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3대 영화상 | ||
청룡영화상 | 백상예술대상 | 대종상영화제 |
大鐘賞
DAE JONG FILM AWARDS[1]
공식 홈페이지
300px |
제52회 대종상영화제 |
목차
1 개요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하고 사단법인 대종상 영화제가 주관하는 영화상, 또는 상을 증여하는 영화제[2]의 명칭.
그러나 실상은 꼰대 중심의 어용 영화제
2 역사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958년에 문교부에서 '국산 영화상'이라는 명칭으로 설립하였다. 단, 국산 영화상 시절은 대종상의 수상목록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국산 영화상 시절과 단절을 선언하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이름을 대종상으로 바꾼 것은 1962년. 그런 이유로 햇수로는 59년이지만 회수로는 2014년 기준 51회이다.[3] 국가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넘어간 것은 1992년부터다.
3 역대 수상
3.1 최우수 작품상 및 감독 상
회차 | 연도 | 최우수작품상 (감독) | 감독상 (영화) |
제1회 | 1962년 | 연산군 (신상옥) |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
제2회 | 1963년 | 열녀문 (신상옥) | 유현목 (아낌없이 주련다) |
제3회 | 1964년 | 혈맥 (김수용) | 이만희 (돌아오지 않는 해병) |
제4회 | 1965년 | 벙어리 삼룡 (신상옥) | 신상옥 (벙어리 삼룡) |
제5회 | 1966년 | 갯마을 (김수용) | 유현목 (순교자) |
제6회 | 1967년 | 귀로 (이만희) | 김수용 (안개) |
제7회 | 1968년 | 대원군 (신상옥) | 신상옥 (대원군) |
제10회 | 1971년 | 무명의 교사 (?) | 유현목 (분례기) |
제11회 | 1972년 | 의사 안중근 (주동진) | 신상옥 (평양폭격대) |
제12회 | 1973년 | 홍의 장군 (이두용) | 최훈 (수선화) |
제13회 | 1974년 | 토지 (김수용) | 김수용 (토지) |
제14회 | 1975년 | 불꽃 (유현목) | 이만희 (삼포가는 길) |
제15회 | 1976년 | 어머니 (임원식) | 설태호 (원산공작) |
제16회 | 1977년 | 난중일기 (장일호) | 최인현 (집념) |
제17회 | 1978년 | 경찰관 (이두용) | 임권택 (족보) |
제18회 | 1979년 | 깃발없는 기수 (임권택) | 정진우 (심봤다) |
제19회 | 1980년 | 사람의 아들 (유현목) | 이장호 (바람불어 좋은날) |
제20회 | 1981년 | 초대받은 성웅들 (최하원) | 임권택 (만다라) |
제21회 | 1982년 | 낮은데로 임하소서 (이장호) | 이장호 (낮은데로 임하소서) |
제22회 | 1983년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이두용) | 이두용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제23회 | 1984년 | 자녀목 (정진우) | 정진우 (자녀목) |
제24회 | 1985년 | 어미 (박철수) | 배창호 (깊고 푸른밤) |
제25회 | 1986년 | 안개기둥 (박철수) | 임권택 (티켓) |
제26회 | 1987년 | 연산일기 (임권택) | 임권택 (연산일기) |
제27회 | 1989년 | 아제아제 바라아제 (임권택) | 김호선 (서울 무지개) |
제28회 | 1990년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장길수) | 장길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제29회 | 1991년 | 젊은날의 초상 (곽지균) | 곽지균 (젊은날의 초상) |
제30회 | 1992년 | 개벽 (임권택) | 김호선 (사의 찬미) |
제31회 | 1993년 | 서편제 (임권택) | 임권택 (서편제) |
제32회 | 1994년 | 두 여자 이야기 (이정국) | 장선우 (화엄경) |
제33회 | 1995년 | 영원한 제국 (박종원) | 박종원 (영원한 제국) |
제34회 | 1996년 | 애니깽 (김호선) | 김호선 (애니깽) |
제35회 | 1997년 | 접속 (장윤현) | 정지영 (블랙잭) |
-- | 1998년 | 쌍방울 부도로 인한 일시폐지 | |
제36회 | 1999년 | 아름다운 시절 (이광모) | 이광모 (아름다운 시절) |
