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출생 | 1867년 2월 9일 도쿄 신주쿠 출생 |
사망 | 1916년 12월 9일 도쿄부 |
국적 | 일본 |
학력 |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졸업 |
직업 | 소설가, 수필가, 영문학자 |
대표작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吾輩は猫である) 그 후 (それから) 몽십야 (夢十夜) 마음(こころ) 도련님(坊っちゃん) |
목차
1 개요
일본의 소설가, 영문학자로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이다. 일본 최초의 근대 문학 작가로, 1984년부터 2004년동안 1,000엔 지폐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도 불리며, 이름 있는 문학 평론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소세키론을 쓸 만큼 일본 현대 문학의 기초를 닦았다고 할 수 있는 작가. 언문일치를 주장한 후타바테이 시메이와 함께 현대 일본 순수 문학의 본령인 사소설이라는 체계를 최초로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작품 중 <뜬 구름>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현대 일본어로 정리한 판본이 아니면 현대인이 읽기에는 다소 어색하여 읽는 데 품이 조금 든다.
대표작으로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그 후>, <도련님>, <풀베개>, <산시로>, <행인>, <마음>, <한눈팔기(道草)> 등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무렵에 활동했던 작가이지만 현대에 와서 읽어도 세련된 문장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2 일생
현재의 도쿄도 신주쿠 구 기쿠이 초에서 태어났다. 당시 나쓰메 가(家)는 명문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집안이 상당히 쇠락한 상태였다. 소세키는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이미 나이가 꽤 지긋했다. 형제도 많았고 집안 사정 또한 여의치 못하여 2살 때 시오바라 마사노스케의 양자로 들어갔다. 소세키의 생부는 지역 동장·이장 쯤 되는 '나누시(名主)'였고, 시오바라는 그의 동료 나누시였다. 그러나 소학교에 입학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양부모가 이혼하여 결국 다시 친부모 품으로 돌아갔다.
11살의 나이에 이미 친구들과 회람잡지를 만들어 <마사시게론>(正成論)이라는 일본 무장에 대한 논문을 한문으로 써냈을 만큼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평소에도 한문, 한시를 애독, 애송했다고 알려져 있다.
총명하던 소세키는 도쿄제국대학의 등용문이라 여겨지는 대학 예비문(고등학교 해당)[1] 예과에 입학했다. 참고로 소세키는 중학교를 중퇴했다. 도쿄 부립 제1중학교를 다니다가 한문을 배우기 위해 중학교를 퇴학하고 한문학 교육기관인 니쇼학사에 들어간 것. 그러나 '앞으로는 영어를 배워야 전망이 좋다' 는 형의 권유에 따라 다시 영어를 가르치는 세이리쓰 학사에 가서 영어를 공부하고 대학 예비문에 진학했다.
대학 예비문 예과 시절에 복막염을 앓아 낙제한 적도 있었지만, 추스르고 심기일전하여 결국 졸업 때까지 수석을 차지했다. 엄친아의 위엄 대학 예비문 예과를 졸업하고 본과 영문과에 진학한다. 본과 시절에 하이쿠 시인인 마사오카 시키와 교우하면서 '소세키' 라는 아호를 쓰게 되었다. 마사오카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하이쿠에 심취했다. 첫 소설 연재 또한 하이쿠 잡지에서 시작했다. 이어서 도쿄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1892년에는 분가와 동시에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기고[2] 그해 5월 도쿄전문학교의 강사로 출강했다.
1893년에 도쿄제대 영문과를 졸업하여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 강사와 중·고등학교 선생을 했으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세계에 자주 드러난다.
1896년에 중매로 만난 귀족원 서기관장인 나카네 시게카즈의 딸 '교코'와 결혼했다.
