藤堂高虎(とうどう たかとら) 등당고호
1556년 2월 16일 ~ 1630년 11월 9일
도도 가문의 담쟁이 문장.
목차
1 소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워낙 유명한지라 가려지는면이 좀 있지만 이 사람도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아시가루에서 3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축성의 달인(생애 20개의 성을 축성).
전국시대부터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 전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 겸 다이묘. 몇 번이고 주군을 바꾼 무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순신 무적 신화의 첫 번째 제물이며, 이순신에게 가장 많이 당한 희생양.
그가 섬긴 주군은 최초의 아자이 가문 계열(나가마사(15세), 아츠지 사다유키(17세)), → 오다 가문(오다의 가신 이소노 카즈마사(18세 80석 봉록), 카즈마사가 오다 노부즈미에게 가독을 승계. 무공을 쌓았으나 봉록을 올려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자 로닌) → 도요토미 가문(히데요시의 동생 8천 5백석의 히데나가(21세 300석 봉록에서 32살에 2만석), 히데야스, 히데요시(7만석)) → 도쿠가와 가문(이에야스(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32만석), 히데타다, 이에미츠)까지 10명에 달한다.
대세를 따라 주군을 수없이 바꾸어 섬긴[1][2] 이 그는 주군을 바꾸는 것이 일상적인 전국시대의 분위기에서 조차 매우 독특한 인물임에 분명하나, 다카토라 자신은 이에 대해서 부끄러움보다는 오히려 긍지를 가지고 있었던 듯한데, 이는 그가 남긴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주군을 7번 바꾸지 않는다면, 무사라고 말할 수 없다."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야말로 지조다."
한마디로 중국사의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가후, 풍도같은 인물. 하지만 이러한 사실로 인해 역사소설 등에서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훗날의 일이지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무렵 도도 다카토라의 후예들인 이세 번은 조정군과 막부군 최대의 전투인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가장 처음으로 막부군을 배반했다. 원래 에도 막부는 "전투가 일어나면 선봉은 히코네의 이이 가문[3]과 이세의 도도 가문"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때는 그런 것 없이 형세가 불리해지자 잽싸게 막부를 배반하고 조정군 쪽으로 돌아선 것. 이를 두고 막부 쪽 사람이든 유신지사든 누구를 막론하고 "제 조상 버릇 어디 가나"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다카토라에 대한 이미지는 당시부터 좋지 않았다는 소리. 그러나 최후의 양심은 있었는지 이에야스의 무덤인 닛코(日光)[4]의 동조궁(도죠구, 東照宮)을 공격하라는 명에는 "다카토라공이 곤겐님(이에야스)께 입은 은혜가 있다"며 끝까지 거부했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여러 주군을 섬긴 인물답게 여러 싸움에 참가하였다. 시즈가타케 전투, 사이카슈 정벌, 큐슈 시마즈 정벌, 임진왜란, 정유재란, 아이즈 우에스기 정벌, 세키가하라 전투 및 오사카 겨울, 여름 전투까지 굵직한 싸움에는 해외를 막론하고 참가하였다. 공도 많이 세워서 말년에는 다이묘로서 32만석의 영지를 가지기도 했다. 단, 미묘하게 대전운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오오타니 요시츠구[5], 오사카 겨울싸움 때에는 쵸소카베 모리치카, 모리 카츠나가 등과 붙어서 피해를 많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을 만나면서 바닥을 찍는 대진운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이순신 전용 샌드백.. 일단 옥포 해전에서 통제공에게 첫 승리를 내줬고 임진년 해전에서 연달아 계속 털렸다. 또한 명량 해전에서는 수군 총대장으로 참전했는데 그냥 털린게 아니라 화살을 맞는 부상까지 당하고 퇴각.[6] 단,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한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기도 했다. 이 경우엔 대전운이 매우 좋긴 했지만. 그럴수 밖에 없는게 조선 수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할때는 세계 해전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명장가 그의 적 이었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로 압승했을 때는 적장이 세계 해전사, 아니 모든 전쟁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한 멍청이가 상대였다.
