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金庸/Jin Yong 1924.02.06~ 홍콩의 유명한 무협 소설 작가이며 언론인이다. 본명은 사량용(查良鏞/Louis Cha)으로 김용은 필명이다. 김용이란 필명은 용(鏞)자를 파자해서 만든 이름이다. 녹정기 서두에 등장하는 명,청 교체기의 문인 사계좌(査繼佐, 자는 伊璜)가 그의 선조라고 한다.
중국의 金씨[1]를 "김"과 "금" 어느 것으로 읽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은 없다.[2] 김성탄, 김일제, 김위, 김선의 예처럼 "김"으로 읽는 것이 현재는 더 보편적 관행이나, "금"으로 읽어야 옳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절강성 해저현에서 태어났으며 신문사 편집장으로 일을 하다 1959년에 홍콩의 일간지인 명보(明報)를 창간하여 1993년 은퇴할 때까지 언론인으로 일했다. 1955년부터 1972년 사이에 15편의 무협소설을 집필하였으며 1959년 명보를 창간한 후에는 명보의 판매율 신장을 위해서 명보에서만 독점 연재하였다. 김용이 무협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 신문사 신만보(新晩報)의 편집장으로 막 승진한 김용이 신만보의 구독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을 목격하자 신문의 구독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만약 신문이 잘 팔리고 있었다면 김용이란 작가 대신에 김용이란 편집장만이 있었을 것이다. 안팔려서 다행
뛰어난 스토리 텔러인데다가 지루하지 않게 하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뛰어난 작가이다. 특히 자신의 소설 속에 쏟아내는 그 엄청난 지식은 가히 압권으로 어문학, 철학, 사학, 종교학 등 중국 전통의 인문학 전반에 높은 수준의 식견을 지니고 있다. 이때문에 '신필(神筆)'이라 불린다. 판타지에 톨킨이 있다면 무협에는 김용이 있다고 할 정도로 서양의 중국 관련 교재에도 김용의 소설이 등재되어 있으며, 영미권에서 톨킨의 판타지를 톨킨학으로 부르면서 연구하듯이, 중국어권에선 김용의 무협을 김학 혹은 용학이라고 부르면서 연구하고 있다. 김학 연구로 학위를 받은 대학교수들도 수두룩하다.
김용의 무협소설들은 동서양의 수십개국에 번역되었으며, 대만에서 1천만부, 중국에서 1억부 이상이 팔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어 15부작 전부가 여러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되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쓴 소설을 저자 김용으로 출판한 위작도 많이 있다. 고려원은 1986년 김용의 작품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이어지는 사조삼부곡을 영웅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는데 무려 800만부가 팔렸다. 고려원이 도산해서 사라진 후에 사조삼부곡은 김영사에서 정식으로 판권계약을 맺고 출간했다. 사조영웅전이 2003년, 신조협려가 2005년, 의천도룡기가 2007년 각각 출간되었다.
참고로 고려원 출판본을 해적판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는데, 알아둬야 할 것은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해외 문학 작품을 정식 라이선스를 획득하지 않고 들여오는 경우가 많았다[3]. 애초에 우리나라가 베른 협약 에 가입한 것이 1996년이라서 이 전의 출판물에 대해서는 현재와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다.
2007년 이후로는 노령이라 망중한을 보내시는 듯.
2 절필
녹정기 이후 절필선언을 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쓴 글의 개정판은 계속 나오고 있다. 신문연재로 작품을 썼던터라 개연성이 부실해서 스토리를 매끄럽게 계속 고치고 있는 셈이다.
30년의 절필을 뒤로 다시 복귀한다고 한다는 말도 있지만, 김용선생 본인이 자신을 무협작가라기 보다 언론가, 평론가 쪽으로 불리길 원한다는 말도 있다. 어떤 기자가 계속 그에게 무협에 대한 인터뷰를 하자 '여대생이 한때 호스티스를 한 적이 있다고 치자, 근데 그 이후에도 계속 그 얘기를 꺼내면 좋으냐' 라며 불쾌해했다는 루머가 있다.
