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애나 구입

미국의 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지역/시대별독립 이전
~1776
영토 확장
1776~1861
남북전쟁~하와이 병합
1861~1897
현대
1897~
동부제임스타운13개 식민지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
플리머스 식민지
뉴 암스테르담버몬트 공화국
중부누벨프랑스루이지애나 준주아메리카 연합국
서부
남부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텍사스 공화국
캘리포니아 공화국
본토 외부러시아령 아메리카알래스카 준주
하와이 왕국하와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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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에서 프랑스의 삼색기가 내려가고 미국의 성조기가 게양되고 있다.

1803년의 여름, 토머스 제퍼슨은 펜을 한 번 휘리릭 놀려서 미국 영토를 두 배로 늘려버렸다. 루이지애나 전체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다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일은 축제 분위기를 가져왔으며, 미국 여론과 언론은 한 목소리로 칭송을 했다. 이로써 제퍼슨은 멕시코만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미시시피 강 루트를 보호할 뿐 아니라, 영토범위를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뻗는다는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리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손을 뻗치려는 팽창욕을 크게 억제할 수 있었다.

- 닉 래곤, 대통령의 결단

1 개요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803년, 뉴올리언스(누벨 오를레앙, Nouvelle-Orléans) 시의 통상권을 요구하러 간 미국 대사에게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 루이지애나(루이지앙, Louisiane) 전체를 통 크게 단돈 1500만 미국 달러(7500만 프랑)에 팔아넘긴 사건이다.[1]

이 거래는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거래이자 역사상 가장 평화적이고 즉흥적으로 진행된 최대의 영토 거래로 불린다. 1km2당 겨우 단돈 7달러의 가격이었다![2] 이 구매로 인해 얻은 영토로 미국의 영토는 2배로 불어났고(즉, 루이지애나 = 구입 전 미국 영토), 현재의 미국 영토의 4분의 1 가량을 차지한다. 따라서 미국 역사에서 "서부개척시대"의 시작을 알린 가장 중대한 영토 변동이었다.

참고로 '루이지애나 구매'이지만 현재의 미국 남부의 한 로 있는 그 루이지애나가 아니다. 물론, 그 지역이 핵심이었고[3], 미국이 원래 사려고 했던 통상권 지역이긴 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후술한다.

2 배경

이런 큰 영토를 한 번에 팔아넘기는 건 순조로운 과정은 아닌 게 일반적인데, 그렇지 않은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루이지애나는 본래 절대왕정 식민지 개척 시대에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으로 차지한 땅 중에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루이 14세의 식민지라 루이의 땅이라고 루이지앵이라고 붙인 것을 거래 후 미국식으로 바꾼 것. 거의 영국의 동부 해안을 제외하고는 모든 북미를 차지하고 있던[4] 프랑스의 루이지애나는 당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인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의 이명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에 뉴올리언스가 있는 오를레앙(올리언스)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763년 7년 전쟁[5]의 결과로 북미, 인도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화조약에 따라 현재의 캐나다 퀘벡 북쪽과 미시시피 강 동부의 영토는 영국에게, 미시시피 강 서부의 영토는 스페인에게 모두 할양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 1800년 나폴레옹이 호구가 된 스페인과의 조약을 통해 미시시피 서부의 옛 루이지애나 영토를 빼앗았다. 미국은 스페인에 이어서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갓 독립한 미합중국 옆에 자국 영토와 비슷한 크기의 프랑스 식민지가 등장한 건 신생국인 미국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당장 미시시피 강에서 흙파고 살던 농민[6]들이 물 등을 위해 루이지애나의 뉴올리언스 근교를 지나며 통행세를 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 정도면 좀 괜찮은데, 남부의 농업 교역에 미시시피 강 수운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이 더 치명적이었다.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프랑스령 식민지가 미시시피강 하류를 정확히 차지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만약 프랑스가 미시시피 강을 봉쇄했다간 남부가 의존하는 수운은 끝장이었다. 이런 미시시피 강에 대한 의존은 남북전쟁 때도 여전해서 북부 연방이 미시시피강 하류를 봉쇄하자 남부동맹의 해외 무역의 90% 이상이 막혔다.