최후로 섬긴 도쿠가와에게는 충성을 보이고 많은 공을 세워, 주위의 대다수가 그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에야스는 다카토라를 깊이 신뢰하였다. 소설 대망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이에야스가 히데타다와 대화를 하면서 경계할만한 다이묘를 논하는데 히데타다가 시마즈, 다테 등을 얘기할땐 "그럴 능력도, 상황도 안된다"며 웃어 넘겼지만 다카토라를 거론하자 정색을 하며 "이즈미노카미(和泉守)[7]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라며 즉시 동석시킬 정도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마사코가 입궁할 때는 할복까지 불사한다는 태도로 입궁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우수한 무장이면서도, 그보다는 지장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한 인물로 내정, 축성(유머를 섞어서 '축성 오타쿠'라고 불리기도 한다), 모략, 군사 등 모든 면에서 능력을 발휘했다. 문학이나 노가쿠, 다도 등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초상화에서 드러나듯이 동시대의 일본인 치고는 키가 매우 큰 거한이었다고 전한다. 알려져 있기로는, 6척 2촌(약 190cm).
말년에는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침실을 나설 때 오늘은 죽는 날이라고 마음 먹어라. 그런 각오가 있다면 어떠한 것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가훈 1조
철저한 실력주의자였으며, 충의 대신 실력만으로 인생을 살아갔던 다카토라 자신의 가치관을 말해주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말년에는 200조항의 가훈을 남겼다.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속여서는 안된다.'
오래 아들이 없어 니와 나가히데의 아들 타카요시를 양자로 들였으나, 친아들 타카츠구가 태어나면서 타다요시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아들이 태어난 뒤 타카토라는 타카요시를 거북하게 생각했으며 타카츠구도 타카요시를 기피했다고 한다.
NHK에서 다카토라를 주역으로 한 드라마를 제작하려고도 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출전했기 때문인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도도와 같이 임진왜란에 출전했던 쿠로다 칸베에와 구로다 나가마사도 드라마화되어 나오는걸로 봐선 아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볼순 없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는 임진왜란을 '명분이 없는 전쟁'이라고 깐다.) 게다가 명량 해전과 같은 전투도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 구로다 간베에는 사실상 자문 역할로 온거라 직접적인 전투가 없었고, 나가마사는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이나 연안성 전투처럼 패전한 전투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투들도 적지 않았다. 허나 도도는 위에 있다시피 최악의 굇수와 몇번을 싸운지라 직접적 묘사를 피할 수 없다. 사실 임진왜란에 출전했다는것 자체는 문제가 없는데 하필 역대 최악의 대진표를 받은것이 문제였다. 주인공이 깨지기만 하는 사극을 누가 보겠는가. 그것도 전력이 1/10이 채 안되는 적에게 깨지기까지 하니...
젊을 적 낭인으로 떠돌아다닐 때 어느 떡집에서 무전취식을 했는데 주인이 오히려 노자를 주면서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타카토라는 후에 다이묘가 된 뒤 그 집을 찾아가 떡값을 후하게 치렀다고 한다. 기인도 떡 세 개이기 때문에 대중매체나 동인설정에서는 떡을 좋아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이묘가 된 이후 도미를 대접받았는데 '출세를 하니 이런 진미도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에도 시대에만 해도 도미가 비교적 흔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이 일화에 격세지감을 느끼는 평이 있다.
2 대중매체에서
2.1 슈팅 게임 바사라 시리즈
바사라에서의 모습 | 바사라2에서의 모습 |
바사라에서의 전함 | 바사라2에서의 전함 |
나리를 치려고 생각했다라. 지나갈 수는 없다고. 원망마라.(바사라 1)
최소한 편안하게 보내주마. 원망마라.(바사라 2)
1탄에서의 성우는 나카타 조지.
지장이라는 것을 반영해서인지 안경을 쓰고 나온다. 대형 전함을 타고 나오며, 전함이 파괴되면 함교가 분리된다.(제2형태) 바사라2에도 등장했다.(2번째, 4번째 이미지는 2에서의 모습 및 타고 나오는 전함)
말버릇은 '원망마라(恨むなよ)'. 근데 말버릇이라고 보기에도 뭐한 게, 각 작품에서 1번씩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나올 때마다 저 대사를 치는 걸 보면... 말버릇 맞을지도 모른다.
2.2 지휘봉의 행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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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신장 183cm. 비주얼 연령 29세. 취미는 측량. 좋아하는 것은 떡. 들고있는 것은 자로, 축성의 명인이기 때문에 들려줬다고 한다. 옷을 잘 보면 성이 실루엣으로 그려져 있다.
