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역사

< 미국
미국의 역사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지역/시대별독립 이전
~1776
영토 확장
1776~1861
남북전쟁~하와이 병합
1861~1897
현대
1897~
동부제임스타운13개 식민지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아메리카 합중국
플리머스 식민지
뉴 암스테르담버몬트 공화국
중부누벨프랑스루이지애나 준주아메리카 연합국
서부
남부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텍사스 공화국
캘리포니아 공화국
본토 외부러시아령 아메리카알래스카 준주
하와이 왕국하와이 공화국

1 개요

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독립까지의 역사

콜럼버스가 오기전에는 베링 해협을 통해서 북 아시아에서 건너온 원주민들이 살았으며,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이들은 종족별로 생활방식이 달랐다. 서기 9세기 들어서 미시시피 강을 중심으로 해서 소규모 도시 국가들이 형성되었고, 외부와의 교역하거나 장대한 건축물을 만들고 인구 수만 규모의 도시도 지니고 있는 등 상당히 발전된 모습을 보이지만 남미의 잉카나 중미의 아즈텍처럼 거대국가가 나타난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야 문명처럼 발전된 형태의 문자와 천문학, 건축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미국내에서도 존재감이 희박하다. 이들 원주민들은 대부분 남부에 상륙한 콘키스타도르들에 의해 쫓겨나기 시작했고 영국인들이 들어온 동부는 처음엔 공존을 꾀하다 나중에는 영국도 스페인처럼 다 죽이거나 쫓아낸다. 이것은 미군과의 인디언 전쟁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동해안에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결국 자체 소멸(…)했고[1] 1607년 영국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건설한 식민지가 현 미국의 모태가 된다. 그 이후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 청교도[2]들이 건설한 식민지[3]는 변두리에 지나지 않았다.[4]

여기서 여담을 붙이자면, 티스콴툼이 죽고 정착민들이 자력 생존이 가능해진 이후에 왐파노와그 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한 것에서 짐작하겠지만, 필그림들은 원주민들을 사탄의 종자라고 불렀다[5]. 결국 필립왕 전쟁 때, 정착민들은 왐파노와그 족들을 공격해서 양 측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왕파노와그 족은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 평화협정이 맺어진지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절멸했다. 이 시기를 다룬 글 링크.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영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유렵에 갖다 박아도 모자란 군대로 전쟁까지 치뤄줬는데 세금을 한푼도 안 내려고 하는 식민지가 어이없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아무리 개겨봤자 영국 입장에서는 태평양전쟁때 미국한테 주제모르고 시비 깐 일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식민지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의무(세금)을 지우면 권리도 주시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6]. 하지만 영국 본토는 그런 의견 따위는 상콤하게 무시해 주시고[7] 인지세를 걷고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정도로 유지하려 드는등 삽질을 거듭했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면서[8]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775~1783). 이에 영국은 식민지 독립을 막기 위한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에 맞서서 독립 분자(Patriot)들은(아직도 미국인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의 세력 탓에 한동안 영국에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갔으나, 결국은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은 미국인들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비를 사용해 훗날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 역시 문제는 돈. 독립 전쟁 직전에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있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물론 실상은 보스턴 차 사건 항목에도 있지만, 영국 상인에 의해서 인도와 중국에서 건너와야 하는 차 보다 미국의 앞마당 멀티 중남미에서 생산된 커피를 미국 상인들이 직접 들여오는 쪽이 훨씬 저렴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여담으로,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있는이유가 바로 이 시대에 연방에 가입한 주가 13개 였기 때문.[9]

3 독립 후 시작된 영토 확장


미친듯한 영토 확장

그 후 미국은 1803년 212만㎢에 이르는 루이지애나[10]를 프랑스로부터 거의 무료로 구입하였다. 현실은 구입이 아니라 공갈 그것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군출신 황제 나폴레옹을 협박해서.. 나폴레옹 너 유럽에서 전쟁한다며? 아메리카에서도 전쟁할래 아니면 그냥 땅 다 내놓을래? 그후 '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이란 사상 아래 18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11]으로 멕시코 북부를 싸그리 뜯어갔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와의 협상으로 알래스카를, 1898년에는 하와이 공화국 합병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100년에 걸쳐 영토를 서쪽으로 마구 넓히게 된다. 여담으로 이 때 금을 찾아다닌 것을 골드 러시라 한다.

