에 쓴 범례가 3월 16일 발간되었다는 환단고기에 벌써부터 실려 있을까? 역시 타임머신은 실재했다니까!

이밖에도 계연수의 실존을 증명한다고 제시되는 자료로는 1920년에 편찬된 정신철학통편과 1960년대에 지어진 해동인물지가 있는데, 정신철학통편은 정훈모의 단군교와 관련된 인물로 언급된 것이고, 해동인물지는 그로부터 한참 뒤에 태백교가 만든 것이라 객관적 신뢰성이 전무하다.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거냐? 또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민족사서라면 대종교의 교주 김교헌이 만든 신단실기나 신단민사가 고작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홍범도나 오동진의 지원을 받아서 찍어냈다는 환단고기의 존재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15] 또 범례에 보이는대로 한민족의 위대함을 증언하는 사서가 어지간한 집에는 발에 채이게 굴러다녔다면 하다못해 조대기나 진역유기와 같은 유사 자료라도 어떻게든 발견되었을 터인데, 실제로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만일 신채호가 환단고기를 보고 사료로 삼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쓰는 글마다 주구장창 사료의 부족을 한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부여는 왕검 이후 그 자손들이 서로 그 보장(寶藏)을 지켜서 태평하고 부유함을 자랑하였으니 볼 만한 사료가 많았으나 모용외의 난에 그 나라 이름과 함께 다 없어지고, 고구려에는 동명성제와 대무신왕 때에 사관이 조선 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 사실을 기재하여 유기라 이름한 것이 100권이었는데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난에 다 빼앗겼다. 단군 왕검의 이름과 삼한·부여의 약사(略史)가 위서(魏書)에 다 실려 있음은 위나라 사람이 유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 뒤 백제 중엽에 고흥 박사가 서기(書記)를 지었고, 고구려 말엽에 이문진 박사가 신집(新集)을 지었으며, 신라는 진흥대왕 전성시대에 거칠부가 신라 고사(故事)를 저술하여 삼국이 다 한 세대의 전고(典古)를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한 마디 말이나 글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이는 천하만국에 없는 일인지라,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다.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제3장 <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略評>

뭐 굳이 따지자면 신채호가 주창한 삼조선설이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기는 하는데, 정작 신채호는 환단고기를 바탕으로 삼조선설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중국과 한국의 사서들을 나름대로 해석함으로써 삼조선설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삼한의 진한, 마한, 번한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조선에도 진조선, 마조선, 번조선이 있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그 위에서 사기 조선열전에 연나라가 진번조선(眞番朝鮮) 두 나라를 복속시켰다는 기록을 '진·번조선'으로 끊어읽었던 식이다. 이처럼 그 근거와 과정이 명백한 추론에 환단고기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즉 환단고기를 보고 삼조선설이 나온 게 아니라 삼조선설을 보고 환단고기가 나온 것.

그런데 이러한 신채호의 삼조선설도 여타 기록에서 진번(眞番) 또는 조선(朝鮮)은 나와도 진조선이나 번조선은 나오지 않는다는 점[16]에서 광복 이후의 사학계에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오직 환단고기의 추종자들만이 환단고기를 근거로 삼아 삼조선설을 신앙하고 있을 뿐.(...) 증거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거냐?(2) 덧붙이자면 오히려 신채호는 나철 사후 김교헌의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에 보이는 비실증적, 종교적 역사관에 실망한 나머지 사실상 대종교와 결별하고 아나키즘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단군교의 경전인 천부경을 후대의 위작이라 깜으로서 간접적으로 계연수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서적의 진위와 그 내용의 가치를 판정할 안목이 없으면, 후인 위조의 천부경 등도 단군왕검의 성언(聖言)이 되는 것이다.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제4장 <결론>[17]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태종의 분서 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 신채호, 『조선상고사』, 제1편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18]

4 이유립의 사악한 조작

4.1 안함로와 원동중을 만든 과정

세조실록 → 오주연문장전산고 → 광문회(정인보) → 오천년간조선의얼 → 환단고기

4.2 아, 편저자가 요기잉네?

