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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진표 |
예명 | JP |
출생 | 1977년 8월 13일 |
신체 | 180cm, 78kg, A형 |
학력 |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
가족 | 배우자 윤주련 아들 김민건, 딸 김규원 |
트위터 블로그 |
1 경력
CJ E&M의 첫 번째 노예 쇼미MC
상문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5년에 이적과 함께 패닉으로 데뷔했다. 김진표하면 가장 유명한것은 역시 패닉 활동과 리바이스 CF[1]이다.재학 당시를 기억하는 교사들은 "가수 한다길래 머리도 기르게 해 줬는데!" 라며 패닉 2집에 대한 분통을 터뜨리곤 한다. 그러나 정작 김진표 본인은 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었던 학교[2] 상황에다가 실용음악을 하겠다고 연습하는 자신을 교사들이 "나발부는놈"이라고 비하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원래는 이적이 솔로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앨범 다 만들고 데뷔하기 직전에 이적이 김진표를 끌어들여 듀엣 결성. 이적 曰 키워서 잡아먹었다 덕분에 패닉 1집 앨범에서는 김진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5집 수록곡인 '폼나는 대로'를 들어보면 녹음실에 딱 3일 있었다는 듯 하다.
타이틀곡인 '아무도'가 별 반응을 불러오지 못하자 후속곡으로 '왼손잡이'를 내세웠는데, 원래 앨범 수록 버전에는 랩이 없었지만 김진표를 위해서인지 왼손잡이로 방송 활동을 할 때는 김진표의 랩 파트가 추가됐고, 왼손잡이보다도 더 큰 인기를 끈 '달팽이'에서는 옆에서 색소폰을 부...는 표정연기를 맡았다. 그 노래는 진짜로 앨범 끝자락 트랙에 끼워넣기로 이적 혼자 부르는 노래인데 그게 얻어걸렸으니... 덕분에 당시 학교에서 별명이 '나팔 부는 놈'이었다는 듯. 본인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좋다고 나팔만 불던 이 때를 흑역사로 생각한다.[3] 그래도 나름대로 색소폰을 불 줄 알았던지, 청소년 때 잠시 영국에 살았을 적 학교 기숙사에서 Wham!의 Careless Whisper의 앞 부분을 연주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듯 패닉의 깜짝인기로 큰 인기를 얻고 속칭 연예인병에 걸린 어린 김진표는 아래쪽에서 서술할 이런 저런 사고와 기행을 펼치고 다니고 간간히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듯 패닉의 트러블메이커로 자리잡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적이 녹음실에서 김진표에게 '너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가다간 내가 너를 데리고 음악을 안 할 수도 있다. 나는 너 없어도 음악 할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있냐'고 직언을 날린것에 충격을 먹고 각성하여 본격적인 랩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4]
이후 패닉 2집인 '밑'에서부터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 mama와 벌레 두 곡을 썼지만 과격한 내용으로 인해 두 곡 모두 가사가 잘려나가 버렸다. 패닉 2집은 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굉장히 과격했다.
패닉 2집 이후에는 이적과 마찬가지로 솔로 데뷔. 솔로 1집인 '열외'는 전곡 이 랩 장르로 이루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앨범으로 알려져있다. 최초의 전곡 힙합앨범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최초의 랩 앨범이라고 하기에는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Blex'의 검은소리 Vol.1과 다소 논란이 있으나, 검은소리 Vol.1은 정식으로 나왔던 앨범이 아니라 그냥 동호회 차원에서 배포했던 앨범인 관계로 일단은 정식 앨범으로 나온 이 쪽을 최초로 쳐준다. 또한 노바소닉을 결성하여 밴드로도 활동하였으나 3집 발표 이후 건강 문제로 탈퇴한다.[5] 대표곡은 오락실의 최고 인기곡인 '또다른 진심'(마지막 편지:그것조차 거짓)과 '나쁜 여자', 'SLAM' 등[6]
정박으로 딱딱 떨어지는 라임과 플로우로 인해 귀에 가볍게 들어오는 랩이긴 하지만 재미없고 밋밋하다는 평도 많다. 거의 윤종신급 영어 라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특징. 한국 힙합씬 초기 랩에 있어서 라임이라는 요소를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당시 신선하게 느껴졌던 라임이 강조된 랩도 시간이 흘러 연구가 이뤄진 지금 들으면 촌스럽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김진표 2집의 수록곡중 '진표생각 1'의 훅인 '나는 싸가지가 너무 바가지 힙합바지 입고 나가지'는 지금도 김진표를 조롱할 때 종종 인용되는 가사이다. 김진표 본인도 이런 점을 알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억지라임의 황제"라고 지칭한 가사를 쓰기도 했다(…).[7]
다만 시대를 감안할때 충분히 혁신적인 라임과 플로우라 볼 수 있다. 당시 잘 나간다는 랩퍼들 중 이보다 못한 가사는 수두룩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랩은 기본적인 라임조차 구성이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냥 가사에 Yo만 붙이고 랩이라고 우기거나 영어만 쓰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전문가들도 한국어로 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하곤 했다.
