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6년부터 1848년까지 벌어진 미국과 멕시코간의 전쟁.
1 배경
1.1 루이지애나 구입
1803년, 갓 독립한 신생국가 미국은, 미시시피 강의 해운 이용을 위해 프랑스령 뉴올리언스를 매입코자 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했다. 이들 특사단은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다.
특사단 : 1000만 달러에 뉴올리언스 파세요? 나폴레옹 : 그럴바에 차라리 500만 달러 더 얹어서 루이지애나도 같이 사가시죠? 특사단 : 콜! |
나폴레옹 입장에선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북미 식민지를 관리할 틈이 없었던 데다가 아이티 반란 등으로 도저히 루이지애나 식민지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귀찮은데 그냥 미국에다 싸게 팔아버리자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특사단은 의회가 허락해준 권한을 넘어서는 이 통큰 제안을 받아들이고 귀국, 이후 미국에서는 갑론을박 끝에 루이지애나 매입을 허용했다. 이 루이지애나가 지금의 루이지애나 주 수준도 아니었고, 땅주인 프랑스도 대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잡히는, 전혀 관리가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알고 보니….
검은색 테두리 안의 땅이 당시 매입한 루이지애나다. |
미국 영토는 거의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미국, 땅부자되다
이후, 미국은 미친듯이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에게 그 크고 아름다운 루이지애나 대륙은 프랑스로부터 합법적으로 매입한 땅이었고, 자기들이 개척해야 할 영토였다. 물론, 그 땅에 잘 살고 있었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운명은(...)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서부개척은 불과 30여 년만에 한계치에 도달했다. 그리고 서부지역의 불분명한 경계선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이었다.
1.2 멕시코의 등장과 텍사스 문제
독립과 동시에 유카탄 반도 이북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의 영유권을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던 멕시코로서는 동부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1820년, 즉 멕시코가 독립하기 불과 1년 전에, 이 지역의 공식적 통치국가였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텍사스 일부 지역을 불하받은 미국인 이민자들이 텍사스에 들어와서 정착촌을 건설한 상태였던 것이다. 신생국가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민자들과 협상 끝에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불하권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멕시코의 정치불안을 틈을 타서 미국인 이민자들은 텍사스로 빠른 속도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결국, 필연적으로 조건 따위는 씹어먹은 미국인 이민자들과 멕시코계 주민들간의 충돌이 잦아지며, 미국과 멕시코 양국은 모두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은 텍사스를 구매하고자 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멕시코의 중앙정치 혼란은 가속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텍사스의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크게 강해졌다.
중앙정치의 혼란을 잠재운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무장한 미국인 이주민들은 무장해제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주민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산타 안나가 직접 지휘하는 멕시코군은 알라모[1][2]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진격했으나 산하신토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혀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고 풀려났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잡혀있던 사이 멕시코 정부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퇴위시킨 상태여서 산타 안나의 조약엔 효력이 없었다. 멕시코는, 그리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이 된 산타 안나는 이를 이용하여 텍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신생 텍사스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파와 연방합류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연방합류파가 승리하여 미국의 1개 주로 합류하기로 하고, 미국 역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커졌다. 한 마디로,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이 제멋대로 반란군들이 강점한 자국의 영토를 멋대로 먹튀를 한 셈이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이웃의 독립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라는 태도였다.
결국, 열받은 멕시코는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 오히려 군사행동은 미국이 먼저 개시했다. 미국은 텍사스 하나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팽창론자로서 공공연히 태평양 출구인 캘리포니아까지 확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1846년 4월 25일, 양군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미군 다수가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미군이 전쟁선포 떡밥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국경에서 집적대면서 충돌을 일부러 일으켰다(...).
2 전개
개전과 동시에 리오그란데의 국경에서 미군이 일제히 루비콘 강을 건너며 공세를 개시했다. 애당초 인구도 적고[3] 장비나 훈련 면에서도 뒤떨어지는 멕시코군이 미군의 전면공세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개전 초기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사실상 국경방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개전 초 미국의 공세는 캘리포니아에 초점을 맞추었다. 7월 7일, 미 해군 프리깃과 슬루프함이 몬테레이에 지상군 일부를 상륙시킨 것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캘리포니아의 미국 정착민들의 대반란까지 겹치며 이내 수세에 몰렸다. 미군을 요격하기 위한 멕시코군의 반격은 테일러 장군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내 로스앤젤레스가 포위되었다. 12월 16일에는 애리조나의 주도 투손이 함락되었으며, 1847년 초에 캘리포니아에서 애리조나, 뉴멕시코 전역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시되었다.
태평양 출구를 확보했음에도, 멕시코가 항복을 하지 않자 미국은 멕시코 본토로의 공세를 개시했다. 압도적인 해군 전력을 활용한 미군은 멕시코 영토 남단이며 수도 멕시코시티의 동쪽에 위치한 최대항구 베라크루스에 지상군을 기습적으로 상륙시켜, 제2전선을 형성하고 진격하기 시작했고, 주력부대도 이에 호응하여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1847년 9월 13일, 수도 멕시코 시티의 관문인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 수비부대는 약 2,600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며 참패, 마지막 방위부대가 붕괴된 반면, 미국의 공격부대는 불과 200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지체없이 수도 멕시코 시티로 침공했다. 결국 9월 15일, 멕시코 시티가 함락되고 멕시코군은 포로 포함 약 7,000명의 인명피해를 내면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사실상 이 전투로 전쟁의 승패가 확실하게 갈렸기 때문에, 미 해병대 찬가(Marines' Hymn)의 첫 구절 "'몬테수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To the shores of Tripoli)"'에서 나오는 '몬테수마의 궁전'이 바로 이 차풀테펙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선 6명의 멕시코 유년 사관생도들이 끝까지 저항하다가 전사했고 멕시코에선 "소년 영웅(Niños Héroes)"으로 현재에도 기념을 하고 있다.