제37회 | 2000년 | 박하사탕 (이창동) | 이창동 (박하사탕) |
제38회 | 2001년 | 공동경비구역 JSA (박찬욱) | 한지승 (하루) |
제39회 | 2002년 | 집으로... (이정향) | 송해성 (파이란) |
제40회 | 2003년 | 살인의 추억 (봉준호) | 봉준호 (살인의 추억) |
제41회 | 2004년 | 봄여름가을겨울그리고봄 (김기덕) | 박찬욱 (올드보이) |
제42회 | 2005년 | 말아톤 (정윤철) | 송해성 (역도산) |
제43회 | 2006년 | 왕의 남자 (이준익) | 이준익 (왕의 남자) |
제44회 | 2007년 | 가족의 탄생 (김태용) | 봉준호 (괴물) |
제45회 | 2008년 | 추격자 (나홍진) | 나홍진 (추격자) |
제46회 | 2009년 | 신기전 (김유진) | 김용화 (국가대표) |
제47회 | 2010년 | 시 (이창동) | 강우석 (이끼) |
제48회 | 2011년 | 고지전 (장훈) | 강형철 (써니) |
제49회 | 2012년 |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 추창민 (광해, 왕이 된 남자) |
제50회 | 2013년 | 관상 (한재림) | 한재림 (관상) |
제51회 | 2014년 | 명량 (김한민) | 김성훈 (끝까지 간다) |
제52회[4] | 2015년 | 국제시장 (윤제균) | 윤제균 (국제시장) |
3.2 남우 / 여우 주연상
회차 | 연도 | 남우주연상 | 여우주연상 |
1 | 1962년 | 신영균 《연산군》 | 최은희 《상록수》 |
2 | 1963년 | 신영균 《열녀문》 | 도금봉 《새댁》 |
3 | 1964년 | 김승호 《혈맥》 | 황정순 《혈맥》 |
4 | 1965년 | 신영균 《달기》 | 최은희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
5 | 1966년 | 김진규 《태양은 다시 뜬다》 | 최은희 《민며느리》 |
6 | 1967년 | 박노식 《고발》 | 문정숙 《귀로》 |
7 | 1968년 | 신성일 《이상의날개》 | 문희 《카인의후예》 |
10 | 1971년 | 장동휘 《대전장》 | 윤정희 《분례기》 |
11 | 1972년 | 황해 《평양폭격대》 | 고은아 《며느리》 |
12 | 1973년 | 신영균 《삼일천하》 | 윤정희 《효녀 심청》 |
13 | 1974년 | 박근형 《이중섭》 | 김지미 《토지》 |
14 | 1975년 | 하명중 《불꽃》 | 김지미 《육체의약속》 |
15 | 1976년 | 신일룡 《아라비아의 일몽》 | 최민희 《빗속의 연인들》 |
16 | 1977년 | 김진규 《난중일기》 | 윤미라 《고가》 |
17 | 1978년 | 하명중 《족보》 | 고은아 《과부》 |
18 | 1979년 | 최불암 《달려라만석아》 | 유지인 《심봤다》 |
19 | 1980년 | 이대근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정윤희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
20 | 1981년 | 남궁원 《피막》 | 정윤희 《앵무새몸으로울었다》 |
21 | 1982년 | 안성기 《철인들》 | 김보연 《꼬방동네 사람들》 |
22 | 1983년 | 안성기 《안개마을》 | 장미희 《적도의꽃》 |
23 | 1984년 | 윤일봉 《가고파》 | 이미숙 《그해겨울은따뜻했네》 |
24 | 1985년 | 안성기 《깊고푸른밤》 | 김지미 《길소뜸》 |
25 | 1986년 | 이영하 《안개기둥》 | 최명길 《안개기둥》 |
26 | 1987년 | 이영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 강수연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
27 | 1989년 | 이덕화 《추억의 이름으로》 | 강수연 《아제 아제 바라아제》 |
28 | 1990년 | 신성일 《코리안커넥션》 | 강수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
29 | 1991년 | 이영하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원미경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30 | 1992년 | 이덕화 《개벽》 | 장미희 《사의 찬미》 |
31 | 1993년 | 이덕화 《살어리랏다》 | 심혜진 《결혼 이야기》 |
32 | 1994년 | 박중훈 《투캅스》, 안성기《투캅스》 | 윤정희 《만무방》 |
33 | 1995년 | 김갑수 《태백산맥》 | 최진실 《마누라 죽이기》 |
34 | 1996년 | 최민수 《테러리스트》 | 심혜진 《은행나무 침대》 |