1900년 문부성의 국비 유학생 1호가 되어 영국으로 2년간 유학을 떠난다[3]. 원래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등록할 예정이었으나 포기하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 강의를 청강했다. 하지만 유학 비용 부족과 고독감으로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영국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방대한 소설과 시를 읽다가, 무엇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하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애당초 인간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고민하게 된다. 한 밤중에 불도 켜지 않고 흐느껴 울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일본인 친구는 글로 남겼다. [4]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영국 유학시절에 런던 탑을 관광하며 느꼈던 감정을 단편소설 <런던탑[5]>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영국 유학기간 동안에는 다니던 학교도 휴직하여 연봉이 적게 나왔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빚도 많이 졌으며[6][7] 양부와 유학 즈음에는 완전히 몰락한 처가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였다. 결국 제1고등학교 강사, 도쿄제국대학 문과대학 강사를 겸임했고, 메이지 대학에도 출강하며 벌이를 늘렸다. 이 와중에도 자신의 신경쇠약을 다스리고 잔돈푼도 좀 벌어볼 목적으로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 다른 일이란 바로 문예지에 첫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발표한 것이다. 처음에는 1화 분량의 단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반응이 좋아 계속 연재하게 된다. 처음 작품을 연재한 지면은 하이쿠 잡지인 <<호토토기스>>.[8]
앞에서 언급한 <런던탑> 등 다수의 단편을 발표하고 1906년엔 단편집을 출판함과 동시에 2번째 장편 작품인 <도련님>을 <<호토토기스>>에 발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7년에 드디어 교직을 전부 사직[9]하고 1년에 100회 가량 연재소설을 쓰는 조건으로 아사히 신문의 전속 작가가 된다.
1909년에는 대학 시절 친구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고레미키의 초대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그 여행기인 <만한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를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문부성에서 문학박사 학위 수여를 통보받았으나 거부했다.
1916년에 지병의 악화로 인해 188회를 마지막으로 <명암>의 연재를 중단했다. 결국 그 해 12월 9일 위궤양 악화로 인한 내출혈로 사망했다.
3 작품성향/특징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그것을 쓴 작가 본인이 강하게 투영되는 경향을 보여주기는 하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구샤미 선생이나 <도련님>의 화자는 작가와 사실상 동일인물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로 작가의 삶과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일단 두 작품 다 화자나 중심인물의 직업이 선생이다. 다만, <도련님>의 화자는 이과로 수학 선생이다. 그래서 그런지 수업 장면이 별로 안 나온다. 참고로 <도련님>의 배경은 시코쿠[10].
초기 단편소설인 <런던탑>은 런던 유학시절 작가 본인의 경험을 풀어낸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이라면 에세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런던탑에서 작가 혼자 리처드 3세가 어린 왕 형제를 런던탑에 가둔 일이나 제인 그레이가 처형당한 일 등 영국사를 바탕으로 신나게 공상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런던탑이라는 작품 앞부분에 당시의 궁핍한 유학생활 실태가 묘사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근대화에 비판적인 것도 이때 근대화 1번지인 영국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개고생한 탓인 듯.
작품생활 전반기 작품과 후반기 작품의 분위기가 정말 크게 다르다. 초기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나 <도련님>처럼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유머러스한 작품들이 많았다면 후반기엔 그의 대표작인 <마음>을 비롯하여 전부 인간의 내적 갈등을 다룬 무거운 분위기의 작품이 다수이다. 그래서 초기 작품을 읽고 이어서 후기 작품을 읽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읽으면 기분이 다소 이상해질 수 있다.
그 이유는, 전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인 <문(問)>을 집필하던 1910년 6월, 위궤양으로 입원. 8월에 이즈의 슈젠지 온천에서 요양생활을 하던 중, 800그램의 피를 토하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슈젠지의 큰 병(修善寺の大患)'을 겪는다. 의사의 기록을 보면 약 30분간 죽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의 죽음의 체험과 병상에서의 생활은 이후의 작품에 영향을 준다. 전기에는 작품 속에서 죽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후기의 작품에는 병고에 시달리는 인물과 자살하거나 죽는 사람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후기 작품에선 대체로 삼각관계를 바탕으로 그 관계 사이에서 내적갈등을 겪는 각 개인의 심리를 다루고 있다. 본격 아침드라마 연애소설 작가로 거듭난 것인가 싶겠지만, 사실 대놓고 연애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끓어오르는 연애 감정과 배덕감 등으로 고뇌하는 개인의 모습을 조망한다.
