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김명자 |
출생 | 1940년 7월 15일 |
신체 | 160cm, 48kg |
가족 | 전 배우자 최무룡, 나훈아 슬하 2녀, 외손주 6명 |
데뷔 | 1957년 영화 '황혼열차' |
학력 |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
종교 | 불교 → 천주교(세례명 : 세실리아) |
1 상세
6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대한민국 여배우. 빼어난 미모와 문란한 남성편력 덕분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있으나, 본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고, 나는 나다"라며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고 한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친척언니가 운영하는 명동 백조다방이란 곳에 놀러갔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어 영화계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김기영 감독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김지미의 미모는 뛰어났었다. 집안이 유복했던 김지미는 외국 유학 준비 중이었고, 김 감독의 제의를 거절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영화계에 데뷔를 하게 된다.
데뷔 초기였던 1960년대에는 선배 최은희와 경쟁했으며, 1960년대 후반 부터는 후배 윤정희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1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어 <황혼열차>로 데뷔한 김지미는 199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450편의 작품을 남겼다.
1960년대 후반 최은희, 엄앵란, 문정숙, 최지희, 김혜정 등 기존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이 모두가 2진으로 물러났지만 유일하게 김지미만 살아남아 그들과 경쟁했다.
198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루면서 <길소뜸>과 <티켓>이라는 일생일대의 역작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과 함께한 작품 외의 영화들은 수준 이하의 범작들이었고, 이후 영화인협회 회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영화인들의 신구세대 다툼 속에 욕만 먹고 물러났다. 영화 수입도 했는데 마지막 황제가 바로 지미필름에서 수입해와 1988년 흥행 1위를 차지한 경우.
이후에 정권이 바뀌자 당시 젊은 세대의 영화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인터뷰를 하며 초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2011년 9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명계남·문성근을 직접 언급하며 "(당시 영화계 현안을) 영화인협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을 다른 단체를 만들어 데모만 해 영화계 물을 흐렸고, 구세대들을 다 물러가라고 했다"면서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라고 발언하고 문화일보에서 인터뷰로 문성근, 명계남을 지칭하며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 오로지 좋은 연기자가 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나는 50여년 배우 생활을 하며 이렇게 박수를 받지만, 그때 설쳤던 '아이'들은 생명이 끝났지 않았느냐"면서 "걔네들이 아직 활동하는가"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비난을 실컷 받았음은 물론 10년 넘게 잠적하던 건 왜 거론하지 않냐며 자뻑이라고 비웃음도 받았다. 게다가 친새누리당 발언을 하고 전여옥 전 새누리당 의원과 우호라든지 김지미야말로 내로남불로 정치색을 띄었기 때문이다.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인의 회고전을 하자 영화제 측에 도를 넘은 지나친 의전 요구를 하여 구설에 올랐다. 자신의 의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 회고전을 보이콧하겠다고 공갈협박했기 때문에 영화제 측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고. 김지미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위한 특급호텔 객실 30개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대형버스를 요구했다고 한다. 주최 측은 객실 15개와 전용버스를 대절해주는 선으로 마무리했지만 이 협상 와중에 피를 말리며 고생했다고 한다. 이래서인지 그 뒤로 어떤 영화제도 그녀를 초청하지 않게 되었고 영화계에서 이후 다시 묻혀진다.
홍콩의 액션 스타 왕우가 김지미에게 반해서 자신의 영어 이름을 지미(Jimmy)로 지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한때 김지미가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역시나 사실무근이었다.
1.1 홍성기 감독
1957년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한 김지미는 1958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12살 연상의 영화감독 홍성기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은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와 홍성기 감독의 외도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1.2 배우 최무룡
홍성기와 헤어진 김지미는 홍콩에 한중 합작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최무룡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1962년 당시 한국 최고의 남자배우 최무룡과 간통 혐의로 구속되고,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였다고(...) 흑역사 결국 최무룡의 이혼 위자료를 지불하는데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위자료 330만원+채무 70만원)을 지급한다. 그 시절 400만원은 지금의 환율로 계산하면 10억 이상의 금액이라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한다. 두 사람 사이의 혈육으로 딸 "밍크"가 있다.
딸 "밍크"(최영숙)는 훗날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손정호씨와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남자배우 최무룡은 후일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크게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고(...)
1.3 가수 나훈아
1976년 36살의 김지미는 7살 연하의 가수 나훈아를 만나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연예계에선 두번째로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었다.[1] 두 사람의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 했다.
2013년, MBN 예능 프로그램 "아궁이"에 출연한 연예기자 1호 정홍택 교수에 의하면 김지미는 "내가 나훈아를 만난 것은 잘못인 것 같다"는 후회를 했었다고 전한다.
김지미는 훗날 "내가 한 결혼은 3번 뿐이다"라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게 되는데... 원인은 자신의 딸로 인한 말 못할 아픔이라 카더라.
1.4 이종구 박사
1991년 심장 질환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4번째 결혼, 나훈아와의 만남에 힘들어 했던 그녀는 이종구 박사와의 만남에서는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변화를 원했지만,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되고 싶었던)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훗날 한다.
신성일의 회고에 의하면 신성일은 김지미와도 친했고, 이종구와도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종구가 김지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신성일은 "형님, 네 번째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구는 신성일의 말을 듣지 않고 김지미와 결혼을 하였고, 이로 인해 신성일과 김지미의 사이도 멀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4번의 결혼과 이혼 후,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 능력 있는 남자, 다 살아봤는데 남자는 별거 아니더라.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더라"고 밝히기도 하였다.
2 출연
- <별아 내가슴에>(1958)
- <청춘극장>(1959)
- <비극은 없다>(1959)
- <카츄샤>(1960)
- <장희빈>(1961)
- <홍도야 울지마라>(1965)
- <춘희>(1966)
- <마지막 황후 윤비>(1966)
- <빙점>(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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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1984): 실제 비구니들의 집단 항의와 원본 필름 소실로 영화가 엎어졌다. 사족으로, 김지미는 원래는 실제로 불교 신자였으나, 1982년에 천주교로 개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