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皇紀2600年奉祝楽曲(こうきにせんろっぴゃくねんほうしゅくがっきょく)
일본 정부가 황기 2600주년을 기념해서 1940년에 국민 통합용으로 진행한 여러 행사와 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일련의 음악 작품. 대부분 음악적으로 돌아볼 가치가 거의 없지만,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로 슬금슬금 리바이벌이 시작되면서 음반도 재발매되는 중이다.
2 발단
메이지 유신 이래로 덴노는 국가신토의 힘도 있어서 중세 교황을 뛰어넘는[1]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이를 잘 알고 있던 일본 정부도 조선 침탈, 만주국 등의 친일 괴뢰 국가 건국과 중일전쟁 개시 등의 제국주의 정책을 밀고 나가면서 각종 정치적 선전 활동에 적극 활용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 초대 덴노는 기원전 660년에 즉위한 진무 덴노였는데, 이 해를 시점으로 해서 '황기(皇紀)' 라는 연도 계산법을 도입한 결과 1940년이 황기 2600주년이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저 해를 기념하기 위한 각종 행사와 식전, 문예 부분의 공모전 등을 기획하고 있었다. 심지어 하계/동계 올림픽과 만국박람회도 (비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는 못했지만) 끈질긴 로비와 홍보전 끝에 개최권을 따냈을 정도였다.
일본이 이렇게 1940년을 기념하려고 한 의도는, 물론 자국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 황국사관을 확립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따진다면, 중일전쟁 이후 국가 경제 체제를 전시 체제로 개편해 나이트클럽이라든가 카바레 같은 향락 산업을 엄격히 통제하고 죽어라 군수산업 위주로 돌리던 당시 상황에 일종의 청량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3 전개
음악 쪽에서도 일본 내의 음악인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2600주년 기념 작품의 작곡을 의뢰해 일본에서 세계 초연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작곡 의뢰와 연주회의 기획은 다른 2600주년 관제 행사들과 마찬가지로 내각 모임인 '은사 재단 기원 2600년 봉축회'의 엄격한 관리와 감독 아래 진행되었다.
물론 봉축 행사에 쓰기 위한 노래의 모집도 행해졌는데, 우선 내각 모임인 봉축회에서 1938년에 도쿄 음악학교(東京音楽学校. 현 도쿄 예술대학 음악학부)에 공식 봉축가를 촉탁했다. 음악학교 작사·작곡으로 발표되었으나, 실제 작곡은 노부토키 키요시(信時潔)[2]가 했다고 전해지는 '기원2600년 송가(紀元二千六百年頌歌)'는 곧 봉축회의 노래이자 모든 봉축 행사 때 제창되는 공식 봉축가로 사용되었다.
1939년 8월에 일본 방송 협회에서 개최한 봉축가 현상 모집에도 18000곡 이상의 노래들이 제출되었다. 그 중 서적상인 마스다 요시오(増田好生)가 작사하고 음악 교사 모리 기하치로(森義八郎)가 작곡한 '기원2600년(紀元二千六百年)'이라는 노래가 뽑혔고, 이 노래도 도쿄음악학교에 촉탁한 공식 봉축가와 더불어 '국민가요'로 널리 보급되었다.
4 해외 봉축곡
클래식 계통의 봉축 악곡들 중 가장 대내외적으로 홍보가 많이 된 것이 해외에 촉탁한 봉축곡들이었다. 위탁된 작곡가들은 지금도 음악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걸출한 이들이 상당수였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만한 소식이었다.
일본 정부가 작품을 의뢰한 나라는 모두 여섯 군데였는데, 프랑스와 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영국, 미국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 의뢰한 시점에서 이미 미일 관계가 막장테크를 제대로 타고 있었던 만큼 한큐에 거절당했다. 결국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개 국가에서 일본 정부의 위촉을 받아들여 국가당 한 곡씩 모두 다섯 곡의 악보가 일본으로 발송되었다.
봉축곡의 위촉/선정 과정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영국에서는 정부의 문화예술 담당 부서에서 해당 국가의 대표 작곡가 한 사람씩을 지목해 작품을 위촉했다. 헝가리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의 청탁을 받은 뒤 별도로 봉축곡 모집을 위한 작곡 경연대회를 열었고, 여기에서 1위로 입상한 곡을 일본으로 보냈다.