이런 영토 확장을 미국인들이 '프런티어 개척 정신'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상 파고보면 유럽의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 19세기 내내 미국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문제 불간섭(먼로 독트린)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식민지화 대신 통상 위주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부개척'이 완료되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더이상 확보할 땅이 없게 되자 곧 180도 태도를 바꾸어 태평양 너머의 하와이를,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1898년 필리핀푸에르토 리코를 접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명시한 중재 조항을 엿바꿔 먹으며 한국일본에 넘기는 데 일조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이주민과 소위 '인디언'으로 불리던 북미 원주민들 간의 전쟁이 계속된 끝에 원주민들은 거의 멸망하고, 살아남은 일부 후손들은 보호구역(Reservation Area)에 갇혀 사는 꼴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나라나 어두운 역사가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런 사태는 현재 미국인들 중에도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꽤 있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이 좀더 이들을 존중하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으로 대체된 것도 그러한 맥락 가운데 하나. 그러나 아직도 인디언이라는 호칭은 매우 많이 쓰인다. 대표적으로 대놓고 인디언이라고 한 야구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레드스킨즈'. 팀이름을 바꾸라는 여론이 아직도 거세다. 어디까지나 찻잔 속의 태풍이지만.

지금도 원주민 보호구역은 유지되고 있고, 미 정부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세금도 걷어가지 않으며 지역에 따라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불만 해소 차원에서 식량과 술, 카지노를 마음껏 지원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알콜, 약물 중독 문제, 높은 빈곤 수준, 낮은 교육 수준, 미국 사회와 교류가 거의 없는 고립성 등등 원주민의 삶의 형편은 대체로 암울하다. 황량한 벌판에 카지노를 세워서 부유하게 된 몇몇 개인이 존재하는 정도? 또한 원주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거권이 없다.

미국 정부는 주 여럿이 힘을 합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연방주의(federalism)을 기초로 한다. 식민지들로부터 계승된 첫 13주를 시작으로 차츰 북아메리카의 영토가 다양한 형식으로 주로 변형되 흡수한다. 텍사스의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 지역 주민들이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써 독립을 한 뒤 자발적으로 미합중국의 일원이 된다. 물론 그 과정에는 미국의 농간이 있었다.

4 남북전쟁

미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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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연합국

한편으론,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에서는 이런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힘싸움이 항상 있어왔다. 건국 초기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를 주축으로 강한 연방정부로 조금 더 유럽적인 국가체재를 갖추려고 했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견제로 지방자치는 그 형태를 유지한다. 각 주들은 연방정부에 동등한 권한을 요구하고 심지어 "여차하면 탈퇴해서 다른 나라에 붙는다?"는 위협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참혹한 전쟁을 겪은 그 다음이었다.

노예제에 대한 갈등을 표면적 이유로 한 경제정책 갈등은 결국 남부가 CSA(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남부 연합)로 독립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쟁(1861.4~1864.4)이 터지고 만다. 초기에는 로버트 E. 리가 지휘하는 남군이 여러가지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리를 거둬 독립을 쟁취할 것처럼 보였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매클래런 등이 앤티덤 전투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진하는 남부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승리는 북부에게로 돌아갔다.

5 아메리카 대륙을 넘어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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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공화당그로버 클리블랜드민주당 8년을(그나마도 연이어진게 아니었다) 제외하고 44년을 해먹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토는 해가 갈수록 팽창되었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였던 탓에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해 아일랜드나 다른 유럽 국가 등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이니 인구도 날로 증가했다. 그 세력이 나날이 강대해졌다. 내연기관을 바탕으로 한 제2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도, 토머스 에디슨 등의 발명가가 활약한 곳도 모두 미국이었다. 이렇게 꾸준한 발달로 19세기 즈음에는 고립주의 성향으로 정치적 영향력만 없다 뿐이지 경제적으로는 이미 유럽 전체는 쌈싸먹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당시의 사회상은 마크 트웨인의 풍자소설 '도금 시대' 등에도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이 즈음부터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테슬라 등 지금도 잘 알려진 기술발전의 상징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럽은 이렇게 성장한 미국을 의식하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고[12] 자기들끼리의 싸움에만 열중하다가 2차대전 이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가 극한으로 치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거대 기업집단(트러스트)의 등장으로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헨리 포드, 존 피어포트 모건 등의 유명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들을 세우고 했던 것을 보면 그 국력의 레벨이 가늠이 잘 안 된다.

