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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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51년 8월 5일, 강원도
학력춘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경력1974년 MBC 입사
MBC 보도제작국장(1998.03~1999.03)
MBC 보도국장(1999.03~2000.02)
MBC 보도본부장(2000.03~2008.02)
MBC 사장(2008.02~2010.02)
한국방송협회 회장(2008.02~2009.03)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2012.04~2014.09)
종교개신교

문화방송의 前 기자이자 사장.

1 개요

1990년대~ 2000년대의 MBC의 전설적인 앵커.
앵커로서는 최고였으나, 정치인으로써는 최악의 인물.

뉴스데스크의 전설적인 앵커맨으로 현재까지 대한민국 최장수 앵커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보도하시던 분. 48년만에 이겼다그가 뉴스데스크 앵커로 재임한 기간은 장장 13년 2개월 (1989년 10월 9일 ~ 1996년 11월 8일 / 2002년 1월 1일 ~ 2008년 2월 1일) 로 뉴스데스크를 가장 오래 지켜온 앵커다. 2010년 MBC 리서치에서도 뉴스데스크 하면 가장 떠오르는 남자 앵커로 70%가 그를 뽑았을 정도다. 말단 기자로 시작하여 MBC의 메인 뉴스 앵커,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을 거쳐 사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다.[1] 강원도 출신으로 춘천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1974년에 MBC에 입사했다.

2 기자

기자생활에서 꽤 파란이 많은데, 1977년에는 설악산을 취재하고 김포공항으로 복귀하다가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거의 죽다 살아나기도 했다.[2] 이 때 비행기 조종사와 부조종사는 사망하였다. 1980년대에는 파리 특파원을 역임하며 뉴스 마무리를 항상 세느강변에서 하여 화제를 모았다.[3] 이때 흩날리는 머리에 바바리코트 차림이었기에, 기자의 로망으로 불리며 기자 지망생들의 선망을 얻기도 했다.

3 뉴스데스크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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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진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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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의 진행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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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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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일 마지막 진행 모습.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으로 유명했던 멘트.

1989년 10월에 38세의 나이로 뉴스데스크의 앵커로 발탁[4]된 이후, 1996년 11월까지 7년 가량의 긴 기간동안 진행을 맡았다. 이후 파트너 김은주 앵커와 함께 앵커직에서 물러나고# 보도국장, 보도본부장을 역임하다가 2002년 1월부터 다시 앵커를 맡아 2008년 2월 1일까지 6년 가량 계속 뉴스데스크의 앵커 자리를 지켜왔다. 동시에 MBC 사장이 되기 전까지 특임이사 자리도 겸했었고, 2007년부터는 아예 부사장 대우를 받았다. 부사장이 직접 전해주는 뉴스. 손석희? 2008년 2월 1일, 엄기영 앵커의 마지막 날엔 뉴스데스크에서 고별 뉴스를 마련해줬다.2008.2.1 앵커직 고별 뉴스 2008.2.1 클로징 멘트

최일구 앵커만큼은 아니지만 클로징 멘트로 종종 이슈가 되는 말을 자주 했다. 최일구 앵커보다는 훈계적인 성격이 더 강하긴 했지만 이전 앵커들은 "뉴스 마치겠습니다." 같은 간단한 멘트로 끝마치다 보니 더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였다. 이 말을 박명수를 비롯하여 여러 개그맨들이 엄기영 앵커의 성대모사를 할 때 사용했다.

하기야 엄기영 앵커가 앵커직에 있던 때(1989년-1996년)는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를 시작으로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이어 역대급 재난인지금 1995년 6월 29일 "MBC 뉴스특보" 에서 "온 국민 할말을 있고 지금 어이없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까지?" 터지는 등 대형 사건들이 워낙 많이 일어났던 때인지라 저런 말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되는 대형사고 때문에 못참았는지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당시엔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되어야만 합니까?" 로 뉴스를 시작한 적이 있다. 지금봐도 그 멘트는 후덜덜하다[5]# 하지만 이로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고 역대급 규모의 참사가 일어나 버렸다...

