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관계

이 문서는 일중관계로도 들어올 수 있다.


(...).[1]

중국어 간체: 中国-日本关系
중국어 번체: 中國-日本關係
일본어: 日本-中国関係, 日中関係
영어: Sino-Japanese relations, People's Republic of China-Japan re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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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홍기일장기

1 개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관계. 현재는 주로 중화인민공화국일본과의 관계를 말한다.

2 고대 및 근대사

중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문화에 심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견수사, 견당사와 이에 따른 헤이안 시대의 번영이 좋은 예. 심지어 견수사를 보낼 시절에는 수나라에 "해 뜨는 나라의 천왕이 해 지는 나라의 천황께 보낸다.(東天王敬白西天皇)"라는 황당한 국서를 보내기도 했다만 정작 수나라에서는 오랑캐라 예를 모른다고 생각해서 넘어갔다고 한다. 근데 제왕병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발단이 되기는 했다. 대군을 동원한 원래 목적이 주변국에게 무력 시위도 하는 김에 한반도를 넘어 일본까지 갈 생각이었기 때문이었으니, 근데 고구려에서 OTL

다만 중국이랑 직접적으로 붙어있던 반도인 한국과는 달리 중국이랑 멀리 떨어져 있던 섬나라인 일본에서의 중국 문화는 한국보다는 중국 문화의 전통성에 덜 구애되어 비교적 자유로이 발전해 온 경향이 있다. 일례로, 한국 한자음은 중국 한자 발음의 반절음 체계에 종속적이지만[2] 일본 한자음은 소리만을 따왔고, 고유어와 한자를 대응시키는 훈독의 전통이 발달한 것을 들 수 있다. 다만 가나의 경우에는 음차하는 한자 필기체를 간략화 한 것으로, 가타가나는 부수의 일부를 딴 것, 히라가나초서를 정형화한 것이다.

중세에는 쿠빌라이 칸이 주도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 있었고(태풍으로 실패했지만), 또 무로마치 시대 말기와 센고쿠 시대에 일본 큐슈 등의 왜구명나라의 남쪽을 침략하여 "북로남왜"로 명나라의 주된 근심거리가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막부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에게 일본 국왕으로 책봉을 받고[3] 함께 왜구를 토벌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규군과 명나라가 직접적으로 마주친 역사상 최초의 사례로, 심유경고니시의 회담이 대표적이다.

근세의 청나라에도 막부는 소닭보는 관계. 초기에만 해도 대만 정성공의 사례에서 추측되듯 대만이나 동남아에서는 민간적 교류나 공생이 어느 정도 있었느나 쇄국정책을 통해 그나마도 차단되었다. 동남아가 서구(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식민지가 되기도 했고, 류큐 왕국은 청나라와 에도 막부의 양국의 조공국으로 존재했다.[4]

근대에 들어서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일찍 맞이해 관계가 역전되어 수많은 일본식 한자어가 현대 중국어에 수입되기도 하였다. 반면 중국은 일본에게 청일전쟁, 21개조 조약(5.4 운동), 만주사변(괴뢰국 만주국 성립), 중일전쟁, 특히 난징 대학살 등을 통해 수많은 화를 겪었고, 당시로서는 청나라의 일부였던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등 여러 갈등의 씨앗이 뿌려졌다. 비록 중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고 일본이 패배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대만 또한 중국에게 되돌아왔으며 또한 지금의 중국이 뛰어난 성장세를 보이고 패권국으로 우세해졌다고는 하나, 중국이 동아시아의 유일한 패권국이라 하기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존재가 무시못할 정도라 경계심을 갖고있다.