다만 이 시기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꽤나 악명이 높아서[13] "사회주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발현할 것이다"라고 많은 이들이 예견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국민정서나 기존 정당들의 간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보면 그렇게 나쁜 근무 환경도 아니였고 때에 맞는 적절한 개선이 있어줬기 때문이다.

실존했거나 현존하는 식민제국 목록
러시아영국덴마크네덜란드미국벨기에스웨덴쿠를란트-젬갈렌독일베네치아
스페인오만오스만이탈리아일본포르투갈프랑스오스트리아-헝가리청나라제노바

동시에 식민지였던 주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 하는 꼴을 보더니 위기감을 느끼고 제국주의를 발동하여 갓 독립한 필리핀을 대통령이 받은 '신의 계시'로 식민지화 하고, 하와이를 합병해 버리고, 청나라[14]일본을 영국과 같이 군함을 몰고 가 개국시켜버린다. 신미양요도 남북전쟁 직후에 일어났다는 걸 상기하자.[15]

필리핀을 합병하게 된 계기인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팽창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으며,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대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이루어진 원인은 미국의 빠른 해군력 증강과 이때부터 쇼미더머니 영국의 대서양 철수에 있다. 영국은 신생 독일 제국을 강하게 의식해서, 노골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빌헬름 2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서양 해군 전력들을 독일을 포위하려고 차출해 버렸다. 영국이 대서양 해군을 유럽으로 철수시키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사실상 미국의 안마당이 되었다.

한 편, 미국 밖에서 무슨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고립주의 노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너지게 된다.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조지 워싱턴이 유럽에서의 전쟁에는 휘말리지 말라고 하던 유언도 어기고 끌려나온다.[16] 허나 마음에도 없던 감투라고 윌슨 대통령이 고생해서 차린 UN의 전신격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참가를 의회에서 부결해버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버로우 탄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로부터 촉발된 공화당의 분열로 잠시 8년간 정권을 잡았던 민주당은 1920년 대선에서 공화당 워런 거메일리얼 하딩이 승리하면서 우드로 윌슨의 민주당 8년 정권이 끝나고 대공황까지 12년간 공화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 때가 미국의 제1차 황금기인 이른바 '아메리카니즘' 시대이다. 이를 증명하듯, 미국의 경제규모는1920년대에 대영제국을 추월해서 1차대전 이후부터 미국으로 옮겨져 가던 세계의 중심이 완전히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쓰고 세계의 중심을 영국으로부터 뺐어왔다고 읽는다.[17] 이 시기에 금주법이 실행되어, 불법 주점 등으로 갱단과 마피아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해주는 등 삽질을 하던 적이 있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비약한 생산력을 내수에 쏟아부으며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들 중산층의 삶을 윤택하게 한 것은 이른바 '할부 판매'로 당시로서는 고가의 도구였던 세탁기[18], 라디오[19], 자동차를 쉽게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좋았던 시절도 얼마 가지 못 했으니...

6 세계 대공황잃어버린 4년, 그리고 뉴딜 정책

미국 내에서의 소비의 한계[20]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결국 1929년 세계 대공황을 맞게 된다. 항목 참조.