2002 월드컵 때는 광주 월드컵 경기장 에서 당시엔" 결국 해냈습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이 4강에 진출하는 좋은 성적을 낸 뉴스를 보도해서인지 여태까지에 비해서 늘 밝은 표정이었는데 대회 진행에 따라 한국 대표팀이 계속 승리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록 더욱 그런 표정을 지으며 뉴스를 보도했다. #

하지만 그의 앵커 생활에도 흑역사가 딱 하나 있었는데 2004년 6월 30일 "혹시 댁에 설치한 자동잠금장치, 이 회사제품과 똑같은 것은 아닌지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정번호 3개를 한꺼번에 누르게 되면 비밀번호를 몰라도 잠금장치가 그냥 풀려버린다고 합니다.

김철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2007년 7월 26일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에 관한 뉴스를 전해주다 화면이 특파원 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웃음짓는 모습을 보여서 이에 대해 네티즌들의 엄 앵커를 비판하고 옹호하는 싸움이 일어났는데, 결국 엄 앵커가 이에 대해 사과했다.#

4 MBC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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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MBC의 27대 사장이 되었다. 그는 사장직에 있었을 당시 집권당과 정부의 심각한 공정방송 훼손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PD수첩에서 광우병 논란에 대해 다룬 걸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당 쪽에서 계속해서 MBC의 최대주주이자 사실상 MBC 사장과 임원의 임명권을 쥐고 있는 방송문화진흥회를 친정부측 인사로 채우고 엄기영 사장과 MBC를 압박하면서 서로의 갈등이 극에 다른 시기였다[6]

그런데 갑자기 2010년 임기를 마치지 못한 채 갑자기 MBC 사장직에서 사퇴를 선언했다.# 사퇴한 이유는 뉴MBC플랜이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책임이라고 알려졌다.# 그리고 MBC의 암흑기가 시작 그의 사퇴를 시작으로 많은 아나운서, 기자들도 파업 등으로 줄줄이 사퇴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 시기부터는 마음 고생 탓인지 머리 염색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백발 스타일이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MBC와 사이가 멀어져서 MBC에선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으나 의외로 뉴스데스크 40주년 특집에 참석했다. 그에겐 뉴스데스크가 특별한 존재니 이 자리만큼은 참석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5 사장직 사퇴 이후

그 이후로는 한나라당으로부터 계속 강원도지사 출마를 요청받았으나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물러나게 될 경우에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2011년 3월 2일, 한나라당 후보로 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사실 엄기영은 춘천 출신으로, 평소에 고향 강원도를 위해서 일하고 싶다는 의견을 MBC 재직 시절부터 주변에 자주 피력했고, 퇴임 이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추진위원장을 맡은 바 있다. 이 시기에 평창 유치 홍보를 위해서 KBS의 아침마당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KBS에 나오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나 뭐라나.

2011년 3월 1일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강원도지사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참조. 같은 MBC 사장 출신의 최문순과 대결해 주목을 받았지만 강릉의 한 펜션에서 불법적으로 전화 홍보원 30여 명을 동원해 불법 선거운동을 하다 적발되었다. 엄기영은 선거운동원들이 자발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팬션과 휴대폰을 자신이 마련해준 걸 보면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많았다. 결국 최문순에게 득표수가 밀려서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2012년 바뀐 당명인 새누리당의 이름으로 남긴 정치 행적이 없는 것으로 보면 강원도지사 낙선 이후 한나라당에서 탈당했거나 새누리당에 가입만 되어있을 뿐이고 정치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김문수 前 경기도지사에 의해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를 맡았으나 2014년 7월 8일에 사표를 제출하였고 그 이후로는 방송계와 정치계에서 모두 물러난 상태로, 이제 2008년 마지막 뉴스데스크 클로징에서 말한 것처럼 진정한 모니터 밖의 일반인이 되었다.