식민지였던 한국과 승전국인 중국은 일본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 한국은 주로 수세적 입장에서 사죄와 피해보상에 대해 일본에 요구하는 반면, 중국은 아시아에서의 패권을 두고 공세적 입장에서 일본과 대립하는 양상을 띈다.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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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공동성명에 서명하는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1952년 화일(華日) 평화조약으로 중화민국과 국교를 정상화했지만, 1972년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이는 닉슨 독트린과 맞물려 이뤄진 것이다.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일본에 대해서 국가적 차원에서의 청구권과 배상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과거 일본에게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나, 중국은 엄연히 2차대전 시기 일본이랑 전쟁을 벌여 이긴 승전국이라는 걸 감안해야 한다. 장제스는 '원수를 은혜로 갚는다'라는 태도였고 마오쩌둥 역시 일본과 국교를 맺을 때 인민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겼으니 사죄와 배상 따윈 필요없다'라는 태도를 보였다. 근데 이건 오해로, 당시 중국은 서방의 주축인 미국의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전략[5]을 고려하여 못 받을 것이라 생각하고 일본과 교류하기 위해 짠 국가 전략이었다. 당연히 일본인들은 우리가 중국에게 엄청난 사죄와 배상을 해야만 할 줄로 알고 있었으나,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대인배스럽게 배상을 깔끔히 포기(...)하자 지금까지 수많은 중국 장년층들에게는 아직도 끔찍한 난징 대학살이나 마루타, 충칭 대공습 등의 악몽이 남아 있으며, 이는 반일 시위의 원인이 되고 있다.[6] 그런데 사실 일본에서는 자기들 기준에서는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당시 공산권인 중국에 많은 금액과 기술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4 군사적 대립

센가쿠 열도 문제 등으로 대립하는 상태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중관계에서는 합참의장이나 장관급 만남이 있는데 비해 중일 사이에서는 드물다. 영관급 자리 만남 등을 보면 아주 어색해보인다. 미중교류보다 더 어색해보인다. 2014년 4월에 일본 해상막료장가와노 가쓰토시와 중국 해군사령원우성리가 만나려고 했지만 중국 정부의 불허로 무위로 그치고 대신 해군 관련 포럼에서 비공식적으로 15분을 접촉하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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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대 훈련을 참관하는 인민해방군 장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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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진 촬영.

5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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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문제 외에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영토분쟁이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양국은 강대국에 속한데다, 각각 세계 경제 규모의 2, 3위인 국가이기에 이들의 분쟁은 필경 크고 아름다운 후폭풍을 초래할 수밖에 없어, 이들 사이에 위치한 한국으로서는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대국관계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중국, 일본 2개 국가의 인구만 합쳐도 15억명 정도 된다.중국이 14억이고 일본이 1억이라는게 함정

2013년 1월부터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로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군에게 전쟁 준비 명령(진돗개 하나 상황)을 내림으로써 중일간 전쟁의 가능성이 점점 생기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상황을 파국으로 몰아 가는 것은 원하지 않는 관계로 전면전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7], 관계악화에 따른 불이익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댜오위다오 문제로 중국에서는 반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중국인들에 의해서 주중 일본대사관에 쓰레기가 투척되는 모욕을 겪기도 했고 일본 기업들이 죄다 문을 닫아야 했다. 거기다가 중국은 아예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중국에게 넘겨주고 중국의 영토로 인정하기 직전까지 희토류 원소를 일본에 수출하는 것을 강력히 막았다. 그러나 일본이 열받아서 미국에게 희토류 원소 기술을 전수받고 독자적인 기술로 희토류 원소를 생산하자 중국은 또 배가 아파 죽으려는 중.

2013년 12월 26일에 벌어진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로 인해 중일관계는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이다. 왕이 외교부 장관이 공식석상에서 직접 "앞으로 중국의 지도자들이 아베 총리와 대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발언했으며, 중국의 주요 언론도 앞다투어 일본과 아베 총리에 대해 "변태 왕따 쓰레기 왜노 총리"바보 멍게 해삼 말미잘 등의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다. 두 나라와 가까이 자리한 한국 역시 중요하게 경계할 필요가 있는 부분.

2014년 12월 난징 대학살 추모일을 앞두고 중국에서 벌인 군사훈련에서 가상의 적을 일본으로 삼았다고 당당하게 밝히면서 중국이 일본을 명백한 적국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커밍아웃 밝혔다. 일본의 경우에도 '한국이 싫다!'라며 혐한시위를 자주 벌이나[8] 중국의 경우엔 싫은 수준이 아니라 수많은 일본인들이 중국을 위험한 경쟁국이자 적국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한국을 견제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나 그래도 같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써 우호적으로 접근하려고 있는 반면에, 중국에 대해서는 패권을 위협하는 경쟁국이자 적성국으로 태도가 전혀 다르다. 보통 설문조사를 했을 때, 중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국가가 일본이며 일본인이 제일 싫어하는 국가는 중국이다.[9]