이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빠르게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고 흔히 여겨진다. 하지만 이건 대중적의 일반적인 인식이고, 최근에는 그 효과가 과연 있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여러 가지 이론이 대두되고 있다.[21] 여튼 1930년대 초반은 미국 역사에서 드물게 고통스러운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현재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사회 보장 제도'가 도입되었다(1933년). 농민들의 경우는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 중서부를 휩쓴 몇 년간의 가뭄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평원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의 황무지를 특별히 황진지대(Dust bowl)라고 부른다) 수많은 농민이 빈민이 되어 그나마 날씨 좋은 서부 해안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22] 이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소설로 분노의 포도가 유명하다. 한편 1930년대 후반을 거치며 가뭄도 잦아들고 경제는 상당히 회복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치솟자 미국 경제에는 다시 호경기가 찾아오게 된다. 현대사에서 전쟁이란 얼마나 화끈하게 국력을 소비해버리고도 버티느냐를 의미한다.

물론, 이때 호경기가 왔다는 게 꼭 전쟁 덕분이였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전쟁은 시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많은 비극을 낳는다. 실제로 전쟁때문에 통계상의 경제 수치가 좋아지긴 했어도, 그게 실제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이였던 것은 아니였다.[23] 병사 징집으로 인해 실업률이 하락하고, 전쟁을 위한 정부지출의 증가로 GDP가 증가한 것을 갖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호황'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이코패스일 것이다.[24] 따라서 2차대전이 대공황을 끝냈다고 말한다면 이는 경제학자들이 암걸릴 소릴 하는 셈이 된다. 전쟁을 위해 공장에서 무기들을 마구 찍어내는 것은 그 자원을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자동차를 찍어내는 등) 이용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라는 것을 명심하자.

그리고 외교적으로 미국은 다시 한 번 고립주의와 간섭주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유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면 결국 미국에도 악영향이 온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영국을 돕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 줬으나 자본가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미 의회의 강력한 견제로 이 때만 해도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태평양 너머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 대열에 합류한 일본제국주의 야망과 이로 인한 무분별한 영토 확장을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이에 열받은 미국은 석유 수출을 끊어버리겠다고 일본을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미국을 한번 세게 치면 이걸 내가 어찌 이겨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뜬 구름 잡는 마음진주만 공습을 실행하여 미국 상대로 전쟁을 걸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최대의 성공작이자, 이후 패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크게 격분했으며, 그 분노가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것임을 일본은 끝끝내 몰랐다.

7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파일:Attachment/U.S.A.jpg

그리고 일본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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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글자 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25]

-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미국이 엄청나게 분노한건 당연한 현상이다. 해군 기지가 하나 제대로 얻어터지고,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당했으니[26] 당연하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과 국민들은 대대적으로 전시체제에 들어가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으며, 쇼미더머니를 쳐갈기며 더 많은 양의 물자와 더 많은 양의 무기를 동맹국에 제공했다. 진주만 침공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이제 전쟁에서 이겼다며 씨익 웃었다고 한다. 반면 나치 독일에겐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근데 히틀러는 일본이 한 소식을 듣고 엄청 신났다 카더라

불과 2~3년 사이에 각종 항공기와 차량을 수십만 대씩 뽑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심지어 리버티쉽이라 불리는 양산형 수송선의 경우 하루에 한 척씩 만들어졌다는 믿지 못할 통계마저 있다.[27] 뉴딜 정책이 약발이 점차 떨어져 가던 마당에, 무한정 소비를 보장하는 이런 전시체제는 미국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과 같았다.

또한 랜드리스 계획으로 피폐한 동맹국에게 물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전 기간동안 같은 물량대국으로 평가되는 소련도, 전차나 야포와 같은 전투병기에 예산을 쏟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미국의 랜드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병사의 피복이나 식량은 미국의 랜드리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련의 제파식 전술의 기반이 되었던 군트럭도 미국에게 지원받은 트럭이었으며 대부분의 화차 또한 미국제였다. 전차나 항공기 등도 지원받았으며, 우방국 영국 또한 미국의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전쟁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을 만큼 연합 우방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는 매우 컸다. 그러면서도 자기 것은 다 챙긴 것을 보면...

결국 전쟁은 대승리였으며, 이때 유럽 열강들이 전쟁의 피해로 초토화된 것을 계기로 이후 세계의 맹주로 급부상한다. 그러나 베링 해협 너머로 공산주의 사상을 앞세워 주변국들에 사회주의 정권을 하나하씩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끼친 소련이 미국에게 도전장을 던지기 시작하였으니...