작품에서 대체로 인텔리, 지식인 출신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는 당연히 그의 출신 탓이겠지만. 연구자들은 소세키를 통해 근대 지식인 유형을 연구하기도 한다.
1908년에 연재한 <산시로>, 1909년에 연재한 <그 후>, 1910년에 연재한 <문>의 세 작품들은 연재 순서 뿐만 아니라 내용, 작중배경이 어느정도 연속성이 있어서 소세키 연구자들 중엔 이 세 작품을 일종의 3연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목을 밋밋하게 짓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 제목이 장황하지 않고 간소하며, 작품 내용과도 그렇게까지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곤 한다. 심지어 이듬해 춘분까지 연재한다고 <춘분 무렵까지>라는 제목을 붙인 작품도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인물이지만 딱히 작품이나 글 등에서 제국주의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입장이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는 편. <만한 여기저기(滿韓ところどころ)>에서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비하하는 발언들이 등장하지만 단편적인 내용들이라서 일본 제국주의를 적극적으로 찬양한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말 돌리냐?
말년의 작품인 <점두록>에서는 반군국주의적인 작품 성향을 보였는데, 1차 세계대전에 주목하여 전쟁이 부른 참상을 지적했다. "저 탄환과 저 화약과 저 독가스와 그리고 저 육탄과 선혈" 이라 묘사하며 전쟁에 항변하는 모습을 보였고, 트라이치케를 예로 들어 독일 군국주의가 어디까지 성장하여 통일 독일까지 이루어 내었는지를 상세하게 살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군국주의자와는 다소 거리가 먼, 평화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4 영향력
일본의 근, 현대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어일문학과 학생들에게는 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수준의 입지로, 멀리 갈 것도 없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읽어보면 이 사람이 일본 문학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서 있는지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이 작가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 지 드러나는 재미있는 사례로는, 나쓰메의 소설을 연구한 사람이 나쓰메 소세키론을 썼는데 시간이 흘러 몇십 년이 흐르자 그 나쓰메 소세키를 연구한 사람을 연구한 사람이 나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나쓰메 연구 일대기를 연구하기도 한다.메타메타평론
5 여담
현암사에서 나쓰메 소세키 사후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쓰메 소세키 장편소설 전집을 2013년 9월부터 2016년 6월까지 4차에 걸쳐 완간했다. 1차분으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풀베개』, 『태풍』, 2차분으로 『우미인초』, 『갱부』, 『산시로』, 『그 후』, 3차분으로 『문』, 『춘분 지나고까지』, 『행인』, 4차분으로 『마음』, 『한눈팔기』, 『명암』이 출간되었다. 노재명이 옮긴 『태풍』, 『그 후』를 제외하고 전부 송태욱이 옮겼다.