닌자를 다루는데 능한 책사. 원래 도요토미 가에 있었지만 동군에 참전. 얼핏 보면 경박해 보이지만, 냉정침착하고 관찰력이 좋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
열혈인 이시다 미츠나리와는 생리적으로 안 맞아 싫어하는 듯. 반면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자신과 비슷하다고 여겨 마음에 든 모양. 모략으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도 원령으로라도 나타나 이야기나 나누자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요시츠구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무덤까지 만들어 매년 참배하는 듯.
자신이 부리던 쿠노이치인 하츠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미츠나리에게 완전히 패배하고 사람 마음은 계산대로 안 된다고 한탄했다.
적 캐릭터지만 지휘봉의 행방 캐릭터 중 상당히 인기가 높은 편. 공식 인기 투표에서 이시다 미츠나리, 요시츠구에 이어 남자 부분 3위를 했다. 캐릭터 디자인 자체도 '적이지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생각하고 했다고.
2차 창작에서 자주 엮이는 것은 의외로 자신을 두번 찬 하츠보다는 오오타니 요시츠구. 대단하다 대단하다 동인녀 놈들 가끔 이시다 미츠나리, 이이 나오마사와 엮기도 한다.
설정자료집에 의하면 하츠가 미츠나리에게 받은 비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츠에게 차였다
뜻하지 않게 주인공인 이시다 미츠나리를 부관참시했다(...) 하츠에게 연심을 품고 있어 미츠나리를 싫어한다는 설정이지만 그것보다 오오타니 요시츠구와 대립하고 나중에 무덤까지 만들어 준데다 매년 참배까지 한다는 떡밥 때문에 둘의 커플링이 흥했고, 그 결과 미츠나리는 지휘봉의 행방 팬덤에서 주인공인데도 묻혔다(...) 어찌 보면 훌륭하게 미츠나리에게 연심의 복수를 한...걸지도 모르겠다.
2.3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藤堂高虎.jpg |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
사이토 도산, 마츠나가 히사히데와 함께 시리즈 전통의 의리없는 인간. 능력치는 출중하지만 의리 수치 1이 걸린다. 천도에서는 모살 특기를 들고 나왔다.
2.4 전국무쌍 시리즈
도도 다카토라(전국무쌍) 항목 참조.
2.5 태합입지전
여기서도 올라운더의 능력치. 가장 낮은 무력도 70수준에 가장 높은 지모는 90을 찍는다. 기능은 내정 쪽이 극강에 전투에서도 유용한 정도. 여기선 의리 없는 이미지가 좀 덜하다. 물론 기본적인 성향이 의리없음에, 야심이 90이나 되긴 하지만 등장년도가 1570년인데 등장년도엔 아자이가에 자동사관이고 처음부터 등장상태인 시나리오는 1575년 패도의 장부터인데 이때는 노부나가의 직신. 1582년도 동일하며 1598년엔 아예 다이묘로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의리없고 야심가득한 장수들에 비해 반란, 배반하는 일을 보는게 힘들기 때문. 사족으로 다카토라수준의 의리 없고 야심 많은 장수면서 시작부터 성주, 국주인지라 툭하면 배반하는 장수로는 마쓰나가 히사히데, 다카하시 아키타네, 쓰가루 타메노부등이 있다.
2.6 불멸의 이순신
이후 광개토태왕의 개연수와 대왕의 꿈의 연개소문을 맡았던 최동준이 맡았다.
극중에서도 항상(...) 붙어다니는 일본수군 3인방 중 이순신에게 제일 많이 관광당한 장수. 다른 사극의 배역들과 달리 상대가 상대인지라 극중 활로가 참 안습하다(...) 어쨌든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만 보면 우라돌격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나 끝내주는 공기력을 자랑하는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와는 달리 그나마 이순신 비슷하게라도 생각은 하려는 장수다[8]. 옥포에서 처음 패배할 때 "이순신을 죽이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일본 수군은, 아니 태합의 군대는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라 말하는 등, 이순신의 진면목을 바로 파악한 지장으로 그려진다. 또 패전의 이유로 할복을 지시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내가 할복하면 그 다음은 누구냐고 되묻는다. 그리고선 이순신에게 진 자들이 다 할복해야 한다면 조선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모든 장수들에게 모조리 할복을 명하셔야 할겁니다!라고 일갈하며 전쟁을 그만하라고 충언하는 장면이 백미.