- 이탈리아
- 위탁 작곡가: 일데브란도 피체티 (Ildebrando Pizzetti)
- 작품: 교향곡 A조 (Sinfonia in La)
- 독일
- 위탁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Strauss)
- 작품: 대일본제국 건국 2600주년 행사에 즈음한 축전 음악 (Festmusik zur Feier des 2600jährigen Bestehens des Kaiserreichs Japan). 약칭 '일본 축전 음악 (Japanische Festmusik)'
- 영국
- 위탁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 (Benjamin Britten)
- 작품: 진혼 교향곡 (Sinfonia da Requiem)
1940년 5월에 제일 먼저 베레슈 작품의 악보가 일본에 도착했고, 7월에는 슈트라우스와 이베르의 작품이, 8월에는 피체티의 작품이 도착했다. 브리튼의 작품은 가장 늦은 9월에 도착했는데, 브리튼 곡이 발송될 무렵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은 이미 관현악단 단원들을 위한 파트 악보 편집에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곡들이라고 다 주최 측의 구미에 맞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특히 제목부터 '위령'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던 브리튼의 작품이 가장 문제가 되었는데, 거국적인 경축 행사에 진혼곡을 연주한다는 것도 분명 이상했을 것이고 한술 더떠 영일 관계까지 갈수록 악화 일로를 달리고 있었다.
결국 브리튼의 작품은 '악보가 너무 늦게 도착하여 부득이 공연에서 제외하게 되었다' 라는 공식 발표가 나오면서 공연 목록에서 제외되었고, 이베르와 베레슈, 피체티, 슈트라우스의 네 작품이 최종적으로 공연 허가를 얻었다. 그 대신 일본 정부는 브리튼에게 약속했던 작곡료를 예정대로 지불했고, 보내온 악보도 파기하거나 반송하는 대신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진혼 교향곡이 일본에서 처음 연주된 것은 종전 후인 1956년 2월 18일에 방일 중이었던 브리튼이 직접 지휘한 NHK 교향악단 연주회 때였고, 세계 초연은 1941년 3월 30일에 존 바비롤리 지휘의 뉴욕 필하모닉 연주회에서 이루어졌다.
5 일본 봉축곡
물론 해외에 의뢰한 것 이외에도, 일본 작곡가 또한 이런저런 봉축곡을 꽤나 많이 작곡했다. 음악 공연도 평시보다 다소 뜸하게 열리던 전시체제 하에서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고, 심지어 식민지 쪽에서 작곡된 작품도 있다. 간추린 목록을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 야마다 코사쿠(山田耕筰): 오페라 '쿠로후네(黑船)'[5], 교향시 '카미카제(神風)'[6]
- 하시모토 쿠니히코(橋本國彦): 교향곡 제1번
- 이후쿠베 아키라(伊福部昭): 교향 무악 '에텐라쿠(越天楽)'
- 미츠쿠리 슈키치(箕作秋吉): 서곡 '대지를 걷다(大地を歩む)'
- 키요세 야스지(清瀬保二): 일본 무용 모음곡
- 오키 마사오(大木正夫): 하고로모(羽衣)
- 오자와 히사토(大澤壽人): 교향곡 제3번 '건국의 교향악(建国の交響楽)', 교성곡 '만민봉축보(万民奉祝譜)', 교성곡 '바다의 새벽(海の夜明け)'
- 하야사카 후미오(早坂文雄): 서곡 D장조
- 스가타 이소타로(須賀田礒太郎): 교향 서곡, 쌍용교류지무(双龍交遊之舞)
- 후카이 시로(深井史郎): 발레 음악 '창조'
- 노부토키 키요시: 교성곡 '해도동정(海道東征)'
이들 작품들도 대부분 1940년을 전후해서 연주되었고, 노부토키의 교성곡 같은 경우 이듬해인 1941년에 일본 빅터에서 녹음해 SP로 발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7] 그리고 해외 봉축곡들과 마찬가지로 여기 써놓은 작품의 상당수가 지금도 재연되거나 음반으로 발매되어 유통되는 중인데, 하시모토와 오자와의 교향곡, 하야사카, 스가타, 후카이의 작품들은 홍콩 소재 다국적 음반사 낙소스의 '일본작곡가선집' 시리즈에 포함되어 전세계에 판매되고 있다.