8 소련과의 캐삭빵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은 자본주의(혹은 경제적개인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 소련은 공산주의(혹은 전체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국가로서 서로 양분됐고, 미국과 소련을 지지하는 국가들이 서로 줄을 서면서 냉전의 서막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공산파 게릴라와 정부 간의 내전이 발발한 것을 보고 미군이 직접 개입해 공산 게릴라와 싸운 직후, 미국에서는 공산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UN에서 적극 항의하고 UN군 결성과 파병을 건의한다. 때마침 중국과 대만 중 누가 상임이사국이 되느냐로 싸우다가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한 상태라 소련을 제외한 전 상임위원국들이 찬성하여 기적적으로 UN군 파병이 이뤄진다.[28]

참전 초기에는 스미스 특임대가 오산에서 캐발살나고 24사단이 대전에서 패퇴하는 등 고전했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후에도 공산군과의 교전에서 주력 역할을 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막대한 물자 지원으로 한국전쟁 무승부(…)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한편, 90년대 이후에 당시 미군이 저지른 오폭이나 민간인 학살 등의 의혹에 대해서도 꾸준히 연구가 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 비율은 80%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미군이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자행했던 것에 기인한 면이 크다.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노근리 사건. 여기 참조 (#)
신대륙의 기상

사실 흑역사스러운 더러운 짓은 당연한 얘기겠지만, 북한쪽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남쪽에서의 민간인 학살이나 피해사실에 대해 떠드는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저지른 실수를 떠올리고는 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당시 적군이였던 북한군이 훨씬 더 심했다는 것은 당연한 진실이다.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 해리 S. 트루먼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20년 정권은 슬슬 고인 물은 썩는다고 부정부패가 이어졌다. 결국 한국 전쟁을 끝내겠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민주당 20년은 종식되고 만다.

여하간 이 민주당 20년이 끝난 이후 미국 경제는 1차 대전이 끝나자 대공황이 일어나듯이 추락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계속 성장, 미국의 쇠퇴와 그에 따른 소련의 독주를 기대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예상을 가차없이 깨버린다(이미 죽어버렸지만..). 동시에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막대한 경제 원조로 서유럽 경제를 되살리고 아시아권 반공 국가들(대표적으로 필리핀, 대만, 일본, 한국 등)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청난 전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 시장은 그야말로 상품의 블랙홀이었고 전후 빈곤에 허덕이던 서방 국가들은 대미 수출길이 열리며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의 질 수준은 대단히 높은 편으로 고등학생들도 자가용을 끌고 정도 였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1960년대에 들어가서 달라지게 되는데, 밖으로는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고, 니키타 흐루쇼프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니마니 하면서 맞먹으려고 들게 된다. 이에 존 케네디린든 존슨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행정부는 아폴로 계획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섰으나 도리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천민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범람에 반발, 도덕주의가 득세하며 히피를 비롯한 뉴웨이브 운동이 득세했고 호황으로 인한 사회적 기회 확대로 대규모 흑인 공민권운동 등이 일어나는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리처드 닉슨 때의 일로(아폴로 계획의 결실인 달 착륙도 이 때 따 먹었다), 동시에 소련과 각을 세우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 데탕트를 앞세우고 재선에도 성공하지만 그 직후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다. 이후 승계한 포드 대통령을 거쳐 인권 외교를 표방한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 등으로 취약성을 드러내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행정부는 "레이거노믹스"라고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스타워즈"로 대비되는 군비경쟁을 펼치면서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영국과 함께 보수주의 시대를 연다. 우연인지, 아니면 군비경쟁 정책의 결실인지 조지 부시 행정부 들어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던 일본 경제의 몰락으로 인해 미국은 이제 그 누구도 도전할수 없는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9 최강대국 미국, 그러나 적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We have had a globe-straddling empire and a very intrusive foreign policy for decades that incites a lot of hatred and resentment toward us.
우리는 전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을 가졌으며, 굉장히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수십년간 유지해왔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향한 엄청난 증오와 원한을 사게되었습니다. - 론 폴

1991년, 사담 후세인이 일으킨 전쟁인 걸프전에 미국이 참전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엄청난 지지도 상승을 이루지만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한계가 드러 가기 시작했다. 결국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구호로 내세운 빌 클린턴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소련까지 붕괴하면서 미국은 넘사벽의 천조국이 된다.