본인 말로는 자기는 그냥 랩퍼지 힙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모양. 실제로 음악 스타일도 전형적인 힙합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음악생활 초중반의 커리어를 펑키한 락 혹은 발라드(패닉), 헤비한 락(노바소닉)을 하는 사람들과 보냈기 때문에 다른 힙합 랩퍼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음악을 한다. 그래도 가장 오래 한국말로 랩을 한 축에 들다 보니 랩에 감정을 넣는 기술은 꽤 뛰어난 편이다. 노래는 잘부르는 편이 아닌 모양. 패닉 3집 발매 후 출연한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레너드 코헨의 I'm your man을 딱 한번 부른적이 있다. 고음불가. 작곡 능력은 없지만(일단 하긴 한다) 작사는 평이 좋은 편. 특히 사랑노래 가사를 말랑말랑하게 잘 쓴다. 하지만 3집 앨범 JP3과 5집 앨범 Galanty Show에서는 대놓고 가사가 시궁창을 시전하였다.[8] 현재까지 나온 앨범중에서는 3집이 명반으로 꼽힌다. 4집 이후 발매된 리마스터링 베스트 앨범에서도 32곡중 8곡을 차지했다. 정규앨범 수록곡이 아닌 곡과 신곡이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가장 많은 편
2003년에 현대홈쇼핑 쇼호스트 출신 동갑내기 여성과 결혼했으나 2006년에 전격 이혼했다.[9] 그 뒤 2008년에 5살 연하의 연기자 윤주련[10]과 재혼했다. 현재는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살고 있다.
2014년의 쇼미더머니 3부터 전속 MC로 출연하고 있다. 5까지도 이어서 하니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 절제된 애드립이 묘하게 재미있다.
2015년 12월 18일 2년 2개월 만에 신곡이 나왔다 만세
곡명은 '산타처럼'
곡내용은 연인이 헤어지는? 그런 내용인데 솔로는 듣지 말자 곡 음원에 재규어 F-타입 엔진 배기음과 깜빡이 소리가 나온다. 남친이 금수저 같은데 왜 헤어졌지?
곡은 브랜뉴뮤직 를 통해 나왔지만 블로그에서 브랜뉴 소속이 아니며 그냥 라이머 와 친한사이고 (중학교 동창이라고 한다) 종종 싱글곡은 앞으로 브랜뉴를 통해 발매할것 같다고 밝혔다
곡설명등 출처
2 논란
2.1 故 유니 조문 논란
2007년 가수로 활동하던 유니가 자살을 했고, 김진표가 유니의 빈소에 조문을 오지 않은 가수협회나 후배가수들을 비판하면서 불거진 사건.
'가수협회는 가수가 죽었음에도 동료가수들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연락을 받지 못해 직접 주소를 물어 조문을 왔다. 막상 와보니까 가수들은 거의 없더라. 방송국에서는 그렇게 예의바른 후배들이 정작 이럴때는 조문 올 시간조차 없는거냐'
당시 김진표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내용. 이에 최백호 당시 가수협회 부회장은 '당신들(김진표와 유니)은 가수협회 소속이 아니잖아. 우리는 협회 소속이 아닌 가수들을 챙겨줘야할 이유도 없고 협회 소속이 아닌 인물한테 까일 이유도 없다'라는 식으로 반박했고, 쩌네요 선생님.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이 사건을 두고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당시 리얼타임 기사와 덧글들. 네이버 반응.
참고로 유니가 자살한 후 1년 후에 나온 김진표의 5집 수록곡 중 '날 찾지 마세요'는 한 여자 연예인의 인기와 추락, 자살을 다룬 곡이다. 직접적으로 유니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 또한 이 곡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짐작된다.
2.2 탑기어 코리아 운지 발언 사건
2012년 6월 17일 탑기어 코리아에서 운지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가 된통 까이게 되었다. 파문이 커지자 블로그에 사과문을 썼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이 때문에 진표를 하고맙니다라고 드립치는 사람이 가끔 보인다.