자, 그렇다면 이제 진짜 편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볼 차례다. 찾긴 뭘 찾아 당연히 이유립이지 이유립은 1911년에 계연수가 간행했던 환단고기 초간본 30부는 어느샌가 소실되었으므로,[19] 환단고기는 그의 기억에 따라 필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유립은 환단고기를 열심히 익혔고 어려서 전령으로 활동하면서 암기력이 단련됐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기억에 의존해 기록을 복원한 여러 사례들을 봤을 때에는 설득력이 대단히 낮다. 그런데 1949년에 오형기가 마니산에 있는 태백교의 본당 대시전(大始殿)에서 환단고기의 필사를 부탁받았다는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작 기억으로 복원했다는 판본은 어디가고 현전하는 환단고기는 모두 오형기의 필사본이다. 애당초 증언과 현상이 불일치하는 것.[20]

각설하고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환단고기라는 게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79년이 최초[21]인데, 사실 그전부터 이유립은 환단고기에 들어간 내용, 아니 환단고기에 들어 내용을 여기저기 마구 뿌리면서 수정하고 다니고 있었다.[22] 이건 뭐 한 갑자 뒤 경신년(1980)에 공개하겠다던 계연수와의 약속은 진작에 팔아먹었던 것인가. 아니, 환단고기의 출간 과정 자체도 이유립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니 정말로 어디다가 팔아먹었던 듯하다.(...) 각설하고, 그런데 이처럼 환단고기에 들어갈 내용을 아주 착실히도 여기저기 뿌리면서 수정하고 다녔던 덕분에 오히려 이것들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창작'한 과정을 추적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환단휘기
1971
세계문명동원론
1973
동양문명서원론을 비판한다
1976.5
환단고기
1979
단군세기 단군가륵
十年
人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利, 自此, 稱其地曰素尸毛利, 今牛頭州也. 其後孫, 逃於海上,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가륵
戊申十年
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利, 自此, 稱其地曰素尸毛利, 今牛頭州也. 其後孫, 逃於海上,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가륵
戊申十年
豆只州叛, 命余守己, 斬其酋素尸毛, 自, 稱其地曰素尸毛, , 今轉音爲首國, 也. 其後孫, 有陜野奴者, 逃於海上, 據三島, 僭稱天王.
단군세기 단군매륵
三十八年
遣裵幋銘, 往討海上. 三道, 倭之有號始此.
단군세기
三十八年
新野侯裵幋,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倭之有號始此.
단군세기 단군가륵
甲寅三十八年
遣新野侯裵幋,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단군세기 단군매륵
甲寅三十八年
野侯裵幋命,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일본 진무 덴노의 형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동쪽 바다에 들어갔다는 전설을 한국에서 동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을 세운 것으로 이해. 이 사람의 이름이 이나히노미코토(稻飯命)인데, 이 이름이 한국어로 쌀밥이라는 의미이므로 같은 뜻의 '벼밥'을 음차하여 배반(裵幋)이라고 이름붙임.이나히보다 먼저 스사노오가 신라 소시모리에서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신화가 있으므로 첨가. 소시모리=소머리=우두주의 연상 과정을 거쳐 소시모리를 신라시대 우두주였던 강원도에 비정. 이천서씨의 시조 여수기가 단군시대에 강원도 예국(濊國)을 다스렸다고 하므로 첨가. 또 이때는 아직 신라가 없으므로 배반명을 '신야후'로 만들어 해결!역대 단군들의 연대 배분을 통해 갑자를 확정. 뭐 여기서 더 크게 손볼 건 없고, 스사노오가 추가되었으니 이나히부터 '왜'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스사노오와 상충되는 것 같아서 삭제.진무의 이름 가운데 하나가 협야존(狹野尊)이므로, 일본으로 건너가 처음으로 천왕을 칭했다는 자의 이름을 협야존, 아니 협야노(奴)라고 낮추어 씀. 한편 배반명도 진무와 오버랩시켜보고자 하는 의도로 호칭을 신야후에서 협야후(陜野侯)로 변경. 이렇게 해놓으니 보니 강원도는 그 무대로 너무 좁은 듯하여 '두지주'와 '우수국'이란 말로 위치를 흐림.
태백일사
昔有桓國, 衆富且庶焉, 初桓仁, 居于天界, 得道長生, 擧身無病, 代天宣化, 使人無兵, 人皆作力, 自無飢寒.
태백일사 환국본기
朝代記曰
昔有桓國, 衆富且庶焉, 初桓仁, 居于天, 得道長生, 身無病, 代天化, 使人無兵, 人皆力作以勤, 自無飢寒.
태백일사
桓雄, 亦以是日, 自天以降, 立檀祭天, 爲民祈禳.
(없음)
태백일사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天下.
태백일사 신시본기
三韓秘記曰
伏羲, 旣受封於西鄙, 位職盡誠, 不用干戈, 一域化服, 遂代燧人, 號令域外
환인은 역사적 지도자가 아니라 일종의 신격. 천계에 살면서 병들지 않는 몸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선천적인 완전성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존재. 사람은 저마다 능력을 지닌 유토피아적 세계. 환웅은 실제로 천계에서 내려온 신적 존재. 천하란 곧 중국!환인은 한민족의 역사적 지도자. 지상에 살면서 몸을 병들지 않게 잘 관리하며, 후천적으로 완전성을 만들어낸 존재. 사람은 열심히 일함으로써 먹고 살 수 있음.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은 삭제. 중국 까이거 오랑캐 아니여? 뽀대나게 조대기, 삼한비기 그런 데서 인용했다고 하자!

