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2669079936E+130001.jpg

당시 뉴스 보도

"도대 언제까지 이런 후진국형 참사가 계속 되어야만 합니까?'"

- 엄기영 당시 뉴스데스크 앵커의 멘트.

1 개요

1995년 4월 28일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도시가스 폭발 사고이다.

2 전개

상인네거리에 있는 대구백화점 상인점[1] 신축 공사를 위해 지반공사를 하던 (주)표준개발의 인부가 실수로 가스관을 파손시켰다. 이 때 누출된 가스가 하수관을 통해 지하철 공사장으로 유입 후 괴어 있다가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 후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400m에 달하는 건설 현장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 폭발 사고로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가 파손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2]인 데다 등교 시간이라는 점 때문에 학생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유품으로 피 묻은 책가방과 불에 탄 교과서/참고서가 많아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당시 사진 중에 피범벅이 된 책가방을 수습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여성 자원봉사자의 모습도 있었다. 특히 근처 영남중학교 학생들의 피해가 컸는데 사망자 중 42명이 이 영남중학교 학생이다. 그나마 영남중학교를 제외한 나머지 인근 중학교들은 그 날이 금요일이라서 모두 소풍을 나간 바람에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또 영남중학교와 붙어있는 영남고등학교는 등교 시간이 사고 시간보다 20분[3] 빨라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고 후 1년이 지난 1996년에 영남중학교 희생자 유족과 교사, 학우들이 쓴 글을 모은 책이 발행되기도 했는데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 가능하다.

또한 폭발 당시 튀어오른 복공판[4]이나 고열 때문에 크게 훼손된[5] 시신이 많아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근처 아파트 베란다 샷시는 강력한 폭발에 모두 깨졌고, 꽤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하는 굉음이 들릴 정도였다[6]. 이로 인해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깨진 유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재산피해 역시 상당했다.

이 와중에도 여러 의인이 나타나 많은 생명을 구했다. 교통 정리를 하던 52세의 이용선 씨가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 5명의 목숨을 구하고 공사장의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복공판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10여m 아래로 추락해 숨졌으며 버스 기사 29세의 임해남 씨가 자신의 버스에 탄 승객들을 구하고 근처 차량의 일곱명의 시민을 구했다.[7] 사고 소식이 전해지자 2천명의 대구 시민이 몰려들어 헌혈을 했으며 하루만에 전국 각지에서 40억원에 가까운 성금이 모였다.

3 원인

대백프라자 신축공사를 맡은 표준개발 측의 뒤늦은 신고와 대구 도시가스 측의 뒤늦은 사후 대처로 대형 사고가 났다는 점은 한국에서 발생하는 대형 참사의 기본적인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표준개발 측에서는 가스관 파손 이후 30분이 지나서야 대구 도시가스에 신고를 했으며 대구 도시가스 측은 또 30분이 지나서야 사고 현장 주변의 밸브를 일일이 수동으로 잠그러 출동하는 어처구니 없는 대처를 보여주었다.

사실 한국의 대부분 도시의 지하 내에 있는 파이프나 전선 등이 제대로 정비 및 관리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벼이 여겼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상하수관을 실수로 건드려 물이 치솟은 일은 가끔 볼 수 있는데 이 때는 상하수관이 아니라 가스관을 건드렸다는 것 뿐이다. 가스관 자체도 규정인 1m보다 얕게 매설되어 있었으며 시공사 측도 가스관 매설 등의 정보를 미리 받고 피해서 공사를 해야 하지만 무허가로 막무가내로 진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4 대책

이 사고는 관계 기관의 안일한 태도로 인해 벌어진 인재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이후 관련 법 개정과 구난체계 개혁이 이루어졌다. 법원에서는 시공사 측의 과실을 인정하여 인부를 포함한 회사 관계자 9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광주 남구 봉선동 대화 아파트 옹벽붕괴 사고 까지 터지면서 안전불감증에 대한 대대적인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또 당시 사고 때문에 상인네거리를 지나는 시내버스들은 모두 사고 수습이 끝날 때까지 우회 운행을 했으며 당시 사고로 파손된 121번 버스[8]는 사고의 참혹함을 말해줬다. 하지만 이121번 버스의 경우 버스 기사의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5 미비했던 언론보도

당시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데다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텃밭인 대구에서 일어난 사고라 학생이 많이 죽은 대형사고 임에도 언론이 축소보도 했다는 의혹을 많이 받았다. 또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라 대형사고임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어려웠다는 식으로 둘러대는 경우도 있었는데, 지역방송국이 당시 KBS, MBC 모두 존재했고[9] 또 이를 취재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안가는 변명에 불과하다. 이전에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일에는 하루종일 뉴스특보를 했던 방송 3사라 국민들의 화는 들끓었다. 시청료 거부운동 재현이 안된게 용할정도 그래서인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틀 뒤에 벌어진 그 대형참사 때는 철야방송까지 하며 논란을 종식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공영방송 KBS의 태도는 더욱 지탄을 받았는데 1TV가 사고 당일에 10시 15분에 방송을 끝냈고 오후에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고교야구 준결승경기를 생중계해서 빈축을 샀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KBS는 당일 오전 11시부터 공보처에 뉴스특보 방영목적으로 방송시간 연장허가를 신청했는데도 허가가 나지 않았고 그럼 자막이라도 내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해서 허가받고 자막속보를 낸 시간이 오후 2시 2분부터였다. 속보방송 승인은 오후 2시 50분에야 얻어냈고 55분부터 13분간 뉴스특보를 한 게 전부였다.