특이하게도 송태욱이 번역한 작품에 있는 '번역을 마치고' 란 명칭인 역자 후기에 쓰인 문체가 번역가가 아닌 등장인물이 후기를 남긴 듯한 느낌을 줘서 재미있다. 다만 노재명이 번역한 작품에는 역자 후기가 없다. 예를 들자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진지하게 읽지 마시라. 그랬다가는 메이테이 선생에게 늘 당하고 마는 구샤미 선생 꼴이 나기 십상이니. 그냥 힘 빼고 즐기시라. 코믹소설, 뭐 그런 거라 생각하시라. 이러저러한 걸 풍자한 것 아니겠나, 하며 의미 맞추기에 골머리를 앓다가는 고양이한테도 무시당할 터. 그러다 보면 웃어넘기지만은 못할 여운이 묵직하게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하략)'라고 썼다. 『도련님』의 역자 후기 끝에서는 '이 무엄한 것들 같으니라고.'라고 썼다.이 진지하지 못하고 무엄한 역자 같으니라고
5.1 이름의 유래
소세키(漱石:수석)라는 말은 한자로는 돌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이다. 이는 진서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한 것으로, 본래 안빈낙도의 생활을 의미하는, 돌을 베고 시냇물로 입을 헹군다는 의미의 말을 어떤 사람이 잘못 인용하여 시냇물을 베고 돌로 입을 헹군다고 한 것을 남들이 비웃자 시냇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것은 더러운 말을 귀에서 씻는다는 의미이고 돌로 입을 헹군다는 것은 속세의 일을 버린다는 비유라고 우겼다는 데서 나온 말로, 말장난을 하거나 무리하게 억지를 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일종의 말장난을 아호로 삼은 것.
5.2 1,000엔
일본은 패망 이후 1963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1,000엔의 모델로 사용했으나 주변국들로부터 맹렬한 반발에 부딪혔다. 당연하지 하지만 그런 반발을 무시하고 사용하다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했던 것인지, 1984년 1,000엔 지폐의 모델을 이토 히로부미에서 나쓰메 소세키로 변경 조치하였다. 그 이래 나쓰메 소세키는 2004년 말까지 1,000엔의 모델을 하였다. 2004년 11월부터는 1,000엔의 모델이 노구치 히데요로 변경되었다. 근데 이 분도 딱히... 문학계에서는 5,000엔에 히구치 이치요.
1,000엔 앞면
1963~1984
1984~2004
2004~현재
5.3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
영어 문장 'I love you'를 '달이 아름답네요(月が綺麗ですね)'라고 번역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영어수업 도중에 학생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로 번역하자 "일본인이 그런 말을 입에 담겠는가. '달이 아름답네요' 정도로 옮겨 두게. 그걸로도 전해질 걸세."[11]라고 말하며 정정해주었다는 설과 소설을 번역할 때 직설적으로 할 수 없으니 고민하다가 저 말로 번역했다는 이야기. 그 시절의 일본에서 밤을 함께 할 정도의 남녀 사이(연인)라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비슷한 말로 후타바테이 시메이가 번역한 '죽어도 좋아(死んでもいいわ)'. 다만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도시전설이다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관련 링크 참고. "달이 아름답네요"라는 표현은 그 후에 남녀가 로맨틱한 상황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대표적인 낭만적인 대사로 일본의 문학과 일상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고 신파조의 대사로 현대의 일본 서브컬쳐에서 자주 패러디 되기도 한다.
5.4 조어
소세키는 평소 한문과 한시를 애송했고 조예 또한 깊었다. 한자 조어 역시 많은데 신진대사(新陳代謝), 반사(反射), 무의식(無意識), 가치(價値), 전력(電力) 등 외래 문명에서 온 낱말을 새롭게 조어했고 '저회취미(低徊趣味)'라는 고유한 한자어도 소세키의 조어다. 그 밖에 아테지(当て字)라고 하는, 고유어, 서구 외래어 등 본래 한자어가 아닌 낱말을 그럴듯하게 한자로 적는 방식도 애용했는데 현재에도 쓰이는 '낭만(浪漫)'이 그런 말이다. 영어 '로망'을 제대로 옮길 말이 없어서 '낭만주의'라는 한자로 음차하여 옮겼다고 스스로 밝혔다. 浪漫은 일본어 발음으로는 '로우망'이다. 일본어의 토니카쿠(兎に角 : 어쨌든), 타쿠산(沢山 : 많이, 잔뜩) 등 소세키가 사용한 아테지 중 일부는 지금도 쓰이고 있고 한자어 역시 쓰이는 것이 많다.