이후에도 항전을 지속한 멕시코였으나, 미군이 계속해서 공격해오면서 각지에서 계속 참패,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점령지만 늘어나는 꼴이 되자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휴전을 제의했다. 안습
3 결과
1848년 2월, 양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냈다. 멕시코는 텍사스의 미 연방 합류를 인정했으며, 이 지역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으로 삼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멕시코는 미국에 막대한 영토를 헐값에 강매해야 했다. 1500만 달러의 대가로 넘겨준 지역은 지금 기준으로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 주의 남부 일부, 캔자스와 오클라호마주의 일부에 달했다.
물론, 이 협상을 멕시코가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면, 멕시코는 완전히 미국의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4] 미합중국 멕시코 주
멕시코가 미국에 양도한 영토 - 흰색 지역(...) |
승전국인 미국은 또 땅부자가 되었고, 패전국인 멕시코는 땅거지가 되었다(...). 이번에도 루이지애나급의 영토가 더 늘어난 것이다. 이밖에도 미국은 캘리포니아 반도 및 멕시코 북부 주 영토까지 노렸다. 참고로, 갈색 영토는 프랭클린 피어스 시기인 1853년 메시아 지역의 국경이 불명확하다는 개드립을 쳐대며 1,800만 달러를 주고 매입했으며, 이것을 개즈던 매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커다란 발전을 위한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미국의 멕시코 침공과 아일랜드 반란으로 내외적으로 곤란해하던 영국이 현재 미국의 서북부 지역(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를 양도하여 미국의 오늘날 영토가 90% 이상 완성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반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당장 영토만 따져봐도 전쟁 이전 영토의 약 55%를 날려먹었다. 게다가 강력한 중앙정부를 제창하던 대통령 산타 안나는 패전 책임으로 실각했고, 이후 멕시코는 강력한 중앙정부파가 아닌 연방형성파에 의해 주도된다.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강력한 중앙정부가 형성된 것과 비교하면…이후 멕시코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형성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을 맞이하게 된다.
이로서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친, 북아메리카 대부분을 차지하는 크고 아름다운 국가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미국은 양대양을 걸치게 되었다는 이점을 갖고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훗날의 일이긴 하지만, 멕시코에게 삥뜯어낸 어느 땅에선 황금이 쏟아졌고, 또 다른 땅에선 석유가 콸콸 흘러나왔으니 자원의 축복까지 받았다.[5] 물론, 멕시코로서는 배가 아파서 미칠 지경이겠지만(…) 그리고 50년뒤 자신들을 지배했던 엣 나라도 미국에게 개같이 털리게 된다. 역사는 반복한다.
한편으로는 남북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노예주와 자유주들이, 이 전쟁에서 얻은 새로운 주들을 "노예주로 하느냐? 자유주로 하느냐?"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빚기 시작한 것이다.
4 여담
에이브러햄 링컨은, 이미 수 세기에 걸쳐서 멕시코의 영토인 곳을 점령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했으며, 휘그당은 새로 편입된 주에서 노예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율리시스 그랜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 전쟁을 가리켜 남의 땅을 노리는 유럽 군주들의 전쟁과 같으며 미국이 약소국에 저지른 횡포라 비판하였고 남북전쟁은 이 전쟁으로 미국이 받은 천벌과 같다고 적었다.
미국 히스패닉계의 급격한 인구증가야말로 미국이 이 전쟁으로 받는 진정한 복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토는 미국 영토가 되었지만, 현지에 거주하던 멕시코 시민중 대부분이 그냥 살던 곳에서 살기로 해서 원래부터 인구가 많았던데다가 멕시코에서 넘어오는 밀입국자도 워낙 많아서(...)
월든의 작가 헨리 소로는 이런 부도덕한 전쟁을 하는 나라에다 세금을 못 낸다고 버티다가 감옥에 갔고, 이후 친척이 세금을 대납하여 풀려났지만 이 전쟁에 대한 역겨움의 표시로 시민 불복종이라는 책을 썼다. 자세한 것은 시민 불복종 운동 항목을 참고하자.
ABBA의 노래 Fernando가 이 전쟁을 멕시코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먼 훗날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을 하는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독일이 미국이 참전할 경우를 대비해 멕시코에게 잃어버린 영토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자신들과 함께 싸워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 미국사의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 유명한 데이비 크로켓을 포함한 개척민들로 구성된 186명의 민병대가 성당을 개조해 만든 알라모 요새에서 10배 이상이나 많은 3천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며칠동안 분전하다 모두 전멸했다. 미국에서는 관련 영화도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투. 덕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클라이맥스 전투에서도 밀러 대위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최후 방어 거점을 '알라모 요새' 라고 부른다.
- ↑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는 알라모(1960년, 2004년 작)와 데이빗 크로켓이 있다.
- ↑ 멕시코는 890만, 미국은 2320만
- ↑ 실제로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멕시코 전체를 미국에 병합하자는 주장을 했다.
- ↑ 사실 멕시코도 미국급은 아니라서 그렇지만...석유는 많이 나오기는 나와서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에는 석유로 노다지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처절하게 망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