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령

團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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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의 초상화에 묘사된 신라 중~후기의 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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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초상화에 묘사된 고려 말~조선 초의 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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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초상화. 조선 초기 흉배가 달린 단령을 입고 있다.


채제공의 초상화. 조선 중후기 흑단령의 모습이다.

1 개요

중국에서 유래해 한국에서도 신라, 고려, 조선에서 입었던 관복으로 전통의상의 일종이다.

원래는 둥근 깃을 의미하나 단령포, 즉 둥근 깃의 외투를 단령이라고 한다. 특히 조선 시대 관리들이 집무를 볼 때 상복(평상복)으로 입었으며 옷의 색상과 가슴과 등에 달린 흉배와 허리에 매는 띠로 품계를 구별하였다. 현재는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입는 옷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라 진덕여왕 2년 김춘추당나라에서 받아온 것이 처음이며 고려 때에도 신라의 관복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다가 왕권 강화에 큰 힘을 쏟은 광종 11년 3월에(960년) 사색 공복 제도를 시행하였다. 당시 이 사색은 자색, 단색, 비색, 녹색으로 시행이 되었다.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할 때에는 원나라의 관복인 질손을 입었고, 이후 고려 우왕 13년(1387)에 설장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홍무제로부터 사모와 함께 하사받아 다시 들여왔고 정몽주 등의 주장으로 관복화되었다. 1900년에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게 되면서 단령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단령은 처음에는 고려 후기 단령과 처음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가, 상복의 띠 만으로는 상하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고 하여 조선 단종 2년(1454년) 때부터 가슴과 등에 흉배가 달리고 소매가 점차 늘어졌고 품 또한 넓어졌다. 백관 상복의 흉배는 사각형으로, 1897년(고종 34년) 기록을 보면 왕족은 기린(麒麟), 문관 당상관(정3품 이상)은 쌍학, 당하관은 단학, 무관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이며 이를 보여주는 실물도 상당수 남아 있다. 초기 흉배의 크기는 상복의 가슴을 모두 덮을 정도로 컸지만, 말기에는 작아졌다.

구조적으로도 약간 차이를 보이는데, 초기의 단령은 중국식 그대로 매듭으로 된 맺은단추로만 옷깃을 고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맺은단추는 깃 쪽에만 남고 다른 곳은 일반 한복처럼 옷고름으로 여미게 되었다.

또한 색상으로도 상하 구분을 하였는데, 왕족과 당상관은 홍색, 당하관은 청색을 입도록 하여 구분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비 절감 및 검약을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조선 후기에는 당상관 당하관 구분 없이 잿빛의 흑단령으로 통일되는 모습이 조선시대 관료의 초상화들의 변천을 통해 확인된다.

한편, 단령은 혼례의 신랑 예복으로 쓰였는데, 이는 벼슬있는 자의 관복을 착용함으로써 결혼예식을 일생을 통한 최고의 경사스러운 의식으로 여겼음을 나타낸다. 혼례복으로 단령을 착용할 시 자색이나 남색의 관복을 입고 각띠를 띠고 흉배를 달았는데, 신랑예복의 흉배는 당상관과 같은 쌍학을 달았다.

단령이 본래 중국 한족 왕조들이 고안한 의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단령의 기원은 서역, 혹은 북방 유목민족 의상인 호복에서 비롯된 것으로 남북조시대에 처음 등장하며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가 단령을 관복으로 채택하면서 중국 고유 의상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1]

2 국왕의 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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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된 고려 태조 왕건 어진. 이길범 화백의 작품이다. 소매가 좁고 연한 뽕잎색의 단령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종묘에 소장된 공민왕의 초상화에서는 흑색 복두를 쓰고 옷깃이 흑색인 붉은 단령을 입고 홀을 든 모습으로 그려졌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32년(1450년) 윤1월 7일의 기록으로 보면, "홍무 2년에는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공민왕(恭愍王) 전(顓)에게 구장 면복(九章冕服)을 하사하셨고..."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369년부터는 고려 왕도 곤룡포를 입게 되었으며, 이것이 조선 때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 어진이 청색인 것으로 보면 고려 왕들도 청색 곤룡포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3 외국의 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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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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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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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온 베트남 사신들의 모습을 조선 사신들이 그린것. 보다시피 조선과 명의 관복과 매우 유사하다. 후 레 왕조(後 黎朝, 1428년 - 1788년) 시기에 입던 관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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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옌 왕조(阮朝, 1802년 - 1945년) 시기 단령 사진. 이전의 후레 왕조 시기와 비교해 보면 관복에 문양을 수놓는 등 굉장히 화려해진 모습을 볼 수 있다.


류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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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 ~ 17세기 초 류큐 국왕이었던 쇼네이 왕어진. 왕의 곁에 서 있는 관리들의 복식을 보면 역시 중국것과 유사한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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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 쇼쿄왕자의 초상화

4 천랑열전의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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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오괴의 막내. 연오랑의 편지가, 명부첩과 바뀌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원흉. 본래 사유랑과 함께 청수문을 털러 갔다가, 청사검과 함께 보물상자를 한개 훔쳐왔으나, 하필 그게 명부첩이라 형제들을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로 이끌게된다(…)

죽림오괴가 전부 전멸한후, 연오랑을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라다니게 된다. 아군 합류 이후, 각종 인물에게 츳코미를 거는 역할이 된다. 전력에는 전혀 도움이 안되어 인질로 잡히거나, 험한꼴을 많이 당한다. 자신을 공격했던 월하랑에게는 좋은 감정이 없었으나, 연오랑이나 월하랑이나 세상물정은 영 꽝이였기에 중간에 껴서 개고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연오랑과 월하랑이 플래그를 세우고, 연오랑이 절벽으로 떨어진 이후 적운, 금천무와 같이 행동하면서 비중이 급하락하게 된다. 최종화 이후에는 첫째 오라버니인 대호량과 같이 살게 된듯하다. 꽤나 비중이 있던 조연이였으나 히로인은 끝내 뛰어넘지 못했다. 사실 일러스트만 봐도 월하랑이 백배는 더 났다. 여캐들은 전부 커플[2]이 맺어졌건만, 단령은 혼자 솔로다. 괜찮아 대호량이 있잖아 후속작에선 언급조차 안나온다. 안습;;
  1. 당장 삼국지등 남북조 시대 이전 시대를 다루는 창작물을 봐도 당시 중국 관리들은 단령이 아닌 다른 의상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중국 드라마 삼국에선 관복이 이후시기에는 특별한 행사에 입는 조복으로 표현되었다.
  2. 연오랑=월하랑, 결마로=유화, 적운=소향, 이연비=진세연, 모용비=자혜가 맺어진다. 죽어버린 홍군과 쌍둥이는 지못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