그의 한나라당 입당은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MBC 사장 시절만 해도 이명박 정권과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MBC의 자율성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과 최문순 의원이 후보 양보론까지 꺼내가며 영입하려 했을 정도였으나 강원도지사 선거에서 최문순에게 패하며 정치적으로는 안습한 행보를 가게 되었다.[7]

혹자는 그가 X맨 역할로 한나라당에 들어가서 고의적으로 토론을 망친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강원도지사 후보 토론회에서 앵커 출신이라는 점이 무색한 정도를 넘어서 아예 횡설수설로 일관해버리는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오죽했으면, 최문순 후보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역으로 날렸을 정도였다.

위에서 말한 X맨 설과 MBC 사장 자리에서 반강제적으로 사퇴한 것을 보면 'MBC와의 끝을 안 좋게 한 한나라당과 정권에게 빅엿을 먹이자.'라는 의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진실은 저 너머에.......

반면에 그가 원래부터 한나라당 성향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MBC 사장 역임 시절 MBC 노조원들이 미디어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파업을 두 차례 강행했으나 열흘을 못 넘겨 철회된 바 있고, 민주당 영입설이 돌 당시 그의 측근들이 그가 한나라당 성향이라 반박했던 점이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또한 1992년과 1996년에 MBC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다른 앵커들(예를 들면 손석희, 백지연 등)과 직원들이[8] 제작거부에 동참하거나 간접적으로 리본을 다는 식으로 파업에 참여할때 땜빵 방송을 맡았으며 덕택에 20년 뉴스 보기에서도 MBC 파업기간 당시의 뉴스데스크 방송일자를 검색해보면 엄기영 앵커가 혼자 진행하는 모습을 볼수있다 (...). 이래서 정치판이라는 게 적도 동지도 없는 거다. 다만 이게 사실이라면, 방송에서 자기 성향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므로 적어도 방송인으로서의 엄기영은 상당히 훌륭했다고 볼 수 있겠다. TV조선의 같은 종씨 쓰는 사람과는 다르다

6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2011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강원도지사)[9]한나라당267,538 (46.6%)낙선 (2위)
  1. 몰론 그런 식으로 사장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엄기영 이외에도 몇명 있는데, 대표적으로 엄기영 다음 사장인 MBC를 말아먹은 김재철 역시 보도국 기레기자 출신. 다만 김재철은 뉴스 앵커를 하지는 않았고 또한 엄기영처럼 MBC 기자들을 통솔하는 보도국장이나 보도본부장엔 오르지 못했다. 이런 친정부 인사가 뉴스 앵커를 했다면 사장 되기 전에 파업했겠지
  2. 하지만 본인도 2개월간 식물인간이었다고 했다.그러고도 13년 동안이나 앵커 해먹어?
  3. 마무리 멘트인 "파리에서 MBC 뉴스 엄 기영이었습니다"라는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저 말을 할 때의 포인트는 "엄" 과 "기영"을 끊어서 읽어주는 것.
  4. 이득렬 앵커 이후 2년간 강성구, 추성춘씨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백지연씨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5. 참고로 사고현장에 파견된 기자는 어느정도 유명한 인물인데, 나중에 MBC를 퇴사하고 정치인이 된 정동영이다
  6. 우리나라 공영방송의 지분 구조가 좀 골때리는데, 공식적으로 MBC의 최대주주는 특수법인 방송문화진흥회(약칭 방문진)이며 이 방문진의 이사장과 이사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임명한다 그런데 방통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방통위원은 국회의석 비율에 따라서 추천한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대통령과 집권당이 공영방송에 개입할 수 있다. KBS도 마찬가지로 이사회 의원의 대다수를 정부 여당과 청와대에서 추천한 인물이 맡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역시 개입이 가능하다
  7. 이전 버전에서는 그가 각종 선거 개표 방송에서 노무현-민주당이 우세를 보일 때 미소를 지었다는 서술이 있었으나, 당시 영상들을 아무리 돌려봐도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의심암귀의 전형일 뿐.
  8. 그토록 욕을 먹는 김재철이나 후에 한나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직을 역임하게 된 한선교도 의외로 파업에 동참한 적이 있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수구화 되었지만. [1].
  9. 전임자 이광재 도지사직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