35 | 1997년 | 한석규 《초록물고기》 | 심혜진 《초록물고기》 |
36 | 1999년 | 최민식 《쉬리》 | 심은하 《미술관 옆 동물원》 |
37 | 2000년 | 최민수 《유령》 | 전도연 《내 마음의 풍금》 |
38 | 2001년 | 송강호 《공동경비구역 JSA》 | 고소영 《하루》 |
39 | 2002년 | 설경구 《공공의 적》 | 전지현 《엽기적인 그녀》 |
40 | 2003년 | 송강호 《살인의 추억》 | 이미연 《중독》 |
41 | 2004년 | 최민식 《올드보이》 | 문소리 《바람난 가족》 |
42 | 2005년 | 조승우 《말아톤》 | 김혜수 《얼굴 없는 미녀》 |
43 | 2006년 | 감우성 《왕의 남자》 | 전도연 《너는 내 운명》 |
44 | 2007년 | 안성기 《라디오스타》 | 김아중 《미녀는 괴로워》 |
45 | 2008년 | 김윤석 《추격자》 | 김윤진 《세븐 데이즈》 |
46 | 2009년 | 김명민 《내 사랑 내 곁에》 | 수애 《님은 먼 곳에》 |
47 | 2010년 | 원 빈《아저씨》 | 윤정희 《시》 |
48 | 2011년 | 박해일 《최종병기 활》 | 김하늘 《블라인드》 |
49 | 2012년 | 이병헌 《광해, 왕이 된 남자》 | 조민수 《피에타》 |
50 | 2013년 | 류승룡 《7번방의 선물》, 송강호《관상》 | 엄정화 《몽타주》 |
51 | 2014년 | 최민식 《명량》 | 손예진 《해적:바다로 간 산적》 |
52 | 2015년 | 황정민 《국제시장》 | 전지현 《암살》 |
3.3 기록
- 5회 수상자
- 4회 수상자
- 3회 수상자
4 문제점
4.1 수상자, 수상작 논란
대부분 시상식이 수상자, 수상작에 논란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특히, 대종상은 유난히 타 영화상에 비해 훨씬 정도가 지나쳐서 그 논란들로 인해 권위가 바닥인 상태다. 과거에는 유일무이한 영화제로서 권위가 높았지만 그 와중에 비리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예 돈봉투 건네주고 상을 '구입'한다는 말도 많았었고 지금은 흐지부지되어 거론되지 않으나, 1960~1970년대 영화계 인사들은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다. 더불어 정부에서 주도하는 관제행사라서 높으신 분들의 눈치를 보는 어용 영화제로도 악명이 높았다. 사회비판적 영화는 절대 금기였으며, 1970년대 후반까지는 정권의 입맛에 맞춰서 사회계도성을 매우 중요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작품상, 감독상 다음으로 (0체제선전용) 반공영화상이 주요부문으로 여겨졌다. 1980년대 이후로는 반공영화상도 폐지되고 노골적인 체제홍보는 줄었지만, 사회비판 영화는 여전히 금기였다.[5]
더구나 당시에는 막대한 이권이 있었던 해외 영화 수입권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우수 작품상 수상작을 내놓은 영화사에 수여했다.[6] 이 외화수입권은 당시 돈 기준으로 억 단위로 거래되고 있었다. 때문에 이 상을 타는 것은 곧 수억을 번다는 것을 의미했다. 영화사들은 대종상 작품상을 타기 위한 영화를 찍었다. 당연히 그 영화들은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맞아야 했고, 무엇보다 정부의 입맛에 맞아야했다. 그리고 이렇게 대종상만 노린 영화는 작품상을 타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었지만, 만일 못타면 그대로 영화사 창고로 직행하는 사례도 흔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대종상은 본질적으로 최고의 영화제인 동시에 최악의 영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작품성이 있으나 사회 부조리를 다룬다든지 높으신 분들을 까는 내용이 있다면 설령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고 평가를 받더라도 일절 후보에도 못 오르던 것이 흔한 일이었다. 10월 유신시대에는 아예 정부 주도로 수상을 통제했고, 친정부적이고 반공적인 영화에 '우수반공 영화상'을 따로 개설해서 시상할 정도였으니 사실상 어용 영화제 시상식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문제점을 찾아본다면 엄청나게 쏟아진다. 심지어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1990년부터 나온 문제점들만 봐도 이렇다. 이러니 그 이전에는 얼마나 많을지...