그래서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여기의 교역권이나 협상하자고 사람을 보냈는데…[7] 정작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덜컥 그냥 "차라리 1500만달러(7300만 프랑)으로 땅 전체를 다 사는게 어떰?"는 식으로 나선 것이다

땅 크기만 보면 나폴레옹이 정신줄을 놓았나 싶지만, 나폴레옹에겐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폴레옹으로서는 북미 영국 식민지로부터의 침략 위협도 많고,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이티에서 혁명도 터지고 하는 판이었다. 당장 영국 해군의 함대 때문에 프랑스군을 아이티 등 카리브 식민지에 파견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큰 잠재력을 가진 땅이라지만 무역항인 뉴올리언스 정도를 제외하면 당장 나오는 이익도 별로 없는 마당에 유지비는 크게 드는 등 제대로 손쓸 수 없는 상황. 당시 뉴올리언스를 비롯한 미시시피강 하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탐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 지역에 대한 정보는 미국이 구입한 뒤인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의 탐사 뒤에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대로 군사적 효용은 컸지만 정작 당사국인 미국은 프랑스와는 우호적인 관계라서 당장은 큰 효용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즉 처음에는 새롭게 돌려받은 영토로 프랑스의 확장을 꿈꿨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자 3년 만에 접은 것. 토마스 재퍼슨은 제꺼덕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체로 점점 퍼져나가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나폴레옹의 몇 수 앞을 내다본 전략적 판단이었던 셈이다. 후세에 역사책을 보고 단순히 땅 크기의 문제로 생각하면 나폴레옹이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해가 잘 안되긴 하지만(...) 또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이 계속 소유했어도 패전 이후 다시 영국, 미국 등에 할양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뜻밖의 횡재로 100년 동안 현 본토의 1/4에 해당하는 영토를 헐값에 샀다. 미국 : 자 큰거 하나 맛있게 먹었으니, 또 뭘 먹을까? 아하 이제 에스파냐에 독립한 멕시코가 남았구나

야사로 나폴레옹이 이 매각 서류에 서명하면서 "이 것으로 미국은 영국에겐 해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가 될 것이며, 결국 영국은 머지않아 그 오만한 머리를 미국에 숙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3 비슷한 사례

위의 플로리다 구입과 오리건 구입도 유명한 사례지만, 루이지애나에 맞먹게 유명한 미국의 영토 구입은 제정 러시아알래스카 매각이다. 이 거래도 역시 미국이 횡재를 한 케이스다. 당시 국무장관 슈워드는 "720만 달러(오늘날 16.7억 달러 상당)짜리 비싼 냉장고를 샀다."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그 냉장고에서 석유도 나오고 자원도 나오고, 안보도 나아지고(...) 사실 정치인들은 찬성한 케이스였다.

제2차 영란전쟁(1665~1667)에서 아직 미국이 영국식민지였을 때 네덜란드는 승전의 댓가로 "뉴암스테르담"이라는 작은 식민지와 인도네시아의 영국 식민지를 교환했다. 당시는 뉴암스테르담의 가치가 훨씬 떨어졌다. 왜냐하면 당시 뉴암스테르담은 아메리카의 식민지 거점 도시 중 하나인 곳에 불과했던 반면, 뉴암스테르담과 교환한 인도네시아 식민지는 당시 유럽에서 엄청난 가격으로 팔리는 육두구 의 주요 산지였다. 그러나 그 뉴암스테르담이 바로 나중에 그 유명한 뉴욕이 되었다(...). 이 역시 현재의 시각(당대에는 미래의 시각)으로만 당대의 영토 거래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더구나 비연속국에 지키기도 힘든 루이지애나와 뉴암스테르담이 안보적으로 보장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말이다.

4 후일담

오늘날의 루이지애나 주, 즉 뉴 올리언스 지역은 1804년 10월 "루이지애나 준주(territory)"에서 분리되어 한동안 올리언스(오를레앙) 구역으로 불리다가, 1812년 4월 정식 주인 루이지애나로 가입했다. 두 달간 "루이지애나 주"와 "루이지애나 준주"는 이름이 공존하다가. 6월 이름이 미주리 준주로 변경되었다.