이외에도 단군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의 전신이라는 가림토(加臨土)가 원래는 원시 흉노의 의사소통 수단이었다거나, 직구다국의 이명은 구막한국(환단고기에서는 매구여국)이라거나 하는 환단고기와 사이비한 내용이 이유립의 입에서 직접 나오고 있다.(!) 이것이 이유립의 창작 과정이 아닌 단순한 실수라고 해도, 이렇게 혼란스러운 기억력과 논리력, 그리고 일단 쓴 글을 자기 마음대로 근본부터 뜯어고치는 사람됨을 가진 사람이 오직 기억만으로 되살려 썼다는 책이 과연 그 원본이라는 것과 얼마나 일치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또 가지마 노보루가 일본판 환단고기에 실은 후기에 의하면, 환단고기를 신토와 접합시켜 일본에 유리하게 만들어버린 사건도 사실 이유립이 자신이 주필로 있던 <자유>지의 발행인이었던 박창암과 함께 직접 가지마에게 줬고, 가지마가 번역한 것을 나중에 감수까지 해주었다. 비록 가지마의 논리가 이유립 자신의 본의와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일치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지 동아시아 역사를 통째로 떠다가 중근동에 옮겨놨는데 고유의 단군신앙을 일본 신도와 접합시키는 바보 같은 짓에까지도 가담한 것이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1982년 9월에는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을 치하하는 시까지 지어주었으니 충격과 공포다! 이것만으로도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출간이 이유립과 무관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국적은 비록 달라도 광거(廣居)에 거하니[23]

환단의 진의가 허무로 돌아가지 않겠네
두 기둥과 부교, 절로 엉긴 섬들은
삼한의 관경과 신시의 유적이라
천황의 가계는 부여족이고
일본의 문명은 오우(烏羽)의 글이니
지론은 다소 서로 다르더라도[24]
그 주장은 천추에 기여(起予)할 만하오[25]
- 이유립

하지만 이유립은 개정판을 내고자 하는 열망이 그토록 강렬했는지 애지중지하던 광오이해사본은 오형기와 조병윤이 제멋대로 낸 것이라 내버린 자식으로 몰아버리고, 1983년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배달의숙본 환단고기를 발간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1920년에 계연수에게 직접 환단고기를 건네받으며 한 갑자 뒤 경신년(1980)에 공개하라는 당부를 받았다는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천마산대 대장 최시흥(崔時興)과 서로군정서 이덕수(李德秀)를 거쳐서 이유립이 입수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전수 과정에서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하지만 가지마 노보루 것을 엉망진창으로 중역한 임승국 때문에 정작 오류를 고쳤답시고 야심차게 낸 배달의숙본이 묻혀버린 건 참으로 뭐라 할지.(...)

시간은 흘러 제5공화국 시대가 되자, 이러한 자칭 재야사학쇼비니즘적 성향에 자극받은 비뚤어진 민족주의자들이 환단고기를 비롯해 이유립의 여러 글들을 모은 '대배달민족사'라는 책의 출판을 뒤에서 밀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유립은 자료 정리 중이던 1986년을 일기로 사망. 대배달민족사는 그 이듬해 출간되었다. 이 때문에 이유립이 제5공화국 당시의 파시즘적 국수주의 세력과 모종의 관계를 맺지 않았는가 하는 의혹도 존재. 하지만 <자유>지의 박창암이 5.16에 동참한 중요 인물이기는 했지만, 정작 제5공화국 시기 인물들과의 관계는 불명확하다.