2.3 아빠! 어디가? 시즌2 출연 논란
2014년에 시작되는 아빠 어디 가? 시즌 2에 합류한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김진표는 이미 탑기어 코리아 운지 발언 사건과 과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가사가 담긴 'Dr.No Theraphy'라는 노래를 조PD와 함께 불렀으며[11] 탑기어 코리아에서도 부적절한 동작을 선보였기에 시청자들 사이에 큰 논란이 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일밤 아빠 어디 가의 시청자 게시판만 봐도 김진표의 하차를 요구하는 게시물로 도배될 정도.
결국 김진표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동안 있었던 사실을 해명했으며, 이미지 세탁이 아닌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라며 그 잘못을 사과하는 글을 남겼다.
그렇게 글을 남긴 후 아들이 아닌 5살 짜리 딸과 출연하긴 했지만 여전히 하차요구를 한다. 자신의 딸인 규원이 방송에 부적응하는 모습이 보이고[12] 거기다가 김진표 자신마저 방송에 적응을 못했다.[13] 그러다가 감독 겸 선수를 맡은 신생 레이싱팀의 창단으로 3월 29일 결국 자진 하차하게 되었지만 하차 이유를 적응하기 힘들어서라고 말해 또 비난을 받았다. 결국 김진표의 아빠 어디가 출연은 흑역사 중의 흑역사로 남게되었다.
3 레이싱 드라이버로서
김진표/레이싱 드라이버 참조.
4 기타
심한 부정맥 탓에 페이스메이커를 달고 있다. 독고진?! 그래서 군대는 면제. 덕분에 공연 중 몇 차례 실신하기도.[14] 사실상 이 심장질환과 이혼이 패닉 + 노바소닉 + 솔로로 나름대로 기세가 좋던 가수 김진표가 추락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정확한 병명은 심장의 우측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게 되는 '부정맥유발성 우심실 이형증'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결국 페이스메이커를 달고 말았다. 그리고 전지를 갈기 위해 일정 기간이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
인기몰이를 하던 당시에는 김진표가 이적보다 더 기세가 좋았다는 말이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이적의 솔로 1집은 예상보다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지 못했던데다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는 바람에 공백기까지 가졌으니. 이적 본인도 공익 시절 김진표 3집을 듣고 진표가 그 때까지 진표가 내던 물건들은 요번에는 이 정도 하겠지 싶은 기대치가 있었고 그만큼 했다, 그러나 3집은 그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었다고 발언했었다. 허나 노바소닉 공연을 강행하던 중 몇 차례나 쓰러지고 이후 노바소닉 탈퇴[15], 퀄리티가 어중간하던 솔로 4집과 건강상 제한된 공연횟수, 이혼, 5집까지 5년이란 엄청난 공백기간이 이어지며 이적과 김진표의 위상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지고 말았다.
꽤나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또 헤어지고를 여러차례 반복한 모양이다. 이를 노래로 만든 것이 솔로 1집의 '사랑해 그리고 생각해'와 노바소닉 1집의 마지막 편지 시리즈 등.
꽤 일찍부터 PC 통신을 드나들거나,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개인 홈페이지(JPHole)를 스스로 디자인하는 솜씨도 있다. 덕분에 과거 조선일보선정 국내 100대 개인 홈페이지에 들었을 정도. 선정 당시엔 개인이 홈페이지를 갖는다는게 꽤 어려운 시절로, 개인 홈페이지 하나 만들기 위해 호스트 등록하고, 태그 배우고 하던 시절이다.
드렁큰 타이거가 한국어에 서툴렀던 시절 대신 가사를 써주기도 하고, 드렁큰 타이거가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친분이 있는 사이. 김진표의 2집 앨범(1998년) 에 있는 '푸념'이라는 곡은 드렁큰 타이거가 데뷔하기 전에 피처링한 곡이다. 가사를 양쪽으로 돌려쓴 부분이 있지만
- 사실상 무브먼트 크루의 초대멤버라 할 수 있으나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탈퇴했다.
해피투게더 시즌 3에서는 싸이와 오랜 친구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어머니가 고등학교 동창, 김진표의 할머니와 싸이의 할아버지가 친구, 즉 3대째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김진표는 싸이와 친해지기 전부터 이미 어머니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활동한 지 꽤 오래되고 친목질에도 능해 이런저런 인맥이 있고 이는 앨범 작업에도 좋게 작용한다. 솔로 정규 3집은 이 인맥을 십분 활용한 김진표 최고의 앨범이며 심지어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팬들 및 아마추어들을 피처링 아티스트로 기용하기도 했다. 이 때 전 스토니 스컹크 멤버이자 현 YG 프로듀서인 KUSH(A.K.A 소래눈보이 A.K.A S-Kush A.K.A Shader)이자 이낙인 김병훈이 응모해 캐스팅된 일도 있다.