제퍼슨 후임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 때 벌어진 미영전쟁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투인 뉴올리언스 전투가 벌어지면서 대 전장이 되었다. 1815년 1월 6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미국은 크게 승리하며 평화 협상 중이던 미영간의 전쟁 승패에 쐐기를 박았고[8], 앤드루 잭슨 장군은 전쟁 영웅이 되어 9년 뒤 대통령에 당선 되어 재선한다. 1818년 10월, 영국과 미국은 북위 49선을 기점으로 국경을 정하기로 하면서 루이지애나는 영국령 "루퍼트 랜드"의 일부를 편입하고 대신 북위 49도선 이북 지역을 넘겨준다. # 또한 1819년, 미주리 준주의 북위 36도 30분 이남이 "아칸소 준주"로 독립했다.

1819년에 맺어져 1821년 3월 적용 된 애덤스 오니스 조약 역시 일시적으로나마 중요한 조약이다. 애매했던 루이지애나의 서쪽 경계(즉, 미국의 서쪽 끝이자 스페인과 만나는 국경)를 둔 문제였다. 미국은 서부 경계를 로키 산맥 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스페인은 미시시피 강이 닿는 곳이 다라고 보았던 것. 또 스페인이 오레건 지방으로 북상하는 것도 미국 입장에선 좀 불편했다. 태평양을 놓칠 수 없다! 반면 스페인은 독립 전쟁이 빗발치고 영국의 견제가 심하자 더이상 북미 식민지를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는데, 플로리다도 반쯤 미국인들이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결국 협상을 하려던 점에서 양국의 의견이 일치했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영토를 늘리려는 미국이 스페인의 요구를 들어 많이 양보를 했다. 일보전진을 위한 2보 후퇴 새바인 강(Sabine river), 경도 서위 100도, 미시시피 강의 상류 지류인 아칸소 강 등을 미국의 루이지애나와 스페인의 식민지 "누에보 에스파냐(뉴 스페인)"의 경계로 하는 대신 스페인의 북상을 위도 42도선으로 제한한 것. 결과적으로 루이지애나 영토는 일부 스페인에 양도되고, 대신 미국이 거진 반 영토가 된 플로리다(1845년)를 사들이기로 했다. # 결과 그런데 그 직후인 1821년 9월 멕시코가 독립하면서 스페인으로서는 별로 이득 본 게 없게 되었다(...)

루이지애나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주로 승격된 주는 1821년의 미주리. 노예주였는데, 이를 문제로 위도 북위 36도 30분(미주리의 남부 주계)을 기준으로 남부는 노예주, 북부는 자유주로 하는 미주리 협정이 그 전 해인 1820년 맺어졌다. 이로서 루이지애나 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주리 준주"로 불렸던 이 지역은 이름이 없어졌다. 북서부 일부가 1834년 미시간 준주의 일부가 되었다가 미시간이 1837년 승격되고 그해 3월 위스콘신을 거쳐 다시 아이오와 준주가 되었다. 아칸소 역시 노예주로 1836년 승격하면서 아칸소 준주 역시 폐지되었다.

한편 루이지애나 이서에 텍사스가 자립을 시도했으나 멕시코에 재정복 당하면서 루이지애나 지역과 그 이서 지역은 이 정치적 변동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미국의 주요 관심사가 된다. 멕시코는 스페인과 달리 국경을 열었고(...) 결국 텍사스에 미국 출신 이주자가 넘쳐나면서 1835년 봉기로 루이지애나 이서에 바로 텍사스 공화국이 들어선 것. 텍사스 공화국은 서부 국경을 리오그란데강이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1844~1846)이 벌어지고 말았고, 결과는 당연히 미국의 대승. 결국 스페인이 따내서 멕시코에게 넘겨준 루이지애나의 일부는 고스란히 거대한 텍사스 주의 영토로 들어가버린다. 1850년 다시 대폭 재조정 되어서 지금 크기의 텍사스가 되지만.[9]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미시시피강 서부로 유배보낸 눈물의 길 역시 루이지애나 구입의 산물이다. 그러면서 1824년부터 "인디언 준주(인디언 구역, Indian territory)"이 설정되었다. 1854년 약간의 구역 변경(축소)은 있었지만 이 곳이 오늘날의 오클라호마.[10] 그 이북에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가 생성 된 것도 같은 해인 1854년인데, 결국 이들이 주로 가입하면서 남북전쟁의 큰 떡밥이 되고 말았다. 제임스 뷰캐넌 참조.[11]