- 1990년
- 당시, 영화계도 예상을 했지만 정지영 감독이 연출한 남부군은 단 1개도 수상하지 못했다. 빨치산을 다뤘다고 논란이 거셌던 이 영화는 당시 흥행 대박과 같이 평도 상당히 좋아서 정작 조선일보가 주최한 청룡영화제에선 감독상(정지영),남우주연상(안성기), 남우조연상(최민수), 신인여배우상(故 최진실)을 받았다.
- 1991년
- 1991년에는 미군에 의하여 성폭행을 당한 여인이 되려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다가 결국 생계를 위해 양공주로 전락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미군을 깐다고 해서 작품상 후보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논란이 컸었다. 겨우 대종상 의상상을 수상했을 뿐이었고, 이에 대하여 당시 영화지 로드쇼에서 취재하니 대종상 관계자들이 윗사람 눈치가 보이니 할 수 없다는 답변을 털어놓기도 했다. 영화가 서울관객 17만을 기록하면서 흥행도 대성공하고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각본상 및 여우주연상(이혜숙)을 받고 원작인 안정효가 쓴 소설이 미국에서도 번역되어 나와 미군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점에 대하여 작은 화제를 낳았던 거와 대조적이다.
- 1994년
- 대종상의 권위가 본격적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부터였다. 당시 흥행스코어에서 참패한 영화 '두 여자 이야기'가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도 영화 개봉하기 전(1994년 4월 23일)에 수상(1994년 4월 3일)하여 한동안 작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막상 개봉한 이후 좋은 영화였다는 평이 많아 논란은 수그러들었다. 밑에서 언급한 '애니깽'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 작품 또한 봉건주의 제도 하에서 두 여인의 굴곡진 삶을 잘 그려낸 수작이다. 흥행성과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이 반드시 국내 영화 시상식 결과에 영향을 줄 필요도 없고, 그러한 전례나 후례는 많은 나라에서도 존재한다. 이 작품을 연출한 이정국 감독은 데뷔작 '오월의 노래'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을 세상에 알리지만 그 결과 한동안 영화연출 제의가 끊기기도 했었다고... 한편, 함께 후보에 오른 영화는 안성기, 박중훈 콤비의 연기가 돋보였던 투캅스와 그 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수상한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 등등. 그러나 '화엄경'은 감독상을 받는데에 그쳤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빨갱이 영화'라고 까이기만 했다. 투캅스는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당시 서편제에 이어서 역대 한국영화 흥행 2위라는 엄청난 초대박을 거둬들이고[7] 화엄경은 베를린 영화제 알프레트 바우어상을 수상하고,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칸 영화제에 출품되고 서울관객 15만으로 그럭저럭 흥행도 하던 것과 달리 두 여자 이야기는 흥행도 서울관객 2만으로 참패하고 지금은 아주 듣보잡이 되었다. 그나마 감독인 이정국은 나중에 최진실 주연인 영화 편지로 서울관객 72만이라는 대박을 거두긴 했지만 이 영화는....
- 1996년
- 1996년 제 34회 시상은 지금까지 진행된 대한민국의 영화 시상식 중에서도 넘사벽급으로 손꼽히며,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도 많은 대중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다른 말로는 영화 제목을 본떠서 애니깽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세한 것은 1996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를 참조하자.
- 2001년
- 2001년엔 그 해 흥행 최고를 기록한 친구가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단 하나도 수상하지 못했던 반면에, 관객에게 외면을 당하고 평가도 좋지 않았던 영화 "하루"에 감독상 여우주연상 포함 4개를 줬다. 특히, 여우주연상 고소영은 역대 최악의 수상으로 남아있을 정도다.
그래도 양심이 있었는지, 고소영은 수상 트로피를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반납했다고 한다.
