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불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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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英佛關係. France–United Kingdom relations(영어).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e Royaume-Uni(프랑스어) 왠진 모르겠으나 영어판 위키백과에선 프랑스를 앞에 두고 있는데, 영어는 영국만이 쓰는 언어가 아니며 영어판 위키백과는 영어로 된 위키백과일뿐 영국의 위키백과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알파벳 순서대로 해서 프랑스가 앞에 나온 것이다.

아무래도 잉글랜드프랑스와 주요 관계를 맺었고 스코틀랜드는 결혼동맹 등 프랑스와 한통속이었던 적이 많아서 Anglo-French relations란 용어도 쓰인다.

오늘날에 11만명의 프랑스인이 영국에서 살며 프랑스에도 약 15만명 정도의 영국인이 산다. 통혼도 빈번하게 일어났고 인구 이동도 잦았던 탓에 조상 중에 영국인 있는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인 있는 영국인은 수두룩할 것이다.

위키백과 한국어판의 영국-프랑스 관계
위키백과 영어판의 영불관계
위키백과 불어판의 불영관계

1 단순비교

항목프랑스영국
면적674,843km²243,610km²
인구67,128,00064,800,000
1인당 GDP(2015 추정치)$37,728$44,118
명목 GDP(2015 추정치)$2조4230억$2조8650억

2 역사

2.1 로마 시대와 1000년까지

옛날에 로마 제국이 유럽에서 깽판치던 시절에 갈리아브리타니아나 다 켈트족들 땅이었다. 그러다가 로마한테 거하게 털리고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다만 이 시절 켈트는 편의상 후대의 사람들이 묶어서 켈트라는 거지 서로 동족 의식은 전혀 없었다. 오늘날 미국인이나 영국인, 프랑스인들은 이런 켈트한테 향수라도 느끼는 것 같지만.

어찌 됐든 게르만 족이 오면서 프랑스엔 라틴계나 켈트계 말고도 게르만계가 포함됐고 게르만족 가운데 색슨(작센)족이나 앵글(앙겔른)족들이 영국으로 가서 켈트랑 얍얍하면서 스코틀랜드웨일스로 밀어내면서 영국에도 게르만계들이 꽤 들어왔다. 프랑스가 프랑크 왕국을 거치면서 정체성 쌓는 동안 잉글랜드는 소왕국들끼리 놀았다.

2.2 노르망디 공 시대

그러다가 북유럽에서 깡패인 노르만이 내려와 프랑스 서부를 때려잡고 노르망디를 먹었고 겁먹은 프랑스는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잉글랜드도 가서 정벅했다. 노르망디 공이 잉글랜드의 왕이 됐다. 그 때문에 한동안 잉글랜드의 왕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다. 1350년경 잉글랜드의 추정인구는 300만 정도였고 1801년에 770만 정도였다. 그러다가 1821년에 1천만을 넘겼고 1871년엔 2천만, 1901년엔 3천만을 넘기는 등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1] 그에 비해 프랑스는 120년에 이미 7백만이었고 그후 감소하다가 850년경에 다시 700만을 회복했다. 그리고 1226년에 1,600만이었고 1345년에 2,020만 정도로 추정한다.[2] 1000년 경에 중국의 인구가 약 8,700만이었고[3] 15세기까지 그리 큰 변화가 없던 걸 생각하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굉장히 많았다. 추세가 유지됐다면 현재 프랑스의 인구는 3억은 됐을 것이다.

2.3 백년전쟁 후

그러나 왕위 계승 문제, 프랑스내 영국 영토의 문제로 인해 백년전쟁이 터지면서 조그마한 잉글랜드는 농민 장궁병 위주로 귀족 기사군 위주의 프랑스를 대규모 전투에서 여러번 박살내며 급기야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절반수준 집어삼킬 정도로 털었다. 궁지에 몰리던 프랑스는 잔 다르크의 등장으로 간신히 그 위기를 막아내고 그녀의 희생 이후에 영국군을 몰아내긴 했지만 프랑스는 꽤 상처를 입었다. 노르망디 공 시기에 프랑스어영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왕족이나 귀족 차원이고 사실 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친 라틴어영어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프랑스어 같은 경우엔 사전에서 라틴어 어원이 뭔지 찾는 게 가능할 정도다. 로마 망한 뒤로 가라 라틴어 쓰던 영국이 프랑스에서 이어져온 라틴어를 보고 베꼈다는 게 정확할지도.

그 후 두 나라는 중세 국가로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기에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구교임에도 신교 편으로 투입돼 싸웠고 프랑스와 인구가 엇비슷하던 독일 지방은 신나게 털렸다. 1700년에 1,960만 수준으로 많이 회복하긴 했지만[4].

17세기가 지나면서 영국은 해군력을 발전시켜 당시 먼저 해먹고 있던 네덜란드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섰으며, 북아메리카쪽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도 한 몫 해보려고 했는데 이들의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고 7년 전쟁 등을 거치며 영국이 북미에서 식민지 우선권을 얻었다.