이는 당시 공보처의 방송국 허가장 일부 규정 때문이었는데 지상파가 정파시간에 긴급속보를 때려야 될 경우에는 사전에 공보처에 얘기를 한 뒤 허락을 받아야 방송을 틀 수 있었다. '방송질서 유지' 명목이었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었고, 결국 김대중 정부 시절에 방송위원회가 출범하며 이 시책은 없어졌다. 1994년 12월 발생한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당시에도 오후 방송 개시 5분 전부터 뉴스속보를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편성 관련자가 징계를 받은 전적이 있어서 KBS는 위에는 높으신 분들 눈치보느라, 아래에서는 국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MBC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공보처에 아침 방송시간 20분 연장[10]을 신청한게 전부였고, 그날 저녁 인기가요 베스트 50도 정상적으로 생방송했다. 다만 이 프로그램의 당시 MC였던 신은경-김지수가 오프닝에 이번 참사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한다는 멘트를 날리긴 했지만... 방송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이외에도 방송 3사 모두 사고 당일 저녁에 예능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송해 욕을 먹었다. 결국 대구시민들은 들고 일어나 며칠동안 시민단체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으며 KBS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까지 걸었으나, 1997년 4월 서울지방법원에서 보도가 별로 안되었던건 알권리 침해가 아니었다며 패소판정을 받았다.

파일:0P1gwcy.jpg
사고당일 MBC 뉴스특보 방송장면. 대구MBC 50년사에서 발췌. 좌측 서울 스튜디오에 나오는 분이 손석희 앵커다.

"선배님 큰일났습니다. 여기에 도시가스가 폭발해 다 날아갔습니다"

"흥분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거 다 얘기해봐"
"지하철공사장에서 도시가스가 폭발해 복공판이 50미터까지 튀어올랐답니다. 사람들 시체가 여기저기 있어요. 버스도 불에 타고 트럭, 택시, 승용차 수십 대가 박살났습니다. 지하철 저 아래로 떨어졌어요. 건물도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부서졌어요."
- 당시 첫 취재내용을 보고하던 대구MBC 오태동-김세화 기자의 대화 중.

"여긴 지금 상인네거리. 지하철 공사장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복공판이 완전 붕괴되었습니다! 사망자, 부상자가 도대체 몇명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제 옆에도 시신이 있습니다!"

- 사고 지점에 있던 대구MBC <푸른 신호등> 통신원 전화연결 중.

한편 사건보도는 MBC가 제일 빨랐다. 사고 당시 방송을 막 끝내려던 참이었던 대구MBC 라디오 <푸른 신호등>[11]에서 후반CM을 내보낸 뒤 클로징을 하려는 순간 여기저기서 제보전화가 걸려왔고, 그중 하나를 통신원을 전화연결한 것이 사건보도의 시작이었다. 같은 시간 여러 시민들의 제보를 받은 보도국에서는 마침 사고지점 근처를 지나가던 취재기자를 통해 제보 5분만에 사고를 파악해 속보를 내보냈다.

당시 PC통신 하이텔에서는 사고 현장이 보이는 아파트 등의 사용자, 해당 사고현장을 지나온 사용자 등을 통해 게시판에 거의 생중계에 가까운 현장의 목격 글들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방송에서는 상당시간을 침묵하고 있었다. 중앙언론을 통제해도 이제는 인터넷(당시는 모뎀을 통한 PC통신)망을 통한 정보의 전달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현실이 된 사건이기도 하다.[12]

6 기타

현재 이 사고의 추모 공간으로는 롯데백화점 상인점과 건너편 교복 대리점들이 사이에 있는 횡단보도 중간 지점 고가도로 하단에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위령비가 있다. 또 달서구 월성동 학산공원 내부에 위령탑이 있어서 여기서 추모 행사를 벌여왔지만 공식적인 추모 행사는 2005년 10주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지 않았지만, 20주기인 2015년에 다시 공식적인 추모 행사를 열었다 사고로 학생들의 피해가 심각했던 영남중학교에서도 부속 건물에 추모 공간을 마련해놨다.

대구의 지하철 관련 사고 중 가장 먼저 발생한 인명 사상 사고다. 이후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일어났으며 2011년 11월 8일에는 수성구 범물동 동아백화점 수성점 앞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 현장에서 굴삭기가 작업하던 도중 도시가스관을 파손하여 가스가 누출되었다. 다행히 신속히 밸브를 차단하고 복구해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제2의 상인동 참사가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도시가스관 등의 지하 매설물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 항상 참사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흠좀무한 것이 참사 이전에 이미 " 에서 사고가 한 번씩 터졌으니. 이제 남은 곳은 땅 속 뿐" 이라는 말이 돌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그저 "그게 무슨 우스갯소리냐"로 흘리는 농담이었겠지만, 결국은 말이 씨가 됐다. 결국 땅 속에서도 사건이 터져서 여러 사람들을 잡고 말았다. 이 사고 후 두 달 뒤에 엄기영 앵커의 이 멘트는 서막에 불과했다는 사고가 터졌다. 그리고 2014년, 역사는 반복되었다. 아니, 오히려 더해졌다.