- 2004년
- 2004년엔 영화·연극·방송을 포함해 1년 이내 경력자'가 후보자격이 되는 신인 배우상을 출연작이 무려 19편이나 되는 공형진과 6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한 김래원 등이 올라 논란을 일으켰으며 김래원의 수상으로 더욱 논란이 되었다.
- 2009년
- 2009년엔 내사랑 내곁에의 하지원이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는데, 개봉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하늘과 바다>의 장나라가 여우주연상에 오르며 논란이 되었다. 기사에서는 미개봉작이라고 하고 있지만 하늘과 바다가 대종상 시작하기 전에 개봉했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출품된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대종상 1주일전에 개봉하였으며 제한적 개봉이라서 미개봉작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하지만, 더 빨리 개봉했다하더라도 작품성 때문에 역시 논란은 피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같은 해에 시작된 청룡영화상은 하지원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기며 대종상에게 빅엿을 선사했다.
- 2011년
- 2011년엔 써니의 심은경이 사정상 불참[8]하자 여우주연상 후보에서 제외시키면서 논란이 됐다. 그 대신 영화 로맨틱 헤븐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린 후 상을 줬는데, 심은경은 "상을 받아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담담하다."라는 글을 올렸다. 거기다가 심은경을 대신해서 여우조연상을 받고 수상소감까지 말해야 했던 사람은 써니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천우희였다.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상황
- 2012년
- 2012년엔 광해 한 작품에 15개를 몰아주는 바람에, 수상하는 사람들이 미안해하는 시상식[9]을 벌이며,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에 빛나는 피에타의 감독 김기덕이 빡쳐서 영화제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게 만들면서 안 그래도 박살난 권위가 가루가 됐다. 청룡영화상은
기다렸다는 듯이작품상에 피에타를 선정하며 또 대종상을 엿먹였다.
- 2013년
- 2013년은 대종상 50주년을 맞이한 매우 뜻깊은 해였다. 하지만 2013년에는 본편 진출작 중에서 더 테러 라이브와 연애의 온도 같은 롯데엔터테인먼트의 배급 영화들이 전부 출품되지 않았고 작품상과 기획상 후보 명단이 미발표되었고[10] 베를린이 촬영상, 편집상, 조명상, 의상상, 미술상 5개 중에서 조명상과 촬영상 2개 부문을 수상했지만 수상자가 참석하지 않았다. 권위가 없음을 인정하는 비공개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 2014년
- 2014년엔 음악부문에서 표절 논란이 있었던 수상한 그녀가 수상을 하고,[11] 독립영화를 아예 빈 손으로 내보내면서 비난을 받았다.
- 청룡영화상은
이때다 싶어한공주[12], 도희야 등의 독립영화의 손을 들어주었다.
- 2015년
- 애니깽 사태 이후 역대 최악의 대종상 영화제. 자세한 내용은 2015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를 참조하자.
4.2 운영상 문제
- 1998년 - 스폰서 부재로 인한 일시폐지
- 1962년 출범된 대종상은 그동안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인총연합회, 영화진흥공사, 映協 등으로 주관단체가 바뀌어 오다가 1992년부터 정부 지원이 중단되었다. 이후 삼성문화재단의 협찬으로 운영이 되어 왔는데 상기에 서술한 1996년 애니깽 사태로 인하여 삼성문화재단이 협찬을 취소해 버리게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쌍방울이 후원에 나서면서 1997년 제35회 시상식은 쌍방울 계열사인 무주리조트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로 쌍방울이 부도가 나면서 대종상은 다시 후원사를 잃었고, 결국 다른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1998년 시상식은 열리지 못하였다.
- 2010년 - 초대 가수 선정의 병폐
- 2010 대종상 시상식 논란 문서 참조.
- 2013년 - 야구에 밀린 50주년 기념 대종상
- 50주년 대종상 시상식은 2013년 한국시리즈 7차전 중계 때문에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으로 방영되었고 그 영향으로 1부가 7.0%, 2부가 6.2% 평균 시청률은 6.6%을 기록하여 49회 시상식 평균 시청률 7.3% 보다 0.6% 감소했다. 관련기사 KBO 리그 포스트시즌은 KBS2, MBC, SBS 등 지상파에서 한 경기씩을 번갈아 가며 중계하는데,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갈 시 7차전을 KBS 2TV에서 중계하는 것으로 확정이 된 상황이라 그 중계를 취소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KBS 측에서는 대종상 주최측에 "행사일 변경이 가능하다"는 사전 고지를 했는데 대종상 측에서 "한국시리즈가 7차전까지 갈 줄 몰랐다"고 변명한 사실이 드러났다.