다만 중국의 크고 아름다운 시장이랑 국력을 일본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어서 중국에 저질렀던 전쟁범죄를 포함한 강제 징용 노동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유화적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한국보다는 훨씬 양보하는 분위기도 있다. 물론 중국인 남경 대학살, 댜오위다오에 대한 것이라든지 중국이 강력하게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본이 배째라 굴기에 이 분쟁은 쉽게 끊을 수가 없을 듯 하다. 무엇보다 일본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유엔 상임이사국 선정에 대하여 러시아와 더불어 결사반대하는 상임이사국이 바로 중국이며, 중국은 남경 대학살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며 일본의 상임이사국 선정을 시종일관 반대하고 있고 지금까지 일본은 상임이사국이 되지 못했다. 자세한 건 상임이사국 항목 참고.

6 문화 관계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므로 끝났다는 입장이지만 최근 중국의 센카쿠열도(다오위댜오) 영토 침범으로 인해 경색되었다. [10]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중국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서브컬쳐 문화가 인기를 몰고 있는데, 예를 들면 상하이 지하철에 러브라이브 캐릭터들로 지하철을 꾸민다든가. 유희왕이 정발되었는데 인기가 좋아서 데블즈 게이트까지 나온다든가. 거기다 일러스트는 일본판과 똑같이 간다! 그래서 유희왕이 판매되고 있는 국가 중 일본과 일러스트를 공유하는건 중국이 유일하다.[11]

이렇게 중국에서는 일본의 서브컬쳐 문화도 한국 못지 않게 많으며,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가 많은 만큼 위의 지하철의 예처럼 얼핏 일본을 아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일본문화 애호를 벌이기도 한다. 실제로 비정상회담에서도 장위안"중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싫은 거지 일본인들이 싫은 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중국은 일본 문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는 않는 듯. 오히려 일본 문화 개방은 한국보다도 빨랐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을 들여올 때 지명, 이름 등에 대한 로컬라이징이나 왜색 관련 내용에 대한 삭제도 없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유서깊은 동아시아의 문화 발생지이고, 이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만큼 타 문명에 의한 문화 잠식에 대한 우려가 적은 편인 것이 한몫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경제에 대한 걱정없이 풍요로웠던 70~80년대에 아무래도 타 문화를 접하는 마음이 너그러울수밖에 없어서[12] 이때를 비롯해 90년대까지 중국 문화에 대한 민간의 관심이 많았고 이 시기에 나온 일본 서브컬쳐 계열 작품들에서도 아예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여럿 나왔음은 물론이고 일본이나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도 치파오를 입고 쿵후를 구사하는 등 중화 아이덴티티로 무장한 중국인 캐릭터가 꼭 한명씩은 나왔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당장 삼국지, 수호지 등 역사서에 기반한 컴퓨터 게임들이 나왔고, 만화 드래곤볼은 시작부터가 서유기의 오마주였고, 쿵후보이 친미, 란마 1/2 이 세 작품은 모두 다 일본 외의 배경이면서 80년대에 나온 일본 작품들이며 모두 히트친 만화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13] 하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이것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의 여파와 맞물리고 국력이 나날이 성장해가는 중국과의 잦은 마찰, 그리고 서브컬쳐 소재들의 적극적인 일본 내수용으로의 변화와 더불어 은근히 일본적 성향이 짙어져가는 이쪽 업계의 사정 등으로 인해 일본 서브컬쳐계에서의 중국풍 유행은 거의 사라지게 된다. [14]

반대로 중국에서도 2015년 6월 11일 상하이에서 열리는 중국 상하이국제영화제 일환으로 열리는 일본 영화 주간에 진격의 거인이 상영금지를 당했다. 링크[15]

또 중국에서 서비스되는 온라인 FPS 광영사명에서는 아무리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지원한 게임이었지만 자위대가 적으로 등장하는 댜오위다오 코옵 맵이 업데이트되면서 이것 때문에 상당히 시끄러웠던 적 있다. 군용판 캠페인은 다른 국적 군대랑 섞고 국가 언급도 안 해서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했는데 어째 민간용이 더하다. 참고로 싱글 플레이 가능한 군용판도 초기 개발과정 자료를 보면 미군이 적이었는데 중간에 중일관계 악화 때문이었는지 도조 히데키 면상의 육상자위대가 주요 적으로 나오고 미군은 아주 가끔가다 나오는 수준으로 변경되었다.

