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토르 피아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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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or Pantaleón Piazzolla(1921년 3월 21일 ~ 1992년 7월 4일) [1]

"나에게 있어 탱고는 발보다 귀를 위한 것이다."

아르헨티나탱고 작곡가이자 반도네온 연주자. 춤곡이었던 탱고 음악을 재즈, 클래식을 도입한 누에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감상용 음악, 순수 음악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대중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음악으로서의 탱고의 대부분은, 피아졸라가 작곡한 것이거나 그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것들이다. 대표작으로 리베르탱고, 김연아선수의 2013-14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 등이 있다.

피아졸라는 1921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부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아버지가 반도네온을 물려주면서 처음으로 음악을 시작하였다. 1930년 그는 부모를 따라 유년기를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이 당시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바흐, 슈만의 음악과 유행하던 재즈 음악을 반도네온으로 연주하길 좋아했는데, 이는 그가 주로 하던 탱고와 다른 장르의 음악 사이의 크로스오버에도 영향을 미친다. 피아졸라는 13살때 당대 탱고의 거장 카를로스 가르델을 만나고, 그의 앞에서 연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 가르델은 그에게 '연주 실력은 훌룡하지만, 탱고를 양놈[2]처럼 연주한다'는 평을 했는데, 그 당시 피아졸라가 재즈,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정확한 지적이었고, 나중에 피아졸라가 정통 탱고에서 벗어난 것을 생각하면 수십년 후를 예언한 평이었다. 한편으로 가르델은 피아졸라의 연주 실력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주기도 했고, 자신의 연주여행에 함께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아졸라의 아버지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는데, 가르델과 그의 악단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훗날 피아졸라는 인터뷰에서 '내가 그때 간다고 우겼거나 아버지가 허락했으면, 반도네온대신 구름 위에서 하프를 뜯고 있었겠지…'라는 말을 하였다.

1936년, 아르헨티나의 고향으로 가족과 돌아오면서 피아졸라는 여러 탱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이 당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르다로의 6중주단이었다. 이 당시 탱고는 빅 밴드 오케스트라가 주로 연주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실내악 탱고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피아졸라도 이후 이에 영향을 받아 실내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그의 나이 17살 때,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해 당시 최고의 탱고 악단이었던 아니발 트로일로의 악단에 연주자로 들어간다. 피아졸라는 그 곳에서 월 240달러를 받으며 반도네온 연주 외에도 편곡, 피아노 연주 등을 맡으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본인은 '카바레는 매음굴이었다'고 회상하며 그 시절에 대해 넌더리를 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숙소는 개판이었고, 여러 동료들 중 약 안 빨고, 여자랑 안 논 것도 그뿐이었다고.

그러던 중 1941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을 찾아가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을 평해달라고 요청하는 패기를 보였고, 루빈스타인은 이 부탁을 너그러이 받아들이면서 피아노 파트를 연주하고서는 '다 좋은데, 오케스트라 파트는 어디 있나?'라고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없었다(…) 음악이론이 부족했던 피아졸라는 피아노 독주곡을 쓰고는 협주곡이라고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럼에도 한번더 기회를 드리고 싶어요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보고 작곡가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를 사사할 기회를 주었다. 이후 피아졸라는 히나스테라의 밑에서 음악 이론을 배우고, 문학, 미술 등 교양을 쌓으면서 탱고 연주자로도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첫 아내 데데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6년간 히나스테를 사사하면서 첫 클래식 작품을 발표하기도 한 피아졸라는 점점 기성 탱고 음악계와 갈등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작품 편곡을 놓고 팔리게 만들려는 트로일로에게 반발을 맞기도 했고, 피아졸라도 맘에 안드는 동료나 공연 와서 들으라는 음악은 안듣고 염장질이나 하던[3] 손님들에게 폭죽이나 쓰레기를 던졌다고 한다.높으신 분들이 맞았으면 피아졸라도 코로 초리소 시식을 했거나탁치니 억하고 죽었을지도 결국 이런저런 문제가 쌓인 끝에 그는 1944년 트로일로의 악단을 떠나 1946년 자신만의 악단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르케스타[4] 티피카'(이하 티피카)를 결성하고,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립해나간다.

