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 프로축구 K리그에서 시행된 드래프트 제도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K리그에서 시행된 드래프트제는 크게 1기와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1기는 1988년~2001년을 칭하고 2기는 2006년~현재까지를 칭한다.[1] 현재 시행중인 2기 드래프트제는 점차적으로 축소되어 2015년 드래프트를 마지막으로 폐지되고 2016년부터 완전 자유계약제로 전환될 예정이다.
한국프로야구와 달리 K리그가 자유계약제와 드래프트제 사이를 오가는 이유는 축구의 종목상 특성에 기인한다. 국가간 선수이적이 드문 야구나 농구 등 타 종목과는 달리 축구는 한국 국적 선수라 해도 유럽이나 일본 등 타 국가로의 이적의 문이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다. 따라서 국내 클럽들은 우수한 신인선수 확보를 위해 국내 타 클럽들과 경쟁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클럽과도 경쟁해야 하고, 결국 선수에게 들어오는 제의는 해외클럽 쪽이 더 끌릴 수밖에 없다. 드래프트제로 선발된 신인은 지명 순위별로 계약조건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드래프트제 자체가 직장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이기는 하나 타 종목의 경우 그 침해의 정도가 드래프트제 시행 목적을 달성했을 때의 이익에 비해서 가벼운 데 비해, 축구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K리그 출범 시에도 처음부터 신인선발 제도를 자유계약제로 택한 것이며, 중간중간 아래에서 서술할 몇 번의 사건(?)들로 인해 드래프트제로 전환했지만, 결국은 자유계약제로 돌아가는 것이 리그를 위해서나 선수를 위해서나 바람직한 방향이란 데에는 대부분의 축구인들과 축구팬들이 동의하고 있다.
결국 2012년 프로축구연맹에서는 현 시행중인 드래프트 제도의 점진적 완전 폐지를 결정하고, 2013년 신인선발부터 드래프트에 우선해서 각 구단에서 자유계약 신인 선발을 시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2013년 각 구단별 1명의 신인 자유계약이 허용되고, 이 인원수를 점차 늘려나가다 2016년부터는 완전 자유계약제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2 1기 : 1988 ~ 2001
슈퍼리그의 출범과 함께 시행된 신인 자유계약제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큰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3년만에 축구판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형 사건이 터지는데 당시 고려대학교에 재학중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던 축구천재 김종부의 스카웃을 놓고 현대와 대우간에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현대는 신인 최대어 김종부를 잡기 위해 고려대측에 물량공세를 퍼부었고, 그 결과 김종부는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현대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2] 그러나 김종부는 현대행을 거부하고 자신은 대우로 갈 것이라고 선언하며 현대와의 계약은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에 현대는 분노하며 김종부를 못 데려올 바엔 팀을 해체하겠다고까지 했고, 고려대 역시 김종부를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으며 선수를 압박했다.[3] 김종부 파동은 결국 대한축구협회에서 나서서 김종부를 제3의 구단인 포항제철에 입단시키는 것으로 정리되었으나, 이 파동으로 인해 신인 자유계약제의 폐단[4]이 드러났고 결국 1988년 신인선발부터는 전격적으로 드래프트제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도입된 드래프트제는 1990년대 들어서면서 몇 차례의 드래프트 거부 파동을 거쳐 후진적이고 구단, 선수의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라는 비판에 직면하였고[5] 2001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자유계약제로 회귀하게 된다.
2.1 주요내용
- 전시즌 성적 기준으로 역순으로 지명권이 주어지는 것을 기본 골자로 했다.
- 첫 해인 1988년은 대졸예정 선수만 드래프트에 지원할 수 있었다. 1989년부터 고졸선수의 참가도 허용되었다.
- 당시 K리그는 전면적인 지역연고제 실시 이전이었지만 원시적인 형태의 연고지명도 시행되었다. 각 구단의 광역연고 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를 우선적으로 연고지명할 수 있었다. 연고지명 제도는 중간에 한 번 폐지되었다가 1998년 부활하였다. 1998년에는 각 팀별로 한 개의 고등학교를 선정하여 해당 고등학교 졸업선수를 3명까지 우선지명할 수 있었다.[6] 2000년에는 구단별로 3개의 고등학교를 선정할 수 있도록 확대되었는데 이 때 명목상으로는 해당 구단 연고지 내 고등학교를 선정하도록 했으나 실제로는 포항이 보인정산고를 지정하거나 울산이 서울체고를 지정하기도 했다.