물론 모든 봉축곡에 군국주의의 망령이 깃들어 있다는 식의 매도를 하는 것도 곤란하지만, 예술 작품들에 대한 순수예술적 접근 외에도 성립 과정이나 배경까지 분명히 알아두어야 제대로 된 재평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왜 프랑스에서 인기가 없는지, 바그너의 음악이 왜 이스라엘에서 껄끄럽게 받아들여지는지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
하지만 해외 봉축곡의 공연 이후 항목에서도 썼듯이, 일본에서는 그저 리바이벌 자체에 열중할 뿐, 어두운 과거에 대한 성찰의 자세는 거의 느껴지지 않으니 문제다. 이 자식들 안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 김기수: 아악 '황화만년지곡(皇化萬年之曲)'
...그리고 식민지에서 작곡된 봉축곡. 한국 국악계의 거목이라는 죽헌(대마루) 김기수 선생[8]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되겠다. 물론 작사자였던 이능화도 마찬가지. 일본인 작곡가들이야 단순한 애국심으로 '저질렀다고' 하면 그럭저럭 참작이 되겠지만, 이 경우는...에휴. 뭐 총독부가 까라면 까야하는 시절
6 악단의 조직
돈을 듬뿍 들여서 유명 작곡가에게 작곡을 위촉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들 작품의 공연을 위해 주최 측에서 준비한 악단의 규모도 황당할 정도로 컸다. 악단의 정식 명칭은 '기원 2600년 봉축 교향악단(紀元二千六百年奉祝交響楽団)'으로 정해졌고, 모두 165명이나 되는 연주자들이 모였다.[9] 통상 관현악단의 연주 인원이 70~110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큰 편성이었다. 악기 별로 세분해서 따져보면 다음과 같다.
플루트/피콜로: 4
오보에: 4
코랑글레: 1
클라리넷: 5
베이스클라리넷: 2
색소폰: 1
바순: 4
콘트라바순: 2
호른: 14
트럼펫: 8
트롬본: 8
튜바: 3
타악기: 12 (슈트라우스 작품에서 추가 편성된 범종 연주자를 포함한다.)
하프: 3
제1바이올린: 24
제2바이올린: 22
비올라: 18
첼로: 16
콘트라베이스: 12
물론 당시 일본에서 이 만한 대편성의 관현악단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 양악 계통 연주단체였던 궁내성 아악부[10], 도쿄음악학교 관현악단, 신교향악단(현 NHK 교향악단), 주오(중앙) 교향악단(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세이오 취주악단, 도쿄 방송 관현악단에서 단원들을 차출해 통합시킨 임시 악단 편제였다.
이렇게 편성된 악단은 10월 12일부터 연습에 들어갔는데, 거의 두 달 동안 30회에 달하는 강도높은 총연습을 해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체 다양한 악단에서 징하게 많이 긁어모아 급조한 관현악단이 제대로 된 소리를 단시간에 낼 수 있을 리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제 공연 때의 연주도 그렇게 잘 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단원들 중에는 전후 일본 양악계의 중진이 되는 인물들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바순 파트의 우에다 마사시와 첼로 파트의 사이토 히데오(이상 신교향악단 소속), 하프 파트의 야마다 카즈오(도쿄음악학교 소속)는 이후 지휘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11] 사이토와 함께 첼로 파트에 참가한 아베 코메이(도쿄음악학교 소속)는 종전 후 작곡가로 전향해 명성을 얻었다.
공동 악장(콘서트마스터)들 중 한 사람이었던 쿠로야나기 모리츠나는 당시 신교향악단의 악장이기도 했고, 한국에서도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창가의 토토' 의 저자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아버지였다.[12] 이외에도 바이올린 등 찰현악기의 교본과 교수법 창안으로 유명한 스즈키 신이치의 동생들인 스즈키 아키라와 스즈키 후미오(이상 주오 교향악단 소속)도 각각 비올라와 첼로 연주자로 참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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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공연 때의 곡목 순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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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쿄 가부키자 공연 때의 사진. 슈트라우스 작품의 연주 장면이다.)
어려웠던 연습과 높으신 분들의 징징닦달 끝에 1940년 12월 7~8일 이틀 동안 첫 공연이 개최되었는데, 도쿄의 가부키자에서 주최 측의 초대 손님들만 모아놓고 치른 비공개 연주회였다. 1부에서는 이베르와 베레슈의 곡이, 2부에서는 피체티와 슈트라우스의 곡이 연주되었고, 지휘자는 각 작품마다 모두 달랐다.