티피카 악단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탱고를 알리며 그의 지지자를 모으던 피아졸라는 다른 한 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버르토크,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실내악 위주로 창작하였는데, 1945년에는 그의 작품 번호 1번 '하프와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이 초연되었고, 그 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인정한 첫 탱고곡 '엘 데스반데'도 내놓지만, 당시만 해도 피아졸라는 탱고보다는 클래식을 더 좋아하였다. 아니, '반도네온 들고 밖에 돌아다니기 쪽팔리다'고 했을 정도로 탱고를 반쯤 혐오하였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탱고 좆까, 나도 스트라빈스키 될거야!!'같은 심정으로 살았다고. 한편으로 그의 악단 티피카도 열성 팬들을 모으긴 했지만 댄스 반주로 부적합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크게 얻지 못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앞의 주석에서 검열삭제를 즐겼다고 했던 페론 부부가 정권을 잡고 독재자처럼 권력을 휘두르면서 악단에도 페론 가카 찬양의 압박이 악단 안팎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페론주의자였던 피아졸라도 본인이 흑역사로 인정한 '아르헨티나 공화국'과 '페론 찬가'를 연주해야 했고, 후자는 본인이 직접 작곡해야 했다. 이후에도 계속 페론주의자들의 압박에 시달려온 피아졸라는 결국 본인의 탱고에 대한 무관심, 정치적인 압박, 인기 부족에 시달린 끝에 마지막 콘서트 만석에 실패해서 티피카 악단은 1949년 대충 망했다. 이후 피아졸라는 객원 멤버로 연주에 참여하거나 영화음악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한편으로 클래식 작곡에도 전념했다. 아, 탱고도 작곡했다. 아주 가끔씩(…)

그러던 중 1953년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 교향곡'으로 세비츠키 상을 수상하면서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정통 관현악 편성에 반도네온을 추가했기 때문에 초연 무대에서 '야!!! 클래식 연주하는데 반도네온 소리 좀 안나게 하라!!!'며 난동이 일어났지만, 그는 이 상의 특전으로 파리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이듬해 그의 아내와 함께 파리로 떠난 그는 나디아 불랑제에게 작곡을 사사했다. 처음 피아졸라가 불랑제에게 자신의 작품을 연주할 때에는 클래식 곡을 연주하였는데, 그녀의 평은 '다 좋은데 말이야, 니 음악에 감정이 안 실린 것 같은데….'였다. 한편으로 그녀가 그에게 클래식 말고 다른 음악도 한 적 있느냐고 묻자 피아졸라가 자신이 탱고 연주자라고 커밍아웃하고 자신이 작곡한 탱고를 연주하자 그녀는 피아졸라에게 그것이 그답다고 하면서 그의 음악 재능에 탱고가 더 맞다는 조언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래식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탱고는 그냥 생계 수단으로만 여겼던 피아졸라로서는 이를 계기로 탱고 음악가로 완전히 탈바꿈한다.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이후 파리 유학시절 피아졸라는 불랑제에게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는데, 특히 불랑제에게 상당히 엄격하게 배운 대위법과 푸가 작곡은 이후 피아졸라의 여러 클래식 지향 작품에서 매우 자주 응용되었다. 또 파리 재즈 클럽들에서 재즈 연주를 들으며 그 영향도 받았고, 이후 자신 만의 실내악단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또한 연주 스타일도 고쳐 반도네온을 앉아서 연주하는 대신 의자를 밟고 서서 연주하였다. 본인이 말하길 앉아서 연주하면 늙어보이고, 서서 연주해야 관객과 눈을 맞추고 소통할 수 있다고. 이러한 사소한 변화마저 후대의 탱고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파리 시절 생각했던 실내악단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겨 부에노스아이레스 8중주단을 결성한다. 기존의 오케스트라, 빅 밴드를 앞세운 탱고와 달리 실내악을 중심으로 했을 뿐 아니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를 정식 단원으로 넣어 기성 탱고 음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뿐아니라 그는 새로운 탱고(Nuevo Tango)를 내세워 예술성을 주로 하고, 성악을 뺐으며, 재즈를 도입하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시도로 본국에서는 논란에 휩싸인다. 아르헨티나에서 당시 탱고의 입지는 지금과 같은 격있는 음악이 아닌 우리의 트로트와 비슷한 입지였다는 점을 감안 하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잘나가던 신인 트로트 가수가 '나 예술할래요~'하며 턱시도 빼입고 노래하면 반응이 어떻겠냔 말이다…. 잘 해줄게 제발 그런 사람 한 명만 나오란 말이다!!!! 국악에선 나온 것 같은데 말이지….

