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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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澤諭吉
1835.01.10~1901.02.03

1 소개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1]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
"조선은 아시아 주 중의 하나의 소야만국으로 그 문명의 정도는 우리 일본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설사 그쪽에서 내조하여 속국이 된다 할지라도 기뻐할 만한 것이 못된다."
중세적 봉건주의 국가였던 일본을 근대적인 국가로 변하게 한 일등공신이자 흑화한 제국주의자

만엔센세

근대 일본의 계몽운동가이자 철학자, 교육가. 아호는 산쥬잇코쿠진(三十一谷人)이다. 게이오기주쿠(게이오기주쿠대학의 전신)[2]와 지지신보(산케이신문의 전신)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기 일본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막부 정치 대신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할 것을 추구한 개혁주의자였다[3]. 일본의 초기 인권 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라이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중년기 이후의 급격한 사상 변화로 논란을 낳기도 하는데, 이 시기에 내놓은 아시아 경멸론, 미개국 경멸론은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다. 정작 후쿠자와는 군국주의에 반대했다는 게 아이러니.

일본의 근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동시에 일본에 제국주의를 심은 대표적인 인물이므로, 일본에서는 위인일지 몰라도 한국에서 위인으로 떠받들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는 인물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한 자유주의자로 칭송받으며,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서재필 등 구한말 급진개화파들이 이 사람의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의 청년 개화주의자들을 다 망쳐놨다."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혈기가 넘쳤던 갑신정변을 긍정적으로 봐준다고 해도, 갑신정변에서 살아남은 급진개화파 분류의 인물들 모두 이후의 행적이 언급하기 껄끄러울 정도로 변질해버려서 마지막까지 긍정적 평가를 받은 인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1만엔권 엔화의 얼굴마담으로도 유명한데, 1984년부터 오늘날까지 엔화 1만엔권에 초상이 실리고 있다.[4]그래서 일본에서는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는 후쿠자와 유키치 라는 농담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쿠자와 유키치가 1만엔에 실리기 시작한 해에 이토 히로부미가 1천엔권 초상에서 퇴출됐다.[5]


2 생애

2.1 계몽운동가 후쿠자와

일본 오사카 출신으로 1835년 하급무사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6] 아버지는 성리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나카츠 번에서 하는 일은 회계담당 겸 창고담당이었다. 그는 유키치가 2살 되던 해 사망했고 저명한 성리학자인 형 역시 젊은 나이에 죽는다. 그는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보고 실력이 있어도 성공할 수 없는 문벌 사회에 대한 강력한 증오감을 품게 된다.

이후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지고 서양의 대포 이야기가 전국에 퍼지자 그는 포술을 공부하기 위해 네덜란드어를 배웠으며 당대 최고의 난학자(蘭學. 일본어 : 란가쿠, 네덜란드 학문을 뜻함)[7]가 되어 1858년 도쿄(당시의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語學校)인 난학숙(蘭學塾, 일본어 : 란가쿠주쿠)을 세우고 계몽 운동에 기여를 한다. 그러나 이듬해 쿠로후네 사건의 진원지이자 미국인들의 거류지가 된 요코하마를 우연히 방문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곳에 머물면서 네덜란드는 이류국가에 불과했으며 미국영국이 세계 최강이란 사실을 깨닫고 크게 충격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후쿠자와는 난학을 때려치우고 영어를 공부하여 1860년, 에도 막부 소속 조사 시찰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반년 간 방문하고 영어 사전을 가져와 일본 최초의 일영사전을 편찬하였다. 1862년에는 유럽을 1년간 여행했으며 이때 막부의 통역담당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1867년에는 다시 반년간 미국을 방문했다.

1868년 난학숙을 게이오기주쿠로 이름을 변경시키고 메이지유신 때 신정부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모두 거절하였으며 대신 언론 활동과 교육에 전념하며 일본의 개혁과 근대화를 주장하는 한편 서양의 문물을 소개하면서 대중적인 토론과 회의 등을 통해 전국적인 논의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였다. 이후 1867년부터 1870년까지 유명한 『서양사정(西洋事情)』을, 1872년부터 1876년까지는 아직도 널리 읽히는 『학문의 권장(學問のすすめ)』을 펴내 단숨에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서 저술가이자 계몽운동가로서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서는 만국공법과 함께 서양사적이 당대 최고의 관심을 받는 서적이었다. 그가 학문의 권장에서 남긴 일신독립(一身獨立)하여 일국독립(一國獨立)한다는 구절은 최근에 방영된 일본 근대 사극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 강조될 정도로 일본의 계몽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토 히로부미 등의 군국주의 정책에 반대하여 자유와 민권 운동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초기 일본의 헌법과 교육법 제정에 민간인 교육자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지만 이토 등과의 논쟁 이후 교육령 개정, 헌법 개정에서 모두 손을 뗀다.