이베르는 야마다 코사쿠, 베레슈는 하시모토 쿠니히코, 피체티는 이탈리아인 가에타노 코멜리(Gaetano Comelli),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독일인 헬무트 펠머(Helmut Fellmer)가 지휘를 맡았는데, 이들 역시 당시 일본 양악계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거물들이었다. 야마다는 일본 양악 역사상 선각자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고, 하시모토는 일본 최초로 도쿄음악학교에 개설된 작곡과 교수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외국인 지휘자들이었던 코멜리와 펠머는 각각 궁내성 아악부와 도쿄음악학교에서 양악 부문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비공개 연주회는 당시 주간뉴스에서 찍어갈 정도로 중요하게 보도되었고, 같은 달 14~15일과 26~27일에는 각각 도쿄 가부키자와 오사카 가부키자에서 일반 청중들을 위한 공연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였던 18~19일에는 도쿄 방송회관의 제1스튜디오에서 청중 없이 방송용 연주회를 추가로 열었는데, 18일에는 이베르와 베레슈의 곡이, 19일에는 피체티와 슈트라우스의 곡이 연주되었다. 양일 공연 모두 전국 방송을 탔을 뿐 아니라, 음반사인 일본 콜럼비아가 방송국 직통 송신 선로를 이용해 모두 녹음했다. 이 방송용 연주회는 단파방송을 통해 해외에도 중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파울리네가 1941년 3월에 남편의 곡을 지휘했던 펠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 공연의 실황을 듣고 매우 만족했다' 는 립서비스내용이 담겨 있다.
이 공연이 단순히 음악적인 목적으로 개최된 것이 아님은 도쿄에서 처음 치른 비공개 연주회와 오사카 연주회에서도 알 수 있는데, 비공개 연주회는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던 각국 외교관과 고위층 인사들을 초대해 '동맹국 상호간의 신뢰'를 선전하기 위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의도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오사카 연주회에서는 공연 전 도쿄를 향한 궁성요배와 중일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묵념, 2600년 봉축회 비서와 아사히 신문 사장의 시국 연설이 행해져 분명한 정치색을 드러냈다.
8 결말
일본 콜럼비아가 두 대의 녹음기를 동원해 녹음한[13] 음원은 이듬해 3월에 하나도 빠짐없이 총 열다섯 장(이베르 두 장+베레슈 세 장+피체티 일곱 장+슈트라우스 세 장)의 SP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공식 시판과 동시에 덴노 일가와 위촉 국가의 정부 당국, 작곡가들에게도 여러 선물들과 함께 보내졌다. 하지만 물자 부족에 허덕이던 전쟁 중에 제작한 것들이다 보니 음반들의 품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고, 연주나 녹음 상태도 마찬가지였다.[14]
이들 작품 중 해당 작곡가들의 걸작으로 열거되고 있는 곡들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흑역사 취급을 당하는 처지다. 심지어 슈트라우스의 경우,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지인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들에서는 가차없이 졸작이라고 자아비판을 했다. 오히려 명곡으로 인정받은 작품이 일본 정부로부터 거부당한 브리튼의 곡 뿐이라는 점도 굉장한 아이러니.