하지만 부시 재임 내내 부시 행정부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떨쳐짐에 따라 자연히 공화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9.11 테러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의 연이은 병크로 부시 행정부는 전 세계적인 반미감정을 초래했으며, 그럼에도 계속 일방주의로 나가다가 벼락을 맞고 만다. 특히나 반미감정이 극심했던 중동 지역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에 기반한 테러리스트 단체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테러 활동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미군을 시종일관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사태 전까지 최근 10년간 서브프라임으로 세계의 돈을 주워 모아서 자국 서민들에게 '잠시 동안' 집을 마련해 주었지만, 부시 정권과 금융 관리 당국의 호흡이 맞지 않아 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대량의 수금 불가 상태의 대출이 발생했고 동시에 부동산 값도 내려가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전 세계적 금융 위기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현재는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폴 크루그먼 가라사대, "재정 적자가 대공황의 벼랑 끝에서 세계를 구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이 되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당시 공화당은 존 매케인세라 페일린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부시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안달했지만 이 사건이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결국 2008년 11월 4일, 민주당의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29]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부시의 족적이 워낙 큰지라 큰 위기에 밀렸으나 색깔론과 건강보험을 바탕으로 다시 지지율을 높이고 있는 형편이다.

2012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큰 차이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밋 롬니에게 승리하였다. 접전주에서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고 지난번 대선에서 이겼다가 이번에 진 주는 노스캐롤라이나밖에 없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회복된 경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30] 민주당은 그러나 하원을 공화당에 내주고 오바마도 힘겹게 임기를 시작하였다. 2기의 업적은 이란 핵 협상과 호경기도 있겠다. 2015년에는 거품을 걱정해야될정도로 경기가 호전되었고, 경제 공황은 최소한 면했다.