아르헨티나에서 100만 안티 시절 문희준처럼 비난 세례를 받던 피아졸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도 해체하고 반 강제로 뉴욕으로 건너가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편곡이나 댄스단 반주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 와중에 1959년 아버지의 부고 소식까지 접하며 최악의 시기를 맛보게 되는데, 이런 절망 속에서 그는 걸작을 하나 내놓았으니 그것이 김연아 선수의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유명한 아디오스 노니노[5](Adios Nonino). 우리말로 하면 '안녕, 노니노'이다. 그러나 뉴욕에서더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한 피아졸라는 다시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온다.

피아졸라가 돌아온 1960년 당시 아르헨티나는 날로 바뀌고 있었다. 페론 정권이 군부 쿠데타로 무너지고 그렇게 세운 정권이 또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탱고도 로큰롤포크의 인기에 치여 시들해지고 있었다. 피아졸라는 이 혼란기를 기회로 삼았다. 모 고소왕처럼 TV 출연으로 인지도를 쌓았고, 카바레 대신 등장한 소규모 탱고 클럽에 출연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그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그의 팬과 안티 사이에 대첩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번은 TV 스튜디오에서 피아졸라와 그의 안티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기도 했고, 택시 기사가 '니 탱고가 탱고냐'며 승차 거부를 했을 정도(…) 그 와중에도 피아졸라는 티피카 악단, 부에노스 아이레스 8중주단에 이은 새로운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 퀸테토 누에보 탕고(새로운 탱고 5중주단, 이하 5중주단)를 새로 결성하고 활동에 나섰다. 1961년 하마이카 클럽에서 처음 공연을 시작해서 1962년 676 클럽으로 무대를 옮겨 공연을 하였는데, 청중 수는 들쭉날쭉했지만, 천천히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새로운 시도를 위해 새로 주자들을 영입하여 옥테토 콘템포라네오(현대 8중주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실험이기 때문에 몇 달 활동하고 5중주단으로 돌아갔지만, 평은 좋았다. 다른 한편으로 클래식도 가끔씩드디어 상하관계가 뒤집어졌다!! 작곡하여 1963년 '아르헨티나 탱고 3악장'이 초연되기도 했다. 이 무렵의 성공으로 지방 순회 공연도 다니고, 유럽 순회 공연도 기획을 하였다. 1965년에는 아르헨티나 국격 높이기 문화 홍보 차원에서 미국, 브라질을 방문하여 콘서트를 열었는데, 오히려 본국에서보다 평이 좋았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함께 공동 작업하여 앨범을 내기도 하여 마침내 첫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무렵부터 부부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피아졸라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66년 두 부부는 별거하고, 이혼이 합법화될 때까지 사실상 이혼 상태에 있다가 1988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이혼한다. 별거를 시작한 이후 피아졸라는 더 신이나서 합법 바람을 피웠고, 그 와중에도 별거 중인 아내와 밀당을 시도하면서 양다리를 놓기도 했다.보트를 태웠어야 했어 그러나 이러한 가정사는 그의 음악에도 영향을 미쳐서 1966년부터 67년까지 2년동안 영화음악 두 곡을 제외하고 아무 작품도 쓰지 못했다.꼴 좋다