그리고 명량 해전에서 철수 직전 나동그라져서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다 어헣헣헣헣~!"도 꽤 볼만하다.
2.7 징비록
김종민이 아니다
대조영에서 연남건 역을,[9]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완 역을 맡은 안홍진이 맡았다. 불멸 때와는 달리 압도적인 화력에 함대를 모조리 잃고 목숨만 건져서 간신히 도망쳤다. 도망치기 직전 벙쪄있다가 하는 절규가 일품. 걱정 마, 앞으로 더 깨질 일 많으니까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도 놈이 손을 못 쓸 정도"라는 언급에 의하면 능력은 있는 듯. 그리고 47화에서 출진하는 장면이, 48화에서 간략히 언급된 칠천량 해전 직후 축하연에서 다시 한번 등장했다. 정작 군공 자체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다 가져갔지만지못미
2.8 명량
파일:/image/241/2014/07/17/htm 20140717163616530 99 20140717163902.jpg
영화 명량에도 당연하게 등장. 배우는 김명곤.명창지니[10] 고려를 멸망시키고 세워진 조선에 복수하기 위해 일본인으로 환생한 옥환[11]
작중에서는 일본 수군의 총사령관 역할이며, 조선을 정복할 야심에 들떠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특별히 선임해 보낸 선봉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패기에 꽤나 흡족해하며 바람앞의 등불과 같았던 신세의 이순신을 무찌르고 조선왕을 사로잡을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해전 장면에서는 별다른 활약 없이 차 한잔 즐기면서 느긋하게 이순신의 패망을 감상하고 있었으나 믿었던 선봉장 구루시마가 처참하게 개발살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도 무력하게 패퇴하는 꼴을 지켜보다가 좌절감을 맛보면서 쓸쓸히 퇴각. 실제 역사와 달리 부상입은 장면은 나오지않고 멀쩡히 철수하여 옥의 티로 남았다.
여담으로 이때 등당고호는 42세였는데 당시 53세였던 치트공보다 늙어보인다........
- ↑ 하지만 대세가 판가름 났을 때 주군의 뒤통수를 때린 적은 없었고 임관하고 있는 가문에 뭔가 일이 있을땐 한눈팔지 않고 성실히 일했다. 때문에 오히려 전주인으로부터 감사장이나 추천장을 받고 나올 정도였고 새 주군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실력좋은 신참이 들어오니깐 오랫동안 가문을 섬겨온 고참들의 견제와 디스가 좀 심한 편이었을 뿐...
- ↑ 그리고 아무리 실력주의에 주군을 수없이 바꾸는 것이 일상적인 전국시대라 하여도 위급한 때에 기존의 주군을 버린다던가 뒤통수를 때린다던가 하는 일은 암묵적인 금기로 여겨졌고 이런 일을 행한 뒤에는 십중팔구 매장당하거나 새 주군을 섬긴다 해도 찬밥 취급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도도가 신중했던 측면도 있다.
- ↑ 이에야스의 창업공신인 이이 나오마사의 후예들이다.
- ↑ 당시 시모츠케국.
- ↑ 나중에 요시츠구의 묘를 건립하여 주었다고 한다.
- ↑ 비교적 안전한 후방에 있었을 총대장인 도도가 화살을 맞을 지경이라면, 도도가 탄 배를 제대로 호위하지 못할 정도로 일본 함대의 전열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이 된다.
- ↑ 다카토라가 조정으로부터 받은 관직
- ↑ 전반적으로 신중한 성격이다. 임진왜란 발발 전에도 조선의 함선에 화포가 탑재되어 있다니 그에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하는 등, 우라돌격과는 한참 거리가 먼 타입.
- ↑ 졸지에 대왕의 꿈과 대조영에서 고구려의 연씨 부자(연개소문, 연남건)을 연기한 배우들이 도도를 연기한 꼴이 되었다.
고구려의 멸망을 못 막은 두 명이 하필 일본 장수로 환생!? - ↑ 알라딘에서 정말 지니의 성우를 맡으셨다!
- ↑ 대왕세종에서 고려부흥세력의 수장인 옥환을 맡기도 했다.
전생에선 고려부흥에 실패하여 자결하고, 환생 후에는 일본군 장수가 되었지만 조선군에 패해서 전생의 복수에 실패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