SBS 파워FM에서 김진표의 야간비행[16]으로 DJ를 맡았던 바 있으며, TV에서도 종종 MC로 활동. 묘하게 게임정보 프로그램 MC를 여러번 담당했다. 그 시절 사람답게 게임 좋아한다. 특히 당시 최대 히트작 중 하나인 심시티...
그리고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 악역으로 출연해 연기를 도전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흑역사.
어렸을 땐 나름대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통했다. 1996년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의 '잼콘서트'가 끝나고 술집에서 어떤 일행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 경찰에 입건됐다던지, SBS 한밤의 TV연예의 리포터 조영구가 귀찮게 인터뷰 요청을 해 와 솔로 3집 마지막에 히든 트랙으로 '# 같은 TV 연예'라는 곡을 수록했던 사건 등이 대표적.
당시 김진표의 홈페이지에는 '연예정보프로그램, 특히 한밤의 TV연예는 공공의 적'이라는 뉘앙스의 김진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찰나, 김진표가 심장 수술을 막 받았을 때, 치료 중이던 병원으로 조영구를 비롯한 한밤의 촬영팀이 인터뷰요청차 찾아왔다. 당연히 김진표는 인터뷰를 거부한 후, 밖에서 기다리던 연예가중계팀과 인터뷰를 하고 다시 병상에서 잤다고 한다. 이 후 매니저가 여차저차 설득시켜서 한밤 팀과도 인터뷰를 무사히 했지만, 빡친 한밤은 그 인터뷰를 방송에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벼르고 있던 김진표의 반격이 이 '# 같은 TV 연예'이다. 문제는 기획사 및 앨범 유통사에서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며 초판CD중 후속 제작된 앨범에서 문제의 곡을 뺀채 유통시킨것. 왜 노래가 없냐며 항의하던 팬들의 글을 자기 홈페이지에서 본 후 김진표는 사과를 하고 전량 교환조치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진표는 2007년부터 09년까지 선정성으로는 알아주는 tvN에서 연예뉴스 진행을 맡았다. 그리고 당연히 까였다(...), 욕먹으면서도 JP팬하던 팬덤이 이를 계기로 거의 무너진다. [17]
2005년 부터 카레이서로 활동하여 2008년 R-Stars 선수로 프로활동을 시작, 2010년부터 쉐보레 레이싱팀[18]에 소속했었으며 클래스 챔피언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다. 지금은 금호타이어 엑스타 레이싱 팀 소속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김진표/레이싱 드라이버 항목 참고. 2011년 8월에 XTM에서 방영하는 탑기어 코리아의 메인 MC중 한명으로 발탁되었다. 제레미-김진표, 리차드-연정훈, 제임스-김갑수 쉐보레 크루즈 광고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다.
가수로서의 본업도 손놓은 건 아니고, 벅스와 3년 동안 일정한 곡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수령하는 계약을 맺어 월급쟁이 가수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흔한 계약방식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 사례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보기 드문 계약 방식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월급쟁이 방식 덕택인지 6집도 나이 치고는 꽤 빨리 나왔으며, 이제서야 겨우 잃어버렸던 감을 대부분 되찾은 듯 곡도 랩도 깔끔하게 잘 만들어졌다.
2012년 2월 10일부터 엠넷에서 방송되는 오디션 프로그램 The Voice Korea의 MC를 맡게 되었다. 톤이 좋고 임기응변에 뛰어난 진행능력을 인정받는 편.
연예계에서도 알려진 굉장한 자동차 애호가이다. 자타공인 포르쉐 마니아인데 정작 포르쉐가 없...었다가 중고 매물을 득템했다. 전 오너가 직수입한 964 쥬빌리 30주년 한정판 009번 전 세계에 911대 밖에 없는 차로 터보 카울에 자연흡기 엔진이 달려있다. 대체로 한을 풀었다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연정훈 보고있나? 도둑조심하세요. 또, 김진표가 아들인 민건군이 태어나며 산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3와 롱텀 시승을 위해 지원받은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와 재규어 F-타입도 소유하고 있다.
- ↑ 김진표가 "난 나야!" 하는 그 유명한 광고.