새로운 반전은 1968년에 찾아왔다. 시인 오라시오 페레르를 만나 5중주단도 해체하고 함께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오페레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마리아'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작업을 이어갔지만 1968년 5월의 초연은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4개월만에 막을 내렸고, 피아졸라는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피아졸라는 새로 창작열을 얻고 5중주단을 부활시키고 6중주단도 새로 결성한다. 페레로와도 계속 함께 작업해 '바친의 젊은이', '광인을 위한 발라드' 등의 히트곡을 작곡한다. 특히 '광인을 위한 발라드'는 4달만에 15만장을 팔아치우고 전세계에 그의 이름을 알린다.그 와중에 안티들이 자기 곡을 깎아내리니까 좌파의 소행 드립치던건 안자랑 이러한 활동은 1971년까지 이어졌고, 페레로와 함께 '전주곡 3부작'을, 혼자서 기악곡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 모음곡을 작곡한다.

그러던 중 1971년, 피아졸라는 돌연 5중주단을 해체하고 유럽으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 빡빡한 공연 일정을 명목으로 5개월간 파리로 여행을 떠난 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새 앨범 '퀸텟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고, '콘훈토 9'(이하 9중주단)이란 9중주단을 결성한다. 이 밴드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시 정부의 지원을 받고 1971년 첫 해외 공연과 72년 앨범녹음을 하며 성장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시 정부와의 계약 이행을 위해 지방 순회공연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1972년 4,5월에는 해외 연주여행을 떠나 이탈리아, 브라질에서의 공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당시 그는 '나가르 콘체르토', '바르다리토', '더블 A의 비가'|A4 용지와는 관계 없다, '숨', '3×4'12, '히피에게 보내는 송가', '40에의 오마주', '9 시리즈', '코르도바의 오마주' 등 명곡을 쏟아내는 등 리즈시절을 찍었다.

그러나 시 정부로부터 9중주단의 지원이 끊기면서 와해, 피아졸라는 다시 5중주단으로 복귀한다. 밴드의 와해, 복귀 후의 평론가들의 혹평, 그리고 아르헨티나에 돌아온 페론주의 정권으로 인한 혼란 등이 겹치면서 피아졸라는 정신적으로 흔들린다. 거기에 국내 무대도 줄어들면서 피아졸라는 해외로 눈을 돌리고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다. 하지만 애인 아멜리타의 반대로 이주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곡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거의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하였고, 결국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심장마비로 쓰러진다. 다행히 목슴을 건지고 생명에도 지장이 없어 1972년 10월 퇴원하지만, 피아졸라는 이 일이 있은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피아졸라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후 이주를 결심한다. 1973년 이탈리아인 에이전트 알도 파가니와 계약 후 같은 해 3월 이탈리아 TV 출연을 시작으로 유럽을 주무대로 삼는다. 이 당시 방송용 소곡들을 주로 작곡하였는데, 그것들이 바로 '리베르탱고', '메디탱고', '트리스탱고', '비올렌탱고', '아멜리탱고' 등의 걸작이다. 그 외에도 브라질 순회 공연, 색소폰 연주자 게리 멀리건과의 공동작업 모두 성공하면서 피아졸라는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1975년에는 칸 음악제에서 '로큰롤은 한계에 달했다. 영국인들의 침략도 이제 끝이다.'라며 설레발을 쳤을 정도. 또한 에바 페론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기획했으나, 안타깝게도 어떤 영국인 양반초대박 뮤지컬로 먼저 침을 발라놓는 바람에 시망. 그는 후에도 그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고 호평하면서도 '내가 만들었으면 더 잘 만들었을거다'라며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나….

이탈리아 외에도 피아졸라는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등을 돌아다니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75년 로마시에서 황금금수상을 받는 등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고국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정이 악화되면서 향수병이 도졌고, 분위기 전환을 위해 다시 이주를 계획한다. 그러나 영 좋지 못한 일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오랜 세월 반 파트너, 반 연인 관계로 지내던 아멜리타와 결별한 것. 이 일로 피아졸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곡 '아멜리탱고'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음악'으로 개명하고 그녀의 이름을 자기 앞에서 꺼내지 못하게 하는 등 그녀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아Q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오랜 맞수인 트로일로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그에게 헌정할 '트로일로 모음곡'을 작곡하는데, 이 작품이 그의 영화 음악 '산티아고에 내리는 비'[6], '뤼미에르'와 함께 그 당시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다!