- 고졸 연고지명과 별도로 대학 연고지명도 시행되었는데, 구단별로 한 개 대학을 지정하여 재정적 지원을 한 후 해당 대학 졸업선수를 지명 가능하도록 한 제도이다. 안정환이 이 제도를 통해 부산에 입단할수 있었다.
2.2 뒷이야기
- 최초로 고졸선수 신분으로 드래프트에 지명된 선수는 최문식으로 알려져 있다.관련인터뷰
- 1992년 드래프트는 황선홍, 홍명보의 드래프트 거부 및 포항제철의 편법지명 파문, 서정원, 신태용 등의 드래프트 거부 등으로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린 한 해였다.관련 칼럼
- 황선홍과 홍명보는 이미 1991년 드래프트를 거부하였고, 이듬해 포항제철에서 산하 아마추어팀에 입단한 선수는 3년 후 드래프트 없이 프로행이 가능하다는 조항을 이용하여 두 선수를 산하 아마추어팀에 입단시킨 후 해외연수를 보내 3년 후에 불러들이기로 했다. 이에 타 구단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한 일. 거센 비난여론에 부딪히자 홍명보는 결국 드래프트를 신청했고 유공에 지명된다. 유공의 김정남 감독은 홍명보를 지명한 데 대해 만족감을 표했으나,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홍명보는 4시간만에 포항제철 유니폼을 입게 된다. 이 때 포항제철은 홍명보를 데려오기 위해 드래프트 1,2순위 지명 선수를 다 내주고도 모자라 기존 소속 선수 한 명을 얹어 줘야 했다. 한편 황선홍은 원래 포철측의 계획대로 해외로 떠나 독일 2부리그 부퍼탈에 입단한다.[7]
- 앞서 드래프트를 거부했던 서정원과 신태용 등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멤버들도 마침내 드래프트 신청서를 제출했다.[8] 서정원은 안양에 지명되었고
안양의 별이 된 그는 어느 날 프랑스 무대로 진출했다가 국내로 복귀하는데...신태용은 대우에 지명되었다가 보름만에 일화로 트레이드된다. 대우가 미리 사전협상으로 점찍어놓은 김정혁이 일화에 지명되자 그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신태용을 대체급부로 내놓은 것이다. 서울-천안-성남 세 연고지를 거친 일화의 전설적인 대스타는 이렇게 탄생했다. - 한편 서정원, 신태용과 함께 드래프트 거부를 선언한 김병수, 정광석은 끝끝내 드래프트에 불참했다.[9]
- 포항제철에서 독일로 보낸 황선홍은 결국 1993년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제출했고, 예상대로 당시 신생팀으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완산 푸마에 지명되었다. 황선홍을 놓칠 수 없었던 포철측은 홍명보 때와 마찬가지로 물량공세에 들어갔고, 선수 8명을 내주면서 사상 초유의 1대8트레이드를 성사시킨다.황선홍 본인의 회상[10]
- 1993년 드래프트에도 드래프트 참가를 거부한 선수들이 있었는데 이 때는 불참 이유가 신생팀 완산 푸마에 지명되는 것을 꺼려서였다. 이 때 불참한 선수 중에는 타이거 마스크 김태영이 포함되어 있었다.[11] 1997년 드래프트에서도 신생팀 대전 시티즌에 지명되기를 꺼린 유망주들이 드래프트에 불참했다.[12] 반면 탄탄한 자본력을 갖춘 신생팀(수원)이 창단되는 해에는 역으로 신인들이 드래프트 참가에 적극적이었는데 수원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세대를 쓸어담을 수 있었던 것이 이 때문이다.
- 고교 연고지명이 실시된 후 프로에 직행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한 선수들의 경우 드래프트 이후 2년 동안 해당 구단이 지명권을 행사하여 입단계약을 맺지 않으면 해당 지명권은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제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안양 유니폼을 입은 이천수, 울산 유니폼을 입은 조병국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3 2기 : 2006 ~ 2015
1기 드래프트가 도입되는 계기는 김종부가 제공했듯이, 2기 드래프트 도입에도 또다른 대형 유망주 박주영이 중심에 있었다. 박주영의 모교 청구고는 포항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학교로[13] 박주영도 포항의 돈으로 브라질 축구 유학을 다녀왔다. 그 조건으로 박주영과 포항은 추후 박주영이 프로에 입단할 시 포항과 가장 먼저 협상테이블에 앉을 것을 약속했는데, 고려대학교로 진학한 박주영은 계약을 어기고 FC 서울과 홀라당 계약해버린 것이다.그러고보니 드래프트 도입 두번 모두 고려대학교가 원흉이다 이미 천하의 개쌍놈 김동현을 일본에 뺏긴 적이 있는 포항은 당연히 크게 분개했고, 기껏 어린 선수들 키워놓으면 뭐하냐 다 뺏기는데. 그냥 드래프트해서 꽁으로 주워오면 되지라며 드래프트제 부활을 주장한다.