하지만 태평양 전쟁 패전 후에도 일본에서는 이들 작품의 재공연이 종종 이루어졌고, 이베르와 베레슈, 슈트라우스 작품들은 최신 기술로 새롭게 녹음된 음반들도 나오고 있다. 피체티 지못미 그리고 2007년에는 롬 뮤직 파운데이션이라는 음악 재단에서 일본 음반사나 음악인들이 만든 음원들을 선별해 제작한 '일본 SP명반 복각선집' 시리즈의 3집에 1940년 당시 제작된 네 곡들의 음원이 모두 포함되었다.참고 사이트[15]
물론 저 시리즈가 이 곡들처럼 구릿한 녹음들만 채워져 있는 건 아니지만, 문제의 소지가 충분한 곡들의 녹음까지 포함시켜 '명반' 이라고 발매한 것을 마냥 칭찬하고 좋게 볼 수 있을까나? 그리고 첨부된 해설에도 (당연하겠지만) 까는 어조는 거의 없고, 음악에만 집중해 당시의 병맛넘치는 상황의 재조명은 아오안인 것을 보면 역시 반성을 모르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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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에는 일본의 복각 전문 레이블인 알투스(Altus)에서 이 당시 녹음들의 새로운 복각판 CD를 내놓았다. 보너스 트랙은 신교향악단을 창단한 지휘자로 유명한 코노에 히데마로(近衛秀麿)[16]가 1928년에 히로히토의 덴노 즉위를 기념해 작곡한 '대례봉축교성곡(大礼奉祝交声曲)' 의 2~4악장을 직접 지휘한 녹음과, 194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 자신이 라디오에서 읊은 2차대전 항복 성명인 옥음방송. 자기 나라 왕의 GG 선언을 보너스 트랙으로 넣는 열도의 기상
소리는 SP판 잡음이 거의 그대로 들어가 튀김집 주방에서 틀어놓은 듯한 롬의 복각판에 비하면 표면 잡음을 많이 없앤 편이지만, 복각에 사용한 원판 상태와 녹음 자체가 구린 탓에 그다지 큰 음질 향상은 없다. 음반사에서도 이 앨범이 철저히 일본 자위내수용이고 해외에 내놓아도 병맛이라고 디스 당할걸 알고 있는지, 앨범 커버에 일체의 원어 곡명을 기입하지 않고 있다.
9 후속 병크: 만주국 건국 10주년 봉축곡
2년 뒤인 1942년에는 대일본제국의 빵셔틀 만주국 창건 10주년을 맞아 비슷한 발상으로 건국 기념 음악회가 기획되었는데, 수도였던 신징(현 창춘)의 신징음악단 관현악부에 야마다 코사쿠가 일본연주가협회 단장 자격으로 일본에서 데려온 연주가들을 합해 71인조 중편성 관현악단인 '만주국 건국 10주년 봉축 교향악단(満州国建国十周年奉祝交響楽団)'을 급조했다.
다만 이 때는 유럽의 전황이 악화되어 자유로운 여행이나 우편 송달이 힘들었고, 예전처럼 유명 작곡가들을 섭외하기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동맹국인 독일을 대표해 일본에 계속 체류하고 있던 헬무트 펠머가 '경축곡'을, 이탈리아를 대표해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던 에토레 구스타보 펠레가티라는 작곡가가 '전원 교향시'를 위촉받아 작곡했다. 일본 대표로는 야마다 코사쿠가 의뢰받아 '건국 10주년 경축곡'을 작곡했다.
여기에 도쿄음악학교 명의로 발표되었지만, 실제 작곡은 하시모토 쿠니히코가 했던 '만주 대행진곡'과 야마다의 구작인 교향시 '메이지 송가', 오타카 히사타다(尾高尚忠)의 '일본 모음곡', 와타나베 우라토(渡辺浦人)의 교향 모음곡 '야인(野人)', 타카다 신이치(高田信一)의 서곡 '사쿠라(櫻)', 그리고 각각 동맹국 독일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의미에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서곡과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의 저녁기도'서곡을 추가해 공연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지휘자로는 야마다 외에 신징음악단 단장이었던 오츠카 준(大塚淳)과 펠머가 교대로 출연했는데, 대부분의 연주회 곡목들은 야마다가 지휘했다. 9월 21일부터 30일까지 신징 기념공회당과 대동공원 야외 무대, 하얼빈 만주철도회사(약칭 만철) 후생회관, 펑톈(현 선양) 헤이안자에서 비공개 초대 연주회와 공개 연주회를 포함해 모두 12회의 공연을 개최했는데, 1940년의 이벤트와 달리 별도의 방송용 공연이나 음반 녹음은 없었다. 다행이다
그리고 이 공연을 전후해 조선인 작곡가들도 봉축곡을 발표했다. 만주국에서 연주회가 열리던 때를 맞춰 독일의 베를린에서도 10주년 경축 음악회가 열렸는데, 여기서 안익태가 만주국 유럽 담당 영사 에하라 코이치의 시에 곡을 붙인 '만주국 환상곡'을 작곡해 선보였다. 게다가 당시 나치독일의 국정뉴스인 독일 주간뉴스에서도 찍어가는 바람에, 2000년대 들어 이 동영상이 발굴되면서...망했어요.[17]
이 당시 신징음악단 관현악부에는 가곡 '목련화'로 유명한 김동진과 이재옥이 각각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주자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들도 이 건국 10주년 연주회에 참가했다.[18] 그리고 김동진의 경우 연주 활동 외에 작곡도 하고 있었고, 이듬해인 1943년에 개최된 '만주곡 건국 10주년 경축악곡 발표회'에서 자작곡인 '건국 10주년 경축곡'을 직접 지휘해 초연했다. 이러한 친일 활동 사례들이 사료 조사를 통해 발견되면서, 안익태와 김동진도 김기수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고 말았다.