1975년 중반에 들어서서 피아졸라는 다시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전자 음악에 도전한 것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의 전자음악과 재즈의 퓨전에 영향을 받은 그는 신시사이저와 전자 악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였고, 1975년 9월에는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새로 전자 8중주단을 결성한다. 신시사이저, 전자 오르간, 일렉 기타 멤버들을 포함하고 즉흥 연주를 허용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이 8중주단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보수적인 기존 팬들로부터 거하게 욕을 퍼먹기도 했지만,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피아졸라도 크게 만족했다.

아후 북미, 유럽을 돌며 연주와 창작에 전념하던 피아졸라는 1977년까지 전자음악, 락 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500 모티바시오네스' 등의 명곡을 발표했지만, 1977년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와의 갈등 등으로 8중주단 역시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1978년에는 그 해 조국에서 거행된 월드컵을 위해 작곡을 하였으나 그 해 월드컵은…. 결국 그 곡들은 모두 월드컵과 관계 없게 제목갈이를 해야 했다.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피아졸라는 8중주단을 포기하고 5중주단을 새로 결성한다고 선언했다. 만들고 깨지고 만들고 깨고…… 밴드가 도자기냐? 동아시아 모 국의 정치사가 생각난다면 기분 탓입니다 새로운 5중주단은 전자음악을 버리고 다시 어쿠스틱한 실내악으로 돌아온 모습이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안티가 많았지만 해외 반응은 성공적이었고, 5중주단 활동기 동안 '친친'네?, '비유야'등을 작곡하며 작곡가로서도 건재함을 드러냈고, 그 정점은 1979년 초연된 '반도네온 협주곡'과 1980년 초연된 '푼타 델 에스테 모음곡'이다. 그리고 1980년, 다시 해외 활동을 위해 파리로 다시 이주, 5중주단과 함께 유럽 순회 공연을 하는 등 공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80년대 후반에는 영미권 활동에 주력하여 몽트뢰, 몬트리올 재즈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장르에서 환영받는 명실상부한 국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크 주모 여기 아르헨뽕 하나 추가요! 근데 피아졸라쯤 되면 좀 취해도 된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5중주단을 거의 갈아넣다시피한 고된 일정을 소화, 88년 심장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5중주단도 해체하고 또? 회복 후 6중주단을 다시 결성한다. 또…. 이 당시의 음악은 건강 악화의 영향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6중주단은 이전 못지 않은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90년대에도 그러리라고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팬들도 믿었다.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1990년 8월 5일, 피아졸라는 뇌출혈로 몸 오른쪽이 마비되어 즉시 귀국,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같은해 12월에는 폐렴, 91년 1월에는 장출혈까지 겹친 끝에 92년 7월 4일 숨을 거두었다. 향년 71세.

  1. 아르헨티나 사람이므로 이름을 스페인식으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때문에 스페인식으로 읽으면 피아솔라(/piasola/)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름의 철자를 보면 알겠지만 피아솔라는 원래 이태리 성이다. 때문에 피아솔라의 국적과 관계없이 이태리 식으로 '아스토르 피아라'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많다. 이 항목은 그냥 영어식으로 대충 읽은 발음을 따라 '피아졸라'로 작성되었다.
  2. 원래 사용한 표현은 gringo. 뜻은 같다.
  3. 당시 탱고를 연주하던 카바레에서는 커튼만 쳐놓고 오리온 자리 아래에서 검열삭제를 했다고 한다. 이런 이들 중에는 후안 페론에바 페론 부부도 있었다고. 흠좀무
  4. 스페인어로 오케스트라
  5. 그의 아버지의 애칭이었다.
  6.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당시 개쌍놈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의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