사실 박주영 파동 이전부터 드래프트제 부활 주장은 있어 왔다. 주로 탄탄한 자금력으로 좋은 계약조건을 제시해 우수한 자원들을 스카우트할 수 있었던 수원 등 부자구단과, 자체 유스육성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던 포항, 전남 등이 드래프트제 부활에 반대했고, 자금력이 부족한 시민구단들은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신인선수들을 확보할 수 있는 드래프트제 부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기업구단이 시민구단보다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으니 드래프트제 반대 주장이 우위였으나, 기업구단이자 영향력이 큰 명문구단인 포항이 드래프트 찬성으로 돌아서니 밸런스가 깨진 것. 결국 박주영이 K리그에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2005년 연말에 2006 드래프트가 시행된다.
그리고 2015년 드래프트를 끝으로 다시 완전 자유계약으로 돌아왔다.
3.1 주요내용
- 시즌 말미 하위권에서 져주기 게임 양산을 방지하기 위해, 지명 순서는 전 시즌 순위와 무관하게 무작위 추첨으로 결정했다.
- 2006년 드래프트의 경우 드래프트제 부활 결정 이전까지 각 구단이 개별적으로 자유계약을 맺은 신인들에 대해서는 드래프트와 별도로 선발 가능하도록 했다. 이미 대어급 유망주들은 이를 통해 각 구단과 계약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이 해 드래프트로 지명된 신인들은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전체 1순위로 대구에 지명된 황금성만 해도 이런 선수가 있었는지 기억하는 축구팬들이 많지 않다. 번외지명으로 막차를 탄 배기종 정도가 그나마 포텐을 터뜨린 선수.
- 2007년부터는 각 구단 산하 유스 출신 선수에 대한 우선지명이 실시되었다. 당초 졸업생 중 최대 4명까지 지명할 수 있도록 했으나 제한이 너무 적다는 각 구단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2011년부터는 통크게 무제한으로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 각 구단이 산하 유스 우선지명권 행사를 시작한 시기는 다음과 같다.
- 유스 출신으로서 우선지명된 선수들은 프로에 직행할 수도 있지만 대학에 진학한 후 추후에 중퇴 혹은 졸업 후 해당 구단에 입단할 수도 있다. 대학 진학 후에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면 구단 측에서 우선지명권을 포기할 수도 있다.
-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지명 후에 해당 구단 입단을 거부한 선수는 5년 동안 드래프트 참가가 금지되며, 5년 후에도 자신을 지명한 그 구단하고만 계약을 맺을 수 있다.
- 상기하였듯이 2012년에 연맹은 드래프트제 폐지 및 자유계약제로의 전환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2013년 드래프트부터 드래프트제 시행 이전에 각 구단별로 자유계약으로 신인선수를 선발할 수 있게 되었다. 2013년에는 1명의 자유계약 선발이 허용되고, 2014년에 2명, 2015년 3명으로 점진적으로 확대한 이후 2016년 신인선발부터는 드래프트제를 완전 폐지하게 된다.
3.2 뒷이야기
- 자유계약제의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는 시각도 있지만 지명 순위별로 계약금액에 제한이 있고 약팀에 지명될 수도 있기 때문에 드래프트 참가를 꺼린 유망주들이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이 있다. 이같은 현상은 2009 U-20 월드컵 8강 진출의 주역인 김보경, 김민우, 김영권 등이 J리그 팀과 계약하면서 가속화되었다.
- 과거 같으면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지명되는 선수가 누구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현 제도 하에서는 우수한 자원들은 유스 우선지명, 신생창단팀 우선지명, 자유계약, J리그행 등으로 제외된 후에 드래프트가 실시되기 때문에 예전만큼 1순위 선수에 대한 주목은 덜한 편이다. 그래도 연도별 전체 1순위 선수가 누군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딱 봐도 몇몇 빼고는 네임밸류가 시원치 않다(...) 이 중에서도 A급으로 끝까지 살아남은 건 홍정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