2016년에는 버락 오바마가 8년 만에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민주당과 공화당에서 진행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참조. 공화당에서는 또 다른 부시인 젭 부시마코 루비오가 유력후보로 꼽히지만, 지지율 1위는 도널드 트럼프가 몇달째 하고 있다 후보가 됬다. 그리고민주당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이 지지율 1위였지만 조금씩 하락하고 있고 버니 샌더스가 급 부상하고 있다가 결국 힐러리가 후보가 되었고 샌더스가 적극적으로 이를 지원해주는 형태가 되었다. 물론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이상설로 샌더스로 후보를 교체할 가능성도 조금은 있다. [31] 여론조사는 박빙이라지만 대의원을 민주당이 그동안 많이 확보해 놓아 본선에선 클린턴이 우세하다. 아직 잘 모르겠던데
  1. 미국스페인령은 남부 플로리다텍사스, 루이지애나, 오클라호마 그리고 서부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뉴멕시코였다. 남부는 쿠바 부왕령의 일부였다.
  2.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
  3. 제임스타운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
  4.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시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인 왐파노와그족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2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후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 이 사람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5. '영어를 할 줄 아는 스콴토'는 자신들의 정착을 돕는 하느님의 사자였다.
  6. 실제로는 세금 못내겠다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식민지 대표들이 영국에 가서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개소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 실제로 당시 기록을 봐도 정치적 권리를 달라는 것보다 세금내기 싫다가 훨씬 많다.
  7.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땅따먹기도 능력껏 하자
  8.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이 큰 역할을 했다.
  9. 첫번째로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10. 연결된 문서인 현재의 루이지애나 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현 루이지애나 주의 일부만 포함한다) 지도상 가운데에 나온, 현 미국 중부의 대영토를 말한다.(미국 본토 면적의 4분의 1이다!) 이게 깡패지
  11. 전쟁이라고 보다는 거의 땅따먹기 수준이었다. 멕시코는 이 때 국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어느 정도로 억지였냐면 심지어 전쟁을 지휘하던 율리시스 S. 그랜트마저도 옳지 못한 전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미국 내부에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 전쟁은 미국에게 두고두고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오늘날 멕시코 등 남미 히스패닉계들이 미국의 남부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
  12. 예컨대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미국이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데, 신흥 부자가 된 신도시 깡촌 쯤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13. 하루 12시간 근무에 점심시간 30분만 휴식, 그나마 지급되는 것은 빵 두 조각에 사과 반 알 정도였다고 한다.
  14. 청나라의 경우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러시아가 같이 합세해서 불평등조약을 맺었다.라고 쓰고 삥뜯기 시작했다고 읽는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15. 제네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가 서로 원인과 결과이면서 그만큼 시차가 나는 가장 큰 이유이다.
  16. 하지만 경제에서는 전혀 달랐는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전쟁 당사국들에게 자국의 무기를 팔면서 전쟁국들이 발행하는 국채을 사는 등 실속은 다 챙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종전 직전에 영국의 최대 채권국은 미국이 되어버렸다.
  17. 1870~1880년대에 당시 미국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경제규모를 처음으로 따돌렸고, 1890년대 ~ 20세기 초반에 미국과 대영 제국의 국력을 넘어서기 시작하였으며, 역전한 계기는 제 1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황이었다. 이 때부터 미국은 천조국이 되었다.
  18. 지금도 여러 가지 발명 중 주부의 삶에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19. 현재의 TV의 위상과 맞먹으며, 대단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특히 채널 돌리기가 쉽지 않아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지하실에 4개의 라디오를 동시에 갖다 놓고 각각의 방송에 채널을 맞추어두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20. 1927년경부터 제조업 각 분야에서 이미 악성 재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21.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100227711&intype=1 참고
  22.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에서 왔건 무조건 오키(Oki)라고 불렀는데, 오클라호마 출신 뜨내기란 뜻.
  2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101040901&intype=1 참고
  24. 예를 들어, 당장에 공장에서 폐수와 오염물질을 마구 배출해서 환경을 엄청나게 오염시킨다면, 그 환경을 다시 원래대로 바꿔놓기 위해서 엄청난 정부지출이 따라야 할텐데, 과연 이런 식으로 GDP 수치가 증가한다고 사람들의 삶이 나아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에 더 가깝다. GDP가 증가한다고해서 반드시 경제가 풍요에 다가선다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25. 이걸 쉽게 해석하면,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사기적인 물량도 미국의 전체 국력과 비교해 보면 별로 크질 않았다는 뜻이다(…).
  26. 사실, 그 당시 일본 해군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 포고를 제대로 하고 나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선전 포고문을 담은 암호의 해독이 늦어져서, 일본 대사가 미국 장관에게 선전 포고문을 전달한 시점에는 이미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장관에게 전해진 후였다. 어쨌거나 선전포고 없이 기습한 셈이고, 이미 공격해 버렸으니 변명도 못 한다. 이런 판이라 이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 제독도 엄청나게 분노했다고 한다.
  27. 독일의 U보트로 대표되는 무제한 잠수함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이거다. 결국 독일은 전쟁말기에도 교환비율을 1대1까지 찍어내면서 분전했지만, 미국의 물량은 그정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28. 그런데 계속된 연구로 밝혀진 그 당시 기록에 따르면, 소련의 불참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이 한반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국력 회복 및 유럽에서의 공산화 작업을 위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29. 케냐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인이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흑인들 중 백인 피가 섞여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하버드대 헨리 루이스 게이츠 교수에 의하면 자신이 흑인이라고 응답한 미국인의 약 58%가 12.5%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으며, 약 1%가 50%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그 1% 역시 약 38만9천 명 정도로 적지 않은 숫자다. 사실 흑인이라고 치더라도 오바마는 혈통이 일반적인 흑인과 크게 다르다. 미국 흑인은 조상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서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오바마는 동아프리카니까. 부계로 치면 이민 2세밖에 안 되기도 하고.
  30. 사실 가장 최근 있던 세 번의 재선선거에서는 현역 대통령이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31. 대만 대선에서 지지율이 밀리던 중국 국민당이 주리룬으로 후보를 교체했었기 때문에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물론 주리룬의 지지율도 절망적으로 낮아 결국 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