2.4 나폴레옹 시대

영국이 한참 북아메리카에서 재미보다가 미국 독립으로 개털린 후 꼬시다며 그거 돕던 프랑스는 재정 파탄으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의 목이 날아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했다. 유럽 대륙을 때려잡은 나폴레옹은 영국도 먹으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유배된다. 늘 유럽 대륙 언저리에서 독일 견제하고 프랑스 견제하고 러시아 견제하는 등 유럽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한 영국은 여러 이득을 잘 빼먹으며 식민지를 확장해가며 국력을 쌓았다.

2.5 19세기

나폴레옹 때 치고박고 싸웠지만 그 후엔 딱히 싸우진 않았다. 크림전쟁 등에선 힘 합쳐서 러시아 견제하고 둘 다 독일을 견제했다. 독일에서 통일이 이뤄지면서 유럽엔 독일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고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는 털렸다. 먼저 식민지를 먹은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전통적인 강국이었지만 독일은 새로운 강국의 지위를 원했다. 다만 그 외엔 그렇게 큰 전쟁 없이 흘러갔다. 산업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대국이었고 식민지 사람들 괴롭히느라 자기들끼린 그냥 시큰둥했다.

당시 부르주아계급이 발달하면서 소설이나 연극 등이 유행하던 건 두 나라 다 비슷했다. 프랑스어는 당시 유럽에서 교양 있는 언어로 인기였고 영어는 상업에서 많이 쓰였다.

2.6 20세기

벨 에포크를 지나 유럽의 팽창은 내부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충돌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1904년 영불 협상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으로 독일과 싸운다. 그러면서 패배한 나라들의 식민지를 나눠 가진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쌓여온 제국주의의 모순과 사회진화론 등이 결합되면서 독일에서 나치라는 희대의 또라이들이 등장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프랑스와 영국은 승리하지만 이미 1차 대전 때 19세기 말부터 저력을 쌓아온 미국이 그들을 추월해버리고 농업국가인 줄 알았던 러시아소련을 거치면서 초강대국이 되면서 점점 색이 바랜다. 게다가 1950년대와 60년대에 이르러 둘은 식민지를 안 놓아주려고 버티지만 결국에 식민지를 다 잃고 경제적으로 위축된다. 그래서 핵 개발에 집착하게 된다. 김정일 돋네 영국과 프랑스의 핵개발 참고.

2.7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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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이동이 잦고 통혼이 잦았고 언어 교류도 잦았던 탓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웃나라로 관계가 깊다. 사실 하도 관계가 깊으면서도 서로 엎지락 뒤치락한게 오래라서 오히려 이제 양국민들은 서로를 지겨우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애증이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다만 그만큼 서로 좀 싫어하는 것도 있다. 대표적으로 콘돔. 영국은 콘돔을 프랑스 편지(French letter)라는 속어로 부르고 프랑스에선 영국산 외투라고 한다.

두 나라는 채널 터널로 이어져 있으며 지리적인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그 때문에 프랑스를 정복한 정복자들은 늘 영국을 털려고 했다. 로마 제국이나 노르만이나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나.

다만 유럽연합에 관해서는 두 나라의 견해가 갈리는 편이다. 영국조지 소로스 때문에 파운드 스털링을 유지하고 있으며 유럽에서 악재가 터지자 약간 꼬시는 느낌이고. 유로화로 들어간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남유럽이 싸지른 똥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다. 과거와는 달리 영국이나 프랑스 대신에 독일이 유럽의 선두국가 느낌이 강해졌고 영국은 미국한테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져 샤를 드 골이 별로 안 좋아했다. 특히 21세기 들어서 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이 미국과 공조체계를 유지한데 비해 프랑스나 독일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유럽 문제 등에 있어서 앙겔라 메르켈니콜라 사르코지가 메르코지라 불릴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영불관계가 부침이 있긴 하지만 최근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다만 민간교류는 여전히 많다.

섬나라와 대륙국가에 왕국과 공화국[5]이라는 공통성 때문에 중일관계와 비슷한 경향이 있기는 한데, 영국과 프랑스가 몇몇 문제에서 독자노선을 걷기는 하지만 일단은 엄연히 동맹관계이며, 중국과 일본처럼 비공식적으로 서로를 주적으로 여기는 수준은 아니다. 국민감정도 영불이 서로 우호에 가까운 애증으로 보고 있다면 오늘날 중일 양국의 서로에 대한 시각은 증오에 가까운 수준이다.
  1.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Population_of_England
  2.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Demography_of_France#Historical_overview
  3.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Demographics_of_China
  4. 출처: http://www.populstat.info/Europe/germanyc.htm
  5. 프랑스는 이원집정제 형태의 민주 공화제, 중국은 공산당 1당 인민 공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