무협소설로 유명세와 대학교수 등 사회적 지위도 얻고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스스로 무협소설 쓴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소설을 무협소설이 아닌 역사소설로 불러달라는 등 과거를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에 일부 무협 매니아들 사이에서 까이기도 한다. 다만 다시 리메이크된 작품들을 보자면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부끄러워 한다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본업이 소설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하다. 어쩌면 츤데레일지도.
김용의 친구이자, 또 하나의 무협소설계의 거벽인 양우생이 훌륭한 언론인이기도 한 김용이 고작 그가 썼던 소설들 때문에 묻힌다고 한탄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소설인이란 직함보다는 언론인이란 직함을 먼저 달고 싶은가 보다.
왠지 코난 도일이 자신이 셜록 홈즈로만 너무 유명해져서 정작 인정받고 싶었던 역사소설 등에서는 인정받지 못해서 영 껄끄러워했다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추리소설은 깊은 작품성보다는 대중들의 흥미를 충족시키는 소설로 보았기 때문이다. 김용이 무협소설을 썼던 기억을 껄끄럽게 여긴다면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오로지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입문했지만, 점점 무협소설에 대해 큰 애정을 갖게 되어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이루고 죽기 직전까지 다양한 실험을 통해 무협소설을 순수문학의 경지까지 넘어다보길 바랬던 고룡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영화감독 장철[4][5]의 회고에 의하면 도박을 즐겼다고 한다. 녹정기에서 위소보가 도박을 잘하는 이유가 이때문일듯.
3 작품
김용 작품 | ||||
서검은구록 | 벽혈검 | 사조영웅전 | 신조협려 | 설산비호 |
비호외전 | 의천도룡기 | 원앙도 | 백마소서풍 | 연성결 |
천룡팔부 | 협객행 | 소오강호 | 녹정기 | 월녀검 |
구체적인 자료는 김용/발매 작품 참조.
한국에는 영웅문으로 알려지기도 한 사조삼부작. 즉,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있으며 그 외에도 소오강호(우리나라에선 동방불패로 유명), 녹정기 등 15작품을 집필하였다.
스스로 지은 14개의 소설의 첫머리를 따서 다음과 같은 대련을 짓기도 했다.
飛雪連天射白鹿(비설련천사백록) 하늘 가득히 눈이 휘몰아쳐 흰 사슴을 쏘아가고,
구절 순서대로 김용 작품을 나열하면, 비호외전, 설산비호, 연성결,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백마소서풍, 녹정기, 소오강호, 서검은구록, 신조협려, 협객행, 의천도룡기, 벽혈검, 원앙도이며 이는 김용군협전(국내 정발명 의천도룡기 외전)이란 게임에서도 핵심적인 문구. 대련에 속하지 않은 것으론 월녀검이 있어 합해서 총 15작이다.
절필선언을 했지만 국내에 잘 알려지지가 않아서 위작이 많다. 유명한 위작으로 장백산맥 2부작이 있는데, 황당하게도 1부는 상관정 2부는 고룡 작품. 작가조차 다른 두 작품을 멋대로 엮어서 출판했다. 비슷한 예로 녹정기 2부는 양우생 작품. 그밖에 사조삼부작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화산논검이라는 그럴싸한(...) 위작-심지어 미완-을 비롯해 의천도룡기 외전, 신조협려 외전 등이 있다. 이들 중 화산논검은 한 번만 읽어봐도 설정이 영웅문과 충돌되는 점을 엄청나게 발견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화산논검만의 오리지널 설정도 이 부분과 저 부분의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너무 야하다. 김용선생도 껄적지근한 표현을 꽤 좋아하긴 하나 노루표 무협지 식의 노골적인 묘사는 하지 않는다.