4.3 현재

전산입력시의 부주의로 말미암은 오류. 숙명여대에 있는 것은 1911년 본도 아니고 심지어 1979년 본도 아니며, 연도만 1979년으로 끌어올린 1983년 배달의숙본이다. 이유립이 서지사항에 환단고기는 1911년에 초간되었고, 이 책은 1979년 재간한 것이라고 적어놓았기에 생긴 오류. 한국말은 끝까지 들읍시다 좀.
배달의숙본에 있는 발문으로 말미암은 오해. 1979년 배달의숙본의 말미에는 오형기가 1949년에 환단고기를 필사하면서 붙였다고 설정되어 있는 발문이 있는데, 전산입력 과정에서 이것에 따라 기재하였기에 1979년본이 졸지에 1949년본으로 바뀐 것이다. 책 상태가 깨끗한데다 결정적으로 필사본이 아닌 인쇄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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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항목의 작성에 참고된 전거는 다음과 같다.
    계연수(이유립), 『桓檀古記』 凡例
    계연수(이유립), 『桓檀古記』, 倍達義塾, 1979(1983), 서지사항
    계연수(이유립), 안경전 역주, 『桓檀古記(현토본 축소판)』, 상생출판, 2012
    이유립, "국사 바로잡기 천년의 혈맥", <자유> 1978년 12월호
    이유립, 「桓檀古記正解」, 『大倍達民族史 1』, 고려가, 1987
    이유립, 「아직 표상없는 雲樵桂延壽大承正」, 『大倍達民族史 5』, 고려가, 1987
    김낙천, 「이유립 연보」, 『大倍達民族史 1』, 고려가, 1987
    양종현, 『백년의 여정: 이유립 평전』, 상생출판, 2009; 정경희, 「여말 학계와 《天符經》」, 『仙道文化』 제6집, 2009
    박종혁, 「海學 李沂 硏究」,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1990
    이숙화, 「일제 강점기의 천부경 연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008
    우대석, 「《환단고기》 위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2010
    이승호, 「한국선도문헌의 연구사 소고」, 『仙道文化』 제6집, 2009
    신상구,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립 선생의 서글픈 사연", 대전투데이, 2014.08.11 17:53, (링크, 2015.10.23 18:45)
    신상구, "이유립 기념관 건립으로 대전 구도심 활성화 하자", 디트뉴스24, 2014.05.05 21:41, (링크, 2015.10.24 19:07)
    편집부, "민족사학의 큰 스승 한암당 리유립 선생", 한배달 2001년 7월호, 2001
    이정훈, "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신동아,2007.10,25 15:36, (링크 2015.10.24 21:03)
    이정훈,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신동아, 2007.10.25 15:36, (링크 2015.10.23 19:12)
    안경전, "잃어버린 한민족 국통맥 밝히는 유일한 역사서 ‘환단고기’", 충청투데이, 2015.7.13 20:17 (링크, 2015.10.22 11:5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유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링크, 2015.10.22 11:31)
    紫霞洞人, "운초 계연수 약전-2", 대배달민족사연구회, 2006.02.11 14:24, (링크, 2015.10.23 18:19)
  2. 학회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이는 엄연히 학술단체가 아닌 종교단체로서, 태백교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태백교'라고 쓰고 '커발한'이라 읽으므로 단학회(단단학회)=태백교(커발한교)로 하나의 단체가 이름이 넷인 셈이다. 이건 뭐 삼위일체도 아니고
  3. 이것이 그냥 상편(上篇)이 아니라 전상편(全上篇)이라 명칭된 것은 각각이 독립된 하나의 완성본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4. 상기한 조선시대의 참서 회수령은 세조 3년, 예종 1년, 성종 0년에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表訓天詞'가 '表訓'으로만 쓰이거나 '文泰山'이 '文泰'로만 쓰이거나 '道詵漢都讖記'가 '道銑讖記'로만 쓰이는 등의 낙자, '誌公記'가 '志公記'로 쓰이거나 '河沙良訓'이 '河少良訓'으로 쓰이거나 '王居仁'이 '玉居仁'으로 쓰이는 등의 오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修撰企所'라는 것도 기소(企所)라는 말이 도저히 문법이 성립되지 않는 조합이기 때문에 소기(所企)가 실수로 뒤집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보면 '元老'가 세조실록에서 '老元'으로 잘못 뒤집어졌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5. 