그렇게 미주리, 아칸소, 텍사스 이래 아이오와(1846년), 미네소타(이전에 준주, 1858년), 캔자스(1861년), 네브래스카(1867), 콜로라도(1876),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몬태나(1889)가 주로 편입되면서 흡수 86년만에 사실상 구 루이지애나의 모든 지역이 미국의 주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대망의 오클라호마 주 가입.

2003년은 루이지애나 구입 200주년이었지만 하필이면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이라크전 반대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방미하지 않았다. 그리고 2년 뒤인 2005년,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에 몰아닥쳤다(...)

5 여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013년 재퍼슨이 영국과 동맹하겠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서 팔았다는 이야기를 방영했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멀 가능성이 높다.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개척을 중단한 것에는 당시 열대 숲모기전염시키던 전염병 황열병도 있었다. 이걸 가지고 황열병이 없었다면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를 팔지 않았을 것이고, 패전 후 엘바 섬에서 탈출해서 팔지 않은 루이지애나, 즉 "누벨 프랑스"로 가서 미국과 전쟁을 벌였을 지도 모른다(...) 이것이 대체역사만약에의 한 가정 에피소드. 근데 제퍼슨은 불빠잖아요
  1. 2012년 미화로 환산해보면 230~240억 달러(25조) 상당이다. 지금 어떤 나라가 와서 저기에 포함된 땅 전체도 아니고 거기서 가장 작은 주의 땅을 300억 달러로 전부다 사겠다고 하면 어떨까? 모두가 코웃음을 칠 것이다. 3조달러가 아니고 300억 달러? 그러니 심각하게 싸다.
  2. 정확히는 6000만 프랑을 내고 1500만 프랑은 미국이 프랑스 채무를 변제를 해줬다.
  3. 뉴올리언스는 지금도 루이지애나의 최대 도시이다. 당시 큰 루이지애나의 중심지는 당시부터 해안가의 미시시피 강 하류 항구 도시인 뉴 올리언스였다.
  4. 물론 이게 깃발만 꽂고 점점점으로 개척촌을 세운 수준이긴 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과 공존했다.
  5. 북미 전역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6. 특히 신생주인 켄터키테네시. 그 이남의 하류지방은 아직 주가 없었다.
  7. 근데 이 부분부터가 제대로 따지면 전쟁으로 갈 시비의 여지가 큰 부분이라, 살짝 협박성에 가깝다. 그쪽 항구 지역 통행세 내는게 거슬렸던 미국에서 일단 통행 허가를 요구했던 것. 눈치 빠른 나폴레옹은 가뜩이나 루이지애나 주변 영국식민지 때문에 거슬렸던 프랑스가(나폴레옹이 통치하는 동안 가장 싫어하고 거슬려했던 나라가 영국이다 대륙봉쇄령을 왜 내렸는가) 가장 많이 지원했던 독립전쟁으로 사이가 매우 좋았던 미국과 사이가 틀어질까봐 두려워졌다고 분석된다. 그냥 통행권 주면 호구 되고 안 주면 싸움 날거 같으니 땅을 파는 척하면서 다 주자
  8. 조약에 변경은 없었다.
  9. 그것이 지금의 콜로라도와 뉴멕시코 등이다.
  10. 참고로 오클라호마는 이 자치주 문제로 가장 늦게 가입한 주 가운데 하나이다.
  11. 남북전쟁 기간에는 네브래스카의 가입이 보류되면서 준주 지역이 네브래스카, 콜로라도, 다코타(1861.3), 몬태나(1864.8) 등으로 구분되면서 사실상 주가 들어설 텃밭이 닦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