- ↑ 상문고등학교 사태
- ↑ 김진표는 고3이 되어서도 뚜렷한 목표 없이 방황하던 자신에게 "나랑 같이 음악할래?"라고 제안해 준 이적을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여러 번 밝힌 바 있다. 흑역사라는 낱말로 표현하기엔 뉘앙스가 다소 부적절한 듯하다.
- ↑ 후일 이적과의 이야기에선 내가 그런 이야길 했었어? 하면서 완전히 까먹은 이적의 증언이 나온다.어찌보면 김진표를 아직 뮤지션으로 살게 해준 사람이 이적이 아닌가 싶다.
- ↑ 이 후에 들어온 멤버가 이현섭으로, 현재는 N.EX.T의 잠정 보컬.(잠정 보컬인 이유는, 신해철 생존시 NEXT UTD 더블 보컬이었지만,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넥스트의 활동이 안갯속으로 빠졌기 때문.)
- ↑ 이렇게 보면 김진표도 은근히 인맥풀이 좋다. 애초에 뮤지션 입문을 도운 이적도 그렇고, 노바소닉때의 김세황도 그렇고. 후에는 이현도하고도 같이 작업한 적도 있다.
- ↑ 게다가 힙합바지 드립은 후에 이현도의 New Classic 앨범때 또 써먹는다. 그러나 과연 DO-JP-PD(이현도-김진표-조PD) 시절 그들의 랩 스킬을 엉터리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한국어로 랩 가사를 라임-플로우 형식으로 제대로 쓰기는 힘들다" 라는 인식이 굉장히 팽배했기 때문에, 이현도는 정말 어찌어찌 시도만 했던 실험적 상황이었고, 조PD는 유학파라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어로 쓰다가 안되면 그냥 영어랩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런 고로 김진표의 라임 (이른바 단음절 라임 방식) 방식을 지금이야 실컷 깔 수 있다고 당시 상황 고려하면 쉽게 까긴 어렵다. 애초에 라임-플로우의 체계 어느정도 갖춰진 게 VJ-DC(버벌진트-데프콘)의 마스터플랜때고, 완전히 완성된건 피타입-UMC-가리온 때라는걸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버벌진트가 이 단음절 라임을 까던 말던 간에 어쨌든 주적으로서 까고 있는 시점에서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
- ↑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3집이 나왔던 2001년 전후반은 인터넷문화가 막 봇물을 이루면서 사회비판 의식이 소수 마니아에서 대중 전반으로 퍼지던 시기였던 만큼 김진표를 비롯해서 당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고, 5집은 앨범 제작 기간이 김진표가 이혼 후유증을 겪었던 시기라 여러 모로 감정이 복잡했다. 이혼 후 몇 개월 만에 발표했던 싱글 '사랑 따위'는 김진표가 작사 작곡을 다했는데 5집보다 더 암울한 곡이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삭발하는 뮤비까지 찍었다!
- ↑ 전부인은 쇼호스트 그만두고 셰프로 활동 중이라고 한다. The Institute of Culinary Education : Culinary Art, 츠지원 요리과정 수료
- ↑ 예능 프로그램인 애정만세로 데뷔해 연기자로서 조연 및 단역을 오갔지만 결국 포텐이 터지지 않았다, 대학시절엔 한예종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다.
- ↑ 다만 이 디스곡은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현직 대통령이었던데다가 모두가 알다시피 노무현이라는 대통령은 역대급으로 여기저기서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기도하다. 이 곡 하나만으로 김진표가 노무현이라는 사람 자체를 까내렸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정치가 디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나이가 어려선지, 혹은 어린 나이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 불편했는지 몰라도 아이들이 주도하는 미션에서 자주 열외되는 모습을 보였다.
- ↑ 예능 출연이 처음은 아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주말 예능이라는 성격은 이제껏 그가 활동해 왔던 분야와는 거리가 멀었던 점이 작용한 듯.
- ↑ 결국 이것은 노바소닉 활동도 그만두게 만들었다. 특히, 3집 콘서트 당시 부정맥으로 쓰러질 당시엔 진짜 죽을 뻔 했다. 어쨌든 이 문제로 한국 힙합내 병역문제에서 까일 수 없는 존재.
- ↑ 노바소닉은 이후 이현섭을 영입해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이후 10주년 기념 앨범을 마지막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 ↑ PC통신을 통해 청취자 참여가 이루어진 당시로선 획기적인 컨셉이었다.
- ↑ 그래도 이 때 연예뉴스를 진행한 경험이 5집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1985716
- ↑ 김진표가 합류할 당시에는 GM대우 Mighty Blue. 2011년에 팀명 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