『학문의 권장』의 첫 문장인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에서 드러나듯 후쿠자와는 만인이 각기 불가침의 권리를 갖는 평등하고 독립적인 인간임을 강변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일신독립하여 일국독립한다는 사람은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학문과 실업에 힘써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일신의 독립이 국가의 독립과 직결되는 이유는 무지하고 게으른 인민은 정부의 압제를 초래하고 국력을 약화시켜 외국의 침략을 불러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국가의 근대화에는 개인의 근대화, 곧 시민적 자유를 향유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의 형성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는 정부와 인민 관계가 상하관계가 아니라 인민이 주인이고 정부는 대리자인 서로가 대등하며 국법에 의해 서로의 권리 존중하고 의무를 이행해야하는 계약관계임을 설파했다. 학자건 상인이건 관(官)의 일만 선호하고 정부를 견제할 사립의 중요함을 모른다는 일본의 국가주의적 풍토에 대한 비판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나왔다. 후쿠자와가 막부와 메이지 정부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고 끝까지 민간에서 활동한 것도 이러한 사상 때문으로 보인다.

『학문의 권장』에서 드러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써내려간 후쿠자와의 또다른 고전『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역시 1875년의 저술로, 이 시기의 유키치는 그야말로 일본 근대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쌓았다. 보통 여기까지를 후쿠자와의 생애 전반으로 보며, 일본에서는 후쿠자와의 옹호자이건 비판자이건 이 시기의 업적은 모두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후쿠자와는 생애 전반에는 조선에 별다른 저술을 남기지 않았으나, 임오군란 사후 처리 사절로 방일한 김옥균과 만나게 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조선의 급진 개화파에 후쿠자와가 끼친 사상적, 실질적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스승으로 모셨고, 후쿠자와도 김옥균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지어 후쿠자와는 김옥균을 위시한 급진 개화파가 정치적 실각 위기에 처하자 갑신정변에 직접 개입해 반란의 성공을 위해 도검과 폭약 등의 무기를 조달하기도 했다.

실제 후쿠자와를 통해 무기를 조달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옥균, 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 선생은 단지 그 대본의 작자임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를 가르치고 또한 필요한 도구를 갖추는 등 만반의 수단을 강구한 사실이 있다"는 증언을 남겼다. 물론 후쿠자와는 자서전인 후쿠옹자전에서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이러한 후쿠자와의 조선 근대화에 대한 개입은 단순히 '조선의 근대화에 열의를 보인 후쿠자와'라는 평가에서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조선에 강요한 후쿠자와', 심지어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후쿠자와'에 이르기까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갑신정변 시기까지는 후쿠자와가 어느정도 아시아 각국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사실이며, (의외이지만) 조선인에게는 한글이 가장 알맞으니, 국한 혼용체를 사용하여야 한다며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도 하였다.[8]. 그러나 갑신정변이 같은 아시아 국가인 청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자, 이후 이사람은 탈아론으로 완벽하게 흐콰(...)해버린다.


2.2 흑화 제국주의자 후쿠자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후쿠자와는 '조선독립당의 처형'이라는 글을 게이오기주쿠에서 발행하던 신문 '시사신보'에 싣는다.[#] 이 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를 처형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조선 정부가 죄 없는 부모, 조부모와 처자식, 나이 어린 손자까지 처형하는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야만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한 글이었다.

갑신정변은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는 반역죄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에서 반역죄에 적용하던 처벌대로 내린 것이고, 갑신정변은 현대 관점에서도 외환죄에 해당한다. 여기 적용된 연좌제는 실제로 일본에서도 공식적이진 않지만 부라쿠민같은 형태로 남아있었다. 즉, 누워서 침뱉기(...) 근대주의자였다기 보다는 후의 제국주의자인 면모를 보면 일본이 쉽게 조선을 날름할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서 노발대발한 걸로 보인다. 제 3자가 보기에는 후쿠자와의 발언은 내정간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여기에서 드러나듯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의 좌절로 인해서 일본이 한국을 쉽게 접수하지 못 한것에 대해서 극도로 분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후쿠자와는 세 달 뒤인 1885년 3월에 그 유명한 탈아론을 발표한다.

