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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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네시아의 역사
독일령 뉴기니남양군도태평양 제도
일본 제국의 외지
외지지역시대통치기관
화태(樺太)가라후토 ⒧화태청
조선(朝鮮)조센총독부
대만(臺灣)다이완총독부
남양(南洋)난요남양청
관동(關東)간토관동청
⑴ 가라후토는 1943년 이후 내지(內地, ないち, 본토)로 편입
국제연맹 위임통치령
A형 분류시리아메소포타미아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B형 분류레바논동카메룬동토고서카메룬서토고탕가니카루안다-우룬디
C형 분류나우루사모아뉴기니남양군도남서아프리카
영국 ( 호주, 뉴질랜드 삼국 공동) 프랑스 일본 제국 벨기에 남아공
남양군도
南洋群島
South Pacific Mandate
국기휘장[1]
League_of_Nations_mandate_Pacific.png
남양군도 지도(1번)
위치남양군도
* 팔라우
* 미크로네시아 연방
* 마셜 제도
* 북마리아나 제도
수도코로르[2]
정치체제국제연맹 위임통치령
군주덴노
언어일본어
오스트로네시아어
성립 이전독일령 뉴기니
멸망 이후태평양 제도

1 개요

일본 제국1914년 9월~10월 사이 독일 제국의 속령이었던 미크로네시아[3]를 점령하였다. 정식명칭은 남태평양 위임통치령이다. 일본에서는 내남양(內南洋)이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1919년 발효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남양군도는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위임통치령[4] 이 되었다. 국제연맹이 설정한 위임통치 분류는 C형(Class C)이었다.

2 역사

영토확장에 야욕에 불타던 일본 제국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제 막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한 후발주자였고, 기존의 열강들에 비해 재정적, 군사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영국도 동남아 지역에서 독일 제국군을 봉쇄해야 했기 때문에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동맹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1914년 일본 제국은 산둥과 함게 남양군도를 점령하였다. 이후 1915년 1월에는 21개조 요구(二十一個 條項)를 발표하였다. 21개조 요구는 일본 제국의 권익 확대를 위해 중국에 요구한 것으로, 일본 제국이 소유한 만주 남부의 이권을 확장하고,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산둥 조차지를 일본 제국에 이양하는 등 대단히 제국주의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당시 일본 제국에 비해 약세였던 중국은 일본 제국의 외교적 압박에 1915년 5월 이 요구를 승인하게 된다. [5]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되어 패전국인 독일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이 승전국들에게 배분되었다. 이에 따라 남양군도는 1919년 6월,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일본 제국에게 배분되었다. 1922년 4월에 일본 제국은 이곳에 남양청(南洋廳)을 설치하였다. 그 전까지는 남양군도는 사실상 일본 해군의 군정체제나 다름이 없었으나 남양청이 설치된 이후에도 남양군도는 실질적으로 일본 해군의 관할이었다. 1920년대부터 일본 해군은 남양군도의 주요 섬에 군사시설을 설치하였다. 이는 미국의 태평양 진출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 해군에 의해 항만시설, 해군기지, 비행장 건설이 이루어졌다. 1930년 대부터 일본인 이주민이 크게 늘어나 남양흥발주식회사(南洋興發株式會社), 남흥수산, 남양석유 등 일본의 민간기업이자 준(準) 국책기업이 남양군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만주 사변이 발발했다. 일본 제국 정부의 방침에 반기를 든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이 전쟁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은 만주를 영유할 수 있게 되었으나, 열강과의 협의 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만주를 함부로 병합할 수 없었다. 위임통치령 형태로 소유하려고 해도 일본 제국이 독자적으로 감행한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국제연맹이 승인해 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일본 제국은 이곳에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으나, 국제연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1935년 일본 제국이 국제연맹에 탈퇴하였다. 이런 급격한 정세는 남양군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는데, 남양군도는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었으므로 '일본 제국이 국제연맹에서 탈퇴한다면 남양군도를 다시 반환해야 하는지' 여부가 국내외에서 문제가 되었다. 이는 국제연맹이 일본의 남양군도 위임통치는 계속 유효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이로인해 국제연맹에서 일본 제국이 탈퇴하였음에도 국제연맹은 일본 제국의 남양군도 통치를 계속 감시할 수 있었고, 한편으로 일본 제국은 남양군도를 사실상 다른 식민지와 동일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1936년에는 일본의 국책회사(國策會社)인 '남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남양군도에 제4함대를 설립,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군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연합군과의 격전지가 되기도 하였다. 1944년 6월 15일 미군은 남양군도 사이판에 상륙했고, 동년 6월 19일 마리아나 해전이 발발, 일본 해군은 여기서 패배함으로써 사이판에 일본 해군은 섬멸되었다.

6월 말에는 대본영이 사이판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전선은 더욱더 후퇴하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남양군도 티니안 하고이 비행장에서 리틀보이를 실은 B-29를 발진하였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이미 전쟁은 일본 제국의 패배로 결정되었고, 8월 15일 마침내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종결, 남양군도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미국신탁통치령태평양 제도가 되었다.

3 산업

1921년 11월에 설립된[6] 남양흥발주식회사는 남양청으로부터 사탕수수 독점권을 부여받아 사탕수수를 재배했으며, 전분, 인광, 수산물 등을 생산하였다. 남양청의 전폭적인 후원아래 남양흥발은 세계상품인 설탕의 주요 생산지가 될 수 있었다. 남양무역은 해운업, 야자 재배를 수행했다. 또한 남양청과 조선총독부가 남양흥발주식회사와 함께 추진한 '남양농업이민'에 의해 남양군도에도 조선인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사탕수수, 카사바 재배 및 무수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열악한 음식과 주거환경, 무더위로 인해 이들 이주 조선인들의 생활은 참혹했으며, 이때문에 1919년에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3.1 운동과의 연관성은 추가바람) [7]

4 참고 자료

5 관련 문서

  1. 이미지 출처
  2. 현재 팔라우의 최대도시이다.
  3. 마리아나, 트럭, 팔라우 제도
  4. 위임통치령(mandate)은 국제 연맹이 해당 통치 지역의 복지, 개발을 위해 위임국에게 위탁한 지역을 말한다. 즉 남양군도는 일본의 다른 식민지들과는 그 위치가 달랐다. 예를 들어 일본은 남양군도에 대한 위임통치 상황을 매년 국제연맹에 보고, 심사를 받아야 했다. - 조정우, "제국일본의 식민지 개발 구상과 군사주의", 2015, p. 81
  5. 이 21개조 요구가 원인이 되어 훗날 중국판 3.1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5.4 운동이 중국 전국에서 발발한다.
  6. 남양청이 1922년에 설립되었으므로 남양청의 설립보다 빨랐다.
  7. 이 폭동은 일본 제국이 남양군도 통치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할 정도로 파장이 컸는데, 남양군도는 일반 식민지가 아니라 위임통치령이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태평양까지 확장하는 것을 경계한 서방(미국, 호주, 네덜란드 등)은 일본 제국의 통치를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폭동은 자칫 일본제국의 통치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