위에 설명한 15종 말고는 무조건 가짜니 낚이지 말자. 언젠가 오나라를 중심으로 한 삼국지를 써보려고 한적도 있는데 포기했다고 한다. 삼국지의 진정한 영웅은 손권이라고, 손권을 주인공으로 쓰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손권 항목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말년의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주인공을 쓸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다만 김용이 홍콩출신이라서 손권을 영웅으로 그리려 했다는 이전버전의 설은 잘못된 것으로, 김용은 고향이 오나라의 수도였던 남경이 있던 강소성 옆의 절강성 출신이라서 그런면도 있는듯 하지...
4 미디어 믹스
김용의 사조삼부작은 자주 드라마화 되는걸로 유명하여 의천도룡기는 매년, 신조협려는 2년 마다, 사조영웅전은 3년에 한번 꼴로 드라마가 제작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 대륙 등 중화권 국가면 다 한 번 이상 만들었다고 봐도 된다. 그래서 팬들은 드라마판의 명칭 뒤에 제작연도를 붙여서 구분한다. 신조협려의 경우, 같은 1998년에 싱가포르와 대만에서 두 가지의 버전이 동시에 제작된 경우도 있었다. 이 때는 연도 뒤에 제작 국가까지 붙여서 구분한다(…).
대부분 원작 중시의 드라마였지만, 조금씩 스토리나 주요인물들의 성격같은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2008년판 사조영웅전으로 거기서는 원작인물들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했다.
추가로 김용관련 소설 작품들의 경우 중국, 대만 등등등 김용 소설 작품들이 인기있는 도시 한정으로 게임 기획의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신조협려 등의 개별작품의 게임화 외에도 의천도룡기 외전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김용군협전[6]이 유명하다. 2000년대 이후로는 상업적 게임 작품으로는 모든 소설 대부분을 보여준 지 오래된 문제 때문인지 여러가지 동인 게임 리메이크 또는 웹게임을 포함한 융합 게임 위주의 게임 기획 소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7].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김용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중국 성씨 중 64위에 해당되며 인구수 380만명, 총인구의 0.3%를 차지한다.
- ↑ 물론 신해혁명 이후의 현대 인물은 중국어 "진(jīn)"으로 읽는 것이 원칙이지만 '김용'의 예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 ↑ 영웅문 초판이 발행된 시점은 1986년이다. 당시 적용된 저작권법은 일본법을 베껴 만든 1957년 저작권법으로 이후 한번도 개정 않고 방치된 상태인 데다 저작권 관련 조약에도 가입하지 않아 외국인의 저작권 보호에는 당연히 소극적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등 선진국의 저작권 압박이 거세지면서 어쩔 수 없이 1987년 세계저작권협약(UCC)에 가입하면서 국내 출판, 문화계에 한바탕 난리법석이 일어났으나, 조약 가입에 맞춰 개정된 1987년 저작권법에서도 조약의 소급효는 인정하지 않아 조약 가입 이전의 외국 저작물을 보호하지 않았다. 1996년에는 베른협약에 가입하였고 저작권법 개정으로 소급효도 인정되게 된다. 참고로 홍콩이 UCC와 베른협약에 가입한 것은 1997년이다.
- ↑ 장철과 김용은 비슷한 또래(장철은 1923년생,김용은 1924년생)에 대학동창이었기 때문에 매우 절친했다. 또 천룡팔부의 상당부분을 대필하기도한 김용과 절친했던 작가 예광은 장철과 시나리오 작업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이런 인연 때문에 세 사람이 매우 친했고, 장철은 말년에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 벽혈검, 비호외전, 협객행을 영화화 하였다.
- ↑ 김용과 장철은 대학동창이라는 점 외에도 김용이 한 때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도 연출하기도 하는 등 영화에 손을 댄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친했을지도 모른다.
- ↑ 그 후속작인 무림군협전은 결국 발매되지 않았고, 이를 한글화 하려는 일반 유저들의 시도도 있었으나 결국 도중에 무산되었다.
- ↑ 중국산 웹게임을 그대로 가져와서 서비스하는 국내사정상 정식 서비스된 물건도 많다. 남제북개라거나 일대종사라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