"조선 인민 일반의 이해(利害:득과 실)가 어떤지를 논할 때는 (조선의)멸망이야말로 오히려 그들의 행복을 크게 하는 방편"이라는 말 역시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즉, 전제적이고 봉건적인 조선 정부가 멸망하고 (일본의 메이지 정부와 같은) 근대적 정부가 성립해야만 조선 인민이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후쿠자와가 제국주의 침공의 선동자였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은 위에서 보이듯 그냥 조선 정부에 빡쳐서 날린 공개 디스에 가깝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라고 하였다.

후쿠자와는 두 번의 미국 여행과 한 번 유럽 여행만으로 당대의 흐름이었던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를 사는 사람은 그 당대의 시간적, 공간적 인습에서 벗어나 사물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시공간을 초월한 안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러한 국제 정세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는커녕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 비법을 배워서 일본 제국주의를 추진하여 일본이 제국주의의 막차를 올라타도록 주도했다.제국주의는 나쁘지만 내 나라 일본은 제국으로 만들어야 겠다 해킹으로 비유하면 제로 데이 공격을 한 꼴.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었을 때 남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에 자기가 먼저 사용해서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제국주의의 묘리를 선취해서 남보다 먼저 아시아를 수탈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게다가 사상가로서의 명망과 다르게 원칙이 없는 언행을 일삼았다. 예를 들어 보자면, 그는 초기에 쓴 『학문의 권장』에서 인간평등 사상을 내보이지만, 나중에는 스스로 이것을 부정한다. 물론 사상가가 사상이 원고부동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변화한 후가 너무 막장이라는 게 문제.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하여 그의 입장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자면

학문의 권유/인민이 지식을 쌓아야
→ 강박교육론(강제의무 교육론)/계몽부터 해야
→ 강박교육 반대론/아 그런데 개인의 존엄성을 침범하면 안되지..
→ 최하등 교육론(3년제 간이소학교 용인)/일단 사람부터 되야하니 어느정도 의무교육은 있어야할 거 같기도
→ 신 학문의 권유/에라 모르겠다, 과정에 대한 논의는 됐으니까 지식좀 쌓으라고
공장노동 아동에 대한 교육거부/"아 X발 다때려칠거야 노예같이 살거면 교육이 뭐가필요해 우민들아!" 노답봐라? 흑화트리와 일치한다

변천한 내용을 보면 단순히 원칙이 없는 것을 떠나서, 과연 교육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악질적인 주장도 서슴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막부 정치를 그리워하는 당시의 일본 시골 사람들을 보며 우매한 대중이라며 경멸했다. 이것은 그의 또다른 특징인 우민 멸시 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초창기의 개혁적 성향과 달리 흑화된 이후 후쿠자와는 우민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사상으로 변화해갔다.

그는 천황제의 본질이 어리석은 백성을 농락하는 사술임을 알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그는 초기에는 천부인권의 인간 평등을 주창하다가 나중에는 대중을 바보와 병신같은 구제불능의 우민집단으로 간주하였으며,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종교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백성을 종교를 이용해 통제하고자 논리는 국가신토라는 전체주의적 암덩어리로 자리잡게 된다.

"세상에 병신들이 있는 한 종교 또한 매우 유용하다. 바보와 병신에게 종교는 꼭 맞는 구색이 아니랴."