안함의 귀국 시점에 대해서는 576년(신라본기), 605년(해동고승전), 625년(의상전) 설이 있다. 576년 설은 진평왕 37년(615)을 진흥왕 37년(576)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605년 설은 입당 시점에서 고작 4년 뒤라는 것을 고려할 때 문제가 있어 보인다. 625년 설을 주장하는 최치원의 의상전은 비교적 당대의 기록이기도 하거니와, 재위년수가 아닌 연호로 건복 42년이라 하고 있어 착오가 있었을 가능성이 적다. 따라서 신라본기의 진평왕 37년은 다시 47년으로 보정할 수 있다. 진평왕을 진흥왕으로 오인하면서, 진흥왕은 37년까지만 재위했기 때문에 47년이라 되어 있는 것을 37년으로 바꾸었던 듯하다.
  6. 또는 삼성기와 함께 회수된 책이 모두 도참비기라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안함이 남겼다는 예언서가 노원 동중과 함께 취급되면서 '삼성기'라는 이름이 붙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예언서에는 선덕여왕의 죽음, 사천왕사의 창건, 김인문의 귀국, 신라의 삼국통일 등이 예언되어 있었다고 한다.
  7. 『운곡행록』 시 "정공이 쓴 홍주객관 시에 차운"; "지남차"
  8. 이암의 원래 이름은 군해(君侅)이고, 자는 익지(翼之)이다. 1352~1358년 사이에 청평산에 은거하면서 이름을 암(嵒), 자를 고운(古雲)으로 고쳤다. 행촌(杏村)은 만년에 붙인 호이다. 이군해는 1313년 8월에 권한공과 최성지가 주관한 과거에 17세로 급제했다. 이후 충숙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각급 인사결정에 참여했지만, 충혜왕이 잠시 즉위한 뒤에 복위한 충숙왕은 이전까지와 달리 이군해를 충혜왕파로 간주하고 섬으로 유배보냈다. 하지만 그 덕인지 이군해는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돌아오자 함께 조정에 복귀하고 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충혜왕이 결국 막장짓을 하다 쫓겨나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이군해는 고용보에 의해 다시 밀양으로 유배되었다. 이군해는 원나라에 가 충정왕을 옹립하면서 다시 국정에 복귀했지만, 이내 충정왕이 쫓겨나고 그 숙부 공민왕이 즉위하자 다시 면직되었다. 인생 참 어지간히 꼬였다(...) 결국 1353년에 57세의 이군해는 은퇴를 결심하고 청평산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5년 뒤인 1358년에 공민왕은 다시 이암을 불러 수시중으로 삼았고, 이후 이암은 홍건적에 맞서 서경을 지키거나 안동까지 공민왕을 호종하는 등의 공으로 일등공신 겸 철성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이암은 직후 1362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강화도 선원사에 은거하다가 1364년에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9. 온몸이 찢겨 전국에 뿌려졌다고도 하고, 사지가 토막나 압록강에 버려졌다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과장이 너무 심하다.
  10.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3』, 국회도서관
  11. 정훈모가 1910년에 대종교에서 뛰쳐나와 세운 친일 지파. 원래는 나철이 이끌던 대종교 자체도 단군교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나철과 정훈모가 갈라서면서 나철이 이름을 대종교로 갈았다. 때문에 흔히 대종교와 단군교가 혼동되지만 실은 다른 교단이다.
  12. 이유립이 1954년에 세운 종교단체. 태백교라고 쓰고 '커발한'교라 읽는다? 이명은 단단학회(檀檀學會)로, 이기와 계연수가 대종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단학회(檀學會)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유립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삼신일체를 교리로 한다. 현재 이유립에 이어 양종현(梁宗鉉)이 회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증산도와 크로스 합체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13. 이기의 유고집인 해학유고의 <증주진교태백경>에 따르면, 이것이 태백교의 경전이 아니라 '진교(眞敎)'의 태백경으로 되어 있으며 이 '진교'란 바로 대종교였다. 따라서 이기가 대종교와 별도의 단학회(태백교)를 세웠다는 것은 허구가 된다. 그런데 이유립은 어쩌다 손에 넣은 이걸 제멋대로 뜯어고쳐서 '태백교'의 경전인 <정교증주태백속경>으로 팔아먹었다.(...)