당시 사고로 대구 영남중학교에서는 교사 1명과 남학생 42명이 목숨을 잃었고, 아들을 잃은 부모들 중 12쌍의 부부가 먼저 떠난 자식의 동생을 낳았다. 놀랍게도 태어난 12명의 아이들 중 11명이 남자아이였으며, 아이들과 부모들은 매년 만나 우애를 키워가고 있다고 한다. 이 중에는 영남중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아들 김준희, 김준형 군이 둘 모두 등교하던 중에 사고로 사망해서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던 김상돈 씨 부부의 늦둥이 아들과 당시 대구대 강사였던 유족회장 정덕규 씨의 늦둥이 아들도 있다. 영남중학교는 1997년에 추모 공간인 세심관을 건립하여 희생자들의 영정을 모시고 사고 자료를 전시하면서 추모 행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영정사진 훼손 등이 심해지자 2015년 20주기 추모식 이후 추모 공간을 교육용 시청각실로 리모델링하고 영정을 모시는 공간은 철거하는 한편, 희생자들의 얼굴을 동판으로 제작하여 건물 중앙에 모시기로 유족들과 협의했다. 리모델링은 2015년 7월부터 이루어질 계획이라고 한다.

대구 출신 중 사고가 일어난 상인동과 그 근방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 사건과 관련된 다양한 일화와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당시 영남고등학교의 어떤 교사가 학교를 땡땡이친 학생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것으로 여겨 노심초사하다가 건들거리며 늦게 통학한 학생을 보고 한 대 쥐어박았다던가,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자거나 차가 밀려서 용케 살아남았다던가, 승용차가 엔진 문제를 일으켜 브레이크를 걸면 시동이 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받지 않게 돌아갔다가 사고를 피했다던가, 앞산순환도로에서 내려오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커다란 게 바로 앞에 떨어져서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보니 커다란 복공판으로 추정되는 철판이 있었다던가와 같은 간발의 차로 사고를 면한 이야기들이 대다수다. 특히 영남고등학교나 영남중학교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짬날 때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아무래도 사고 현장 바로 옆에 있던 학교인 데다가 사상자도 많이 나왔고, 해당 학교가 사립 학교로 장기 근무를 하는 교사도 많아서 사고를 직접 본 교사들이 직접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대구MBC "푸른 신호등"의 당시 진행자였던 지역 연극배우 겸 MC인 류강국 역시 이러한 헤프닝을 증언하고 있다.[13] 그는 방송을 끝낸 뒤 또 다른 공포에 휩싸였는데, 사고지점 근처에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린이집을 다니던 5세 딸이 아침에 타는 통학버스가 상인네거리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이집으로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 혹시나 해서 집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든 이는 바로 딸이었다. "아빠야~ 여기 꽝했어"가 딸이 건넨 첫 마디였다고. 알고 보니 그 날따라 차량 정체로 어린이집 차가 늦게 왔고, 차를 타기 전에 폭발 사고가 나 어린이집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7 관련항목

  1. 2004년 롯데백화점 상인점이 됐다.
  2. 당장 근처만 해도 영남중학교, 영남고등학교, 상원고등학교(당시 대구상고), 경북기계공고 등이 있다.
  3. 7시 30분.
  4. 지하철 공사 구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스팔트 대용 대형 복공판을 말한다. 무게는 300kg 가까이 되는데 그게 폭발로 튀어 올랐다가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5. 팔다리는 물론 머리까지 잘려진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발간된 모 월간지 기사에 따르면 중3 남학생의 시신을 염습하는 과정에서 뒤통수가 깨져 피가 콸콸 나오는 바람에 장의사가 애를 먹었다는 일화도 있었다.
  6. 2km정도 떨어진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근처에서도 굉음이 들렸다.
  7. 이 버스 기사는 하술하는 121번의 버스 기사였다.
  8. 지금은 폐지된 646(-1)번의 시내버스의 전신이다.
  9. 지역민방TBC개국 2주 전이었다.
  10. 당시에 평일 오전방송은 10시에 종료했다.
  11. MBC 라디오서 지금의 <시선집중> 시간대에 방송했었던 출근길 교통정보 프로그램.
  12. 그러나 당시에는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이라는 벽이 있어서 어떠한 정부비판/사회이슈(동성애자 권익 개선 등) 글을 올리거나 관련 사이트를 열어도 불온판정먹고 계정 정지/게시글 삭제 내지는 사이트 폐쇄까지 갔다. 1995년에 하이텔 한국통신 노동조합 회원전용게시판이 폐쇄된 것도 그 이유이다.
  13. 대구교통방송이 개국하고 얼마 후에 폐지됐으며, "여론현장"으로 대체됐다.(현재는 주중 아침 8시 35분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