당시 일본 국민들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경멸, 여기에 조선, 청나라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무시, 갑신정변 이후 조선인 독립당의 처참한 최후까지 더하여 그는 죽을 때까지 민중을 경멸, 바보와 병신을 위한 종교진흥론을 1백편 이상 집필했다.[9] 그 밖에도 "압제도 내가 당하면 싫지만 남을 압제하는 것은 몹시 유쾌하다." 이런 뉘앙스의 정신나간 명언(?)도 남겼다. 그는 당시 일본인들이 신사에 가서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어리석고 미개한 짓이라며 조롱했다. 그러나 수천년간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인들의 습관을 고칠 수는 없었다. 동시대의 일본인들도 그가 일본을 강도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포함한 일본의 '계몽주의자'들은 대중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유 민권 운동 당시 이 운동을 "잡스러운 것"이라고 비난하며 메이지 정부를 옹호했다는 점을 보면 곡학아세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이러한 우민 멸시 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우민화 정치를 펴는 아시아 멸시 사상으로도 발휘되었다.[10] 여기서 이러한 멸시관이 후일 일본군의 잔학행위의 사상적 배경으로 연결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단의 서술처럼 후쿠자와 유키치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고 후쿠자와 개인에게 당시의 여러 요인을 무시하고 책임을 돌리는 건 어리석은 얘기겠지만 일본 사상계의 태두라 할 수 있는 그의 부정적인 영향 역시 막대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여튼 이 때 부터 후쿠자와는 [막말]의 강도가 점점 세지며 흑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침략의 목적은 일본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남을 위한 게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다." "조선국은 사지가 마비되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없는 병자와 같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병사는 돼지꼬랑지 새끼" "조선과 중국 이 두 나라는 진보의 길을 모르고 구습에 연연하며 도덕마저 땅에 떨어진데다가 잔혹, 몰염치는 극에 달하고 거기에 오만방자하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인간 평등 사상에서 '다른 나라는 서양 제국주의 나라빼고는 쓰레기이며 특히 동아시아가 가장 막장이고 오물투성이지만 일본만은 특별하다'는 식으로 일본을 옹호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저서인 학문의 권장에서 아시아 민족의 전근대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영국과 프랑스등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문명의 선도자로 좋게 본 건 맞지만 그 폭력적 성격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또한 일본과 일본인은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비굴하다며 디스를 했고, 그렇게 몇백년간 몸에 밴 근성을 뿌리뽑을려면 국민 개개인이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업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평등 사상을 내세우면서, 일본인도 할 수 있는데 왜 서양인만 만나면 굽신거리기 바쁘고 말도 제대로 못하냐며 한탄하는 부분도 있다. 한마디로 이 인간의 문제는 통찰력이 없는게 아니라, 당대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적 가식과 그 뒤에 있는 시커먼 탐욕의 본질을 파악할 만큼 명민했던 주제에 이걸 도덕적 차원에서 배격하고 대체할만한 인본주의적 주장을 펼친게 아니라, 오히려 저 탐욕을 긍정하고 내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기꾼들이 공갈사기 치는걸 다 궤뚦어 보았음에도 이들을 사기치지 말라고 나무란게 아니라, "오 님 좀 천재인듯?" 하며 지도 같이 사기꾼의 대열에 자발적으로 합류했던 것이다.나도 꿀 좀 빨아보자 그리고 이런 근대화의 억압적, 차별적인 면모에 대한 긍정은 갈수록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더욱 더 심해졌다.

후쿠자와와 그가 설립한 게이오의숙으로부터 많은 신진민권론자들이 배출되었고 1800년대 중반부쯤 되어서는 자유민권운동이 활발해졌는데 이때부터 일제는 교과서 검열제도를 실시했고 『학문의 권장』도 그 대상이었다.[11] 국가의 교육방침 자체가 국가주의, 군국주의 일변도를 가면서 자유주의사상 역시 탄압대상이 되었는데 만주침략, 태평양전쟁 시기에 게이오의숙은 반정부주의의 소굴로 취급되었고 극심한 감시를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후쿠자와는 그저 미국과 영국 문화를 소개한 사람 정도로 받아들여지다가 그가 다시 인기를 회복한것은 패전 후였다. 패전으로 천황의 정치일선 후퇴, 군부의 퇴출, 그리고 민주주의가 들어오면서 "사람위에 사람없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 이는 전후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 바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로 일본 군국주의를 예리하게 비판하며 명성을 얻은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12]라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의 [어록]을 보면, 후기의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간략하게 줄이자면 만화에서나 볼법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타락해버린 이상주의자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3 평가

피해국가인 대한민국, 중국 등에서는 이렇게 제국주의자로 평가를 내리고 있으나, 대체적으로 평범한 일본인들은 계몽가, 일본 근대사의 위인등으로 좋게 평가하며 일본내에서 존경받을 위인 같은 주제로 조사 통계를 내면 항상 상위권 내에 든다. 교토대학 사학과에 재학중인 일본인"일본사에 관심없거나 겉핥기로 아는 일본인은 전국시대를 좋아하지만, 일본사를 탐독한 사람은 일본 근대사를 좋아하며, 일본 근대사를 어숙하게 아는 사람은 사카모토 료마를 높게 평하지만, 진짜로 존경받아야 할 사람은 후쿠자와 유키치 선생이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높게 평가된다. 실제로 일본인들 입장에서 높게 평가할 인물인 것 자체는 사실. 근대가 재밌는건 일본이 제일 재미본 시대니까 그렇겠지. 원래 이기는 게임이 재밌잖아,

20세기 무렵, 상대적으로 미발달한 나라였던 일본이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시아, 중동, 동유럽, 북유럽 소수 국가들처럼 열강들에게 침탈당하는 대신 열강들이 했던 것처럼 다른 나라를 침탈할 수 있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고 그 성장을 밑거름으로 오늘날까지 부흥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이 사람의 역할과 영향이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과거 일본의 정치와 사회의 여러가지 면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지금까지 일본에는 "정부의 역사"는 있어도 "국민의 역사"는 없었다고 까내린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3].