7 여담

영불관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중국은 대륙국가이며 아시아의 패권을 쥐려 하고 있으며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데 프랑스 역시 대륙국가이며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고 과거 유럽의 패권을 쥐려 했던 국가이다. 일본은 섬나라이며 근대사 이후로 중국 대륙의 정치세력을 제압하거나 견제하고 있는데 이는 섬나라라는 지위를 이용해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던 영국과도 비슷하다. 영국과 프랑스의 서로에 대한 국민감정은 좋지 않은 편인데 중국과 일본 또한 그렇다.

다만 영국과 프랑스가 정치적으로는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닌 반면 중국과 일본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나쁜 관계라는 차이가 있고, 영국과 프랑스의 서로에 대한 국민감정이 나쁘다 하더라도 서로를 놀려먹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중국과 일본 국민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증오 수준으로 좋지 않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백년전쟁 직후의 영불관계라고 볼수도 있다.

자신의 딸이 일본인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려고 하자 대성통곡(...)하는 중국인 아버지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서로에 대한 악감정은 국민들의 생활 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1. 짤방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 15기 6화 중 한 장면. 오른쪽 인물은 텅 루 킴이다.
  2. 심지어 당나라 시기의 고대 중국어 발음을 객가인광동성 다음으로 보존시키고 있다.
  3. 물론 이건 후일 근왕주의자들에게 신나게 까였다. 그것도 그렇지만 원래 요시미츠는 남북조시대의 북조로 남조와 교류하던 명에게는 정식 국왕은 커녕 북조의 신하로 인식되었다. 결국 요시미츠가 남북조를 통일시키고 출가까지 한 것은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4. 이 때문에 17세기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을 중개하는 무역으로 여러가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18세기에 청나라와 일본의 직교역이 개통되면서 조선의 중개 무역 또한 쇠락한다.
  5. 공산국가에 원조나 학문 지원 등을 금했다.
  6. 2ch 같은 성향의 일본인들은 즉시 중국을 "대인배라지만 호구 나라"라고 조롱하였다. 반면 일부 일본인들은 중국에게 되려 은덕을 입었다는 이유로 일본의 자존심에 먹칠당해 일본이 중국에게 제대로된 굴욕을 받았다며 한탄스러워하기도 했다.
  7. 하지만 국지전의 경우 말이 달라질 수 있다.
  8. 그리고 그것도 "쯧쯔, 뭘 모르는 철부지들 같으니."라고 보면서 한심해 하는 일본인들도 있는 편이다.
  9. [1] 반대로 중국인이 제일 좋아하는 국가는 러시아이며, 일본인이 제일 좋아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10. 르번구이쯔항목에서도 나왔지만 일본인들을 비하하기 위해 씌여진 명칭이 오히려 모에선을 타 중국인들을 멘붕시킨 후에, 나중에 중국인들이 정통 일본인들의 비하 명칭인 워누라는 단어로 일본인들을 강력하게 비난하여 일본인들을 역관광 때렸을 정도. 헌데 일본인들은 그 왜노마저도 모에화시켜버렸다.(...) 흠좀무
  11. 사실 중국어판 유희왕 카드는 푸른 눈의 백룡과 블랙매지션이 존재했었지만 중국에서 유희왕이 정식발매된건 2014년 2월달이 처음이다.
  12. 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유화적이었고 독도 문제에도 별 마찰이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나라 모두 공론화할 생각이 없었다. 이때는 냉전과 한국의 군부정권 출범이라는 시기 속에서 서로 밀월관계를 유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옆나라 한국이 급격한 성장을 맞이하면서 여러 갈등이 시작되었다.
  13. 80~90년대 일본 작품들이 아예 일본 특정시대를 배경으로 하는게 아니면 일본풍을 좀처럼 집어넣지 않던 시기라서 이와 맞물린 것도 있다. 전혀 상관없어보이는 배경과 소재에조차 오덕요소나 일본풍 문화 및 만담을 꼭 몇가지는 집어넣곤 하는 요즘 세태와는 반대였던 시기.
  14. 그래도 조금씩 언급되고는 있다. 과거만큼은 아니어도 중국풍의 캐릭터나 설정들이 소수 등장한다던가, 중국 음식이 언급된다던가, 작중에서 사업등의 이유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는 등.
  15. 단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여서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이 죽도록 싫어하는 체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내용이 껴있어서일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