5.5 식성과 위장병
예민한 신경 탓에 신경성 위장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식탐이 많아서 배가 아픈 와중에도 꾸역꾸역 입 안에 먹을 것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위장병으로 입원했을 때 배를 따뜻하게 하기 위해 배 위에 올려놓은 곤약을 떼어먹었을 정도.
달콤한 음식을 즐겨서 양갱을 좋아했으며, 딸기 잼은 외국에서 일부러 주문해서 한 달에 8캔을 먹었다고 한다.
5.6 다른 매체에서의 등장
명탐정 홈즈에서는 영국 유학생으로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역전재판에서는 주인공 나루호도 류노스케의 의뢰인(!)으로 등장한다.
역내청원본에서는 히키가야 하치만이 중학교 2학년 때 소세키의 마음(나쓰메 소세키)를 읽고 독후감을 썼다.그 썩어빠진 성격에 걸맞은 독후감을 참 잘적었다...
- ↑ 소세키가 수학하던 중 제1고등중학으로 개명되었다가 이후 제1고등학교가 된다.
- ↑ 병역기피 설이 유력하다. 당시 개척을 위해 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기면 징집이 유예되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징집면제를 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일본 정부에서는 홋카이도 개척을 촉진하기 위해서 홋카이도 거주민에게 병역면제를 내렸는데, 이 규정은 1898년에 폐지되었다.
- ↑ 소세키는 자신의 에세이 문학론에서 '영국 유학은 관(국가)의 명령이었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더라면 절대로 안 갔다. 2년 동안 굉장히 고생했다'는 내용을 적은 바 있다.
- ↑ 소세키는 영국 런던 유학중에 신경쇠약, 특히 감시공포증에 시달렸다. 이런 소세키와 만났던 독일 유학생 이케다 기쿠나에(MSG의 원료인 글루타민산을 발견한 화학자)는 일본 정부에 보낸 전보에서 이 상황을 딱 한 마디로 요약했다. "나쓰메 미쳤다." 정부로부터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지만, 일단 할 일은 다 마친 뒤에 귀국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얻은 신경쇠약 증상은 귀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소설을 창작한 것 자체가 이 신경쇠약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도피 행위였다고도 한다.
- ↑ 당시 표기는 倫敦等. 프랑스-불란서와 같은 맥락. 페르소나 3의 시험 문제 답안으로 '론돈탑'이 나온 바 있다만 사실 우리말로는 윤돈탑이라 읽는다.
- ↑ 그가 유학 중에 100엔, 일본에서 머물던 사람들이 100엔, 귀국해서 100엔 정도의 빚이 있었다. 이 당시 목수의 하루 일당이 1엔, 임시 교사의 월급이 8엔이던 시절이다.
- ↑ 특히 장인인 나카네 시게카즈가 고위관직에 있었던 터라 상당한 원조를 받았었지만, 나츠메 소세키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직후에 정권이 교체되면서 물갈이를 당해서 관직을 박탈당한 데다가, 손을 댔던 주식까지 폭락하는 바람에 거액의 빚을 지게 되어서 원조가 끊기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상당부분을 장인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나츠메 부부의 가계도 더불어 파탄이 난 것.
- ↑ 참고로 호토토기스는 우리말로 '두견새'를 뜻한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이라며 성격을 비교한 일화에서 언급된 바로 그
노부나가에게 끔살당하는새가 호토토기스이다. - ↑ 소세키의 연봉은 1,500엔으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이걸 접고 작가로 뛰어든 것이다.
- ↑ 소세키는 마쓰야마와 구마모토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배경에도 도고 온천이 나오는데 이 온천은 지금도 있다. 사족으로 시코쿠 마츠야마에는 이런 인연을 바탕으로 "도련님 경단"이라는 군것질거리를 파는데 맛은 그냥 경단.
- ↑ 원문은 「日本人がそんな台詞口にするか。『月が綺麗ですね』とでも訳しておけ。 それで伝わるものだ」 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