  14. 개중에는 계연수를 참획군정으로 거느렸다는 이상룡의 역사인식이 그나마 환단고기의 내용과 가장 흡사하기는 한데, 환단고기에 배어나는 철저한 반중국적 역사인식과 달리 이상룡은 오히려 중국을 '4천년 동안 모국이었던 중화'라 칭하면서 자신은 농서 이씨의 후예로 "중화 또한 씨족의 구관(舊貫)"이라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환단고기에서 기자는 일개 망명객에 불과할 뿐 정치적 세력을 이룬 바 없지만, 이상룡은 1911년부터 일관되게 기자조선이 평양이 아닌 요양에 있었다고 함으로써 환단고기와 달리 기자조선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한민족 북방사의 계통을 '단군조선→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고구려)'로 설정한 것도 환단고기에서 '북부여→가섭원부여(동부여)&졸본부여(북부여)→고구려'로 설정한 것과 차이를 보인다.
  15. 관자에 '발조선'이나 대대례기의 '발식신' 정도가 이와 비슷한데, 이는 일주서에서 "발인이 씩씩하여, 사슴과 같이 빠르게 달린다."는 문구가 발굴되면서 '발·조선'과 '발·식신'으로 끊어읽어야 하게 되었다.
  16. 2007년에 비봉출판사 출간본에서는 고약하게도 '천부경등'이라는 네 글자를 빼버렸다. 생전에 글자 하나 건드렸다고 투고를 끊어버린 일도 있었던 단재인 만큼, 저승에서라도 이를 알게 된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듯.
  17. 이 말은 신채호가 나서서 '단언컨대 이건 위작이다'라고 한 것은 아니고, '이걸 고서라고 하는 눈깔 삔 사람이 누가 있음?'이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그러니까 이게 위작이라는 사실은 입 아프게 논증할 필요도 없다는 것.
  18. 양종현은 계연수를 살해하고 단학회의 본부이던 배달의숙에 불을 질러서 계연수가 소장하고 있던 3천여 권의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다. 물론 계연수와 단학회가 비실재했다는 게 문제지만.(...) 이유립이 가지고 있던 초간본이 어찌되었다고 변명하는지는 위에서 다 이야기했다.
  19.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유립이 대시전을 세운 것은 1969년 봄이다. 어라? 오형기가 필사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네?
  20. 다만 1952년에 저술되었다는 심당 이고선의 '단서대강'에 환단고기, 단군세기, 규원사화 등이 이미 참고서적으로 나와 있어서 실제로 1949년에는 필사본으로나마 대체적인 내용이 잡혀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단서대강은 1952년 당시에 출간된 것이 아니라 이고선 사후 1981년이 되어서야 (그의 아들?) 이준에 의해 유고집인 심당전서로 묶여서 나왔기에 단서대강 자체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으므로 상술한 것처럼 1979년에 완성되었다고 볼 여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인 이고선이 워낙 무명인사라서 더 이상의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런데 단서대강이 진서라 해도 문제인게, 결국 한 갑자 뒤에 공개하겠다는 계연수와의 약속은 어디다 팔아먹었냐는 거다.
  21. <환단휘기(1971)>, <세계문명동원론(1973)>, <동양문명서원론을 비판한다(1976.5)>, <이병도사관을 총비판한다(1976.10)>.
  22. 맹자는 '천하의 광거(廣居)에 거하고, 천하의 정위(正位)에 서고,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하는' 자가 대장부라고 하였다.
  23. 이를 가리켜 증산도 역주본에서는 "가지마의 번역이 많은 오류와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애써 이유립에게 변호를 하지만, 유교 고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시 서두와 말미의 광거(廣居)와 기여(起予)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소치에 불과하다.
  24. 자하가 공자에게 "예가 나중에 오는 겁니까?"라 묻자, 공자는 "나를 계발시키는 자, 바로 자하로구나(起予者商也)! 이제 함께 시를 말할 만하다(始可與言詩已矣)!"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