당대 사상을 충실하게 따른 인물이므로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답이 아니며, 그가 일본을 근대화하는 과정 등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다른 일본의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단 잘못하면 일본 우익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일본의 방어적 제국주의, 식민주의론과 설사 의도치 않았다 하더라도 교감을 이루게 될 위험성이 있으므로, 항시 적절한 균형을 잡아 주는 비판적인 시각은 결코 방기되어선 안 된다. 요컨대 후쿠자와는 자유주의자이자 군국주의의 반대자였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유럽의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자이기도 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 화백의 걸작인 "왕도의 개"는 일본인 작가의 작품이지만, 후쿠자와를 정말 강하게 디스한다. 흑화 후쿠자와 특유의 형용할 수 없는 느글거림 역시 제대로 묘사된다. 또한 조선이 러시아에 빌붙으려는 모습을 보인다면서 이런 나라는 희망이 없다고 실망했다고 무시한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말과 어긋나지 않느냐는 주인공의 지적에 "그러니까 학문을 배우라는 말이다. 그런 것도 모르는가?"라는 무책임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단순한 만화적 픽션으로 취급하기 힘든게, 실제로 흑화 후쿠자와의 사상과 언행이 이러하다.

전 나고야 대학 교수인 야스카와 주노스케가 기존의 후쿠자와 연구에서 벗어나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한국에도 '후쿠자와유키치의 아시아침략사상을 묻는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아시아 멸시 발언 어록도 부록으로 낱낱히 들어가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한번 읽어보자.

또한, 2015년 7월자로 야스카와 쥬노스케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도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흑화'혹은 '전향'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제국주의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 또 그 사실이 감춰지는데 있어 마루야마 마사오가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야스카와는 9.11테러를 미국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음모론자이므로] [그의 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


4 관련 항목

  1. <학문의 권유>의 첫문장. 하지만 이 구절 뒤에는 "~라고는 하지만 사람간에 격차는 분명히 있고 그것은 혈통에 의한게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학식으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는 식의 말이 나온다. 에디슨의 격언과 비슷하게 와전된 경우.
  2. 한때 이 학교 유학생 출신인 한국인들에 의해 경응의숙으로 불렸다.
  3. 실제로 이 양반이 당장 했던 극언이 "근대화 안 하겠다고 버티는 조선이나 중국은 일본의 미래에 있어서는 일절의 도움도 되지않는 국가임. 이런 나라들은 이웃이라고 특별취급 안 하는 게 장땡."였다.
  4. 그렇기에 한국에서 1만원권 지폐를 '세종대왕'이라고 부르는 것처럼(세종대왕이 몇 분...), 1만엔 지폐를 돌려 말하는 식으로도 '유키치'라는 말이 쓰인다. 세뱃돈으로 유키치 세 장, 하는 식으로.
  5. 후쿠자와가 대체한 것은 쇼토쿠 태자, 이토를 대체한 것은 나쓰메 소세키다.
  6. 아버지는 유키치가 태어나던 날에 그 전부터 읽고 싶었던 대명률의 상유조례(上諭條例)라는 책 한 질을 구했다. 그래서 諭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정작 그 아들은 훗날 서양학문을 공부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 책을 팔았다.
  7. 네덜란드의 다른 명칭인 홀란드를 한자로 옮기면 화란(和蘭)이 되며 이를 일본어로 읽으면 "오란다"가 된다.
  8. 게이오기주쿠를 세우고 교육이야말로 문명화, 근대화의 열쇠라고 주장했던 만큼 한자만으로는 서양의 학문이나 사상의 습득에 많은 어려움이 있을것으로 보고 자신의 사재로 한글활자 주조비용도 지원을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최초의 국한혼용 신문이 바로 한성주보
  9.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였다.
  10. 그는 일본아시아에서 탈피하여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을 제창한 사람이다. 번역하자면 아시아에서 탈출하고 유럽의 길로 들어가자는 뜻.
  11. 천황과 황군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데 "사람 위에 사람 없고~"라는 말 자체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정작 폭력과 침략 논리는 수용해버린 것이 모순.
  12. 별명이 "학계의 천황". 정작 마루야마 본인은 이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긴 자유주의 좌파 학자한테 천황이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좋아할리가...
  13. 근대에 들어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정권이 민중에 의해 바뀌거나 민중의 요구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는걸 보면서 한 말이다. 스스로 참여해서 만들어진 법과 제도를 준수하는 구미인들과 정부의 필요에 의해서만 만들어지고 정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을 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