7차전까지 진행되는 (적어도 주최 측 기준에서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두고 날짜 변경을 고려했어야지, 한심하다
- 2015년
- 2015년에는 아예 인기상 투표에서 투표권을 유료로 팔기까지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창조경제 투표법 인기투표에는 투표 한 표당 200포인트가 차감되는데 포인트를 얻으려면 강제로 각종 어플을 깔던지, 돈으로 포인트를 사야 한다.
- 2016년 52회는 열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 함량미달의 진행자 선정
- 사실, 배우들의 시상식 불참과 수상결과 문제가 커서 묻힌 것 뿐이지, 진행을 맡은 신현준의 진행 방식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즐라탄을 닮아서어수선하고 웃기려는데에만 치중하다 보니 후보자의 이름이나 작품 이름을 헷갈리는 등의 사전 지식 습득도 없이 막무가내로 진행한다는 평이다. 친 정권성향이 강한 한국영화배우 협회이사를 맡고 있다 보니 이 단체가 주최하는 대종상 시상식 진행을 맡게 된 것. 이 시상식에 이어 한국영화배우 협회에서 주최하는 '톱스타 시상식'에도 진행을 맡아 영화계에서 그에 대한 인식이 바닥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5 관련 항목
6 관련 링크
아래 링크된 기사들을 읽어보면 오늘날의 대종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개판으로 전락했는지 알 수 있다.
- 또다시 떠오른 '대종상 괴담', 무엇이 문제인가?
- '좌파척결' 외치던 보수영화인들, '돈 때문에' 내분
- 영화감독협회, 이사장 선거 놓고 삼각다툼
- 보수 온상 영화감독협회, 세대교체 이뤄지나
- 대종상 운영 놓고 서로 으르렁, 영화인협회 내분 심화될 듯
- 원로영화인들 싸움에 '대종상' 등 터진다
- 대종상 의혹에 격화되는 원로영화인들 갈등
- 이규태 방산 비리, 대종상에 불똥...영화계 옥신각신
- 시끌시끌한 영화인협회, 반세기 넘은 대종상의 현 주소 '씁쓸'
- '출석상 논란' 대종상 코앞... 과연 누가 출석할까
- 전직 배우 문성근이 말하는 대종상이 파탄난 이유(45분부터 시청)
- ↑ Grand Bell Awards가 아니다.
- ↑ 올바른 명칭은 영화 시상식이나, 법인 측에서 굳이 영화제라는 명칭을 고집한다. 덕분에 진짜 대종영화제는 대종영화축제라고 따로 부른다.(...)
- ↑ 1969년, 1970년, 1988년, 1998년 총 네번 개최를 안했기 때문이다.
- ↑ 백투더 2012년(...)
- ↑ 당시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영화를 독재정권의 3S정책의 도구라고 비판하였다.
- ↑ 여담으로 같은 권리가 그해 최고의 반공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도 돌아갔다. 반공영화가 미친듯이 찍혀나온 이유가 있다.
- ↑ 다만 투캅스의 경우는 해당 항목에도 있지만 표절 시비가 꽤 강하게 일었었다는 것은 고려하자.
- ↑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학업에 전념하려고 불참했다.
- ↑ 당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배우 류승룡은 "'광해로 상을 받았지만 '내 아내의 모든 것'으로 수상 소감을 말하겠다"라면서 연출가 민규동 감독을 비롯해서 함께 출연한 배우 임수정과 이선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원래 해당 작품으로 수상소감을 말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얼마나 미안하게 생각했으면 이런 관례를 깨고 수상소감을 말했을까?#
- ↑ 후보가 미발표되었다는것은 본선 진출작이 전부 후보인 셈이다.
- ↑ 일단 법원에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결론내렸다.
- ↑ 2011년에 대종상에게 모욕을 당한 천우희가 여우주연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