10 일화
네 작품 중 슈트라우스의 작품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 슈트라우스의 곡에서는 초반부와 후반부에 14개의 공이 사용되는데, 서양 음악에서 동양 음악을 묘사할 때 많이 쓰는 클리셰인 5음 음계(펜타토닉 스케일)를 내보이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세부 사항을 꽤 이상하게 해석한 일본 측에서는 절에서 쓰이는 범종을 갖다놓고 연주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당연히 슈트라우스가 의도한 공보다 음정도 불명확하고 효과도 별로 없었다. 지금은 일본에서도 이런 생쑈는 안하고 있고, 훨씬 작은 크기의 음정 있는 공들을 놓고 친다. 하지만 어느 연주회에서는 당시 공연을 재현한답시고 또 범종을 갖다놓고 연주했다고 한다. 참나...
- 공연 후 범종들은 원래 있던 절들로 반납되었지만, 그 중 몇 개는 슈트라우스에게 선물로 보내졌다고 한다. 슈트라우스는 이 종들을 받고 기뻐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슈트라우스 자료 보관소에 소장 중이라고 한다.
- 일본에서 치러진 첫 공연을 전후해 슈트라우스 자신도 직접 바이에른 국립 관현악단을 지휘해 도이체 그라모폰에 녹음을 했는데, 이 때는 무슨 이유인지 공 대신 초기 전자악기였던 트라우토니움을 썼다고 한다. 분명히 대체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웬만한 신발명 악기와 옛 악기까지 자작곡에 동원했음에도 전자악기 쪽에는 끝내 관심 1그램도 주지 않았던 작곡가 치고는 꽤 이례적인 사례였던 셈.
그리고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 혹은 조선인과 관련해서도 이 봉축곡들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발견되는데, 다음과 같다.
- 음악학자 이경분이 독일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안익태의 1940년대 독일 기획사였던 한스 아들러의 홍보물을 살펴보면, 1942~43년 시즌의 연주곡들을 적은 목록의 상단에 이후쿠베 아키라의 '일본 광시곡'과 자작곡들, 그리고 베레슈와 피체티, 슈트라우스의 봉축곡들이 기입되어 있다. 이전까지 각종 자료들에서 숱하게 지휘했다고 되어 있는 한국환상곡은 코빼기도 안보이는 것에 주목. 특히 슈트라우스 작품의 경우 빈에서 공연했을 때 청중 자격으로 임석했던 작곡자로부터 추천서까지 받았지만, 이 추천서는 이후 한참 동안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유야 뻔했겠지만.
- 해방 후 한국의 대표적인 작곡가가 된 정윤주도 1940년대에 작곡을 공부하는 동안 이런저런 음반들을 통해 당대의 서양 근대음악들을 접하고 큰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언급되는 물건들을 봐서는 봉축곡들의 레코드들도 들었음이 분명하다.이 글 참고.[19]
- ↑ 이전 문서에는 교황에 버금간다고 되어있었는데, 교황은 신의 대리자 직무일 뿐이지 선출제에 인간 취급이라도 받지만 덴노는 그 자체로 신의 후손으로 숭배되므로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 ↑ 전쟁 중 제작된 일본 주간뉴스에서 일본군 옥쇄 소식 등 비장한 뉴스가 나올 때마다 흘러나오던 군가 '바다로 가면(海ゆかば)'의 작곡자.
- ↑ 물론 의뢰받은 시점에서는 그냥 프랑스였지만, 공연을 준비하던 동안 프랑스가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함락되면서 사실상 비시 프랑스를 대표해 출품된 작품이 되어 버렸다.
- ↑ 발표 당시에는 번호가 없었지만, 이후 1952~53년에 미니애폴리스 심포니의 위촉으로 두 번째 교향곡을 작곡했기 때문에 교향곡 제1번으로 번호가 매겨졌다.
- ↑ 개항 시기 일본에서 서구의 철선을 부르던 단어로, 쿠로후네 사건에 설명되어 있다. 초연 당시의 제목은 '새벽'이었고, 일본 최초의 본격 오페라로 기록되어 있다.
-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나온 같은 이름의 악명높은 자살특공대와는 상관없다.
- ↑ '결말' 항목에 언급한 롬 뮤직 파운데이션의 복각선집 2집에 이 녹음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가사에 당시 일제의 침략 야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지만, 덴노를 닭살돋게 떠받드는 황국사관의 영향력은 확실히 반영되어 있으니 주의.
- ↑ 국악, 특히 정악을 열심히 연주했다면 한두 번 쯤은 들어 보았을 이름. 유명 대금연주자로 정간보를 현대와 같은 형태로 개량하고 단소, 대금, 소금 파트를 오선보로 채보한 사람(정간보항목 참조). 요즘 사용하는 정악 악보의 대부분이 김기수 선생이 편찬한 것을 사용한다. 은하출판사에서 나온 대금정악 악보와 세광출판사에서 나오는 고급단소교본 악보가 이 사람 작품. 이외에도 정악 악보 표지에 한자로 '김기수'라고 써 있거나 정간보의 표제란 아래쪽에 '대마루 엮음'이라고 써 있는 것이 이 사람이 제작한 악보이다.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장, 중요무형문화재 1호 종묘제례악 기예능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 국악고 교장 등을 역임했다.
- ↑ 공연 프로그램의 단원 명부에는 159명으로 되어 있지만, 정식으로 참가하지 않은 엑스트라 연주자는 명부에 기재되지 않았다고 한다.
- ↑ 기본적으로는 전통악기 연주만 담당하지만, 서양악기를 사용한 연주도 가능하다.
- ↑ 이들 중 사이토 히데오는 이미 지휘 경력을 시작하고 있었고, 연습 기간 동안 부지휘자로 악단 지휘도 맡아가며 준비했다. 현재 한국 음대나 음악원 지휘 클래스에서 교재로 많이 쓰는 '사이토 지휘법'도 이 사람이 창안한 기법.
- ↑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창가의 토토'에서도 이 부분이 약간 언급된다. 작품에서 주인공 토토의 아버지는 전쟁중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위해 자신의 연주를 팔아야 하는 상황에 상당한 자괴감을 느꼈다고 묘사된다.
- ↑ 1940년대 당시 오픈릴 테이프 녹음기는 발명 초기였기 때문에 독일을 제외하면 음반사나 방송국 스튜디오에 설치한 나라가 거의 없었고,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실황 녹음이나 방송용 녹음의 경우 두 대의 디스크 녹음기를 4분 주기로 번갈아가며 사용해 녹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옥음방송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녹음된 음원이다.
- ↑ 당시 일본의 방송 기술은 유럽과 미국의 어느 방송국들과 비교해도 열세를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의 제국방송(Reichsrundfunk)과 단파방송으로 라디오 프로그램 교류를 했을 때, 독일 측 기술진들은 일본 방송의 음질이 너무 구리다고 불평했다.
- ↑ 참고로 저 시리즈는 해설서의 언어에 따라 일본어판과 영어판이 따로 발매되어 있다.
- ↑ 이 사람 형이 그 막장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다. 이 사람도 형 닮아서 파시즘 후빨을 일삼는 등 여러 가지 ㅂㅅ짓을 저질렀다.
- ↑ 게다가 그 동영상에서 들려오는 선율 중에는 훗날 한국환상곡에서 들을 수 있는 선율들까지 섞여 있다. 이 때문에 이 곡이 한국환상곡에 전용 또는 일부 차용되었거나, 아니면 원본 한국환상곡을 만주국 봉축곡으로 개작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 ↑ 이 공연을 전후해 이들은 각각 카나모리 토신(金森東振)과 쿠니도 토요미(國堂豊見)라는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악단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이재옥의 경우에는 바이올린과 호른을 모두 연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후 호르니스트로 역할을 바꾸었다.
- ↑ 해당 단원만 뽑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당시 그에게 큰 인상을 준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및 R. 슈트라우스, 베레스 산도르(Veress Sandor), 자크 이베르 작품의 음반이었다."